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투자의 오해와 진실
김현영 지음 / 하움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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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요즘 각종 투자의 바람이 크게 부는 상황입니다. 암호화폐, 주식, 선물, 부동산... 시중에 유동성이 넘쳐나니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으나, 이런 돈이 투자 섹터로 몰려 그나마 다행이지 만약 다른 실물로 흘렀다면 생필품 등의 인플레이션 때문에 크게 고생했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풍부한 유동성이 아니었다고 해도, 원래부터가 한국은 부동산 불패의 신화가 통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니 부동산 투자에 대해, 근거 없는 오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거시경제에 해롭기까지 한 착각, 이런 것들이 한데 어울려 가계와 개인의 피해를 부르고 국민 경제를 좀먹어 왔던 게 사실입니다. 요즘처럼 수도권, 혹은 일부 지방의 집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를 때에는 더욱 그 투자 속성에 대해 정확한 정보와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 책은 부동산 투자 전문가의 노련하고 예리한 시각으로 독자의 그런 필요를 잘 충족시켜 주는 듯합니다.

한국에서는 아파트의 소유와 거주가, 어느 정도 중산층 소속 여부를 밝히는 지표 구실을 합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한국에서 가장 비싼 가격을 형성하는 주택 집단도 무슨무슨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아파트 브랜드가 대부분인데, 일반 주택이 아닌 아파트군이 이런 지위를 차지하는 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습니다. 책 p30에는 아파트의 원조라 할 만한 고대 로마 제국의 "인슐라"가 나오는데, 이런 아파트는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공동 주택의 전형에 불과했습니다. 책에도 나오듯이 부유층은, 오늘날 우리가 서초동 등에서 볼 수 있는 단독주택형인 "도므스(도무스)"가 주된 거주 형태였죠. 몇 년 전 한국에서도 정발되어 큰 인기를 끈 콜린 매컬로 여사의 소설 <로마의 일인자> 시리즈를 읽어 봐도 이런 사정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인슐라"는 원래 "섬"이란 뜻입니다. 슬럼 등이 현대 도시에서도 "섬" 취급을 받으며 경원시되는 건 사정이 그때나 같습니다.

책에는 과연 부동산 전문가의 내공이 잘 배어나는지라 한국에서 최초로 등장한 아파트가 무엇이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아파트가 서민, 중산층의 선망 대상이 되었는지가 재미있게 잘 설명됩니다. 현재 부동산 관련 책이 시중에 여러 권 나와 있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이렇게 독자가 논의 대상의 지난 연혁까지 잘 파악할 수 있게끔 근본 있게(?) 설명해 주는 방식이 좋더라구요.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에서 아파트가 주거의 주류로 부상하는 건 꼭 이례적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2000년대 이후 초고속 인터넷망이 새로 등장했고, 이런 인프라(사설이건 공영이건 간에)는 대단지 아파트에서 특히 효용이 높으리라는 점은 전에 미처 예측할 수 없었던 현상이었습니다. 한국은 가뜩이나 아파트의 비중이 높았기에 이 점이 폭발적 시너지를 내게 되었죠. 한때 IT 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건 아파트 중심의 주거 구조가 한몫을 한 게 또한 사실입니다.

이처럼 아파트 위주의 주거 문화가 사실은 보편적 패턴과는 거리가 먼 한국 고유의 현상이기도 하기에, 책에서는 여러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외국인에게 한국의 대단지 아파트 사진을 보여 주면, (남북의 군사적 대치라는 선입견 때문에) 이것이 군사시설이 아니냐는 오해 가득한 답도 돌아온다고 합니다. 사실 내국인이 봐도, 예를 들어 가도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목동, 분당 수내동 등의 아파트단지는 특히 밤에 보면 약간 무섭기까지 합니다(그나마 수내동이 좀 낫지만).

이어서 책에서는 위정자들의 잘못된, 혹은 정직하지 못한 정책으로 인해 그들이 올려 온 부당한 이득, 또 이와 동전의 앞뒤를 이룬다 할 서민들의 피해에 대해 논합니다. 또 아파트는 미등기 전매 등의 방법으로 탈세의 수단 노릇을 하기도 하는데, 탈세가 워낙 만연하다 보니 정직하게 세금 내는 서민들에게 부과되는 세율이 또 높아지게 되는 부작용마저 있다고 합니다.

부동산, 특히 아파트에 대한 왜곡된 인식 때문에, 사용가치가 교환가치보다 훨씬 떨어져도 조용히 묵인하는 풍조마저 있습니다. 일례로 최근에 건축, 분양된 몇몇 아파트의 경우 부실 하자가 심각한데도 주민들이 "아파트 값이 떨어질까 무서워" 쉬쉬한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왜 당당히 하자 보수를 청구하지 않으며, 시공 분양사도 배째라 식으로 나오는 건, 이런 말못할 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폭탄돌리기 패턴이 되풀이되며 피해를 끝에 가서 입는 건 실거주자들입니다.

저자는 "진짜 고소득자는 세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회비용을 따져 보면 낼 걸 다 내는 게 오히려 유리하며, 얄팍한 탈세 시도는 다음 번에 반드시 발목을 잡게 되어 있으므로, 투자가 가져다 줄 적극적 이익에 더 주목합니다.

또 "진정한 투자자는 (전국) 지도를 가까이한다"고 합니다. "지도는 많은 정보가 숨어 있는 보고(寶庫)"이며, 확실히 노련한 부동산 투자자는 지도를 끼고 살며 아예 머리 안에 맵 하나를 그려 놓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국토 종합 계획도", "수도권 정비 계획도" 등입니다. 사실 정말로 체계적인 부동산 투자를 위해 전략적으로 임하려면, 건축법 등 관련 강행법규에서 토지와 건물 규제를 어떻게 하는지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책 pp.138~146(제9장)에 공유수면매립법, p221 이하에 농지(제15장) 등에 대한 설명도 나와 있습니다.

주식 투자와 부동산 투자는 닮은 데가 있으면서도 매우 다르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우선 주식 투자는 큰 욕심 안 부리고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라"는 격언이 널리 통합니다. 만약 발바닥에서 사려 들면 결국 매수 시점을 놓치거나 아니면 하락세로 치닫는 종목에 물리기나 쉽습니다. 머리에서 팔려 들면 이 역시 매도 시점을 놓치고 큰 손해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 주식은 수시로 매수매도가 이뤄지지만, 부동산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주식은 사이클에 따라 가격이 한없이 추락했다가 오르지만, 그래도 부동산은 (적어도 한국의 경우) 일단 사면 가격이 잘 내리지 않습니다(그런 구간도 있었습니다만). 주식이나 부동산이나 "사이비 전문가들"의 마수에 속지 않게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충고도 덧붙입니다.

현재까지 한국에서 아파트는 불패 신화를 뽐내 왔으나(특히 지금처럼 아파트 값이 최고점에 달한 판이면...) 앞으로는 자연 경관 등 여려 입지 조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투자해야, 향후 불의의 손해를 보지 않으리라고 저자는 예측합니다. 사면 무조건 오르던 시대는 이제 서서히 저물어간다는 거죠. 또 타운하우스 등 외국에서 고가 주택 포맷으로 자리잡은 곳도 눈여겨 보라고 합니다.

특정 시점에서 절대 진리로 통하던 바가 앞으로도 계속 유효성을 유지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지식이건 간에 "원칙론"이 중요합니다. 한국적 현실, 또 어떤 특정 시대의 제약 조건 때문에 예외적으로 나타난 현상이, 앞으로 세계적 보편에 수렴되면 더 이상 과거처럼 지배적 트렌드가 될 수는 없죠. 책에서는 이런 "원칙"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접할 수 있어 좋았고 앞으로 투자시에 어떤 점을 유념해야 할지 점검할 수도 있었네요.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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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산에 갔다 빈손으로 오다 - 현안 스님의 미국 찬禪 메디테이션 이야기
현안 지음 / 어의운하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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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으로 척박한 비즈니스계(미국)에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도놀랍지만, 세속의 성공이 결국은 공허하다는 점을 깨닫고 제행무상 제법무아의 도를 만인에 공히 일깨우고자 출가를, 그것도 미국에서 감행하셨다는 사실 역시 매우 놀랍습니다. 이 책의 저자 현안 스님의 사연이 그러합니다.

미국에는 의외로 참선과 명상을 중시하는 유파, 모임이 많습니다. 아마도 서양권 문화 전통에서 이런 방식으로 수도를 권하는 가르침이 극히 드물기에, 동양의 이런 독특한 전통이 그들의 갈증을 채워 주어서가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아무튼 이 중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 즉 불교식으로 참선, 명상을 이끄는 곳은 의외로 또 아주 그리 많지는 않은 편입니다. 한국이야 워낙 불교의 전통이 깊기에 참선 하면 바로 불교를 떠올릴 정도이지만 말입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이것이 불교 법문이라는 점도 잊었다." 저자 현안 스님은 한국인이면서도 참선과 법문을 대뜸 불교와 연관시키질 않으셨나 봅니다. 그만큼 "현지인, 미국 사람이 다 되어서"일 수도 있겠죠. 혹은, 일단 내 영혼의 갈증을 채우려다 이것이 너무 좋아서 이끌렸는데 그게 바로 불교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렇게 무엇인가에 입문하는 게, 어떤 다른 동기나 합리화 같은 게 끼어들지 않아서 더욱 좋습니다. 정말로 순수하게 "내가 좋아서, 내가 필요해서" 받아들인 것이니 말입니다.

"수행하는 데에는 아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게 장점이 되기도 한다." 역시 독자인 제가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우리 한국에서 무슨 불교식 수행을 한다고 하면, 미리 내 자신이 어디서 어설프게 들은 선입견이나 지식에 따라 이후의 수행을 끼워 맞추려 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엇을 배울 때, 나아가 무엇을 깨달으려 할 때에는 그야말로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천진무구한 백지에 깨끗한 그림을 그러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이게 참 힘듭니다. 그런가하면 스님들과의 관계, 인사치레 이런 데 더 신경이 쓰이다 보니 마음 공부, 수련, 이런 건 어느새 뒷전이 되기 쉽습니다. 산중에 있어도 풍진 세상 한복판에 있을 때나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저자의 말씀대로 "수행하는 데에는 아무런 어떤 지식이 필요 없으며", 있으면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모든 수행은 지관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는 멈출 지(止)이고, 관은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하나에 집중하는 것(p89)"이라고 합니다. 특히 후자에 대해 "마음챙김"이라 하여 mindfulness라고 영어로 표현하는데 영미권에서 불교에 대해 대단히 큰 호응을 보이는 게 이 부분이라고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 동양인들이 허식에 치우쳐 정작 간과하고 넘어간 부분을, 그들이 예리하게 통찰해서 재정리한 부분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장 이 책 저자님(스님)부터도 한국 분이신데도 미국에서 출가를 하셨으니 말입니다.

마스터 스님인 영화스님은 오히려 "mindfulness"라는 번역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도 보이시네요. 영화 스님의 의견에 따르면 이 개념은 정념(正念)에서 유래했는데, 이건 proper thought라고 옮겨야 맞다고 말씀(p143)하십니다. right가 아니라 proper라고 하신 점이 눈에 띄는데, 이 깊은 뜻은 독자인 제가 두고두고 더 생각해 봐야 할 듯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에게 중풍은 정말 무서운 적입니다. 원영연 선생은 한국에서 열린 불칠, 선칠 프로그램에 멀리서부터 와 참석하셨는데, 영화 큰스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p134). 이미 신심이 깊은 분이셨는지 평소에 대화할 때는 항상 온화한 표정을 지으셔서 눈치챌 수 없었는데, 사실은 이미 신체의 절반이 중풍의 침노를 받아 자유롭지 않았으며, 가끔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가르고 지나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장기간 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한 끝에, 지금은 온몸이 같은 감각으로 돌아온 편이라고 합니다. 이러니 편안한 마음, 수행 끝에 안식을 찾은 영혼의 치유력이 얼마나 강한 위력을 갖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고통스러운 가부좌 자세 끝에 이런 효험이 나타났다고 하니 말입니다.

사실 요즘은 입식 생활이 주류이기 때문에, 특히 가부좌 자세를 취하라고 하면 대부분이 오래 버티질 못하고 다리에 쥐가 납니다. 이런 와중에 산중의 절에서 이 자세로 수행하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힘들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 참선에 진정 깊은 뜻을 두었다면 낯선 자세가 큰 문제로 다가오지는 않을 듯합니다. 책에는 20대 후반의 청년, 필라테스에 큰 관심을 갖던 이선미씨라는 여성분, 필리핀 출신의 30대 후반 여성 등등 면모도 매우 다채롭습니다.

저자께서는 수행을 지도할 때, 우리가 흔히 쓰곤 하는 "행복, 사랑" 같은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스님 말씀은, 이런 단어는 매우 주관적일 뿐 아니라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을 담게 되므로 어차피 무의미하다는 취지입니다. 부처님도 그의 제자 마하가섭을 향해 불립문자, 심심상인, 염화미소의 가르침을 전한 바 있습니다. 중요한 건 실천이요 행동이지, 번잡한 말이 아닙니다. 말은 오히려 감옥이고 혼선의 근원입니다. 세속에서 이룰 수 있는 성취를 웬만큼 다 이루고 돈도 원 없이 벌어 보신 성공한 사업가의 생생하고 실감나는 "친근한 법언"이라 더욱 집중하여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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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바라봅니다
김영희 지음 / 아름다운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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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죽음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과연 사람은 죽고 나서 다시 다른 생으로 태어나기도 하는 걸까요? 윤회, 환생이 맞는지 그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만약 이것이 근거 없는 생각이라면, 얼마나 죽음이 두려웠기에 인간이 이런 걸 다 상상해 냈을까 하는 결론이 나오겠으며, 유한한 생 앞에 한없이 무기력한 우리네의 운명이, 측은, 처연하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생은 소중하기에 치열히 살아야만 하며, 죽음은 그렇게 치열히 살아낸 생이 끝날 무렵 최대한 담담하고 평온하게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김영희 저자께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은 영원한 소멸입니다." 참 냉정하고 야멸차게 들리지만, 우리는 모두 지금 이 단정, 단언이 사실은 팩트임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죽으면 끝이지 그 뒤에 뭐가 있나?" 천국도 지옥도 허랑한 이야기이며, 현생 뒤에 내세가 있다는 말 또한 제발 그랬으면 하는 인간의 희망이 담긴 주문일 뿐입니다.

어차피 죽어 없어질 영혼, 육신이라면, 그저 완전한 사멸로 끝나고 마는 생이라면, 이 유한하게 주어진 인생이 너무도 고맙게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죠. 어찌 보면 저 소박한 표현 속에 생(과 사)의 진실과 요체를 정확하게도 요약했다는 말밖에 안 나옵니다. 저자께서는 말합니다. "마음 속에 타인에 대한 사랑과 인정을 따듯이 담아 놓으면, 죽음에 이르러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생을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죽는 순간 온갖 회한과 한맺힘에 부르르 떠는 이라면, 그는 살아 생전에 인간 관계를 깔끔히 정리 못해서 그러는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죽음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역시 감탄이 나올 만한 통찰입니다. 이렇게 살다 그냥 갈 수 없어, 죽고 나면 무엇이든 연속되거나, 어떤 보상이 있을 거야, 이런 생각을 우리는 갖곤 합니다만 그게 얼마나 철없이 떼를 쓰는 어리광인지 동시에 우리는 내심으로 다들 인정합니다. 제1장에서 저자가 말씀했듯, 한번 죽으면 그만이지 다른 무엇이 남질 않습니다. 그러니 주어진 삶, 유한한 인생을, 가능한 한 치열하고 성실하게 산 사람이, 죽음 역시도 지저분한 미련 없이 깔끔하고 객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객관적"이란 말을 썼지만 사실 저자는 "잘 산 사람이 죽는 것도 잘한다"는 의도 아니셨겠습니까. 죽어서 온갖 괴로움과 두려움에 압도당하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죽는 이만큼 불행한 사람도 또 없습니다.

"가벼운 삶은 죽음도 가볍게 합니다." 여기서 "가벼움"이라는 건, 세속에 집착하지 않고 산뜻한 처신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주관 없고 경박하며 제 중심을 갖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바람직한 건 "자기 중심이 잡히고 진중하며 무게 있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은 쉽게 가치관이 흔들리지 않고, 어떤 시련이 닥쳐도 쉬이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진중한 삶을 산 분이, 죽음에 임해서도 침착하고 현명하게 신변을 정리하지 않겠습니까.

"죽음은 반드시 옵니다." 만약에, 죽음을 잘 준비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이들이 있다면, 운명 전체를 주재하는 신 같은 존재가 마치 로또 복권 당첨 확률로 그들 중에 자격 있는 자를 골라 영생이라는 선물을 준다면, 사람들은 아마 남에게 해꼬지하지 않고 보다 도덕적인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반대로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꾸미는 악질 위선자, 사기꾼들이 늘어날까요? 여튼, 제아무리 도덕군자(겉과 속이 같은)라 해도 죽음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매우 낮은 확률이나마 이를 모면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정확한 날짜만 모른다뿐 누구에게나 닥쳐 옵니다. 이 현실을 냉정히, 현명히 직시하는 이가 더 성실하고 보람된 나날을 이어갈 수 있음은 자명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예전에 임권택 감독의 어느 영화를 보면 장례식을 축제처럼 표현한 게 있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생을 담대하고 보람차게 살아낸 이에게, 평화롭고 담백한 죽음은 하나의 상장, 표창, 수훈과도 같습니다. 책은 "아름답고 훌륭한 죽음을 죽자"는 내용이지만, 그 말은 결국 "주어진 삶을 최대한 알차게 보람되게 살자"는 뜻이나 같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치열하고 알차게 살아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죽음을 훈장처럼 맞고 떠나도록 하죠. 멋진 죽음은 멋진 살의 목에만 걸어 주는 꽃다발과도 같습니다. 자격 없는 자에겐 결코 주어지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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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아티스트로 산다는 것 - 청춘의 화가, 그들의 그림 같은 삶
YAP 지음 / 다반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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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생각으로, 예술, 혹은 그를 만드는 예술인들이란 우리 사회에서 근린공원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고 여깁니다. 곁에 없다고 해서 당장 목숨의 유지가 곤란한 건 아니지만, 없어도 살기야 얼마든지 살겠지만, 만약 없다면 삶이 참 피폐하지 않겠습니까. 광범위한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서울 혹은 수도권을 크게 벗어나고 싶지 않아들 하는 거고, 집값도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 되기도 하겠고 말입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예술인들의 삶이란, 예술이 한국 사회에서 대접 받는 만큼 (종전에 비해) 향상된 바가 사실 거의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대중 앞에 많이 노출되고 미디어를 통해 인정 받은 극소수의 아티스트들은 사정이 크게 다르겠으나, 많은 아티스트들은 그들의 실제 공헌도, 성취도, 잠재력에 무관하게 사회에서 거의 일률적으로 푸대접받는 게 현실입니다. 작년 9월 이낙연 더불어당 대표가 김수로씨를 만난 자리에서 그가 현장(공연계)의 고충을 대변하여 전하는 말을 담은 뉴스를 읽은 적 있습니다. 사실 사무직, 생산직 노동자들의 아픔이나 애로라면 이를 제도적으로 대표하는 어떤 조직이라도 있어서 그나마 사정이 낫습니다. 아티스트들은 온갖 어려움과 인식 부족 앞에 맨몸으로, 개인으로, 내던져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의 저자 명의인 "YAP"은 young artist power의 약칭이라고 합니다(p7). 강병섭, 고스, 권태훈, 김동욱 등 여러 아티스트들이 이 책에 실린 여러 꼭지의 글들을 써 이뤄진 책이더군요. 각 꼭지 말미에는 필자의 인스타그램 ID가 적혔기 때문에 관심 있는 분들은 웹상에서 다시, 깊이 있게, 작품으로, 이분들을 만나볼 수 있을 듯합니다.

책 앞부분 중에는 고스라는 분의 글을 관심 깊게 읽게 되었습니다. 미술의 본산지는 누가 뭐래도 프랑스겠죠. 피카소도 스페인 사람인데 어려서부터 그 재능을 인정 받고 파리로 건너와 여러 아티스트들과 교분을 나눈 끝에 화가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죠. 통속 소설가 시드니 셸던의 작품 <게임의 여왕>을 보면 주인공이 아들을 프랑스로 보내고서 그 예술을 향한 집착을 끊기 위해 모략을 쓰는 장면이 나오는데 역설적으로 예술가로서 대성하려면 아무래도 그 본고장에 가서 보고 배워야 한다는 점 다시 확인이 가능했죠. 뭐 원효 대사의 해골물 일화에도 나오듯 진정 뜻이 있다면 어디에서든 불가능하겠습니까만 아무래도 쉽지 않죠.

고스 님은 프랑스에서 미술 교육을 받고 아마 충격을 받은 듯합니다. 대화가 많다, 대화가 많다... 사실 저도 어려서는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유치원에서 미술 배울 때 "비 오는 건 이렇게 이렇게 그려야지!"라는 채근을 받고 좌절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쌤이 시키는 대로 그려 놓고보니 그럴싸하긴 합디다만 이런 주입식(미술을 주입식으로 가르치다니!) 교육 하에서 무슨 (창의력이 그 본질인) 예술이 싹트겠습니까? 지금도 저는 제 중요한 재능 하나가, 나쁜 교육 시스템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는 아쉬움을 거둘 수 없습니다.

진정한 미술은, 그 표현의 방식과 아이디어의 구체화를 놓고 마스터와 학생 사이에 끝 없는 토론이 이뤄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살바도르 달리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서 그는 4차원 형상을 2차원 평면 위에 표현하는 시도를 했는데, 그가 수학적, 혹은 물리학적 소양이 없었다면 이런 작품은 나올 수가 없었죠. 우리나라처럼 천편일률적인 테크닉을 주입식으로 가르치거나, 해외의 트렌드를 어설프게 모방하고선 선생이나 학생이나 기만적인 에고를 달래는 식이 되어서는, 세계적인 예술가가 나올 수가 없죠. 예술가는커녕 간판쟁이들도 키우기 힘들다고나 할까요.

빅터 조 님은 강원도 영월 출신인가 봅니다. "어려서부터 씨름 선수는 유독 경상도 출신이 많은 게..."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사실 특정 세대는 민속씨름(프로 씨름)이 인기 스포츠였던 환경에서 자랐기에 씨름에 관심이 있을 수 있다 쳐도, 그 선수들이 경상도 출신이 많다는 점까지는 모를 수도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 대목이 참 독특하게 여겨졌네요. 사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천하장사를 지낸 장지영 씨, 또 한참 후의 박광덕 씨, 이런 사람들은 경상도 출신이 아니죠. 다만 경상도의 왼씨름 방식이 해방 후에 표준으로 굳어서 그렇다는 설이 있었으나 이 역시 사실이 아닌 게 최근 판명되고 있습니다. 여튼 아무리 예술적 재능이 있어도 그런 자질을 꽃피울 수 있는 환경이 또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박훈님의 이야기도 공감이 많이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느꼈던 다크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꼭 무슨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어서가 아니라, 외로움을 많이 탔다거나 이상하게도 음침한 공간에 필이 꽂힌 적이 많았다거나 하면 이런 성향이 생깁니다. 다크한 감정을 끝없이 표현할 공간, 기회라도 생기면 그나마 다행이죠.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 지금은 이케아에서 일한다는 필자 박훈님이, 뭐 직장에서도 크게 인정 받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겠지만(그러고 있으시겠지만) 언젠가는 전업 예술가로서만 사회에서 인정 받고 돈도 많이 버시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장은혜씨는 "근 20년 전에 대학을 졸업하신" 분이네요. 여튼 아직 젊다면 젊으신 나이이며, 예술혼이란 물리적 연령으로 측정할 건 아니겠으니... 대부분 이쪽 계통 분들이 그러시겠지만 "졸업 후 전공과는 무관한 일을 더 오래" 하신 듯합니다. 그러나 다시 공부를 계속한다거나, 본격적으로 예술가의 길을 걷고 싶으시고 현재 그러고 계신 그 열정, 충분히 공감합니다. "미친 듯이 투잡 쓰리잡 뛰어 독일 유학 갈 돈을 모았다." 그리고 한국의 직장도 계속, 종사하다가 나오다가 다시 들어가고... 이 역시 저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스트릭랜드의 행보와도 비슷하죠(그는 딱 한 번에 자발적으로,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그만둔 게 다르지만). 역시 준비의 시간은 있어야 합니다. 직장 다니면서 고뇌했던 그 시간들도 다 준비의 자양분이라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필자 중 정진 님의 지인이 한 이야기는 참 묘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회사에서 돈을 받고 일하는데, 너는 돈을 남한테 주고 전시를?" 이게 정확하게 평균적인 한국인(저 포함)들이 예술인들을 보는 시선의 수준입니다. 물론 예술가가 현실적인 수입을 (올려도) 올리는 건 전시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전시를 통해 (잠재적) 구매자와 소통을 한 이후가 됩니다만 말입니다. 몇 달 전에 코로나 재난지원금 1500만원 지급으로 논란이 된 어느 분 아드님의 문제도 있었지만, 또 그분의 예술적 성취도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겠지만, 여튼 이만큼이나 한국 예술인들의 상황이 열악하다는 하나의 반증입니다. 필자께서는 무역회사를 한때 다니기도 한 분이고, "나의 경계"에 대해 어떤 실존적 고민을 한 분이기도 해서 이 부분 특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노채영 님도 (본문에 나오듯이) 한 5년 정도 회사를 다닌 분입니다. 이 책에는 이처럼, 전업 예술가가 되고 싶어도 그리 되기 힘든 많은 (현실) 아티스트들의 솔직한 회고, 고뇌가 잔뜩 풀어져 있어 좋았습니다. 승무원으로도 근무하시고, "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미술에 대한 진로는 확고했었다"고 하시는 분이라 더욱 그렇더군요. "일은,전업 작가로 버티기 위해서 하는 거다." 이렇게 일과 일 사이의 경계가 험난하니, 예술가가 자연히 "철학자"가 될 수밖에 없나 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사실 고뇌하는 어느 영혼에게 적어도 그 고뇌의 시간만큼은 영원처럼 깁니다만, 성취 후 그 여유와 쾌감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촌음처럼 또 짧습니다. 예술가도 아니고 예술적 소양도 없지만, 남이 한 일의 가치와 그에 담긴 노고를 평가할 만큼은 우리 모두가 좀 마음이 열린 사람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에는 필자들의 작품이, 컬러 백상지에 선명한 사진으로 담겨 이를 감상하는 재미, 보람 또한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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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준비교육 20강 - 삶이 행복해지는 죽음이해, 돌봄에 대한 가르침
김옥라 외 지음 / 샘솟는기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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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진시황은 중원을 통일한 후 지존의 자리에 올랐으나 죽음 앞에 무력함을 깨닫고 동남동녀를 보내 불로초를 구하려 들었습니다. 허나 그 시도는 무위로 끝났고 그의 제국은 2세 호해의 손에 들어간 후 오래지 않아 무너졌는데 이는 아마도 진시황의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대비가 매우 부실했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는 기인하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고대 제왕의 죽음도 이러할진대, 우리들 평범한 소시민의 경우야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얼마나 깔끔하고 대범하며 합리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준비하느냐에 따라, 우리들 인생이 얼마나 보람되었으며 알찬 유산을 남기는지가 결정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보통 대학교 학부 과정 강좌는 16강 정도가 한 학기를 구성합니다. 사실 "개론" 수준이라 해도 16강 정도로 과연 마스터가 가능할지는 언제나 의문이었습니다만, 이 역시 가르치는 분과 배우는 이의 마음가짐, 열의, 재능에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강"으로 이뤄진 이 책은 어떠할까요? 저는 처음에 책을 받아 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 체제나 구성, 내용이 마치 학창 시절 열독한 교과서와도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너무 어려운 책은 아닐까?" 솔직히 그런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 혹은 제목에 끌려 책을 펴 든 독자가 염두에 둔 토픽 자체가 무엇일까요? 바로 "죽음"입니다. 이 죽음이라는 게 과연 만만한 과제입니까? 천하를 통일한 자마저도 끝내 정복하지 못하고, 혹은 성숙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서 패배한 대상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죽음을 이해하고 준비한다면서, 간단한 충고 몇 마디로 대신하려 들었다면 이는 죽음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을 보다 잘 준비하고 영접하려는 이들(그 시기에 차이는 있을망정)이라면, 이 정도 "교과서"는 수능준비하는 마음가짐으로 열독 정독하고 마음 속에 새길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로고테라피란 무엇입니까? 물론 이 용어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많은 다른 쓰임새들이 있겠습니다만, 이 책에서는 그 창안자인 오스트리아의 빅토르 프랑클(책에서의 표기는 "빅터 프랭클") 박사의 입장을 충실히 따릅니다. 이분은 정신분석학의 태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보다 약 반 세기 뒤의 인물인데, 역시 제국 시절, 혹은 그 직후 시기의 오스트리아는 의학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날 행해지는 심리치료의 이론적 바탕 대부분은 이분의 업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로고테라피에서 "로고"는 물론 의미라는 뜻(p64)입니다. 이 용어는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했을 때의 바로 그 말씀, 로고스와 어원이 같기도 합니다. p60에서 인용되는 프랭클은 "죽음은 인생의 3대 비극이지만, 결단코 죽음은 삶의 비극에만 그치지 않고, 삶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들고, 나아가 삶을 완성하는 가장 강력한 자극"이라고 합니다.

우리들 인생은 그 끝이 있고 무한정이 아니기에, 우리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더 의미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며 주어진 시간의 귀함을 깨닫습니다. 끝도 없는 무한의 시간 안에서라면 인간은 그저 말초적 쾌락에 몰두하며 전혀 자신을 객관하거나 의미를 탐구하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타인을 배려하려 들지도 않고 함께 세상을 개선하려는 시도도 전무하겠으며 모두들 그저 하등동물처럼 제 본능에만 충실할 것입니다. 죽음은 이처럼, 인생과 존재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의 동기와 유인을 제공해 줍니다.

"로고테라피는 그저 치료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의 진정한 성장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다른 치료 행위와 달리) 그저 깨어진 균형을 회복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균형까지 깨뜨려 새로운 불균형까지 만들어 냄으로써 치료와 성장이 (동시에) 이루어지게 한다.(p65)" 책의 이 문장을 잘 읽어 보십시오. 죽음을 상상하면 한 없는 불안과 슬픔이 몰려와서 이 책을 펼쳐 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은 아마 "정신의 균형, 안정이 깨어져 치료가 필요한" 분들일 겁니다.

그런데, "죽음준비교육"은 그런 분들에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죽음 같은 건 아예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젊은이들, 혹은 현재 아무런 고통과 불편과 궁핍을 겪지 않기에 지극히 마음이 안정된 분들에게도, 오히려 이 책은 더 강력한 효용과 수요를 가집니다. 이런 분들은, 인생에서 여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곤궁(사람에 따라서 이런 위험이 아예 면제된, 축복 받은 이들도 물론 있습니다), 혹은 죽음에의 위협(이것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등을 비로소 겪을 때, 처음으로 정신적 안정이 깨어지며 극도의 불안정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백신도 건강할 때에서야 맞을 수 있듯이, 이런 분들일수록 오히려 평소에 죽음을 "정석에 맞추어" 대비해야 저런 갑작스러운 위험에 닥쳐서도 순조롭고 지혜롭게 극복해 낼 수 있겠습니다. 태평스럽게, 현재의 편안함과 안일함에 매몰되는 것도 여튼 균형이며,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균형은 빨리 깨뜨려버려야 참된 마음의 평화, 올바르고 단단한 (새로운) 균형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거죠.

"아빠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아빠는 지금 먼 여행을 떠나셨단다(p112)." 아직 나이 어린 아이들에게 죽음이란 이해할 수 없는, 무섭고도 아득한 미스테리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나와 즐겁게 놀아 주던, 정서적으로 깊이 의존하던 어떤 거인이 갑자기 세상을 떴다는 게, 그 어른의 부재라는 현실 자체도 견디기 어렵지만, "돌이킬 수 없는"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되는" 속성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고, 이런 속성을 지닌 죽음이라는 게 너무도 두렵습니다. 이 책 6강에서는 이처럼 어린이들이 마주해야 할 가까운 이들의 죽음에 대해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대비 교육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p122에 나오는 J. William Worden의 방식이 인상 깊었습니다. 세 가지 방법이 나오는데 또래들과 함께허는 집단 활동, 상담, 부모의 개입 등입니다. 이 중에는 미술(그림 그리기) 등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게 하는 방식이 포함됩니다.

"죽음 교육은 그 속성상 다학문적(multidisciplinary)인 접근이 유용하다.(p142)" 이 문장은 물론 미국의 중학생들을 염두에 주로 둔 진술이지만, 어차피 죽음에 대한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해도 별 차이는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배경을 지닌 교사(지도자)에게 배워야 하겠으며, 어차피 올바른 죽음관을 배양받고 습득하는 방식이 종합적이고 전체적이라야 하기에 이는 당연한 결론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들 학습자들도 이를 배울 때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학습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부 기능이나 국지적 지식을 배울 때와는 자세가 달라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과연 죽음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하고 있을까요? 이보다는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아직 삶의 기쁨도 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대체 "죽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하던 경험을 먼저 떠올려 볼 만합니다. 난감한 건, 사실 우리 어른들도 이런 전문가들의 체계적 지식 앞에서, 그저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만 아직 모르는 게 아니라, 아예 "죽음"의 정확한 개념이 뭔지 모른다는 점은 어린이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나의 무지를 솔직히 인정하는 데에서 새롭고 참된 배움이 시작할 수 있죠.

이런 이치는 죽음이라고 다를 바 없어서, 기존의 피상적인 지식을 넘어서 우선 그 개념부터를 정확히 다시 이해하는 게 첫걸음입니다. p155에는 미국 법학도들의 필독서인 "블랙 법률 사전"의 정의가 인용됩니다. 우리도 1993년에 처음으로 의협에서 뇌사를 사망판정기준으로 삼자는 제안이 있었습니다만 아직까지 그때로부터 큰 진전은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전제되어야 "늙음"에 대한 현명한 대처도 가능한데, p166 이하에 "에이징"에 대한 아주 유용한 정의, 대응 방법이 나옵니다.

p183 이하의 10강에서는 호스피스론이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호스피스 포함 요양병원은 요즘에서야 인식이 크게 확산되어, 부양해야 할 부모님을 "어디 갖다버리는 것" 정도로 부정적으로 여기던 단계에서 크게 현재는 벗어난 상태입니다. p194 이하에 자세히 나오지만 호스피스는 본디 완화치료 자체를 직접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책에서는 아예, "호스피스는 치료 개념이 아예 아니며, 따라서 병원보다는 가정에서 이뤄지는 활동"에 초점을 둘 것을 제안합니다. 물론 현실에서 호스피스는 "완화치료"와 병행되는 경우가 많겠으나, 치료 자체는 아니므로 의료, 의학상의 개념과는 (원칙적으로) 별개로 파악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확하고 효과적인 호스피스가 이뤄질 수 있죠. p142의 문장 "죽음준비교육은 다(多)학문적이다"를 다시 한 번 새길 일입니다.

p263에는 서머싯 몸의 유명한 <사마라에서의 약속>에서 죽음의 신에 대한 우화가 인용됩니다. 이 우화는 2017년 1월 1일 한국의 KBS에서도 방영된 영국 드라마 <셜록> 시즌 4의 한 에피소드에도 나옵니다. 다음 페이지에서 정진홍의 저서 중 "살아 있는 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결국은 죽어야 한다"는 문장도 인용됩니다. 이 대목에서 저 우화는 죽음의 불가피성, 필연성의 부각 외에도, 죽음의 "일상성"을 일깨우기 위한 의도로도 인용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는 게 죽음이며, 삶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죽음이란 사실만 흔쾌히 받아들여도, 죽음 때문에 공포에 떨 이유는 상당히 줄어들겠습니다.

p266에는 "하나님 컴플렉스"가 나옵니다. 죽음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가지면, 이처럼 삶에 대해서도 올바르지 못한 인식, 행동, 그리고 나쁜 결과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책데는 다양한 영화에서 비뚤어진 세계관을 가진 빌런들이 예시되는데, 사실 이 책에 나온 캐릭터들 말고도 이런 컴플렉스에 시달리며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르는 픽션상의 인물, 실제 역사의 악당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이 그런 짓을 하게 된 동기 중 하나는 죽음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라는 점도 이 책을 통해 이해 가능하죠. 책에는 "죽음의 뒷면이 삶이요, 삶의 앞면이 죽음이다" 같은 문장도 있으며, 도원선사의 발언(p240)을 통해 삶과 죽음을 기(氣)의 응집 여부에 따라 구별하는 등 다양한 각도에서 죽음/삶으로 접근하므로 어떤 특정 종교 베이스에서 출발하지 않느냐는 의구심은 깔끔히 접어도 좋겠네요.

p300 이하에는 "애도 상담"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애도는 영어로 condolescences라고 하는데, -s라는 복수 접미사가 붙은 저 모습만 봐도 애도의 효과가 각별한 노력, 성의,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mourning. grieving, lamentation 등 다양한 단어도 등장하는데 이들 각각의 의미에 미묘한 차이가 있음도 책을 통해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한국인이 가장 흔히 접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바로 lamentation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p310에는 저 위 p122에서(그 외에도 많습니다) 인용된 워든 박사의 다른 업적, 즉 과업이론이 자세히 설명됩니다.

"용서"는 결코 현실 도피의 값싼 감정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용서도 죄 지은 자가 준비가 되었을 때에나 가능하다"고 하던데, 생각보다 용서는 그리 쉽게 행해지는 정신작용, 행위가 아니며, 이 대목에서 필자(공저자분들 중 박순 원장입니다)는 제임스 뉴튼 폴링 박사와의 만남을 회고하며, "상처는 그저 상처일 뿐, 무작정 잊으라고 강요하지 말라"고 외친 캐서린 후트의 시를 재인용합니다 맞는 말이죠. 가해자가 멀쩡히, 회개 없이 거리를 활보하는데 무슨 피해자가 눈물을 떨구며 뒤에 숨어서 가해자를 용서하겠습니까. p328에는 "강요된 용서보다는 새로운 이야기의 재구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도 합니다.

p364 이하에서는 장례와 기타 포괄적인 의식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반성적 극복이 나옵니다. 이미 유교적 폐습과 가치관이 극복된지 오래지만, 개중에는 여전히 우리의 의식과 관습 중에 남아 음습한 악영향을 지속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개인들이 주관적으로 진취적이고 생산적인 의식만 각성한다고 될 일은 아니며, 사회적으로 반복 시행되는 리추얼과 루틴 중 개인의 각성, 극복, 재생 등을 방해하는 건 혹시 없는지 마땅히 돌아볼 일입니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라서 죽음 자체를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긴 하나 이는 다분히 자기기만적인 주문입니다. 그보다는, 그 속성을 이성적으로, 또 성숙한 감정으로 직시했을 때 "의외로, 그리 나쁜 녀석은 아니었음"을 바르게 깨닫는 게 더 중요합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욱 소중하며, 죽음을 비통하지 않고 행복하게, 성숙하게 끌어안은 사람은 죽는 순간에도 궁극의 깨달음을 얻고 죽은 것이라는 점에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동의한다면, 오히려 남은 삶의 날 하루하루가 기쁨과 보람으로 가득 차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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