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계속 가라
조셉 M.마셜 저자, 유향란 외 역자 / 행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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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긴 여정에 있어 우리는 누구나 크고작은 장애물을 만납니다. 이때 아 여기서 그만 멈춰야 하는지, 아니면 개의치 않고 계속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합니다. 의지대로 나아가는 것도 멋지겠지만, 때로는 현실을 돌보지 않고 무작정 기존의 진로만 고집하는 건 어리석은 만용으로도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저 개인적인 소감은, 지나친 고집이나 독단의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 편인지 잘 모르겠을 때, "그저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도 하나의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바람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든 개의치 않는다면, 저 매는 자신을 위한 선택을 바람에게 맡겨 두는 셈이지."(p47)

그래서, 그 매의 선택이 바람직하다는 걸까요, 아님 그 반대라는 걸까요? 이어지는 대화는 "너의 인생은 네가 행한 그 수많은 선택으로 이뤄져 있다"는 말로 귀결됩니다. 사실 이 독후감에 건조하게 정리된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는 대화로 채워져 있습니다만(저자분의 글솜씨가 매우 찰집니다), 뭐 결론만 추리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동양권에서는 나의 인생이 나 자신의 선택보다는 부모님, 학교, 기타 사회적 서열이 우월한 이에 의해 결정되는 바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pro-life, pro-choice라고 할 때, 후자의 무게가 너무 가볍지 않나(밸런스가 안 맞지 않나)라고도 하는데, 이는 영어권의 관습과 가치관을 너무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동양권에서는 개인의 선택이 집단의 가치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저쪽 사람들은 개인의 독특한 가치와 선택, 취향을 존중합니다. 무시되고 매몰된 개인의 선택이 쌓이고 쌓일수록 공동체의 유대는 약해지며, 나중에는 형식적인 권력 관계, 공허한 매너리즘만 남게 됩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참된 발전과 진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서양 가치관이 무작정 옳다는 게 아니라, 동서를 가르지 말고 명백히 저쪽이 옳다 싶은 건 배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남의 장점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능력과 의향이 없는 사람은 이미 자신 고유의 장점도 다 잃은 사람입니다.

p102 이하에는 "홀로 서 있는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한때 남부러울 것 없이 모든 걸 가지다시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자식들을 잃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풍족한 재산을 던져 가며 "비움 속에서 채움을 찾는" 의로운 인물이었습니다. 헌데 마치 기독교 구약에 나오는 욥 이야기처럼, 이번에는 그의 아내가 외로움과 허무감을 못 견디고 자살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초심을 꺾지 않고 더욱 결의를 다지며 "혼자 서는 데" 성공합니다. 결국 이 사람은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존경을 받는다는 결말인데,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족들이라든가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겠는지도 충분히 짐작이 가더군요.

p131 이하에는 온갖 시련을 물리치고 마침내 영혼의 안식을 얻은 형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용감한 형제들"이라는 아주 예전 미국 드라마도 있었고, 그런 이름을 가진 작곡가도 있으며, 배달의 민족 법인명은 "우아한 형제들"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형제가 의기투합하면 세상에 못 해낼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형제들은, 그저 속물의 관점으로 보면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훨씬 많은" 불운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자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네 마음이 절망으로 가득하지 않다면, 이미 네 마음에는 희망과 승리가 자리한 것이다" 어떻습니까? 저는 어떤 사람이 진정 마음의 평안을 얻었는지, 그렇지 않고 아Q식의 정신 승리만 거듭하는지는, 오로지 자기 자신이 가장 확실한 해답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형제들은 그 많은 시련을 겪고서야 비로소 무엇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지를 깨달았으며, 이로서 그들은 모든 것을 비로소 손에 쥔 셈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도 다 이러합니다. "그래도, 그대, 계속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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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란 무엇인가
테리 이글턴 지음, 이강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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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우리가 상실한 천국이요, 무례하게 쫓겨난 행복한 정원이요, 역사적 지평선 너머로 멀리 사라져 버린 유기적 사회다."(p23)

인류 문명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삼천 년 전이라고들 말합니다. 물론 이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어서 흔히들 4대 문명으로 일컫는 것들 중 보다 멀리 거슬러올라가는 게 있다고도 하는 반면, 페르시아의 엘람 문명은 이보다도 더 오래되었다는 주장까지 있습니다. 여튼 "문명"이라는 게 때로 대단히 세속적, 물질적으로 타락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문화는 대단히 고고한 성격을 띠며 경우에 따라 문명과 정반대의 길까지 걷는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p102에는 헤르더와 버크 간의 유명한 논쟁이 나옵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찰스 테일러의 경우 저 독일학자 헤르더의 업적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언어와 그 의미에 대해 매우 다르게 생각하는 방식을 고안"했다는 요약을 내놓았었죠. 결국 이런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이 후대의 스위스 학자 드 소쉬르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대개 영국의 인문학자, 철학자들이 대륙의 학문적 경향에 대해 냉소적 태도를 취하지만, 저자 이글턴의 경우 마르크스의 지평 위에 서 있으므로 저 위에서처럼 헤르더에 대해 열렬한 찬동의 경향을 보이는 게 그리 어색하지도 않습니다. T S 엘리엇은 주로 작품으로 말하던 작가였지만 여기서 이글턴은 그가 남긴 저작과 (비교적 소수의) 평론을 통해 저 헤르더와 정반대의 지평을 향한(그의 시각에 따르자면) 엘리엇의 비전을 꼼꼼히 분석합니다. "정신보다는 내장과 신경 말단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p118)." 특히 이 말이, 이글턴이 인용한 T S 엘리엇의 지향성을 압축하다시피한 표명인데, p120에 인용된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도 함께 읽어 보십시오.

이후 이글턴은 예이츠의 입장, 또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사회적) 무의식"을 끌어들인 논변까지 인용합니다. 사실 이 이슈에서 문화의 본질과 성격이 좀 지나치게 영국쪽 논자들의 입장만 원용된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만, 고드프리트 헤르더의 주장이 자세하게, 또 비교적 우호적으로 논의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균형이 맞는다고 하겠습니다.

"컬처의 어원 중 하나인 라틴어 동사 colere는 차지하거나 거주하다는 뜻을 갖는다(p167)." 물론 이 점은 우리가 영단어 colony등을 통해 알고 있는 지식이기도 합니다. 바로 밑에서부터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트리컨티넨털리즘)으로 논의가 옮겨가며, 테리 이글턴 자신이 영국 주류사회로부터 영원한 이단아일 수밖에 없는 그 개인적 배경, 아일랜드계 가톨릭이라는 어떤 숙명의 코드가 다시 등장합니다. 시니어드 오코너가 교황(당시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진을 찢은 것처럼, 저자 테리 이글턴에게도 교황이란 혹 현임자 프란체스코처럼 상대적 진보의 스탠스 성직자라 해도 미묘한 안티테제의 아이콘일 수밖에 없습니다.

테리 이글턴이라면 또한 "문화적 위계를 무너뜨리는 행위(p197)"에 대한 열렬한, 또 매혹적인 찬동의 논변자이겠습니다. 차별이란 "차이를 식별하려는 행위"인데, 이것이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이건 아니건 간에 이글턴적 논법 중에서는 깔끔하게 단죄가 이뤄지는 장점이 있습니다. 트럼프의 시대(지나갔지만)에 나온 가장 이글턴 적인, 재치있고 신랄하며 박식한 논의였으며, 다음 저작에는 이 시대의 가장 핫한 화두인 "증오, 혐오"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특유의 시원시원한 이야기를 들어봤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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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경제학 - 마음과 행동을 바꾸는 선택 설계의 힘
리처드 H. 탈러 지음, 박세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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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경제학은 기존의 "합리적인 경제 주체의 이성적인 결정"에 주목하는 학문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혁신적인 흐름이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탈러 박사, 또 대니얼 카너먼 등은 왜 우리들이 어리석고 비효율적인 행동을 하며 사고의 오류에 빠지는지를 면밀히 분석하여 노벨상까지 받았습니다. 훌륭한 사람들의 이성적인 결정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고 어리석은 오류로부터도 반면교사의 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일상의 우리들이 저지르는 실수 등이, 행동경제학의 주제와 훨씬 더 밀접히 닿아 있기에, 행동경제학의 여러 논의들은 마치 우리의 일기장을 엿보듯 흥미롭기까지 합니다. 삶의 실천적 과제를 (정반대 방향에서) 실용적 해결책을 일러 주는 고마운 코치이기까지 한 셈입니다.

과도한 재고는 비단 자동차 기업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게, 혹은 공장 등에서 사장님들한테 언제나 골칫거리인 문제입니다. p204에는 크라이슬러에서 내놓은 "리베이트 프로그램"이라는 예가 나오는데, 쉽게 말해 차를 사면 현금으로 일정액을 돌려 주는 제도이며 우리도 드물지 않게 만나곤 합니다. 재미있는 건 처음부터 가격을 깎아 주는 가격할인 프로그램보다, 금액이 같으면서도 이렇게 현금 다발을 돌려 주는 방식이 훨씬 효과가 좋다는 겁니다. 내 돈 중 일부를 돌려받았을 뿐인데도 왠지 횡재나 한 것 같고 말입니다.

하지만 경쟁사도 이 정책을 같이 채택한 후에는,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 게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이 행사는 "애초부터" 새로울 게 전혀 없었으나, 까다로운 자동차 판매점으로부터 현금을 일부나마 도로 돌려받는 "체험"의 효과가 컸던 셈입니다. 나의 "지갑"에는 큰 영향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만약 이 행사를 한국에서 지금 실시한다면? 냉정하게 살펴서 일찍이 있었던 "할인"과 별 차이 없다며 큰 관심을 안 보이는 이들도 많을테고(이성적입니다), 그렇지 않다며 현금 환급은 뭔가 다르다는 축도 있을 겁니다. 사실 재난지원금 이나 유류환급금 지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애초에 세율을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케인즈는 현대 거시 경제학의 큰 흐름을 이루는 두 가지 트렌드 중 하나를 창시한 사람입니다. 재미있는 건 주류경제학자들 중 상당수가 케인즈의 이론을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여지가 훨씬 넓어진 게 작금의 현실이며, 행동경제학이 한참 후인 지금 이처럼 인기 있어진 시점에서 케인즈의 여러 진단은 뭔가 "비합리적이지만 효과 있고 널리 행해지는 선택"의 예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는 겁니다. 허나 케인즈의 천재적 통찰력은 여전히 위력 있으며, 이 책에도 나오듯 "소수의 오너가 오히려 대중 다수보다 더 정확히 기업 가치를 파악한다"는 말은 두고두고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이 과연 맞기에, 주식시장에서 온갖 주식들이 미친 듯 가격의 등락을 거듭하는 것이겠고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합리적인 결정과 판단을 하려 애 씁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만족과 거리가 멉니다. 이 이유는, 우리의 생각을 메타적으로 객관화하는 노력을 못 하기 때문이죠. 어처구니없는 건, "생각을 객관화"하라는 비판조차도 남을 향해 즐겨 쓸 뿐, 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중인 자신에 대해서는 도무지 그럴 엄두 자체를 안 낸다는 겁니다. "내 생각이 이처럼이나 옳은데 왜 저들은 내 말을 안 듣지? 바보 아냐?" 이런 말이야말로 특급 바보들이 즐겨 입에 올리는 전가의 보도입니다. 나 자신을 객관화하여 통찰하고 반성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현자의 전매 특허이겠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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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의 금속 - 그린 뉴딜의 심장, 지정학 전쟁의 씨앗 / 희귀 금속은 어떻게 세계를 재편하는가
기욤 피트롱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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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는 희귀금속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p22)."
"이 책은 세계의 반(反) 역사를 담고 있다(p23)."

수백 년 전 뉴턴이 몰두했던 여러 과제들 중 하나는 바로 "연금술"이었습니다. 고전역학의 창시자이자 초기 미분학의 개척자였던 그가 한때나마 중세의 미신 같은 연금술에 천착한 건 아이러니처럼 보이지만, 우수한 두뇌를 지닌 이가 큰 재산을 벌 수도 있을 난제에 흥미를 드러낸 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어쩌면 그의 직관은 이미 결론이 "불가능"인 줄 알았겠으나, 이의 과학적, 이론적 확증을 위해 (무익한 종착역을 향해) 노력을 기울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여튼 연금술의 목적은 "비교적 흔하고 그 쓸모는 덜한(당시 기준) 금속이나 물질들을, 귀한 금(gold)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멘델레예프가 원소 존재의 질서 있고 체계적인 배열을 예견한 이래 인류는 여태 잘 알지 못하던 여러 원소들의 존재에 대해 눈 뜨게 되었고, 산업이 고도로 발전함에 따라 상품과 중간재의 더 정교한 고안과 설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며, 이 용도에 더 적합한 희귀 (금속) 원소를 향해 자원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수천 년 인류 문명사 동안 우리가 관심도 없던 희귀 금속이 갑자기 귀하신 몸으로 부상한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전히 금(gold)만이야 못하겠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높은 대접을 받게 된 여러 금속들이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어떤 금속은 (많이 과장하자면) 금(gold)을 끌어와 오히려 이런 종류로 바꿔어야 할 만큼, 뭐 아주 "리버스 연금술"의 과제가 될 지경이라고나 하겠습니다(물론 아직 그 정도로까지 가치가 높아진 희귀 금속은 없습니다만).

"전기 모터는 인류의 무한정한 번영을 보장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에너지 전환을 그럴 듯한 가설로 만들었다(p38)." 이 대목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과거에는 석유, 석탄 등의 탄소 자원을 연소함으로써 원하는 수준의 에너지를 얻었다면, 이제는 충분히 발달한 전자기역학의 도움을 받아 구태여 저런 "시커먼" 녀석들을 태워 가며 환경을 오염시키고 우리의 건강을 해칠 필요가 낮아졌다는 거죠. 물론 오염이 아주 없어진 건 아니고 저자도 본문에서 "오염이 적어졌음"과 같은 표현을 씁니다. 그래도 에너지를 얻기까지의 과정이 혁신적으로 깨끗해진 건 사실입니다. 또, 이처럼 기름이나 석탄이 아닌, "배터리"를 쓰는 공정이 대폭 늘어났기에, 한국의 LG화학(이후 LG에너지솔루션 분사)이나 SK이노베이션 같은 곳들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겠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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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동반성장, 자본주의 정신
정운찬 지음 / 파람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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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는 그동안 대기업 위주의 성장이 이뤄졌습니다. 이런 대기업 위주의 성장은 예를 들어 대만이 선보이는 중소기업 위주의 성장과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대만 역시 1980년대 이래 한국처럼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뤄 왔으며, TSMC 같은 세계 굴지의 기업이 반도체 산업을 리드하는 것만 봐도 그 성장의 의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한국 역시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이 첨단 산업 분야에서 새로이 세계 정상을 차지했으니 대만만 못하다고 결코 단정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한국은 어떤 진로를 취해야 할까요? 삼성 등 대기업이 그간 잘해 있으니 이를 적극 장려하고, 기업이 보다 기업하기 좋은 풍조를 조성해야 한다는 의견도 크게 설득력이 있습니다. 최근 이재용 회장이 수감되었을 때 그를 동정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는데 이런 분위기는 그간 재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분위기와는 많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국이 마냥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지금처럼 펴 나가도 문제가 없을까요?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탈취하여 남용 악용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집니다. 남의 기술을 뺏어서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런 일이 일상화하면 앞으로 젊은 인재들이 어떻게 의욕과 패기를 갖고 아이디어를 내며 건강한 스타트업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한국처럼 국토가 협소하고 자원이 부족한 나라는, 저 후츠파의 정신으로 일어선 이스라엘 모델에서 어떤 영감을 받아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요구하는 바는 재벌의 몫을 나눠 달라는 게 아니다(p94)." 재벌은 재벌의 영역에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중소기업은 자신의 강점이 있는 영역에서 자신만이 발휘할 수 있는 창의력을 발휘하게 장려되고, 그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오랜 동안 주창해 온 동반성장의 핵심입니다.

이 책의 제목, 그리고 본문에는 "자본주의 정신"이란 말이 들어 있고 자세히 논의됩니다. 자본주의 정신, 즉 가이스트 카피탈리스무스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노동과 창의와 근면과 헌신의 정신을 귀하게 여기고 이를 바탕으로 이익을 창출하며, 그 결과는 개인의 영역에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처럼 재벌이 중소기업만의 성과를 함부로 침해하고, 이후의 재생산이나 창의력 발현을 막는다면 이것은 자본주의의 존중이 아니라 그 정신의 말살에 가깝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걱정 없이, 자신만의 기여를 사회에 베풀고 그 대가를 합리적으로 거두어갈 수 있게 돕고 북돋우는 게 정부의 할 일입니다.

"후생"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체계화했을 때 이 개념은 대단히 보수적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후생은 이제 재정의되어야 하며, 많은 이들이 최대한의 만족을 누리는 시스템을 만들려면 무엇보다 중소기업의 자유와창의가 존중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오랜 세월 동안 강조해 온 동반성장 정신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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