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지능 - 미래의 속도를 따라잡는 힘
정두희 지음 / 청림출판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존의 모든 일자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인공지능이 대체하며, 인간보다 나은 지성과 연산 능력, 정확성, 신뢰도로 업무를 수행할 것이라는 전망이 꽤 우세하죠.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인간은 그 절대다수가 고유의 존엄을 인정 못 받던 노예제, 봉건제 사회에서조차도, 인간이 행하는 노동과 기여가 없으면 사회가 기능할 수 없는 체제를 일구고 살아 왔습니다. 한정된 지표면에 인구가 너무 많이 사는지도 모르며, 이 때문에 드디어 절대 다수는 무능력, 비효율성 등의 이유로 도태해 버리고, 창의적이거나 선대로부터 큰 부를 물려받아 대규모의 생산 시설을 장악할 수 있는 소수만 살아남아, 너른 공간과 부를 향유하며 깨끗한 환경에서 대를 이어 생존할 수도 있습니다. 이 역시 인류가 여태 경험만 못했을 뿐, 앞으로 그런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낯선 미래가 펼쳐지기보다, 지금까지의 패턴과 더 닮은 방식으로, 창의력과 혁신 의지가 더 뛰어난 이들이 보상을 받아가며, 인공지능만을 부려서는 사회의 부가가치 창출과 문제 해결이 이뤄질 수 없는 영역에서 인간만의 고유한 기여를 이어나가며 생존, 진화를 이어간다고 보는 편이 더 무난하고 설득력 있는 미래 예측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상당수가 도태되는 건 맞으나, 능력 유무에 불과하고 모조리 기계에 밀려나는 게 아니라, 자기 가려운 등 못 긁는 부분이 분명히 있듯, 고도로 효율화한 시스템 속에서 반드시 자체 해결이 어려운 버그를 집어 내고, 인간만의 비약적 상상력으로 단계의 혁신을 꾀하는 "기여"는 미래에도 여전히 대접받지 않겠냐는 전망 말이죠. 사실 지금도 "육체노동 기여"는 서서히 도태되어 가는 중입니다. 제가 몇 달 전에 리뷰한 <박스>라는 책에서도, 비능률적이고 심지어 부도적하기까지 했던 부두 노동 패턴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컨테이너 자동화 시스템이 차지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삼류, 사이비"인 정신 노동이나 사무직은 기계에 밀려나고, 진짜 창의력 있고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는 분석가들만 조직 안에서 대접받는다는 뜻입니다.

기술 지능(TQ)란, 암기 지능이나 단순 계산 지능이 아닌, "기술"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관점에서 세상을 재설계하거나, 기술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세상에 여태 없던 상품, 서비스"를 창조해 내는 지능을 말합니다. 예술가의 창조성과도 유사하지만, 그 수단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기하급수적 패턴으로 진화하는 기술"이라는 게 차이점입니다. 화가가 색과 선과 면 구성의 조합으로 기발한 그림을 만들어내듯, 작곡가가 8도의 음정으로 영혼을 정화하는 듯 신이하고 고아한 음률을 창조하듯, "기술지능"이 뛰어난 이는 갖가지 기술을 창의적으로 결합하여 보통 사람이 생각도 못 하던 도구를 만들고, 기업을 조직하며, 사람들이 그 수요를 채 깨닫지도 못하던 상품(쉽게 말하면 스마트폰이라든가)을 제시하여, 없던 시장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저자는 그 대표적인 예로 일론 머스크를 드는데, 물론 가장 대표적인 "기술 지능 천재"이긴 합니다만, 우리 독자들도, "아 그럼 그 사람도 이런 데 끼겠네" 싶은 여러 인물들이 떠오를 겁니다.

지난시대에는 국지적 재능, 지능이 뛰어난 이들이 제한된 영역에서 업적을 남기고 부와 명성을 쌓았습니다. 크게 성공한 사업가들은 꼭 자신이 뛰어난 공학자라든가 남다른 학문적 소양이 있어서 성공한 게 아니라, 때로는 뻔뻔스러운 사기, 무력 탈취, 정치적 협잡술로 거대한 부를 움켜쥔 이들도 많았을 겁니다. 헌데 미래에는, 앞서 말한 대로 기술 지능이라는 특별한 재능, 적성을 발전시킨 이라야, 자아 실현도 하고 거대한 부(富)를 획득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시대에는 부분적 지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저런 전근대적 패턴의 사업가에게 고용, 종속되어 부분적 과실을 분배 받으며 만족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앞으로 "기술 지능"을 남달리 발전시킨 이라면 자신의 재능을 온전히 자신의 계좌에만 차곡차곡 쌓아, 재능의 과실을 자신만이 오롯이 맛볼 수 있을 겁니다. 또, 방대한 인공지능 서버만 잔뜩 구축해 놓고 그에 대한 소유권을 대대로 물려받은 소수만 풍요를 누리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시스템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갖추고("기술지능"의 일부입니다), 어디서건 반드시 버그와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보완, 개선, 향상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야 사회적 지위와 부를 장악할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과거에는 노동 자본이 부를 창출했다. 일한 만큼 돈을 벌었고, 노동자가 많은(=노동자를 많이 고용한) 회사가 더 많은 수익을 거뒀다." 실제로 어떤 기업의 사세를 규정할 때, "종업원 OOO만 명을 고용한 회사"라는 설명이, 매출액 몇백억, 순이익 몇십억 같은 지표와 동렬에서 취급되었습니다. 지금 구글 같은 회사가 그 고용한 종업원 수효로 평가받지는 않습니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제안한 "법칙", 소수 20이 전체 80의 부를 차지한다는 원리는, 이제 "거듭제곱의 수익률이 세상을 지배하는(p31:6 등 이 책 여러 군데) 국면에서 더욱 심화되어, 극단적으로는 1:99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기술은 동시다발적으로 발전합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랬습니다만 지금은 그 양상이 특히나 복합적, 다면적, 총체적입니다. 이 기술 발전상이 폭발적이라서 언젠가는 불꽃 같은 상호 작용, 상승 국면에 접어들어 대 도약을 이루리라는 점은 이미 레이 커즈와일 같은 이가 지적했습니다. 저자는, 아직도 그 폭발성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현재에조차 이처럼 기술 진보의 템포를 따라가기가 벅찬데, 앞으로 거듭제곱의 법칙이 본격 현실화하는 세상에서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럼 저자가 말하는 "기술 지능"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다음의 다섯 가지 요소를 꼽고, 이어지는 여섯 챕터들에서 구체적으로 예를 들며 각각의 팩터를 독자에게 납득시킵니다.

1) 감지의 영역
2) 해석의 영역
3) 내재화 영역
4) 융합의 영역
5) 증폭의 영역

어쩌면 요즘 각광받는, 인공지능(만)이 갖춘(혹은, 그렇다고 하는) 미덕이나 장점과도 통합니다. 작금의 현실에서 혁신은 인공지능이 이끌어갈 전망인데, 사람의 재능, 적성, "지능" 역시 그 구조를 배우고, 나아가 이를 선도하는 모습이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지"는 보이지 않는 걸 찾아내는 능력입니다. 이런 성공적인 기업은 과거의 패턴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꾸준히(정도가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축적되는 정보에 의존하여 의사를 결정합니다. 에어비앤비는 세계적인 호텔 체인 "포시즌즈"보다 압도적인 성장세를 기록하는 중인데, 저자는 "비로 이 순간에도 유저들이 올리고 표현하는 욕구, 정보가 기하급수적으로 쌓이고", 이 기업의 핵심 자산은 바로 이에 기반하는 구조이니, 기하급수적으로 시장의 과실을 쓸어담는 미래의 승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정당하고 유의미한 신호와 노이즈를 구별하는 능력이야말로, 감지 영역의 핵심입니다.

신호가 감지되어도 올바른 해석이 뒤따라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전통적인 마케팅론에서 강조하던 포지셔닝 역시 "해석"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현상으로부터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은, "기술지능"의 5요소 중 가장 중요할 뿐 아니라, 나머지 네 요소가 제 기능을 발휘하게 돕기까지 한다고 저자는 단언합니다.

"내재화"는 내 것으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독자로서 제 생각은, 이 내재화야말로, 족보 보고 적당히 남 흉내나 내는 삼류 기술자들과, 진정한 창조자를 구분하게 결정 짓는 팩터라고 생각합니다. 매뉴얼이나 교과서를 수시로 커닝하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비슷한 부분을 참고나 해야 수습이 가능한 사람은, 이 내재화가 전혀 이뤄지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런 건 흉내내기에 불과하지, 참된 적성이나 능력, 지능으로 승화되지 못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뭘 근거도 없이 우기는 건 잘하는데, 나도 우기고 남도 우기니 결국 목소리 큰 사람(혹은 제정신을 잃고 난장판을 만드는 사람)이 이기는 낙후된 판에선 무슨 건전한 혁신이 있을 수가 없죠. 저자는 인공지능의 경우, 알고리즘은 시간이 지날수록 학습 능력이 좋아지므로, 이를 선점하는 자가 시장을 파레토적으로 지배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내재화가 못 된 지성은 알고리즘을 못 만들고, 알고리즘 하나가 시장 하나를 만드는 세상에서 이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융합의 미덕은 이미 혁신의 아이콘인 잡스가 세계를 향해 선보인 바 있습니다. 헌데 작금의 "융합"은, 다양한 기업들에 의해 더 섬세한 방식으로 구현되며, 이 과정에서 자신만이 뽐낼 수 있는 섬세한 개성이 드러나는 융합이 또 대세를 탑니다. 융합은 여기저기서 훔쳐 누더기처럼 이어붙이는 표절, 구걸, 사취가 아니라, 그 자체로 혁신과 창조라 부를 만한 또하나의 정신 작용입니다.

융합, 결합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이어진 모든 섹터는 시너지 효과를 내어야 하며, 부분의 합보다 커야만 합니다. 이렇게 폭발적인 증폭, 사이즈 업을 이루려면, 모든 걸 걸고 판에 뛰어들어 베팅을 하는 결단의 순간이 필요한데, 이런 요소는 사실 전통적인 기업가 정신에서 아주 핵심덕인 것으로 간주되던 자질입니다.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로컬 재벌을, 글로벌 콘글러머레이트로 키워낸 이건희 회장도 이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죠. 다만 종전의 "베팅"과 차이라면, 무모한 도박을 하라는 게 아니라, 현대에 충분히 유리하게 조성된 환경 중 하나인 "네트워크 효과"를 자기 것으로 선용하라는 게 저자의 주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술이라는 은하에서 - 우리 시대 예술가들과의 대화
김나희 / 교유서가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대기 오염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요즘, 정말로 별이 빛나는(starry) 하늘 구경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만, 나안(裸眼)으로 아무리 은하를 만나기 어렵다 해도 은하의 본체, 본질이, 헤아릴 수 없이 먼 거리에서 내재의 에너지로 빛나는 "별들"이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압니다. 또, "예술이라는 은하"에 반짝이는 별들이라면 물론 예술가들이겠습니다.

물욕과 이기심, 터무니없는 거짓과 위선으로 찌든 세상을, 말 그대로 은하의 별처럼 환히 비춰 주는 이들은 바로 이들입니다. 예술인들은 물론 흔한 상업적 호객 멘트가 아닌 "작품"으로 우리와 소통합니다만, 우리들의 눈이 어두워 이 소중한 작품을 통해서조차 예술인들의 참 뜻을 곡해, 간과하기 쉽습니다. 예술인들 역시 말을 삼가고 낯을 가리는 이들이 대부분이기에, 일부러 말을 고르고 골라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이미 작품으로 할 말을 다 했기에) 우리에게 "말"로 말을 걸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과의 대화, 인터뷰는, 예술인들의 생리와 속마음을 잘 이해하는 예술인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메타적으로 분석하고 거리를 두어 관찰할 수도 있는 인터뷰어의 능력이 성공 관건이라 하겠습니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었습니다. 1부는 "고통과 고뇌 사이"란 제목인데, 음악인이 아닌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감독이라든가, 신경숙 작가와의 인터뷰도 실렸습니다. 국외인이면서 비 음악인으로는 미셸 슈나이더(작가), 알랭 바디우(철학자) 등과의 대담이 있는데, 이처럼 인터뷰이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건 <객석>, <씨네 21>, <중앙 SUNDAY> 등 다양한 매체에 기고된 글들을 한 책에 모은 연유가 있다고 있다고 저자 서문에서 밝혀 줍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 대해, 특히 이 영화의 성공이 <골드베르크 변주곡> 등을 국내에서 더욱 자주 들리게 한 원인도 되었다고들 하죠. 인터뷰어 김나희님도 이 점에 대해 특별히 짚고 넘어가는데, 여기 대해 봉 감독은 "....나는 영화계에 몸담고 있지만 진짜 위대한 예술은 음악이라고 생각한다."라는, 다소 충격적인 진술을 합니다(이런 당혹스러울 만큼 솔직한 대답을 이끌어내는 것도 인터뷰어의 능력이라고 봐야겠죠). 이어 그는, "나는 그러나 음악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하며, 앞서 (영화)음악감독 벨트라미(마르코 벨트라미. <울버린>, TV 시리즈 <V> 등의 배경음악을 맡았죠)의 도움을 운 좋게 입었다고 한 이유가 뭔지 독자들에게 잘 밝혀 주는군요.

박찬욱 감독과의 인터뷰는 비교적 최근에 이뤄졌나 봅니다. "블랙리스트" 관련 질문이 오가는 걸 보니 말입니다(이와는 대조적으로, 민감한 질문이 없는 걸로 봐서 이 책 중 신 작가와의 인터뷰는 꽤 오래 전의 분량인 듯합니다). 인터뷰는 역시 꽤나 흥미로운데, 박 감독은 본인을 "완벽주의자와는 좀 다른, 철저한 화면과 서사에 노력한 연출자"로 규정하며("철저한"에 방점이 놓입니다. 인터뷰어의 표현대로, 한국 영화에 새로운 장을 열어젖힌 그이니만치 "he on himself"가 어떤 워딩으로 채워지는지는 언제나 궁금해지죠), 이어 김나희 인터뷰어는 그의 개성과 성취를 두고 네덜란드의 지휘자 베르나르드 하이팅크에 비유합니다. 스케일이 크면서도 깐깐한 원칙 속에서 벗어나지 않는 스타일이 과연 닮기도 했습니다.

알랭 바디우는 이제 저만큼이나 늙은 분이지만, 프랑스 지성사, 나아가 역사 자체에 한 획을 그은 1968년 5월 혁명의 주역이었다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소개할 정도로, 어떤 정체성과 소속감을 확실히하는 분입니다. 이 인터뷰는 2012년 한국 대선을 앞두고 이뤄졌는지, 그 사정을 감안하는 질문과 답변이 눈에 띄어 흥미롭습니다(단, 분명히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인터뷰어의 사전 프레이밍이 어느 정도는 개입한 듯도 보이네요. 이 대담은 유독 2012.6 이라고 일자가 명기되어 있습니다). "민주주의란, 어쩌면 불안정한 시스템일지도 모른다는 뜻인가?"라는 인터뷰어의 다소 절박한 질문에, 그는 "어차피 프랑스도 45%는 좌파, 45%는 우파인 구도가 고착화되었으며, 나머지 중도가 역사의 향방을 가른다"는 대답을 내어놓습니다. 진보와 긍정은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진보주의자로서 나는 미래를 긍정하나, 철학자로서 지속적인 긍정주의자가 되기는 어렵다"라는 명답을 하네요.

19세기 이전 서양 고전음악을 즐기는 분들은 작곡가의 국적을 분명 염두에 둡니다. 그러나 예컨대 자크 오펜바흐에 대해서는 좀 태도가 애매해지기도 하겠지만 말입니다. 파스칼 뒤사팽에 대해, 인터뷰어는 "당신은 '프랑스' 작곡가인가?"라고 분명한 의도를 띤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에 그는, "나는 프랑스적인 작곡가가 아니라고 보며, 정명훈(물론, 이분과의 인터뷰도 따로 이 책에 수록되었습니다)이 한국인이지만 프랑스 음악에 대한 직관이 남다른 것이나 마찬가지로, 음악의 형이상학적 추상성에 따라 언제나 넘어야 하는 다른 고비가 있는 게 음악인의 길"이라고 명쾌히 답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 그는 사진집도 자주 내는 편인데, 어렸을 때는 사진작가가 꿈이었다고 하는군요. 시간 예술과 공간 예술의 접점이 한 인물 안에서 관측된다는 사실로 꽤 흥미를 유발하는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학과 음악은 서로 얼마나 통한 것 같나요? 픽션 속의 캐릭터나 실제 의료인들을 보면, 창작이나 생산, 연주까지는 아니라도 감상에 꽤 깊은 소양을 지닌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특히 음악의 경우 감상 소양(이 역시 훌륭한 자질입니다만)과 창작 능력은 차원을 달리하는 벽이 그 사이에 가로놓여져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필립 헤레베헤는 자신의 생, 커리어에 그 두 영역의 넘나듦을 기록한, 좀 특이한 경우라고도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이분 이야기를 하면, 고음악(바로크 등) 복고 열풍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분이 규정하는 고음악의 정수, 그리고 자신의 예술 세계 핵심 키워드가 "자유, 완벽, 순수"입니다. 어쩌면 음악의 진짜 정수도, 흐릿하게 가려진 시야 때문에 온전한 실체를 관측 못하는 우리 대중들의 불찰이 아니라면, 이미 17세기 고음악의 시대에 나올 게 다 나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필립 헤레베헤는 그 점이 안타까워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거죠.

인터뷰어는 마렉 야놉스키와 롤랑 바르트, 그리고 바그너를 한 맥락에서 이해하는 듯합니다. 이 서평 앞부분에서 봉 감독이 "음악의 절대 우위"를 말했는데, 아마 서로 안면이 없을 듯한 지휘자 야놉스키도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하네요(물론 그야 본격 음악인이니 당연한 소린지도 모르겠지만). "... 요즘 음악인들은 음악이 아니라 연극적 요소를 더 앞에 둔다.... 무대 장치, 새로워야 한다는 아방가르드적 강박이 음악 자체보다 우선이었다.... 파격, 아방가르드, 미니멀 등은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오페라의 몰락이라고 나는 본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베토벤의 <피델리오> 같은, 오페라라기보다 교향곡에 가까운(확실히 그렇죠?) 작품을 더 선호합니다. 그러나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등은 (연극적 요소가 강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레퍼토리에는 절대 오르는 일이 없을 것이라 단언합니다. 이 책에 실린 중 가장 보수적이고 단호한 언사가 채워진 파트였는데, 그의 스타일을 잘 아는 팬들이라면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이후부터는 연주자들 인터뷰가 많이 이어지는데 피아니스트 피에르로랑 에마르도 그 중 하나입니다. 바로 앞 야놉스키처럼 이분도 대단히 깐깐한 원칙주의자죠. "어렸을 때 신동으로 데뷔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에서 사라져버리는 연주인는 되고 싶지 않았다...." 본인도 신동이었지만, 또 연주인들의 세계는 인생 초창기의 화려하고 극적인 데뷔가 중요하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저 완벽한 기교에만 치중하는 스타일은 팬들에게 외면당합니다. 세련된 귀에는 "아직도 어려서 배운 정석의 재현에만 기계적으로 집착하는, 성장을 거부하는 신동"의 행보가 일일이 구별되어 들리거든요. 어려서는 "어쩜, 어쩜 저렇게 하나도 안 틀리면서, 제것인지 뭔지 모를 감정을 저리도 잘 표현하나!" 같은 감탄을 받습니다. 어린 연주자, 특히 신동에게는 다 너그러우니 말입니다. 신동도 기계적 정확성만으로 승부하는 건 아닙니다. 팬들이 그런 걸 원하는 걸 알기에, 어른들의 감정 표현을 슬쩍슬쩍 센스 있게, 결정적인 대목마다 집어 넣는다고요. 그러면 듣는 이들이 거의 미치려고 하죠.

하지만 나이 든 연주자에게는, 아무리 신동 시절의 각별한 성취와 기억이 있더라도, 이런 잔재주가 더 이상 안 통합니다. "당신은 이제 어른이거든요?" 그런데 어려서 신동으로 데뷔하기도 힘들지만, 커서 어느 앞선 연주자도 표현 못 한 스타일을 개발(속물적인 어휘라서 죄송)해서 나만의 것으로 정착시켜 이를 갖고 대중과 팬들과 소통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피카소의 예를 들면 쉽죠. 그는 이미 8세 때에 라파엘로처럼 그릴 수 있었지만(이런 신동이 한 세기에 한 명이나 나오겠습니까?), 이후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졌기에 비로소 세계적인 거장이 되었습니다. "8세 때의 재주"만으로는 당대에야 화제가 되었겠으나, 백 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도 기억 못할, 한때의 통속적 이슈에 불과했을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자벨레 파우스트처럼 레퍼토리에 제약을 두지 않는 만능형 연주자도 좋아합니다. 진짜 천재는 이런 타입이 아니겠냐며 멀이죠. "단단하고 결집된 안쪽 소리"에 대해 그녀는, "악곡의 구조나 폴리포니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만 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게 바로 싸구려 떠돌이 악사와 예술가가 서로 길을 달리하는 지점입니다. 얕은 재능을 뽐내고 다니는 날품팔이(이보다 더 낮은 품계라면, 재능도 없으면서 남의 것을 베껴 사기치고 다니는 엉터리입니다)와, 후대에 길이 남을 해석과 재현의 전형을 완성한 예술가는 이래서 서로 다른 거죠.

"청중은 겨우 수십분 동안 우리에게 귀기울이며... (중략) 그 시간은 하나의 점과도 같은 찰나이다..... (중략) 한 점이 모여서 직선이 되고, 어찌 보면 직선에서 점이 차지하는 부분이 대단히 미미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 예술가의 인생 역시 연주와 창작 외에 다른 부분이 더 결정적일 지도 모른다(요 대목은 독자로서 저의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고 그녀는 말합니다. "... 그래서, 다음 생에는 다른 일을 해 보고도 싶군요..." 솔직한 토로입니다. 예술가가 아닌 평범한 일상에 매몰되어 사는 우리들은, 반대로 강렬한 점들로만 채워진 다른 긴 직선의 삶을 내생에는 보낼 수도 있었으면 하는 꿈을 꾸지만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라리 혼자 살걸 그랬어
이수경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로 모르는 사이였던 남녀가 만나 깊은 정과 공감을 나누고 가정을 꾸리며 그 결실로 슬하에 자녀까지 두는 부부의 결합이야말로,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 길지 않은 생을 이어가는 큰 보람과 행복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혼이 배우자 쌍방에게 큰 상처만을 남기고, 차라리 만남과 결합이 애초에 아니 이뤄지느니만 못했다는 후회만 쌓인다면, 그건 당사자뿐 아니라 곁에서 지켜보는 제3자의 마음까지도 안타깝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파탄에 이르게 된 혼인을 놓고, 어긋난 감정을 억지로 누르고 왜곡해 가며 남 보기에 윤리적이고 체면 서는 쇼를 벌이게 강요한다면, 마치 사과할 마음이 없는 자에게 억지로 사죄를 시키는 것만큼이나 인간의 양심 본연의 영역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자신의 마음이 치유될 뿐 아니라 자신을 아프게 한 상대방에 대한 묵은 감정까지 서서히 아물며, 상대방에 대한 자연스러운 용서가 이뤄질 뿐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이 편해집니다. 무작정 솔직해지는 게 상수는 아니라 해도, 덮어지지도 가려지지도 않는 걸 애써 덮는 데 쓸데없는 수고를 아끼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가 꽤 넉넉히 찾아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도 밝히듯 기업인으로서 성공한 인생이고, 외관상 아무 문제 없는 가정을 일군 남편인 저자가, 어떻게 해서 "가정행복코치"라는 직함으로 더 유명세를 타시고, 숱한 "문제 가정"들의 위기를 조언하며 위기에 처한 부부들에게 "구원자"라는 칭송까지 받을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이처럼 "실천형(실전형) 이슈"에 대해 자타가 공인하는 진정성 있는 해결사로 맹활약하시는 분들의 경우, 이를테면 여성 문제의 경우 본인이 이혼녀라든가, 경단녀로서 모진 고생 끝에 여성 CEO로 거듭났다거나, 여튼 우여곡절과 거듭된 실패가 사람을 더 강하게 키운 사례의 주인공이라야 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룰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 역시 부분적으로는 타당한 판단일 것입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남 앞에 서서 고민을 들어 주고 유효한 해답을 내놓으려면, 먼저 본인이 위기를 미리미리 잘 관리해서 흠 없는 진로를 걸어 온 분이라야, 남에게 뭐라고 충고와 조언을 베풀 자격도 생기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대중 앞에 자신을 살짝 비껴간 위기와 고비에 대해 진솔한 고백을 털어놓고, 그러한 고백담이 생기기까지 실로 뼈를 깎는 노력과 소통에 힘쓴 어느 남편, 지금까지도 한 여인만을 바라보고 사랑해 온 남편이야말로, 만인 앞에서 "행복 코치"를 자임할 자격이 생긴다 할 것입니다.

"키도 크고 예쁜 아내에 첫눈에 반했고, 십여 년 동안 큰 위기 없이 달달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아니었습니다. 결혼만 하고 나면 무작정 다 잘 풀릴 줄 알았지만, 아니었습니다. 결혼에 관해서 저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으며, 아내를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제 자신을 사랑했을 뿐이었습니다.(p20, p93)"

의지는 서서히 약해질 때 호되게 나무라면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갑니다. 더 체질이 강해지는 수도 있죠. 하지만 감정은 절대 그리 다스리면 안 됩니다. 일단 내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그 실상을 알고 내 안의 다른 아이를 다른 어른이 나서서 도닥이듯 분명하고도 정직한 진단을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하물며, 그것이 타인을 향한, 혹은 타인과 엮인 감정의 한 단락이라면, 더군다나 얼렁뚱땅 임시방편 가면과 가식과 땜질로 지나쳐선 안 됩니다. 이수경 저자님의 "성공 비결"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할 때 정확히 그 국면을 똑바로 보고, "이건 지금 분명히 잘못되어 가는 중"임을 서로(부부니까요) 인정한 후, 함께 부둥켜안고 눈물도 지어가면서 정직히 해법을 찾는 데에 있었습니다. 부부 간의 관계야말로, 초기에 잘만 다스리면 나중에 가래를 막을 일을 미리 호미로 잘 건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시인 롱펠로의 말을 인용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못이 되든 망치가 되든 둘 중 하나이다." 알쏭달쏭한 이 말을 두고, 저자는 명쾌하게 "내가 주도적으로 살면 내 삶의 주인이 되지만, 남의 손에 맡기면 피동적으로 만들어지는 삶을 살게 마련이다"라고 해석합니다. 여기서 다시 저자는 놀라운 결론을 이끄는데, 내가 지금 불행한 게 배우자 탓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이미 행/불행의 열쇠를 (배우자라는 그 사람에게) 넘겨 버렸으므로, 앞으로도 불행하고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다음이 더 탁견인데, 현재 "난 당신 덕분에 너무 행복해."라고 말하는 이 역시, 배우자에게 자신의 행복 키를 넘긴 건 마찬가지이므로, 그 행복이란 곧 불행으로 바뀔 위험이 다분하다고 하시네요.

부부가 아무리 일심동체라고 해도, 인격과 감정은 엄연히 자기 영역이 따로 있으며, 존중되어야 할 내밀한 부분도 여전히 남아있게 마련입니다. 이걸 억지로 무시하고 과도하게 조기 폭주하면, 반드시 뒤에 탈이 납니다. 내 감정 내 행복이 내 것이 아니라 당신 것이라는 무리수는, 그게 상대를 향한 헌신적인 사랑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터무니없이 높아진 일방적인 기대치를 뜻합니다. 상대는 준비도 안 되었는데, 나 혼자서 열심히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김칫국을 마신다면, 그만큼 지독한 이기주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게 사랑이라는 달달한 포장까지 뒤집어 쓰고 있으니 더 큰 문제입니다. 나는 지금 열심히 잘하려는데 왜 너는 몰라주느냐는 반응은, 억울함의 표시가 아니라 덜된 투정, 미리부터 부지런을 떠는 위선적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이 아닌 게 사랑인 척하고 있으니, 나중에 단단히 탈이 날 밖에요.

그래서 어르신들이 결혼 안 한 사람은 애 취급을 하는 겁니다. 부모 노릇은 좀 뒤의 문제고, 사람이 사랑이라는 달콤한 구름 위에서 생판 모르던 타인과 감정을 싹틔우고, 이를 대등한 인격체 간에 수습도 하고 갈등도 겪어 보고 다시 복원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되고 어른도 비로소 된다"는 뜻이죠. 저자는 겸손되이 "나는 어린아이나 다름 없었다"고 하시지만,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닐 겁니다. 사람이 자기 가정을 원만히 가꾸고 배우자와 성숙한 사랑을 일구는 일만큼 위대하고도 어려운 과업은 다시 없을 겁니다. 가정 경영의 달인이야말로 그 어느 CEO보다 유능한 인물입니다. "어른스럽게 상대의 배우자가 못 될 바엔 차라리 혼자 살아라!" 역으로, 결혼은 미숙한 인격이 생에 처음으로 맞는, 달콤하고도 가장 험난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혼, 절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 책을 읽고 알게 되었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특별한 경험
보도 키르히호프 지음, 서윤정 옮김 / 붉은삼나무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가 발달하기 전엔, 종이(묶음)를 매체로 삼는 출판업이나 언론 섹터가 더 호황을 누렸던 건 분명합니다. IT 분야의 혁신이, 저들 업종에 본질적 위기를 몰고 온 걸까요, 아님 이런 기술적 진보와 원칙적으론 무관하게, 대중의 기호가 더 이상 전통적인 방식의 "이야기와 정보의 소비"를 원치 않게 된 걸까요. 마셜 맥루언식의 오래된 문제제기처럼, 메시지가 중요한가 아니면 메시지를 담은 미디어가 더 중요한가의 딜레마가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라이터 씨는 중년 연배와도 제법 오래 전에 헤어진, 노인이라고 해도 무리 없을 나이 많은 남성("공식적으로". p44:2)이며, 단 정황으로 보아 그닥 나이 들어 보이지는 않는 외모인가 봅니다. 그가 추억 속에서 그토록 자랑스레 여기는 "여자 친구"가, 예순을 넘기고도 마치 서른 살 먹은 여성 부럽지 않게 선명한 개성과 매력과 활기와 지성을 발산하듯, 모르긴 해도 이분 역시 근사한 스타일을 유지하며 품위 있게 늙어가는 중산층 신사 같습니다.

라이터 씨는 출판사를 경영하는 사장입니다. 아니, 사장이"었"습니다. 소설 후반부에는 이런 문장이 나오는데요. "거대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마지막 빙하처럼, 진부하고 평범한 것들의 열기에 녹아 버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의 출판사(p162) (하략)" 이 한 마디로 그가 어떤 경위로 출판업을 접었는지는 짐작이 됩니다. 소설은 내내 자세한 설명을 삼가는 톤입니다만, 이는 주인공 라이터 씨나, 느닷 만나고선 이내 뜻이 통해 (이 소설의 주된 사건 줄기가 된) 짧은 여행의 동반자 노릇을 해 준(물론 그녀가 더 원했다고 봐야 할) 레오니 팜이나, "말이 너무 많은 것"을 싫어하는(예를 들어 p30, p55 등) 사람들인 걸 감안하면, 사건이 아닌 심상과 감정의 단면만을 툭툭 던지며 진득한 메시지를 담아가는(우리의 공감을 유도하는) 작품의 포맷은 명과 실이 상부하는 셈입니다.

특이한 여름 신발을 신고 찾아와 계절을 앞당긴(혹은, 반대로 혼자서만 계절에 뒤처진- 이 대목은 라이터 사장이 그녀에게 왜 반했는지 암시하는 중요한 의의를 갖습니다. 자신이나 팜이나 똑같이, 자신의 시대에 속하지 않는 "아름다움과 멋"을 지닌 동질감을 인식하거든요) 레오니 팜은 뜬금없이 라이터 씨의 직업을 묻고 나선, 자신을 두고 "폐업한 모자 가게 사장"으로 소개합니다. "음.. 제 가게에서 모자를 사는 사람들이 점점 줄더라구요." 요즘은 거꾸로 다시 모자를 채용한 패션이 슬슬 뜨기 시작하는 추세입니다만, 남녀 불문하고 사람들이 더 이상 헤어를 모자로 가리지 않게 된 건 꽤 오래 전입니다. 그러니 라이터 씨의 은퇴와 팜의 폐업을 같은 선상에서 보기는 무리고요. 이는 자신의 일에 더 이상 열정을 못 갖게 된 이들 중년(노년)들의 핑계, 혹은 "위장된 이름(p18. 표면상 다른 문맥이긴 하지만 결국 같은 함의라고 봅니다)"이 아닐지 저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속한 세대도 다른 두 남녀가 (이때까지는) 오직 이 지점에서만 교점을 갖는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타인의 일을 장본인보다 더 생생히, 신이 나서 타인들에게 내레이션하는, "남자들이 그녀를 볼 때면 잠자리까지 같이 연상하게 마련(p29)"인 불가리아 금발머리 여성 마리나는 결국 동료(?)인 에리트레아 여성 아스터와 공동 운명체입니다. 정작 아스터는 자신의 엑소더스 스토리를 그닥 즐기지 않고, 마리나가 요란스레 독일인들 앞에서 거의 규격화, 상품화한 버전으로 방송에 재방송을 해 대는 모습도 싫습니다. 이런 아스터에게 라이터 씨가 끌리는 건 확실히 이유가 있습니다. (리뷰 후반부에, 제가 생각한 이유를 적어 보겠습니다)

이제 "방문객에서 동행인으로 격상된"(p50) 팜은 라이터 씨와 함께 차를 타고, 남부 독일에서 알프스를 지나 이탈리아 남단으로 먼 여행을 떠납니다. 이탈리아 반도가 남북으로 아주 무한정 길게만 뻗은 거리는 아니겠습니다만, 번거로운 중간 설명이 일절 생략된 채 둘은 해협을 사이에 둔 시칠리아 섬에 어느새 도착하여 회포를 풉니다. 애착과 가치를 두었던 인연, 업무, 열정의 대상이 모두 자신을 배반하고 떠났다는 핑계, 혹은 "위장된 이름"을 대지만, 쿨하게 이들을 먼저 떠나도록 손짓한 건 오히려 라이터씨(나 그의 일시 동반자 레오니 팜)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아무튼 이 도중에 그들은 한 이상한 소년을 만나는데, 라이터 씨의 표현에 의하면 "애매한 게 아니라 끔찍한 침묵의 사자(p134)" 같았다고 합니다.

두 남녀는 그간 작위적으로 불러들인 고독 때문에 견딜 만한 취미성 마음앓이를 하는 중이었습니만, 동행인이 생기자 단수에서 복수로 위상이 바뀝니다. p95에서 procedunt, p101에서 ambulant라며 서로 반대되는 뜻의 라틴어 동사(꼭 반대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튼 라이터 씨는 그리 의미 부여를 하네요)의 (3인칭) 복수형을 되뇌는 건 다 그런 "극복, 탈출"의 안도감을 그들 나름대로 표현한 겁니다. 지중해 저편에서 목숨만을 그저 건지기 위해 험한 꼴을 다 겪으며 바다를 건너는 난민들과는 사뭇 다른 의미겠습니다만. 저 동사들이 1인칭 복수("우리")가 아닌 3인칭 꼴을 하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겠고요.

앞의 저 소년이 일종의 예고편이었다면, 본편은 타오르미나 어느 식당에서 만난 부랑아 소녀였습니다. 이미 "단수(single) 신세"를 면해 복수(plural)이 된 그들이지만, 뭔가 이기적인 섬처럼 (아름다우나) 낯선 땅에서 스쳐지나가는 관광객이 되긴 싫었던 그들입니다. 그들은 소녀에게 속하고 싶었고, 이런 체험을 통해 서로에게 더 단단히 결속되고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저 부랑아 소녀를 가운데 두고 "의사 가족"을 이루려던, 작은, 꼭 진지하다고만은 할 수 없던, 소망이 "칼라 밑까지" 이미 내려간 겁니다. 입에서 오물오물 희망만 되뇌던 단계는 지나갔다는 뜻이죠.

이 소녀는 앞에서 말한 에리트리아 출신 난민 아스터의 "다른 분신" 정도로, 그들은 시칠리아의 풍광 속에서 받아들였던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칠리아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마련해 둔 영화 <대부>의 상징물처럼, 그들은 어쩌면 이기적으로 이 소녀의 마음은 아랑곳않은 채 자신들의 허한 마음을 채우는 매개체로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나마 소녀의 속마음에 공감한 건 팜이었으며, 어느 순간 전혀 근원이 다른 존재의 이질감, 거리를 확인하고야 만 라이터 씨는, 짧은 충돌과 몸싸움 끝에 팜과 소녀 모두를 잃습니다. 그는 그렇게 다시 "혼자, 단수"가 됩니다.

여담입니다만 주인공 라이터씨는 독일어 철자가 Reither인데, 이걸 한국어로 음사하면 "라이터"가 되어, 소설 곳곳에서 "담뱃불 붙이는 라이터"라든가, "차의 전조등" 같은 것과 내내 가까운 거리에서 착시를 유발합니다만, 이는 한국어판에서만 우연히 빚어진 재미있는 사정이겠습니다.

(전략)나이지리아 남자에게 담배 한 개비를 줬으나, 그는 그저 라이터란 이름을 라이더로 반복해서 부르며 화제를 바꿨다. (p256)

(전략)라이터를 가리키며 라이터라고 그의 이름을 말했다. 그래도 그녀(소녀)는 테이블 위 담배와 라이터만 바라보고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p168)

이 대목들 말고도, 숙소에서 라이터가 라이터를 떨어뜨렸을 때 소녀가 집어 주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도 주어와 목적어가 같은 꼴이라 묘한 느낌이 듭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은 어리석은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 - 의도된 선택인가, 어리석은 판단인가! 선택이 만들어낸 어리석음의 역사
제임스 F. 웰스 지음, 박수철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어리석은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 물론 맞는 말씀이겠거니 여겼으나, 이 두꺼운 책을 읽다 보니, 어리석음이라는 게 그저 살면서 종종 저지를 수 있는 과오를 가리키는 게 아니더군요. 이 두꺼운 책에서 다루는 "어리석음의 역사"란, "인간이 살아온 자취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의 본성 속에는 필연적으로 "어리석음" 자리했던 것이죠.

씁쓸하지만, 이 책에서 자세히 분석되고, 어쩌면 같은 패턴으로 이렇게 치명적인 실수를 반복할 수 있었을까, 그러면서도 당사자의 눈에는 이런 과오가 전혀 보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과연 인간의 본성에는 "합리성, 이성" 같은 게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절로 회의가 일었습니다. 그러나 멀찍이 거리를 둔 "타인들"의 어리석음을 구경하는 포맷이기에, 일단 읽기에 재미는 있었습니다. 이 감상과 각성이 그저 재미로만 그친다면 그건 독자의 손해이자 또다른 "어리석음"의 증명이겠습니다만 말입니다.

아낙사고라스는 자연철학자의 범주에 드는, 만물의 씨앗, 혹은 "누스(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인물로 우리가 중등교육과정 윤리 시간에 배웠던 인물입니다. 그는 "윤리적 사고"보다는 순수 사고, 자연과학에 보다 접근할 수 있는 중립적, 메타의 틀을 강조한 인물이었는데, 이런 사고 방식은 당대인들로부터 "신의 존엄을 경시하는 불경한 태도"로 간주되기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자연히 그는 "왜?"보다는 "어떻게?"에 대한 해명에 치중했는데, 흔히 요즘 인도 등 동양권에서 유학 온 젊은 인재들이 서양 학문을 배우며 "왜?"가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태도와도 통하죠. 그러나 자연과학은 본디 이런 (어느 정도) 기계론적 세계관, 사고방식에서 출발점을 마련해야 원활한 발전을 기할 수 있는 학문입니다. 아무튼 그는, 자신의 본향인 이오니아는 물론, 아테네를 비롯하여 그리스 문명권 전체의 어리석음을 비판한 셈이고, 오늘날 우리들의 눈으로도 "고작 신성을 간접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뛰어난 지성을 핍박한 그들의 어리석음"이 꽤나 눈에 거슬리는 게 사실이죠.

"기하학적이나 작았으며, 정돈되었지만 조각상처럼 정지되었다.(p59)" 이것이 그리스 문명의 한계를 꼬집는 저자의 한 마디 비평입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자치를 누리던 도시국가들은 (그 자체의 지위가) 최상의 영예였으나, 동시에 치명적인 한계였다." 이유는 명백합니다. 통일된 거대 정치 단위를 이루지 못했기에 페르시아 같은 멀리 자리한 제국으로부터도 생존에의 위협을 당했고, 결국은 아드리아해 건너편의 로마 제국에 종속당했죠. 흔히 서양 저자들은 그들 문화 고전의 토대를 완성한 그리스 문화를 무작정 에찬합니다만, 이 책 저자는 그리스적인 "고정성, 불변성, 비융통성"을 들어 그리스 고유의 어리석음으로 확정 진단합니다. "모든 것을 이상화하는 과정을 통해, 순수를 위해 삶의 다양성을 희생했으며, 단순한 합리적 체계를 선호한 나머지 복잡한 인간적 상황을 무시하고 말았다.(p107)" 의미심장한 비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어 저자는 고대 이집트로 무대를 옮깁니다. 이집트인들은 풍요로운 물산, 고립된 지형(외세의 침략이 용이치 않음)의 덕분으로 오랜 동안 발전된 문명을 이뤄 왔으나, 한번 잘 마련되어 원활히 작동한 시스템에 마냥 기대어 타성에 젖어, 환경과 상황이 바뀐 후에도 여전히 종래의 방식을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건 다를 바 없었습니다. 저자가 특히 이집트형 어리석음으로 꼽는 건, 도대체 서신 교환이나 개인 사이의 대화에서조차 "개성"이란 게 드러나지 않고, 과거에 있었던 그 무엇에 자신을 빗댄다(를 넘어 동일시한다)거나,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무심히 시간 밖에 머물러 들었다는 겁니다. 이런 점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대단히 얼빠진 행태처럼 보일 텐데, 물론 그 체계 안에서 편히 안주하는 이들에게는 사회적으로 갖추어야 할 당연한 예의, 매너, 품격처럼 여겨졌을 겁니다. 이런 태도를 버리고, 자신만의 감정을 표현하는 게 오히려 "어리석음"으로 간주되었겠죠.

중국에 대해서도 저자의 비판적 시선은 이어집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근 2500년 동안 해당 대륙의 거주민, 위와 아래를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행동 준칙을 정해왔을 텐데, 저자는 이를 두고 "너무도 상식적이며 시간밖에 벗어나 있는 듯 사건성을 결여한 태도로 사물을 바라보는 터라, 자연과학적 사고, 나아가 일체의 진보의 싹이 발달할 여지가 없었다"고 합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화약, 인쇄술, 나침판, 제지술 등 모든 놀라운 혁신이 중국에서 비롯했으나, 그 과실은 고스란히 서양이 따 먹었을 만큼, 그들의 발전과 혁신은 확장성, 연속성이 부족했습니다. 그 결과 현대에 이르러 큰 상처와 좌절을 겪은 그들이지만, 이제 어느 정도 과거의 "어리석음"을 수용, 내면화하고 거듭날지, 아니면 "서양 문화의 가장 나쁜 물질적 측면만을 모방하는 데 그치고 과거의 패턴으로 다시 돌아갈지(저자의 표현입니다)"는 여전히 그들의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중세 유럽의 "어리석음"은 새삼 뭘 지적할 것도 없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는 데 급급하여 거짓과 위선을 일삼았고, 문명의 보존에 애 쓴 만큼이나 그에 비례하여 모든 어리석음 역시 교회가 그 원천이었습니다. 이러던 암흑기가 끝나가며, 주로 알프스 이남의 이탈리아에서 (막강한 교회의 위세를 여전히 배후에 두고서도) 인본주의의 싹이 새로 트기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을 계기로 비로소 유럽 문명은 "인간다움"과 다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만, 저자는 "세속적 욕망, 물질주의와 도덕관념의 부조화(p262)"라는 숙제가 이 시기에서부터 여전히 해결 안 된 채 대물림되어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전한다고 지적합니다. 매우 타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죠.

17세기의 특성은, 이성 자체보다는 "이성에 대한 확신(p374)"였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계몽주의가 스스로 자신의 시대에 모든 무지몽매를 추방하고 전근대적 폐습을 일소한 건 아닙니다. 계몽주의스럽지 않은 일체의 타자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그 모순을 짚어 내었으나, 정작 이성과 합리를 내세운 자기 구조 안의 비정합성에 대해서는 맹신으로 일관했죠. 어쩌면 이 책의 주제인, "학습의 결과로 이뤄진 스키마의 구조적 부작용, 체질적 약점, 내재적 어리석음"은 그 전형이 이 시기에 배태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여튼 우리 인류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무엇이 발전, 진보, 개화인지,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진 상태로 상승한다는 게 무엇인지 목적의식만은 분명히 다집니다. 물론 현실도피성 몰입이 "더 나은 내일"이라는 식의 착각, 허풍은 가장 악성의 어리석음이겠지만 말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색다른 어리석음의 최신판을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그전부터 궁핍에 시달리던 인간은, 그 궁핍으로부터 절제, 검약, 반성이라는 미덕 하나는 확실히 얻어 발전시키고, "이상적인 인간형"을 사회 신참자에게 교습하는 데 반드시 이 덕목을 주입했습니다. 억지 춘향도 문제지만, 이제 고삐가 풀려 무작정 욕망의 충족을 위해 폭주하는 행태도 인격의 타락이나 공동체 질서의 와해를 부를 수 있죠. 픙요로워지기는 했으나 어느 선에서 욕망의 고삐를 당겨야 할지 결정하는 지혜("어리석음의 반대")는 아직 인간이 미처 배우지 못했습니다.

20세기 들어 자연이 가장 비밀스럽게 숨겨 오던 힘의 근원 하나가 밝혀지고, 나치 같은 집단 광신이 처참하게 몰락하는 과정에서 지구 전체의 신 질서 수립을 모색하려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이 등장하여 군비 경쟁에 몰입하고, 상대를 파괴하려다 자신의 존재까지 부정하려 들 수 있는 "오만, 힘에의 맹신" 같은 어리석음이 또 하나 등장했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은 다시금 문명 충돌의 파장을 낳아, 전세계 곳곳에 걸쳐 테러리즘의 만연, 극단적 폭력 투쟁이 그칠 날 없이 이어지는 비극을 낳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에서도 눈치챌 수 있지만 "어리석음"은 미개, 야만족 사이에서만 표징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다분히 역설적이지만, 저자는 이 두꺼운 책을 통해 인류사 전반이 "증명"한 어리석음을 논하며, "문명과 함께 비로소 탄생한, 문명화한 어리석음"을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문명 이전의 인간은, 혹 그런 자각 비슷한 게 있었다면, 스스로를 완성된 인식이나 개량된 생활 방식을 터득한 우월한 존재로 여기지는 않았을 겁니다. 반면 이런 "문명화한 어리석음"은, 스스로가 전혀 어리석은 줄 모르고 "틀에 박혀 버린 어리석음"을 자랑스럽게 반복한다는 점에서, 관찰자인 제3자가 보기에 더욱 희화스럽고, 그 어리석음의 자발적 교정 여지가 더욱 줄어든다는 점에서 위험합니다.

"자기기만은 개인의 자신감을 키워줌과 동시에, 집단 안의 협력을 촉진하는 효과적인 자기 방어 메커니즘이다.(p23)" 통렬한 비판이지만 지극히 타당한 지적,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목격되곤 하는 바보스러운 행태이죠. 자신의 삶 그 기반이 매우 취약하기에, 자기기만을 통해서만 생존 의지를 북돋울 수 있다는 건 우려스러울 뿐 아니라 당사자가 스스로 서글프게 여겨야 마땅한데, 예컨대 과학적 소양이 전무하면서도 단편적 암기사항을 주문처럼 되뇌면서 어리석은 주변 인물들에게 가짜 이미지를 심는다든가, 파탄 난 가정상을 위장 왜곡하려고 묻지도 않은 배우자 이야기를 꺼낸다든가 하는 허풍 허언의 기제도 이에 속할 것입니다. 어리석음을 요란히 연출하는 건 남 보라고 벌이는 쇼인데, 어리석은 쇼에 속아 주는 건 자신뿐이라는 게 지독한 역설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저자의 "어리석음"에 대한 정의로 다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p22에서 어리석음을, "학습에 의해(=인위적으로) 변질된 학습"으로 정의합니다. 그 결과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에 머물거나, 환경과 그 영향, 특정 변수가 발생시키는 결과에 대해 올바른 인과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을 파멸시키는" 단계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저자가 결론에서 강조하는 대로, 어리석음이 그저 어리석음의 단계에 머무는 게 아니라 "오만"에 까지 이르면, 그 결과는 인류 전체의 파멸이란 필연일 뿐입니다. 인간이 어리석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한 가지 방법, 기준은, 자신이 지금 그토록이나 확신을 품는 바에 대해 한 번이라도 "모두 틀렸을 수 있다"는 회의를 작동시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허, 겸손"은 자기 구원에의 길과도 통합니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길이 어쩌면 그처럼이나 간단한데, 이를 필사적으로 우회하는 걸 보면 우리 인간은 아직 갈 길이 멀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