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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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는 "죽음의 키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유다가, 로마 병정들에게 그의 스승을 넘길 때 누구인지 알리는 표지로 예수에게 입을 맞춘 데서 유래했다고도 합니다. 많지도 않은 금전적 이익을 탐 내어 스승을 팔아남겼다는 게 성경에 나오는 문면이며, 이런 이유에서 종교적 입장의 차이를 불문하고 한 인간으로서 비난 받아 마땅하다는 게 중론이며 문화권 따지지 않고 배신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소설가, 영화 감독 등에 따라서는 "스승의 위대한 구원 사업을 앞당기기 위해" 그가 악역을 자청한 면이 있다고도 합니다. 하긴 모든 일이 "아버지의 뜻대로 될 뿐"이라고 했으며 이 사람의 배신행위까지 미리 내다 본 예수 자신의 언급이 있으니 또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작가 아모스 오즈는 독특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배신자의 대명사로 낙인 찍히고 그토록 오랜 동안 증오의 대상이 된 이유는, 1) 유대인들이야말로 끝까지, 심지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예수가 구세주임을 결코 인정하지 않은 이들이며, 2) 12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유다가 그저 개인이 아니라 저런 유대인들을 대표, 제유하는 존재였기에 수천 년 동안 그런 대접을 받아 왔다는 것입니다. 하긴 우리도 어렸을 때 저 "유다"의 이름을 처음 듣고, "유대인"이라고 할 때 그 "유대"와 발음이 비슷하여 혼란을 느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그저 나이가 어려서 학습상의 불편을 겪는 중이겠거니 스스로 판단했으나, 이 소설의 작가는 유다의 히브리형 이름 본모습까지 연구하여 "그저 발음이 비슷한 게" 아니었음을 주장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대표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캐릭터인 대심문관을 등장시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들 인간은 너무도 사악하고 어리석어 대체 구원받을 가망이라는 게 없다. 너예수가 천 수백 년 전 지상에 와서 너무도 힘든 숙제를 우리 어깨 위에 짐지우고 돌아갔을 때, 나 같은 사람들은 오만한 너를 대신하여 그 짐을 어리석은 인간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춘 것이다." 예수를 지상에서 대변한다는 자(가톨릭의 성직자)가 오히려 예수를 단죄하며 그 "오만함"을 꾸짖고 있으니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만 저 말에도 일리가 있으니 더욱 기가 막히죠.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도 하나같이 종교, 구원, 거듭남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예수가 그르다는 게 아니라, 인간이라는 게 그만큼 가망이 없는 존재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유다는 최초이자 최후의 기독교인이었으며, 그랬기에 기독교 문명권과 유대인들에게 똑 같이 경멸받고 저주 받았다는 뜻입니다.

슈무엘과 발드는 마치 <카라마조프의 가의 형제들>에서 알료샤와 바냐가 싸우듯 끝도 없이 싸웁니다. 물론 두 사람의 논쟁은 저 러시아의 형제들이 벌이는 말다툼에 비하면 호각지세이긴 합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예수나 유다나 결국 동시대인들에게 이해 못 받았다는 점은 같다"였습니다. 작가 역시 글로벌리스트 스탠스에서 외부인들, 심지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무슬림과 친하게 지내다가 동족들로부터 비난 받은 점이 저들과 비슷합니다. 세상은 플라톤이 말한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으로부터 빨리 탈출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소위 "진보"라는 게 가능해지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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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365일 1
블란카 리핀스카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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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사실 언제나 마피아가 등장하여 펼쳐지는 이야기는 재미가 있습니다. 폭력을 미화하거나 떠받드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 깡패, 해결사, 더 큰 폭력으로부터의 보호자 역할은 사실 필요악이라서 아주 근절을 하질 못합니다. 미국에서도 1930년대 도저히 조직 폭력배들의 등쌀로부터 배겨낼 방법이 없다고 시민들이 아우성치고서야 비로소 공권력 차원의 단속이 이뤄졌는데 이 역시 FBI는 1960년대까지 마피아라는 거대 조직의 존재를 부정하고 들다가 꼼짝 못할 증거가 발견되고서야 입장을 바꿨습니다. 그러니 그 전까지는 체제가 어느 정도 용납하거나 조장했다는 뜻입니다.

미국의 마피아는 역사가 매우 깊으면서도 구조적 뿌리가 튼튼한데, 미국뿐 아니라 이탈리아 사회에까지 두 갈래로 번성하여 서로를 먹여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여주 라우라는 어느 마피아 가문의 젊은 후계자 마시모(이름과 캐릭터가 아주 잘 어울립니다)에게 사실상 감금, abuse를 당하는 처지인데, 그렇다고 뭐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범죄자에게 심정적으로 완전 동조하는 건 아니고 진취적이고 똑똑한 여성답게 상황을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변화시키려 분투합니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게 독자로서의 큰 재미이나, 사실 읽으면서 좀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라우라가 마시모(사실상 남주)에게 너무도 크게, 치명적으로 매혹당하는 점이 객관적으로(?) 봐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라우라는 딱히 내세울 게 없는 스펙이었고, 그래서 자신의 직장에서 자신의 진가를 입증해 보이는 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작중에서 스스로의 표현으로 그리 말하기도 합니다. 반면, 마시모는 비록 범죄자의 추악한 가문이라고는 하나 어려서부터 많은 혜택(...)을 받고 자랐으며, 이 흔적이 그 화려한 외모와 호방한 스타일에 그대로 남겨졌으니 뭐 나름 축복 받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런 남자에게 혹하는 여자들을 보면... 저 개인적으로는 대부분 "골빈" 타입들이 많았는데, 라우라 같은 여자가 그런 감정에 빠져든다는 건 사실 좀 그랬습니다. 물론 (거듭되는 말이지만) 라우라는 매우 똑똑한 여성이므로 전적으로 상황에 매몰되지는 않습니다.

p65에는 마시모의 대사 중에 "이것은 제안이 아니야, 넌 거부할 수 없어."라는 게 나오는데, 이거는 1971년작 미국 영화 <대부>에의 오마주이겠습니다. 그 영화에는 a proposal that you can't refuse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너무 좋아서 거부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폭력과 강요에 의한 것이므로 그렇다는 겁니다. 이런 역설성, 반어성, 중의성이 재미있어서 큰 인기를 끈 표현인데 사실 문자 그대로 강요 때문에 거부할 수 없다면 그건 이미 "제안"이 아니죠. 마시모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p79에 "파미글리아"라고 나오는데 이탈리아어이므로 비음으로 발음되어 "파밀리아"가 맞겠습니다.

만약에, 딱히 내세울 것도 없고 현재의 삶이 팍팍한 젊은 여성이라면 차라리 확 돈 많고 젊은 깡패한테 납치라도 당해서 당장 궁한 처지는 모면하고 기깔나게 살았으면 하는, 일종의 판타지를 잠시나마 가질 만도 합니다. 물론 그런 생각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이런 소설을 통해 일종의 대리만족이 가능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탈리아 깡패와 치명적인 운명에 빠져드는, 유럽의 먼 변방 폴란드 출신 젊은 여성의 사연! ㅎㅎ 남자가 읽어도 재미있었네요. 약간 19금 묘사가 자주 나오니 주의가 필요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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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 1
이철환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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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훈훈하면서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야기였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연이면서도 그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아 공감이 가능하게 돕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인데, 간만에 딱 내 스타일이다 싶은 소설을 읽고 감상했다 싶었네요.

요즘은 물질이 풍족해져서인지 동기간이라도 음식을 나눠먹고 양보하며 내 몫을 삼가는 모습을 극히 보기 힘듭니다. 참 이상한 결과입니다, 다들 가난하게 살 때는 식탁에서 내 몫을 서로 줄이려 경쟁했다는데(물론 다 그랬던 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만), 요즘처럼 풍요로운 시절에는 같은 테이블에서 오히려 서로 고기 몇 점이라도 내 입에 더 넣으려고 싸우니 말입니다. 어렵고 힘든 세월이, 오히려 가족의 소중함을 더 절실히 깨닫고 더 인간다운 가치로 우리를 복귀하게 돕는 것일까요?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저 어리고 가난한 남매가, 서로 먹겠다고 싸웠다면 사장님 영선씨가 과연 그렇게 인심을 썼을까요? 사실 이런 손님들은 요즘 손에 꼽을 만큼도 안 될 만큼 수가 적기에, 이런 손님한테 인심을 썼다고 가게가 휘청이지는 않습니다. 사장님 동팔의 태도는 "당신이 그런 태도를 계속 유지하면 경영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일종의 경각심의 환기이지 남매를 돕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동팔도 내심 그들을 돕고 싶었으며, 만약 처지가 바뀌어 동팔이 먼저 그들을 접했으면 똑같은 행동을 했겠고, 이번에는 영선씨가 이를 말리려 들었을 겁니다.

동현이는 서연을 사랑합니다. ㅎㅎ 어린 감정이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결코 안 될 일이지만, 사실 그 나이에 사랑이 뭔지 내 진짜 감정이 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외인구단>의 까치는 엄지를 위해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을 읊었고 실제 행동에까지 옮긴 녀석입니다만 이런 게 과연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의 결과일까요?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진 이에 대한 동경이며, 혹은 갖지 못한 자신에 대한 한탄이자 분노의 산물이 아닐까요. 여튼 동현이도 비슷한 처지의 다른 세입자의 딸내미가 아니라, 자신이 겪고 있는 곤궁함을 한 큐에 날려줄 듯한 "다른 신분"의 보유자, 건물주의 딸을 사랑합니다. "반 1등하고 전교 1등은 레벨이 다르지!(p77)" 네,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게 나의 영혼 빈 곳을 채워줄 만한 상대방을 만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아무튼 어른들의 계층, 계급이 남긴 상처와 미련이 아이들 대에까지 물려지는 듯하여 가슴이 아프지만, 한편으로 그 나이 또래 순수한 영혼의 갈구와 실수가 공감을 살짝 부르기도 합니다. 또, 이처럼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하고 그리워할 때,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가장 겸허히 성찰하게도 됩니다. 이러니 이런 감정은 동기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소중하고 존엄한 것입니다. 동현이가 우리 독자에게 깨우쳐 주는 바는 생각 외로 심대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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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 처음 만나는 초등 고전 시리즈
조이스 박 지음, 권영묵 그림 / 미래주니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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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 로마 신화는 서양 문화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하므로 어렸을 때부터 신들이나 영웅의 이름에 익숙해야 청소년기 이후의 독서에 무리가 없습니다. 거의 필수라고 해야겠죠. 사자성어라든가 동양 고사를 잘 알아야 한국에서 교양인으로 대접 받는 것이나 비슷합니다. 그런데 동양 고전은 비록 한자라는 장벽이 있긴 해도 같은 동양권 문화라서 큰 거부감이 없는데, 그리스 신화는 이름도 어렵고 등장하는 신들이 너무 많아서 접근이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내용은 대단히 성적(性的)이기도 해서 더욱 난감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좀... 아이들 용으로 너무 복잡하지 않게 정리하거나, 이런저런 민감한 내용을 좀 쳐내고 순화한 책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아이들 책은 확실히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 pp.6~7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 계보도가 나오는데 제가 보기엔 아이들 용으로 가장 깔끔하게 정리된 표처럼 보였습니다. 일단 올림포스 12신의 이름은 따로 두드러지게 표시를 하고, 그 외에 누가 누구와의 사이에서 누구를 낳았는지 보기 좋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읽어 가면서 이런 내용을 머리 속에 정리할 건지, 아니면 먼저 표로 개념을 잡고 이야기를 읽을 건지는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튼 중요한 건 이런 표가 좀 따로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어른인 저도 신들의 "계보"가 머리 속에 잘 정리된 건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누가 누구였는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마다 아이들이 책을 앞으로 넘겨 참조할 수가 있어야 할 겁니다.

서양 동화, 민담, 심지어 동양이나 한국의 그것에도 "의붓부모, 의붓 자녀" 이야기가 상당히 자주 등장하며 특히 계모한테 학대 받는 아이들 이야기는 거의 빠지지 않습니다. 사실 아이를 학대하는 건 계부가 현실에서 압도적으로 많은데도 말입니다. 예전에는 일부일처제 의식이 희박해서 그랬다고 쳐도, 요즘은 그렇지도 않은데 구태여 아이들에게 결합 패턴 가정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 줘야 할지 의문도 들지만, 예컨대 p104 이하에 나오듯 헤라가 시앗에 대한 질투 때문에 의붓아들이라 할 수 있는 헤라클레스를 개고생시키는 건 원래 신화의 줄거리가 이러하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그나마 책에서는 최대한 거부감 없게, 마치 심술꾸러기인 헤라가 헤라클레스를 고생시키는 것처럼, 원 내용의 왜곡까지 안 가는 범위에서 최대한 무난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노역"이라는 단어가 어린이들에게 좀 어렵게 다가오겠지만 여튼 12난사를 최대한 재미있고 간단하게 추렸다는 느낌입니다.

표준 표기는 (이 책에 나온 대로) "미다스"입니다만 여튼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표현은 이제 일상에서도 널리 쓰이며 이의 패러디인 "마이너스의 손"도 재미삼아 널리 회자됩니다. 책 p146에는 "미다스의 손"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지는데, 무작정 물욕에 빠져들다 인생 전체를 망친 인물의 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해 어린 독자들이 생각할 바가 많을 듯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동양의 여러 고사가 품은 익숙한 교훈과 가장 접점이 많은 예이기도 하겠습니다.

p60 이하에는 사랑의 신 에로스의 장난으로 다프네를 향한 일방적인 사랑에 빠진 아폴론의 치정 이야기가 다뤄지는데 요즘 스토킹이라든가 여러 사회 문제가 많이 벌어지기도 하기에 시의적절한 면이 있습니다. 아폴론은 만약 에로스의 장난이 아니었으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텐데,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뭔지도 모르고 이런 감정의 폭주에 빠지는 일이 잦습니다. 일시적 격정에 몰려 인생 전체를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이야기로부터 교훈을 잘 추출하여 정신을 가다듬는 건 의미있는 체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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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한 내과 의사입니다
이정호 지음 / 한국경제신문i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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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 가장 선망 받는 직업은 단연 의사입니다. 의사라고하면 누구나 우러러보며, "결혼 시장(상당히 어폐가 큽니다만 이 또한 현실입니다)"에서 특등 대우를 받는 게 의과 대학을 다니거나 재학 중인 젊은이들입니다. 의사의 자녀라고 하면 일단 가문의 배경으로 최상급의 존중을 받는 편입니다. 이런 신분상의 리스펙트는 돈으로 함부로 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할까요? 이 책은 현업의 내과 의사이시며, 현재는 요양병원에서 연로한 어르신들을 위해 애 쓰시는 이정호 선생님이 "과연 대한민국에서 내과의사로 산다는 건 무엇인가?"에 대해 진솔하고도 심각한 이야기를 펼쳐 놓고 계십니다. 의사가 아닌 사람이라고 해도, 하루 종일 천태만상의 환자를 진료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것도 어렵지만 의사가 일단 되고 나서 치르는 과업 역시 얼마나 지난한지에 대해 다들 공감합니다. 개업의로서의 고충 역시 결코 작지 않다는 걸 주위 친지 중에 의사가 있다면 잘 알 것입니다.

저자께서는 아주 엄격한 가풍 하에 자라신 듯합니다. 할아버님께서 하루마다 행하곤 하셨던 검열은 가히 군대내무반의 그것을 방불케 했나 봅니다(p46). 조부님께선 그 당시에만 있던 제도로 "공의(公醫)" 신분이셨는데(p31) 이처럼 이 책에는 현대 한국을 사는 우리들이 잘 모를 만한 생소한 이름이나 직역, 제도가 자주 등장합니다. 본디 우리 속언에는 "의술은 인술이다"라는 말이 있긴 하나 이를 실천에 옮기는 이들은 극히 드문데, 저자님의 조부님이야말로 손에 꼽을 만한, "의술을 통해 사람을 살리는 활인지불" 같은 분이 아니셨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군대식의 엄격한 훈육도, 사회에서 쓸모있는 사람으로 장차 자라나려면 자신만의 이기적이고 초보적인 욕구를 억누를 줄 알아야 한다는 인식 하에서 나온 게 아니었겠나 짐작합니다. 요즘은 이런 훈육이 너무 드물어서 갖가지 사회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닐지 생각도 해 봅니다.

"자녀들에게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스스로 공부하게 해야 할 것이다."(p91) 간단하고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를 교육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제 생각에도 스스로 책을 펼치고 그 안에서 무궁무진한 삶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만큼 뜻 깊은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실제로 겪어 보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경지입니다. 물론 예술작품을 두루 감상하고 건전한 감성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며, 합당한 운동을 적절히 행하여 신체가 고루 발달하고 건강을 갖추게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진정 쓸모 있고 공동체 성원들의 존경을 받으려면 역시 공부와 학식이 중요합니다. 이 책에는 오로지 의술 한 길을 파며 배움과 깨달음의 희열과 보람을 온 몸으로 체득한, 실로 대단하신 의인의 인생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마치 조선 시대 호남의 고고한 선비, 학자의 모습을 엿보는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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