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피컬 나이트
조예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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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고 두렵게 잔인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너무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서 이게 뭔가 싶은 이야기였다. 어쩌면 이렇게 다양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을 찌르는 이야기가 판타지의 세계에서 펼쳐지면서 독자의 마음을 빨아들이고 있는 걸까. 더우면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때의 느낌과 닮았다. 한낮의 더위에 등에 땀이 흐르는데도, 저녁의 입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시원해지는 기분. 어쩌면 인간은, 누구나 이렇게 양면의 모습을 가지고 사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알 수 없지만 알 것 같고, 알 것 같아서 더 들여보게 하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나는 조예은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더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생각하지 못했던 인물의 등장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였다. 고기와 석류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던 옥주는 쓰레기를 뒤지던 이상한 그림자를 발견한다. 분명 손으로 만져지는 존재였고, 그 아이는 무엇이든 먹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아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던 옥주의 마음은 외로움이었을까? 집안으로 들여 먹을 것을 주고 돌봤다. 그리고 그 아이가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옥주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혼자 지내면서 외롭게 죽기 싫었던 옥주의 상황을 알고 찾아온 것처럼, 아이의 등장은 묘했지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 이야기와 비슷하게 고양이와 인간의 동거를 다룬 유니버설 캣숍의 비밀역시 우리가 혼자 남았을 때의 외로움을 떠올리게 했다. 사라진 고양이를 찾기 위해 전단을 돌리고, 진심으로 그리워하던 순간에 사라진 고양이의 존재를 알게 됐다. 누구나 자기의 원래 자리가 있을 거고, 때로는 떠나고 돌아오기도 할 테지. 기약 없는 약속을 하면서 보내주기도 하는 게 관계의 한 모습이라면 그것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이래서 SF를 읽는 건가 싶게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독자는 더 다양한 상황과 감정을 만난다. 릴리의 손은 언젠가 우리가 마주할지도 모를 미래 세계를 보여주면서, 시공간을 넘나드는 순간을 연결한다. 누구의 손인지 모를 인공 손이 주인공의 옆에 머문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장면이 스쳐 가면서 어떤 목소리는 주인공을 부르기도 한다. 혼자여서 외로웠는데, 기억도 못 하는 시간의 주인공이 혼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시사한다. 우리는 서로가 온 곳이 달라도 친해지고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상대가 누구였더라도 관계가 만들어지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우리는 외로움을 감당하고 견디면서 한 뼘 성장하는 인간이 아닐까.


그래서 가장 작은 신의 결말에 뭉클해지기도 했다. 먼지 바람이 인간 세상을 덮어버리고,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두렵게 만들었을 때, 누군가는 더 깊숙이 숨어들 계기가 된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로부터 상처받지 않기 위해 문밖의 세계와 단절하고 지낼 무렵 찾아온 한 사람. 누군지도 몰랐던 존재가 주인공의 외로운 틈을 파고든다. 이용하려는 사람과 그걸 알면서도 곁에 두려는 사람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정을 팔아 올라가려는 사람과 방심하던 사이 훅 들어온 사람 모두 각자의 틈을 메우고 있다는 걸 알기는 했을까. 먼지 폭풍을 뚫고 달려나가던 그 용기에 달라졌을 무언가가 그려진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다. 한없이 무너지기만 하지 않고, 주저앉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숨어있기만 하는 건 더더욱 아닌 존재. 한번 문을 열고서 나간 사람이 이제 어떻게 살아갈지 알 것 같다고 하면 오버인가. 그래도 어떻겠나. 이 소설의 결말을 본 내가 바라는 게 우리가 바라는 삶일지도 모르는걸.


문을 한번 열 때마다 시간이 바뀌고, 운명이 달라진다.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는 어느 시간을 통과해도 결말을 달리할 수는 없었다. 다만, 마녀의 저주를 받았다는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 메리 블루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여긴, 죽은 여자들을 대신해 넘나드는 시간 속에서 하던 일은 계속됐다. 그녀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듯, 기꺼이 살인마가 되어 악인을 처단한다. 악몽을 뿌리며 배를 채우면서도 연민을 느끼는 나쁜 꿈과 함께역시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어렸을 적 가슴에 품었던 곰인형이 낡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성장한 것 같아도 완벽하지 않다. 불안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우리는 계속 성장해야 하며, 혼자가 아닌 존재로 살아가야 하니까. 그래서 외로움에서 파생한 감정은 사랑이 되고 함께가 된다. 외로움이 외로움으로 머물지 않게 한다. 사람의 곁에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괴담으로 가득한 이야기라고, 판타지로 포장한 으스스한 차가움이 아닐까 싶었다. 잔인한 장면에서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고, 악인의 등장에서는 내가 처단하고 싶기도 했다. 혼자서 꼭꼭 숨듯 살아가는 이를 볼 때 슬퍼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소설은 마치 비극의 결말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 거라는 듯,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적인 장면으로 분위기를 전환한다. 사라진 기억 속에서 머물던 목소리, 달려나가서 친구를 구하는, 싫어했지만 삶의 방향이 같아서 미워할 수 없는 사촌, 사라진 아이를 지켜보는 이가 있다는 시선을 보여준다. 혹시 어느 날 찾아온 외로움이 힘들거든, 악몽이 찾아와 밤이 괴롭거든, 함께였지만 잃어버린 사람이 생각나거든, 결코 혼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를. 보이지 않아도 당신 곁에 누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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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나쁜 일 오늘의 젊은 작가 37
김보현 지음 / 민음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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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곳 주차장을 걷다가 발에 뭐가 걸려서 넘어졌다. 그날따라 반바지를 입었고, 넘어진 무릎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넘어진 게 창피해서 몰랐는데, 대충 치료를 하고 나니 점점 통증이 심해지더라. 아팠던 거다. 내 피부가 쓸리고 피를 흘리는 일은 아픈 거였다. 지금 무릎의 상처는 딱지가 되어 있다. 아픔보다는 가려움이 더 커진 상태. 처음에는 피부의 상처가 크게 보여서 속상했는데, 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게 어디냐 싶어서 그때의 고통은 곧 잊히더라. 사는 방법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슬픔은 내일의 고통보다 가벼울지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3년 전, 정희는 아들을 잃었다. 2년 넘게 병원에 있던 아들은 더는 치료받을 수 없는 상황을 감당하며 죽어갔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그녀는 고스란히 경험했고, 3년이 지났음에도 아들이 잃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의 일상은 언제나 위태로웠고, 그나마 남편이 존재함으로써 견뎌내는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정희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다른 여자를 향해 환히 웃으면서 달려가던 남편의 실종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이상한 일은 계속 일어난다. 정희는 남편의 실종을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실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기다려보라고 말한다. 협박하듯 걸려온 전화, 연락도 없이 계속 실종 상태인 남편, 처음 본 시누이의 남편이 찾아와 이제까지 몰랐던 진실을 꺼내놓는 등 그녀를 둘러싸고 위험하고 위태로운 상황이 이어진다. 아무도 해결해줄 수 없다. 꼬리만 드러낸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서 그녀가 나서야 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로, 그녀가 겪은 슬픔의 감각이 만들어낸 예민함으로 한발 한발 진실의 중심으로 다가간다.


정희와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인물이 철식이다. 외모부터 피폐해 보이는 그는 한국에 거주하는 탈북민이다. 그는 같이 탈북한 아내 록혜와 한국에서 행복할 줄만 알았다. 목숨 걸고 탈출한 그들이 아니었던가. 북쪽의 일은 다 잊고 이곳에서 뿌리내리는 삶을 계획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내가 자살했다. 그는 아내가 자살한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다가 록혜가 한 남자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철식의 남은 생은 한 가지를 위해 존재했다. 아내를 죽게 한 남자를 찾아서 죽게 하는 것.


알 듯 모를 듯 이 소설의 곳곳에 등장하는 인물이 영호였다. 정희의 시누이 지애의 남편으로, 결혼한 줄도 몰랐던 지애의 남편이라며 갑자기 찾아온 그는 혼란스러워하던 정희를 더 세게 흔들고 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정희 앞에 나타난 것이며, 그의 아내가 사라진 것을 왜 정희에게 말하고 은근한 협박 같은 말을 쏟아놓고 갔는가. 더 이상한 건 아내가 연락이 안 된다면서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찾아내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는 거. 그가 성훈의 실종과 지애의 연락 두절 사이에서 무엇을 노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양한 인물의 등장으로 처음에는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 애쓰며 읽었다. 아이를 잃고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여자가 살아가는 모습에 빠져 있다가, 강인하면서도 나약해 보이는 남자의 분노에 두려워하다가, 너무 신사다운 모습으로 사라진 아내를 찾는 순한 남편의 태도에 안쓰럽다가도 이야기가 어디로 흐를지 몰라서 궁금했다. 정희의 눈앞에서 사라진 성훈은 어디에 있는지, 왜 사라진 건지, 그의 실종이 이 소설의 과정을 어떻게 장식할지. 아무런 단서도 없이 이야기는 시작되었는데, 인물 각자가 가진 오늘의 무게가 버거워 보여서 단순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은 우리를 존재하게 한다. 돈 때문에 죽고 돈 때문에 울고 웃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영업하는 사람이 팔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엇이든 팔 수 있는 시대가 된 거다. 돈과 목숨을 맞바꾸는 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 이거 현실에 너무 진하게 물들어 있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인간도 사고팔 수 있다는 게 상상이 아니었다. 결말을 확인하면서 점점 나 자신에게 묻는 횟수가 늘어간다. 나는 어떤 상품일까. 얼마나 잘 팔릴까. 얼마에 팔릴 수 있을까. 아니, 내 삶이 나를 팔아야 할 정도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묻고 있었다.


그녀는 희망이 없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상황이 어떤 식으로 치달아 갈지 역시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가슴이 조여 왔다. 정희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조용히 흐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도 이것은 끝이 아니며 가장 나쁜 일도 아니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일들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걸 차마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다. (206~207페이지)


내용을 다 소개하자니 이 책을 읽고 싶은 독자에게 스포일러가 될까 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럽다. 한 사람을 의심하다가 보면 진실은 다른 곳에 있고, 다른 사람을 추적하면서 따라가다 보면 여기에서도 진실은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듯하다. 누군가에게 나쁜 일이 닥칠 때마다 누군가에게는 카타르시스를 느낄만한 전율이 흐른다. 그러면서도 주인공의 무너지지 않음이 이 소설의 희망이 된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릴 것 같은 고통에 빠져 있다가 벌떡 일어나게 될 계기가 되기도 하는, 어쨌든 찾아야 할 진실이 있다는 이유로 맨발로 뛰어야 했어도, 숨이 쉬어지지 않아 숫자를 세면서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오늘이 가장 최악 같아도, 가장 나쁜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가장나쁜일 #김보현 #민음사 #오늘의젊은작가 #한국소설 #소설 #문학

##책추천 #인간영업 #탈북민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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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평균 400~500명의 민원인을 나와 옆자리 동료가 상대하고 있다. 짧게는 1~2, 길게는 4~5분씩 많은 사람과 얼굴 맞대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반년이 넘게 일하면서 참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걸 매일 느낀다. 좀 심하게 말하면 매일 진상을 마주한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진상은 매일 업그레이드되어 나타난다. 말 그대로 X진상.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대한 적도 없거니와 세상에 이렇게 많고 다양한 진상이 있다는 걸 배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싶게 하루하루 멘탈이 뿌리째 흔들리곤 한다. 그래도 어느 정도 적응을 했는지, 마스크 안에서 내 입은 소리 내지 않고 욕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다음에 마주할 사람은 더 심각한 진상이다.’라고 읊조리며 눈앞의 사람을 상대한다. 사람 성격 쉽게 안 변한다고, 어차피 두 번 볼 사람은 거의 없으니 진상 개조에 마음 둘 일은 아니다. 빨리 잊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는 걸 깨달은 지 오래다.


그중에서도 정말 오랫동안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 있는데, 나이 든 사람의 반말이다. (나이 든 사람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니 오해가 없기를) 볼 때마다 저렇게 늙지는 말아야지 다짐한다. 내가 하루에 마주하는 사람의 절반 가까이 나이가 든 사람이다. 보통 60대 이상의 노인분들. 딱히 적당한 호칭을 찾을 수 없어서 보통은 어머님, 아버님, 혹은 어르신이라고 부른다. 이들 중에는 겉으로 보이는 차림새에 상관없이 예의가 바르고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들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존대하면서, 찾아온 용건을 차분히 말하고 잘 해결하고 가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말을 꺼내는 순간부터 반말인 사람들이 있다. 이거 해줘, 안 했어, 모르지, 내가 어쨌는데, 등등. 반말로 시작해서 반말로 끝난다.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그런 거지? 나이를 먹으면 상대가 누구든 저렇게 말을 놔도 되는 건가? 친한 사이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초면에?


이럴 때마다 궁금해진다. 도대체 우리는 나이를 왜 먹는 걸까? 나이를 먹으면서 세상의 경험도 많아지고, 뭘 배우고 배우지 말아야 하는지 알게 될만한 세월인데도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뭔지... 나이를 먹었으니 대접받아야 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보다 어려 보인다고 당연하게(?) 말을 놓는 사람이 있다는 걸, 당연하게 뭐든 양보하고 우선으로 해줘야 한다고, 나이 든 사람의 특권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나이를 먹었으니 당연하게 먼저 해주고 양보하고 상대가 손해를 봐야 하는 게 아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을 배려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몸이 불편할 테니, 판단이 둔해질 수도 있을 테니, 한번 말한 것을 바로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으니, 도와 드리고 안내하고 살피는 거. 시간은 계속 흐르고 우리도 계속 나이를 먹고, 언젠가는 눈앞 노인의 나이가 될 테니까. 그러니까 나이 든 사람을 배려하는 건 언제나 배워야 한다고 여겼다. 나의 부모이고 미래의 내 모습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그 배려를 버리고 싶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도 많은 노인을 만났고, 많은 반말을 들었다. 반쯤 올린 존댓말에 거의 내린 반말에 익숙한 하루를 보내던 중,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민원인을 마주했다. 너무나도 심한 반말 폭격에 내가 얼마나 기분이 나쁜지 표현해야 하는데, 싸우지 않으면서 적나라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 몇 초 고민하다가 말이 쏟아져 나왔다. 민원인이 찾아온 목적을 다 해결해주고 한마디 건넸다.


구단씨 : 어머님, 혹시 저를 아시나요?

민원인 : 그럼, 알지~

구단씨 : 어머, 정말요? 저를 어떻게 아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민원인 : . 전에도 여기서 본 적 있어~

구단씨 : 아니요. 그런 거 말고요. 혹시 원래 저를 알던 분이신가 해서요. (진짜 내 기억에 없는데?)

민원인 : 아니, 그건 아니고. 여기서 처음 봤는데?

구단씨 : , 그러세요. 저는 또... 처음 오시자마자 너무 편안하게 반말을 막 하셔서, 제가 아는 분인데 못 알아뵌 줄 알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려고 여쭤봤어요.

민원인 : (정말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 죄송합니다.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을까? 사과하는 걸 보니 알아듣기는 한 것 같은데, 아마 뒤돌아서서 육두문자를 날렸을지도 모르겠다. 저 대화를 끝으로 나는 다음 사람을 부르며 그 민원인에게서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으니까. 옆자리 동료 역시 나와 비슷하게 정신이 피폐해지는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20대 청년이 한 달 반가량 겪은 정신적인 피폐함은 그에게 절대 서비스직은 못 할 것 같다는 교훈을 주었다지. 내가 그 민원인에게 하는 말을 듣고 옆자리 동료가 잠깐 감탄의 눈으로 쳐다보기는 하더라만. 글쎄, 반년 넘게 벼르고 벼르다 꺼낸 말이 어떤 효과를 불러올지 모르겠지만, 그 민원인이 많은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처음 본 사이에 전혀 친하지도 않고, 많은 관공서나 은행 등등 이용하면서 만나는 직원에게, 자기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무조건 반말부터 시작하는 무례한 태도가 바로 본인의 얼굴이라는 것을. 자기 자식이 어디에선가 자기같은 사람을 상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예의가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누구나 늙는다. 언제까지 젊은 나이에 머물 수 없다는 게 인간의 몸이니까. 어떻게 나이 들어야 하는지 이렇게 배우면서, 혹시라도 다 알지 못하는 것을 계속 배워가는 게 나이 듦의 의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자기 살아왔던 라떼만 계속 고집하지 말고, 나이 든 사람의 특권같은 것만 찾지 말고, 요즘 세상의 모든 것을 흡수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 번쯤 다른 생각도 들어보면서 살아가는 태도를 쌓는 것. 말하는 것처럼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겪는 감정의 고통이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건 안다. 이렇게 해야지 하는 다짐보다 이렇게는 절대 하지 말아야지 하는, 장점으로만 채울 수 없다면 단점을 지우면서 살아가는, 그것도 잘살아가는 잘 늙어가는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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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8-17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인류애가 사라지게 하는 진상들이 많군요ㅠㅠ 저도 일하면서 반말 제법 듣는데 제 동생은 정말 심한가 보더라구요. 약국에서 일하는데 진짜 자기는 노인포비아라고, 너무 공포스럽다가도 너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하더라구요. 배려를 권리로 여기고 나이를 훈장처럼 생각하고 수치를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네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구단씨 2022-08-18 00:54   좋아요 3 | URL
방송으로 비유하자면, 정말 비방용 진상들이 어마무시합니다.
겪을만큼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매번 새로운 진상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말하기 조심스러웠는데, 저 정말 노인포비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습니다. ㅠㅠ
동시에 배우게 됩니다. 사람이 존중받으려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를요...

햇살과함께 2022-08-18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힘드시겠어요..
제 친구도 공무원인데 민원실 발령 받으면 정말 괴로워하더라고요.
전화 받자마자 욕 하는 사람도 어찌나 많은지.
나이 들어가면서 의식적으로 반말 주의해야 한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되요.
친근감 표시(언제 봤다고??)라고 쉽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구단씨 2022-08-18 09:53   좋아요 1 | URL
저는 공무원은 아닙니다만, 정말이지 어느 관공서든 일반 회사 민원실이든 괴로운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알라딘 고객센터 통화도 조심히 말하려고 노력합니다. ^^

오후즈음 2022-08-18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몇년전 비슷한 일을 해 본적이 있어요. 마스크 없는 그때 집으로 오면서 수없이 혼자 속으로 욕했던때가 있었어요. 특히 특정한 지역 사람들이 너무 괴롭더라고요, 저도 늘 반성합니다. 난 저렇게 늙지말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단님 내일도 화이팅 입니다

구단씨 2022-08-25 21:59   좋아요 0 | URL
고된 한주였어요. 월요일부터 사건이 터졌고요.
결국 사건이 폭발하고야 말았습니다. 다른 파트에서 다른 민원 건으로요... ㅠㅠ
결론은 뭐, 저희가 참고 해야 한다는 지침 같은 조언 같은 뭐 그런 공지가 있었더랬죠...
화가 난다고 다짜고짜 반말부터 쏘아대는 인간들 보면, 누가 잘못 했는지가 아니라 그냥 저런 인간이 되지 말아야지 합니다.
 



오메, 두권짜리네.

신간 알림 소식 듣고 들어왔더니, 이렇게 두툼한 장강명의 책은 처음 만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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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나비꽃 에디션) - 세상의 모든 딸, 엄마, 여자를 위한 자기 회복 심리학
박우란 지음 / 유노라이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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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이벤트]


한마디로 정리하기가 어려워서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다가, 계속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있게 된다. 말 그대로,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는 말을 알 것 같았다. 나를 봐도 그렇고 주변의 많은 모녀 관계를 봐도 그렇다. 이상하게도 엄마를 정말 사랑하는데, 엄마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그래서 애증 관계라고 하는가 보다. 그런데 이 애증 관계는 한 세대에 머물지 않고 대물림하듯 세상의 모든 모녀 관계로 이어진다. 정말 이상하지? 그러면서 고민하고 갈등한다. 자기와 엄마가 겪은 그 감정의 묘한 관계를 자기와 딸의 관계에서는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한 여자의 마음 말이다.


저자는 이런 관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례와 연구를 독자에게 들려주면서 이 관계 회복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시작점을 찾아야 한다. 엄마와 딸, 두 존재가 서로에게 감정적으로 어떻게 집착하고, 그 집착에서 왜 벗어나기 어려운지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 이유는 참 많겠지만, 여성 특유의 심리적 기질을 눈여겨보게 한다. 타인의 빈 곳에 나를 채움으로써 존재를 찾으려는 일. 보통 보이는 게 남편이나 아들에게 집중하며 돌보고 그들의 부족한 것을 채우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딸에게는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연대하는 마음을 요구한다. 엄마뿐만 아니라 딸도 비슷하다. 엄마의 감정과 자기감정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정말 사람의 복잡한 심리를 보는 기분이다. 딸의 처지에서는 자기도 받고 싶은 사랑을 외면한 채 요구만 하는 엄마를 미워하기도 하지만, 마냥 미워할 수만도 없는 마음을 감당해야 한다.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복잡한 감정으로 변하고, 문제가 되는 상황에 이른다.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 딸도 엄마도, 이 관계의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에 저자는 조건 없는 관계를 지우라고 말한다. 그래야 엄마와 딸의 애정 관계를 유지하면서 각자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여러 사례를 듣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내가 겪은, 내 주변의 많은 여성이 겪은 일이 생각나기도 한다. 은근히 남자 형제를 더 아끼던 엄마의 태도, 같은 상황에서도 아버지나 남동생을 챙기는 게 우선이었던 순간 같은 거. 그때는 그래야 하는가 보다 하지만, 그때도 그렇고 지나고 나서도 외로움과 불평등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분명 엄마도 같은 경험을 하면서 자랐을 텐데, 왜 같은 감정의 고통을 딸에게 고스란히 물려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작정하고 그런 건 아닐 것이기에 더 감정을 해소하기가 어렵다. 엄마가 그렇게 살면서 겪은 감정 찌꺼기가 딸을 향한다는 이야기에 이상하게 밀려오는 서러움은 뭘까 싶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치유의 길로 들어선다. 나의 고유한 시선으로 나의 삶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 자기가 어릴 적 마음속에 담았던 엄마의 시선을 떨치고 진정한 나 자신과 마주해야만 내 안의 엄마를 지울 수 있다는 거다. 나의 시선과 엄마의 시선을 분리해서, 내 안에서 엄마를 내보내야 자기도 딸도 감정의 대물림을 끊어낼 수 있다. 결국, 엄마를 사랑하지만, 거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마음을 살피면서도 내 욕구를 채워 넣지 말라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딸과 분리된 상실을 받아들이며, 그 빈자리를 나 자신으로 채우는 연습을 하라는 것. 딸과 나의 삶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일까.


내 삶의 주체가 누구인지 떠올리게 하는 말에 처음에는 쉽지 않겠지만, 계속 노력하고 연습하는 것만이 나 자신의 삶을 완성하게 하는 것 같다. 딸과 엄마, 모녀 관계의 이 험난한 감정 소모를 더는 하지 않게 하는 지침에 조금은 귀 기울여도 좋겠다. 나 역시 엄마와 따로 살기로 하면서 가장 걱정하던 게 혼자 남은 엄마의 삶이었는데, 나만 마음 편하게 살면 괜찮을까 싶어서 죄책감에 고통스럽기도 했는데,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마음을 조금 달리 먹게 된다. 나는 분명히 엄마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서로의 적당한 거리는 서로를 더 살피고 아끼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 모든 모녀 관계가 애증이 아니라 서로의 다른 삶을 인정하고, 적당히 가깝고 적당히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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