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종 인간
팻 시프먼 지음, 조은영 옮김, 진주현 감수 / 푸른숲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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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 나아가 "침략"과, "진출"의 구별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당한 몫이라 할 고유의 영역이 있고, 남의 영역을 함부로 넘나드는 건 때로 범죄로까지 다뤄집니다. 허나, 심지어 중등 교육 과정에서조차, 체제와 제도는 사회의 신규 진입 성원들에게, "현실에 안주하려는 이들을 위한 미래는 없다"며 개척과 도전 정신을 가르칩니다. 진출과 도전은 어느 지점부터 합리화의 근거를 마련하며, 혹 자신의 행위가 "침입"이라고 규정된다면 양심의 가책과 회개는 어느 지점까지 마련되어야 할까요?

이 책은 그간 진화론 주제로 여러 논쟁적인 결론을 제시하여 일반 독자들에게도 널리 지명도와 지지를 얻은 팻 시프먼의 최근작입니다. 감수자 진주현 교수의 추천 서문까지도 흥미로운 이 책은, 해당 감수 소회에서도 드러나듯, 저자는 "내용도 표현도 좋은" 대중적인 과학서를 그간 여럿 저술했으며, 과학적 진실에 인문적, 감성적 색채를 입히고 미래의 비전까지 (눈 밝은 독자에게) 제시해 온 위대한 지성입니다. 제목은 "침입종 인간"이라 붙었습니다만, 이 뜻은 "침입종 인간"이 따로 있다는 게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 자체의 본성을 "침입하려 드는 것"으로 파악했다는 쪽이겠습니다. 인간의 종명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인 것처럼, "호모 인바덴스(invadens. 즉 invado의 현재분사)" 같은 새로운 명명을 도입할 필요도 있다는 취지로도 저는 해석했습니다.

대개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오랜 세월 농경 문화 공동체 안에서 정착 생활 패턴을 이루고 살아 왔습니다. 남의 생활권에 "침입"하는 건 고사하고,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패턴으로 수천 년을 이어갔다고나 할 수 있습니다. 저들 서유럽인처럼 남의 대륙을 "발견"하고, 무시로 전쟁을 벌여 경계를 재확정하는 "스포츠"를 즐기는 생리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개성으로나 여겨 왔죠. 허나 미국인들, 서유럽인들에게는 그들의 조상들이 역사 속에서 벌여 온 여러 "침입"의 행태들이 일종의 원죄의식까지를 심어 준 게 사실인지, 소설이나 영화, 심지어 학술 연구의 패러다임조차 이런 쪽으로 상정하고 논의(혹은 상상)를 전개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어찌 보면 "남들의 회개"에 대해(그것이 설령 과학적 연구의 결과물이라 해도) (죄를 짓지도 않은 우리가) 지나치게 감정이입, 동조하며 서술을 따라가지나 않는지, 억지 춘향격 고해성사를 흉내내는 건 아닌지 회의가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여튼 진주현 교수님 말씀마따나 "워낙 책이 재미가 나서" 그런 사소한 불만은 책의 1장 반절까지만 읽어도 까맣게 잊혀지더군요. 하긴 남 이야기만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책 p60에 보면, 미토콘드리아 DNA는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이 겹치는 곳이 없으나, 핵 DNA는 1~4%가 공통이라는 (역시 독자들이 꽤 친숙한) 결론이 나오는데, 유럽인 혹은 "동.아.시.아.인"만이 그러하다는 (잠시 잊고 있던) 사항을 거론함으로써 경솔한 독자를 무색하게 만들더군요.

앞에 적은 말들은 제가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든 단상이었습니다만, 책은 마치 그런 독자의 반응을 예상이나 했다는 듯 다음과 같은 개념규정부터 깔끔히 시도합니다(p36).

"한 종이 지리적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것과 침입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저자는 "시간과 거리, 영향력"이라는 다소 무미건조한, 그러나 이런 과학적 논의에서 그 본질을 정한다 할 객관적 지표를 들고 있습니다. ".... 침입종 혹은 비(非)토착종을 규정하는 작업이, 이론적으로는 어렵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라고는 하시나 후속 논증을 보면 연구의 어느 단계에서건 결코 쉽게 처리될 성격이 아니더군요. 500년이냐 (예컨대 저자의 시론처럼) 1만년이냐의 문제인데, 길어야 백 년을 사는 인간이 애초에 편의적 가치 준별까지 적잖이 개입시켜 가며 진화생물학 같은 아찔하고 아득한 영역에 지성의 일단을 바쳐 진리를 규명하는 자체가 애초에 무망한 도전입니다. 무슨 결론이 도출되건 어느 관점에서의 비판이 가능하고 설명이 안 되는 맹점이 여전히 남으니 말입니다.

언제 인류는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했나? 여기에 대해 저자(와 이 섹터 한정으로 저자와 의견을 같이하는 여러 선구적인 학자들)는 그저 우연히 한 가족이 뗏목에 실려 떠내려온 게 아니라, "분명한 의도를 갖고 뛰어난 항해술을 활용한 채(p43)" 이곳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뿐 아니라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 등에 정착한 여러 종족들 역시, 오늘날의 인류에게는 완전히 잊혀진 특별한 기술을 고안하여 저 낙원과도 같은 고도에 도착했다는 결론에 많은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합니다. 성공적인 침입과 그 후속 번성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인간의 생존과 문명 발전을 향한 의지에는 반드시 "침입하려는 의도"와 "그 적절한 수단에 대한 고민"이 개재된다는 뜻도 됩니다.

유럽에 더 오래 전부터 터잡고 살았으며 불쌍하게도 우리 직접 조상들에 의해 멸종했고, 그 와중에도 우리들에게 약간의 DNA를 물려주기까지 했기에 더욱 안타까운 네안데르탈인들에 대해, 저자는 왜 그들(어느 시점에서는 역시 침입종이었을 수 있는)이 경쟁에서 밀려 생태계에서 퇴출되었는지 그간의 다양한 연구 성과들을 짚어 나갑니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생존 방식이 있었"으며, 이는 호모 사피엔스가 침입해 오기 전까지는 꽤 괜찮은 방식이었다는 데에 대개 의견이 일치함은 우리 독자들도 여러 대중서를 봐 왔기에 아는 내용입니다. 익숙한 개념 분류인 K-선택종/r-선택종에 의하면 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 사피엔스나 다 같이 전자에 분류되며, 따라서 그들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들이 무엇을 먹었느냐"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시프먼만의 노련한 논점 전환입니다.

책에서 재인용되는 조지프 그리넬은 "식성이 비슷한 두 종이 같은 지역에서 오랜 동안 비슷한 수를 유지하며 균형을 이루는 일은 매우 드물다"고 합니다(p127). 두 호미닌은 심지어 메뉴조차도 비슷했으나, 먹이를 얻을 수 있는 환경 여건이 악화되었을 때 저품질의 대체재로도 만족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고 종전의 육류를 고집하는 "보수적"인 성향이냐 같은 기준에서 크게 갈라진다고 하는군요. "융통성이 부족한" 식성을 지닌 종은 결국 무리하게 사냥에 나서다 해를 입을 수 있으며(p135:4, p139:12), (앞에 나왔듯) 같은 K-선택종이어서 어린 자녀에게 정성껏 안정적인 영양분을 공급해야만 했기에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었으리라고 저자는 치밀하게, 또 조심스럽게 자신의 결론으로 독자들을 몰고 갑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과학 대중서 역시, 저자에 따라 어떤 구조와 논리로 독자를 설득하는지 그 스타일에서도 인적 개성을 발견하는 재미로 읽는 편입니다.

믹 재거는 비틀스와 대조되는 악동 이미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롤링 스톤스의 리더이자 보컬이었죠. 책에도 나오지만 키스 리처즈도 함께 쓴 가사인데 그의 이름만 크레딧되는 건 좀 부당하지만, 여튼 히트곡 중 하나인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이 꽤 인상적인 노랫말을 담았는지 외르시 서트마리 같은 학자(팻 십먼보다 십여 년 후배인 진화생물학자입니다. 한국에는 이상하게 이분 책이 번역이 안 되네요. 하긴 십먼 저서도 이 책이 첫 소개이긴 하지만)가 이렇게까지 장난스러운 명명으로 그 주옥 같은 원리를 설명하는군요.

이상의 논의에서도 눈치챌 수 있지만 저자는 학계와 대중 사이에서 그간 더 큰 인기를 누린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퇴출된 네안데르탈인" 시나리오를 우회,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가설을 내놓으려는 겁니다. "어쩌면 그들은 현생 인류가 "도착(침입)하기 전부터 이미 멸종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저자는 독자들이 다른 책들에서 만나 온 주장, 예컨대 F 라미레스 로치(이분은 아직 대중서는 안 쓰더군요) 등의 학설이라든가, 처칠 팀의 연구 같은 것들(그 반대 과정을 강력히 암시하는)도 공정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튼 안정적인 "길드"가 붕괴된 후, 네안데르탈인이 기아에 대응한 방법은 카니발리즘 등 굉장히 졸렬한 것들이었습니다. 반면 현생 인류는 MIS 3기가 안긴 시련을 꽤 슬기롭고(이름값을 하는군요) 세련된 방식으로 돌파했습니다.

이 책이 출간시부터 큰 화제를 모은 건 물론 4부 이하부터 폭발적인 페이스(와 설득력)으로 달리는, "(우리가 살아남고 그들이 사라진 건)늑대를 개로 바꿔 동맹자로 데리고 다닌" 현생인류의 놀라운 선택이란 결론 때문이었죠. "최초로 개(늑대)를 길들인 인간"이야말로 종 전체를 위한 프로메테우스적 혁신을 이룬 은인이었으며, 잘 알려진 대로 "개 역시 인간이 필요했기에" 이 놀라운 동맹은 성공적이었고 또 지속적이었습니다. 저자는 A. 셰라트의 1980년대 연구(그간 정설로 여겨진)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현생 인류는 "가축"이 아니라 (인간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새로운 도구로써" 개가 절실히 필요했고, 녹록지 않았을 오랜 시행 착오를 통해 전략의 현실화를 이뤄냈습니다. 코르티코스테로이드 분비 수치가 현저히 낮은 종이 높은 호기심으로 탐색 기간을 길게 잡는 그 본성 덕분에 인간의 시행 착오 과정 역시 의미있게 단축될 수 있었습니다.

초보 군사학 상식에서 자주 하는 말이, 보통 공격에는 수비 측의 두 배 전력이 필요하다는 거죠. 여러 모로 보수적이고 현실 안주형이었던 네안데르탈인들과 달리, 현생 인류는 자신의 약점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부지런히 개선과 대안을 찾았으며, 자신의 종은 물론 다른 종에게서도 "동맹군"을 물색하고 실제로 말쑥한 협업을 이뤄냈습니다. 이랬기에 그들은 "생존을 위해 절실한 과제였던" (낯선 환경에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고, 침입은 곧 적응의 성공과 종의 생육, 번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시 잠깐 진주현 교수님의 서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흔히 보던 개조차 더 이상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책에서는 잠시 개 식용 풍습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저자에 의하면 개는 물론 늑대의 고기조차 단백질원으로 삼지 않은(최소한, 증거가 안 나온) 사실을 두고 "동맹에게 바치는 특별한 문화심리학적 동기"로 해석합니다. 우리 한국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위화감을 느끼는데, 역시 그래서 "침입종 규정"에 실감을 덜 느끼게 된 걸까요? "침입도 안 하고, 개고기도 먹겠다" 같은... (물론 농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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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레산드로 다베니아 지음, 이승수 옮김 / 소소의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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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잔잔하고 마냥 착한 듯하나 엄청난 울분과 정의감의 격동을 담은 장편을 지은 알레산드로 다베니아에 대해, 현재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젊은 작가라는 소개가 책날개에 있습니다. 그렇기도 하고, 현지의 지인한테 잠시 물어 보니 "젊은 독자층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작가"라고도 불려진다고 합니다. 적잖이 다른 규정 같지만 의외로 같은 지점으로 통하는 면이 큰 글들인데, 평이 중요하다기보다 독자들이 책을 직접 읽고 그 맛을 느껴 보는 게 맞지 싶은 그런 장편이더군요. 젊은 작가분이 과연 사랑 받을 만하게 작품을 쓰셨고, 젊은 독자층이 지지와 호응을 보낼 만한 내용과 주제, 그리고 맛갈난 표현과 통찰들이 많았습니다.

다베니아 선생(현직 교사 신분입니다)는 젊은 축에 속하는 게 맞습니다. 이 자전적 소설에서 1인칭 주인공 페데리코의 고백과 술회를 통해 무시로 드러나는 각종 대중문화 코드를 봐도 분명히 증명됩니다. p70을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죽 나열하면서 U2의 보노가 나온 포스터를 든다거나, 텔레비전 시리즈물 <맥가이버>, <A-팀> 같은 걸 대뜸 리스트에 끼워 넣습니다. 이런 건 한국에서라면 페데리코가 자라던 시절보다는 좀 이른 시기에 대중의 사랑을 받던 아이템들인데, 한국(남한)과 시칠리아의 갭이 그 정도였는가 보다 하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A-팀'은 아마 번역가 이승수 선생께서는 모르셨나 봅니다. 특정 세대라면 KBS 2TV에서 틀어 주던 '에이 특공대'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요.

현대의 대중 문화 세례를 받고 자라닌 세대라면 당연 저런 코드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만 페데리코는 또래들과는 다른 아이입니다. 어떻게 다르냐. 고전과 인문을 무척 좋아하며 그 질서 정연하고 정돈된 아름다움 속에 폭 빠져 시공을 초월한 꿈을 꿀 줄 안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19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 페트라르카와 단테를 두고 정말 그 본연의 매력에 흠씬 취할 줄 알기란, 싸구려 대중 문화의 해로운 중독과 "피폭"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만큼이나 딱 어렵습니다. 마땅히 완상하고 탐독할 줄 알 만한 멋진 고전의 담백한 맛을, 감미료와 첨가물에 길들여진 (어린) 혀가 수용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데, 형 여친인 코스탄차 말마따나 페데리코는 천상 시인의 자질을 타고났나 봅니다.

페데리코를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은 그의 "스타일"을 두고 바로크적인 과장이 가득하다고 하지만, 그게 깎아내리는 말투이거나 시정을 요구하는 지적은 아닙니다. 그저 글쓰기 산물들이 (어른이 보는 눈에서) 애답지 않다는 것일뿐 고전 소양의 촉촉한 축복을 받았다는 분명한 인정이기는 하니 말입니다. 이런 애들이 커서 정말 일류 문장가로 성장할 수 있는지는 몇 고비를 더 넘길 필요가 있겠으나, 여튼 어려서 고전 많이 읽고 그 인문적 축복을 받은 애들은 페데리코뿐 아니라 다들 꼭 글을 그런 투로 씁니다.

p79에서 페데리코는 이탈리아어 단어 몇을 갖고 재치문답형 습작을 몇 행 써 나갑니다. 사실 나이에 비해 그리 성숙한 솜씨는 못 되고, 진짜 천재라면 초등생 정도 때 남길 법한 수준이긴 한데 얘는 지금 고등학생이거든요. 한번 보십시오.

가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사(항복. resa)보다
로사(장미, rosa)가
나는 더 좋다.

그 다음은 s 하나가 덧붙은 단어쌍으로 장난을 칩니다.

북적임에도 불구하고
레사(ressa, 군중)보다
로사(rossa. 빨간)가
나는 더 좋다.

어째 ressa와 rossa가 순서가 바뀌어야 뜻이 더 통할 듯합니다만 뭐 페데리코 지 생각이 그런가보다 하고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제가 소설 속으로 들어가 수사의 정석에 대해 한 마디 해 줄 수도 없고, 괜찮은 학교를 다니는 녀석이니 그 담당 교사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가르치겠죠. 제가 하나 지적하고 싶은 건, 이탈리아어라서 이런 말장난이 2연에 걸쳐 이어지는 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스페인어라면 자음의 geminate가 매우 드물어서 저런 s, ss 자음 교체로 의미의 차별화가 이뤄지질 않습니다. 요런 장난으로 혼자만의 기쁨을 누리는 페데리코는 시칠리아에 태어나길 아주 잘한 것 같네요.

시칠리아는 유럽에서도 큰 편에 속하는 섬이며 이탈리아의 국가적 통일이 그만큼이나 늦은 역사를 감안하면 반 독립국이었다고 봐도 됩니다. 통치하는 왕조가 여러 번 바뀌었고 나폴리와 한데 묶였다가 상속과 협약에 의해 다시 다른 손에 양도되었다가 뭐 운명도 복잡했습니다만 주민들은 언제나 저항과 딴청피우기 기질을 손에서 마음에서 놓은 적이 없습니다. 자연, 공적 통치 기구가 제 구실을 못 했고 치안 유지와 정의 구현은 토호, 마피아들의 손에 맡겨졌는데 물론 이들이 그런 일을 제대로 해 낼 리가 없습니다. 버젓한 서유럽 문명 국가에서 깡패들이 사실상 공포 통치를 이어가는 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페데리코는 그래도 운이 좋은 아이입니다. 팔레르모의 유복한 집안에서 부모님의 따스한 훈육을 받고 자랐으니 말입니다. p42에 보면 "펠레르모"의 어원이 pan ormus, 즉 "모두가 항구"라고 나옵니다. 한참 뒤로 넘어가 p309에 보면 앞의 어원 설명이 잠시 반복되다가, 그리스- 로마 인들의 지배가 끝나고 아랍인들이 진출했던 시절 "발라름"이라고 불렀다는 "후일담"이 이어집니다. "항구"라는 정의(definition)을 버리지 않으면서 이 고장 특유의 짙은 향내 또한 반영하는 명칭이 바로 저것이라는 뜻이겠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2부가 다 끝나가는, 소설 전체의 결말에서) 하는 걸까요? 지중해 건너편 피붓빛 검은 이웃들의 사정에도 눈 감지 말자는 뜻입니다. 이 소설의 배경 시점은 아니지만 북아프리카 난민의 참상은 소설 창작 시점에서 현재 진행형 아니었겠습니까.

부촌에서 자라난 문학소년, 시인인 페데리코는, 존경하는 신부님(진정 존경을 받아 마땅한, 성자와도 같은 분입니다) 돈 피노와 세대를 초월해 친해지면서 팔레르모와 바로 이웃한 브란카치오의 암울한 풍경에 대해 처음으로 시선을 주게 됩니다. 아주 어린 꼬마인데도 세파에 찌들어 온갖 못된 짓에 물든 프란체스코(저는 처음에 얘가 주인공인 줄 알았어요)도 다독거리고, 근심 모르고 살아온 "시인" 페데리코에게는 세상의 반대편 지독한 그늘, 아니 지옥을 잠시 구경도 시켜 주고, 깨어 있는 양심과 영혼이 결코 눈 감지 말아야 할 진실에 대해 오버하지 않고 위선 떨지 않고 거부감 안 느껴지게 차분히 깨우칩니다.

페데리코에게는 형이 있는데 형제가 다 총명하긴 하나 형은 좀 세속적이고 현실적으로 약아서 공부에 전념하는 그런 스타일입니다. 남들이 다 선망할 만한 엘리트로서의 삶을 꿈꾸는, 약간은 속물인데 여튼 자신의 기질과는 매우 상반되는 몽상가인 동생을 무척 좋아하며, 나중에 페데리코가 좋은 일 좀 하다가 팔자에 없던 주먹다짐에 엮여 얻어터지고 돌아오자 "난 네가 부럽고 자랑스럽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라는 말도 할 줄 아는 멋진 형입니다. 페데리코 같은 애는 영락없는 문과 기질이라 수학에 서투르지만 형은 못 하는 과목이 없습니다. 이런 애가 좋아하는 영화의 한 대목을 <언터처블>에서 알 카포네가 정찬 자리에서 야구 배트로 누구 머리 깨는 장면이라고 했을 때는 왠지 안심도 되더군요. 괜한 동질감이 느껴져서 말입니다(개인적으로 참 창피했었는데ㅋ).

이 대목까지만 해도 똑똑한 형제들의 고담준론(예를 들어 p89, p221의 옥시모론이 어쩌구 하는 모순어법 토론 등)이 이어져서 이렇게 중산층 젊은이들의 따스한 성장담이 이어지는가 보다 했는데 기어이 2부 이하에선 졸라풍의 지독한 자연주의 비극이 페이스를 냅다 높이며 독자까지 함께 지옥으로 몰고 가더군요. 1부에도 물론 돈 피노 신부가 위험한 일(마피아에 맞서 지역 주민들을 위한 참된 복지, 계몽, 교육 사업을 벌임) 할 때부터, 또 그 비행청소년과 아슬아슬 엮일 때부터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2부부터는 안전막이 싹 걷히고 저 <언터처블>에서처럼 무지막지한 깡패들이 바로 본색을 드러내며 "순교자"를 만듭니다. 보면서 독자가 참 격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데 열 받으니까 서평에는 자세한 줄거리는 생략하겠습니다. p267에 보면 영화 <대부>에서뿐이 아니라 실제 코를레오네 패밀리(아마 짝퉁이겠죠?)가 등장해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양아리짓을 저지르고 다닙니다. 역자 후기를 보면 실제 인물은 나중에 크게 뉘우치고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데 책 중간쯤에 나오는 "십자가 옆에 못 박힌 도적" 이야기가 과연 여기도 적용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돈 피노 신부 같은 성자라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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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사 1 -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전쟁과 평화 학술총서 1
일본역사학연구회 지음, 아르고(ARGO)인문사회연구소 엮음, 방일권 외 옮김 / 채륜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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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제독의 이른바 "포함 외교" 시도에 큰 충격을 받고 서둘러 구폐를 소탕한 후 신체제를 부랴부랴 가동한 일본의 행보는 구미 측으로부터 일정 시기 동안 경탄과 우려와 경멸 어린 시선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아무리 근본 각성 없이 수박겉핥기식으로 밀어붙인 근대화의 시늉이라고 해도, 여튼 그렇게나 짧은 시간 안에 국가의 틀 하나를 완전히 새로 짠 후에는 가당찮게도 열강의 나쁜 행보만 본받아 식민지 침탈까지 시도했으니 말입니다. 이 역시 놀랍게도 성공(...)을 거둬 20세기 들어서는 러일 전쟁의 승리, 한국 병탄 등의 연이은 행보로 아시아에서 힘깨나 쓰는 강대국의 대접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요아힘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을 보면 "... 거듭된 요행 덕에 이뤄진 성공에 버릇이 나쁘게 들어...."와 같은 평가가 있는데 물론 히틀러를 두고 이른 말입니다. 천품이 비천하고 머리에 든 것 없는 망상자가 비뚤어진 욕심과 왜곡된 자아상으로만 정신을 가득 채울 때 이런 패턴이 흔히 나타나는데, 이런 이들에게 두 가지 길이 대개 앞에 놓입니다. 하나는 늦게나마 현실을 깨닫고 자신의 분수에 맞는 미래를 성실히 준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끝까지 현실을 거부하고 망상만을 추구하다 처참한 파멸을 맞는 것인데, 역사의 필연과 정의가 대개 어느 쪽으로 귀착되었는지는 우리가 결과를 봐서 잘 압니다. 일본군국주의 역시 비슷한 길을 걸어, 객관적 자기 역량의 신중한 평가 없이 무모하게 감행한 태평양 전쟁에서 결국 패망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였을 뿐 아니라, 국력의 손실과 막대한 인명 사상은 두고두고 역사의 상흔으로 남았습니다.

이 책은 거의 60여년 전에 쓰여진 일종의 "고전"입니다. 이미 태평양 전쟁 개전 전에도 일본의 양심 있는 지성인, 학자들은 체제의 모순과 허약한 시스템 기반의 맹점을 날카롭게 파악하여, 더 큰 재앙을 맞기 전에 무모한 "행군"을 중지할 것을 권했으나, 군부와 정치인들은 오불관언이었으며 오히려 양심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탄압하는 데에만 전력했습니다. 그러다가 도쿄 대공습, 두 차례에 걸친 원폭 투하 등으로 민간인들까지 끔찍한 피해를 입고서야 이 무모한 전쟁은 비로소 무조건 항복으로 종결되고, 이 책의 저자들처럼 올곧은 양심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지성인들의 양심 선언일 뿐 아니라 이 책(시리즈)은 학문적으로도 치밀하고 충실한 방법론에 입각하여 저술된 모범적인 교본에 속합니다. 독자는 이 책들을 통해 1) 일본 내에 엄존하는 올곧은 지성의 양심 고백을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2) 태평양 전쟁 직전과 경과, 이후의 aftermath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정립할 수 있고 3) 나아가 세계사의 거대한 맥락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동아시아사, 일본사에 침투하여 하나의 필연을 빚어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장에서는 태평양전쟁, 나아가 그 전단계였던 만주사변과 조선 침략 등이 그저 단견, 근시안의 정치인들이 둔 일시적 패착이 아니라 세계적 규모에서 작동되던 자본주의 기제의 필연적 모순 노출이었음을 저자들은 지적합니다. p17에서는 "...천황제와 반(半) 봉건적 지주제, 그리고 이 둘과 깊이 결부된 특권적 대자본이.... 국가를 전쟁으로 내몰았음"으로 분명히 전쟁의 원인을 짚고 있습니다.

전쟁은 그저 표피적, 독립적, 우발적으로 벌어지는 게 아니라 사회 구조의 모순과 언제나 연결됩니다. 저자들은 특히 일본 소농들의 빈곤과 궁핍상에 주목하는데, 대개 소출의 50%를 소작료로 지불해야 하는 가혹한 조건 때문에 반(半) 농노 상태에 머물렀다고까지 규정합니다. 반 세기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세계적 산업국가로 성장한 일본 굴기의 이면에는 이처럼 1차 산업 섹터의 어두운 그늘이 자리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국사 시간에 배우기로 "1910년대 후반에 대대적으로 열도로 반출되었던 조선의 미곡 때문에 일본 내 소매가가 급격히 떨어져 (일본) 농촌에서 대대적인 반발이 일어났다" 같은 교과서의 한 줄 언급이 있었죠. 이처럼 식민지에서는 현지 농민들을 수탈하고, 자국에서마저 농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추진한 공업화, 산업화란 필연적으로 사회 구조상의 중대한 균열을 노정하기 마련입니다.

한편으로, 제국주의는 세계적 규모에서 상품 수출과 자본 수출을 동시에 주변부에 진행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서평 맨처음에 적었듯 페리가 군함을 이끌고 열도에 내습한 건 그저 일시적 군사력의 위용 과시가 고작 그 목적이 아니라, 이를 발판으로 선점한 주변부에서 향후 상품의 판매와 항구적 금융이익 획득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던 치밀한 전략적 고려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저자들은 흥미롭게도 책의 항목 일부를 "억압 받는 국가에서 억압을 가하는 국가로, 그리고 다시 억압 받는 국가로"로 제목을 정했는데, 심지어 조선에 식민 기지를 건설했을 때조차 일본은 초기 투자국인 미국, 영국 등으로부터 끊임없이 차관 상환을 압박받았습니다. 그 직전 단계인 러일전쟁 역시, 표면적으로는 "한반도가 러시아에 점령되어 일본 열도를 겨누는 칼끝이 되는 결과를 예방한다"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장래를 생각지 않고 마구 끌어다 쓴 온갖 빚이 정부와 민간에 큰 짐으로 끊임없이 작용했기 때문이죠. 이러던 일본이 정작 고종의 대한제국에 대고는 "경부선, 경인선 부설 융자금의 상환"을 끝없이 요구한 건 실로 아이러니입니다. 이처럼 내부를 들여다 보면 근대화의 화려한 외관 속에 숨은 부실이 끝도 없이 구조를 좀먹고 있었던 셈입니다.

전쟁도 군수물자를 생산할 여력이 되어야 개시, 지속할 수 있으며 일단 일으킨 전쟁 역시 전선의 군인들을 꾸준히 지원할 수 있어야 승리는 고사하고 현상 유지라도 가능해지는 법입니다. 러일전쟁도 미, 영 측의 차관 제공이 아니었다면 일본 정부는 결코 끝까지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며, 초기 예측과는 반대로 러시아가 극동에서 압살당할 조짐까지 보이자 미국은 도리어 일본 측의 지나친 세 확산을 경계하여 서둘러 종전을 주선했다는 분석은 실로 충격적입니다. 결국 전쟁을 일으키거나 향방을 결정하고 심지어 패전 처리의 구체적 조건까지 조율하는 것도 막후의 국제 자본이라는 뜻이니 말입니다.

대전 발발 직전 국면을 보면, 책은 협소하게 일본 국내 정치 상황만을 다루지 않습니다. 태평양 전쟁 반대쪽인 당사자인 미국을 보면, 1930년대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대공황을 타개하려 시도합니다. 여기서 몇 줄 아래를 보면 "... 큰 곤봉을 차고 걸으면 오래 걸을 수 있다... "라는 루스벨트의 재담이 등장하는데, 책에서는 퍼스트 네임이 생략되었으나 이 말 자체는 FDR의 먼 친척 아저씨뻘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남긴 유명한 조크죠.

대공황은 먼저 식민지 조선에서 민중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빈곤에 시달린 농민들은 만주로 이주했고, 한편으로 열도의 경제적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한 식민지에서 이처럼 공황의 폐단이 집약적으로 발생하자 역으로 일본 본국에 그 부작용이 유입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말한 일본 경제구조의 봉건적 후진성은 거의 개선되지 않았던 데다 이런 타격까지 받으니, 일본으로서는 전쟁 외에는 위기의 돌파구를 찾을 수 없었던 게 됩니다. 한편으로 일본인들이 조직적으로 부추긴 만주 내 한 중 갈등상이 큰 무력 충돌로 비화하고, 이 소문에 격분한 조선인들이 한반도 안에 거주하던 화교를 공격하는 등 대단히 안타까운 민족 간 분쟁으로 비화합니다. 현재까지도 일부 중국인들은 1930년대 이후의 만주, 북중국 일대의 정세에 대해 "조선과 일본이 합작하여 대륙 침략을 기도했다"는 오해를 하는데, 이런 배경에는 일정한 이유가 작용했던 셈입니다.

장개석 정권은 1930년대 일본의 침략 의도가 노골화해도 유효한 대응을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내륙과 남부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던 마오의 소비에트 정권에 대한 견제와 진압에 국력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른바 "북벌" 과정에서 북중국의 군벌을 견제하느라 장샤오량 등의 병력을 통제했으므로 정작 현지의 군벌(대부분은 농민을 수탈하는 봉건제적 구태에 지나지 않았지만)이 유조구 사태, 노구교 사건 등에 대해 전혀 효과적 대응을 못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장개석 정권이 친일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논란 대상입니다만 그가 ㄷ담판을 위해 일본 정치가들과 한 테이블에 앉았을 때 일부에서는 "여튼 그는 우리(일본)의 편"이라 단정했는가 하면, 귀국 후에는 (당시 일본과는 중대한 대립 관계였던) 미국 측에 곧바로 대화 제스처를 취하는 등 모순된 태도를 보여, 마냥 호락호락한 일본의 주구는 결코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p59에는 악질 친일파 왕정위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p91의 후주에 보면 본명을 "왕조명"으로 한자 표기하면서도 정작 중국식 독음은 "왕정웨이"라고 하여 혹 혼동의 우려가 있으니 독자들은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왕자오밍이야말로 누대에 악명을 남긴 친일파, "한간"이라고 봐야겠죠.

우리가 유심히 봐야 할 대목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이미 미국과 일본은 국가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했다는 점입니다. 미국는 만주 일대에 큰 이권을 가졌으며, 상대적으로 영국은 대륙 본토에 이해관계를 지녔으니 만주 침략에 대해서는 초연했는데, 이런 태도는 히틀러를 상대할 때 당장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유화 제스처를 쓰다(네빌 체임벌린) 돌이킬 수 없이 상대의 간만 키워 준 어리석은 결과를 빋은 유럽의 정책 실패를 떠올리게 합니다. 미국에서는 "맨츄리언 캔디데이트"라는 관용구를 두고 "괴뢰"라는 뜻으로 널리 쓴 적이 있는데 얼마나 그들이 중국 동북 지역 일대에 큰 관심을 당시 두었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이러던 만주(현 동북 3성)를 일본이 불과 3개월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장악했으니 세계는 큰 충격을 받았던 게 당연하죠.

책은 마치 소설책을 읽듯 시간적으로 정확한 경로에 따라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며, 전후 일본 지성계의 통렬한 반성을 글자 하나하나에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사를 공부하는 표준적 교과서로 충분히 참고, 열독할 만한 멋진 역사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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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칼릴 지브란 지음, 류시화 옮김 / 무소의뿔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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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은 20세기 후반 들어 종교와 민족 사이에 벌어진 갈등과 분쟁으로 세계인들에게 참담한 인상만을 남겼지만, 본디는 백향목의 산지이자 수려한 풍경, 쾌적한 기후로 이름 높은 지역입니다. 이런 조건 덕분에 유대교의 경전(기독교의 구약)을 비롯, 각종 고문헌에도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유서 깊은 고장이기도 한데요. 칼릴 지브란은 바로 이런 나라에서 열두 살이 되던 해까지 자라고 이후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감성은 레바논의 조화롭고도 신비한 자연이 안긴 온갖 색채와 결을 지니고 있으며, 청소년기를 미국에서 지냈기에 그의 언어는 현재 지상에서 가장 풍성한 컨텐츠를 담은 논리와 표현으로 물들 수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한국에서도 이미 1980년대에 대학생들과 독서층을 상대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베스트셀러이며, 일정 연령대 이상의 분들이라면 적어도 제목 한 번은 들어봤을 시집입니다. 한국에서는 이처럼 뒤늦게 알려졌으나, 칼릴 지브란이 문명(文名)을 떨칠 시절은 벌써 20세기 전반이었고 이때는 아직 최근 반 세기 동안과 같은 지역 분쟁상이 거의 발발하지 않던 시절입니다. (타고르와도 활동 시기가 일부 겹칩니다) 물론 만성적 빈곤, 오스만 제국과 서유럽 제국주의(특히 프랑스)의 이중 지배 체제 때문에 겪은 식민지의 질곡이 있긴 했습니다만.

시집이면서도 이 책은 주제별 아포리즘을 묶어 놓은 듯 뚜렷한 체제 안에 각각의 작품이 고루 제 자리를 찾아가며 실린 모습입니다. 읽어가며 느낀 점은, 혹 한 편 한 편을 따로 접했어도 여운이 깊게 남았을 텐데, 이처럼 26개 카테고리 안에 예쁘게 편집까지 마쳐져서 독자를 만나니(우리 독자가 작품들을 만나니) 그 울림이 더욱 각별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예언자>를 두고 성서의 언어를 사용했다고들 보통 평합니다. 기독교 성서 중에서도 시편이나 잠언의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이 책은, 시적 화자인 ("예언자") 알 무스파타의 잔잔하고도 초월적인 말 건넴으로 채워집니다. 오르팰리스 주민들, 나아가 우리 독자들- 아마도 삶의 진리가 목마르거나, 연인이나 가족과 헤어져 살을 저미는 고독에 몸부림치거나, 품은 이상은 높은데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이들은 간절히 이 현자에게 말을 건네고, "예언자"는 타이르듯 다독이듯 일생을 두고 깨달은, 혹은 신(이슬람의 신일 수도 있고 딱히 어느 종교에 한정된 존재가 아니겠죠)으로부터 건네받은 계시의 한 자락을 들려 줍니다. 말 그대로 "구하라, 주실 것이요.."를 설교, 수훈하는 예수의 목소리와도 같습니다. 신약의 4복음서 중 예수의 육성만 따로 본받은 듯 하지만, 종교적 색채보다는 삶의 비의를 넌지시 일러 주는 노인의 다사로운 훈계나 톨스토이의 정숙한 교훈과도 비슷합니다.

When you love you should not say, ‘God is in my heart, ‘ but rather, ‘I am in the heart of God.’

“‘신이 내 마음속에 계시다.'라고 말하지 말고, '내가 신의 마음속에 있다.’라고 말하라.” 류시화 시인은 이렇게 옮기네요. 지브란, 아니 알 무스타파는 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요? 신은 누구의 마음 속에나 거하는 게 틀린 말이기라도 한가요? 신이 내 안에 있다고 하면, 왠지 이기적이고 스스로를 무람하게 높이는 듯한 느낌도 암시합니다. 그러나 내가 작아져서 신의 마음 안에 들어 있다고 하면, 그 마음 안에는 나의 이웃과 친구, 혹은 내가 적대하는 이들의 영혼까지 자리를 함께 나누고 마음을 터 놓을 여지까지 다 마련된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이런 말을 하게(혹은, 하지 않게) 된다는 걸까요.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절로 "나는 신의 마음 안에 머문다." 같은 고백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And is not the lute that soothes your spirit the very wood that was hollowed with knives?

이처럼 이 책에는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했던 지브란의 원문이 함께 실려 있어서 좋습니다. 류 시인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슬픔이 존재 속을 깊이 파고들수록 그대들은 더 많은 기쁨을 품을 수 있다. 그대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피리는 칼로 후벼 파낸 나무이듯이.”

어쩌면 우리 영혼도 슬픔으로 철저히 단련된 모양새, 재질이라야, 한층 웅숭깊어진 속에 더 많은 기쁨을 품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쁨을 몇 배는 더 깊이 느끼라고 사람은 슬픔도 겪게 마련이며, 더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 소중한 줄을 알라고 아픈 이별도 호되게 시련으로 치러 내는 것 아닐까 생각도 되네요.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이런 슬픔의 더께와 상처를 성장의 거름으로 쓰고 난 영혼을 두고, 마치 칼로 후벼 파 낸 나무로 만든 피리, 아름다운 곡조를 처량하게도 경쾌하게도 빚어내는 관악기에 비유한 건 역시 지브란이 아니면 입 밖에 낼 수 없는 통찰이요 도약입니다.

That which seems most feeble and bewildered in you is the strongest and most determined.
It is not your breath that has erected and hardened the structure of your bones?

“그대 안에서 가장 약하고 가장 흔들리는 듯 보이는 것이 가장 강하고 확실한 것이다. 그대의 뼈대를 일으켜 세우고 강하게 만드는 것은 그대의 숨이 아닌가?”

숨은 손으로 움켜잡을 수도 없고, 가까이 피부라도 대어 보지 않고서야 감지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뼈대보다 삶을 더 깊은 근원에서 지탱해 주는 건 바로 숨결입니다. 생명은 숨의 들고 남을 멈출 때 비로소 종지부를 찍습니다. 숨처럼 약하게 보이면서, 동시에 숨처럼 강하게 모든 이치와 작용을 장악하는 건 세상에 없습니다. 레바논의 청아하고 쾌적한 바닷바람 숲바람을 동시에 맞으며 자란 영혼만이 감지해 낼 수 있고 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진리라 하겠습니다.

And as a single leaf turns not yellow but with the silent knowledge of the whole tree,
So the wrongdoer cannot do wrong without the hidden will of you all.

"나무 전체의 묵인 없이 나뭇잎 하나가 갈색으로 변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죄를 짓는 사람도 그대들 모두의 숨은 의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죄인 하나가 미꾸라지처럼 세상을 더럽힘도, 결국은 그를 사랑으로 감싸지 못 했거나 암암리에 죄악의 작은 씨를 그의 마음에 뿌리고 부추겼던 이웃들의 공동 연대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든 죄 없는 자가 먼저 나서서 저 여인을 돌로 쳐라"라고 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도대체 없을 뿐 아니라, 그 여인의 행실이 그처럼 타락하게 된 데에 이웃들의 방조와 묵인과 사악한 기여가 없었다고 누가 감히 장담하겠습니까?



시인이자 동시에 화가였던 지브란은 언어와 색과 면과 구상의 선을 모두 매체로 구사하여 시심과 궁극을 표현했던 셈입니다. 저렇게 단색으로 섬세한 얼굴을 그린 데에서 정말 블레이크의 분위기가 풍기기도 하고, 괴이하며 소름끼치는 형상이 많이 등장하는 블레이크의 작품 세계와는 소재 면에서 대척을 이루기도 합니다. 알무스타파(사실 띄어쓰기를 안 해야 맞는데, 섬세한 그가 이런 표기에도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했겠죠)의 얼굴은 지브란 자신 같기도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도 닮았습니다. 어쩌면 내내 그의 작품 세계를 돌보고 충고하며 (사실상) 공동 작업까지 참여했던 그의 어머니가 눈빛 속에 입매 속에 머무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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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1 0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0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빙혈 2018-01-20 19:51   좋아요 0 | URL
헉 댓글은 자동으로 비밀 처리가 안 되는군요. 윗 대댓글은 급 수정했습니다.

2018-01-20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4 0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함께 떠나는 문학관 여행
김미자 지음 / 글로세움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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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 좋고 풍광이 수려하며 자연재해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한국은 본디 뛰어난 문인, 풍류객들이 여럿 배출되어 공간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예찬 받던 곳이었습니다. 내가 사는 지역(혹은 인접 고장)의 명소나 어트랙션을 자세히 살펴 보지 않아 지나쳤을 뿐, 알고 보면 가까운 곳에 향취 그윽한 문학관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설령 좀 멀다해도, 이미 고속철이나 수도권 전철의 연장, 혹은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타고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거의 연결되다시피한 요즘입니다. 찾아볼 마음만 먹고 정신에 약간의 여유만 품는다면 어느 곳인들 일일이 못 돌아볼 이유가 없습니다.

전국에 문학관은 그 수효(數爻)가 이제는 꽤 많은 줄 압니다만, 중견작가 매강 김미자 선생께서 직접 답사하여 그 소회를 정리하신 이 책을 보면 (몇몇은 이미 저도 개인적으로 다녀온 곳인데도) 그 참된 매력을 못 보고 지나친 구석이 이렇게 많았던가, 혹은 이미 그분을 기리는 문학관이 (과연 있어야 할 만한 곳에) 들어섰는데도 그저 무신경한 탓에 존재도 몰랐구나 하는 자괴감도 느껴지더군요. 저는 <복희 이야기>, <마흔에 만난 애인> 등을 재미있게 읽었는데(저희 어머니도요), 바로 그 김미자 선생이 펴낸 문학과 여행기라서 정말 큰 기대를 갖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전라북도 부안 태생이신데, 부안 역시 한국에서 첫손에 꼽는 예향 아니겠습니까. 저도 자주 찾고 제 지인도 여럿 거주하여 개인적으로도 연이 각별한, 참으로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책은 모두 여섯 장으로 이뤄졌습니다. 지역별로 나눠진 차례인데, 서울-경기(인구도 많고 지역은 넓긴 하나 문학관이 의외로 많지는 않더군요. 하긴 빼어난 문인들이 주로 자연이 더 보존된 지방에서 더 영감을 크게 받았을 테니), 충청, 강원, 전라, 경남, 경북 순(順)입니다. 강원도 여러 문학관들은 특히나 부군과 함께 탐방하셨으며, 이 여행기가 완성되기에는 근 일 년의 시간이 쓰였다고 하십니다. 여행도 다녀 오시고 여행기를 쓰시기까지에는 일 년이 걸릴 수 있지만, 이런 멋진 안내와 가르침을 담은 책을 다 읽고 나서 우리 독자들이 한번 따라해보기는 그보다 훨씬 적은 시간만 투자해도 일정이 완료될 수 있지 않을까요.

청운동에 윤동주 시인의 문학관이 들어선 연유가 무엇일까. 똑같은 의문을 작가님도 가졌다고 하시네요. 답은 "연희전문시절 이 동네에서 하숙을 하셨다"는 겁니다. 청운동이면 제가 일 때문에 한 주에도 여러 번 들르는 곳인데 여태 이런 사실도 몰랐다는 게 (하늘을 우러러?) 좀 부끄러워졌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 "팬"들이 자주 찾는 명소라고 합니다. 과거 자신들의 정부 체제가 식민지로 삼고 탄압하던 때 비참하게 희생시킨 상징적 인물이기도 하고(글 말미에는 "생체 실험"을 암시하는, 경도[京都]제대 출신의 송몽규 선생의 증언도 나옵니다), 무엇보다 "잘생겨서"라는 이유가 크다고 하네요. 좀 착잡하기도 합니다만 여튼 이런 식으로 민간 차원의 교류가 늘면 반성도 이해도 몇 걸음씩 더 나가지 않겠습니까. 그보다, 해외 홍보(일본뿐 아니라 중국에도)가 늘어야 국부에도 도움이 될 텐데 내국인들도 이처럼 까맣게 모르고 있으니.

미모 하면 그보다는 후배 문인인 한무숙 님도 빠질 수 없죠. 한말숙 작가님도 그의 동생분이기도 하고요, 한무숙 님은 <생인손>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데 해당 작은 MBC에서 특집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저희 가족이 모두 모여앉아 시청했었죠. 정말 반갑게도 p27에 그 언급이 나오네요. 매당 쌤도 보셨나 보죠?ㅎㅎ). "단아한 한국 여성의 기품과 자신의 문학세계를 조화시키며 모범적인 삶을 산..." 이런 평가를 사후에 남길 수 있는 분은 얼마나 가득 축복을 받은 인생입니까. 혜화동뿐 아니라 정작 문학관이 또 생겨야 할 곳은 태생지인 부산이기도 합니다.

김수영 시인은 당대에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근래 들어 저항정신과 현실 비판 의식 때문에 더 각광 받는 분입니다. 제가 깜짝 놀란 건 1960년대에 불의에 항거한 활동과 족적뿐 아니라 그 다양한 시선과 넓은 폭의 작품 활동인데, 예컨대 <나는 아리조나 카우보이야> 같은 작품도 있더군요. 아시겠지만 1950년대 후반 가수 명국환씨가 부른 비슷한 제목의 트롯풍 가요가 있습니다. 아리조나 카우보이와 트롯이라니 참 어울리지 않는 만남이란 생각이었는데, 무려 김수영 시인의 작품에도 채용된 모티브라니. 참고로 애리조나에는 정말로 전설적인 총잡이도 악질적인 카우보이도 역사(?)에 큰 한 자락을 남긴 바가 있죠. 와이어프 어프 등의 "OK 목장의 결투"가 그것입니다. 왠지 불의에 단신으로 저항하는 코드가 김 시인과 통하지 않습니까?

왜 화성에 노작 홍사용의 문학관이 들어섰을까? 이 역시 그가 유복한 성장기를 보낸 고장이라는 연원이 있다고 하시네요. 화성이라면 꽤 멀게 느껴져도 병점역에서 내려서 찾아가라고 할 것 같으면 그리 멀지 않을 듯합니다. 예전에 숀 코너리, 마이클 케인 주연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번역 제목을 단) 영화도 있었고, 근래에는 같은 이름을 붙인 장규성 감독의 한국영화도 나와 있습니다. 이들이 노작의 시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특히나 전자는 더), 여튼 그 멋진 어감 때문에 많은 영향을 받은 건 사실입니다. (물론 더 앞선 시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있긴 합니다만)

1장에 실린 문학관의 주인님들 중 안양의 김대규 시인은 유일하게 지금까지도 활동 중인 "할아버지" 문인이십니다. 홍사용 문학관을 찾아가실 때에도 저자께선 1호선 안양역에서 출발하셨다고 책에 나옵니다만 아무래도 현 거주지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터잡고 활동하시는 향토 문인(안양은 수도권이긴 합니다만)이시니 더욱 존경과 관심이 생기셨을 법합니다. 김 시인은 꽤 고령이신데도 아직 정정하실 뿐 아니라 문인 특유의 멋이 물씬 풍기는 참 젠틀한 외모이십니다. 바로 앞에 나왔던 토픽의 주제 조병화 선생(역시 큰 시인이셨죠)과 대학생 시절부터 교류하시던 분이라고도 나오네요.

부여는 백제가 도읍을 둔 마지막 장소이기도 하고 호암사 정사암 등 무수히 많은 문화재로 유명한 고장이지만 여기는 "껍데기는 가라"의 신동엽 시인이 근거를 둔 곳이기도 합니다. 저도 가 본 적 있는데 작가께선 "신동엽문학상 수상작"들이 천장에 "모빌처럼" 매달렸다고 하십니다. 모빌이라 함은 물론 콜더의 그 모빌 장르를 말하는데, 아주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시의 깃발'과 옥상의 구조였다." (p111)

박인환은 참 그 이른 시기 현대 한국의 모던한 정서를 너무도 잘 대변, 표현한 분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따지고 보면 별것없는데도 그 말 맛이 너무도 착착 감겨든다."고 평하시던데 가장 헐하게 평하고 들어도 이 정도의 감탄을 자아내는 진정 특출한 재능을 지닌 분입니다. 시로서도 탁월하지만 유행가 가사로 붙여도 참으로 제격인데, 1980년대 대중가요 상당수의 가사가 쓸데없이 현학적이고 고답성을 가장하는 건 어쩌면 (훨씬 앞선 시점에서 뜻밖에 요절한) 박 시인의 (예기치 않았던) 영향일지도 모릅니다. 문학관이 소재한 인제는 그의 출생지이니 더욱 의외입니다. 그런 벽촌에서 이런 극한 도회적 감성의 소유자가 탄생하다니요.

천재 소설가 김승옥은 오사카 태생이지만 순천에서 성장기를 보냈기에 이곳에 문학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서울대 재학 시절부터 모두의 기를 죽이는 놀라운 재기를 발산했던 그는 젊어서부터 온갖 문학상을 휩쓴 분이지만 장년기에 쓴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이상문학상 제1회 수상을 하기도 했죠. 이곳에는 정채봉 시인의 코너도 마련되었는데 그는 인접 농촌 승주 출신이지만 현재는 행정구역이 통합되었으므로 이곳에서도 그의 자취를 살필 수 있습니다.

이병주 선생은 개인적으로 무척 존경하는 분이고 하동에 세워진 그의 문학관에 찾아본 적도 여러 번입니다. 순천이나 하동이나 영호남 경계에 붙은 곳이라 작가께서는 인접한 일정으로 다 소화하신 듯합니다. <소설 알렉산드리아>도 참으로 멋지고 작가 본인이 4. 19 등에 참여하신 이력이 있는 만큼, 이후 1980년대에도 <그해 오월> 등의 시사성 짙은 대작을 창작하기도 하셨지요. 사람은 이처럼 말과 실천이 맞닿은 삶을 살아야 하는데 무슨 자기만의 환상 속에서 민주화운동의 끝판을 보기라도 한 양 말만으로 폭주하는 정신병자도 있으니 참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그저 개탄스럽기만 합니다. 김 선생께서는 특히 이 문학관에 대해 존(zone)을 나눠 색깔별로 의미를 부여한 선택에 대해 특히 높이 평가하시며, 특히 갈색인 4 zone에는 "끝나지 않은 월광 이야기"란 제목이 달려 있었다고 회고하시는데 저 역시 그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김동리는 책에도 나온 대로 본디 경주 태생이고, 그래서 그의 풍자적 단편 <화랑의 후예>가 더 각별한 의의를 갖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명은 우리가 국어 교과서에서 잘 배운 대로 "시종"이며, "동리"라는 필명(아호가 아닙니다)은 그의 형이 지어주셨다는군요. 김미자 작가님은 "... 곡선이 아름답고 웅장한 기와 지붕은 그 어떤 관문과는 격이 다르다..."는 말로 첫 소회를 표현하십니다.  "먼저 선배인 동리관으로 들어갔다"라는 문장이 있어 잠시 웃었는데 이 책에는 이곳 말고 그 앞에서도 이런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처음에는 김 작가님 개인적으로 선배 된다는 뜻인 줄 착각했는데, 아무려면 김동리 소설가가 연배로든 무엇으로든 김 작가님께 "선배"가 될 수는 없죠. 한 고장에 세워진 문학관에는 그 지역이 배출한 여러 문인을 기리는 코너가 있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박목월 시인에게 소설가 김동리가 선배인 셈이란 뜻입니다.

우리 자신의 정신적 여유를 찾고 삶의 깊은 의미를 돌아보는 데에 이처럼 문학관 탐방만한 멋진 계기도 또 없을 듯합니다. 예쁜 책이 아니라도 이곳들은 언제나 우리의 팍팍하고 메마른 정신을 향해 손짓하지만, 이런 예쁜 컴패니언까지 곁에 끼고서 한 곳 한 곳 발품 팔아 현지의 정취를 직접 접해 보는 것도 어떻겠습니까? 문학은 그저 종이 저편에서만 우리와 소통하려 드는 세계가 아니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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