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 곽재구의 신新 포구기행
곽재구 지음, 최수연 사진 / 해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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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프한 연필이 필요해 

밑줄 긋고 깨알 메모해야지 

지우개가 있어야 해 지우면서 

읽어야 하니까 범행현장 청소하듯 

언젠가 또 '첫사랑' 하겠지 


투 플러스 원 독서라고 해버려 

깨달음보단 울림이 더 '좋아요' 

시의 리듬이 스민 산문들 

음, 곽재구의 포구기행 

시리즈가 내겐 그렇더라 


투 플러스 원, 삼 세 판 읽기

가게가 24시 편의점뿐이라 

문득 발견한 나의 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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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娛 2022-04-14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 신영복선생님의 말씀하신 書三讀(서삼독)이 생각,투 플러스 원으로 삼세판 읽기 아주 좋습니다 ,투 플러스 원으로 삼세판 읽기 아주 좋습니다 투 플러스 원으로 세판읽 기 원

Meta4 2022-04-14 10:34   좋아요 0 | URL
감사, 책에 기척을 남기는 것은 스스로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더라고요. 다시 읽으려면 내가 쓴 기록 때문에 확증편향. 해서 책을 새로 사요. 이건 아니지 않나, 해서 ... 그 시간의 내가 아닌데 늘 그 시간처럼 머물게 할 순 없지 않나. 감사

ranskykim@gmail. 2022-05-08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드뎌 20년만에 <신(新) 포구기행>을 내셨다.
지난 2002년에 초판을 낸 후 오랜만에
그의 감미로운 문장을 보게 되었다.

Meta4 2022-05-13 18:27   좋아요 0 | URL
해냄에서 이것을 펴내면서 기존의 포구기행도 개정판을 냈지요. 벌서 몇 년 되었네요. 월간 <전원생활>에 연재한 기행수필을 단행본으로 엮었답니다.
 
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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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TV를 켤 수가 없었다. 뉴스 보기 싫어 인터넷도 하지 않았다. ‘근소한’이라는 말이 무색할 표차로 대선 결과가 엇갈리면서 패닉 상태였다는 이들의 토로다. 그런데 그 ‘한동안’이 오래 가지 않을 것 같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예측가능성 없는 당선자의 무리한 행보인데, 어떤 이들은 거두절미 ‘국방부 사건’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곧 이어질 지방선거다. 또 한 차례 표심으로 심판할 기회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분노란 똑똑 떨어지는 꿀보다 달콤해서 

인간의 가슴속에는 점점 커지는 법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2권 2장 ‘분노’)에서 『일리아스』(18권, 109~110행) 한 대목을 인용하고 “분노에는 (……) 즐거움이 수반된다.”며 ‘분노’라는 감정의 실체를 밝힌다. 분노에는 쾌감이 수반된다. 곧 분노는 욕구의 일종이라는 전제가 흥미롭다. [이거 뭐지?] 숱한 여론조사에서도 속내를 읽을 수 없던 2030여성들의 표심이 선거일에 임박해서야 한 후보 쪽으로 움직였고, 선거의 막판변수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진단은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석패하자마자 당일(2022.3.10.에 개설한 한 인터넷카페(네이버)에는 보름 정도에 15만 가입자를 넘길 만큼 문전성시다. 가장 핫(HOT)한 카페 1위로 떠오른 것. 필자도 며칠 후에 가입하여 가끔 눈팅하며 ‘좋아요’를 누르는 정도로 참여하고 있다. 2030여성들이 주도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카페에 참여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들 중 한 명일지 모를 우리 딸의 생각이 궁금해서다. 카페 이용규칙에는 ‘페미니즘’ 관련 항목도 있는데, 1)관련 이야기를 금지하자. 2)다른 단어를 쓰자(예: 이퀄리즘) 등 네거티브를 지양하기 위한 노력이 신선하면서도 선배 세대로서 반성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분노는 자신이나 자신의 친구가 까닭없이 명맥하게 멸시당한 것을 두고 

복수하고 싶어하는, 고통이 따르는 욕구다.”

(만약 분노가 그런 것이라면) 분노하는 사람은 1)인류 전체가 아니라 특정 개인에게 화를 낸다. 2)특정 개인이 분노하는 사람 자신이나 그의 친구를 해코지했거나 해코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3)이런 ‘모든 분노에는 언젠가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즐거움’이 수반된다. 왜 분노가 즐겁지?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달성할 수 없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분노하는 사람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목표로 삼는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은 즐거운 것이니까” 

그리고 앞서의 『일리아스』 한 대목을 인용한다. 사람들은 복수하겠다는 생각에 온 정신을 쏟기에 분노에는 쾌감이 따른다고 한다. 가능하다면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그래도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대선이 끝났는데, 한 차례 복기는 필요하지 않을까. 

20대 대선은 한판의 분노 마케팅이었다. 그 분노를 조직한 키워드는 ‘정권교체’였다. 정당의 목적은 정권을 잡는 것이므로, 대선에서 정권교체는 야당의 프리미엄으로 으레 상수로 작동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도 ‘정권교체’는 새로울 것도 없거니와, 지금 이 순간에도 현직 대통령의 국정수행 평가가 역대 최고를 유지하고 있기에 의외였다. 결과적으로 이 키워드는 강력한 프레임으로 작동했다. [기승전‘정권교체’]였다. 수세에 몰린 여당은 ‘정치교체‘로 대응하고 늦었지만 ’통합정부‘ 카드로 맞섬으로써 그나마 근소한 차이로 석패하여 ’졌지만 잘 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식, 법과 상식] 판사들은 늘 ’법과 상식에 따라‘ 판결했다고 말한다. 이때 법은 성문법(成文法)이고, ’상식‘은 모든 경우(판례)를 글로 쓴 법률로 규정할 수 없으므로, 전통과 관습 등에 따르는 불문법(不文法)의 장점으로, 보완하였다는 의미에서 ’상식‘이다. 그런데, 상당수 판결도 그렇고 이 ’상식‘이 문제다. 지난 대선 과정을 복기하면서 ’상식‘ 운운하는 것은, 그것이 ’실제 그 자체‘이거나 ’실제 그런 것으로 보이‘거나 상식에 기반하여 프레임이 만들어지고, 프레임 전쟁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분노‘는 그렇게 ’상식‘을 주재료로 하여 조직되고 유포된다.  


’분노‘라는 감정을 설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첫 인용의 출처가 『일리아스』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당연하기도 하다. 그의 『수사학』은 『시학』과 떼어놓을 수 없는 쌍둥이 저작인데, 한국어 콘텐츠로 새로 태어난 두 고전이 한 권으로 묶이기까지, 거기에는 각별한 사연이 있다. 천병희 옮김 『수사학/시학』에서 『수사학』은 최초의 원전번역이다. 반면에 천병희 『시학』은 1980년대 어느 시점으로 거슬러가야 할만큼 천병희 선생의 대표 번역이었다. 그랬는데, 천병희 선생의 원전번역들을 꾸준히 출판해온 출판사(숲) 『수사학/시학』을 펴내면서, (문예출판사로부터) 시학의 판권을 가져와, 한 권으로 묶이게 된 것. 연구이든 창작이든 문학전공자들에게 『시학』은 지금도 전공필수 서적이기에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신학기에 움직이는 책이다. 

그런데 『시학』은 그리스 서사시와 비극 장르의 실체를 밝히는 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한다. 『일리아스』는 곧 서사시라는 장르 그 자체일 만큼 대표 텍스트이고, 신화와 비극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일리아스』의 주제가 (아킬레우스의) 분노다. 잠시 『수사학』의 '분노'에 대입해보자.  

분노하는 사람(아킬레우스)은 1)인류 전체가 아니라 특정 개인(아가멤논 왕)에게 화를 낸다. 2)특정 개인(아가멤논)이 분노하는 사람 자신(아킬레우스)이나 3)그의 친구(파트로클로스)를 해코지했거나 해코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일리아스』의 시작이며, 끝이다. ’분노의 생성에서 소멸까지 그 과정이『일리아스』라는 진단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 몫의 전리품인 브리세이스를 빼앗는다. 아킬레우스에게 브리세이스는 ’사랑이면서 명예‘였다, 사람도 명예도 빼앗김으로써 아가멤논을 향한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생성된다. 『일리아스』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런데 그(아킬레우스)의 친구를 해코지한 이가 있다. 트로이아의 왕자 헥토르다. 이제 아킬레우스는 ’전투파업‘을 철회하는데 분노의 제1대상(주적)이 헥토르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친의 죽음에 대한 복수[3)] 덕분에 『일리아스』는 끝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간다. 이처럼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또 하나의 『일리아스』의 시작이면서 끝이 된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또 하나의 『일리아스』의 시작이면서 끝]『일리아스』의 지은이로 확실시되는 호메로스(작가, 창작)는 대단하다. 지 작가에 못지않게 『일리아스』의 주제를 간파하고(『시학』)에서, 분노의 실체를 파악한(『수사학』에서) 아리스토렐레스(비평, 문학이론가)에게도 경의(敬義)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에게는 자신의 분노에 수반되는 “죽어도 좋을” 즐거움을 맛보았다. 호메로스는 그 분노를 창조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분노의 실체를 간파했다. 우리 독자들은 한글콘테츠로, 직거래 번역으로 태어난 『일리아스』와  『시학』과 『수사학』 덕분에, 분노의 주성분인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글을 맺으며, 인터넷에서 ’분노 마케팅‘으로 검색하니, 첫 화면에 ’분노 마케팅‘에 꼭 맞는 결과는 별로 없고 ’마케팅에 분노‘란 사례는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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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3-26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리아스』리뷰라면, 단행본 한 권을 쓰고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핑계 삼아, 길게 써보았다.

2022-03-27 1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 2020년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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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대선은 끝났지만, 국민통합을 이뤄야 하는 작금의 국내 상황도 한창 전쟁 중, 아니 이제 막 시작되었다. 두려움의 저편애 자신감이 있다. 막연한 두려움에 휘둘리는 것도 그렇지만 과도한 자신감도 무척 위험하다.] "두려움은 파괴나 고통을 야기할 임박한 위험을 생각할 때 느끼는 일종의 고통 또는 불안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해악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나 고통을 야기할 해악만 두려워하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 2권에서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 간파해야 할 인간의 감정들에 관해 고찰한다. 인용은 제2권 5장 '두려움과 자신감' 중 두려움에 대한 간명한 정의다. 필멸의 인간에게 죽음은 언젠가 다가올 위험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결국 죽을 것을 알지만, 죽음이 가까이 있지 않으므로 죽음에 무관심하다. 곧 우리는 (죽음처럼) 아주 멀리 있는(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큰 파괴력을 가지거나 우리에게 큰 고통을 안겨줄 해악을 끼칠 능력이 있어 보이는 그런 것들이 두려운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 것들은 징후조차도 두렵다는 것. 이런 징후의 한 예로 "우리를 해코지할 수 있는 자들의 적대감과 분노가 있다." 나아가 우리를 해코지할 수 있는 자들이 느끼는 두려움도 마찬가지다.(수사학, 2권 제5장 두려움과 자신감(1382a~1383b) 앞부분 정리) 


[아주 멀리 있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과 더불어 <시학>을 썼고, <시학>을 집필한 동기가 그리스 비극이 가진 힘을 강조하기 위한 것 아닌가, 싶게 비극 장르, 그 작품들이 가진 미덕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반면 <수사학>은 좋은 문학작품이 가진 수사적인 면모(기술)를 간파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지, 그 노하우를 밝힘으로써 수사학을 학문 영역으로 편입시킨 저작이다. 그럼에도 <수사학>의 텍스트들은 그리스 비극이 가진 역동적인 힘을, 흔히 말하는 '드라마를 드라마틱하게' 즐길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다음은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메데이아>와 <휩폴뤼토스>의 줄거리이다. 두 작품의 등장인물이 가진 '두려움'의 실체를 잠시 살피고, 그것이 극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감상 포인트 하나를 정리해볼까 한다.(두 작품의 줄거리를 사진 촬영하여 올리는 것으로 했다.)  

[사진1은 <메데이아>의 줄거리다.] 

여기서는 크레온 왕이 가지는 '두려움'이 극을 전개하는(사건의 발단이랄까), 원동력이 된다. 조국와 부모 형제까지 배신하면서 이아손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그간 메데이아가 펼친 활약상은 더 이상 '미덕'일 수가 없다. 크레온은 이미 처자가 있는 이아손을 사위로 맡이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후계구도를 튼실하게 할 욕망에 사로잡혀,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였고, 메데이아와 두 아들만 추방하면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렵다. 지난 날 메데이아가 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쌓은 미덕은 이제 악덕이 되어야 하고, 그녀가 '요주의 인물'이며 공존할 수 없는 구실이 된다. 그 선택 때문에 애지중지하는 딸과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였음에도 그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 '두려움' 이란 감정은 이렇게 극적으로 작동한다.

[사진2는 비극 <휩폴뤼토스>의 줄거리다.]

 파이드라는 전처 소생인 힙폴뤼토스에게 가진 연정 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이 가장 두려웠을 것이다. 유모를 통해 그 연심이 전달되었고, 힙폴뤼토스에게 그 마음을 들켰다는 사실 자체를 용서할 수 없다. 어쨌든 파이드라가 가진 두려움은 그 결과가 뻔히 보이는, 해서는 안 될 사랑을 하고 있다는, '안 봐도 비디오'처럼 예견된 그 자체가 두려웠던 것이다. 결국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해서는 안 될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것이었고, 제어할 수 없는 그 '두려움'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때문에 힙폴뤼토스가 부왕에게서 추방을 당하고 비극적인 결말에 이른다는 것은 파이드라의 고뇌에 비하면 '조연급'의 고민이다. 

(덧붙여) 두 작품의 결말, 그러니까 복수에서도 유사점은 있다. 메데이아는 사랑하는 '우리' 아들들을 죽임으로써 자식을 잃은 슬픔을 안고 평생 살아가게 함으로써 남편 이아손에게 복수한다. 파이드라는 제 목숨을 제물로 삼아 자기 사랑을 거부한 힙폴뤼토스에게 복수를 하는데, 궁극적으로 그 복수의 화살은 남편 테세우스(메데이아가 그랬듯이)를 향하고 있지 않았나, 그리 해석할 수도 있다(그냥 남편인 것이 야속한 것일까). 메데이아가 사건 발생 이후의 거취를 정해놓고 일을 도모했다면 파이드라는 문득 찾아온 <상사병>이 그랬듯이 대책 없이 일을 저질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식을 직접 죽여야했던 메데이아라고 행복했겠는가!  


[막연한 두려움도 과도한 자신감도 위험하다.] 

(맺으며)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진단에도 아리스토텔레스가 고찰한 '두려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신흥 강국이 부상하면 기존의 강대국이 (느끼는 두려움 때문에) 이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발생한다는, 투퀴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 『에정된 전쟁』,그레이엄 앨리슨 지음),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 원인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20대 대선은 끝났지만, 국민통합을 이뤄야 하는 작금의 국내 상황도 한창 전쟁 중,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려움의 건너편에 자신감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막연한 두려움에 휘둘리는 것도 그렇지만 과도한 자신감도 무척 위험하다. 

​"자신감은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은 가까이 있고 두려운 것은 없거나 멀리 있다는 생각에 따른 기대이다. 자신감이 생기는 것은 두려운 것은 멀리 있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가까이 있을 때이다.".(위 <수사학/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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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3-21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사학/시학』(천병희 옮김),『펠로폰네소스 전쟁사』(천병희 옮김),『예정된 전쟁』(그레이엄 앨리슨 지음) 등이 연관 서적인데, 리뷰로 가는 바람에 여기 적어둡니다.

새우 2022-03-21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전쟁, 전쟁 같은 사랑이네여.

Meta4 2022-03-21 16:31   좋아요 0 | URL
[사랑은 전쟁]은 은유, 전쟁 같은 사랑은 직유인가요? 호메로스 서사시 가령, <일리아스>의 경우 직유와 은유의 구분이 없다고 한 어느 해설서 한 대목을 떠올리게 됩니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 2020년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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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피데스 비극들을 다시 읽어야겠다, 이전에 읽던 전집을 펼치니 밑줄과 메모 등이 거슬린다. 딱히 정답은 없는데, 책을 읽는 동안 스치는 생각들을 해당 페이지 해당 지점에 메모하는 습관이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텍스트와 새롭게 만나야 하는데 기존의 생각/느낌이 프레임으로 다가오는 것. 큰 맘을 먹고, 개정판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전2권)을 구입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19편의 작품들을 마음이 가는 대로 골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어 군데 오자는 아니고 탈자가 보이는 것이었다. 다듬는 과정에서 놓친 부분이구나, 반가웠다. 이것이 개정판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것이다. 

"가독성을 높이는데 주안점을 두어 (10년 만에) 개정판을 만든다." 옮긴이가 '펴내며'에서 언급한 부분을 가볍게 보고 지나친 것. 우아해보이는 백조의 고단한 물갈퀴질을 떠올렸다. 무엇인 바뀌었는지,  가볍게 생각한 내가 문제였다. 살핀다. 글자 크기(급수)는 조금 키웠고, 그리드(글자가 배열되는 사각형) 크기는 그대로인 듯한데, 자간과 행간이 조정되었다. 독자 입장에서는 하드커버 전집을 구입하는데 가격 부담이 적지 않을 것이다. 출판사 입장에서도 고충은 상당하다. 재고를 무시하고 새로 만들 수도 없고, 재고가 소진되는 시점에 개정판을 만들 때를 대비해 준비를 한다는 얘기다.(때가 때인지라. 구입 6개월 만에 미루고 미루다 완독한『조국의 시간』에는 인명 하나를 인쇄하여 붙인 곳이 있다. 또 무슨 흠을 잡을까, 싶어 고민한 흔적인가, 문득 씁슬해지는 것이었다.) 

원전번역으로 정평이 나 있는 천병희 선생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오점이 있기 마련이다. 더구나 번역은 원죄처럼  그런 한계를 안고 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1판과 2판 전집을 일일이 대조할 수는 없다. 해서 나는 에우리페데스를 읽는 동안 별표 몇 개로 체크해놓은 부분만을 비교해보기로 했다. 

트로이아 전쟁은 그리스연합군의 승리로 끝난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왜 촉발되었으며 어떻게 소멸되었는지, 과감한 선택과 그 선택에 집중하는 특별한 작품이다. 이처럼 주제가 '분노'라서 이 전쟁은 누구의 승리로 끝났는지조차 독자들은 알 수 없다. 그리스 비극들은 좀 더 섬세한 터치로 이야기(일리아스)가 끝나는 지점에서 이후 이야기를 무대에서 들려준다. 멸망한 트로이아의 왕비 헤카베는 오뒷세우스의 하인으로 살아가야 할 처참한 운명 앞에 서 있다. 그런 그녀에게는 딸(캇산드라, 아가멤논의 첩이 될)은 말할 것도 없고, 또 다른 딸은 폴뤽세네는 전사한 아킬레우스 무덤에서 제물로 바쳐지며, 이웃나라로 대피시겼던 어린 왕자의 죽음을 확인해야 하는 등 2차, 3차 가해 앞에 오열한다. 이 비극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아래 인용 부분은 그 '순간'을 짚어낸다. 

비극 「헤카베」코러스는 포로가 된 트로이아 여인들이다.「헤카베」의 두 번째 정립가(오르케스트라에 위치한 코로스가 좌우로 움직이면서 부르는 노래. 선행 에피소드에 대한 성찰이나 감정을 표현. 나중에는 선행 에피소드와 무관한 막간가(幕間歌)로 변질된다) 세 단락 중 전반 두 단락이다. 왼쪽은 개정판(2판), 오른쪽은 1판의 해당 부분이다. 


「헤카베」 629~646행(제1판과 제2판 비교, 원전번역 제1판 1쇄 발행, 2009년 5월 10일)  


헤카베」 (2판 1,  2020.2.10.)

헤카베」 (1판 5,  2018.2.10.)

[코로스 좌]

나는 이미 불상사를 당하도록,

고통을 당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었네.

알렉산드로스1)가 이데산에서,

바다의 심연 위를 지나 황금빛

찬란한 헬리오스2)가 비추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헬레네의 침상으로 갈 배를

건조하려고 전나무를 베던 순간.

 

[코로스 우]

고생이그리고 고생보다 더 나쁜

강압이 나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네.

단 한 사람의 어리석음으로

시모에이스3)  강 유역에

만인 공통의 파멸이타인들에 의한

고통이 덮쳤네이데산에서

목자4)가 신들의 세 따님 사이에서

시비를 가릴 때5)

[코로스 좌]

나는 이미 불상사를 당하도록,

고통을 당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었네.

알렉산드로스가 이데 산에서,

바다의 심연 위를 지나 황금빛

찬란한 헬리오스가 비추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헬레네의 침상으로 갈 배를

건조하려고 전나무를 베던 순간.

 

[코로스 우]

고생이그리고 고생보다 더 나쁜

강압이 나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네.

단 한 사람의 어리석음으로

시모에이스 강 유역에

만인 공통의 파멸이타인들에 의한

고통이 덮쳤다네이데 산에서

목자가 신들의 세 따님 사이의

시비를 가릴 때.

1)과 4)파리스의 다른 이름.   2)태양신.   3)트로이아 옆을 흐르는 스카만드로스 강의 지류.   5)‘파리스의 판정을 말함(줄임).

주(註) 번호는 필자가 임의로 지정했다. 희랍어에 정통하고 우리말에도 능숙해야 좋은 번역인지를 관찰자 시점에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다. 다만, '이데 산->이데산'으로 바꾸는 것이야, 편집규범에 따르면 되는 것이지만, '사이의'->'사이에서'로 수정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선택의 무게 중심이 달라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는, 것인가, '해주는' 것인가? 그 '순간'(위) 그 '때'(아래)의 주체가 파리스인가, 아닌가의 차이로 달라지는 것이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국내 연극 무대에서 원전 번역 그대로 상연된 일이 있다. 특정 부분만을 선택하여, 무작위로 개정판 이전과 이후를 비교한 실험 결과이지만, 책은 움직이는 비석(碑石)과도 같은 것이라, 독자들이 알아주면 감사한 일이지만, 보다 완전해지는 노력에는 박수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생략한 '파리스의 선택' 주5)는 이런 것이다. 

"이른바 ‘파리스의 판정’을 말한다.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부모인 펠레우스와 테티스가 결혼식을 올릴 때 신들 중 하객으로 초대 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Eris)가 앙심을 품고 연회장에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는 문구가 적힌 사과를 던진다.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가 서로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제우스의 주선으로 당시 트로이아 근처의 이데산에서 목동으로 생활하던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에게 가서 판정받게 된다. 헤라는 아시아를 통치할 권력을, 아테네는 전쟁에서 승리를, 아프로디테는 절세미인을 약속하는데, 파리스는 이 경연에서 아프로디테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린다. 그 대가로 파리스는 헬레네를 아내로 삼게 되지만 함께 경연에 참가한 헤라와 아테네가 트로이아를 집요하게 미워하면서 결국 트로이아는 멸망한다. 특히 헤라는 트로이아가 멸망한 뒤에도 아이네이아스가 이끄는 트로이아의 유민들이 세운 로마를 미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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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2 - 2021년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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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12년에 공연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헬레네」는 메난드로스가 대표작가인 그리스 신희극 등장과 관련하여 각별한 의미가 되는 작품이다. 또한 정통 그리스 비극이라는 장르가 해체 혹은 진화되는 이정표라는 의미도 있다. 또한 비극이 끝나는 즈음에 그리스 비극이란 무엇인가, 그 정체성을 되새기게 한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전2권) 부록(2권) 옮긴이 해설, 「헬레네」 소개 말미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발견한다. 과연 ”「헬레네」를 비극으로 볼 수 있을까?“ 현대적 비극 개념에서 본다면(현대에 이르기까지 고전학자들이 정립한 그리스비극이란 이런 것이란 개념인지, 현대에 통용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비극’이란 뜻인지) 수긍하기 어렵다는 것. 그러나 “(에우리피데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는 …당연히 비극이었다.“는 것(2권, 677면). 1)여전히 신화와 영웅 전설이 소재다. 2)디오뉘소스제에서 공연된 드라마다. 3)“(그들에게는) 불행한 결말보다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에 관련된 비극적 상황”이 있다. 이상 비극의 필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

”「헬레네」를 비극으로 볼 수 있을까?“

이 작품을 과연 ‘(그리스)비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그리스)비극’ 장르가 지닌(갖춰야만 하는) 일반적인 특성을 새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특히 2)는 그 시절, 그 (비극)무대에서 공연되었으므로 비극이란 논거다. 대학 시절 호기심에 선택한 미학 강의(그들에겐 전공필수)에서 관심 있게 들었던 ‘예술제도론’(‘제도미술론’으로 기억)을 떠올린다.

‘어떤 사람을 미술가로 정의할 수 있는가? 혹은 무엇을 미술작품이라 부를 수 있는가?’ 미학자인 조지 디키는 어떤 대상이 ‘예술’로 불리면, 그것은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유명한 예술제도론이다. 대표적인 예는 이렇다. 상업 공간(매장)에 전시·판매 중인 공산품 양변기를 갤러리로 옮겨 전시했다. 이 때 그 상품은 예술공간에 전시되었으므로 ‘작품’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이처럼 (그래도)「헬레네」는 (아직) 그리스 비극이라는 얘기다. 「헬레네」는 정통 그리스 비극 장르의 정체성을 흔든 문제작, 그리고 그 ‘경계’에 위치한 작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연에서 공연되었으므로 비극(예술제도론?) 

「헬레네」는 비극으로 볼 수 없다!! 비극적 상황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1)인간과 신들의 의미심장한 만남이 없다. 2)주어진 운명에 맞서는 처절한 자기주장도 없다. 3)(비극 구성의 필수인 ‘필연’은 사라지고) ‘우연(偶然)’이 새로운 힘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등장한 ‘우연’은 이후 아테나이 신희극(메난드로스가 대표작가)의 지배적 원리가 된다는 것. 다만 근거3) 관련 에우리피데스에게 우연은 ‘우연의 유희’라기보다는 그 안에서 인간적 가치를 함유하고 있으며, “슬기로써 대처해 나가는 인간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 에우리피데스의 후기 비극 세계가 그리스 신(新)희극의 소시민적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것을 위해 길을 닦아 놓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는 것. 

아테네 신(新)희극의 길을 연 에우리피데스 

아테나이 구(舊)희극(아리스토파네스는 대표작가)이 절찬리 상연되던 시기에 에우리피데스의 비극들도 공연되었다. 그런데 아리스토파네스는 자신의 희극에 당대 인물인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에우리피데스를 등장시켜, 조롱하고 비판한다. 그의 비극이 내용과 기법에서, ‘전통’을 벗어나는 것이 못마땅하였으리라. 무엇보다 두 작가는 ‘연설술(수사학)’을 무기로 등장하여 시대정신이 되는(특히 철학계를 뒤흔든) 소피스트들에 대한 수용 태도에서도 대립한다. 당대의 ‘뉴웨이브’에 대한 에우리피데스의 진보적인 수용(작용)과 아리스토파네스의 보수적인 반발(반작용)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한다. 

현대의 드라마는 내용(소재)와 스타일에서 여러 장르로 분화되어 있지만(장르소설, 장르드라마도 있다) 일반 시청자들이 감정 이입하게 하는 개연성 있는 주인공의 등장,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 흥미를 유발하는 에피소드가 흥행에 필수요소인 것. 에우리피데스가 「헬레네」에서 사용한 우연이 ‘진지 모드’였다면 메난드로스의 신희극에서 우연은 유희(遊戲)를 위한 소스(도구, 에피소드, 구성 요소)였다. 그렇게 현대 드라마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희극에만 국한되지 않는) 세련미를 갖춘 드라마 장르의 새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헬레네」에서 진지한 ‘우연’, 신희극에선 유희 

「엘렉트라」(1권 마지막에 수록)에서 에우리피데스는 당대의 비극 소재(신화와 영웅전설)를 새롭게 해석하여 파란을 자초한다. 남편 아가멤논을 살해하고 친딸 엘렉트라와 친아들 오레스테스에게 살해되는 클뤼타이메스트라가 보다 ‘인간적인’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녀는 헬레네와 자매이다(아가멤논과 헬레네의 남편 메넬라오스는 형제이다). 이어 공연된 「헬레네」(2권 첫 작품)에서 이런 경향은 가속된다. 자의건 타의건 트로이아로 간 헬레네는 환영일 뿐이라는 것. 헬레네가 스파르테를 떠난 것은 분명하나 실제 헬레네는 그 기간(대략 17년)에 이집트에 머물렀으며, 그의 배경도 이집트(아이귑토스)이다. 이 비극 작가는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독자들이) 그렇다고 여기는 ‘사실’을 과감하게 흔든다.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은 아닌가, 영웅 신화와 전설, 그에 기반한 서사시의 서사, 그 ‘정설’을 거침없이 뒤틀었다. 가능한 변화이지만 당대의 통념과의 정면승부가 필요하다. 그런데, 기교나 운율 등에 깃든 그리스 비극의 ‘진화’(?)를, 혹은 생성과 소멸, 계승을 (원전 번역의 탁월함에도) 비전공자로서는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그리스 신화와 문학(서사시와 비극)에서, 트로이전쟁이 실제 역사인가 논란마저 진행 중임에도, 민감한 인물이고 예민한 소재이며 영원히 아름다움인 ‘헬레네’의 여러 모습을 따라가며 읽는다. 필자에게 「헬레네」는 이런 독서 탐사, 독특한 경험의 출발점이자 분기점이다.  

그리스 비극의 창조적인 파괴자, 에우리피데스 그리고..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를, 아이스퀼로스는 (비극의)‘창시자’, 소포클레스는 (비극의)‘완성자’자로 부르는 데에 이견은 없다. 그런데 에우리피데스에 이르면 늘 애매하다. 필자는 ‘그리스 비극의 파괴자’라는 수식을 그에게 선사하고 싶다. ‘창조적인’ 파괴자. 그리고 여기에 ‘현대 드라마의 창시자’라는 각주를 덧붙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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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2-19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붙이는 말) 개정판에 올리는 첫리뷰라는 것을 확인하고 몇 가지 기본 정보를 덧붙인디.『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전2권)에는 에우리피데스의 현존하는 작품 19편이 수록되어 있다. 1권 세 번째 수록된 「알케스티스」가 공연연대로는 첫 작품. 그런데 (비극 경연에 출품한) 비극3부작은 아니고 사튀로스 극를 대치한 말하자면 ‘소품‘. 이 작품을 1권 세 번째에 수록한 것을 예외로 하고, 나머지 18편이 1권과 2권에 공연연대 순으로 실려 있다. 1권 마지막 작품이 「엘렉트라」, 2권(9편 수록) 첫 작품이 「헬레네」다. 이들 비극 작품들은 여느 비극들처럼 호메로스의 서사시(『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재해석한 작품군, 그리스 신화(전설)를 차용하고 재해석한 작품군,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난데없이 「헬레네」이야기를 한 것 같아, 설명을 덧붙인다.

새우 2022-02-19 11:24   좋아요 1 | URL
한번 읽는데도 오래 걸리고, 관해서 리뷰쓰기도 벅차고 그렇지요. 배려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