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유령 - 불어판 완역 청소년 모던 클래식 4
가스통 르루 지음, 박찬규 옮김 / 구름서재(다빈치기프트)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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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칭 세계 4대 뮤지컬을 운위할 때 <오페라의 유령>은 거의 단연 첫손에 꼽힙니다. 개개인의 취향이 다양한 문명사회에서, 터무니없게도 어떤 획일적 표준을 강요하는 듯한 "3대, 4대" 타령은 정작 뮤지컬의 본고장에서는 입에도 안 올리지만, 일단 많은 이들 입으로부터 좋다고 정평이 난 작품은 챙겨 볼 필요가 있긴 하죠. 게다가, 뮤지컬 포맷의 완성도로 볼 때 <오페라의 유령>은 각 넘버들이 하나같이 명곡이기도 하며 어느 하나 흠 잡을 구석이 없는 클래식 중의 클래식입니다.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일류 배우들이 꾸며내는 무대로 꼭 감상을 해야 여한이 없을 명작임에는 누구로부터도 이론이 없습니다.

우리가 W A 모차르트의 오페라 부파 <피가로의 결혼>을 인류 전체가 기념할 만한 명작으로 기려도, 피에르 보마르셰의 희극 대본까지 일일이 고전으로 높이며 탐독하거나 칭송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모차르트의 명작이 남긴 휘광과 영향이 워낙 지대하기에, 음악의 참 가치를 온전히 평가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해당 텍스트에도 관심을 줄 뿐입니다(단, 보마르셰의 해당 작품은, 혁명 전야 점증하던 시민 계급[부르주아지]의 각성과 불만을 훌륭한 풍자 기법으로 표현했다는, 일종의 사회학적, 역사적 의의가 더불어 새겨질 만은 합니다). 음악 작품이 훌륭히 고유의 미학적 성취를 거두었다 해서, 평행 효과처럼 원작이나 영감을 준 원 미디어까지 덩달아 빼어난 고전으로 존중될 필요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애써 걱정할 필요도 없이 완성도가 떨어지는 "원작들"은 대중에게겐 전문가, 평자에게건 세월의 풍화와 심판을 받아 잊혀집니다.

그러나 가스통 르루의 이 작품은 어떨까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너무도 유명하기에, 현대인들은 해당 작품과 공연에 "원작 소설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새삼 놀라기도 합니다. 혹 추리 소설 장르에 관심 많은 분들도, 그 유명한 소년 탐정 룰르따비유(훌타빌)의 창조자이자 그 탐정의 대표 활약 작품, 나아가 밀실 트릭의 고전인 <노랑방의 비밀>의 작가로만 알고 있기가 대부분이라서, 바로 그 원작 소설의 작가가 G 르루인 줄 깨닫고는 한 번 더 놀라기도 합니다. 추리 소설 애호가라면(설령 뮤지컬 등에 담을 쌓고 사는 이라도), G 르루의 이름을 봐서라도 이 작품에 눈길을 줄 만합니다. 대개 추리소설을 즐기는 이들은 지적인 취향이 대부분이라, 장르를 불문하고 어느 작품이든 작은 동기, 연계만 생겨도 그 가치를 충분히 즐길 만큼 빠져들 만한 집중력이 있더군요.

헌데 이 작품은 그 이상입니다. G 르루의 작품이 아니라고 해도(읽어 보면 그만의 재기가 뿜어나오기에 아닐 수가 없긴 하나, 작풍이 사뭇 다르긴 해서 새삼 꺼내는 말입니다), 스케일도 크고 인간 본성의 제법 깊숙한 곳을 묘파하는 통찰도 돋보이는데다, 시대와 공간을 따지지 않고 언제나 누구에게건 어필하는 "러브 스토리"이기에, 웬만해서는 일단 펼쳐들고 끝을 보아야만 뒤커버가 간신히 덮일 겁니다. 쫄깃한 표현의 맛과 특유의 유머, 전설이나 야담류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연의 매력, 통속 소설만이 발휘하는 플롯의 흡인력과 장중한 고전의 덕목을 함께 갖추었을 뿐 아니라, 역자 후기에서도 지적되듯 미스테리물의 은근한 잔향도 함께 풍기는 등, 타고난 이야기꾼만이 빚을 수 있는 아름다움을 확고히 장착한 명작임이 분명합니다.

고전이라고 해도, 아니 고전이기 때문에, 역자의 주가 충분치 못하면 그 시대상을 이해할 수 없고, 맥락도 분명히 잡아내기가 힘듭니다. 이 책 p156을 보면 네 개(씩이나)의 각주가 특히 배치되었는데, 제가 전에 다른 번역본들을 읽곤 했을 때는 못 보았던 설명이, 이 구름서재판(박찬규 譯)에는 여럿 발견되어서 읽기가 편하더군요. 사정을 알고 지식에 밝은 독자에게도 주의 환기 차원에서 이런 각주는 필요합니다.

"쿠르티유 언덕길"에 대한 설명은, 이곳이 포도농원과 가까운 구 시가지(파리 역시 여러 번의 역사적 격변을 겪은 큰 도시라서, 문학 작품들에 등장하는 도심, 부심의 지리적 상황이 시대에 따라 다채롭습니다)라는 점을 알아야, 무도회를 앞둔 크리스틴과 라울의 심경을 독자들이 온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저 비련, 혹은 치정 스토리로 일관하느냐, 아니면 (같은 소재를 놓고서도) 세심하게 문학적 장치를 요소마다 배치하여 미학적 효과를 다층적, 입체적으로 꾀했느냐에 따라 통속물과 고전이 갈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줄거리만 (그것도 간신히, 힘들게) 따라갈 뿐, 작가의 이런 치밀한 의도를 못 잡아내고 다흘린다면 고전을 읽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고전은 이를 독자가 읽는 시기와 정서적 환경에 따라 그 느낌이 천차만별로 다가옵니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고, 작가가 그만큼 완결된 세계 하나를 지면에 정성껏 꾸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당대에 큰 화제가 되었다 해도, 통속물이라면 뻔한 줄거리에 뻔한 상업적 노림수로 이야기를 지어내고 공략 포인트를 지뢰처럼 깔아 놓기 때문에, 두 번만 읽어도 바로 질려버립니다. 허나 이 작품처럼, 천품이 뛰어난 재능 있는 작가가 공을 들여 구축한 픽션은, 마치 진지한 추상화가들의 명작처럼, 감상할 때마다 숨어 있던(관찰자가 간과했던) 다른 진귀한 면모를 노출합니다. 당시 가스통 르루의 상황이, 그만의 미학적 소명을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뭔가 당대인의 심금을 짠하게 울릴 로맨스 명작을 하나 내어놓아야만 했었기에(비슷한 언급이 역자 후기에도 나오더군요), 그 나름 썩 내키지만은 않았던 작업을 하면서도 자기 스타일과 고집, 원칙은 그대로 담아내었던 거죠.

이미 읽은 이들은 알겠지만, 이 소설은 좀 별나다 싶게 시점도 자주 변화하고, 내러티브 포맷도 갑자기 진술 조서투가 그대로 나오는 등 현대인들에게는 낯선, 아니, 이 시대 작가가 왜 이런 형식을 내세우는 건지 같은, 지레짐작했던 선입견, 스키마와 어긋나는 데서 유래하는 생경함 등이 느껴질 겁니다. 이게 그만의 무슨 실험 정신을 내세운 흔적은 아닙니다(그런 류의 진지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작가였죠). 그보다는, 자신이 진정으로 몰입했던 추리소설의 아련한 세팅 연장, 혹은 "여튼 나는 이 소설의 창작에 충분히 몰입하고 열정도 불어넣는다" 같은 시그니처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형식상의 배리에이션은, 특히 추리 팬들의 마음을 끌 만한 기교(?)이겠습니다.

이미 다른 판본으로 읽거나 작품의 개성, 줄거리, 좀 특이한 설정 등에 대해 전해 들은 독자들은, 이 소설 후반에 느닷 페르시아인과 해당 지역의 사정이 등장한다는 점도 알고 있을 겁니다. 이 피처가 눈에 띄는 이유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원안(그리고 세계 각처에서 현재 공연되는 대부분의 포맷)에는 이런 세팅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문인, 정치인, 귀족들은 여행차 페르시아를 심심치 않게 다녀왔고(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도 말이죠), 가뜩이나 오리엔탈리즘(에드워드 사이드 식의 의미나 담론이 아닌)에 열광이던 서구인들에게 페르시아만의 지방색이 각별히 어필했던 게 사실입니다(이뿐 아니라 문호를 개방하고 갓 국세를 떨쳐 나가던 멀리 극동의 일본에 대해서도).

이 무렵 페르시아는 카자르 왕조의 말기적 병폐가 극에 달하던 실정인데, 독일은 이른바 3B 정책을 내세워 당시 인기 있던 오리엔트 특급으로 활성화한 철도 교통을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바그다드까지 연장하고, 이웃 나라인 테헤란에까지 자국의 영향력을 넓히려 책동했으며, 독일과 전통적 라이벌 관계이자 이때로부터 불과 수십 년 전 패전의 쓰라림까지 맛 본 프랑스 역시 이곳에서 팔짱만 끼고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문인 특유의 순진함으로, 영국의 위압적인 행보, 독일의 계산적인 접근과는 달리, 자국의 외교 행보에는 뭔가 따스한 온기가 담겨 있다고 편하게 착각할 수 있었겠죠. G 르루의 페르시아 관련 미장센에는 그런 특유의 나이브한 오리엔탈리즘이 분명히 풍깁니다.

역자 박찬규님의 문장이 그래서인지, 이 번역본은 전에 읽었던 판본들과 달리 더 달달하고 더 애잔하게, 이뤄질 수 없었던 딱한 사랑의 비극미가 독자의 심금을 살뜰하게 건드린 듯한 느낌입니다. 혹은 눈도 안 내리면서 스산하기만 한 겨울 날씨 탓에 기분이 그리 흘렀을 뿐일까요? 제 개인적 기억으로는 매번 이 고전의 독서가 우연히도 겨울에 이뤄졌던 터라, 어디까지나 텍스트 자체의 힘(그리고 예쁜 표지 디자인)이지, 그저 착각만은 아닌 듯하군요. 행복한 독서였습니다(추운 겨울에는 남들의 비련이 내 욕구를 달래는 특효약이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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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창조자의 율법 미래의 문학 8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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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계를 관찰하면 그 기기묘묘한 다채로움에 압도되고 경이로움을 느끼는 게 당연합니다. 먹을 수 없는(=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실제 효용을 제공하지 못하는) 꽃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이를 놓고 한없는 상념에 빠져드는 것도 인간만의 능력입니다. 기실 우리가 "다양함" 그 자체에 높은 평가를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여태 힘들게 걸어온 진화의 길 말고도 저런 다양한 대안(alternative), 경우의 수가 더 존재했구나" 같은 놀라움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 진화의 경로 혹은 결과(아직도 진행 중이니 결과를 논하기란 참으로 경솔합니다만)에서 가장 위대한 지점이라면, 우리의 의식 중 무엇이 무지몽매이며 무엇이 계몽됨, 이성적 요소인지 분명히 분별하기 시작한 바로 그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현대 SF의 "고전" 중 하나로 이제는 넉넉히 자리매김될 만한 제임스 P 호건의 이 작품은, 엄청나게 큰 스케일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삼고는 있습니다. 헌데 내용을 뜯어 보면, 의도와 시선은 철저히 역사와 사회 풍자 쪽을 향합니다. 마치 (그의) 까마득한 선배인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등이, 우주적 세팅을 전면에 내세운 후 속뜻으로는 (그 역시 원대한 스케일이자 뜻깊은 시도이긴 하지만) 인간 본성의 사악함과 헛된 탐욕이 저지른 과거의 온갖 실책, 현재까지도 반복되는 정치인들의 음모와 헛발질에 대한 풍자를 품었던 경우와 비슷하게 말입니다. 그래서 이 장편은, SF로서의 재미도 넉넉히 선사하겠지만, 1980년대 서구 사회를 휩쓴 유행과 풍조를 혹시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더 유쾌한 다층서사, 혹은 패러디로 독해되는 재미도 있겠습니다.

역자 후기 중에도 언급되듯, 이 작품이 우스꽝스럽게 전면에 내세운 희대의 사기꾼인 카를 잠벤도르프는, 작품 발표 시기 즈음에 큰 유명세를 타며 지구 곳곳을 누빈 유리 겔라 같은 쇼맨을 다분히 연상케 합니다. 개인 유리 겔라를 신랄히 비꼬고 조롱하는 건 큰 의의가 없을 수 있고(당장 우리 시대만 돌아보더라도, 준엄히 비판, 심지어 단죄받아야 할 사이비들이 겉으로만 그럴싸한 명분을 걸고 [사실은 그 명분을 무엄하게도 모독하며] 얼마든지 설치고 다닙니다), 이런 풍자의 진짜 의도는 서푼짜리 사기꾼에게 바보 같이 속고 다니며 소중한 자원(국가 예산의 일부일 수도 있고, 다중의 열정과 지지 같은 무형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을 낭비하는, 혹은 낭비되게 돕는, 현대의 생각 없는 소비 대중이라고 봐야 옳겠습니다.

- 아니, 물론 올바른 목적을 위해 프로젝트가 마련된 줄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왜 잠벤도르프 같은 작자에게 그 정도 대우를 하며 편법을 써야 하나요? 그자가 사기꾼인 줄은 여기 계신 누구나 다 알지 않습니까? 왜 대중에게, 올바른 교육과 계도를 실시하여 결국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더 정당한 길을 걷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화성을 다녀오는 기적을 누리는 세대입니다.
- 그 방법이 가장 빠르고 확실하기 때문이죠. 어리석은 열광과 골빈 신드롬만큼 우리를 목적지에 신속히 데려다 줄 범선, 증기선은 없으니까요.

저자 호건은 이 외에도 갖가지 신랄한 반어와 유비를 통해, 과장된 선전과 싸구려 마술쇼를 통해 대중의 헛된 환상에 아부하며 부와 명예, 권력을 챙기는 일부 개인과 집단을 신랄히 비꼬며, 이런 자들을 먹여살리는 대중과 미디어의 천박한 행태에 대해서도 (웃어야 할지 뜨금해야 할지 모를 만큼) 적실한 알레고리를 현란히(장르작가로서의 상상력 못지 않게 그는 표현력이 참 빼어납니다. 반면 하드 SF 작가 중에서는 이런 자질이 다소 아쉬운 이들도 많죠) 구사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특히나, 새뮤얼 딜레이니나 앨프리드 베스터보다는 마이클 크라이튼, 혹은 아예 윌리엄 골드먼(켁)에 더 가까워지는 분위기처럼 (독자인 제게는) 다가왔습니다.

소설은 두 개의 별개 시공간을 무대로 넘나들며 전개됩니다. 하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물질문명의 기술적 진보는 눈부시나 의식 수준은 현재, 아니 1980년에 머무르는 듯한) 인간들이 바글거리는 지구이며, 다른 하나는 탈로이드들의 세계입니다. 탈로이드들은 자신의 행성을 "로비아(Robia)"라고 부르며(여기는 우리가 아는, 토성의 위성 타이탄입니다), 스스로를 가리키는 이름은 "로비잉(책에서는 "로빙[Robeing]"으로 표기)입니다. 엄숙한 표정을 짓고 거짓으로 구축한 권위를 행사하는 종교 엘리트들이 걸치는 robe를 떠올리게도 되고, 혹은 robot+human being의 합성어일 수도 있습니다.

하늘을 바로 바라볼 수 없는 대기 상태 때문에 그들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근거 없는 맹신을 키워 왔고, 이런 맹신을 악용하여 종교적 계율로 대중을 통제, 통치하는 소수 집단이 있습니다. 누구나 알 수 있듯 암흑시대 유럽의 교회를 비꼰 설정이겠고요. 그들이 사는 세계가 구체임을 증명하려다 정죄될 뻔한 로프베이엘 같은 캐릭터는 갈릴레오의 아바타이겠습니다.

"크기는 유한하지만 경계 또한 없고, 중심이 따로 없지만 어느 곳이나 중심인 곳". 마치 기독교 구약에 나오는 알쏭달쏭한 수수께끼처럼 들리지만(정말 그렇게 들린다면 당신은 물리학 소양이 부족한 겁니다), 이는 기실 뉴튼과 아인슈타인이 일찌감치 규명한 우주의 구조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막대한 발품을 팔아 완전한 지도 제작의 소명을 이루려던 로프베이엘은 결국 자신들이 발 디디고 선 세상이 구체(globe)라는 결론에 도달하여, 동시대인을 설복하려 들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이단자에의 차디찬 낙인뿐이었습니다.

미개한 맹신이 지배하는 세상을 처음 "발견"한 잠벤도르프들은, 이들의 무지몽매한 행태가 자신들에게 어떤 가능성을 열어줄지 직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극소수 레니게이드(어느 사회에나 이런 존재가 있기 마련이죠)와 서로 언어 소통이 가능해지고부터는, 의식과 지성과 의지, 감정을 지닌(설령, 신체 구조나 진화 과정은 별개였을망정) 존재들 특유의 공감으로 인해, 어떤 미래가 모두에게 당위일지에 대해 더 복잡한 생각을 품게 되지요.

왜 잠벤도르프를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설정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작품 중에 스스로를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동일시했다는 설명이 나오더군요(프로이트가 알았다면 크게 화를 냈을 법합니다. 가뜩이나 화 잘 내는 분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약간 분하기도 한 게, 제임스 P 호건이 직접 말을 하기 전에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어야 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고등 사기꾼은 심리학의 대가라야 한다는 그의 소신(일 뿐 아니라 등장인물들 모두. 나아가 우리 독자들의 컨센서스)는 타당하겠지만... ㅎㅎ 소설 중에서 간간히 언급하는 "집단 오류의 어리석음"은, 근래 큰 발전을 본 "행동경제학"의 여러 결론과 곧 못 통할 바 없습니다. 소설 중에 행태(behavioral)라는 말이 세 번 정도 등장하는데, 확실히 빼어난 픽션은 이후 지성사의 발전 전반에 영감을 주는 게 맞는 듯합니다.

p569 역자 후기에 보면 ".. 하드 SF를 좋아하는 엄격한 독자에게는 ( 정작 본 줄거리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거창하게 마련된 이런 프롤로그가) 낭비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고전"에 대해서는, 그간 말로만 들었지 원어로도 중역본으로도 접해 본 적 없었는데, 그 유명하다는 프롤로그를 읽고 본문 20여 페이지까지 읽고 나서, 저도 정확히 저런 느낌이었더랬습니다. 근데 마련된 서두가 너무 거창하면, 어지간한 역량의 작가로서는 이를 감당할 만한 대작(필연적으로 세계 문학사를 바꿔 놓을 만한 대작이라야 합니다)을 짓기 벅찰 겁니다(즉, 이 정도 프롤로그를 "낭비"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 줄 픽션 우주의 건설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뜻). 다 읽고 나서 오히려 저는, 프롤로그(어차피 제임스 P 호건만의 독창적 상상의 산물도 아니지 않습니까?)의 무게 때문에 본 내용의 가치가 괜히 가려진 면도 없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소속 장르가 무엇이건, 풍자와 우화는 언제나 독자를 유쾌하게 하며, 문제 의식은 항상 우리가 속해 있는 체제와 사회, 혹은 "우리 자신"을 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유에서 이 작품은 "훌륭한 고전" 자격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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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경제 시대가 온다 - 250년간 세계를 뒤흔들 대격변이 시작되었다!
피터 레이시.제이콥 뤼비스트 지음, 최경남 옮김 / 전략시티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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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에서 요람으로"

무슨 뜻일까요? 18세기 산업혁명이 인류에게 생산과 경제 생활의 새로운 장을 열어젖힌 이래, 굴뚝에서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쉴새없이 돌아가는 공장 설비 같은 걸 두고, 우리는 현재 우리가 누리는 풍요의 상징적 풍광처럼 여겨 왔습니다. 풍요와 윤택를 떠받치는 두 축은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아껴가며 열심히 벌어서, 기업이 대량으로 쏟아내는 상품을 부지런히 소비해 줘야 합니다.

매체에서 부지런히 광고해 대는 온갖 유혹에 그닥 끌리지 않는다면(당신의 수요곡선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마도 이 화려하고 매혹적인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혹 부적응자로 살고 있지 않은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아니, 타인의 일자리 창출과 고용 증진에 조금도 기여 못 하는 "소비 무능력자"라면, 당신은 아예 죄책감을 느껴야 마땅합니다. 이 탐욕적이고 착취적인 경제 구조는 역시 쉴새없이 당신에게 이런 메시지를 주입하고, 당신더러 매 순간 이런 세뇌로 거듭나는 "선형경제"형 인간이길 요구합니다.

한편으로 이런 소비 충동에 자극된 대중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기업은 역시 중단없는 생산을 완수해야 합니다. 돌아가지 않는 공장은 채권자와 투자자, 주주, 나아가 사회와 국가에 죄를 짓는 시설입니다. 시장에서 요구하는 상품은 무조건 만들어야 하며, 자원을 얼마나 낭비하든, 끊임없이 신상을 갈구하는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멀쩡한 집도 헐어내고, 싱싱히 자라는 나무도 마구 벌채할 뿐입니다.

웬만한 소국 몇 단위를 합친 분량의 해양을 오염시켜 생태계 일정 구역을 절멸시킬 위험이 따르더라도, 해저건 대륙붕에서건 기름을 파 내어 연료로 원료로 끊임없이 조달해야 합니다. 많이 쓰고 많이 벌 각오로 눈에 핏발이 벌겋게 서야 하며, 혹 자본이 충분치 못하면 어디서 빌려와서라도 물건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레버리징이란, 유망한 사업에 잘만 활용되면 채권자나 경영자 본인이나 돈방석에 앉게 해 주는 참으로 융통성 있는 기법이기 때문이죠.

이런 선형경제의 구조는 다른 말로 "차입 경영"과 같습니다. 현실 경제에서 무모한 사업을 벌여 놓고 빌린 돈을 제대로 갚지 않으면 당장 서슬 퍼런 채권자들이 몰려와 문 앞에 진을 칩니다. 허나 약탈적 선형경제가 마구 끌어다 쓰는 자원은, 사업이 효율적으로 이뤄지건 그렇지 않건, 합리적인 계획 하에 투입이 되건 아니건 간에, 누구 독촉할 채권자가 없죠. 선형 경제 시스템은 어디서 이런 무분별한 자원을 빌려다 쓰면서 함부로 낭비까지 저지르는 걸까요? 우선 우리들의 후손입니다. 다음으로, 말 없고 불평 없고 온화한 어머니 지구입니다. 채권자가 독촉을 않으니 우리들은 일단 빌려다 쓰고 봅니다. 유망한 사업이라도 무분별한 차입은 곤란한데, 그나마 자원이 알뜰히 투입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당대 아니면 멀지 않은 후대에 파산이 확실시됩니다. 이런 추세, 지금 바로 막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경제를 떠받쳐온 구조는, 그 싸이클을 매우 빨리, 또 상당한 광폭으로 회전시키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무분별하게 요람이 생성되어 감당 못 할 생산물이 세상에 나오는 것도 문제였지만, 쓸모가 다한(때로는, 채 다하기도 전인) 물건들이 하루빨리 신상에 자리를 내어 주기 위해 거대한 무덤을 점유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공간은 유한한데 무분별하게 생산된 온갖 욕망의 대상물인 각종 상품의 찌꺼기, 폐기물들이 여기저기서 내 무덤이라며 몸을 누이니, 이제는 새 요람을 어디서 마련할지도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약탈 경제의 필연적 귀결점은 엄청난 폐기물의 무덤들입니다. 상품들은 물론, 이를 소비하는 우리 인간들까지, 지구상에 발 뻗고 자리할 공간이 없으며, 생산과 성장은커녕 생존의 여지까지 위협 받습니다.

저자들은 이런 선형경제, 낭비경제, 약탈경제의 대안으로, 무한한 업사이클링이 이뤄지는 "순환 경제 시스템"을 제시합니다. 이런 순환 경제는 사실 아주 예전부터 환경론자들, "지속 가능 성장론자"들로부터 지지되었고, 이 책의 저자들이 컨설팅 그룹 액센츄어 소속이며, 세계 경제 포럼(WEF) 측과 밀접한 유대를 맺는 사실로부터도 알 수 있듯, 일부 과격한 몽상가들로부터만 지지되는 입장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세계 곳곳의 지도층 인사들로부터 고안, 창안되고, 강력한 후원을 받으며 주류적 대안으로 자리매김하는 아젠다입니다.

또한 순환경제 아젠다는, 최근의 기술적 발전, 메가트렌드로부터도 추진의 큰 모멘텀을 받기도 했습니다. 바로 사물인터넷(IoT)입니다. 어디에 있는 무슨 기기건 망을 통해 사람들과 연결되며, 이로 인해 소통의 한계 비용이 0에 가까워짐에 따라, 폐기물에서 부(wealth)를 만드는 기제를 꿈이 아닌 현실 속에서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과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폐기물과 자원 고갈 때문에 성장과 생존이 한계에 도달한 지금, 생각지도 못한 부문에서 이뤄진 혁신이 이런 기발한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으니, 긍정적인 시야와 원칙(편법 아닌)을 지향하는 문제해결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절감합니다.

4차 산업혁명의 메가모멘텀 중 하나는 우리가 다 잘 알듯 공유경제입니다.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유효하게 쓸 뿐 아니라, 개인 레벨에서도 최소 비용으로 최대 만족을 얻게 도우니, 경제학의 기본 과제와 이념에 상충되지도 않으면서, 근본 목적에 대한 더 영리하고 건강한 성취까지 가능하게 만듭니다. 이 공유경제와 순환경제는 서로 별개의 지점과 동기에서 출발했습니다만, 지속 가능한 성장과 쾌적한 환경, 후손에 부끄럽지 않은 윤리적 삶, 이 모두를 동시에 달성하는 데 이만큼 환상적인 궁합, 팀웍, 시너지의 예를 다른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목표와 이상이라도 현실에 옮겨지거나 검증이 채 마쳐지지 않은 상태라면, 우리는 남들보다 앞선 동참을 주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이미 구체적인 실천 모델을 마련하여, 세계 굴지의 다국적 기업, 한 나라의 거시경제를 선도하는 대기업들, 건전한 재무구조와 알짜 수익을 산출하는 중견 기업들, 장래가 유망한 스타트업 등 다양한 기업군과 협조하여 원대한 프로젝트를 이끌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겨우 파릇파릇한 제언이나 벅찬 원칙의 천명이 아니라, 반대로 그간의 분투와 성과를 정연히 요약한 실무 백서, 보고서에 가깝습니다. "이만큼이나 현실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명백한 대세로 자리매김하는 중이니, 늦게 참여하면 그만큼 손해일 뿐이다." 어떻습니까? 남들이 따스하고 쾌적한 요람에서 윤리적 생산 활동에 몰두할 때, 본인만 꺼림칙한 "폐기물의 무덤"에서 남들 눈총 받아가며, 남는 것도 없고 양심에도 켕기는 재래식 순환생산만 고집한다면, 그건 참 처량하고 낯뜨겁고 어리석기까지 한 선택이겠습니다.

순환경제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건 아직은 뭔가 큰 마음을 먹고 내리는 결단 같은 게 필요한 단계입니다. 그러나 인류 경제사가 걸어온 지난 족적을 한번 되돌아 봅시다. 장인 수공업 경제에서 공장 생산 시스템으로, 속절없이 사람 손만 많이 가는데다 위험도 크게 따르는 방식에서 자동화로 다시 이행할 때에도, 초기 투자 비용은 많이 들고 경영상 이질감의 극복도 쉽지 않은 과제였을 겁니다. 허나 이 역시 피할 수 없는 시대의 대세라 여겼기에, 많은 저항을 감수해 가며 썩 내키지만은 않는 발걸음을 디뎌 온 겁니다. 이 발걸음들이 그간 부정적인 발자국(footprint)만 잔뜩 남겼다면, 이제는 윤리와 산업적 성공을 한 방향으로 일치시키며(그동안은, 절대 화해가 어려운, 영원한 상극이자 trade-off 관계였습니다), 여태 망쳐 놓은 생태 환경까지 복원하는, 역사상 유례가 없던 새로운 도전, 아니 축복의 전조에 직면하는 중입니다.

환경의 파괴와 온갖 혐오스러운 폐기물의 잔해는, 우리보다 앞선 세대가 우리에게 남긴 나쁜 유산이며, 우리는 지금 성장의 한계에 도달했기에, 이대로라면 후손들에게 그나마 긍정적인 재산은 한 푼도 못 남긴 채 재앙만을 떠넘길 수도 있습니다. 이런 파국만은 막아야 하며, 우리가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은 더 미룰 수 없는 "바로 지금(RIGHT NOW)"입니다. 그간의 나쁜 관행과 폐습에서 벗어날 각오만 품으면, 이미 뛰어난 인재들이 현실에서 유효성 검증까지 마친(아니, 유효성 개념의 재정의까지 이룬) 비즈니스 모델로 과감히 전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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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핵심 강의 - 최소한의 중국 인문학
안계환 지음 / 나무발전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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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참으로 광대 무변한 국가입니다. 영토가 넓다 보니 각각의 지역이 지닌 사연도 무궁무진하고, 기후나 풍토도 다양합니다. 이렇다 보니 한 말로 "중국, 중국인들"을 상대한다고는 하나, 어느 지역에서 어떤 처지에 놓인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전략과 태도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사고는 글로벌하게 하되 행동은 로컬하게 하라는 말이 있죠. 개별 상황에서 타겟의 취향과 의도를 정확히 짚지 못하면 아무리 거창한 목표를 잡았어도 원안대로 성취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어느 중국인을 만나도, 또 어느 중국 회사와 상대해도, 무조건 통하고 보는 화제가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자랑하는 오천 년 역사가 이들 후손들에게 남겨준 "역사, 인문"이라는 유산입니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잘 구사해도 정작 컨텐츠, 토픽이 빈약하면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역사와 사상, 철학, 인물, 문학, 예술에 대한 화제가 풍성하면, 저쪽에서 사람을 보는 눈길과 태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우리야 우리 조상들의 역사, 견훤, 왕건, 김춘추, 계백, 이성계, 정몽주 등에 대해, 외국 비즈니스 파트너가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가졌어도 그저 좀 신기하다는 정도의 반응에 그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들 중국인들은 실로 과거의 자취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릅니다(그러니 우리 기준대로 지레짐작하는 건 금물이고요).


동시에, 중화권의 문화 유산에는 우리 조상들이 이바지한 비중도 적지 않은데다, 고려, 조선을 거치며 중국 문화의 정수는 선현들이 대대로 인격 도야, 교양과 학식의 필수 학습 목표로 삼아 왔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중국 문화, 역사, 인문에 대한 핵심 사항"의 이해는 1) 중국인들을 사무 관계로 상대해야 하는 직장인들에게 필수 정보이자 최소한의 에티켓이며, 2) 바로 우리들의 조상들께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소양의 축적 노력입니다.

시간과 정력을 아껴 다양한 목표에 배분해야 하는 우리 현대인들은,  한도 끝도 없는 중국 고전 전거를 모조리 찾아 읽어 내고 내면화할 수는 없습니다(가능하다면 그게 바람직하겠지만요). 고맙게도 단 한 권으로 다이제스트된, 내용의 신뢰성과 가독성을 고루 갖춘 안내서, 입문서, 대중 교양서가 있다면 좋을 텐데, 한 권으로 필수, 핵심 사항을 다 배우려면 오히려 그런 놀라운 책을 찾기가 더 힘듭니다. 고명하신 학자, 교수님들은 많아도 신통한 입시 족집게 선생은 오히려 찾기 드문 것과 같은 이유이겠습니다. 후자가 전자보다 더 가치 높은 존재란 뜻이 결코 아닙니다. 상황이 급하면 지나치게 원칙을 따지기보다 나한테 최적화한 답을 찾는 지혜, 요령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중국 고전의 심오한 뜻을 정석대로 낱낱이 배우다가는, (행여, 생의 종언 전에 끝낼 수 있기나 하다면) 이미 사회 활동 적령기를 한참 지난 노년에 달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죠.


이 책은 일단 박력 있게 잘 읽힙니다. 이런 박력 있고 내용 알찬 책을 읽으면서 저는 예전 생각이 좀 나더군요. 대략 십여 년 전(중국이 본격 세계 무대에서 경제적 굴기를 이루면서)부터, 중국의 고전이나 역사를 요약해서 독자에게 소개하는 책은 매우 많은 종류가 출판되었더랬습니다. 그 상당수는 내용이 너무나 빈약하고, 어떤 것은 부정확한 정보를 담거나, 편벽된 가치관에 휩쓸리거나 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녔던 기억입니다. 어떤 건 (분량의 한계를 고려할 때) 깊이도 있고 관점도 표준적이며 확장성도 갖췄지만, 엉뚱하게도 가독성이 떨어지는 게 있었습니다. 배경 지식을 상당히 갖추고 독서 훈련이 탄탄히 되어 있는 독자라면 눈빛을 반짝이며 환영하겠지만, 그런 책이 주로 초심자를 타겟으로 삼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안타깝고도 역설적인 면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공력 좀 되는 분들에겐 "아, 이 책은 (초심자가 아니라) 뭘 좀 알고 나서, 일정 경지에 오르고 나서 읽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같은 느낌이 안 들 수가 없었죠.

간만에 그런 아쉬움, 종래의 미진한 수요를 모두 긁어 주는 책이 나와서 저는 참 반가웠습니다. 즉, 1) 초심자가 읽어도 재미있고, 그 초심자가 더 심화 학습이 필요할 때 좋은 발판이 되어 줄 수 있으며, 2) 중급, 고급 독자가 읽어도 저자와 치열한 소통을 하며 뭔가 배우고 생각할 거리가 마련되는, 그래서 (이미 그런 사람은 잘 하고 있겠지만) 중국 측 비즈니스 파트너와 대화를 나눠도, 종래 자기 관점과 다르거나, 보다 발전된 경지의 화제 전개가 새로 길을 여는 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꼭 저자의 관점을 따라해서가 아니라(물론 따라해도 되겠더라구요 ㅎ), 건강하고 박식하며 탄탄한 논리를 갖춘 저자의 책을 읽으면, 마치 벡터의 합성처럼 새 방향으로의 개안이 은근 자극됩니다. 제게는 이 책이 딱 그런 책이었습니다. 대화가 더 다채로워지고 상대의 진지한 몰입과 동의를 끌어낼 수 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책은 모두 10강으로 이뤄졌습니다. 역사와 문학과 인문을 한 권에 담는 책들이 흔히 시대별 편제를 취하는데, 대개 그렇게 하면 독자가 좀 지루해집니다. 그런 편제 자체에야 문제가 없다해도, 두어 번 실패한 초심자가 (설령 관점이 내용이 전혀 다르다 해도) 다시 같은 형식을 꾸린 책을 만나면 구미가 덜 당기거나 지레 의욕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의 형식은 참신하고, "중국 핵심 교양"을 전달하려는 목적에 매우 잘 부합하는 구조입니다. 제 개인적 생각에 그칠지 모르겠으나, 한 권으로 핵심을 전달하려면 애초에 다들 이런 목차, 배열, 편제라야 하지 않는가 하는 각성에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앞에서 책이 박력 있게 잘 읽힌다고 했습니다. 이는 저자께서, 주제에 대해 확실히 파악하고 깊은 이해를 갖춘(또한, 오랜 세월을 두고 생각을 숙성시킨) 분이라 이런 시원시원한 서술의 흐름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보를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마련하고 줄거리를 잇다 보면, 정확성에 대한 신경이 쓰이기 때문에 말이 유창해지지가 않습니다. 그렇다고 유창한 말솜씨와 흡인력이 전부는 아닐텐데, 이 책은 (저자의 관점은 일단 차치하고) 전달하는 내용의 정확성 면에서 거의 오류가 없습니다. 내용 오류나 오식(誤植)을 책에서 찾아내는 게 독자로서 오랜 습관 중 하나인데, 이 책은 아주 사소한 몇 군데가 발견되었을 뿐 거의 완벽한 형식 정합성을 보입니다. 초심자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공부도 힘든 판에, 텍스트까지 울퉁불퉁 좌충우돌이라면 마음이 얼마나 불안해지겠습니까.

팩트만 건조하게 전달하면 역시 읽는 맛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마치 유식한 고을 훈장님이 맛깔나게 풀어주는 옛날 이야기 같이 흥겹게 읽힙니다. 본문은 합쇼체, 심화 내용을 담은 박스 아티클은 격식 갖춘 예사평서형 어미를 써서 단조로움을 피합니다. 초심자에게 어려울 수 있는 용어 설명은 책 후주로 돌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중국행 비행기, 이동하는 차량 안 등에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형식으로 여겨집니다.

1강은 중국 신화에 대한 설명입니다. 중국 인문 대중 요약서는 이 신화 파트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는데, 애초에 중국인들부터가 객관적 관념론 체계로 사상, 도덕, 종교, 관습을 통일하면서 이 분야에 대한 관심과 존중을 상대적으로는 소홀히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화 모티브들도 유교 경전 맥락 안에서 인용되면 사뭇 비중이 달라지는데, 책은 그런 전통을 충실히 따랐을 뿐 아니라, 근래 정권에서 열심히 정성을 기울이는 하은주 공정 이슈가 또 있기에, 각별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신화는 나이 불문 학식 불문 누구에게나 재미있지 않습니까?

중국인과 대화하는데 한국인이 마냥 자기 관점만 내세울 수는 없겠으므로, 이 책은 대개 그들의 표준적인 인식을 반영하지만, 제가 읽어 보니 역시 한국인으로서 피할 수 없는 주체적 인식이 충만함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미언대의(微言大義)라고나 할까요?ㅎㅎ 물론 문언, 워딩으로만 봐서는 잘 안 드러나므로 마음 놓고 독해 후 (중국인들 앞에서) 인용하셔도 됩니다. (단, 저자 서문만은 한국인으로서의 비분강개한 의식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2강은 춘추전국기에 대한 설명인데, 역사의 큰 줄기(보통 다른 책들은 이 얘기만 하고 말죠)도 짚어 주지만,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제도사 분석의 성격이 더 짙었습니다. 이야기만 따라가면 왜 이런 사건이 벌어져야 하는지 납득을 못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이 책은 제후와 경-대부 등의 신분 위계 구조를 친절히 먼저 풀어 줍니다. 이로써 "중국형 봉건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인식 틀을 먼저 마련해 주는 겁니다. 박스 안에 따로 편집된 "중국사 줌인(다른 서적 인용으로 대신하기도 합니다)"이 어느 장에서건 유익함은 다언을 불요합니다. 역사를 쉽게 들려 주며, 어느 상화에서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사자성어도 맥락과 함께 제시되니, 초심자들이 머리 속에 오래 남을 수 있겠습니다.

3강은 중국 고전 문화의 토대가 놓인 중요한 시기, 한 제국의 성립 과정을 다룹니다.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높은 화제가 삼국시대, 초한 쟁패기이기도 하고, 이 사정은 중국인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자가 새기고 정리한 한 고제 유방의 처세 핵심, 승리의 비결이 꽤 설득력이 높으므로, 처세와 실용의 관점에서도 한 번은 읽고 곱씹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 앞에는 진시황의 업적과 좌절에 대한 강설이 있고, 챕터 말미에는 "한중일 장기의 차이"라는 무지 흥미로운 토픽이 독자를 반가이 맞습니다.

4강과 5강은 중국 고전 인문의 발원과 심화로 각각 규정되는 "춘추", "전국" 시대에 대한 설명입니다. 보통 양 시대를 뭉뚱그려 설명하거나, 판에 박힌 정치사 관련 서술로만 채워지곤 했는데, 이 책은 두 시대의 차별되는 의의를 다방면에서 해명한다는 게 좋습니다. 유가의 초기 형태, 제자백가의 고전적, 혹은 실천적 의의를 일관된 시야에서 정연히 소명하는 대목이 일품입니다.

6강과 7강은 중국 역사를 과연 어떤 프레임에서 봐야할지, 보다 근원적인 사관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첫째 그들 중국인들이 조금 위험 수위를 넘는다 싶은, 과도한 중화 사관의 극복(우리 입장에서)과도 관계 있고, 둘째로는 그들의 오천 년 역사에서 실제 전개된 양상으로, 중근세로 넘어올수록 정통 농경 세력이 아닌 유목민족의 정복 왕조 통치 기간이 더 길어지는데다, 세계적으로 국위를 떨치고 내부 시스템 면에서도 세련된 기법을 자랑한 업적이 오히려 정복 왕조의 솜싸라는 엄연한 팩트를 어떻게 처리할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결론은 "오랑캐는 없다!"인데, 사실 이 점을 부인하면(즉 화이사관을 마냥 고집하면) 중국인들 입장에서도 자측 역사가 대단히 옹색해진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왜 그토록 포용과 관용, 융합을 (양식 있는 진영에서) 강조하는 걸까요? 함께할 때 더 강해지고, 다양한 배경을 지닌 문화적 장점을 최대한 포섭할 때 더 풍요로워짐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이 대목 강설은 읽기에 참 통쾌했습니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중국의 고전 문화에도 대대적 수정이 가해집니다. 이를 두고 저자는 "학문에서 종교로"라 요약합니다. 불교 문화 하면 대뜸 한자를 우리가 떠올리는 것도, 우리가 숭앙하는 불교는 현장 등 중국의 거두들에 의해 변용되고 수정된 동북아시아형 대승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헤겔 식의 변증법이 꼭 아니라도, 상반되는 개성의 문화 여럿이 만나면 제3의 발전 양상이 대두하기 마련이죠. 그래서 9강에서는 "도교'라는 지극히 중국적인 종교 체계에 대해 자세한 사항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대단원인 10강은 문학입니다. 다시, 초한쟁패의 매력적인 패자(覇가 아닌 敗) 항우 이야기도 나오고(당대뿐 아니라 이후 천 수백년에 걸쳐 얼마나 많은 문인, 가객들에 의해 소재로 떠올랐는지 모르죠), 당송 시문학의 찬란한 정수가 다뤄지는가 하면,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명청기를 대표하는 서민 장르 고전 기서인 <삼국연의>도 나오고, 마법천자문, 드래곤볼, 슈퍼보드 등 한일의 미디어믹스도 언급됩니다.


이 책에도 자세히 나오듯,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 불태입니다(손자병법과 손빈 병법의 차이와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습니다). 중국인과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진행하건, 보다 먼 미래에 그들과 본격 문화 투쟁을 벌이건, 자신의 좁은 틀에 갇혀 뻔한 상식만 견강부회로 우기는 식으로는 아무것도 달성 못 합니다. 한 권으로 정말 필요한 교양을 얻으면서도, 동시에 우리 자신을 쉽게 타협하지 않는 건전한 비전을 재확인하게 돕는, 매우 알찬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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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시공간과 물질
김항배 지음 / 컬처룩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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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종래의 무지와 몽매를 넘어 이성과 계몽의 시대로 발돋움하는 데에는, 그 시선을 우주로 향해 돌린 놀라운 회심과 각성이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광막한 우주를 바라보기 전까지, 인간은 자신이 속한 좁은 지구 위의 물리계에 대해서조차 그 정확한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물리계는 고사하고, 사람은 자그마한 "자기 자신의 바른 실체"에 대해서조차 온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우주의 바른  모습을 파악한 후에야 비로소 (수천 년 전 소크라테스의 가르침마따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게 되었다는 건, 천문학과 물리학에 대한 정확한 소양, 인륜과 도덕에 대한 바람직한 천착, 이 둘이 결코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심도 있게 시사 받는 듯만 합니다.

"교양의 완성은 (자연)과학"이라고도 하죠. 불과 지지난 세기에만 해도 칸트(이 책에도 여러 번 인용됩니다)나 마흐 등 일류 철학자들은 철학자이기만 한 게 아니라 당대 최고 수준의 자연과학 연구를 선도한 두뇌들을 겸했습니다. 인문과 자연과학은 본디 둘이 아니라 하나였고, 이제 통섭의 시대를 맞이하여 다시 하나가 될 운명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인들도, 뉴턴 식 해석의 고전 물리, 천문, 나아가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와 내면화가 이제는 거의 필수라고 하겠습니다.

물고기는 자신이 속한 물 안에서 하늘을 바라봅니다. 수면 위에는 자신을 노리는 성정이 난폭한 맹금류들, 평화로이 공중을 유영하는 여타의 생명체들, 여유로운 구름, 작렬하는 태양, 혹 환하게 빛날 때라면 보름달 등이 그 눈(말 그대로 "어안"이죠)에도 비치겠습니다만, 수면 안에서 바라보는 형상들이기에 바깥 세상이 얼마나 아찔한 다층 구조를 지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층(높이)는 고사하고, 물고기의 소박한 눈에는 그 모든 게 수면 위에 반짝이처럼 고정된 2차원 형상으로만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왜곡, 단순화가 어디 어류의 지적 회로 안에서만 벌어지겠습니까? 어리석은 잡초, 거름 같은 벽지의 무지렁이가 갇혀 있는 초라한 우물 안 세계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유사 이래 수천 년 동안, 인간 역시 "천구"라는 단조로운 프레임으로, 감히 계측과 연산의 시도조차 못 할 광대한 우주를 힘들여, (그나마) 부정확하게 간추려 왔습니다. 별들이 천구라는 표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아니라, 그 각각이 먼 거리, 상상도 못 할 먼 거리를 두고 광채를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 지구의 주위를 태양이 도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진리에까지 비로소 착상이 미친 후에야, 인간은 그때까지 설명 안 되던 모든 수수께끼와 모순에까지 과감히 이성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해명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미신, 기만, 환각, 광신의 굴레에서 벗어나, 노예가 아닌 스스로의 주인으로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주 물리학(과 그 인접 과학)은 그저 물리계에 대한 기술적 정보, 지식의 집합에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 존재의 해방자 구실을 해 준 프로메테우스였던 셈이죠.

별에는 등급이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편의에 따라 정한 것입니다만, 오래 전부터 "겉보기"에 따라 정해 둔 서열(물론 숫자로 표시됩니다)이 있고, 그 별이 품은 에너지에 따라 실제로 발하는 "밝기"가 따로 있습니다(후자는 "절대 등급"이라고 부르죠). 별이 실제로 얼마나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느냐와는 무관하게, 인간은 자신의 터전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만 하면 제 주관에 따라 그 별을 희미하다며 낮은 등급을 매기고, 그 반대로 제 눈에 밝으면 덩달아 등급도 높였으니 우습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죠. 허나 인간은 또한 위대하기도 한 게, 제 눈에 비치는 현상이 그 실체를 온전히 대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기특하게 어느 순간부터 떠올리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천문학적 수치"라는 말을 흔히 씁니다. "별과 우리 지구가 떨어진 거리"를 염두에 두고부터, 그 아찔한 수치를 (계산을 해 내기는커녕) 그저 응시하는 단계부터도 머리가 아찔해졌기에, 네이피어라는 천재적인 이가 logarithm이란 유용한 개념체계를 고안해 냈습니다. 모든 수를 10의 거듭제곱으로 표현한 후, 밑에 있는 10은 잠시 잊고 그 거듭제곱 수치만 따 와 대신 활용하기 시작한 거죠. 예를 들어 10,000처럼 길게 쓸 게 아니라 이에 로그를 취해 4(즉, 10,000이 가진 0의 개수)로 간단히 표기하자는 겁니다. 23,145 같은 숫자도, 소수점 아래를 주욱 늘어놓으면 4와 5 사이의 자기 고유의 값으로 대신 쓸 수 있고, 다른 숫자와 겹치지도 않으니(함수 중에서 이런 걸 일대일대응이라 부르죠) 아주 유용한 방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천체의 겉보기 등급과 절대 등급의 관계식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이성 그 위대한 진보를 확인하는 뜻깊은 공식이라 저도 다시  손수 워드로 써 보았습니다. (참고로, 위의 식에서 로그의 밑이 10인데 0으로 잘못 인쇄되었습니다. 다른 곳은 다 맞는데 거기 하나만 틀렸더군요. 로그는 밑에 0이 올 수 없죠. 분모가 0이 못 되는 것처럼)

천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어딘가(물론 태양이지만)를 중심으로 부단히 도는 중이라면, 다른 별을 관찰할 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의 위치가 바뀌므로, 이른바 연주 시차라는 게 생깁니다. 그런데 케플러가 "신처럼 믿고 의지했던" 티코 브라헤는, 가뜩이나 태양 중심 모델이 마뜩지 않았던 차에, 연주 시차마저 제대로 측정되지 않으니 이런 발상의 전환에 대해 내내 내키지 않아하는 태도를 견지했죠(이뿐 아니라 그는 행성의 원궤도 공전설도 데이터와 어긋난다는 이유로 기각했는데, 케플러가 타원궤도로 수정하여 바른 이론을 완성했습니다).

무지렁이들만 모여 사는 폐쇄적인 공동체였다면, 권위자 티코 브라헤(사실 관측과 자료를 다루는 능력에 있어 불세출의 인물이었으니요)의 벼락 같은 호통에 다들 다른 생각이나 이견을 접고 말았을 겁니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딴 목소리를 내면 이단자, 공감 무능력자로밖에 몰리기밖에 더했겠습니까? 연주 시차가 제대로 측정 못 되었던 이유는 다른 게 없었고, 별이 너무도 멀리 떨어져있다는 사정뿐이었습니다. 여건이 열악하니 현상이 바르게 계측되지 않았고, 인지가 부실하니 지혜에의 바른 인식도 계속 미뤄질 수밖에 없었죠. 이 책에는 이 외에도, 광행차, 연속 스펙트럼 등을 정확히 캐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집요하고 성실한 노력이 있었는지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우주론을 바르게 이해하고 접근하다 보면, 현재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등이 도달한 첨단 지점까지도 천착하게 된다고 합니다. 우주물리학에는 그만큼, 물리학과 그 인접 분야의 최신 성과가 모조리 동원되다시피한 최고 두뇌와 지성의 향연이 벌어지는 셈입니다. 아니, 양자역학은 극미(極微)의 세계이고, 우주는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지는 덩치 큰 수치와 차원이 지배하는 공간(약간 어폐가 있습니다만 일단 편의상 이 말을 쓰기로 하죠) 아닌가? 이런 상식적인 의문에 대해 저자는 "... 초기 우주는 고에너지, 고온의 물질들로 가득 차 있었고... (p225)", 팽창 이전의 구조는 우리가 지금 양자역학을 통해 해석하고 예측하는 극히 좁은 공간에서의 사정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는 가정으로부터 접근해야 한다는 조언을 베풉니다.

p267 이하에서부터는 그 유명한 파동/입자의 딜레마를 다루며, 도대체 왜 "측정 행위" 자체가 물질(혹은 운동)의 상태를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 저자 고유의 친절하고 정확한 설명이 시도됩니다. 이어 힐베르트 공간과 이의 상태를 표현하는 방정식(적분식)이 제시되는데, 특이한 건 이 벡터식에서는 "크기"가 무의미하고, "방향"이 같으면 다 같은 "상태"로 취급된다는 거죠. "상태'라는 말은 이 맥락에서 특유한 의미를 갖습니다. 보통 우리 상식으로는 방향은 무시되어도 크기(절댓값)가 같으면 동류로 취급되는데(그 이전에, 벡터에서 방향과 크기는 개체를 분별하는 핵심 요소들입니다), 여기서는 정반대이니 흥미를 돋웁니다.

우리가 학부 때 선형 대수학의 용도가 그리 넓은 줄 모르고 심드렁하게 배웠습니다만, 벌써 이런 과정에서도 기저(베이시스)를 잡아 모든 상태를 선형 결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 보십시오. 결국 진리는 아무리 저 아득한 경지에 놓였다 해도, 기초 도구와 프레임으로 (아주 번거롭겠지만) 환원하거나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이처럼 수학적 도구를 충분히 활용하되, 교양인의 직관과 선이해의 틀을 충분히 존중하며 "상식"에 부합하는 친절한 안내를 시도한다는 점이 매우 빼어나고 유익합니다.

pp. 308~309에는 궤도 에너지의 반지름과 양자화를 나타내는 공식, 또 쿨롱 포텐셜과 해밀토니언 방정식을 써서 그 유명한 슈뢰딩거 명제를 수학적으로 풀어 보이는 대목이 나와 있습니다. 사실 어느 정도 기초만 배우면 그리 어렵지 않게 따라해 볼 수 있는 레벨이고, 물리학은 (저자가 누누이 강조하는 대로) 말로만 풀어 쓰면 반드시 놓치는 대목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물론 파인만 같은 천재(어학과 수학 모든 도구를 능란히 쓴)는 이는 물리학을 수학 없이 그저 말로만 해명하려는 시도를 했고, 듣는(읽는) 사람들이 자신의 반의 반의 반만 따라가는 수준이었다면 이 시도는 대성공이었을 터였지만, 수학보다 더 어려울 수 있는 게 인간의 언어라는 사실만 확인되고 말았죠.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어차피 피해 다닐 수 없는 수학이라는 (정말 유익한) 도구를 텍스트 안에 최대한 정합성, 적실성 있게 편입하여, 현대 우주 물리학 그 성과를 왜곡 없이 가장 근사하게(아무래도 대중서에는 한계가 있고, 정확한 건 교과서로 배워야 하니까요) 우리 일반 독자들에게 안내해 준다는 점이겠습니다.

p555에 보면 초기 우주가 복사 지배 시대라는 점을 착안(혹은 가정)하여, 이를 프리드만 방정식에 대입한 후, 시간- 온도 관계를 구하는 과정이 나와 있습니다. 이 역시 인간의 범상한 물리계 체험(그나마 머무는 시간이 길지도 못한)이 그 기반 한계를 이루는 상상력으로는, 엄청난 고압 고온이 배태한 에너지를 짐작도 못 하는 것이고, 인간이 짐작 못하는 경지를 이처럼 수학적 도구를 이용해서 그 어림이나마 더듬는다는 자체가 이성의 위대함을 간접 증명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각박한 한계의 벽을 매번 넘음으로써(비록 앞에 더 높은 허들이 즐비하게 남았다고는 하나), 미약하고 하찮은 존재가 점점 더 궁극에 수렴해 가는 도상에서 의의를 찾는 것입니다. 바른 인식과 지성의 도야는, 자연 과학의 정수를 공부할(혹은, 그저 엿보기만 할) 때에 비로소 그 실낱 같은 계기를 잡아챌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교양의 완성은 바로 과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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