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국 핵심 강의 - 최소한의 중국 인문학
안계환 지음 / 나무발전소 / 2017년 10월
평점 :
중국은
참으로 광대 무변한 국가입니다. 영토가 넓다 보니 각각의 지역이 지닌 사연도 무궁무진하고, 기후나 풍토도 다양합니다. 이렇다
보니 한 말로 "중국, 중국인들"을 상대한다고는 하나, 어느 지역에서 어떤 처지에 놓인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전략과 태도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사고는 글로벌하게 하되 행동은 로컬하게 하라는 말이 있죠. 개별 상황에서 타겟의 취향과 의도를 정확히 짚지
못하면 아무리 거창한 목표를 잡았어도 원안대로 성취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어느 중국인을 만나도, 또 어느 중국 회사와 상대해도, 무조건 통하고 보는 화제가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자랑하는 오천 년
역사가 이들 후손들에게 남겨준 "역사, 인문"이라는 유산입니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잘 구사해도 정작 컨텐츠, 토픽이 빈약하면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역사와 사상, 철학, 인물, 문학, 예술에 대한 화제가 풍성하면, 저쪽에서 사람을
보는 눈길과 태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우리야 우리 조상들의 역사, 견훤, 왕건, 김춘추, 계백, 이성계, 정몽주 등에 대해,
외국 비즈니스 파트너가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가졌어도 그저 좀 신기하다는 정도의 반응에 그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들 중국인들은
실로 과거의 자취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릅니다(그러니 우리 기준대로 지레짐작하는 건 금물이고요).
동시에,
중화권의 문화 유산에는 우리 조상들이 이바지한 비중도 적지 않은데다, 고려, 조선을 거치며 중국 문화의 정수는 선현들이 대대로
인격 도야, 교양과 학식의 필수 학습 목표로 삼아 왔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중국 문화, 역사, 인문에 대한 핵심 사항"의
이해는 1) 중국인들을 사무 관계로 상대해야 하는 직장인들에게 필수 정보이자 최소한의 에티켓이며, 2) 바로 우리들의 조상들께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소양의 축적 노력입니다.
시간과
정력을 아껴 다양한 목표에 배분해야 하는 우리 현대인들은, 한도 끝도 없는 중국 고전 전거를 모조리 찾아 읽어 내고 내면화할
수는 없습니다(가능하다면 그게 바람직하겠지만요). 고맙게도 단 한 권으로 다이제스트된, 내용의 신뢰성과 가독성을 고루 갖춘
안내서, 입문서, 대중 교양서가 있다면 좋을 텐데, 한 권으로 필수, 핵심 사항을 다 배우려면 오히려 그런 놀라운 책을 찾기가 더
힘듭니다. 고명하신 학자, 교수님들은 많아도 신통한 입시 족집게 선생은 오히려 찾기 드문 것과 같은 이유이겠습니다. 후자가
전자보다 더 가치 높은 존재란 뜻이 결코 아닙니다. 상황이 급하면 지나치게 원칙을 따지기보다 나한테 최적화한 답을 찾는 지혜,
요령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중국 고전의 심오한 뜻을 정석대로 낱낱이 배우다가는, (행여, 생의 종언 전에 끝낼 수 있기나
하다면) 이미 사회 활동 적령기를 한참 지난 노년에 달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죠.
이
책은 일단 박력 있게 잘 읽힙니다. 이런 박력 있고 내용 알찬 책을 읽으면서 저는 예전 생각이 좀 나더군요. 대략 십여 년
전(중국이 본격 세계 무대에서 경제적 굴기를 이루면서)부터, 중국의 고전이나 역사를 요약해서 독자에게 소개하는 책은 매우 많은
종류가 출판되었더랬습니다. 그 상당수는 내용이 너무나 빈약하고, 어떤 것은 부정확한 정보를 담거나, 편벽된 가치관에 휩쓸리거나
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녔던 기억입니다. 어떤 건 (분량의 한계를 고려할 때) 깊이도 있고 관점도 표준적이며 확장성도 갖췄지만,
엉뚱하게도 가독성이 떨어지는 게 있었습니다. 배경 지식을 상당히 갖추고 독서 훈련이 탄탄히 되어 있는 독자라면 눈빛을 반짝이며
환영하겠지만, 그런 책이 주로 초심자를 타겟으로 삼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안타깝고도 역설적인 면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공력 좀
되는 분들에겐 "아, 이 책은 (초심자가 아니라) 뭘 좀 알고 나서, 일정 경지에 오르고 나서 읽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같은
느낌이 안 들 수가 없었죠.
간만에
그런 아쉬움, 종래의 미진한 수요를 모두 긁어 주는 책이 나와서 저는 참 반가웠습니다. 즉, 1) 초심자가 읽어도 재미있고, 그
초심자가 더 심화 학습이 필요할 때 좋은 발판이 되어 줄 수 있으며, 2) 중급, 고급 독자가 읽어도 저자와 치열한 소통을 하며
뭔가 배우고 생각할 거리가 마련되는, 그래서 (이미 그런 사람은 잘 하고 있겠지만) 중국 측 비즈니스 파트너와 대화를 나눠도,
종래 자기 관점과 다르거나, 보다 발전된 경지의 화제 전개가 새로 길을 여는 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꼭 저자의 관점을
따라해서가 아니라(물론 따라해도 되겠더라구요 ㅎ), 건강하고 박식하며 탄탄한 논리를 갖춘 저자의 책을 읽으면, 마치 벡터의
합성처럼 새 방향으로의 개안이 은근 자극됩니다. 제게는 이 책이 딱 그런 책이었습니다. 대화가 더 다채로워지고 상대의 진지한
몰입과 동의를 끌어낼 수 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책은 모두 10강으로 이뤄졌습니다. 역사와 문학과 인문을 한 권에 담는 책들이 흔히 시대별 편제를 취하는데, 대개 그렇게 하면
독자가 좀 지루해집니다. 그런 편제 자체에야 문제가 없다해도, 두어 번 실패한 초심자가 (설령 관점이 내용이 전혀 다르다 해도)
다시 같은 형식을 꾸린 책을 만나면 구미가 덜 당기거나 지레 의욕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의 형식은 참신하고, "중국 핵심
교양"을 전달하려는 목적에 매우 잘 부합하는 구조입니다. 제 개인적 생각에 그칠지 모르겠으나, 한 권으로 핵심을 전달하려면 애초에
다들 이런 목차, 배열, 편제라야 하지 않는가 하는 각성에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앞에서
책이 박력 있게 잘 읽힌다고 했습니다. 이는 저자께서, 주제에 대해 확실히 파악하고 깊은 이해를 갖춘(또한, 오랜 세월을 두고
생각을 숙성시킨) 분이라 이런 시원시원한 서술의 흐름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보를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마련하고 줄거리를 잇다
보면, 정확성에 대한 신경이 쓰이기 때문에 말이 유창해지지가 않습니다. 그렇다고 유창한 말솜씨와 흡인력이 전부는 아닐텐데, 이
책은 (저자의 관점은 일단 차치하고) 전달하는 내용의 정확성 면에서 거의 오류가 없습니다. 내용 오류나 오식(誤植)을 책에서
찾아내는 게 독자로서 오랜 습관 중 하나인데, 이 책은 아주 사소한 몇 군데가 발견되었을 뿐 거의 완벽한 형식 정합성을 보입니다.
초심자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공부도 힘든 판에, 텍스트까지 울퉁불퉁 좌충우돌이라면 마음이 얼마나 불안해지겠습니까.
팩트만
건조하게 전달하면 역시 읽는 맛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마치 유식한 고을 훈장님이 맛깔나게 풀어주는 옛날 이야기 같이
흥겹게 읽힙니다. 본문은 합쇼체, 심화 내용을 담은 박스 아티클은 격식 갖춘 예사평서형 어미를 써서 단조로움을 피합니다.
초심자에게 어려울 수 있는 용어 설명은 책 후주로 돌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중국행 비행기, 이동하는 차량 안 등에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형식으로 여겨집니다.
1강은
중국 신화에 대한 설명입니다. 중국 인문 대중 요약서는 이 신화 파트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는데, 애초에 중국인들부터가 객관적
관념론 체계로 사상, 도덕, 종교, 관습을 통일하면서 이 분야에 대한 관심과 존중을 상대적으로는 소홀히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화 모티브들도 유교 경전 맥락 안에서 인용되면 사뭇 비중이 달라지는데, 책은 그런 전통을 충실히 따랐을 뿐 아니라, 근래
정권에서 열심히 정성을 기울이는 하은주 공정 이슈가 또 있기에, 각별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신화는 나이 불문 학식 불문
누구에게나 재미있지 않습니까?
중국인과
대화하는데 한국인이 마냥 자기 관점만 내세울 수는 없겠으므로, 이 책은 대개 그들의 표준적인 인식을 반영하지만, 제가 읽어 보니
역시 한국인으로서 피할 수 없는 주체적 인식이 충만함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미언대의(微言大義)라고나 할까요?ㅎㅎ
물론 문언, 워딩으로만 봐서는 잘 안 드러나므로 마음 놓고 독해 후 (중국인들 앞에서) 인용하셔도 됩니다. (단, 저자 서문만은
한국인으로서의 비분강개한 의식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2강은
춘추전국기에 대한 설명인데, 역사의 큰 줄기(보통 다른 책들은 이 얘기만 하고 말죠)도 짚어 주지만,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제도사 분석의 성격이 더 짙었습니다. 이야기만 따라가면 왜 이런 사건이 벌어져야 하는지 납득을 못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이 책은
제후와 경-대부 등의 신분 위계 구조를 친절히 먼저 풀어 줍니다. 이로써 "중국형 봉건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인식 틀을 먼저
마련해 주는 겁니다. 박스 안에 따로 편집된 "중국사 줌인(다른 서적 인용으로 대신하기도 합니다)"이 어느 장에서건 유익함은
다언을 불요합니다. 역사를 쉽게 들려 주며, 어느 상화에서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사자성어도 맥락과 함께 제시되니, 초심자들이
머리 속에 오래 남을 수 있겠습니다.
3강은
중국 고전 문화의 토대가 놓인 중요한 시기, 한 제국의 성립 과정을 다룹니다.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높은 화제가 삼국시대, 초한
쟁패기이기도 하고, 이 사정은 중국인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자가 새기고 정리한 한 고제 유방의 처세 핵심, 승리의
비결이 꽤 설득력이 높으므로, 처세와 실용의 관점에서도 한 번은 읽고 곱씹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 앞에는 진시황의 업적과 좌절에
대한 강설이 있고, 챕터 말미에는 "한중일 장기의 차이"라는 무지 흥미로운 토픽이 독자를 반가이 맞습니다.
4강과
5강은 중국 고전 인문의 발원과 심화로 각각 규정되는 "춘추", "전국" 시대에 대한 설명입니다. 보통 양 시대를 뭉뚱그려
설명하거나, 판에 박힌 정치사 관련 서술로만 채워지곤 했는데, 이 책은 두 시대의 차별되는 의의를 다방면에서 해명한다는 게
좋습니다. 유가의 초기 형태, 제자백가의 고전적, 혹은 실천적 의의를 일관된 시야에서 정연히 소명하는 대목이 일품입니다.
6강과
7강은 중국 역사를 과연 어떤 프레임에서 봐야할지, 보다 근원적인 사관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첫째 그들 중국인들이 조금
위험 수위를 넘는다 싶은, 과도한 중화 사관의 극복(우리 입장에서)과도 관계 있고, 둘째로는 그들의 오천 년 역사에서 실제
전개된 양상으로, 중근세로 넘어올수록 정통 농경 세력이 아닌 유목민족의 정복 왕조 통치 기간이 더 길어지는데다, 세계적으로 국위를
떨치고 내부 시스템 면에서도 세련된 기법을 자랑한 업적이 오히려 정복 왕조의 솜싸라는 엄연한 팩트를 어떻게 처리할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결론은 "오랑캐는 없다!"인데, 사실 이 점을 부인하면(즉 화이사관을 마냥 고집하면) 중국인들 입장에서도 자측 역사가
대단히 옹색해진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왜 그토록 포용과 관용, 융합을 (양식 있는 진영에서) 강조하는 걸까요? 함께할 때
더 강해지고, 다양한 배경을 지닌 문화적 장점을 최대한 포섭할 때 더 풍요로워짐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이 대목
강설은 읽기에 참 통쾌했습니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중국의 고전 문화에도 대대적 수정이 가해집니다. 이를 두고 저자는 "학문에서 종교로"라 요약합니다. 불교 문화 하면
대뜸 한자를 우리가 떠올리는 것도, 우리가 숭앙하는 불교는 현장 등 중국의 거두들에 의해 변용되고 수정된 동북아시아형 대승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헤겔 식의 변증법이 꼭 아니라도, 상반되는 개성의 문화 여럿이 만나면 제3의 발전 양상이 대두하기 마련이죠.
그래서 9강에서는 "도교'라는 지극히 중국적인 종교 체계에 대해 자세한 사항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대단원인
10강은 문학입니다. 다시, 초한쟁패의 매력적인 패자(覇가 아닌 敗) 항우 이야기도 나오고(당대뿐 아니라 이후 천 수백년에 걸쳐
얼마나 많은 문인, 가객들에 의해 소재로 떠올랐는지 모르죠), 당송 시문학의 찬란한 정수가 다뤄지는가 하면,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명청기를 대표하는 서민 장르 고전 기서인 <삼국연의>도 나오고, 마법천자문, 드래곤볼, 슈퍼보드 등 한일의
미디어믹스도 언급됩니다.
이
책에도 자세히 나오듯,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 불태입니다(손자병법과 손빈 병법의 차이와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습니다). 중국인과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진행하건, 보다 먼 미래에 그들과 본격 문화 투쟁을 벌이건, 자신의 좁은 틀에
갇혀 뻔한 상식만 견강부회로 우기는 식으로는 아무것도 달성 못 합니다. 한 권으로 정말 필요한 교양을 얻으면서도, 동시에 우리
자신을 쉽게 타협하지 않는 건전한 비전을 재확인하게 돕는, 매우 알찬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