"다산茶山 정약용은 귀양지 강진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족으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밖에 없다." 그리고 그동안 정리하지 못한 생각을 정리하여 글을 씁니다. 그래야만 200여 년 전 손암巽庵 정약전의 말처럼, 무서운 흑산(黑山)이 희미하지만 빛이 있는 자산玆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_조국, 『가불 선진국』, 메디치미디어, 2022, 03.
공교롭게도 이번 신간에는 '있는' 머리말 앞 ‘펴내며’ 한 대목이다.
평소라면 덧댈 필요가 없다. 그렇게 보였다. 단행본 원고를 탈고하여 출판사에 넘길 즈음 20대 대선 결과를 접했다. 해서 끝에는 <2022년 3월 10일. 20대 대선 결과를 확인한 새벽에. 조국>이라고 정황을 또 덧붙이었다.
‘무서운’ 흑산이 ‘희미하지만 빛이 있는’ 자산이 될 수 있다. 개혁 군주 정조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 다산과 손암 형제의 유배 생활, 『현산어보』를 남긴 형은 유배지(흑산도)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다산은 무려 (유배) 18년이 흐른 뒤에야, 남양주 어디쯤 고향으로 돌아간다. 정약전은 책 서문에서,
“흑산이라는 이름은 어둡고 처량하여 매우 두려운 느낌을 주었으므로 집안 사람들은 편지를 쓸 때 항상 黑山을 玆山이라 쓰곤 했다. 玆는 黑과 같은 뜻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현산어보를 찾아서1』, 이태원, 청어람미디어, 2002-12-05, 정약전의 초판 출간 1814년) 필자(조국)의 프롤로그에서 발견한 한 문장에서 그간의 회한과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을 만난다, 흑산에서 발견한 자산, 희망의 끝을 놓지 않았던 그 형제들처럼.
모처럼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꺼내 해당 대목을 읽는다.
“내가 누누이 말했듯이 청족(淸族)은 비록 독서하지 않는다 해도 저절로 존중받을 수는 있으나 폐족(廢族)이 되어 세련된 교양이 없으면 더욱 가증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고 세상에서 얕잡아보는 것도 서글픈 일인데 하물며 지금 너희들은 스스로를 천하게 여기고 얕잡아보고 있으니 자신을 비겁하게 만드는 일이다. 너희들이 끝끝내 배우지 아니하고 스스로를 포기해버린다면 내가 해놓은 저술과 간추려놓은 것들은 앞으로 누가 모아서 책으로 엮고 교정하며 정리하겠느냐?”_정약용, 박석무 편역,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창비, 19991, 43(근간은 40-41쪽)
18년 유배 기간 동안, 다산에게는 제자이면서 그들끼리는 동학이고, 500여 권의 저서와 편저들을 남긴 다산 출판사의 스텝이었던 전남 강진, 해남 일원의 18명의 제자가 있었다. 아들들에게 남긴 편지 속 당부이지만, 출판사 발행인의 바람처럼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박석무는 청족(淸族)은 ‘깨끗하고 이름 있는 집안’, 폐족(廢族)은 ‘무거운 죄를 지슬이나 출세길이 막힌 집안’이라고 설명한다. 당대엔 그랬지만 좀 살다보니까 폐족이 청족이었고, 청족이 폐족이었음 밝혀지리라. 그 대답 역사에 일임하여 쏘리. 이전의 책 『조국의 시간』이 ‘조국 사태’, ‘조국 전쟁’으로 불리는 민감한 사태의 당사자가 스스로를 변론한 것이라면, 앞서 소개한 ‘펴내며’의 한 구절처럼, 덧댄 ‘펴내며’를 제외하면 다산이 『목민심서』를 기획·집필했듯이, 선진국에 진입하기까지. ‘가불을 해야만 했던’ 우리나라의 아직은 어두운 부분을 밝힐 숙제들을 담고 있다,
『가불 선진국』은. 책에서는 별도 항목으로 다루지 않았지만, 산업역군으로 고된 몸의 삶, 암울한 독재의 시간 속 반공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혼란스런 마음의 삶, 장년, 거슬러 노년 세대들이 마주한 ‘노인 빈곤’를 생각하게 한다. 이분들 인생이야말로 가불된 선진국의, 가불된 삶, 그 시간이었다는 역설.
<파친코> 첫 에피소드를 본 김에 찾아서 본 윤여정 주연의 다른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한 대목은 이렇다.
(양미숙 역(윤여정), 경찰차 안, 운전하는 친구에게 담배 한 개비를 얻어 피우며, 차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혹시 봄 돼서 감방 가면 안 될까요. 제가 추위를 많이 타서, 도망 안 갈게요. (형사, 어이없다는 표정) 차라리 잘 됐지 뭐, 어차피 양로원 갈 형편도 안 되고, 거기 가면, 세 끼 밥은 먹여주는 거잖아요. 요즘은 반찬이 뭐가 나오나, 올 겨울은 안 추웠으면 좋겠다." (1H:45M~)
그리고 <파친코> 첫 에피소드의 한 장면은 이렇다. 할머니 선자(윤여정)의 어린 시절, (부산 영도) 자기 집에서 하숙하던 어부 아저씨와 어시장에서 나누는 대화다.
어린 선자: 괴기 표정이 안 좋아 보이네,
어부 아저씨: 봐래이. 아무리 하찮은 미물도 억척같이 살고 싶은 기라.
어린 선자: 밤장수 아지매는 죽지 못해 산다꼬. 차라리 죽어 삘면 편켓다 하시던데예.
어부 아저씨: 그 아지매는 남편이 밖에선 설설대면서 집구석에만 들어오모 헌구헌 날 마누라 패고 자식 패고 하이까 그치, 말은 그래도 살고 싶을 기다. 가자.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