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답게 나답게
안셀름 그륀.안드레아 라슨 지음, 안미라 옮김 / 챕터하우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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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는 영성". 공저자 중 한 분인 안셀름 그륀에게 붙은 호칭 중 하나입니다. 두 분의 공저자들 중 다른 한 분은 안드레아 라슨이며, 수도사인 그륀 박사의 여동생의 딸, 즉 외조카입니다.

나답다는 건 무엇일까요? 또, 너답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사실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의 궁극 과제를 오직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도 있겠으며, 참다운 나를 찾은 사람은 이미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을 수도 있습니다. 저자분이 가톨릭 수도사이니 가톨릭적인 세계관에 합당한 것이면 족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특히 가톨릭에서 성직자는 평신도, 나아가 일반인들의 모범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분이 규정하고 제시하는 "나다움, 너다움"의 해답은 결코 특정 종교의 (제한된) 이상상에만 부합하는 게 아닙니다.

조카인 안드레아 라슨은 외삼촌에게 묻습니다. "아시다시피 제 남동생은 자전거 타기에 빠져 있습니다. (중략) 아시다피시 저는 달리기를 좋아한답니다.(하략)"(p45) 이 말을 하면서 안드레아 라슨은 "우리는 이처럼,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의 영혼을 또한 공유하기도 합니다."라며, 어느 순간은 이런 모습, 또 어느 순간은 저런 모습을 띠는 우리들이, 과연 어떤 양태의 참모습을 지니는 건지에 대해 심오한 질문을 던집니다.

독자인 저는 이 대목이 몹시도 흥미롭더군요. 보통 자전거타기라든가, 혹은 이런저런 취미활동을 누리는 이들이, 물론 동질감과 공감대를 형성하긴 하지만, 그를 넘어 영혼의 빛깔까지 서로 같다고 여기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습니다. 아니, 그 전에 이미 "내 영혼이 어떤 모습일까?"라는 궁금함 자체를 갖지 않는 게 보통일 겁니다. 안드레아 라슨은 이미 그 어머니와 함께 몇 권의 저술 활동에 참여할 만큼 성숙한 어른입니다만, 또 이미 아이들의 부모가 된 처지(p109)입니다만, 이런 질문을 던질 때는 마치 어린이처럼 천진무구한 어투를 보입니다. "삼촌, 이건 뭐라고 부르나요? 또 저건 뭐죠?" 질문이 끊이지 않으며 정원을 노니는 꼬마와도 같습니다.

이 와중에 그녀가 심각하게 묻는 건, 궁금해하는 건, "역할의 의의"입니다. 내가 이런 처지에도 놓여 보고, 저런 상황에도 처할 수 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일시적인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처지가 바뀌어 봄으로 해서 사람은 타인의 입장에 공감도 해 보고, 전에는 채 보지 못하던 어떤 지평까지 엿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넓혀진 인식이나 깨달음 중 어떤 것이 나다운 것이며, 어떤 것을 영혼에 과연 덧입혀 옳은지, 그녀는 오랜 수도사 생활을 거친 외삼촌에게 진지하게 답을 구하는 중입니다.

p108에서 조카는 다시 "자아"에 대해 묻습니다. 물론 타 종교인 불교에서는 제행무상 제법무아를 논합니다만 여튼 이분들은 비교적 자신에게 가깝거나 평생을 서원한 종교의 틀 안에서 해답을 찾는 게 또한 자연스럽습니다. 이에 대해 외삼촌은 성경 복음서를 인용하며 답을 제안하는데, 원문에서 예수 역시 매우 간략하게 답을 주었듯, 그 역시 짧으면서도 명확하게 말합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는 종"이라는 것이며, 이는 루카의 복음서가 그 출전입니다.

영성의 삶은, 예를 들면 매일 하루를 고된 육체 노동에 시달리다 저녁이면 귀가하여 지쳐 잠드는 노동자의 삶과 다를까요? 그륀 박사의 결론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종이 제 할 일을 애써 마쳐도 주인은, 혹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그를 애써 칭찬하지 않습니다. 영성으로 가득하여 날마다 고상한 주제로 묵상에 잠기는 사람은 남의 칭찬을 받아야 할까요? 이 역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본연의 영성으로 돌아가 청정 상태에 들어가는 건 그저 자연의 섭리만큼이나 자연스러울 뿐입니다. 이를 두고 "칭찬과 평판"을 기대함은, 마치 예수가 복음서에서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을 두고 "회칠한 무덤, 위선자"라 맹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의, 어떤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거죠.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이를 일부 계승한 기독교에서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랑을 논한다는 점, 우리도 고교 교과 과정에서 배운 바 있습니다. 조카인 안드레아 라슨은 이 중 내면의 사랑이 반드시 내면에만 머물러야 하는지에 대해 회의를 표하면서, 진정한 사랑은 내면에 머무르지만 않고 반드시 그 외적인 발현을 동반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특히 수도원 안에서의 청순한 사랑 형태만 지켜야 하는 상황과 모순되지는 않냐고 묻는 듯합니다. 또한 안드레아 라슨은 자신이 부모의 입장이기도 한 만큼, 부부가 서로에게 품는 사랑은 어떤 양태가 이상적인지에 대해서도 묻습니다.

수도사는 아름다운 여성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요? 만약 흔들린다면, 이것은 이른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간 후 "십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을 외쳤다는 지족선사의 일화와 다를 바가 없죠. 그륀 박사는 이에 대해 그 충동의 존재를 구태여 부인하지 않으며, 그러나 이는 "신을 향한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데 하나의 영감을 제공할 뿐"이라고 합니다(p154).

우리는 누구나 일상에 치여 거의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그러면서도 물욕과 애욕을 놓지 않고 세속의 게임에서 작은 포인트라도 하나 더 따는 방식에 대해 일종의 자부심마저 느낍니다. 그러나 성직자의 청신(淸新)한 삶은, 이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가 어린이의 무구한 마음으로 복귀해야만 천국과 평화로 가는 입구가 열릴 것이라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나면서부터 성인(成人)이 된 사람은 없고, 어린 시절을 다 겪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흔하고 공통된 초심에의 회귀가 세상에서 가장어려운 과제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날마다 나의 양심이 다친 바 없는지 자성하고, 참다운 내 모습이 과연 무엇이었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끊임 없이 살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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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 사탕 대소동 반짝반짝 빛나는 아홉살 가치동화 1
최은영 지음, 이현정 그림 / 니케주니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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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동화"라는 말을 자주 들어 보셨나요? 책표지에 이 말이 나와 있었지만 처음에 저는 그저 예사로 넘겼더랬는데 다 읽고 나서 약간 한 방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독후감 말미에 따로 말하겠습니다.

사실 책을 처음부터 꼼꼼히 읽었다면 그런 느낌은 안 들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pp.4~7에는 최은영 작가의 "작가의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작가께서는 이 동화의 창작 의도, 결말(결론?)이 어디로 갈지 미리 독자들에게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순순히 책장만 잘 남겼어도 "당황스러운 기분"은 피해갈 수 있었죠. 음... 그래도, 소설이나 동화나 영화를 볼 때 "반전(일종의)의 충격"은 대체로 유쾌한 편이기에, 결과적으로는 잘됐다는 생각도 듭니다.

주인공은 신하라는 이름의 아이인데, 이 아이는 좀 솔직하고 적극적이며 선생님 상대로 별 거리낌없이 하고 싶은 말도 하는 편입니다. 그런 성격 덕분에 얻는 바가 많은가. 앞으로 더 살아 봐야 알겠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적어도 이 책 안에서는 꽤 결과가 좋은 편입니다. 이 이야기의 발단은, 주인공 신하의 적극적이고 (어찌보면) 좀 막무가내인 성격, 스타일이었습니다.

신하의 반에서는 담임 선생님이 "칭찬 사탕"이라는 인센티브를 유지하는데, 다른 친구들보다 잘한 게 있으면 칭찬의 의미에서 사탕을 주는 식입니다. 사탕 하나가 대단할 건 없지만(치의과적 이유 때문에 요즘 부모들은 오히려 꺼리기도 하죠), 일종의 상징적 의의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서로 받으려고 난리입니다. 이런 게 통하려면 선생님이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거나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아마 나이도 젊고 그런 만큼 다소 경험이 부족하신 면도 적지는 않지 않을까, 저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이유는 뒤에서 제 나름대로 써 보겠습니다).

지호와 재현이는 사내아이들인데도 그리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신하가 이니셔티브를 취했기에 같이 청소를 한 얘네들도 덩달아(?) 사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하는 더욱 으쓱해하며, 사실 이처럼 또래들 사이에 받는 인정, 일종의 리더십 획득이 이런 행동, 성격의 주된 동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한국전쟁 직후도 아니고 사탕 한 알이 큰 인센티브는 아니겠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음... 본래 사촌, 그 중에서도 고종사촌인 아린이는 평소부터 그리 신하한테 호의적인 편이 아닙니다. 성격이 원래 그런 건지, 아니면 고모가 원래 자기 오빠네 식구한테 그리 좋은 감정이 아닌 건지(?), 혹은 아린이가 본래 잘난 점이 많아서 주위 사람들 흠이 제 눈에 잘 들어오는 편인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이 아린이가 신하의 기분 좋은 일에 대해 딴지를 걸고 들어오기를 아주 즐긴다는 거죠. 이 일 말고도 말입니다.

"뭘 잘 한 게 있는데 칭찬사탕을 줘?"
"청소."
"청소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그런다고 칭찬사탕을 줘? 너희 선생님은 너무 기분파 아냐?" (p22)

어떻습니까? 만약에 아린이가 아니라 그 엄마, 즉 신하의 고모가 이런 말을 했다면 또 그러려니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직 어린이인데 구태여 듣는 신하 기분 망치게 이런 트집을 잡는다? 거 참 애 성격 한번 특이하다... 이런 생각이 누구나 들 만합니다. 헌데, 솔직히 말해서 더 당혹스러운 건, 저 아린이의 말이 (사실) 옳다는 겁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때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웃죠. 어른들이 긴장하는 건 애들이 저처럼 맞는 말을 할 때입니다. 그 생각이, 어른인 우리들의 마음 속에 미처 떠오르지 않았을 때 우리는 더 당황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음... 이야기 속에서 (구태여 따지자면 아마도) 빌런에 가까울 아린이가 이런 말을 하니, 성인 독자들은 마음에 긴장이 생깁니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권위(authority)는 결국 올바른 것으로 판명이 나야 한다. 이제 담임 선생님의 처사는 어떤 과정을 통해, 다시 정당성을 획득할까?"

음. 그 전에, 아린이의 항의, 의문 제기가 신하의 클래스 안에서 어떤 공명, 공감을 얻기나 할지도 아직 의문입니다. 이 말다툼(축에도 끼지 못하지만)은 그저 집 안에서의 작은 소동으로 끝나지 않겠습니까?

한편 신하네 반에는 현수라는 아이가 새로 전학옵니다. 전학생이 최초라고 하는군요. 현수가 모 고깃집 아들이라고 하니까 이 반은 곧바로 선망의 웅성거림이 웨이브를 그립니다. 고깃집 아들이 그 정도로 부러움의 대상인가? 저희 때 분위기라면 좀 상상하기 어려운데 뭐 요즘은 그런가 봅니다. 먹고 싶을 때 마음껏 고기를 먹을 수 있어서 그렇다는 걸까요, 아님 (동화 중에 나오는 대로) 동네에서 특별히 잘나가는 음식점이고 그 결과 현수네 집이 상당히 잘 살 것 같다는 추론 때문일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혹시, 이제 거액의 권리금을 주고 갓 입주한 곳이라면? 그 장사의 성패 역시 불확실합니다. ㅎㅎ

여튼, 현수는 이상하게도 선생님으로부터 특혜(?)를 받습니다. 눈이 나빠서 앞자리에 앉는 건 그렇다쳐도, 왜 급식 시간에 남들보다 먼저 배식을 받는 걸까요? 이건 따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책 후반에 이유가 나오므로 여기서는 내용 누설을 삼가겠습니다.

잠시 앞으로 돌아가서, 확실히 아린이는 신하보다, 혹은 또래 아이들보다 좀 똑똑하고 사리에 밝은 것 같습니다. 똑똑한 것까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이런 애들은 어려서나 커서나 어디 가서 부당한 손해는 보지 않습니다. 뭐 대개 그렇더라고요. 아래 대화를 보십시오.

"너희 선생님이 현수 고모쯤 되는 거지. 그래서 현수의 고모인 너희 선생님(아닙니다!)이 현수를 특별 대우해 주는 거야."
"야, 그렇다고 너희 엄마가 나한테 특별 대우해 주는 게 뭐 있냐?"

ㅎㅎ 확실히 아이답게, 신하는 아린이의 논리적 비약에 초점을 두지 못하고, 엉뚱하게도 평소에 자신한테 특별히 잘 해 주는 것도 없는 고모에 대한 억울함을 표현합니다. 물론 즉각, 똑똑한 아린이에 의해 반박당합니다.

"우리 엄마는 선생님이 아니잖아!"

그 다음 신하의 말이 웃깁니다. 하긴 고모(즉 아린이 엄마)는 보험회사에 다니니, 나한테 뭘 잘해주고 말것도 없다는 것. 이 대목에서 독자는 피식 웃음을 짓게 되는데... 여튼 근거가 있건 없건 자신의 주장을 상대에게 곧잘 관철시키는 재주가 있는 걸 보면, 아린이는 아마 엄마의 피를 이어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물론 특정 직업군에 대한 비하의 의도는 절대 아닙니다. 잘하시는 분들이야 억대 연봉 받고 잘나가시죠.

음... 여튼, 삼국유사에도 "여러 사람들의 말은 쇠도 녹인다"는 격언이 나오는 대로, 우리 민족은 뭇 대중이 마음을 모아 소리치면 결국은 그게 통하는 식으로 항상 살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충격을 받은 건, 결국 이 이야기에서...

(내용 누설 주의)
선생님이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앞으로 개선을 약속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작은 학급에서 웬만하면 권위가 유지되게 하는 것도 중요한데, 여기서 사탕의 배분이나 현수에 대한 배려가 과연 "공정이라는 가치의 위반"에까지 다다른 건지는 의문입니다. 형식적인 과업의 완수가 아니라 열성을 다한 행동이라면 사탕을 줘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요즘 브레이브걸스가 역주행에 성공하여 탑티어로 다시 태어난 것도 "평소에 남들 외면하곤 하는 군부대 위문 공연 등에 정성을 다하여 임하는 성실한 태도"가 하나의 중요 이유가 되었다는 점도 떠올려 보면 말입니다.

여튼 공정이라는 가치는 중요합니다. 또, 본문 중에도 나오듯이, 이 공정이라는 가치는 그저 결과의 평등을 말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또한, 선생님이라고 해도 가치의 설정이나 그 내용에 대한 합의는 학생들과 함께 이뤄 나가야 한다는 점은 깊이 새길 만합니다. 동화 속뿐 아니라 현실에서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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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동 204호 아파트 교회 - 도시 목회의 대안 아파트 교회 개척 이야기
이동복 지음 / 샘솟는기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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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동복 목사님은 현재 인천 청라 좋은밭교회 담임목사로 재직중인 분입니다(책 앞날개). 게시된 경력을 보니 수영로 교회 부목사 사항도 있는데 제가 졸업한 초등학교에서 아주 가깝게 위치한, 부산에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로 꼽히던(현재도 같습니다) 곳이라서 반가웠습니다.

책 제목에서도 우리가 눈치챌 수 있듯 저자께서는 "현장 목회에 탁월한 교회 개척자(p4. 앙현표 총신대 교수의 추천사 중)"이십니다. "개척"이란 말은 일상에서 흔히 쓰긴 하나 이를 (어느 분야가 되었건 간에) 실천에 옮기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특히 교회의 개척은, 과거와는 달리 한국에 반(反) 개신교 풍조가 상당히 퍼진 작금에 있어서는 더욱 힘든 과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특정 종교를 반대한다는 게 아니라, 그 중에는 교회가 반드시 경청해야 할 사항도 있는 만큼 목회자의 사명감 고양과 자질 향상은 더욱 어려운 과제가 된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간판도 없고, 새벽기도회도 없고, (심지어) 전도도 없는, 아파트 103동 204호 교회를, 인근도 아닌 부산, 강릉 등지에서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역시, 추천사인 p5 이한수 명예교수의 말 중에서 인용했습니다. 비(非) 개신교 신자 중 해당 종교에 대해 대뜸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마 "극성스러운 전도"이겠습니다. 물론 요즘은 꼭 그렇지는 않으며, 비정상이라 할 만큼 열을 올리는 전도는 종파 불문 종교 불문의 일반적인(그래서 우려스러운) 현상이 되었습니다.

여튼, 어떤 교회가 전도도 없이, 그처럼 알음알음으로 주목 받고, 외부에서조차 절로 찾아오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된 비결이 참으로 궁금합니다. 다시, 책 추천사 같은 페이지에서 몇 구절을 인용하자면, "말씀 앞에 자신의 온갖 우상들을 내려놓고, 깨지고 부서지면서 새로 거듭나기를 갈망하는 저자의 기도가 있었기에 (이런 결과가) 가능"했다는 게 이 명예교수님의 평가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떡, 뛰어내릴 것, 세상의 부귀영화(p44)." 저자는 이를 다시 다른 말로 바꿉니다. "정욕, 권세, 돈" 복음서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며,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 역시 이를 대심문관의 에피소드로 변형하여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속에서 "과연 신의 영감을 받아 쓰인 이야기"라며 무신론자인 이반의 입을 빌려 격찬하고 있습니다. 책의 다음 페이지에서 "예수님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다:"는 말이 나오니다.

독자인 저는 예전에 찰스 셸던의 소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기란 참 쉽습니다. 남들 듣기 그럴싸한 아름다운 격언, 근엄한 충고를 남한테 폼 잡고 떠드는 것도 쉽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매 순간, 내 머리 속에(가슴이 아닌) 기억된 예수의 이런저런 가르침을 기준 삼아, 내가 맞닥뜨린 모든 상황에다 그대로 대입해 보고 정말 실천에까지 옮기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저 셸던의 소설은 문자 그대로 그런 상황을 상정하고 픽션화한 작품이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저는 아직도 이 가르침을, 가장 낮고 작은 스케일에서조차 실행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분명 그게 바른 길이요 선택인데도 말입니다.

예수는 열두 제자를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는 사도라고도 불리며, 원래는 경건함이나 성스러움, 심지어 지혜로움과도 별반 상관 없는 삶을 살던, 지극히 평범한 위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소명을 주어,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든 이가 예수였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제자로서 사는 삶"은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로만 가톨릭이 세상을 덮었을 때, 종교개혁이 일어났다.(p64)" 여기서 저자께서 말하는 종교개혁이란 아마도 후스와 위클리프가 일으킨 선구적인 움직임까지 모두 포함하는 맥락일 것입니다. 그때야말로 유럽을 온통 로마 교황의 권위가 뒤덮고 짓누를 시절이었겠으니요. 저자의 말은 이어집니다. "지금은 자유주의 신학이 세상을 덮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종교개혁으로 돌아가기보다,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종교개혁은 물론 숭엄한 움직임이었고 그 결과도 찬란히 맺었으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최종의 목적지("땅끝")는 어디까지나 예수의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장 목회와 교회 개척의 달인이시라고 합니다만 저자에게도 엄연히 시련과 실패가 있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에 단 한 번의 주춤거림과 넘어짐 없이 쾌속 급행 질주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참으로 진솔한 고백과 그로부터의 깨달음이 이어지기에 더욱 큰 진정성과 설득력으로 독자에게 다가옵니다. 저자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말씀은 리얼 판타지이다."

"복음이 우리를, 말씀이신 하나님께 인도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했다. 우리를 교만케 하고 면죄부 역할을 했다. 마치 산돌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벽돌에 역청을 만들어 우리 이름을 내려는 바벨탑을 닮았다.(p105)" 우리는 죄악이라는 결과에 빠진 우리 자신에 충격을 받고 자기연민에 곧잘 빠집니다. 그럴 때마다 무엇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며 눈물을 떨구고 용서를 청합니다. 그러나 이런 뉘우침의 순간에마저 우리는 남 탓, 상황 탓, 사탄의 탓을 일삼지 않습니까? 나쁜 짓을 한 건 엄연히 우리의 욕정, 탐욕, 오만이었으며, 이 순간의 사탄의 대변인, 육화 노릇을 우리들 자신이 저질렀는데 대체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교회에서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판 작자들이 16세기 유럽에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거짓 눈물과 기도로 양심의 짐을 그때그때 덜려 잔꾀를 부리는 우리가 바로 그들입니다.

저자는 아주 솔직한 분입니다. 목사님이시면서도 송도에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할 때, 노후대책도 겸하여 어디가 과연 가격이 잘 오를 유망한 곳인지를 물색하는 재미가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정도 되면 나의 하나님은 송도의 32평 아파트가 아니었을까?(p128)" 살면서 한 번도 유혹에 빠지지 않고, 신의 윗자리에 물질과 황금을 둔 적 없는 인물이 모세 이래 과연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스스로도 부끄럼 없이 내면화한 철의 규율로 제네바를 다스린 장 칼뱅 정도 아니었을까요? 이 책은 이처럼 목사이신 저자께서 너무도 솔직히 자신의 지난 여정, 오류와 불신과 욕심으로 적잖이 점철된 이력을 털어 놓고 계셔서 더욱 감동적이고 흥미로웠습니다.

베드로의 본명은 게바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을 가리키는 헬라어이며(p150), 게바는 아람어인데 아람어는 당시 서아시아 일대에서 링구아 프랑카로 작동했습니다. 게바는 바울에게서 큰 책망을 받았는데, 본심은 (폐쇄적인) 유대인으로 살면서 그 "외식"만을 그리스도인으로 꾸민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같은 페이지). 배드로가 대체 누구였습니까? 제자 중 으뜸가는 이였으며, 반면 바울은 오히려 초기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여 로마 당국에 넘기는, 그리스도의 길과 정반대 대척점에 서 온, "유대인 중의 유대인(p152)"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마저도 미진한 면이 있어 바울에게 책망을 받았으니, 하물며 가장 부족하고 가장 죄 속에 크게 빠져 영혼을 더럽히는 우리들이, 올바른 길을 찾고 복음을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도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오히려 선민 의식에 빠져 자신의 죄를 가볍게 여기니 이보다 더 걱정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파트 6에는 성도들의 간증이 나옵니다. 세상에는 참 별 일이 다 있어서, 어떤 심방은 한 번 요청하는 데 천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책에는 "이걸 예수 굿이라고 하는거야"라는 말도 나오는데, 예수깨서 직접 보시기라도 했다면 "내 아버지의 집을 돈놀이로 더럽혔다!"며 불호령을 내리셨을 법합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된지 백 년이 훨씬 넘었으나, 오히려 토속의 못된 풍속과 접합하여 이처럼 병든 행태가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게 굿이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욥은 한때 남부러울 바 없이 윤택한(세상의 기준에서) 삶을 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영혼의 갈증을 느끼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거짓말처럼 온갖 악운이 그에게 닥쳐 옵니다. 사탄의 장난과도 같은 매일이 이어졌으나, 욥은 이 모두가 주님의 역사라 여기고 절대적으로 섭리 앞에 겸손하며 순명하는데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입니다. 세상에서 남들 누리는 복락을 고루 누리며 살게 해 달라고 빌어대는 비천한 단계를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참된 길이 무엇인지, 이를 한눈에 직시하는 방법이 의외로 간단하다는 사실이 알고 보면 더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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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이는 입시의 기술 - 대학 입시, 모든 것이 전략이다!
윤윤구 지음 / 아이스크림(i-Scream)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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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입시 제도는 과거와 달리 다양한 전형이 존재하며, 따라서 그 중 자신의 여건과 적성에 맞는 걸 골라 더 현명하게, 효율적으로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책 제목에도 "아는 만큼 보이는~"이란 문구가 들어갔는데, 책을 열어 보니 과연 다양한 방법들이 나와 있었고, 어떻게 해야 이런 방법들을 잘 활용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또 직관적으로 와 닿게 설명하고 있더군요.

저도 간혹 각 대학교 입시관리부서에 직접 연락도 취하곤 해서, 도대체 전형 과정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브로셔를 받아 보고 정독한 적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어떤 경우를 상정하여 마련한 경로인지 짐작이 어려운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어 보니, 역시 전문가의 오랜 경험에서 비롯한 안목이 일반인과는 다르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022학년도 입시의 중요한 변화는 정시 확대였습니다.(p19)" 이른바 N수생들은 언제나 입시에서, 특히 정시 입시에서 큰 변수였습니다. 정시확대가 늘어난 만큼 이들의 수도 늘어날 것이며, 저자는 특히 "작년에 코로나 때문에 손해를 봤다고 여긴 이들이 많은 만큼" 이들의 응시가 큰 폭으로 늘어나리라 예상하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현역들, 즉 현 고3들은 수시 전형을 더욱 꼼꼼히 살피고 신중하게 임해야겠습니다.

구체적으로 학생부 전형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예를 들어 고려대의 경우 교장 추천 전형의 비중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80%는 우리가 익히 알던 대로 정량 평가 위주의 교과 성적인데, 나머지 20%의 경우 진로선택, 전문교과를 반영하며 이것이 "정량"이 아닌 "정성(定性. qualitive)"평가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저자의 전망(p87)입니다. 특히 저자가, 최신 트렌드의 뚜렷한 방향 변화 중 하나로 꼽고 있는 만큼 입시생들이 유념해서 이 부분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의 지적대로, 이 학생부 전형은 본시 정량 평가 위주였다는 점을 먼저 유념한 후 그 뜻을 잘 살펴야겠지요.

우리 나라 현 입시는 도대체 큰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아 문제입니다. 한때는 수능 최저 학력 기준을 없애거나 완화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 책을 보면 p88같은 곳에서 "반드시, 최저 기준을 충족하도록 주의하라"는 말까지 저자가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미디어에서 전후 맥락 없이, 혹은 부정확하게 대충 언질만 나온 수준의 워딩을, 신중한 검토 없이 그대로 보도하는 걸 어렴풋한 기억만으로 확신하곤 하는 우(愚)를 범합니다. 이런 개인적 기억+미디어의 신중치 못한 보도와, 이런 입시 전문가의 저서 중에서 언급, 강조되는 대목 중, 어느 것을 신뢰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후자 아닐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 나는 이렇게 들었는데"라며 고집을 안 꺾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녀의 장래가 달린 문제이니만큼, 확실한 정보와 권위 있는 식견에만 근거하여 이런저런 판단, 결정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공교육의 참된 목표도 그러하며, 대저 학습이란 자기주도의 과정이되어야만 합니다. 아무리 결론이 타당해도, 그 과정에 대한 올바르고 이성적인 납득 없이, 그냥 주입 강요하는 식이라면 그게 효과적으로 머리에 자리할 리도 없고, 학생의 인성도 왜곡되며 정신에 상처를 입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이 책 p102 이하 같은 곳에서는, 자기 주도의 학습, 창의력 발휘, 호기심 발동 등의 과정을 특히 강조합니다. 대체 자기가 스스로 재미가 있어서 공부하는 학생과, 코뚜레에 코가 꿰어 끌려가는 가축처럼 억지로 공부하는 학생 사이에 얼마나 큰 결과의 차이가 날지는 불문가지 아니겠습니까.

특히 최근 수능 중 수학 영역에서 이른바 킬러 문항의 경우, 난도가 상당히 높기로 유명합니다. 유형도 독창적이거니와 기존의 이름난 참고서에서 전혀 다루지 않는 방향의 문제가 출제되기에, 설령 족집게 강사로부터 고액 과외를 받는다 한들 그 해결을 바라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 책 p167 이하에, 사교육의 병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있습니다.

누구는 "수학 천재들이 살아서 와도 제 시간 안에 못 풀 것이다"고도 하던데, 혼이 나야 할 소리입니다. 그런 사람의 정신 세계와 역량을, 그 레벨이 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짐작하겠습니까? 혹 뉴턴과 아인슈타인이라면 그저 자신의 부족함을 정직하게 시인해도 할 뿐이지, 자신이 짐작도 못할 타인의 기량을 함부로 입에 올리며 남 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현실의 한국에서 만점을 맞은 수험생은 그럼 그런 역사적 위인보다 능력이 더 뛰어난 것이겠습니까? 참 다행한 일이긴 합니다만.

책의 저자는 책 곳곳에서 "자기주도 학습"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생각 외로 효과가 큽니다. 어떤 미션을 그저 재미삼아, 스스로 흥미가 발동하여 도전에 임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학생과 성취도 면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재능이 노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 노력하는 사람은 좋아서 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스스로가 학습 동인을 찾아서 열심히, 매 순간 희열을 느끼며 한 계단씩 오르는 학습자에게는 결국 정복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p116 이하에서 말하는 "진짜 공부"이기도 합니다.

p153 이하에는 입시의 성패를 좌우하는 독서 전략이 나옵니다. 저자는 이 화두를 꺼내며, 여기서 소개하는 책들은 결코 필독서가 아니라는 말까지 덧붙입니다. 사실 필독서란 없으며, 자기 주도 학습을 할 줄 아는 학생에게는 그가 스스로 고르는 모든 책이 양서이며 독해력 양성의 기반이 됩니다. 독서는 그저 입시 전형으로서의 논술 대비 수단이 아니라, 입시를 넘어선 인생 전체의 자양이고 밑받침입니다. 물론 국어 영역에서 비문학 고득점 확득의 지름길이기도 하죠.

결국 입시의 정석은, 인성과 바른 세계관과 학습 능력, 문제 해결력이 일체가 된 길입니다. 문제를 잘 푸는 학생이 인성 면에서 문제가 있으리라는 짐작은, 이처럼 변화하는 입시 제도 하에서 더 이상 근거를 갖지 못합니다. 공부의 정석을 걷는 선택이, 결국 자신의 인생 진로 전체에서도 올바른 방향을 잡는다는 사실을 학부형과 입시생 모두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얄팍한 사교육만으로는 어떤 전형도 쉽사리 통과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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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의 세계 - 어느 미술품 컬렉터의 기록
문웅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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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의 기본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종류를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모으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다."(p51)

보통 어렸을 때 시작하는 수집은, 친구들이 뭘 모으는 걸 보고 부러워서 따라하거나, 아니면 부친 등이 시작한 컬렉션을 승계하거나일 것입니다. 이 책 저자께서는 어려서 모으기 시작한 펜대들이 그 출발점이었다고 회고합니다. 환경이 크게 변화해서인지 팬대에 그리 다양한 종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수집의 목표가 되려면 한 개인이 다 커버 못할 만큼 종류가 다양해야 할 듯합니다.

p55에는 석농 김광국이란 분이 내린 "수집"의 정의가 나오는데, 그 뜻이 참으로 깊어서 잠시 직접인용해 보겠습니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면 모으게 되니, (이쯤되면)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이 아니다."(p53)

모으는 일이 여기에까지 이르면 이것은 이미 도를 닦는 경지에 가깝겠습니다.

전남 장흥 출신인 저자는 본업이 사업가입니다. 그 수집의 내력은 참으로 오래된 것이어서 책 p259에는 "'빛의 화가' 우제길의 전시회가 5.18 직후에 열렸다"라는 문장도 나옵니다(이 사건은 1980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문예 작품 수집에 일가견이 있으실 뿐 아니라, (예컨대 서예 작품을 수집하려면 일단 글씨를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하듯) 본인 자신부터가 서예에 소양이 높은 분으로 보입니다. p263에는 아들이 미대에 합격하자 "책이 많은" 홍성담 화가에게 데리고 갔다는 말도 나옵니다.

p34에는 "글씨 공부를 하는 후학으로서"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또 p256 등에는 "감히 내가 일속(오명섭 서예가의 아호입니다)의 서예 세계를 논할 처지는 못 되지만" 같은 겸손의 표현도 있네요. 거듭되는 말이지만, 존경 받는 수집가는 그 가진 컬렉션의 볼륨으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소양으로 칭송 받습니다. "서예술은 뜻있는 글귀의 문자를 조형적으로 형상화하면서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다(p257)." 그러니 서예는 단지 글씨를 시원하고 깔끔하게 잘 쓰는 기술이 아니라, 피카소가 현실의 다양한 형상으로부터 입체를 추상하듯, 엄연히 이데아를 창조하는 예술인 것입니다.

"구매욕을 절제할 수 없던 시절도 있었다." 과연, 수집이란, 최소한의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속할 수 없는 취미이자 활동이기도 합니다. 또, 재력이 있다면 구태여 구매욕을 절제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재력"이란 수집의 필요조건일 뿐 그 이상이 될 수는 없고, 높은 안목과 인문적 소양이 더 본질적인 요소이겠습니다.

p193에는 허버트 드레이퍼의 유명한 그림 <오디세우스와 세이렌>이 나옵니다. 하반신은 물고기인 듯도 보이지만 뱃전까지 거의 다 기어오른 한 세이렌은 이미 인간 여성의 고혹적이고 늘씬한 다리를 다 갖추었는데 이미 유혹에 반쯤 넘어간 인간의 눈에 그리 보일 뿐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그림은 그리스 로마 신화 관련 저술로 유명한 고 이윤기 씨도 자신의 책에 도판으로 즐겨 실었지요. 여기서 저자는 오디세우스를 두고 "마음 놓고 수집품을 모을 수 있는 유한계급"의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안목은 탁월하나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그 답답한 처지를 무엇으로 표현할지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안타깝지만 이 역시 엄연한 현실입니다.

엘러리 퀸의 어느 단편을 보면 두 수집가가 하나의 아이템을 놓고 다투다, 무한정 가격을 올리지 않으려고 타협(담합)하여 일 년을 절반으로 나눠 "공유"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거기에 나온 명대사 중 하나가 "수집가에게는 원하는 물품을 손에 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어느 가격이었냐도 중요하다."였습니다. 하지만 문웅 저자님의 관점은 이런 류와는 사뭇 다른 듯하며, 수집의 첫째 동기는 "일단 자기가 좋아해서 구입하여 감상하는 것(p269)"이라 하십니다. 그러니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 감탄, 존중"이 우선이며, 방대하고 성공적인 컬렉션의 형성은 그 다음 문제인 셈입니다. "미술 감상에는 문외한이면서 투자만을 목적으로 구입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는 얼마든지 더 좋은 투자처가 있음을 말해 주고 싶다(p269)." 저자의 말입니다.

"왜 돈 많은 사람이 그림을 사들일까? 그것은 예술 자체로서의 가치 외에도 투자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p89)." 앞선 진술들과는 살짝 모순인 듯도 보이지만 저자의 사업가로서 날카로운 통찰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아마, 저를 포함하여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펴 든 한 이유이기도 하겠습니다. p111에는 "이제 막 오르기 시작한 작가의 작품"을 권하는 내용도 있고, p92에는 "G2로 부상하기 시작한 중국 작가들의 작품"에 눈을 돌려 보라는 권유도 있습니다. 물론 투자건 수집이건 거액을 들여 물품을 소장하는 최종의 선택과 책임은 본인에게 있겠습니다. 사실 이런 투자의 원칙은 주식이건 코인이건 어느 분야에도 공통으로 적용됩니다.

"더 큰 보람을 느끼려면 시장에서 이미 거래가 활발해진 작가들보다는 신진기예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도 있다(p132)." 책에서는 "그런 수집가야말로 메세나의 역할까지 겸할 수 있다"고도 하는데, 사실 이처럼 일찍 그 가치를 발굴할 줄 아는 수집가는 투자자로서도 크게 성공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p109 등 책의 여러 군데에서 자신을 "예술경영학자"로 규정합니다. 예술가가 경영의 자질까지 갖추기는 쉽지 않으나, 수집가가 예술 감식의 안목과 경영의 재능을 두루 갖추는 건 오히려 보편적이지 않을까 생각도 됩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건, 잠재된 그 무엇의 장래 가치를 통찰하는 안목, 또 하나의 대상을 두고 온갖 노력을 쏟아부을 수 있는 열정(enthusiasm)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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