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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번역 일리아스 / 오뒷세이아 세트 - 전2권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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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똑. 내가 오랜만에 내 서재 문을 두드리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고전 번역가 천병희 선생께서 별세하셨다는 부고를 접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로마 고전 번역에 평생 바친 천병희 교수 별세_플라톤 전집 등 주요 원전 40여 종 우리말로 옮겨(한겨레 고명섭 논설위원) 

그리스·로마 고전 번역에 평생 바친 천병희 교수 별세 : 학술 : 문화 : 뉴스 : 한겨레 (hani.co.kr)

향년 84세. 『일리아스』-『오딧세이아』 세트에서부터 플라톤의 대화편 전편 완역까지, 선생은 대한민국 독자들이 서양 고전들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일평생 원전 번역의 신세계를 펼치셨다.[2019년 플라톤전집 7권을 완역했으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헤로도토스의 『역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정치학』·『니코마코스 윤리학』 등이 고인의 손을 거쳐 완역됐다,] 

『일리아스』부터 읽느냐, 『오딧세이아』부터 읽느냐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처럼 선택은 독자들 몫이지만, 이 두 권의 책이 서양 고전 읽기의 출발점이라는 데에 이의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교양(인문학)교육을 대학 전체의 커리큘럼에 적용한 시카고대학의 일명 ‘그레이트 북스’ 시리즈(시카고대학 선정)의 서양 고전 읽기의 1번이 『일리아스』이고 2번이  『오딧세이아』이다. 이처럼 두 권의 책은 (서양) 고전 읽기, 인문학 공부에서 ABC에 해당한다. 

고대에서 근현대에 이르는 시카고대학 그레이트 북스 리스트에 상당 부분(앞부분)을 천병희 선생 덕분에 원전번역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독자들에게는 내일모레로 다가온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같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단국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당시에 20여 권, 정년 퇴임하고 명예교수로 주석하면서 집중적으로 번역하신 고전들이 40여 권, 부고 기사에 따르면, 그리고 돌이켜보면 선생의 꾸준한 번역 작업은 인생을 마무리하는 숨 갚은 여정이었던 것 같다. 

천병희의 원전번역이 우리 출판계는 물론이고 우리 현대사에 어떤 의미인지, 내게 천병희 선생이 평생 가꾸신 고전의 숲의 길을 안내한 친구가, 했던 말로 추모의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에 그런 대목이 나와. 지주였던 최참판댁 땅이 얼마나 많았는지, 소설의 공간인 평사리 근동의 주민들은 그 집 땅을 밟지 않고서는 어디를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는……. 이처럼 우리나라 독자들은 천병희 선생이 원전번역한 서양 고전들을 읽지 않고서는 서양 고전에 접근할 수가 없다는…….” 

나는 천병희 선생의 번역서 읽기의 칠부 능선에 겨우 올랐지만, 책을 펼칠 때마다 친구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만석지기 최참판댁의 드넓은 땅들 못잖은 면적의 (서양) 고전의 숲을 평생 일구신 분이 천병희 선생이다. “정년퇴직 이후 20년 동안 하루에 6시간씩 꼬박 고전 번역에 몰두해 하루 60여 행의 적은 소출로도 40여 종의 고전을 번역”(숲 출판사 보도자료)하신 분. 

대학 교수나 강사들, 학자들의 연구 실적으로 번역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한’ 문화, 원전 번역은 기간산업, 말하자면 산업화 시대를 이끈 경부고속도로와 같은 것이라고 번역의 중요성을 목청껏 외침에도 대통령 공약집에나 실리고 묻히는 ‘특이한’ 나라, “번역청을 설립하시라!”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향년 84세로 생을 마감하신 고전번역가 천병희 선생을 추모하는 내 나름의 글을 쓰면서, 선생이 일생을 통해 남기신 유언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추정한다. 

“2022년 12월 21일 22시 49분에 작고하신 천병희 선생님의 명복을 소원합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022년 12월 24일,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진행될 예정이다.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서양) 고전의 숲을 맘껏 걸었습니다. 그리고 걷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서양) 고전의 숲을 맘껏 걸었습니다. 걷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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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12-22 2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천병희선생님께서 별세하셨군요 ㅠㅠ
고전이라는 단어에 우뚝 서 계신 분이신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Meta4 2022-12-23 02:05   좋아요 1 | URL
결혼식장에는 안 가도 장례식장에는 꼭 가는데.. 사랑은 하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많이 아프네요. 감사

scott 2022-12-23 0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알았습니다

그리스어 희랍어 원전 번역에 한 획을 그으셨던 분
앞으로 이런 분은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ㅠ.ㅠ

Meta4 2022-12-23 02:11   좋아요 0 | URL
감사, 앞으로 이런 분이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timeroad 2022-12-25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부고 기사를 읽었는데, 오늘에야 모처럼 알라딘에 글 하나를 올릴 시간을 내었네요. 감사~

Meta4 2022-12-27 18:25   좋아요 0 | URL
어제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홧팅
 
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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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 틈새로 작약이 자라고 있어요. 그레이스』 첫 문장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시즌1, 6화 완결)에는 원작소설이 있다. 실화에 근거한 원작소설이 있다. 논픽션(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은 상상력의 한계, 그 임계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인지상정이라고 실제 역사는 매력 포인트, 때문에 드라마나 영화 선택에서,  이런 콘텐츠를 살피게 된다. 원작소설이  있나, 사실에 근거하였나. 탄탄한 스토리가 있다면  무작정 몰아보더라도,  발견 가능성이 높아  할애한 시간이 아깝지 않다.  그것이 실화에 근거한 원작소설이라면 금상첨화, 꽃 중의 꽃을 기대해도 좋다. 내게 소설  『그레이스』(Alias Grace), 드라마  <그레이스>(2017)가 그랬다. 드라마 전편을 시청하고 책을, 전자책을 구매했다.  <미리보기>의 소설 첫 문장에 꽂혔기 때문이다.  


"자갈 틈새로 작약이 자라고 있어요."

최면시술의 결정적인 순간의 그 시그널처럼, 소설 첫문장이 중요하다는 건 새삼 강조할 필요 없다.  심리학자 등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중요범죄를 저지른 재소자를 찾아가는 익숙한 장면, 때문에 다른 영화들을 떠올리다 드라마의 1/3 지점부터 집중하기 시작했다. 독백과도 같은 그레이스의 회고를 이끌어내고 그 기억을 따라가기에(시간 순) 드라마는 어쩔 수 없었으리라.  그레이스에게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직장이 되는,  키니어 나리 댁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풍경(드라마),  정원에 만개한 꽃이 장미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그런데 '작약'은 소설 분문에 무려 열여덟 차례나 등장한다(전자책의 미덕). 권말 <옮긴이의 말>에도 한 차례 더 등장한다. 


"그레이스의 꿈에 빨간 작약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 한국어판은 두 권(그레이스1과 2),으로 출간(2012년)되었고,  드라마 오픈 시점의 개정판은 한 권으로 펴냈는데(2017년), 696쪽, 적지 않은 분량이다. 옮기는 데  상당 시간을 할애하였고 그 과정에서 옮긴이 나름의 '의견'이 없을 수 없는데, 이렇듯 자주 등장하는 작약에  대해 물음표 하나를 던질 뿐이다. 1843년  캐나다에서 실제 일어났던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미스터리 소설기묘한 매력을 지닌 여인 그레이스 마크스와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복잡한 욕망을 파헤치는 심리 소설이다. 실화 바탕, 미스터리. 심리 소설이기 때문에 할 말은 있지만 말하지 않는 선택을 하지 않았나.  소설 첫문장에 이어지는 대목이다. 


"(자갈 틈새로 작약이 자라고 있어요) 헐거운 회색 자갈을 뚫고 올라온 그들은 뱀의 눈처럼 봉오리로 공기를 탐색하다 부풀어 공단처럼 반짝반짝하고 반들반들한짙은 빨간색의 큼지막한 꽃을 터뜨리죠그러다 산산이 땅으로 떨어져요."__1부 <삐죽빼죽한 테두리>(13)

직유에 동원된 '뱀의 눈'이나 '공단(貢緞: 무문無文의 주자직물朱子織物)까지 언급할 시간은 없다. '헐거운 자갈을 뚦고  올라온' 작약에서 핀 꽃이 '산산이 땅으로 떨어지는' 낙하(落下) 혹은 낙화(洛花) 등 섬세한  묘사에는 소설의 주제와 연관된 뭔가가 있다. 뭔가 있지만 그 무엇을 무엇이라고 이름하는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문득 사라질 것 같은 뭔가가, 있다.  이쯤에서 저자(마거릿 애트우드 Margaret Atwood) 화일을 잠시 엿본다. 

"1939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자랐다곤충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매년 봄이면 북쪽 황야로 갔다가 가을에는 다시 도시로 돌아오곤 했다이런 생활로 어울릴 친구가 별로 없었던 애트우드에게는 독서가 유일한 놀이였다.

하지만 독서에만 집중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물과 생태에 대한 관찰력도 함께 갖추었다고 본다. 물레나물목>작약과>작약속인 작약(芍藥; Peony root), 여러해살이풀로 5월이나 6월에 꽃이 피는데 색깔에 따라 홍작약과 백작약이 대표적이다. 이와  비슷한 때 잎이 나고 꽃을 피우는 사촌쯤 되는 식물이 있다. 모란(牡丹; Peony)이다.  역시 물레나물목>작약과>작약속이다.  영어이름에서 보듯,  둘은 사촌 간인데 모란은 작약과 클라스가 다르다. 무엇보다 작약은 여라해살이 풀인데 모란은 낙엽 활엽 관목으로, 나무다.  모란은 잎이 지면 두툼한 가지들을 펼친 채 겨울을 난다. 봄이 오면 줄가에 새순이 돋아 자라고, 곧이어 꽃을 피운다. 그러나 작약은 겨울이 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죽었다가)  자갈이 짓누르고 있음에도 그 틈새를 뚦고 새로운 줄기가 자라기 시작한다.  그 해의 생명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 

작약은 해마다 봄이 오면 오로지 땅 속 뿌리의 힘에만 의존하여 새싹을 틔우고 줄기를 형셩한다. 그래서 영어명에서 'Peony'에 'root'가 추가되는 것.  실제로 모란은 뿌리가 깊지 않아, 재배 시 작약 뿌리나 모란 줄기에 접붙이는 방식으로 번식한다. 재래종 모란의 실생묘나 작약을 대목으로, 9월에 접붙인다.  작약 대목은 활착률은 좋으나 수명이 짧고 모란 대목은 활착률을 나쁘나 수명이 길다.  야생의 고욤(산감나무)에 품종이 우월한 감나무 줄기를 접붙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양질의 수확물(열매)을 위해 야생이 강한 종의 뿌리를 이용하는 것.  

들 다 화려한 꽃을 피우고, 뿌리를 약재로 쓰지만,  작약이  약용(藥用)이라면, 모란은  뿌리를 약재로 쓸 뿐 아니라 크고 화려한 꽃으로 유명하여, 화단이나 정원에 관상(觀想)용으로 재배하였다. 해서 모란은 꽃 중의 왕'이라고 화중지왕(花中之王)’ 혹은 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향이란 뜻의 국색천향(國色天香)’ 등으로 불렸다.  꽃말에서도 모란은 '부귀왕자의 품격'인데 작약은 '수줍음'이다.  제대로 자란 모란은 상당히 큰 키를 자랑하며 봄이 오기 전부터 지난 해 꽃을 떠올리면서 기다리게 만든다. 그런데, 작약은 말라비틀어진 줄기마저 제거했다면 어디 심었는지, 어디에서 줄기가 솟구칠지 알 수 없다. 이처럼 해마다 낯설게 등장하기에 정작 본인은 늘 수줍어할 수밖에. 화단이란 공간에서 모란이 정규직이라면 작약은 비정규직쯤에 해당한다.  

자기나 나나 다를 바 없는 하녀이건만 선임이라는 이유로,  토머스 키니어 씨의 하녀 낸시는 안방마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누가 보아도  나리의 정부이기도 하다. 키니어의 집에 도착한 그레이스의 눈에 낸시의 위치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같은 을이면서 갑질을 서슴지 않는 낸시, 이어지는 작약을 언급하는 대목은 이렇다. 


"저는 작약을 곁눈질해요이상한 일이거든요지금은 4월이고작약은 4월에 꽃을 피우지 않아요그런데 제 바로 앞쪽 길가에 세 송이가 자라고 있지 뭐예요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한 송이를 건드려 봐요바스락거리는 느낌이 나는데알고 보니 조화예요." __1부 <삐죽빼죽한 테두리> 13

모란과 작약은 5~6월에 꽃이 피지만, 모란이 조금 앞서 개화기를 4~5월로 보기도 한다. 물론, 작가는 작약을 언급할 뿐 모란을 거론하지 않는다.  다만, 나리 댁에서 발견한 작약꽃 세 송이는 곧 조화(造花)로 판명되지만, 그해 4월 열여섯 살 손여 그레이스가 문득 마주친 작약꽃, 철 이른 작약꽃은 그녀의 눈에 실제의 모란꽃으로 다가왔으리라, 낸시의 존재감은 그랬다. 중국과 한국 등 동양에서 모란은 부귀와 더불어 장수를 상징하는 꽃이다.  그래서 회갑(요즘은 가족 행사지만)이나 칠순 등 장수를 기념하고 기원하는 행사(상차림)에는 주인공 뒷면에 모란병풍을 세웠다. 근래에 말이 많지만 홍도, 목포, 영산포(나주) 등 홍어가 특산물인 전라도 서남권에서는 피로연에 홍어가 없으면 잔치를 인정하지 않는데, 모란병풍도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행사에서 그런 역할을 했다. 이처럼 대접을 받는 모란의 영광 뒤에는 비교대상으로 작약이 있지 않을까?  그레이스는 첫직장은 친절한 부자인 파킨슨 저택이다. 여기에서 동료이면서 절친, 사수이며 한 침대를 쓰던 메리를 만나 행복한 시절을 보내지만, 메리는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그레이스의 이직에 결정적인 요인이다.  요절한 메리의 장례식 풍경이다. 


"애그니스가 장례를 도와주었어요우리는 마님의 허락 아래 정원에서 딴 꽃을 관에 넣었어요. 6월이라 줄기가 긴 장미와 작약이 만발했는데하얀 꽃만 골라서 땄죠저는 시신 위로 꽃잎도 흩뿌리고 제가 만들어 준 바늘 쌈지도 관에 넣었어요빨간색이라 안 된다고 할 수도 있으니 몰래 넣었죠그런 다음 메리를 기억할 수 있게 뒷머리를 한 움큼 잘라서 실로 묶었어요."__7부 <지그재그 울타리> 169

이번에는 백작약이 등장한다. 안데르센의 단편 <빨간 구두>에서처럼 장례나 예배에서 빨간 색은 금기라, 작약도 흰 꽃잎만을 골라서 딴다.  홍작약, 백작약이지만 그래도 작약꽃은 빨간 색일 때 작약답다.  이제 이 소설에서 '작약'의 생태는 본래 의도했던 바, 외연을 확장한다.  


 "꽃이 아니면 좋겠는데……하지만 지금이 그 빨간 꽃이 자랄 철이다공단처럼 반짝이는물감을 뿌린 것 같은 빨간 작약그들이 자라는 땅은 공허텅 빈 공간과 침묵이다나는 나한테 뭐든 말 좀 해 봐 하고 속삭인다공단 같은 빨간 꽃잎을 떨어뜨리며 침묵 속에 느릿느릿 꽃을 가꾸기보다는 대화를 하는 게 낫다." __9부 <하트와 모래주머니> 215

꽃필 무렵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 작약들이 자라는 땅은 공허, 텅빈 공간과 침묵이다.  석방 이후 그레이스의 실제  삶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30년 넘는 수감 생활을 포함하지만 그래도 '작약'보다는 '모란'처럼 오래, 예기치 않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았다.  드라마에서도 나름 안정을 찾은 그레이스의 이후 생활상이 소개된다.  소설은 그 즈음을 이렇게 다룬다.  여기, 이제 '그녀의' 그림 같은 정원(풍경)에도 작약꽃이 가득 피어 있다. "그레이스의 꿈에 빨간 작약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직 열여섯이 안 된 나이로 나리 댁의 기다란 앞길을 처음 걸어 올라갔던 날로부터 거의 30년이 지났네요그때도 6월이었는데저는 지금 우리 집 베란다에 내놓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어요늦은 오후이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 평화로워서 그림 같아요. (중략마지막으로 꽃을 피우는 작약도 한창인데분홍색과 하얀색 변종이고 꽃잎이 아주 빽빽해요제가 심은 게 아니라 품종은 모르겠어요그 향기를 맡으면 키니어 나리가 면도할 때 썼던 비누가 생각나요. __15부 <천국의 나무>에서(5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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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5-30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타님의 작약 과 꽃에 관한 설명을 읽으니
그레이스를 다시 읽어 봐야 할 것 같네요

이런 의미가 있었다니!^^

Meta4 2022-05-30 22:16   좋아요 0 | URL
모란은 제 설정이긴 하지만, 닮은 듯 닮지 않은 생태를 지녔지요. 두 번째 시녀 생황을 위해 그 집을 찾아가면서, 그레이스는 ‘메리처럼 살지는 않겠다.‘라는 다짐을 하고 있는 듯. 감사합니다.
 
원전번역 일리아스 / 오뒷세이아 세트 - 전2권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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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에서인지 북리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미국의 대학교 리드칼리지는 해마다 입학선물로 책 두 권을 선물한다.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세트>. 리드 칼리지(Reed College),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사립 리버럴 아츠 칼리지다. 신입생들에게 인문학 수업은 선택 아니고 필수다. 신입생들은 서양고전학 입문인 인문학 수업을 들어야 한다. 의무다. 

선물 구성, 알겠다. 학생들은 3학년 때 논문 자격시험에 붙고, 4학년 2학기 동안 교수들과 함께 연구한다. 학생들은 졸업논문을 완성한 다음, 논문 주제뿐만 아니라 이전에 들었던 수업 내용들까지 포함하는 구술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 학교의 학생 대 교수 비율은 9:1이고 토론식 수업을 강조한다.

애플 스티브 잡스는 이곳에 철학 전공으로 입학하지만 곧 중퇴한다. 학부생 1447(2017년 기준)이고 교직원이 164(교수, 2010)이다. 소수정예 같은데, 비율 9:1은 환상이다. 학비 부담 때문에 중퇴하고 도강하였던 스티브 잡스를 이해할 수 있다. 입학선물부터 커리큘럼까지, 인문학을 제대로 공부해야 졸업할 수 있다. 하나에서 열을 읽는다.

입학 선물과 스티브 잡스(전기물덕분에 이 학교에 관심을 가졌다. 한동안 내게 이 학교 이름은 리드(READ) 혹은 리드(LEAD)였다. 최근에야 잘못 알고 있음을 알았다. 1908년에 세워진 이 학교 이름은 컬럼비아강의 무역업자였던 시메온 가넷 리드로부터 따왔다. 내 유산을 포틀랜드 시민들의 교육과 문화발전, 시민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써주세요. 아내 아만다 리드가 남편의 유언을 실행했다. 리드(LEED) 부부가 남긴 그들의 유산이 부럽다.

일리아스오뒷세이아, 어느 것부터 읽어야 하냐, 행복한 고민이다. 하나는 하드하고 하나는 소프트하다 등 의견은 분분하다. 순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서양 고전 읽기 0순위가 두 고전이라는 점은 동서양이 거의 일치한다. 동양고전학 입문인 인문학 수업이 필수인 그런 대학이 우리에게 있다면, 입학선물로 제공할 책 두 권이 무엇일까?

일리아스오뒷세이아라는 거대한 봉우리 사이 가슴골처럼 깊은 길, 서양 고전을 만나러 가는 항해는 역풍과 함께 시작된다. 남쪽 인민들은 (중국이 아닌) 북한 땅을 거쳐 가는 백두산 트래킹을 선망한다. 북한 국민들은 한라산에 로망이 있다. 한반도 최북단 백두산, 최남단 한라산처럼 언젠가는 한두 차례, 몇 번이고 오르고 싶은 산들, 서양인들에게는 자부심 자체이고 우리에게도 일리아스『』오뒷세이아는 대체로 그렇게 다가온다. 한두 차례는 제대로 읽어야 한다, 생각하는 그런  책이다. 

 

(닮은 듯 아니 닮은 듯 언젠가 진안 마이산 지나며 떠올린, 사진_진안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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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5-01 1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 개인 의견으로는 ‘일리아스‘를 먼저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두 내용이 별개인 듯 하지만 그래도 시간적으로 연결됩니다**
오뒷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과 지옥여행에서 트로이 전쟁에 같이 참여한 사람들을 계속 만나거든요~~

Meta4 2022-05-01 12:15   좋아요 1 | URL
저도 님과 의견은 다르지 않습니다. 문득 시작되지만 그래도 일단 산행을 시작했으면 낮은 봉우리라도 끝까지 오를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죠.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독서였더란 말입니다. 제대로 읽기 위해서 알아야 할 정보(주석들이)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실눈 뜨고 일단 세계에 빠져드는 방법에는 말 그대로 공간을 따라 시간을 따라 가는 로드무비, 기행수필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엉뚱하지만 두 권을 동시에 읽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도 있답니다.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폴로도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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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불문고대 그리스와 로마 고전들을 읽노라면 항해 관련 장면, 용어, 비유가 곧잘 있다. 나는 늘 이물과 고물 사이에서 배회한다, 배의 머리와 배의 뒤쪽 사이에서. 이물은 선두(船頭), 고물은 선미(船尾), 하면 명확한데 순우리말 사랑 때문? 읽을 때마다 헷갈린다이물은 늘 이물(異物정상적이지 않은 다른 물질)로 거기 어디쯤 있다.  

또 있다. '선두맡'이다, 바다가 있는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 익숙한. 어린 시절 좀 쓰던 말인데, 최근 검색에도 내가 아는 용법을 찾지 못하였다선두맡이란 배(풍선돛단배)들이 정박하는 포구바다로 나갈 때는 그물 등 어구를 싣고 , 돌아와 그날 혹은 그때 잡은 생선들을 내리는 그런 곳선창(船艙)의 다른 이름이었다머리맡의 ''처럼 선두맡은 뱃머리들이 그 머리를 기대는 그런 곳쯤이 아니었을까. 

비닐하우스 농사로 요즘이야 딱히 농한기가 없다. 당시 아버지는 농한기가 되면 바다로 나가 한동안 뱃사람이 되기도 했다배가 들어올 즈음이면 1킬로미터 가까운 거기까지, 대바구니를 들고 선두맡으로 갔다당신이 품삯으로 받을 크고작은 생선들을(대체로 상품성은 떨어지는집으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그땐 없었던 생각이지만 무사귀환한 가장의 안전을 확인한다는 의미도 없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냥 선두맡이었을 뿐이다짧게는 한 나절길게는 며칠을 거친 파도와 씨름하여 고단했을 어선들이 마침내 돌아와 뱃머리(선두)를 기대고 쉬는 집, 선두맡그곳은 포구였고규모만 달랐을 뿐 요즘의  항구였다.  그때 우리 가족에게우리 이웃에게 바다는 늘 풍요로운 반찬이었다선두맡은 내 유년 시절 아련한 그리움이며 재현불가한 선미(鮮味)이다.

 

매달 비용이 아깝기도 하여(시간이 더  그럴 것인데)  OTT서비스를 만끽한다이등병 시절 보초 수준의 경계다. 최근 <트로이왕국의 몰락>(영국드라마, 2018)을 봤다. 회당 60분씩 8부작러닝타임 480 드라마다. 2004년 개봉 <트로이> 196(3시간 16)보다 할애한 시간 상당하다덕분에 서사시 <일리아스>는 물론이고 전후의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포함되어 있다드라마 <트로이>의 미덕이다더 이상 볼 장이 없음에도 1회당 60분 남짓은 드라마를 16부작까지 꼭 채우는 국내산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는.

그들이 아르고스()에서 출항해 재차 아울리스()에 도착했을 때 함대는 역풍에 묶였다그러자 칼키스가 말하기를아가멤논의 딸들 중 가장 예쁜 딸을 아르테미스에게 제물로 바치기 전에는 더 이상 항해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후반요약적게는 열두 척에서 많게는 100척 이상까지트로이로 출항해야 할 그리스 곳곳에서 소환된 함선들이 출항하지 못하고 있다그곳아울리스 항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아버지는 그리스연합군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이었다드라마는 필요 이상으로 이 대목에 집중한다아울리스 선두맡에서 있었다는 일에 대해서.

도서관 서지 목록에 가까운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하자앞서 언급한 신화의 요약본까지 수록한 책 후반부를 읽다문득 발견한다여기에서 역풍이 분다.’는 적절하지 않다는 주석이다그가 역풍에 묶였다.’로 옮긴 이유다.

 

역풍의 그리스어 ‘aploia’는 항해할 수 없음이란 뜻으로 바다의 잔잔함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당시의 항해술로는 노를 저어 에게 해를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사전적 정의로 역풍(逆風)이다. ‘역풍이란 한자어 의미까지 여기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대체로 역풍에 대한 오해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얘기다바람이 필요한데 필요한 바람이 오지 않는다서핑하기에 딱 좋을 만큼 포구로 몰아치는 그런 파도가 아닌 것이다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고 하지 않나맥락은 맥락이다. 아가멤논은 무플과 싸운 것이다무플 때문에  무단히 세 딸 중 장녀 이피게네이아를 인간 제물로 바치면서너의 전쟁은 나의 전쟁우리의 전쟁으로 바꾸는 나쁜 아버지가 되어야 했다.

 어선에 동승한 적 없으니잘 모르지만 버스에 동승한 아버지로 짐직하건데 거의 모든 탈것 들에서  멀미가 유난했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갈 수 있는 배 위에서의 인생도 그랬으리라. 동쪽 나라트로이로 가는 대장 함선에서 아가멤논의 심사는 대체로 복잡하였고신화와 서사시와 비극들 사이에서변명하거나 변론을 하는 고전들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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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문현미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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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동물원 그 옆 어딘가 종합병원이 있다면  응급실 옆에는 어김없이 영안실(장례식장)이 있다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장례식장은 낡은 문법처럼 응급실 가까이에 있다. 장편소설이라는데 제목 때문에 수상록인지, 아니면 생활 속 잠언들 모음집인지, <말테의 수기>는  늘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다가온다. 그래도 분명하게  아로새겨진 부분이 있다. 첫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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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민음사

"그래이곳으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다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펭귄 클래식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이 도시로 모여든다하지만 나는 도리어 죽기 위해서 모인다는 생각을 한다."(문예출판사)

그래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곳으로 온다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서 모두 죽어 가지 싶다."(열린 책들)


한 작품이지만 옮긴이, 옮긴 때 , 펴낸 데가 저마다인 세계문학전집을 펴내는 출판사들의 이 책 첫 문장은 이렇다(이하 몇몇 인용은 민음사 번역을 따라간다). 좋은 작품에는 늘 있지만 그것이 번역되었을 때는 실감하기 힘든 것,  번역본임에도 문장과 문장 사이, 문장들에서 발견하는 리듬감이다. 시인의 산문이니까,  필치에 운문의 리듬이 배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말테'를 '릴케'로만 바꿔어놓으면, 소설보다는 수상집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 이 특별함, 뭘까?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좀 마땅찮은 부분이 있다.  오히려 작가의  삶, 그 이력을 참고하면서 부분 부분 빛나는 대목들을 이해하는 식으로 발견의 방향을 바꾼다.  


-릴케는 51세가 되던 1926년, 스위스의 한 요양원에서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또 지붕이 없는 마차가 도착하는 걸 보았다포장을 열어젖힌 역마차로서 일반 요금으로 달린다임종 시간당 2프랑 꼴이다."(15면). "(오래된 디외 병원은지금은 559대의 침대에서 사람들이 죽어간다물론 공장과 같다이런 대량 생산에 있어서는 개개의 죽음이 알뜰하게 처리될 수가 없지만문제는 그것이 아니다양이 문제다오늘날 잘 마무리된 죽음을 위해 돈을 치를 사람이 누가 있을까아무도 없다빈틈없는 절차를 밟아 죽을 수 있을 만큼 돈을 가진 부자들조차도 죽음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냉담해지기 시작했다자기만의 죽음을 가지려는 소원은 갈수록 보기 드물어진다좀 더 지나면 자기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삶처럼 흔치 않을 것이다맙소사여기에는 없는 게 없다그저 와서 생을 발견하면 그만이다그저 그것을 기성복처럼 입기만 하면 된다.:(15~16면)

 

-사건이 아닌 상상과 기억의 단편만으로 삶의 본질과 인간 실존 문제를 탁월하게 형상화해 낸 일기체 소설릴케가 파리 생활의 절망과 고독을 통해 29살부터 쓰기 시작해 6년 뒤인 1910년에 출간했다. (책소개)  루 살로메와의 두 차례 러시아 여행에서 돌아온 릴케는 독일 화가마을 보르프스베데에 정착하였다그곳 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화가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게 되고(저자 소개)

"그 밖에 나는 또 무엇을 보았더라?"(10면),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왜 그런지 모르겠으나모든 게 지금까지보다 더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과거에는 항상 끝났던 곳에 이제 머물러 있지 않는다옛날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내면이 생겼다이제 모든 게 그곳으로 간다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모르겠다.(11~12) " "내가 이미 말했던가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그래나는 시작했다아직 서투르지만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 한다."(12면) "보는 법을 배우고 있는 지금나는 무언가 일을 시작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28세가 되었는데 아무것도 제대로 해놓은 게 없다지금까지 해온 일을 돌이켜보자."(26면) "그러나 사람이 젊어서 시를 쓰게 돠면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되도록이면 오랫동안의미(意味)와 감미(甘味)를 모아야 한다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사실 감정은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 거다). 경험이기 때문이다.(26~27면)"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 릴케는 보헤미아 출신답게 평생을 떠돌며 실존의 고뇌에 번민하는 삶을 살았다(저자 소개)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불리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그의 가문은 철강업으로 부를 쌓았다. 191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상속을 거절했다공식적인 상속을 거절했는데도 그에게는 상당한 유산이 주어졌다비트겐슈타인은 그 재산마저가난한 유망 작가 후원에 기부했다그 첫 번째 수혜자가 바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였다.(검색어 '릴케 비트겐슈타인')'"

"나는 아무도 아는 사람 없이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트렁크 하나와 책 상자 하나를 가진 채사실 어떤 것에도 호기심 없이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다집도 없고 상속받은 물건도 없고 개도 없이 살아가는 생활은 도대체 어떤 생활일까최소한의 추억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어쩌면 사람은 그 모든 추억에 다다르기 위해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나는 늙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24면)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별 헤는 밤일부윤동주 시인이 1941년 11월 5일 지은 유작친구 정병욱과 아우 윤일주가 1948년 정리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초간본) 31편 중 앞부분에 실려 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박인환 <목마와 숙녀>의 버지니아 울프와 더불어시인 릴케는 우리의 대표시에 등장한다.

"그러나 이런 소음보다 더 끔찍한 것이 있다바로 정적(靜寂이다"(11면),  "무서웠다사람이 한번 공포감을 느끼게 되면 그 공포감을 떨쳐내기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이 도시에서 병에 걸린다는 건 매우 혐오스러운 일일 거다."(14면).  "나는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무언가를 했다밤새도록 앉아서 글을 썼던 것이다. "(23-24면), "나는 여기 앉아서 한 시인의 작품을 읽고 있다열람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을 느낄 수 없다그들은 책에 몰두해 있다그러면서 마치 잠을 자다가 두 개의 꿈 사이에서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듯 책의 쪽수 사이에서 몸을 뒤척인다책 읽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게 너무도 좋다왜 사람들은 늘 책을 읽을 때와 같지 않을까?(4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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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옆에 영안실(장례식장)이 있다.  누군가는 마중을 위해, 또 누군가는 배웅을 위해 종합병원을 찾는다.  누군가는 살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죽기 위해서 찾는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앞뒤처럼 붙어 있는 생의 터미널이다.  저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는 것이 있다. 어떤 이는 집념, 어떤 이는 집착이라고 한다.  나쁜 습관, 거기에는 늘 죽음이란 두 글자가 어른거린다그대언제까지나 살 것처럼 너무 자만하지 않는가좋은 습관이라고 늘 '까방권'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내게는 책읽기도 그 중 하나다.  발견을 위한 몸부림도 나쁘지 않지만, 나만의 삶에 더 집중해야 하지 않나하는 강박 혹은 반작용. 서른 즈음의 릴케에게서 어떤 터닝포인트(전환점)를 감지한다. 몇 마디로 정리하기 쉽지 않은, 너무 거창한가!     

"너는 천년 만년 살 것처럼 행동하지 마라. 죽음이 지척에 있다.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동안 선한 자가 되라.”_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IV 17

그대들은 언제까지나 살 것처럼 살고 있고,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미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알지 못하지요.”_세네카,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 03-4, 297


이상  『그리스 로마 에세이』  알라딘: 그리스로마 에세이 (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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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4-24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들 세 번째, ‘내게는‘을 ‘나는‘으로 수정했음을 밝힘. 이 글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와 맥락이 닿아 있는 옮김으로 받아들였기에..

Meta4 2022-04-24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트겐슈타인은 그 재산마저, 가난한 유망 작가 후원에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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