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근담
신흥식 역주 / 글로벌콘텐츠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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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채근담>은 여러 판본이 출간되어 있습니다만 이 책은 한학에 깊은 조예를 쌓으신 한조 신흥식 선생이 번역하고 주(註)까지 다신 책입니다. 채근담은 교양 있는 동아시아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익하고 심오한 격언집입니다만, 유불선 중 어느 한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조류의 가르침 그 정수를 고루 담기까지 한, 동양 인문의 결정체에 가까운 역작입니다. 머리에 든 것 없고 천품이 천박할수록 박약한 지능으로 고전을 함부로 폄하하는 풍조가 근래 일어서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만, 이런 와중에도 성현들의 지혜를 오롯이 담은 멋스러운 책들이 계속 출간되니 그나마 세상에 희망의 불잉걸이 아직은 남았다는 생각도 드네요.

채근담은 전/후집 양권으로 나뉜 편제입니다. 전집은 수신의 도에 대해 주로 평하고 논하지만 대개는 유가의 입장에 근거를 두었으며, 후집은 앞서 말했듯 불가와 도가의 심원한 진리까지를 반영합니다. 채근담의 어느 판본이라도 이 고전에 대한 해제를 잘 베풀어 놓았으나, 특히 역주자 신한조 선생님의 서문은 참으로 정갈합니다. 글이란 그저 건조한 지식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고아하고 풍취 높은 표현 속에 수양의 깊이를 증명하는 바 큽니다. 이런 그윽한 문구와 은은한 어휘를 통해 저자와 독자는 인문의 소통을 완수하고, 대 성인의 심오한 깨우침은 면면이 전승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어휘에는 한자어가 일일이 병기되어, 우리가 일상으로 쓰다시피하는 단어가 기실 어떤 속뜻까지를 품었는지 심사숙고할 계기까지 마련해 줍니다.

사람들의 경우와 계제를 보면
갖춘 이도 있고 갖추지 못한 이도 있는데,
어찌 나로 하여금 홀로 갖추어지기를 바라겠는가?

人之際遇, 有齊有不齊, 而能使己獨齊乎

(p60. 책 본문에는 물론 한자음이 일일이 달려 있어 독자에게 최대한 편의를 도모합니다)

결론은, 마치 역지사지하는 자세로, 상대를 보아 가며 그 속사정을 알고 교류의 양태를 그때그때 융통성 있게 달리해야만 진정한 의사의 합치가 이뤄진다는 뜻이겠습니다. 이는 유가에서 목민관이 명심해야 할 자세로도 해석되지만, 역자께서는 맨 아랫줄의 "법문"이란 어휘에 유의하여 개인 수양의 도(道) 쪽으로 새기십니다. 타당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언뜻 저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첫 문장이 생각나기도 하더군요.

고전으로부터 올바르고 청아한 문구만 인용해 댄다고 이를 과연 바른 배움의 자세라 평가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준엄히 방자한 편법을 꾸짖으며, "자신의 단점을 덮고 사적으로 이용하는" 못된 마음가짐이란, "적에게 무기를 내어 주고 도적에게 양식을 대어주는" 한심한 작태나 다름 없다고 하십니다. 말 한 마디를 주워듣고 그 깊은 맥락도 모르면서 비천한 교만을 부리듯 남발하는 몹쓸 처신이란, 이처럼이나 오래 전부터 경각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태어났다면 아마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치도곤을 맞아 폐인 신세가 되었을 겁니다. 바탕이 천한 자는 먼저 마음을 수양한 후 사악한 기질을 말끔히 걷어낸 후에야 비로소 책을 가까이할 수 있습니다. p149에 보면, "의식을 깨끗이하지 못하고 밝은 마음을 구하려는 건, 마치 거울을 향해 먼지를 뿌리는 것과 같다"는 말씀도 나옵니다.

성정이 조급한 자는
타오르는 불꽃과 같아서 만나는 것마다 태워버리고
은덕이 적은 사람은
차고 맑아서 만나는 것마다 반드시 죽게 하느니라.

燥性者火熾 遇物則焚
寡恩者氷淸 逢物必殺 (p76)

어찌 이런 자들이 타인에게만 해악을 끼치겠습니까? 이미 나쁜 성정이 조직과 공동체, 심지어 가정 안에서조차 간파되어, 해롭고 간특하며 악의를 품은 그 바탕을 다들 멀리하니, 남편에게건 자식에게건 직장 상사나 동료에게건 사갈시되는 게 당연합니다. 결국 해악의 발등은 자기 자신을 향해 찍고 마는 것입니다. 저 뒤 p175의 가르침("성정이 조급하고 마음이 거친 사람은 한 가지 일도 올바로 이룰 수 없고....")과도 함께 새겨야 할 대목입니다.

p77에도, 또 p60에도 "방편"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때마다 역주가 달려 있습니다. <채근담>은 명대의 저서인데 오늘날 널리 쓰는 한자어와도 제일의(第一義)가 거의 같다는 사실에 주목하게도 됩니다.

곧은 선비는 복을 구하는 마음이 없기에
하늘이 곧 무심한 곳으로 나아가서
그 복을 채워주고
간사한 사람은 재앙을 피하고자 애를 쓰나
하늘이... (중략)... 그 넋을 빼앗느니라

貞士無心徼福 天卽就無心處牖其衷
憸人著意避禍 (天卽就著意中)奪其魄 (p94)

보통 <사기> 중 태사공자서 일부를 인용하며, 세상에 천도가 없어 악인이 번영하고 선인이 곤경에 처하는 부조리가 흔하다고들 하나, 이 중 상당수는 능력 없고 나태한 자의 비루한 자기 합리화에 그치는 수가 많습니다. 악하다고 해서 반드시 강한 게 아니고, 때로는 그지없이 비틀린 심성을 가진 자가 그저 무능의 허물을 선(善)으로 치장하여, 자신의 실패를 호도하는, 참으로 속 보이는 너절한 변명을 일삼는 작태도 우리는 간혹 봅니다. 세상의 이치는 그리 허술하지 않아서, <도덕경>에 보면 天網恢恢 疏而不失이란 말도 나옵니다. 이 문구는 꽤 유명하여, 저는 서양의 어느 추리소설에서도 한 인용을 접한 적 있습니다.

能脫俗便是奇 作意尙奇者 不爲奇而爲異
능히 속세를 벗어나면 문득 이를 기이하다고 하나
고의로 기이한 체 하는 자는
기인이 아니면서 기인인 체 하는 것이니라. (p148)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각성 없이 그저 현인의 모양새만 가장하여 세상을 속이려 드는 무도한 사술이 횡행했던 듯합니다. 한편 이 장의 후반부에는, 그저 속세와 과격히 절연하려는 자는 청렴의 의도가 아니라 격렬한 성정의 발로일 뿐이라며 훈계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진정성도 없으면서 그저 과격한 언사로 지위를 노리는 속물들이 반드시 경청해야 할 가르침이겠습니다.

寒燈無焰 弊裘無溫 總是播弄光景
꺼진 등은 불꽃이 없고
헤진 갖옷에 온기가 없다 함은
삭막한 광경을 희롱한 것이니라. (p196)

이는 불가의 훈시를 다분히 담은 문구입니다, 차디찬 예식만을 내세우며 정작 인간된 도리와 훈훈한 인정을 잊는다면, 그런 사람은 참된 경지에 이를 수 없으며 자신의 행로까지도 망치고 만다는 의미겠죠. 혹 노자(도가)가 공자를 꾸짖었다는 고사도 연상된다고 할까요. 유교 윤리가 사회의 지배 교리로 자리잡은 현실에서, 융통성과 여유를 좀 남길 것을 요구하는 불(佛), 선(仙)의 개탄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p52, p91, p197 등에 보면 역주자님의 친필(한글, 한자)과 힘찬 붓놀림의 흔적이 도판으로 실려 있습니다. 서화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가외의 선물입니다.

명대에는 점차 사대부의 불만과 좌절이 사회의 문란한 풍기와 맞물려 체제 불안 요인을 형성했으며, 한참 전 남북조의 현실 도피 청류 추구도 아니고 학인 본연의 수행도 아닌, 개인 선에서의 과격한 불만 표출이 흔한 풍조였습니다. <채근담>의 저자는 그런 지식인들에게, 설령 체제의 모순이 개인을 옥죄더라도 선비란 먼저 자신의 인격을 갈고 닦은 후에야 세상을 향해 명분과 결의를 주장할 수 있다고 은근 타이르는 듯합니다. 하긴, 이런 이치가 어찌 명나라 말기에만 해당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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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진단과 처방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송인창 외 지음 / 원더박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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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바뀌면 제도를 운용하는 방식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과거의 영화와 안락에만 젖어 낡은 해법만을 고집하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합니다. 한국 경제에 중병이 든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어떤 이들은 "병이 있으면 고칠 약도 반드시 있기 마련"이란 말도 하죠. 의학적으로야 반드시 타당한 언명은 아니라 해도, 사람 사는 세상에 난관이나 장애가 닥쳐도 적극적으로 궁리를 계속하면 반드시 돌파구가 찾아진다는 뜻으로 새길 일입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이 말의 정확한 뜻은, "그때(에)는 맞았으나, 그때의 방식을 지금 적용하면 그런 태도는 잘못이다." 정도겠습니다. 혹 잘못 해석하면, 그때의 방식은 옳고 지금 하는 건 잘못되었다." 정도로 정반대의 오해를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이 어구는 어느 유명 영화 감독(이 시끄러운 시국의 와중, 소리소문없이 또한번 충격적인 발표를 하신...)의 화제작 제목 문구를 재치있게 비튼 데서 유래했다는 것 정도는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죠(p325 이하 에필로그에도 저자들이 스스로 밝힙니다).

학교에서 코스(코즈 혹은 코어즈. R H Coase. 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 정리 정도는 경제학에 깊은 소양이 없는 분들도 이름 정도는 접했을 것입니다. "외부 효과" 이슈는 당시만 해도 경제학에서 풀리지 않는 난제 중 하나로 여겨졌는데, 이를 로널드 코스가 간명한 방식으로 증명해 낸 것입니다. 이분의 업적에 대해, 대개는 정부의 개입을 금기시하며 자유 방임주의의 타당성을 간접으로 뒷받침했다고도 여겨지만, 저자(필진 중 한 분. 참고로 이 책은 전현직 고위 경제관료들이 의기투합해 저술했습니다)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코스 정리가 규격화하여 널리 유명해지게 된 배경에는 코스 본인이 아니라 스티글러의 해석, 변형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도 하는데, 이에 대해 코스 본인도 불만이 많았다고 하네요.

여튼 1장에서, 저자는 "코스의 눈"으로 재벌 문제를 바라보자며, 발표 후 근 30년 동안이나 학계의 주목을 끌지 못했으나 뒤늦게 발견되어 "사회적 비용(개별 경제 주체 차원의 비용이 아닌)"에 대한 논의와 함께 논쟁의 핵심에 서게 되었음을 지목합니다. 코스는 여기서 물론 불필요한 정부 개입이 매우 해로울 수 있다며 피구(A C Pigou)의 주장에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언제나 정부의 개입을 반대한 건 또 아니며, 때로는 정부가 적절히 시장에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견해네요. 저자의 시각은, "이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과 정책 선택의 문제"라는 겁니다. 하긴 경제 정책에 도그마가 어디 있겠습니까. 타이밍과 여건을 봐서 유연하게 태도를 바꿔가며 액션을 취하는 게 정답이고 능력이죠.

재벌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이미 기업의 이해와 오너의 득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국면이라는 건 공지의 사실입니다. 삼성의 총수가 구속된 후 경영 투명성 제고에 대한 기대 때문에 오히려 주가가 상승한 건 이런 사회적 합의를 방증합니다. 코스의 이론은 오히려 "기업을 기업답게 재편성하여 기업도 살고 사회도 동반성장을 도모해야 하며, 일부 극소수 지분권자의 탐욕 추구에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에 가깝습니다. 물론 저자의 주장이지만, 어떤 특정 정치권에 친분을 둔 폴리페서가 아니라 정부에 몸담은 경제 관료의 선명한 입장이므로 그 설득력이 더하다고 하겠습니다.

아직도 고도성장이 필요하고, 또 가능한가? 여기에 대해 저자는 "생산성은 노동이나 자본보다,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에 더 큰 영향을 준다."라고 말합니다. 생산성이 경제성장에 영향을 준다니 얼핏 잘못 보면 동어반복 같은 느낌을 줍니다만, 여기서는 보다 장기적 관점의 생상성을 가리키며, 귀속 주체는 "사회 전반"이고, 노동 생산성이나 자본 생산성 같은 개별 요소 한정이 아니라고 새겨야 할 듯합니다. 그 다음 줄 쿠즈네츠(물론 쿠즈네츠 파동 할 때 그분입니다)는, "경제 성장의 원천은 기술 발전"이라고 했는데, 이 맥락을 보면 여기서의 생산성은 슘페터적 의미의 "혁신"에 가까움도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2장 말미에서 이른바 "낙수효과"의 의의를 전면 부정합니다. 이미 특정 계층의 소득 증대가 다른 계층의 영역으로 확산하지 않고 각각이 고립된 strip처럼 폐쇄 경로에서만 순환하는 현상이 도처에서 목도되기 때문입니다. (지표로서의) GDP 무용론이 대두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이런 까닭에 저자는 소득 등 양적 통계 외 다양한 인덱스를 개발해야 국민의 복리를 정확히 계측, 반영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당연한 소리 같아도 정책 결정 섹터에서 종전의 양적 지표가 업무 조정, 판단 과정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살핀다면, 경제 관료 출신의 이런 제언은 울림이 상당합니다.

과소비가 문제인가, 저소비가 문제인가. 한때 故 정운영 선생 같은 분은 "소비가 미덕이라 주장하는 얼빠진 작자들이 있다"고 일갈하시기도 했으나, 조순 전 서울시장의 말처럼 "경제 이론은 돌고도는 것"이라 어느 한 입장이 무조건 맞다고 간주하기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그때는 맞았으나 지금엔 틀리다"인 겁니다. 결론은 과소비 저소비 둘 다 문제라는 건데(1990년대 초반에는 계층 불문하고 과소비를 해대어 자제하자는 캠페인이 일기도 했죠), 저자는 일단 소득이 고르게 증대되어야 적정 수준, 골디 락스의 소비가 보장될 수 있다고 논의를 정리합니다.

조세와 부채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는 이런 이분법, 택일의 문제가 대단히 낯설게 들립니다. 아니 선택이 어디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이뤄질 범주인가? 그러나 경제 정책 결정자들에게는 마치 일반 회사원의 사훈이나 부장님 잔소리보다 더 피부에 밀접히 와 닿는 이슈이죠. 정부가 국민들에게 공공 서비스를 하려면 재원을 마련해야 합니다. 어느 정치인은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이다"란 말을 하기도 했는데 물론 상식과 현실에서 고루 타당한 지적이긴 하나 이론적으로 정부 재정 충당의 다른 옵션은 국채 발행이나 기타 차입 방식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거시 경제 총공급 총수요 균형 방정식에서 T 항목과 G 항목이 별개인 거죠. T=G 이면 뭐하러 변수를 두 개 따로 두겠습니까.

앞에서 코스의 이론을 스티글러가 명제로 뽑아 대중화(?)시킨 것처럼, "리카도 등가 정리" 역시 현대의 로버트 배로가 "재발견"하여 공식으로 정립했습니다. 원래 고전기 경제학자들의 저서에는 워낙 많은 내용이 담겨 있기에, 후대 학자들이 끊임없이 탐구 분석하여 현재의 실정에 맞는 내용을 따로 추출도 하는 겁니다. 그래셔 20여 년 전 대중서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가 큰 히트를 치기도 했죠. 여담입니다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저 책에 버금갈 만한 히트 대중 경제서가 안 나오는 건 참 아이러니입니다.

정부는 일을 벌이기 위해, 조세를 얼마만큼, 또 국채발행분을 얼마만큼 획정(劃定)해서 재원을 조달할지 선택을 해야 하고(경제학이라는 게 본디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선택"을 추구하는 학문입니다. 돈 버는 방법 궁리가 아니라), 그 선택에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로버트 배로가 드디어 "리카도를 넘어서는" 이론적 지점에 도달했다고 평가합니다.

적자 재정 편성의 득과 실은 분명합니다. 빚이 늘어나면 분명 재정은 부실해지고, 장기적으로 (얼마 전 미국 연방 정부 의 사례나 수없이 잦은 주정부의 곤란상에서 보듯) 셧다운 사태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허나 그렇다고 세율을 무작정 높이면 경제활동인구의 의욕을 떨어뜨립니다. 배로가 제시한 기준은 첫째 세출 사유가 항구적이지 않고 일시적일 때(예: 전시채권. 당연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으나 예를 들어 남북전쟁 당시 링컨은 화폐 증발로 대응하기도 했습니다. 현대 국가의 정부가 결코 모방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둘째 국민소득 감소와 경기 후퇴가 명백히 맞물리는 국면일 때, 이런 경우는 국채 발행의 비중을 늘려야만 합니다.

이를 두고 조세평탄화 이론이라고도 부르는데, 저자는 이의 소개, 정리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 경제단위별로 그 타당성이 입증되는지 현실에서 변별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호주는 선진국, 인도는 개도국이지만 이들 두 국가에서는 공통적으로 조세 평탄화 이론이 잘 적용되지 않는다(경기가 좋으면 오히려 부채가 늘고, 불경기에 부채가 주어듦)는 실증분석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이 이유를 두고 저자는 여러 원인을 소개하는데, 경기대응식 세율 변동 정책이라든가, 가능하면 적자를 줄이려는 정책적 관성 내지 터부 심리 등을 거론합니다.

세상이 바뀌면 그에 대응하는 방식도 바뀌어야 하나 아직도 각주구검식의 고리타분한 관점과 체제를 우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책은 그간 의심의 여지 없는 도그마로 여겨져 왔던 상식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고, 발상의 전환과 인습의 타파만이 번영과 행복을 달성하는 길임을 치밀한 논조로 독자에게 설득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전현직 베테랑 경제 관료들의 차분하고도 학문적 논변을 장착한 저술이므로, 마치 경제학 부교재를 일독하는 듯 간만에 공부 좀 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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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 파워 - 새로운 시대의 권력,
천훙안 지음, 신노을 옮김 / 미래의창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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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권력이 이상하게도 제 힘을 못 쓰고, 그 대신 국지적인 기반의 소소한 세력들이 알게모르게 실속을 챙기는 요즘입니다. 미국 같은 초강대국도 자그마한 집단의 도발에 뾰족한 수를 못 찾고 갈팡질팡인가 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런 데가 있는 줄도 잘 모를 영세한 기업이나 정치 결사가 큰 수익을 올리거나 역사의 향방을 바꿔 놓기도 합니다. "Size does matter."라는 말이 한때 불변의 진리로 통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빙하기를 맞은 거대 공룡처럼 제 한 몸을 감당치 못해 민망한 방황을 일삼습니다. 세상이 운용되는 근본 원리가 바뀌어 간다는 뜻입니다.

엊그제 마무리된 이탈리아 총선에서는 우도 좌도 아니면서 좌절한 근로 대중의 입장을 대변하고, 무엇보다 직접 민주주의를 표방한다는 어느 정파가 단일 정당으로는 최대 의석을 휩쓰는 이변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현상을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 저자는 "각자의 위치에서 미미하게 제 목소리를 낼 뿐이었으나, 어느새 그 작은 파장이 모이고 모여 대세를 흔들어 놓기까지 하는" 우리 주변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힘에 주목하라고 합니다.

독일의 "물리학자" 하켄은 현대 사회에서 조직의 속성이 근본적으로 변용을 겪고 있다고 날카로운 지적을 합니다. 조직에는 타조직과 자기 조직이 있는데, 타조직의 구성원은 그저 피동적으로 움직일 뿐이며, 조직의 이해와 자신 개인의 목적을 조화롭게 매칭시키지 못합니다. 반면 자기 조직은, 조직의 일이 곧 내 일이니 창의력과 의욕이 매 순간 당사자의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게 또 당연합니다. 예전 공산주의 국가에서 텃밭과 협동농장의 소출이 얼마나 큰 차이를 보였는지를 지켜 보면 이 점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월급쟁이들의 고달픈 신세를 wage slave라고 자조하는 말이 있는데, 체제는 자본주의라도 정작 직장에 소속하여 일하는 절대 다수의 사무직종 종사자들이 주인 의식을 못 느낀다는 건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장 구글 같은 곳에서, 누가 회사를 좌지우지하는 "오너"이며 누가 부림 당하는 "아랫사람"인지 한번 살펴 보십시오. 이곳이야말로 자기 조직의 이상에 수렴해 가며 구성원들에게 현대적 혁신의 의지를 이끌어내는 집단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회사 와서 일은 안 하고 백날천날 딴생각만 하는 분자에게는 타조직이건 자기 조직이건 책상이 마련될 리 없습니다.

저자는 성공적인 마이크로 파워가 발휘되는, 자기 조직의 모범적 사례로 조조의 인재 운용 pool을 듭니다. 원소의 장막에서 천하의 인재들은 소모적인 대립만 거듭하거나, 윗선에서 과감히 부여되지 않는 권한의 한계로 인해 포스트에 헌신하지 않고 내내 겉돌았습니다. 반면 조조는 아랫사람에게 한번 업무를 관장시키면 전권을 주다시피했으니 참모들이 신이 안 날 수 없습니다. 이게 바로 타조직과 자기 조직의 극명한 차이입니다.

저자는 이를 통해, "변혁적 리더십과 거래적 리더십을 상황에 따라 선택하여 융통성 있게 적용한다"는 말로 정리합니다(p55). 한국사에서는 이방원이 일으킨 무인정사(제1차 왕자의 난)과 유사한, 당 태종을 권좌에 올려 놓은 거사였던 "현무문의 변"에서, 이세민의 책사 방현령의 공로는 실로 컸습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어느 조직에서건 "내집단"이란 게 따로 있어, 리더가 이런 코어 섹터를 따로 둔 후 적절히 운용하여야 목표가 효율적으로 달성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에 부작용도 있을 수 있으나, 조직에 활기가 떨어지고 타성과 관행에 젖어 움직인다면 형식적 프로토콜이나 어설픈 명분론은 차라리 해로울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의 "내집단 옹호론"은 타당합니다.

이 책은 픽션과 역사 속에서 다양한 사례를 끄집어 내어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어떤 무리든 간에 오합지졸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한 몸처럼 호흡을 맞춰 고도의 성과를 내며 전진할 것이냐의 갈림길은, 리더가 그 집단을 그저 집단에 머무르게 하느냐 아니면 진정한 유기체와도 같은 "팀"으로 재조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말을 하며 그는 <서유기>의 삼장법사 예를 듭니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각각의 이유에서 반사회분자, 조직에 융화될 수 없는 이들이었고, 삼장법사는 이들을 통제할 초능력 따위를 갖춘 인물이 아니었으나, 분명한 목표의식과 불굴의 의지를 지녔기에, 세 "제자"는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 점은 문예로서의 텍스트를 이해할 때에도 무척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p83에, 그저 집단이기만 한 무리와, "진정한 팀"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세계 굴지의 기업을 세워 천문학적 수익을 올리는 경영자 저커버그의 저력과 재능, 비결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죠. 개인적으로 저는 그저 셰어홀더의 자리로 물러나 젊은 인생의 갖은 기쁨을 누리는 데 몰두하지 않고 구태여 CEO의 현업을 지키는 그의 태도가 참 돋보인다는 생각인데요(실제로 닷컴열풍이 불었던 18년 전에는 이처럼 한번 대박을 친 후 카리브해에서 유유자적하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저커버그의 다음과 같은 언명에 주의를 돌립니다.

"경영자인 저는 첫째 분명한 목표를 설정합니다. 둘째로 우리 회사가 하나의 팀으로서 온전히 돌아가게 보살핍니다."

신기하게도 이런 그의 언급은 저자가 이 책을 쓴 취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이어지는 경영자의 소명은 다시 세 가지가 제시됩니다.

1) 수평적 경영을 지원한다: 상명하달식 시스템은 반드시 한계를 드러내게 되어 있고, 타조직의 타성으로 떨어지는 지름길입니다. 저자는 그러나 단서 하나를 다는데, 질서가 문란해질 만큼 수평 방식을 일관해서는 또 곤란하다는 겁니다. 하긴 이렇게 방만하고 놀자판 회사가 되어 버리면 적당주의 요령주의 무능자만 살 판이 나겠지요.

2) 혁신의 문화와 즐거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역시 십여 년 전부터 모든 경영서가 일관되이 독자에게 경각시켜 온 사항입니다. 일은 놀이와 일체가 되는 수준까지 가야 하며, 차원 높고 성과의 질을 바꿀 수 있는 혁신은 즐거운 마인드로부터라야 창출될 수 있다는 게 이제는 상식으로 통합니다. 물론, 놀이를 통해 일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진지한 사원이라야 이런 인센티브가 통하겠으며, 태생부터 분위기를 흐리고 부정적 기조를 확산시키려 드는 자에게는 애초부터 설 땅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리를 깔아주고 놀아 보라고 하면 제대로 놀지도 못합니다.

3) 기업의 문화와 잘 맞는 직원을 채용한다 : 당연한 말 같아도 이게 막상 조직에 적용해 보면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닙니다. 페이스북의 경우 신규 채용시 전 직원이 거의 모두 심사에 참여하다시피하는데, 이건 첫째 이 기업에서 수평적 업무 문화가 일찌감치 조직 전체에 스며 있어야 가능하며, 둘째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의식을 갖고 조직의 모든 활동에 익숙해 있어야 합니다. 페이스북의 경우 거대 규모의 종업원을 고용하여 이윤을 창출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슬림화만을 추구하는 것도 조직의 건강성을 해칩니다. 이게 성문화, 화석화한 매뉴얼에 의해 움직인다면, 매 순간 조직에 엄습해 오는 난제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습니다. 융통성과 기민함이야말로 마이크로 조직의 혁신과 생존 비결입니다.

책은 후반부에서 주로 젊은 독자층을 겨냥하여, 우선 첫번째 직장을 어디로 골라 몸닫을지를 고민하라고 조언합니다. 경력의 시초점은 결국 그 사람 인생의 전체 경로를 규정하다시피하죠. 목표의식이 분명치 않고 너절한 도피자의 이론이나 페티시처럼 숭배하는 인간은 어느 조직에서건 반드시 도태되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록펠러가 사회 첫 걸음을 뗄 때 몸담았던 공장 관리자의 역할에 특히 초점을 둡니다. 몇 방울이면 충분할 용접을, 수십 방울을 흘려 가며 원가가 낭비되는 현장을 보고, 그는 즉시 시정을 모색합니다. 이런 노력이 어디 용접 공정에만 한정되었겠습니까? 타성에 젖지 않고 모순과 낭비 요소를 귀신 같이 발견하는 그의 눈은, 몸담는 직장마다 연간 수억 달러를 절감하면서도 고도의 성과를 내는 원천이었습니다.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체적으로 업무에 임하며 생생한목표를 발견하고 성취하는 조직이야말로 마이크로파워의 참된 진원입니다. 40년 전쯤에 일본의 칸반시스템, 저스트 인 타임 방식 등의 고안은 세계 경영계에 충격을 주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이 역시 마이크로파워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이런 조직에서는 점차 중간관리자의 할 일이 없어지는데, 한국사회 원하청 구조에서 중간책들이 저지르는 수없이 많은 "갑질" 물의를 보면 아직 우리가 갈 길이 참으로 멀다고 하겠습니다. 중간관리자뿐 아니라, 오너도 없고 부하직원도 없는, 모두가 대등한 자격에서 신 나게 일하고 이윤을 나눠 갖는 조직이야말로 미래형 직장의 수렴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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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가이 - 일본인들의 이기는 삶의 철학
켄 모기 지음, 허지은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책 제목 "이키가이"에서 일단 "이키(いき)"란, 문자 그대로는 (들고나는)숨, 호흡, 활동이 왕성한 기간, 목숨을 뜻합니다. 意氣라고 새긴다면, 우리말에서 쓰는 용법과 같습니다. 그러나 역시 책에서 설명하는 내용(p15)이 가장 중요하겠으므로 그에 더 주목하자면, 이때의 용법은 生き, 活き, 즉 우리말로는 "생기"란 뜻이 됩니다. 한편 "가이"는 効, 甲斐 등으로도 쓰는데, 우리말의 "보람"과 통합니다.

책의 같은 페이지에서 저자는 이 "이키가이"라는 말을, 일본인들이 매우 자주 쓴다고 전합니다. 커다란 성취를 올렸을 때는 물론이고, 소소한 쾌거를 맛봤을 때도 그리 주저하지 않고 이 표현을 적용한다는군요.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비록 원하는 대로의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그에 대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고 후회가 남지 않는다면 당사자들은 얼마든지 자랑스러워하면서 즐겨 이 말을 쓴다는 점입니다.

예전에 저는 일본인들의 품성을 평가한 어느 고문헌에서, "일본인들은 악착 같이 굴기는 하나 간사하지는 않은데, 쓰시마인들은.... (이하 생략)"이라는 대목을 읽은 적 있습니다. 일본인들의 민족성에 대해 그 평가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어도, "악착같음"에 대해서는 거의 의견이 일치한다는 뜻도 됩니다. 사실 일본은 길게 늘어지기만 한 국토 넓이에 비해 경작지가 태부족하고, 인구는 많으나 물산이 적고, 천재지변이 잦아 사람이 살기 그리 적합한 땅이 못 됩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은연중 정신 속에 스며든 게 바로 "이키가이" 정신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책을 다 읽고 나서 들었습니다.

얼마 전 신기술을 발명하고도 그 이익이 고스란히 소속 법인에 다 귀속되다시피하여, 이에 반발한 엔지니어들이 소송을 낸 사건이 일본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한국 같은 경우 엔지니어들에 대한 대우는... 글쎄요... 일본에 비해서는 낫다고 봐야 하는지, 그래도 대기업에 다닌다는 평판과 명예가 금전적 부분을 어느 정도는 만회하는지 아리송합니다만, 일본인들이 느끼는 상실감에 비해선 적은 편이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저자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영광스럽게도) 직접 인터뷰한 기억을 떠올리며, 이 거장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독자에게 전합니다.

"보상은 돈도 돈이고 팬들로부터의 찬사도 찬사이지만,  창작 작업에 몰두하는 그 자체로부터 얻습니다."

이 말은, 미야자키 감독 같은 거장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산업에 종사하는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손에 쥐는 대단히 미미한 보수가 문제는 문제 아닌가 하는 전제에서, 해당 거장이 스스로 토로한 내용입니다. 그러니 그 역시 구조의 모순에 대해서는 의식을 한다는 뜻도 되죠.

제 생각에, 이른바 열정페이다 뭐다 해서, 쥐꼬리만한 대가를 받고 그저 체념적으로 만족하라, 사회가 다 그런거지 뭐, 이런 결론은 아니라고 봅니다(혹시 그렇게 곡해된다면 주의가 필요하죠). 당연하게도, 나의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누군가가 가로챈다면 싸워서 도로 뺏어야 합니다. 이는 당연한 의기의 발동일 뿐 아니라,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 정의를 위해서라도 발휘해야 할 의무입니다. 헌데 그런 경우 말고, 아무리 애를 쓰고 그 결과가 좋았다 해도, 그 당사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대가가 귀속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꼭 최적화된 구조는 아니라서, 결과가 나쁘게 떨어지는 수가 오히려 더 많습니다.

이 경우, 책임 소재를 추궁할 수 있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허나, 어디 대고 하소연도 못할 억울한 상황이 알고 보면 더 많죠. 이 때 분노를 간수하지 못하고 아무데나 화풀이를 해야 할까요? 자포자기 심정으로 일을 방치하다시피 팽개쳐야 할까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래 봐야 자기 손해이며, 나아가 자신을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님, 은인, 지인,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도와 준 이들에 대해 엉뚱하게 분을 풀어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책임을 물을 장본인을 못 찾았다면, 그의 정체가 드러날 때까지 은인자중해가면서 응징의 저력을 길러나가는 게 차라리 현명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이랄까 비결은 바로 "이키가이"입니다.

"이키가이"라고 꼭 일본어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사람이 매사에 생기에 가득하고 넘치는 의욕을 발휘할 곳 어디 없나 눈이 반짝반짝한 사람은 어디 가도 환영을 받습니다. 저 사람하고 일하면 앞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고, 설령 이 조직에서 아직 필요한 기능을 습득 못 했어도 금방 배워서 다 따라잡을 것만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누구로부터도 쌍수를 든 인기를 끄는 게 보통입니다.

앞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예가 잠시 나왔습니다만, 저자는 이런 평가와 해석을 하는군요. 잠시 인용하자면 "작가가 행복에 가득 차서 그려내고 창작해 낸 작품은, 그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그 행복의 기운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아이들은 행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바로 구별해 낸다.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이 그처럼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건, 주된 향유층인 아이들이 그의 작품에서 풍겨나오는 행복을 바로 캐치해 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맞는 말입니까? 아닌게아니라 자신의 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룬 거장은, 표정도 행복하고 자세와 태도에 긍정적인 기운이 넘칩니다. 이런 분들은 자신만 행복한 게 아니라, 전혀 무관한 남들에게까지 그 밝고 맑은 기운을 전파합니다. 얼마나 고마운 분들입니까. 사화의 빛과 소금이란 이런 분들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죠.

저자는 이런 생기를 가리켜 지속가능성과도 연결된다고 합니다. 물론 행복한 사람이건 그렇지 못한 이건 길어야 사람의 수명은 백 년을 넘기 힘듭니다. 그러나 행복한 사람이 남긴 자취는 마치 그윽한 향수의 발산처럼, 당사자가 가고 난 후에도 오래 그 자리를 지키며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지속 가능성의 미덕입니다. 당장 건강에 한정시켜 봐도, 행복한 사람은 얼굴과 태도에 확신과 정열이 스며 있습니다.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이고, 그 사람이 하는 일은 손대는 것마다 성과가 좋습니다. 반면 마음에 부정과 어둠이 가득 깃든 이들은 남의 일까지 망칩니다.

한국의 SK가 과거 "선경그룹"이었던 시절, 그 회사의 3대 사훈 중 하나가 "꼼꼼하게 일처리 마무리하기"였습니다. 허술하게 대충대충 마무리하는 자세로는 남도 망치고 나도 망칩니다. 저자는 책에서 왜 근래 일본이 갑자기 관광대국으로 부상했는지를 두고 이런 분석을 합니다. "일본에는 코다와리 정신이라는 게 있는데,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심혈을 기울이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마음자세를 가리킨다." 아주 적합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이 단어의 정확한 뜻이 뭔지는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려운데, 일본인들끼리는 이심전심으로 통한다는군요.

이키가이의 핵심은 작은 일부터 정성껏 시작하여, 내가 원하던 대로 세심하게 마무리지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정신 자세입니다. 사실 이는 우리 선조들도 얼마든지 자각하고 일상의 실천에 옮겼던 성(誠)과 경(敬)의 마음, 또 단사표음으로 상징되는 청빈의 이념과 통합니다. 결과가 안 좋으면 또 어떻습니까? 최선을 다한 나 자신의 모습이 떳떳하고 뿌듯하면, 이미 나는 그것으로 충분한 승자가 된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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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은 어떻게 우리를 배신하는가 - 국회의원 박용진의 경제민주화를 위한 끝나지 않은 분투
박용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젊고 패기넘치는 의정활동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박용진 의원의 책입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과연 재벌은 대한민국 거시경제의 중추, 혹은 "화수분"으로서 국민이 믿고 의지할 바가 되느냐 하는 민감한 문제를, 그의 소신에 따라 과감히 분석하는 내용입니다. 이른바 "트리클 다운 효과"라는 게 있어서, 대기업이 활발히 본연의 활동으로부터 수익을 거두면 그 혜택이 "아래"에까지도 널리 미친다는 믿음, 혹은 입장이 있고, 이에 반대하며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잔치에 그칠 뿐이라는 강력한 회의론이 있습니다. 이 둘 사이의 논쟁은 특히 십여 년 전부터 우리 사회 곳곳에서 주목을 끌며 불 붙은 바 있는데, 아직까지도 명쾌한 결론이 난 바는 없습니다. 결론이 나기보다, 사회 전체가 진이 빠진 상태라고 할까요. 여튼 저자는 이 신저에서 주로 이 문제를 논급하고 있습니다.

박 의원은 책 중에서 김종인 전 의원의 말을 인용합니다. 김종인 전 의원에 대해서는 재작년~작년 연간에 여러 사건 때문에 낯익어하는 분들이 많겠는데, 이분이 젊었던 시절 노태우 정부에서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일할 때 남겼던 언행은 사실 그런 이미지와는 꽤 다릅니다.

"노동자들이 이렇게 파업을 해 대니 원 세금은 내가 뭐하러 내는 건지."
"세금은 기업뿐 아니라 노동자들도 내는 겁니다."

지금이야 당연한 상식이지만 당시로서는 이처럼 시원한 주장을, 명쾌한 논리와 함께 내놓는 이가 드물었습니다. 김 박사가 그런 말을 하고서야, 사람들은 세수 총액의 본체에서 노동 섹터가 차지하는 비중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새삼 재고하게 되었죠.

이 책에서 인용되는 김 전 의원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닭을 붙들어매고 키우지 않으면 돌아다니며 농작물을 쪼아먹고 다녀 큰 피해를 보게 된다. 그렇다고 닭을 죽여 버린다면 농가에 더 큰 손해이다."

이 말을 두고 박용진 의원은 이렇개 해석합니다.
"여튼 재벌은 필요하다. 그러나 개혁해야 한다. 재벌을 개혁하는 건 국민에 이익이 될 뿐 아니라, 그 재벌을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그는 "혹시나 있을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인데, 재벌 개혁은 재벌을 해체하고 죽이자는 게 아니다."라는 말까지 덧붙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이 이슈와 관련, 그가 얼마나 깊고 너른 사유 끝에 이 대안과 논변을 제시하는지 짐작이 가능합니다.

2부에서는 외부에서 보기에 상당히 불투명한 과정이 많았던 이재용씨의 삼성그룹 승계과정에 대해 조목조목 짚습니다. 사실 이번 큰 스캔들이 터지기 전에도, 외국 투자자 그룹이 합병 비율의 이례적인 양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소송을 걸기도 했습니다. 국수주의 관점에서 볼 게 아니라, 기업은 해외의 투자자들(꼭 그 사람들 말고라도)에 대해서도 일단 신뢰를 얻어야 살아남습니다. 승계 과정에서 불투명한 점이 자꾸 눈에 띈다면, (위에 인용한 박 의원 말대로) 해당 기업의 건강성과 장래를 위해서도 좋을 바 없습니다.

국민을 위해 단호하고 정의로운 정책을 집행해야 할 관료들이, 정기적으로 재벌 측으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관리 대상"이 된다면 이는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만, 박 의원은 여러 제보와 사례를 통해 이런 우려가 현실에 접근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뇌물을 두고 "떡값"이라 부른다면 그저 완곡한 우회어법이 아니라, 명백한 범죄의 추악한 징표를 희석시키려는 불의한 시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박 의원은 유력 야당(당시. 지금은 집권여당)의 힘으로 촛불 혁명이 성취되었다기보다, 국민의 응축된 에너지가 한시에 폭발한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그 기저에는, 정의롭지 못한 경제 구조의 모순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땀방울의 성과를 거둘 수 없는 현실에 분노한 근로 대중의 활화산과도 같은 에너지가 작동했을 뿐, 특정 정파의 공으로 돌릴 게 아니라는 메시지도 담겨 있죠. 누군가가 잘못을 지적하면 이를 계기로 삼아 같은 모순과 병폐가 되풀이되지 않게 모두가 경각심을 다질 필요가 있는데, 한국 사회는 이 점이 결여되었다고 박 의원은 다시 지적합니다.

이 책은 결국 "경제민주화야말로 민주화의 완성이요 국민 행복의 종착점"임을 알기 쉽게 증명하는 기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돕는 주장이 많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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