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네 편이야 - 세상을 바꾸는 이들과 함께해온 심상정 이야기
심상정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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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는 언제나 진보정치의 아이콘으로 우리 대중에게 인식되어 온 분입니다. 특히 대표님은 소탈하고 가식 없고 진정성 있는 인품과 매너로 우리에게 깊은 공감을 끌어내었으며, (아마도 이념과 지향과 인격이 일체가 된 기반에서 가능했을) 시원한 언변(언변을 위한 언변이 아니라)과 토론 솜씨로도 많은 이들의 경탄을 자아냈습니다. 능력도 있고 인간적 매력도 같이 갖춘 정치인, 그러면서도 언제나 내 간절한 아픔도 함께 나눠 줄 것 같은 정치인은 극히 보기 어려운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 심 전 대표가 지난 대선에서 소수 정책정당 후보 초유의 높은 득표율을 올린 게 아닐까 다들 분석하기도 합니다.

가난한 시골 동네에서 자라나 타고난 총명함 하나만 믿고 서울로 올라와서 명지여고를 다니던 그녀는, 작은 키에 수줍은 성격을 지닌 평범한 여학생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그녀였지만, 상식과 통념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담임 선생님이 훈육, 지도할 때에는 단호히 일어나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참으로 당찬 학생이었습니다.

"제가 잘못했으니 제게만 벌을 주셔야죠, 왜 반 전체를 볼모로 잡으십니까?"

물론 일개 여고생일 뿐이고 당시에는 아직 전교조 조직도, 사회과학 서적의 너른 보급도 안 이뤄졌을 시절이니 어떤 분명한 의식이 있어서 한 행동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건 그저 그녀가 타고난 기질, 정의감의 발로였을 뿐이죠. 또 이런 꾸밈 없고 무슨 남보란 듯한 쇼맨십이 아닌 스타일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 하는 진짜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저항도 가식화, 상품화된 세상이 아닙니까.

소녀 심상정은 대학에 진학하여 처음으로 전태일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그녀는 전태일과 세대 자체가 다르며, 그 사건이 일어졌을 당시 겨우 초등학생 청도였겠으므로 in person으로 조우할 수는 없죠. 대학에 들어간 후 엄청나게 많은 사회과학 고전을 섭렵한 그녀는, 토론과 심포지엄에서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실력을 갖추게 됩니다. "전태일을 만났다" 함은, (나중에 저자 진짜 명의가 밝혀진) <전태일 평전>을 읽고, 한국에도 이런 노동 운동의 선구자가 있었음을 알게 된 후, (과연 그녀답게) 봉제 공장에 직접 취업하여 진짜 노동자로서의 삶을 시작한 계기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전태일은 그렇게 외치면서 죽어갔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그가 요구했던 건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모두가 결핍과 가난에서 해방된 지상 천국"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법이라고 정해 놓은 최소한의 약속이나 지켜지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 정도였던 거죠. 잠시 앞으로 돌아가, 고교 시절 담임 선생님께 정당한 항변을 하며 비합리적인 처사에 맞선 것도, 어쩌면 "전태일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그에게 태생적으로 공감했던 그녀였기에 가능한 에피소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튼 이런 현장에의 투신이 있기 전까지는, 심상정은 모교에서 가장 멋을 부린 패션을 걸치며, 그 나름으로는 가장 뽀얀 얼굴빛을 자랑하며 캠퍼스를 누빈 여학생이었다고 스스로를 회고합니다. "괜찮고 똑똑해 보이고 멋있는 남학생들을 쫓아가면 대부분 운동권이었어요." 이때 그는 "대학문화연구회"에 가입하는데, 이 중에는 이후 진경준 전 검사장에게 유죄를 선고한 (학생 시절의) 김문석 판사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서울대 법대 교수를 지낸 한인섭 박사님도 그 멤버였다고 하는군요.

그녀의 롤모델이 된 이는 칠레의 바첼레트 같은 정치인입니다. 2016년 대선에서 그녀는 "여성 대통령 후보"라는 타이틀에 대해 꽤 부담도 느꼈는데, 어떤 정치인이 진정 유권자 총체를 대변할 자격이 있으려면, 그 정치인이 다수 민중의 고통을 해소하는 데 앞장선다는 확신이 모두에게 공유되어야 하고, 이 결과로 "노인들도, 남성들도(아마 바첼레트나 심 전 대푠에게나 지지율 취약 계층일)" 그녀를 지지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1984~85년에는 구로공단은 물론, 대구 시내에서도 택시 기사들의 파업이 있었다는군요. 이걸 두고 심 전 대표(뿐 아니라 대부분의 학자, 전문가)는 1946년 미군정 당시 철도 총파업으로 개시된 노동 항쟁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는데, 그 엄혹하던 시절 이런 기층 노동차층에서 과감한 움직임이 태동할 수 있었던 건 그 상당 부분이 심 전 대표 같은, 젊은 시절부터 현장의 노동자들과 공감하며 헌신했던 이들의 노력 덕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 무렵 그는 이승배 변호사, 즉 현재의 배우자분을 만나게 됩니다. 처음 데이트를 한 곳은 압구정동 아파트 근처였는데, 여느 청춘 남녀와 다를 바 없이, 그들의 만남과 연애도 참 달콤한 시간이었다는 회고군요. 이 무렵 노동계나 정보기관에선 "단문심"이 유명했는데, 단병호 - 문성현- 심상정 등의 요주의인물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심 전 대표가 워낙 유명한 거물이었기에, 정보기관에서도 심-이 커플의 밀회 장소마다 일일이 추적하여 사진을 찍고 동태를 파악하는 등 오늘날의 시선으로는 참 어이없는 일이 많이 있었나 봅니다.

p113에는 젊은 시절 아들 이우균씨를 낳고 모자가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렸습니다. 이 책은 심 전 대표의 인생 주요 국면을 담은 컬러 사진이 여럿 나와서, 개인사는 물론 한국 현대사의 중요 자료집으로도 의의가 클 듯합니다. p151에는 1996년 당시 국제 행사를 준비하던 심 전 대표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때만 해도 참 젊은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군요. 이해 하반기에는 국회에서 노동법 관련 날치기 통과가 이뤄지고, 이 사건을 계기로 김영삼 정부의 기반이 크게 흔들립니다. 바로 1년 뒤에는 외환위기가 터져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갔죠.

크레인 농성으로 유명한 김진숙씨, 고발 보도로 유명한 MBC 이용마 기자 등과의 인연도 소개되고, 우리가 잘 아는 노회찬 씨 같은 이(pp. 222~237에는 같이 진행했던 단식 투쟁 관련 회고가, 관련 사진과 함께 실렸습니다), 혹은 동갑인 유시민씨 같은 이들과의 인연도 소개됩니다. 이 외에도 민노당 안에서 벌어졌던 자주파 - 평등파 간의 내부 알력에 대해 심 전 대표의 소회를 털어놓는 대목도 읽을 만합니다.

심 전 대표의 오늘을 만든 건 이런 걸출한 인물들과의 깊은 유대와 소통도 큰 몫을 했던 것 같습니다. 책에는 자신의 투쟁 과정을 소개할 뿐 아니라, 특히 젊은 독자들에게 당부하는 정책적 제언도 큰 비중을 두어 개진합니다.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메갈리아 관련 곤란한 입장 표명도 한 말씀 있으니 관심 있는 독자들이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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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이야기 2 - 민주주의의 빛과 그림자 그리스인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이경덕 옮김 / 살림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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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일에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입니다만, 서양 고전 문화의 원형을 만들었고 (놀랍게도)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의 초석을 놓았던 그리스 역시, 그 역사와 문화에는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 모두가 선명히 존재했습니다. 이 2권 역시 시오노 나나미 여사 특유의 열정적이고 치밀한 분석과 추적이 돋보이더군요. 아름답고 우아하며 현대인의 눈에조차 세련되고 현명한 족적을 남긴 고대 그리스인의 성취가 뚜렷이 부각되는 반면, "그 어려운 일들"을 남보란 듯 해내고 나서도 버젓이 저지르는 "인간적인 오류"가 안타깝게 역사의 바른 궤도를 뒤집어 놓습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 역시, 초인적인 업적을 달성하고 난 후, "너무도 인간적인" 바보짓의 연발로 비참한 몰락의 내리막 운명을 타는데, 이들 위대한 문명인들 역시 그 운명의 경로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오노 여사는 이 시기 지중해 3대 강국으로 아테네, 스파르타, 페르시아를 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1권에서 잘 보아 알듯,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둘을 합친다 해도) 인구 수, 강역, 국부(國富) 면에서 대제국 페르시아와 상대가 안 되는 처지였으며, 1권에서 저자의 감동적이고 세밀한 묘사를 통해 잘 배웠듯, 골리앗을 꺾은 다윗처럼 믿을 수 없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여 절멸과 병합의 위기를 면하고 오히려 상대를 제압하는 쾌거, 기적을 이뤄냈던 것입니다. 오리엔트 저편의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3대 강국은커녕 그 밑에서 노예살이나 할 뻔했던 그리스인들은, 절묘한 타협과 전략적 사고, 자존에 대한 확고한 결의로 생존, 번영, 자존 모두를 지켜 냈습니다. 1권을 꼭 먼저 읽지 않아도 내용 이해에는 지장이 없으나(저자 특유의 스타일로, 책과 주장의 맥락을 독자가 따라오게 하려고 몇 번의 신나는 강조와 되풀이가 이어지기 때문이죠), 1권에 이어지는 독서라야 감동이 몇 배는 더 늘어납니다.

(결과를 뻔히 다 아는 이야기지만) 강력한 페르시아 제국의 진군이 실패로 이미 귀결되었기에 이 2권은 독자 입장에서 "어휴 우리 잘생기고 착한 그리스가 저 덩치 큰 악당에게 혹시 맞기라도 하면 어쩌나" 같은 조바심은 일찍 접고 편안히 이야기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저자는 언제나 우리 독자들에게 확실한 감정 이입 대상을 정해 주고 자신만의 신나는 이야기를 따라오게 만들죠. 1권에서도 그랬지만 주인공도 아니고 빌런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이긴 한데, 그래도 미련할망정 정을 완전히 끊을 수 없고 아테네인들 못지 않게 무슨 후속담이 자꾸 궁금해지는 (다른 이유에서 위대한) 스파르타인들 역시, 1권에서처럼 마냥 강력하고 강경하고 무식한 게 아니라, 자기 개성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많이 약한, 또 더 유연해진 모습을 이 2권 전반부에서 드러냅니다. 용기와 지혜의 결과, 포상으로 최상의 번영을 누리는 주인공 아테네, 좀 기가 죽고 유해진, 주인공에 대한 질투 때문에 발목잡기를 일삼던(일단 이렇게 쉽고 유치한 프레임으로 봐야 재미가 나죠) 스파르타, 기가 팍 죽은 악당 페르시아, 이 3자간의 편안한 역할 배분이 이뤄진 덕에 2권 전반부는 확실히 편안하게 읽어갈 수 있습니다.

1권에서 비교적 다양한 얼굴들이 등장해 이야기 뼈대를 잡기가 조금은 귀찮았던 독자(그런데 정말 이렇게 느꼈다면 그런 독자들은 정말 많이 게으른 분들입니다. 줄기가 정말 복잡히 뻗은 고대 그리스사를 그 정도로나마 요령껏 간추려 놓기도 힘들거든요. 로마사와는 또 차원이 다른 분석상의 난해함이 엄존하는 그리스 역사 다루는 솜씨를 보고, 이제서야 시오노 여사의 진가를 확인하게 되네요)라 해도, 이 2권은 진짜 "이야기"만 쭉쭉 진행되는 구조라서 훨씬 재미있게 읽힙니다. 1권은 또한 진지한 제도사 분석이 부분적으로 이뤄져서(굉장히 유익하긴 해도) 흐름이 끊기는 면이 있었다면(그렇지도 않았습니다만 정말 "이야기" 하나만 추구하는 독자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었을 겁니다), 2권은 그나마 그런 애로(아니지만)도 없이 시원한 관람과 질주가 가능합니다.

왜 그리스, 로마 역사가 재미있는가 하면, 구도상 승패가 빤히 정해져 있을 것 같은 싸움도, 영리한(혹은 위대한) 주인공의 기지와 자질 때문에 의외의 방향으로 확 뒤집히는 결과가 빈번히 일어나거든요. 키논 역시 상식대로라면 그 위업과 공적 때문에 영원한 정치적 승자로 위상이 굳어야 할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라는 놀라운 정치적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대 정치가(키논에게는 후배이자 라이벌 진영의 경쟁자)가 등장하여, 아테네와 전체 그리스의 역사가 지극히 아테네적인(후대인들의 규정대로) 방향으로 흘러가게 키를 틀어 버리는 역할을 맡습니다. 시오노 여사의 평가에 의하면 "모든 것을 다른 관점에서도 바라보게 만들어 버리는, '유도하는' 천재적 능력" 때문이었죠.

이 능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일단 자측이 수세에 몰렸을 때, 생각지도 않은 지점에서 돌파구를 찾게 도와 줍니다. 혹 싸움에서 져서 침체되었을 때, 재기와 대안과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건 이른바 아Q식의 정신 승리와 달라서, 발상이 그에 도달한 순간 바로 의욕을 갖고 극복을 위한 실천에 나설 수 있다는 게 큰 차이입니다. 억지로 기뻐 날뛰거나 합리화, 자기 위안, 현실 도피를 하는 게 아니라, "왜 그걸 몰랐지?"하며 진지한 각성효과가 나타난다는 게 특징이죠. 책에는 "키논이 연설하면 청중들은 감동하고 울컥하고 격동되었지만, 페리클레스가 연설하면 사람들은 자기들 생각을 멈추고 골똘히 경청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날카로운 지적이자 충분한 근거 있는 상상이며, 정치가나 지도자가 전자 같은 자질을 갖기도 힘들지만 후자는 정말로 드물며 위대한 자질입니다.

마치 카이사르나 중근세 체사레 보르자에 대해서처럼, 이제 미남 페리클레스를 붙잡고 이 시오노 할머니가 또 덕질 동인질 시작이구나 하는 분들도 있겠는데, 그 정도로 감정적 폭주를 하시지는 않습니다(저도 왕년에 여사의 그런 경향을 엄청 개탄했던 독자로서, 이 점은 제가 보증합니다. 진짜 원숙해지셨어요). 아 물론, p119를 보면 "고대 3대 미남"'이라면서 아휴! 이분 또 시작이네 싶은 대목도 없지는 않은데, 게다가 간지럽게도 그 구체적 규정은 페리클레스=편안한, 알키비아데스=위험한, 옥타비아누스= 냉철한 아름다움 이라니 독자의 오래된 닭살이 또 돋을 밖에요. 근데 좀 다분히 의식을 하셨는지, 페리클레스에 대한 기술은 꽤 차분합니다. 이거 후반부나 3권 위해 뭘 아껴 놓는 것 아냐? 이렇게 드라이하게 진행할 리가 있나? 모르긴 해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분명 의식을 하시는 겁니다.ㅋ

키논에 대해 저자는 "친 스파르타"로 분명히 포지셔닝을 합니다. 위업은 위업대로 이루고도 제 본향에서 흔쾌히 인정 못 받는 거물들이 꼭 있는데, 그 이유는 인물 개인의 정체성과 지향이 소속, 출신 집단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파르타에 태어나 불세출의 패권 정치가가 되어야 했을 사람이 이 시끄러운 아테네에 태어나 할 말도 채 못 하고 저 마음고생을 하고 있으니(물론 스파르타도 전통과 시스템에 의한 독재지 개인의 의지가 체제를 바꿀 수는 없는, 희한한 보수 구조였죠)... 그렇다고 그 위대한 인물이 개인 감정이나 에고 때문에 배신자의 길을 걸을 수는 없고, 동시대인들을 안타까이 여기면서("에휴.. 니들도 참. 답은 저건데 말이야....") 최대한 키를 그쪽에 가깝게 몰고는 갑니다. 그는 분명 스파르타식의 엘리트 과두정치를 꿈꾼 인물 아니었겠습니까? 그의 현명한 선택은, 자신의 시선과 조국의 열망 그 방향이 어긋나는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절제를 유지하면서 최대한의 타협과 조화를 도모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도 마찬가지로 현명했습니다. 싫은 사람 무작정 배척하지 않고, 그의 위대한 자질(특히 군사 방면)이 최대한 (자신을 위해, 그리고 조국과 사회를 위해) 발휘되도록 최소한의 리스펙트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스파르타는 이 시기 특히 하층민들의 반발로 큰 고생을 하는데, 종래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던 대목이 드라마처럼 재생되는 느낌이 신기하더군요. 이런 거 하나만 봐도 확실히 시오노 여사 특유의 맥락화, 팩트의 재정돈 버전으로 읽으니 뭔가 재미랄까 역사 읽는 동기 부여가 확실히 되는 느낌입니다. 다 아는 소린데도 재미있고, 이거 내가 알던 지식을 이렇게 강제(?) 재해석 당해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도 금세 진정될 만큼, 이 2권은 밀도 있게 잘 쓰여졌습니다. (거칠게 요약해서) 전반부가 페리클레스, 후반부가 알키비아데스(의 모에화?)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좋은데, 다 읽고 나니 이런 위대한 남성들의 행적은 열정적인 여성 찬미자의 시선과 해석으로 읽을 때에만 비로소 눈에 띄는 뭔가가 있지 않은가 하고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얼씨구!). 알키비아데스 같은 인물은 고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도 꽤 인상깊게 다뤄지곤 하는데요(페리클레스도 마찬가지지만 그 사람이야 또 위상 자체가 다르니), 이처럼 재미있게 낭독되면서도 사료 조사가 치밀히 이뤄진 웰메이드 대중서 덕분에 그 고전의 수요가 좀 줄어드는 건 아닌지, 아주 쓸데없는 걱정도 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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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한국경제 대전망
이근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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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면 언제나 지난 한 해의 실적과 성과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함께, 밝아오는 한 해에 대한 "전망"이 필요합니다. 전망서, 예측서도 참 많이 발간되는 요즘인데, 이 책은 한국에서 왕성한 활동상을 보이는 권위자들이 필진으로 대거 참여하여, 종합적이고 큰 스케일에서 바라본 "진짜 전망, 대 전망"을 담았다는 점이 특기할 만합니다. 서두에 보면 "30인의 필자를 대표하여" 다섯 분의 석학이 책을 여는 말씀을 남기셨는데, 이 다섯 분만으로도 묵직한 예측서 한 권이 나올 만한(아니, 그 중 한 분만으로도) 비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책을 여는 독자가 기대를 갖기에 충분하고, 설레기까지도 합니다.

서문에서 정확히 요약되듯(잘된 책은 목차뿐 아니라 서문에서, 그 책이 자체 나아갈 바를 독자에게 분명히 선포하고 넘어갑니다. 자신이 있으니까요), 책은 세 가지 키워드, 주제 방침 위에서 진행됩니다. 첫째 한국은 일본처럼 장기 침체의 트랩에 빠져들고 마는가(반면교사인가 혹은 깊이 패인 전철에의 편입 답보인가), 둘째 보다 단기적인 전망으로서, 과연 소득 주도- 혁신 주도형 성장으로 이 함정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을지의 아젠다 집중 점검, 셋째로 (저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이 둘을 연결한 고리 역할로) 중국 기업들의 상대적 감속 운행 와중에서, "선진국의 역습, 복수 차원에서 전개되는" 4차 산업혁명 트렌드의 전망은 어떠한지 등을, 큰 뼈대 위에서 짚습니다.

특히 우리 독자들이 주목할 것은, 예의 4차 산업 혁명을 두고, "지금까지(라고 하면 대개 21세기 초 10~13년 간을 지칭하겠습니다)는 신흥국이 세계 경제 흐름을 주도했으나, 이제부터는 게임의 판을 새로 짜기 위해 선진국이 근본 혁신을 이끄는 추세"라며 선명한 성격 규정을 하는 점이 돋보입니다. 이에 대해 저자들은, "게임의 룰 그 전면적 전복이 후발자들에게 기회의 창으로 새로 열릴지", 반대로 선두 주자들이 기존의 우세를 굳히는 회심의 한 수가 될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고도 하십니다(구체적 워딩은 독자인 제 해석과 기준으로 조금 바꿨습니다).

사실 경제학의 오랜 화두는, (이 책에서는 슘페터를 거론하십니다만) 거셴크론 식의 "아무 전례에도 얽매이지 않고 장점만 배워 가며 상큼하게 출발하는 후발자의 이익"이 현실에서 어느 정도의 의의를 갖는지의 확인이 그 중 하나였습니다. 이 대표적인 예라면 19세기의 신흥 공업국 프로이센(이후 독일 제국), 20세기의 미국과 러시아, 이후 등장한 일본이나 우리 한국 등이 좋은 모범이죠. 반면, 후발자의 이익은커녕 맨날 우는 소리, 피해의식에 젖어 과거의 가난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하는 후진국의 수효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4차 산업 혁명의 대(對)결전은 과연 누구의 이론이 옳은지, 가장 치열한 랩(lab) 환경에서 극명하게 그 당부를 가려 줄 테스트베드라는 의의가 하나 더 마련되는 셈입니다(그러나 학자, 평론가들에게 그렇다는 거고,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는 목숨이 달린 레이스죠).

제가 몇 달 전 리뷰한 어느 책에서 한 전문가께선 "다수의 우려와는 달리 한국은 결코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라며 아주 확언을 하고도 있었습니다. 그게 뭐 국뽕에 쩔어서 아무나 다 하는 소리 어깨 너머로 주워들어 흉내내는 식의, 근거 없고 막연한 민족주의 찬가를 부르는 게 아니라, 산업 구조와 일선 경영인들의 기질, 근성 등을 들어서 그런 결론을 낸 건데요. 여기서는 그런 직관적 담론(이런 것도 물론 필요합니다. 전문가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촉", 툭툭 던지는 예언 같은 한 마디는 결코 무시 못합니다. 다만 서로 쓰이는 국면이 다를 뿐)이 아니라, 재정 구조와 제도 도입의 배경이 사뭇 다르다는 실증의 근거를 먼저 들고 있습니다. 즉, 같은 고령화 트레일을 밟아도 복지 지출이나 사회 안전망 재원이 민간에 의지하느냐, 그렇지 않고 공적 자금(지겹게 우리들도 특정 시기에 들었죠)에 크게 기대느냐에 따라 일본과 한국이 크게 다르다는 겁니다. 젊은 직장인들이 너무 많이 떼어간다며 건보, 국민연금에 대해 죽을 소리를 하는 것만 봐도 누가 어느 상황인지 바로 짐작되죠,. 여튼 민간이 이렇게 큰 부담을 지는 편이기 때문에 일본 같은 곤경은 비껴갈 수도 있다는 겁니다(근데 왜 별로 반갑지가 않을까요?ㅋ).

주택 공급 역시 한국이 일본보다 훨씬 양호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사실 최근의 일부 부동산 버블은 특정 지역에만 한정하여 일어나는 현상일 뿐, 국민 전체를 위기로 몰고가는(예컨대 1990년초 전세 대란) 국면은 아니라는 게 차이입니다. 물론 전세난을 겪는 당사자 가구에게는 너무도 큰 시련이므로, 정책 당국은 우리 당대의 눈물이 더 이상 맺히지 않게, 아직은 여유가 있는 편인 재정을 활용해 시장에도 개입하고 적극적 액션을 취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청년 실업 문제도 사실은 일본이 훨씬 심각한 양상인데(어째 이렇게만 보면 모든 면에서 우리가 일본보다 희망적이군요?ㅋ), 일본은 정보의 비대칭성이 유발하는 미스매치의 해소에 보다 초점을 두고, 우리는 직접 고용 창출(예컨대 공무원 선발 인원 증가) 같은 방향에 주력을 두나, 책에서는 산업 구조 자체가 변혁을 겪는 국면에서 그리 바람직하지는 못한 선택임을 지적도 합니다. 직업 훈련이나 고용 인센티브 제공은 한국, 일본 정부(지자체 포함) 모두가 역점을 두고 시행하는 대안들입니다.

중국 산업 동향 분석이라면 국내 전문가 중에서 이근 교수님의 날카로운 안목이 또 빠질 수 없습니다. 일단 필자께선 최근 부쩍 두드러진 중국 게임업계의 활력을 짚고 계십니다. 현재는 '한국 개발- 중국 퍼블리싱"이란 패턴이 유지가 되기에 우리가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지만, 흥미롭게도 "쿵푸 팬더(혹시 저자께선 이 게임을 해 보시거나 애들 하는 걸 구경은 해 보셨을까요? ㅎ)" 같은 제법 두드러진 주자가 어느새 국내에도 들어와 제법 선전하는 걸 보면 미래를 마냥 낙관할 건 또 아닙니다. 증강현실, 가상현실 등 기술 우위를 앞으로 어떻게, 얼마나 유지하느냐에 미래가 달렸다고 하겠습니다.

이어서 저자는 에너지 산업, 공유경제, 바이오 시뮬레이션의 현황과 전망에 대해서도 심층적인, 그리고 치밀한 자료 분석이 기반된 의견을 내어 놓습니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도표와 데이터가 정확히, 또 곳곳에서 풍성하게 원용된다는 점입니다) 중국은 광대한 영역과 그에 부수한 풍부한 자원을 갖췄다고 밖에서 지레들 짐작합니다만, 내부에서 파악하는 사정은 그리 낙관적이진 않습니다. 일단 인구가 너무 많고, 거주 가능한 지역은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밀집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탄소 연료를 소비해 댈 때 그 해악이란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그 폐해를 직접 겪고도 있죠) 이런 중국이므로, 대체 에너지 개발, 보건 이슈, 자원을 가능한 한 적게 소비하는 공유 경제 등에 대해 보다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는 게 당연합니다. 고령화 역시 중국이 곧 당면하게 될 문제이므로. 스마트케어 섹터의 활력과 동인이 남다르리라는 점 누구나 예측할 수 있습니다.

유통 혁신 하면 역시 알리바바로 대표되는 중국이나, 쿠팡, 위메프, 티몬 등이 각축을 벌이는 한국이 그 첨단 추세에서 별반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들 영역에서의 혁신은 곧 전자상거래 전반으로 그 성과가 이어진다는 점에서, 또 인공지능이나 핀테크, ICT 등 인접 영역으로 파급이 매우 빠르다는 이유에서, 거시경제 차원에서 결코 주목을 늦출 수 없는 이슈이기도 하죠.

2장에서는 아베노믹스의 성과 검증, 브렉시트의 경과 등 굵직한 문제를 주로 짚고 넘어갑니다. 저 1장 서두에서도 이미 제기된 문제입니다만 일본은 가뜩이나 재정적자가 심각합니다. 한데 "돈을 찍어내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호언은, 물론 부자의 부담, 희생으로 전 경제 구조에 유동성을 증가시키고 고루 피가 돌게 하겠다는 의도나 의욕은 좋으나, 과연 언제까지 건강성을 유지하며 지속 가능한 정책인지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죠. 이 2장에서는 "추격지수"를 바탕으로 흥미로운 글로벌 거시 경제 분석이 이뤄지는데, 한국, 중국과, 미, 일 등 기존 경제 선진국의 그것이 어떤 양상적 차이를 드러내는지를 두고 독자들이 얻는 시사점이 많겠습니다.

세계 경제 전망을 하는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생존을 모색할지 답을 얻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사회적 경제"는 과연 얼마나 실천적 의의를 담을 모델인가? 철강의 성장은 어느 시점까지 우리 경제를 추동할까? 한류 열풍도 과연 지속적인 성장 동력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특히 IT 인력 공급 과잉에 대해 공적섹터에의 인위적 배치가 과연 답이 될 수 있을까? 재벌 개혁은 성장과 분배의 큰 그림에 어느 정도나 실용적 시사점을 던져 주는가? 나아가, 4차 산업 혁명에 대한 대응과 정책이 이 모든 고민과 건설적 합일을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되고는 있는가? 필자들의 제언이 꽤 구체적이므로, 정책 결정자 입장에서는 물론, 우리 일반 독자들도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소스로 삼고 아이템을 생산할 기반이 될 논의가 많이 실린 편입니다. 웬만한 누구에게도 도움과 시사점이 제공되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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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지능 - 미래의 속도를 따라잡는 힘
정두희 지음 / 청림출판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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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존의 모든 일자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인공지능이 대체하며, 인간보다 나은 지성과 연산 능력, 정확성, 신뢰도로 업무를 수행할 것이라는 전망이 꽤 우세하죠.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인간은 그 절대다수가 고유의 존엄을 인정 못 받던 노예제, 봉건제 사회에서조차도, 인간이 행하는 노동과 기여가 없으면 사회가 기능할 수 없는 체제를 일구고 살아 왔습니다. 한정된 지표면에 인구가 너무 많이 사는지도 모르며, 이 때문에 드디어 절대 다수는 무능력, 비효율성 등의 이유로 도태해 버리고, 창의적이거나 선대로부터 큰 부를 물려받아 대규모의 생산 시설을 장악할 수 있는 소수만 살아남아, 너른 공간과 부를 향유하며 깨끗한 환경에서 대를 이어 생존할 수도 있습니다. 이 역시 인류가 여태 경험만 못했을 뿐, 앞으로 그런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낯선 미래가 펼쳐지기보다, 지금까지의 패턴과 더 닮은 방식으로, 창의력과 혁신 의지가 더 뛰어난 이들이 보상을 받아가며, 인공지능만을 부려서는 사회의 부가가치 창출과 문제 해결이 이뤄질 수 없는 영역에서 인간만의 고유한 기여를 이어나가며 생존, 진화를 이어간다고 보는 편이 더 무난하고 설득력 있는 미래 예측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상당수가 도태되는 건 맞으나, 능력 유무에 불과하고 모조리 기계에 밀려나는 게 아니라, 자기 가려운 등 못 긁는 부분이 분명히 있듯, 고도로 효율화한 시스템 속에서 반드시 자체 해결이 어려운 버그를 집어 내고, 인간만의 비약적 상상력으로 단계의 혁신을 꾀하는 "기여"는 미래에도 여전히 대접받지 않겠냐는 전망 말이죠. 사실 지금도 "육체노동 기여"는 서서히 도태되어 가는 중입니다. 제가 몇 달 전에 리뷰한 <박스>라는 책에서도, 비능률적이고 심지어 부도적하기까지 했던 부두 노동 패턴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컨테이너 자동화 시스템이 차지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삼류, 사이비"인 정신 노동이나 사무직은 기계에 밀려나고, 진짜 창의력 있고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는 분석가들만 조직 안에서 대접받는다는 뜻입니다.

기술 지능(TQ)란, 암기 지능이나 단순 계산 지능이 아닌, "기술"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관점에서 세상을 재설계하거나, 기술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세상에 여태 없던 상품, 서비스"를 창조해 내는 지능을 말합니다. 예술가의 창조성과도 유사하지만, 그 수단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기하급수적 패턴으로 진화하는 기술"이라는 게 차이점입니다. 화가가 색과 선과 면 구성의 조합으로 기발한 그림을 만들어내듯, 작곡가가 8도의 음정으로 영혼을 정화하는 듯 신이하고 고아한 음률을 창조하듯, "기술지능"이 뛰어난 이는 갖가지 기술을 창의적으로 결합하여 보통 사람이 생각도 못 하던 도구를 만들고, 기업을 조직하며, 사람들이 그 수요를 채 깨닫지도 못하던 상품(쉽게 말하면 스마트폰이라든가)을 제시하여, 없던 시장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저자는 그 대표적인 예로 일론 머스크를 드는데, 물론 가장 대표적인 "기술 지능 천재"이긴 합니다만, 우리 독자들도, "아 그럼 그 사람도 이런 데 끼겠네" 싶은 여러 인물들이 떠오를 겁니다.

지난시대에는 국지적 재능, 지능이 뛰어난 이들이 제한된 영역에서 업적을 남기고 부와 명성을 쌓았습니다. 크게 성공한 사업가들은 꼭 자신이 뛰어난 공학자라든가 남다른 학문적 소양이 있어서 성공한 게 아니라, 때로는 뻔뻔스러운 사기, 무력 탈취, 정치적 협잡술로 거대한 부를 움켜쥔 이들도 많았을 겁니다. 헌데 미래에는, 앞서 말한 대로 기술 지능이라는 특별한 재능, 적성을 발전시킨 이라야, 자아 실현도 하고 거대한 부(富)를 획득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시대에는 부분적 지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저런 전근대적 패턴의 사업가에게 고용, 종속되어 부분적 과실을 분배 받으며 만족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앞으로 "기술 지능"을 남달리 발전시킨 이라면 자신의 재능을 온전히 자신의 계좌에만 차곡차곡 쌓아, 재능의 과실을 자신만이 오롯이 맛볼 수 있을 겁니다. 또, 방대한 인공지능 서버만 잔뜩 구축해 놓고 그에 대한 소유권을 대대로 물려받은 소수만 풍요를 누리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시스템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갖추고("기술지능"의 일부입니다), 어디서건 반드시 버그와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보완, 개선, 향상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야 사회적 지위와 부를 장악할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과거에는 노동 자본이 부를 창출했다. 일한 만큼 돈을 벌었고, 노동자가 많은(=노동자를 많이 고용한) 회사가 더 많은 수익을 거뒀다." 실제로 어떤 기업의 사세를 규정할 때, "종업원 OOO만 명을 고용한 회사"라는 설명이, 매출액 몇백억, 순이익 몇십억 같은 지표와 동렬에서 취급되었습니다. 지금 구글 같은 회사가 그 고용한 종업원 수효로 평가받지는 않습니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제안한 "법칙", 소수 20이 전체 80의 부를 차지한다는 원리는, 이제 "거듭제곱의 수익률이 세상을 지배하는(p31:6 등 이 책 여러 군데) 국면에서 더욱 심화되어, 극단적으로는 1:99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기술은 동시다발적으로 발전합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랬습니다만 지금은 그 양상이 특히나 복합적, 다면적, 총체적입니다. 이 기술 발전상이 폭발적이라서 언젠가는 불꽃 같은 상호 작용, 상승 국면에 접어들어 대 도약을 이루리라는 점은 이미 레이 커즈와일 같은 이가 지적했습니다. 저자는, 아직도 그 폭발성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현재에조차 이처럼 기술 진보의 템포를 따라가기가 벅찬데, 앞으로 거듭제곱의 법칙이 본격 현실화하는 세상에서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럼 저자가 말하는 "기술 지능"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다음의 다섯 가지 요소를 꼽고, 이어지는 여섯 챕터들에서 구체적으로 예를 들며 각각의 팩터를 독자에게 납득시킵니다.

1) 감지의 영역
2) 해석의 영역
3) 내재화 영역
4) 융합의 영역
5) 증폭의 영역

어쩌면 요즘 각광받는, 인공지능(만)이 갖춘(혹은, 그렇다고 하는) 미덕이나 장점과도 통합니다. 작금의 현실에서 혁신은 인공지능이 이끌어갈 전망인데, 사람의 재능, 적성, "지능" 역시 그 구조를 배우고, 나아가 이를 선도하는 모습이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지"는 보이지 않는 걸 찾아내는 능력입니다. 이런 성공적인 기업은 과거의 패턴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꾸준히(정도가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축적되는 정보에 의존하여 의사를 결정합니다. 에어비앤비는 세계적인 호텔 체인 "포시즌즈"보다 압도적인 성장세를 기록하는 중인데, 저자는 "비로 이 순간에도 유저들이 올리고 표현하는 욕구, 정보가 기하급수적으로 쌓이고", 이 기업의 핵심 자산은 바로 이에 기반하는 구조이니, 기하급수적으로 시장의 과실을 쓸어담는 미래의 승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정당하고 유의미한 신호와 노이즈를 구별하는 능력이야말로, 감지 영역의 핵심입니다.

신호가 감지되어도 올바른 해석이 뒤따라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전통적인 마케팅론에서 강조하던 포지셔닝 역시 "해석"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현상으로부터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은, "기술지능"의 5요소 중 가장 중요할 뿐 아니라, 나머지 네 요소가 제 기능을 발휘하게 돕기까지 한다고 저자는 단언합니다.

"내재화"는 내 것으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독자로서 제 생각은, 이 내재화야말로, 족보 보고 적당히 남 흉내나 내는 삼류 기술자들과, 진정한 창조자를 구분하게 결정 짓는 팩터라고 생각합니다. 매뉴얼이나 교과서를 수시로 커닝하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비슷한 부분을 참고나 해야 수습이 가능한 사람은, 이 내재화가 전혀 이뤄지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런 건 흉내내기에 불과하지, 참된 적성이나 능력, 지능으로 승화되지 못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뭘 근거도 없이 우기는 건 잘하는데, 나도 우기고 남도 우기니 결국 목소리 큰 사람(혹은 제정신을 잃고 난장판을 만드는 사람)이 이기는 낙후된 판에선 무슨 건전한 혁신이 있을 수가 없죠. 저자는 인공지능의 경우, 알고리즘은 시간이 지날수록 학습 능력이 좋아지므로, 이를 선점하는 자가 시장을 파레토적으로 지배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내재화가 못 된 지성은 알고리즘을 못 만들고, 알고리즘 하나가 시장 하나를 만드는 세상에서 이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융합의 미덕은 이미 혁신의 아이콘인 잡스가 세계를 향해 선보인 바 있습니다. 헌데 작금의 "융합"은, 다양한 기업들에 의해 더 섬세한 방식으로 구현되며, 이 과정에서 자신만이 뽐낼 수 있는 섬세한 개성이 드러나는 융합이 또 대세를 탑니다. 융합은 여기저기서 훔쳐 누더기처럼 이어붙이는 표절, 구걸, 사취가 아니라, 그 자체로 혁신과 창조라 부를 만한 또하나의 정신 작용입니다.

융합, 결합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이어진 모든 섹터는 시너지 효과를 내어야 하며, 부분의 합보다 커야만 합니다. 이렇게 폭발적인 증폭, 사이즈 업을 이루려면, 모든 걸 걸고 판에 뛰어들어 베팅을 하는 결단의 순간이 필요한데, 이런 요소는 사실 전통적인 기업가 정신에서 아주 핵심덕인 것으로 간주되던 자질입니다.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로컬 재벌을, 글로벌 콘글러머레이트로 키워낸 이건희 회장도 이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죠. 다만 종전의 "베팅"과 차이라면, 무모한 도박을 하라는 게 아니라, 현대에 충분히 유리하게 조성된 환경 중 하나인 "네트워크 효과"를 자기 것으로 선용하라는 게 저자의 주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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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라는 은하에서 - 우리 시대 예술가들과의 대화
김나희 / 교유서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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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 오염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요즘, 정말로 별이 빛나는(starry) 하늘 구경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만, 나안(裸眼)으로 아무리 은하를 만나기 어렵다 해도 은하의 본체, 본질이, 헤아릴 수 없이 먼 거리에서 내재의 에너지로 빛나는 "별들"이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압니다. 또, "예술이라는 은하"에 반짝이는 별들이라면 물론 예술가들이겠습니다.

물욕과 이기심, 터무니없는 거짓과 위선으로 찌든 세상을, 말 그대로 은하의 별처럼 환히 비춰 주는 이들은 바로 이들입니다. 예술인들은 물론 흔한 상업적 호객 멘트가 아닌 "작품"으로 우리와 소통합니다만, 우리들의 눈이 어두워 이 소중한 작품을 통해서조차 예술인들의 참 뜻을 곡해, 간과하기 쉽습니다. 예술인들 역시 말을 삼가고 낯을 가리는 이들이 대부분이기에, 일부러 말을 고르고 골라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이미 작품으로 할 말을 다 했기에) 우리에게 "말"로 말을 걸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과의 대화, 인터뷰는, 예술인들의 생리와 속마음을 잘 이해하는 예술인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메타적으로 분석하고 거리를 두어 관찰할 수도 있는 인터뷰어의 능력이 성공 관건이라 하겠습니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었습니다. 1부는 "고통과 고뇌 사이"란 제목인데, 음악인이 아닌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감독이라든가, 신경숙 작가와의 인터뷰도 실렸습니다. 국외인이면서 비 음악인으로는 미셸 슈나이더(작가), 알랭 바디우(철학자) 등과의 대담이 있는데, 이처럼 인터뷰이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건 <객석>, <씨네 21>, <중앙 SUNDAY> 등 다양한 매체에 기고된 글들을 한 책에 모은 연유가 있다고 있다고 저자 서문에서 밝혀 줍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 대해, 특히 이 영화의 성공이 <골드베르크 변주곡> 등을 국내에서 더욱 자주 들리게 한 원인도 되었다고들 하죠. 인터뷰어 김나희님도 이 점에 대해 특별히 짚고 넘어가는데, 여기 대해 봉 감독은 "....나는 영화계에 몸담고 있지만 진짜 위대한 예술은 음악이라고 생각한다."라는, 다소 충격적인 진술을 합니다(이런 당혹스러울 만큼 솔직한 대답을 이끌어내는 것도 인터뷰어의 능력이라고 봐야겠죠). 이어 그는, "나는 그러나 음악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하며, 앞서 (영화)음악감독 벨트라미(마르코 벨트라미. <울버린>, TV 시리즈 <V> 등의 배경음악을 맡았죠)의 도움을 운 좋게 입었다고 한 이유가 뭔지 독자들에게 잘 밝혀 주는군요.

박찬욱 감독과의 인터뷰는 비교적 최근에 이뤄졌나 봅니다. "블랙리스트" 관련 질문이 오가는 걸 보니 말입니다(이와는 대조적으로, 민감한 질문이 없는 걸로 봐서 이 책 중 신 작가와의 인터뷰는 꽤 오래 전의 분량인 듯합니다). 인터뷰는 역시 꽤나 흥미로운데, 박 감독은 본인을 "완벽주의자와는 좀 다른, 철저한 화면과 서사에 노력한 연출자"로 규정하며("철저한"에 방점이 놓입니다. 인터뷰어의 표현대로, 한국 영화에 새로운 장을 열어젖힌 그이니만치 "he on himself"가 어떤 워딩으로 채워지는지는 언제나 궁금해지죠), 이어 김나희 인터뷰어는 그의 개성과 성취를 두고 네덜란드의 지휘자 베르나르드 하이팅크에 비유합니다. 스케일이 크면서도 깐깐한 원칙 속에서 벗어나지 않는 스타일이 과연 닮기도 했습니다.

알랭 바디우는 이제 저만큼이나 늙은 분이지만, 프랑스 지성사, 나아가 역사 자체에 한 획을 그은 1968년 5월 혁명의 주역이었다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소개할 정도로, 어떤 정체성과 소속감을 확실히하는 분입니다. 이 인터뷰는 2012년 한국 대선을 앞두고 이뤄졌는지, 그 사정을 감안하는 질문과 답변이 눈에 띄어 흥미롭습니다(단, 분명히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인터뷰어의 사전 프레이밍이 어느 정도는 개입한 듯도 보이네요. 이 대담은 유독 2012.6 이라고 일자가 명기되어 있습니다). "민주주의란, 어쩌면 불안정한 시스템일지도 모른다는 뜻인가?"라는 인터뷰어의 다소 절박한 질문에, 그는 "어차피 프랑스도 45%는 좌파, 45%는 우파인 구도가 고착화되었으며, 나머지 중도가 역사의 향방을 가른다"는 대답을 내어놓습니다. 진보와 긍정은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진보주의자로서 나는 미래를 긍정하나, 철학자로서 지속적인 긍정주의자가 되기는 어렵다"라는 명답을 하네요.

19세기 이전 서양 고전음악을 즐기는 분들은 작곡가의 국적을 분명 염두에 둡니다. 그러나 예컨대 자크 오펜바흐에 대해서는 좀 태도가 애매해지기도 하겠지만 말입니다. 파스칼 뒤사팽에 대해, 인터뷰어는 "당신은 '프랑스' 작곡가인가?"라고 분명한 의도를 띤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에 그는, "나는 프랑스적인 작곡가가 아니라고 보며, 정명훈(물론, 이분과의 인터뷰도 따로 이 책에 수록되었습니다)이 한국인이지만 프랑스 음악에 대한 직관이 남다른 것이나 마찬가지로, 음악의 형이상학적 추상성에 따라 언제나 넘어야 하는 다른 고비가 있는 게 음악인의 길"이라고 명쾌히 답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 그는 사진집도 자주 내는 편인데, 어렸을 때는 사진작가가 꿈이었다고 하는군요. 시간 예술과 공간 예술의 접점이 한 인물 안에서 관측된다는 사실로 꽤 흥미를 유발하는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학과 음악은 서로 얼마나 통한 것 같나요? 픽션 속의 캐릭터나 실제 의료인들을 보면, 창작이나 생산, 연주까지는 아니라도 감상에 꽤 깊은 소양을 지닌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특히 음악의 경우 감상 소양(이 역시 훌륭한 자질입니다만)과 창작 능력은 차원을 달리하는 벽이 그 사이에 가로놓여져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필립 헤레베헤는 자신의 생, 커리어에 그 두 영역의 넘나듦을 기록한, 좀 특이한 경우라고도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이분 이야기를 하면, 고음악(바로크 등) 복고 열풍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분이 규정하는 고음악의 정수, 그리고 자신의 예술 세계 핵심 키워드가 "자유, 완벽, 순수"입니다. 어쩌면 음악의 진짜 정수도, 흐릿하게 가려진 시야 때문에 온전한 실체를 관측 못하는 우리 대중들의 불찰이 아니라면, 이미 17세기 고음악의 시대에 나올 게 다 나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필립 헤레베헤는 그 점이 안타까워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거죠.

인터뷰어는 마렉 야놉스키와 롤랑 바르트, 그리고 바그너를 한 맥락에서 이해하는 듯합니다. 이 서평 앞부분에서 봉 감독이 "음악의 절대 우위"를 말했는데, 아마 서로 안면이 없을 듯한 지휘자 야놉스키도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하네요(물론 그야 본격 음악인이니 당연한 소린지도 모르겠지만). "... 요즘 음악인들은 음악이 아니라 연극적 요소를 더 앞에 둔다.... 무대 장치, 새로워야 한다는 아방가르드적 강박이 음악 자체보다 우선이었다.... 파격, 아방가르드, 미니멀 등은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오페라의 몰락이라고 나는 본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베토벤의 <피델리오> 같은, 오페라라기보다 교향곡에 가까운(확실히 그렇죠?) 작품을 더 선호합니다. 그러나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등은 (연극적 요소가 강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레퍼토리에는 절대 오르는 일이 없을 것이라 단언합니다. 이 책에 실린 중 가장 보수적이고 단호한 언사가 채워진 파트였는데, 그의 스타일을 잘 아는 팬들이라면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이후부터는 연주자들 인터뷰가 많이 이어지는데 피아니스트 피에르로랑 에마르도 그 중 하나입니다. 바로 앞 야놉스키처럼 이분도 대단히 깐깐한 원칙주의자죠. "어렸을 때 신동으로 데뷔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에서 사라져버리는 연주인는 되고 싶지 않았다...." 본인도 신동이었지만, 또 연주인들의 세계는 인생 초창기의 화려하고 극적인 데뷔가 중요하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저 완벽한 기교에만 치중하는 스타일은 팬들에게 외면당합니다. 세련된 귀에는 "아직도 어려서 배운 정석의 재현에만 기계적으로 집착하는, 성장을 거부하는 신동"의 행보가 일일이 구별되어 들리거든요. 어려서는 "어쩜, 어쩜 저렇게 하나도 안 틀리면서, 제것인지 뭔지 모를 감정을 저리도 잘 표현하나!" 같은 감탄을 받습니다. 어린 연주자, 특히 신동에게는 다 너그러우니 말입니다. 신동도 기계적 정확성만으로 승부하는 건 아닙니다. 팬들이 그런 걸 원하는 걸 알기에, 어른들의 감정 표현을 슬쩍슬쩍 센스 있게, 결정적인 대목마다 집어 넣는다고요. 그러면 듣는 이들이 거의 미치려고 하죠.

하지만 나이 든 연주자에게는, 아무리 신동 시절의 각별한 성취와 기억이 있더라도, 이런 잔재주가 더 이상 안 통합니다. "당신은 이제 어른이거든요?" 그런데 어려서 신동으로 데뷔하기도 힘들지만, 커서 어느 앞선 연주자도 표현 못 한 스타일을 개발(속물적인 어휘라서 죄송)해서 나만의 것으로 정착시켜 이를 갖고 대중과 팬들과 소통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피카소의 예를 들면 쉽죠. 그는 이미 8세 때에 라파엘로처럼 그릴 수 있었지만(이런 신동이 한 세기에 한 명이나 나오겠습니까?), 이후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졌기에 비로소 세계적인 거장이 되었습니다. "8세 때의 재주"만으로는 당대에야 화제가 되었겠으나, 백 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도 기억 못할, 한때의 통속적 이슈에 불과했을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자벨레 파우스트처럼 레퍼토리에 제약을 두지 않는 만능형 연주자도 좋아합니다. 진짜 천재는 이런 타입이 아니겠냐며 멀이죠. "단단하고 결집된 안쪽 소리"에 대해 그녀는, "악곡의 구조나 폴리포니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만 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게 바로 싸구려 떠돌이 악사와 예술가가 서로 길을 달리하는 지점입니다. 얕은 재능을 뽐내고 다니는 날품팔이(이보다 더 낮은 품계라면, 재능도 없으면서 남의 것을 베껴 사기치고 다니는 엉터리입니다)와, 후대에 길이 남을 해석과 재현의 전형을 완성한 예술가는 이래서 서로 다른 거죠.

"청중은 겨우 수십분 동안 우리에게 귀기울이며... (중략) 그 시간은 하나의 점과도 같은 찰나이다..... (중략) 한 점이 모여서 직선이 되고, 어찌 보면 직선에서 점이 차지하는 부분이 대단히 미미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 예술가의 인생 역시 연주와 창작 외에 다른 부분이 더 결정적일 지도 모른다(요 대목은 독자로서 저의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고 그녀는 말합니다. "... 그래서, 다음 생에는 다른 일을 해 보고도 싶군요..." 솔직한 토로입니다. 예술가가 아닌 평범한 일상에 매몰되어 사는 우리들은, 반대로 강렬한 점들로만 채워진 다른 긴 직선의 삶을 내생에는 보낼 수도 있었으면 하는 꿈을 꾸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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