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그래, 구례!’라는 글을 올리고,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살피는데 오류가 있다. 구례(求禮)를 아홉 가지 예를 구하는 곳으로 풀이한 것. 두 군데의 문맥을 수정했다. 구례에서 찾고자 하는 아홉 가지 예(九禮)가 있다는 그것은 무엇일까, 정도로 마무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그래? 그렇다면 구례(求禮)에서 구례(九禮)를 찾아볼까호기심이 꼼지락거렸다. 검색어는 구례 아홉 가지 예. 인의예지신에다 그럴듯한 네 가지만 덧붙여도 되는데, 호사가(好事家)들이 지나칠 리가 없다 생각하면서.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서울신문>, [그림과 가 있는 아침] 코너다.

 



=네이밍을 하는 이라면 필독서인 크라튈로스의 부제는 이름에 관하여'’. 플라톤 전집3(고르기아스/프로타고라스/이온/크라튈로스/소피스트/정치가)에 수록되어 있다.


스무 살 적엔 구례에 살고 싶었지요. 아홉 가지 예를 갖춘 마을, 이름만으로 이상향이라 생각했습니다. 섬진강 마을을 따라 산수유 매화 벚꽃 차례로 피고 살구꽃 복숭아꽃 자두꽃 한참입니다. 강물 위에 분홍색 살구꽃과 연두색 자두꽃 은은히 잠긴 모습 환상이지요. 강물은 흘러도 마을 떠나기 싫은 꽃은 물살 위에 그대로 머뭅니다. 시인이 구례에 이사 왔으니 밤새 술 마실 만합니다. 시도 사랑도 삶도 녹록지 않을 땐 술만 한 친구가 있겠는지요. 술 덜 깬 아침 가연이가 아찌 정말 시인이세요? 묻는군요. 구례에 왔으니 아홉 가지 예를 갖춘 인간의 시를 꼭 쓰라는 격려의 말입니다.”(곽재구 시인 시평, 서울신문, 2021. 04. 02.)

 

이원규 시인의 <뒷집 소녀 때문에>에 대한 시평이다. 시인이 다른 시인의 시에 감상을 덧붙이는 마당이니 그러려니 할까, 구례(求禮)를 구례(九禮)로 해석하면서 어떤 설명도 없다. 더구나 시평을 쓴 시인의 이름이 재구(在九)이지 않은가. 포구기행에서 이 시인의 아홉()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다산초당이 있는 강진 도암만의 옛 이름이 구강포 혹은 구십포인데, ‘(이곳) 사람들은 강진읍까지 들어오는 긴 바닷길을 도암만이라는 이름 대신 구강포 앞바다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를 좋아한다는 것(130). 시인은 구십포는 강진 남쪽 6리인데 월출산에서 남으로 흘러온 물이 강진현 서쪽의 물과 합하여 구십포가 된다동국여지승람까지 인용한다

시인은 오래전에 <귤동리 1>이란 시에서 이 도암만을 장검(長劍) 같다고 했다.


아흐레 강진강 지나/ 장검 같은 도암만 걸어갈 때

겨울 바람은 차고/ 옷깃을 세운 마음은 더욱 춥다



곽재구의 포구기행구시포 편(천천히, 파도를 밟으며, 아주 천천히…… -전북 고창군 상하면 구시포)에서도 아홉()에 대한 애정이 드러난다. 구시포의 옛이름은 새나리불똥‘ '새 바닷가의 불같이 일어날 마을'로 풀이한다. 일제강점기에 이 포구 이름이 구시포(九市浦)’로 바뀐다. '아홉 개의 도시, 혹은 아홉 개의 저자(市場)를 먹여 살릴 마을이란다. 새로운 시작인 극수(極數) ()가 지명에 포함된 사례가 무수히 많다. 그러니 구례의 구()가 이례적일 수밖에,

굳이, 구례를 아홉 가지와 연결시키면, 구구례(求九禮)쯤이 된다. 그런데 옛 구례도 아니고 좀 그렇다. 이제 약간의 기지를 발휘할 때다. 전라선 남원역에서 순천역 사이 굵직한 역 가운데 하나가 구례구역인데, 뜻밖에도 이 역은 행정구역상 구례에 있지 않고 순천시(황전면 선변리)에 위치한다. 역을 빠져나와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구례교) 하나만 건너면 바로 구례다. 옛날에는 지리산을 등반하려는 산악인들이 어김없이 구례구역에서 내려, 은어회 한 접시나 민물참게 매운탕을 먹고 산으로 향하곤 했다. 어쨌든 구례(求禮) 입구(入口)에 있다고 하여, 구례구(求禮口) 역이니, 구구례라는 어색한 이름 대신, 구례구(九禮求)쯤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떠할지. 그래, 구례구(九禮求) 구례(求禮)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 달빛을 깨물다(시작시인선293, 천년의시작, 2019-06-17)에 수록된 이원규의 시 <뒷집 소녀 때문에> 전문은 아래와 같디. 가연이 '덕분에'  좋은 시 한 편 썼지만 여기서는 '때문에'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뒷집 소녀 때문에


                                        이원규



 기필코 좋은 시를 써야겠다

 섬진강 변 녹차밭 대밭 옆으로 이사 온 뒤

 집들이 꽃놀이 밤새 너구리처럼 술만 퍼마시다

 뒷집 소녀 때문에 시를 써야겠다

 

 평균 연령 71세의 강마을에

 쫑알쫑알 아이 목소리가 들려

 필름 끊긴 창문을 열고 헛기침을 하니

 강아지 얼씨구와 놀던 아홉 살 소녀

 먹포도 두 눈을 반짝이며 인사를 한다

 

 아찌, 정말 시인이세요?

 두 눈이 빨개, 밤새 시 쓰다 나왔어요?

 슬그머니 눈곱을 닦으며

 마침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일생 단 한 편의 좋은 시를 써야겠다

 오로지 뒷집 귀농자의 딸 가연이 때문에



 =왼쪽은 구례구역(求禮口驛)  전경,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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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5-15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올리고 보니, 부지를 내주고 이름까지 내준 순천시의 아쉬움이 입석 문구에 남아 있지 싶다. 순천시 황전면 구례구역이라니. 영역표시가 확실하다. ˝아홉 가지를 예를 찾는(九禮求) 구례구역(求禮口驛)입니다.˝로 바꾸면 어떠할까? 예를 찾는 데 순천이면 어떻고 구례면 또 어떠하겠는가!
 
플라톤전집 3 - 고르기아스 / 프로타고라스 / 이온 / 크라튈로스 / 소피스트 / 정치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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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하나 링크했더니 답이 왔다. ‘짧고 재미있게써주시라. 지인의 주문, 내겐 무섭다, '맑고 향기롭게'보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리 하고 싶습니다. 누군 하고 싶지 않아 그러는 줄 아십니까대답하고 싶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든든한  지리산을 뒷배로 섬섬옥수 섬진강도 흐르는 전남 구례, 구례(求禮), 예를 구하다(청하다)

화엄사 앞 식당에서 산채비빔밥 먹고 오는 길, 군계(郡界)에 있는 입간판(옥외광고). “그래, 구례!”(안녕히 가십시오)


지명 유래야 찾아보면 금세 알겠지, 그 예가 무엇인지도 곧그래도 그냥 좋았다. 한 방 먹었구나, 충격이었다


태도다. 예를 구하는 방법1은 경청(敬聽).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 그런 가르침. ‘해주는것 아니라 하는

들어주는것 아니고 듣는. 당신과 만나 대화로 소통하는 가장 기본

이것 하나 있으면 누구나 정신의학과 전문의가 될 수 있다.


그래를 대치하는 다른 용법을 찾는다. 하나는 맞아요다른 하나는 좋아요

맞아요는 문제가 많다옳고 그름 또는 틀림, 삶에 정답이 어디 있다고 맞아요라니

좋아요도 '그래', 무엇이 좋다는 거야좋음의 주체가 나여, 그대여뭣이 좋은지 설명이 필요하다

그냥 좋아요는 위험하다(좀 그렇다).

 

, 그렇지, .”

그렇군요.”

무소식이 희소식 아..

“..그러게요.”


플라톤의 대화편 크라튈로스의 부제는 이름에 관하여'그런가요?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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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25만 부 기념 봄 에디션, 양장)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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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에는 표제시(詩), 소설집에는 표제소설(小說)이 있다. 표제소설, 좀 낯설다. 중·단편 소설들을 모은 소설가의 단행본 제목이기도 한, 수록 작품 중 대표작이 표제소설이다. 표제시도 그렇다. 예외는 있다. 김규동 시인(1925~2011)의 시집 『깨끗한 희망』(창비, 1985)은 수록한 시 「꽃」에서 제목을 뽑았다. 함민복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비, 1996)도 그러하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라는 제호 선정은 어떻게 봐야 할까. 에세이 형식 철학적 담론들을 체계적·조직적으로 모은 리뷰 모음집, 설정은 늘 철학기행이다. 쓰임새에서 <자기계발서>로 분류되기를, 저자는 마다하지 않는다. 14인의 동서양 철학자들에게서 한 가지씩 배울 거리를 추출하고, 그 한 가지에 집중하여 그의 삶을 탐사한다. 


궁금해하기(소크라테스), 걷기(루소), 보기(소로), 듣기(쇼펜하우어), 싸우기(간디), 감사하기(세이 쇼나곤), 후회않기(니체), 늙기(보부아르), 죽기(몽테뉴)… 


’○○처럼 □□하는 법‘이라는 꼭지명에서 신영복 선생을 떠올린다. 지금 『처음처럼』(책이자 캐치프레이즈)은 소주 브랜드로 더 익숙하다. 국회 다수당의 초선의원들 모임 ’처럼회‘란 이름도 같은 맥락에 있지 않을까. □□은 ○○처럼, ○○에게서 배우자. 그렇게 변화하는 나를 만나는 법 발견하기, 이 책의 메뉴다. 

그런데 왜 제호에 소크라테스 선생이 나올까? 공자, 간디, 세이 쇼나곤을 제외하면 이 멤버십 회원들이 서양 지성들이니 이해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다,‘를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다,‘ 혹은 ’철학은 소크라테스다.‘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서양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를 앞세운 속내, 이해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마케팅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 않는가. ’소크라테스‘로 검색한 책들, 결과를 살펴본다. 이 책(『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도 마케팅 혐의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낯설지 않다. 그래서 어짜라고? 어쩌지 않으셔도 된다. 지성 소크라테스의 권위를 가장 먼저 '판' 사람은 수제자 플라톤이다. 소크라테스(는 글 한 줄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의 말씀을 글(책)로 옮긴 인간이 플라톤이다. 위작을 포함 30여 편이 넘는 대화편들이 근거다.『소크라테스 회상』 등 크세노폰도 스승 소크라테스의 삶과 가르침을 전했다. 플라톤만큼 '보란듯이'(노골적은)는 아니었다. 크세노폰에게서 너무나도 인간적인 사람 소크라테스를 만날 수 있는 이유다. 

플라톤의 주요 대화편들, 각각이 다룬 주제를 살핀다. 흥미롭다. 번역가 천병희 완역 『플라톤전집 세트』(전7권, 숲, 2019-07-23) 수록 순에 따라 그 주제들을 살핀다.「향연」은 '사랑'에 관하여,「테아이테토스」는 '지식'에 관하여 나눈 대화이다.「파이드로스」(2권)는 사랑, 지식, 이데아론, 혼불멸론, 혼의 윤회 등 플라톤의 주요 사상을 조금씩 선보인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주제는 ’변론‘ 자체로만 특정할 수 없고 대화편 범주에 넣기엔 좀 특이한 형식이다. 그럼에도 주요 대화편들은 한 주제(개념)를 탐사한 대화 녹취록에 가깝다. 아래 괄호 안 단어는 그 대화편 주제(부제이기도 함)이다. 


메논(미덕), 뤼시스(우정), 라케스(용기), 카르미데스(절제), 에우튀프론(경건), 에우튀데모스(논쟁),  메넥세노스(연설)[2권], 고르기아스(수사), 이온(예술), 크라튈로스(이름)[3권], 테아이테토스(지식), 필레보스(즐거움), 티마이오스(우주), 파르메니데스(형상 形相)[5권]…. 


4권 국가(국가)와 6권 법률(법률)은 말할 것도 없다. 플라톤이야말로 소크라테스 마케팅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책의 두 번째 꼭지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이 사사하는 바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말과 플라톤의 글은 그렇게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 되었다. 헤아릴 수 없는 주해설서의 대상 텍스트로 영원한 삶을 살고 있다. 

익스프레스(Express)는 급행열차에 가깝다. 책(사상)을 다룬 책은, (이) 한 권만 읽으면 ~이 가능하다, 독자들을 유혹한다. KTX처럼 ’빠르게‘, 보다 ’빨리빨리‘ 보다 많이 습독할 수 있다? 그러나 앎과 그 앎을 실행하기는 보다 빨리, 스케치하듯 이뤄지지는 않는다. 두 번째 꼭지 <2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보다 <3. 루소처럼 걷는 법>을 먼저 읽을 필요가 있다. 

당신은 지금 카메라 가방을 메고 피사체들을 찾아 나섰다. 출사다. 천천히 걸을 때라야 포착 가능한 순간들이 있다. 자전거라는 이동수단마저 과감히 버려야 한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되어 있다. 상태 또는 사태의 민낯을 발견하기, 그 한 순간(프레임)을 포착하는 일도 그렇다. 시와 더불어 사진은 ’순간의 꽃‘이다. 이뿐이랴. 모든 발견이 그렇다. 읽기도 걷기처럼 해야 한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열차 종류로 치면 ’무궁화호‘, 그 이전 ’비둘기호‘보다 느린 속도이리아. 정차한 열차 안에서 몇 시간을(OTT드라마로 업로드되어 외국에서 주목 받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한 장면처럼), 며칠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천천히 걷기는 제대로 읽기다. 에릭 와이너(Eric Weiner)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도 그렇다. 원제는 The Socrates Express: In Search of Life Lessons from Dead Philosophers다. 2부 중간 간디(8. 간디처럼 싸우는 법)까지 읽고 썼다.


플라톤전집 세트-전7권 |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은이), 천병희(옮긴이) 도서출판 숲 2019-07-23

알라딘: 플라톤전집 세트 - 전7권 (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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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3 1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톤전집 세트 - 전7권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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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보기에 익숙해졌지만, 자막이 필요한 외국 드라마 연속시청은 쉽지 않다. 눈이 아프다. 또한 OTT시장의 활성화로 예전에 CD나 화일 내려받기로 시청했던 대작들을 쉽게 접할 수 있어, 신작이 마땅치 않으면 '다시보기'가 더 신선한 경우가 있다. 필자는 책읽기나 쓰기에 지장을 주지 않을 만큼 익숙한 '국내' 드라마(혹은 영화)를 모니터 한 켠에 켜놓고 일을 본다. <변호인>도 그렇게, 다시 시청했다기 보다는 청취하던 중이었다.


사무장: 아, 우리 변호사님 영어 억수로 잘하시나봐.

미스문: 와~ 다 영어네요. 변호사님 이게 뭐해요

변호사: (장갑으로 유리컵을 만지작거리다가, 웃으며) 저 난이 왜 저렇노. 비실비실하다, 물 좀 줘야겠다. 미스 문아. 

미스문: 오케이! 난이 말라비틀어져 버렸네에.(화분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변호사: (사무장에게 다가가며) 이게 한글이면 사무장님이 읽을라켔어요. 어차피 가오잡을라고 하는 것, 기왕이면 영어가 낫지에. 

사무장: (이삿짐센터 직원에게) 제일 잘 보이는 데다가 꼽아주시요.(<변호인> 24:20~ )


젊은 변호사 시절의 노무현 전 대통령 자전적 기록을 영화로 만든 <변호인>.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여, 부동산 등기 업무로 진출, 대박을 터트린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어엿한 변호사 사무실을 구해(여직원도 뽑고), 입주하는 날의 풍경, 하드커버로 된 책(전집 중 1권) 한 권을 펼치며 사무장이 송변에게 묻고 대답하는 과정이다. '재미'를 위해 삽입된 그렇고 그런 에피소드 중 하나일 뿐인데, 문득 다른 생각이 든 것이다. 

그 하드커버 전집이 영어 원서가 아닌, 한글 번역판이었다면 어땠을까? 그 내용은 접근성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대화편들로 가득한 플라톤전집(전7권)이었다면.

사무장은, 송변은, 미스문은 플라톤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만날 수 있었을까? 고전번역가 천병희 선생의 원전번역 역작 가운데 하나인 [플라톤전집 세트](전7권)은 2019년에 봄, 이즈음에 완간되었다. 번역가 한 사람이, 그것도 철학전공자가 아닌 독문학자(희랍어와 라틴어에 정통한)가 위작까지 포함하여 플라톤이 집필한 대화편 전편을 읽기 쉬운 한글콘텐츠로 생산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출판계에만 국한되지 않는 빅뉴스였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책에 대한 책을 쓰는 인문활동가가 천병희 선생의 대화편들로 독서토론을 진행하면서 했던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국가>를 읽을 때였다. "영어 원서로 <국가>를 읽을 때, 뭔 말인지 이해되지 않은 대목이 적지 않았는데, 구름 걷히듯 풀리더라." 그런 얘기였다.

격문을 쓰듯 국내 번역환경 개선을 주창한, <번역청을 설립하라>(박상익)를 전자책으로 구매해 읽으면서(2018년 출간) 플라톤전집 완역까지의 과정을 독자로 따라온 사람으로서 감회가 남달랐다. 더구나 천병희의 원전번역은 전공분야인 문학에서 시작하여, 역사 그리고 철학까지 망라하고 있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 대화편 원전번역은 철학전공자들에 의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전공자들은 텍스트만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는 철학사적 의미를 포함한 주해서이고, 그래야 하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고, 우리 번역환경을 생각하면 경제적으로도 쉽지 않은 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서양 고전, 서양 철학에 관심 있는 모든 독자들이 철학전공자들일 수는 없다. 소를 물가에 까지 몰아가는 일, 그리고 물을 먹거나 말거나의 선택은 그 소가 알아서 할 일이다. 독자들이 플라톤 대화편 읽기에 접근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이 부분은 천병희 선생님의 역할이다. 덕분에 이 분야의 매니아들이 늘어난다면, 철학서적의 번역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천병희의 플라톤전집은 모두 7권인데, 위작으로 확정이 되었거나 위작 논란 중인 작품들,  '서한집' '용어해설' 등 대화편으로 볼 수 없는 것들까지 수록한 전집 7권을 제외하면, 6권에게 걸쳐 25편쯤 된다. 전집7에 실린 <알키비아데스1.2>와 <힙피아스1.2>를 각 편으로 치거나 한 편으로 보거나, 7권의 다른 대화편들을 고려한다면 이 전집에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최소한 28편 이상 수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번역청을 설립하라>(박상익)에 담긴 한 나라의 기간산업인 번역환경의 어려움을 고려할 때, 고전번역가 한 사람과 한 출판사의 끈질긴 노력으로 플라톤전집을 완간했다는 것은 뉴스 중의 뉴스이다. 그러나 척박한 번역 현실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완벽한 번역이란 없다. 하지만 완전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은 독서가들(소비자)의 꾸준한 독서가 이어질 때 가능한 일이다. 조사 하나, 쉼표 하나를 첨삭하여, 가독율을 높이기 위해 기울인 번역서의 편집진들에게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원전번역도 좋지만 읽히는 번역서를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 있다. 박상익 교수가 책 말미에 수록해놓은 <번역가를 꿈꾸는 젊은 학도들에게>라는 당부 말씀이다. 절절한 제언이지만 그 가운데 하나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3. 번역가는 편집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도움을 적극적으로 요청할 줄 알아야 한다. 독립적 사고를 하라는 것은 편집자의 적절한 도움마저 뿌리치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약점 없는 인간 없듯이 결점 없는 번역도 없다. (너 자신을 알라!) 편집자는 한계를 극복하게 해 주는 최선의 동지이며, 번역 결과물의 수준을 끌어올려 주는 고마운 동료다. 번역가의 평가는 오직 '결과물'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명심하자." 


여기에 좋은 번역을 읽는 독자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 주인공 송변에게 영어 원서 전집은 '가오'를 잡는 도구였다. 벽돌책, 영어식으로 표현하자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천병희의 플라톤전집이라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그렇게 떠나지 않고 지금도 경남 어디쯤 사저에 살아있다면 영화 속 주인공 실제 인물은 자신의 전문분야인 <소크라테스의 변론>부터 대화편 한 권, 한 권씩 섭렵하며 이곳 어딘가에 리뷰를 올리는 중일 수도 있다. 낱권으로 먼저 발행되었던 책들 재고가 소진되고 전집에 편입되면서, 주머니가 헐거운 독자들에게 하드커버는 부담이 될 것이다. 주요 대화편은 최근 상태의 번역을 반양장으로 출간해놓은 상태, 맛보기로 혹은 시험삼아 읽어볼 수 있다, 굳이 '있어 보이려고' 전집을 사기보다는. 좋은 번역을 훌륭히 소비하는 독자가 되는 길, 좋은 번역에 참여하는 길이기도 하다.(끝) 


[이 리뷰 맨 앞에 썼던 글을 아래에 옮겨 놓는다.]

[OTT시장에 뛰어든 애플TV가 막대한 제작비를 쏟은 <파친코>(8편)를 앞세워, 가입자 늘리기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동명의 원작소설도 세계 독자들의 찬사를 받은 바 있거니와 실상과 달리 'K-드라마'로 세계 시청자들이 오인하는 등, 한류라는 패스트트랙에 올라탄 것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8편 중 3편을 공개하고(3월 25일), 매주 금요일 마다 1편씩 올리는 식으로, 시청자들은 애태우는 마케팅을 선택했다. 그리고 1편을 무료로 공개한 상태이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주말을 이용하거나 평일 밤샘해서라도 전편 몰아보기에 익숙해진 (한국)시청자들의 상태를 잘못 읽은 것은 아닐까. 전편이 공개되는 4월말 이후가 되어야 그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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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22-03-30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웃다가 갑니다. 그리고 급 우울. 그립네요.

Meta4 2022-03-30 21:0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노통의 변론은 죽음 그 자체였죠. 소크라테스처럼.
 
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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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훌륭한 사람들은” 하고 내가 말했네. “돈이나 명예를 바라고 통치하려 하지 않는 것이라네. 그들은 을 받고 공개적으로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고용인들이라 불리기도 바라지 않고, 권력을 이용하여 공금을 몰래 착복함으로써 도둑이라 불리기도 바라지 않기 때문이지. 그들은 또한 야심이 없는지라 명예를 바라고 통치하지도 않을 것이네. 따라서 그들이 통치하게 만들려면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거나 벌 받게 하지 않으면 안 되네. 이런 이유에서 강요당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진하여 관직을 맡는 것이 창피스러운 일로 여겨져왔던 것 같네. 그들 스스로 통치하기를 거부할 때 그들이 받는 가장 큰 벌은 자기들보다 못한 자들의 통치를 받는 것일세. 적격자들이 통치하기로 승낙하는 것은 이 점을 두려워하기 때문인 듯하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마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뭔가 좋은 것인 양 권력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대신 이 일을 맡아줄 더 훌륭한 사람들이나 대등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없어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다가간다네. 혹시 훌륭한 사람들의 도시가 생긴다면, 그곳에서는 지금 우리 사이에서 정권을 맡지 않으려고 경쟁이 벌어질 터인데, 그것은 진실로 참된 통치자는 본성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라 피치자에게 유익을 것을 생각한다는 명백한 증거일세.” (『국가』 347b~d, 67~68면


선거의 계절이 또 왔다. 여러 선거 중에서도 대통령선거는 투표율도 높고 전국을 들썩거리게 한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면 대선은 꽃 중의 꽃인 셈이다. 정기적으로 다가오는 선거철이면 어김없이 플라톤의 대화편 한 구절이 어김없이 소환된다. 신문이며 방송은 물론이고 후보자가 직접 이 대목을 인용하기도 한다. 대략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와 같은 메시지다. 천병희 님 번역에 따르면 ”그들 스스로 통치하기를 거부할 때 그들이 받는 가장 큰 벌은 자기들보다 못한 자들의 통치를 받는 것일세.“이다.

 

오늘날 투표 참여 캠페인에 약속처럼 등장하는 문구이다. 당시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와는 다른 면이 있다. 여기 언급하는 ‘그들’ 또는 ‘훌륭한 사람들’은 뛰어난 철학자(哲人)이며, 플라톤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철인통치론’를 주장하였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철저히 검증된 소수의 엘리트들(곧 '수호자(guardian)', 이들만이 정치 권력을 잡아 다른 모든 (열등한) 이들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통치를 거부한 그들(철학자들)이 받는 벌은 자신들보다 못한 자들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오늘 현실을 떠올리며 텍스트를 받아들여도 무리는 없다. 그런데 핵심 인용문 전후의 맥락이 흥미롭다. 인용문 앞뒤의 텍스트까지 읽으면 오늘날 정치 현실에도 여전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 통치하기를 선택했을 때 어느 누구도 ‘돈’과 ‘명예’와 ‘권력’의 유혹을 떨치기 힘들다는 경고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 통치자는 ‘걸면 걸리는’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인용문의 후반부에서 혹시 ”훌륭한 사람들의 도시“가 있다면 이상국가를 통치할 자격을 갖춘 자들이 서로 ”정권을 맡지 않으려고 경쟁이 벌어질 “ 것이라는 언급이 흥미롭다. 여기서도 오늘날 우리 사회라고 가정하고, ”대통령으로서 자질은 갖춘 이들이 서로 대권을 맡지 않겠다고 경쟁하는“으로 읽어볼 필요가 있다. 과연 그런 양보가 가능할 수 있을까? 


선거철이면 자주 거론되는 『국가』의 한 문장의 출처와 전후 과정을 공유하자는 뜻에서 정리했다. 최근 한 시사유투브에서 이번 대선 출마자들의 인물 됨됨이를 분석하는 방송을 보았다. <최동석의 인사만사#4회>(열린공감TV, 2022. 2. 4.)인데, 최동석 소장이 준비한 PPT(아래 사진)가 시사하는 바와도 맥락이 닿아 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c4Q2rDA5Oto ) 


최 소장이 1965년 이후 하버드신학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친 하비 콕스가 쓴 『신이 된 시장-시장은 어떻게 신적인 존재가 되었나』를 읽다가 영감을 얻어 정리했다는 자료라고 한다. 하비 콕스는 『세속 도시』(1965)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신학자다. "돈이 곧 명예이고 권력이고, 권력이 곧 돈이고 명예이며, 명예가 곧 돈이고 권력“으로 셋은 삼위일체로 함께 쥐게 되는데, ”이 마약을 한 번 먹으면 자기인식이 불가능해지고 학습능력은 떨어진다.." 최소장님의  설명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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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0 18: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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