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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이야기 - 세계의 과거.현재.미래가 만나는 제7의 대륙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 김한슬기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9월
평점 :
지구의
표면 70%를 차지하는 건 대양입니다. 그 중에서도 태평양의 비중은, 평범한 이의 사고로는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 만큼
어마무시하게 큽니다. 태평양이니 대서양이니 남극해니 하는 게 인간의 편의대로 갈라 둔 인위적인 경계로 붙여진 이름, 구역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오히려 인위적이기에 넓이나 비중, 혹은 무지의 정도가 고르게 배분되었음직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한편으로
신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이유를 곱씹게 만듭니다. 이런 점도, 어떤 날카로운 이야기꾼, 작가 같은 분이 일일이 발견해서
둔감한 독자들에게 꼬집어 주지 않으면, 그저 당연하겠거니 넘어갔을 화제라는 게 씁쓸하기도 하고요.
태평양이
감춘(그렇다기보다는, 어리석은 우리들이 여태 눈 감고 지나간) 사연의 깊이와 범위는 그 물리적 규격보다 더 엄청납니다. 그 위를
지나다닌 인간들의 곡절도 그렇고, 수천 년 동안 아름답고 풍요로운 섬 위에 터잡고 살다 한순간에 재앙을 맞은 이들의 내력도
그러합니다. 이런 재앙은, 하찮은 인간의 지력으로는 감히 측량도 할 수 없는 자연의 웅대한 깜냥에 의해 빚어진 것도 있고,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못난 (같은 동족인) 인간이, 섭리 무서운 줄 모르고 태연히 저지른 범죄에 기인한 것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게, 저자는 문화권에 따라 논란도 크고 정서적 거부감도 작용하곤 하는 연호, 기원 시점에 대해 새로이 BP라는 표준을 잡자는
말을 서두에서 제안하네요. P가 "퍼시픽"의 약자 아닐까 짐작했으나, 그 말은 끝까지 꺼내지 않고, 대신 수십 년 전부터 여러
논자들이 제기한 것(1950년 1월 1일을 시점으로 재조정)처럼 Before Present의 약자라고만 합니다(그렇다고는 해도,
저자는 여러 "태평양적 사건"이 이 연도 근방에서 일어났음을 상기하며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저 여담만은 아닌
게, 첫째 저자의 1) 미래지향적, 진보적 세계관이 엿보이며, 2) 문화 상대주의를 옹호하는 분명한 가치관이 벌써 암시되는
대목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리뷰
말미에 써야 할 사항을 지금 미리 좀 말하자면, 이 책은 역자 후기에도 잘 나와있듯, 일종의 퍼즐 맞추기식 구성을 취하고도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역자의 표현처럼 "대체, 왜 이런 주제를 이 챕터에서 뜬금없이 꺼내는 걸까?" 같은 의문이 들 만도 한
구성이라는 뜻입니다. 역자 후기까지 읽기 전 일개 독자인 저도 같은 생각이었는데, 역시 저자 윈체스터는 실망시키지 않고 열심히
읽은 이들에게 꽤나 뚜렷한 큰그림을 떠올려 줍니다. 마지막 10장은 그 뒤에 따로 에필로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 아홉 개의
챕터를 어느 정도 포괄, 종합하는 구실까지 합니다. "미국, 서유럽은 더 이상 태평양 서안의 사정에 개입하지 말고, 그들이 그들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도록 돕는 것이 맞다"는, 다소 놀라운(저자가 영국인이고 평소 성향에 비추어 볼 때) 결론을 맺기
때문이죠.
에필로그를 빼고 총 열 개의
챕터인데, 이 중 역사, 인문 관련 주제는 넉넉히 잡아도 다섯 개를 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기후, 지질학, 산업과 기술 관련
토픽들입니다. 몇몇 대중서들이 제목만 "OOO 이야기"로 걸어 두고는, 여러 문헌(다른 대중서 포함)에서 야사(野史) 토막을
짜집기해서 펴내는 관행과는, 진정성과 완성도의 차원이 다르다고나 하겠습니다. 저자가 현지에 다녀와서 느낀 감상과 소회(물론 꽤나
단편적이라든가, "나 책상위에서 적당히 쓴 것 아님"을 강조하려고 억지로 삽입한 듯 보이는 대목도 없지는 않았습니다만)를 일일이
피력하고, 진짜 "태평양"의 일관된(너무 크니까 애초에 어려운 작업입니다만) 사연을 구축하려 치밀한 계획을 세운(저자 서문에도
잠시 그 작업 과정이 언급되죠)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는 책이란 게 분명합니다. 제목이 부끄럽지 않은, "진짜 태평양 이야기"가
맞습니다.
이기적이고 일방적 의지를
상대에게 관철시키기 위해(본인들은 오히려 피해자 행세를 하며 어지간히 합리화를 시도합니다만), 인간은 어리석게도 번영과 공존을
위한 수단보다는, 나와 상대의 삶을 동시에 파괴시킬 수 있는 무기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피해자 행세도 자신이 수세에 몰릴 때만
어설프게 연기할 뿐,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한다 싶으면 곧바로 정의의 백기사 모드로 돌입하여 폭력과 악의를 윤색합니다.
보통
이런 책들이 비키니 섬, 롱겔라프 섬 원 거주자들의 비극에 대해서만 감성적으로 강조하는데, 저자는 물론 "이 모든 소동이 다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를 되묻기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신무기의 치명적 해악에 대해 미진한 예견만으로 무리수를 두었던 모두가 다
피해자라는 시각입니다. 물론, 실험을 주도한 미국의 당국자들, 무심했던 대중에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건전한 반성과 기조는
열정(여기에는 지난시절 앞다퉈 태평양으로 몰려 온 제국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도 포함)적으로 표현됩니다. 프로젝트 진행 과정이
비교적 자세히 설명되어, "준비 안 되었던 미국"의 어설펐던(사악했다기보다는) 면모가 잘 파악되었습니다.
앨런
그레이브스 같은 이는 그런 심각한 피폭을 당하고도 기적적으로 건강을 찾은 놀라운 예죠. 반면, 이 책에도 나오는 해리 댁라이언
같은 학자는 우리가 잘 알듯 사고 후 몇 시간 만에 죽었습니다. 한국에서도 김정렴 전 비서실장 같은 이는 히로시마의 "그날" 바로
현장에서 피폭을 당한 분인데, 1924년생이면서도 아직 정정히 생존해 있습니다. 여튼 화제도 풍성하고, 시야도 적절히
중립적인데다. "그 장군은 왜 죽었을까?" 같은 음모론도 양념처럼 끼어들기 때문에 읽기에 참 재미있습니다.
저자는
스포츠를 꽤 즐기시는 듯합니다. 책 3장은 주제도 흥미롭긴 합니다만, 본인이 서퍼가 아니라면 쓸 수 없는 내용이 무척
많았습니다. 2장도 대뜸 라크로스 경기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물론 배경 첫 단계가 캐나다이므로 그곳 분위기를 환유할 만한 소재가
나올 필요는 있었겠죠. 참고로 여기(p109: 밑에서 다섯번째)에서는 스포츠 종목 이름이지만, 저 앞 p78: 9에서의 라크로스는
지명입니다. 이 지명도 물론 라크로스 경기장이 그 유래가 되어 붙여지긴 했고, 캐나다에서 아주 멀진 않죠(태평양하고는 무지
멉니다만).
소니는 처음 도쓰코라는
약칭으로 출범한, 자그마한 제조업체였습니다. 도쓰코는 東通工을 일본식으로 읽은 거죠. 펜대를 휘두르는 학자들의 시대가 가고, 이제
엔지니어의 시대가 열렸다는 자못 장엄한 제사가 눈에 띄지만, 사실 문필가들도 그렇고 엔지니어들은 더욱 겸손한 기질입니다. 미국의
앞선 산업 풍조와 연구 성과를 "동양식으로 존중하느라" 처음에는 기를 못 펴고 조심스레 연구했던 일본의 발명가, 엔지니어(당연,
모리타 아키오 회장과 이부카 마사루 같은, 나중에 거물이 된 이들을 포함)들은, 이후 혁신이 작은 성과를 내고부터는 과감한
실험과 개발에 박차를 가해, 세계인이 모두 기억하는 소니 신화(사명 변경은 유행가 가사 한 구절 "sonny boy"에서 따왔다고
책에도 나옵니다)를 이루죠.
에디슨의
GE도 그랬고, 이런 거인들의 출발은 참으로 미미했다는 것,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우아한 이론 과학자의 낭만과
여유는 간데없고 무수히 많은 소재를 두고 시행착오를 거치는 모습도 닮았습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신화는 워낙 유명해 지금도
미국의 나이 든 세대는 "일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공식처럼 여길 정도인데, 이 상품의 대히트에는 경쟁 업체의 갑작스런 철수,
전후 처참한 피해(그리고 패전 직전 군부정권의 단속) 때문에 라디오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던 도쿄의 사정이 동인으로 개입했다는,
묘한 우연이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점도 저자는 지적합니다. 이 챕터의 말미에는 현재 많이 쇠락하고 초라해진 도쿄 부두와, 세계 최대
규모의 컨테이너항이 자리한 상하이를 비교하며, 그렇게 그렇게 대세의 허브가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해 가는 무상한 풍경도
묘사됩니다. 물론 한국 가전 업계의 급부상도 언급되죠.
토르
헤위에르달의 학설이 틀렸다는 지적은 이 책 3장에서도 나오고, 다시 책 저 뒤 에필로그에서, 기적의 항해인 호쿨레아호
이야기에서도 또 나옵니다. 폴리네시아인 포함 태평양의 원거주자들은, 다른 인종이 도무지 흉내 못 낼 뛰어난 항해술을 보유했는데,
마치 철새가 몸 속에 내재된 정교한 생체 기제에 의해 제 갈 길을 찾아가듯, 해도도 전혀 보지 않은 채 항로를 유지하는 놀라운
기법이죠. 서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알몸을 드러내고 파도에 올라 묘기를 보이는 모습이, 일부 편협한 선교사들에 의해
비난당하기도 했으나,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누구에게나 평등한 파도(파도가 해안에서 부서지는 물리학 원리에 대해서도 주석을 통해 잘
설명해 주네요)"를 이용해 짜릿한 쾌감을 플레이어(서퍼)에게 선사하는 이 운동에 대해, 태평양 원 거주자들의 공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우리가 그 혜택을 누렸겠냐며 무척 열띤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생전 서핑하고는 연이 없는 독자도 구미가 동할
만큼이죠.
4장은 북한 이야기라 우리
한국 독자들 사이에서는 좀 반응이 엇갈릴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일단 "영, 중, 미, 소 4국이 애초 안(案)대로 분할 점령하여
신탁 통치를 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긴장된 대치 상태가 생기지도 않았겠으며, 찰스 본스틸의 자의적, 편의적 38도선 획정이 부른
비극이겠고, 한국(문맥상 북한을 뜻하는 듯합니다)은 소련의 퇴조에 따라 독립했을 것이다..." 대목은, 너무도 거칠고 근거없는
주장이라 반박할 마음조차 생기지 않습니다. 이건 정말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객설인데, 제가 서평 앞부분에서 저자의 건전한 가치관을
먼저 옹호했던 건, 지금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이 책은 대단히 뛰어난 구성과 비전, 겸손한 주제의식을
가진 게 분명하다는 전제를 깔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부분을 두고 전체를 싸잡아 매도할 수는 없죠. 정 불편한 분들은 이 4장은
빼고 읽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저자는
미국인도 아니고 미국을 옹호할 이유도 없는 분이지만, 이 4장에서는 푸에블로 호의 치욕에만 너무 포커스를 두는 면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책의 기조만 따라가도 그 팩트를 추리자면, 결국 미국이 원산 근해에서 실속도 없고 국제법 관행에 별 부합하지도 않은
무리한 정찰을 감행하다 망신을 당한 것에 지나지 않느냐는 쪽입니다. 물론 그 뒤에 서술된, 이른바 도끼만행 사건은 이 집단의
야만성과 무지막지함을 잘 드러낸 사건이긴 합니다만. 미국이 태평양 서안에서 "정찰"을 벌이다 망신 당한 사건은 이거 말고도 저 뒤
10장에서 중국과의 정찰기 충돌, 8장에서 지중해와 스페인 토마토 농장에 수소폭탄을 떨군 사건 등 여럿이 나옵니다. 참고로
저자는 각주에서 "냉전이란 용어 사용의 최초는 조지 오웰"이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보통 저널리스트 월터 리프만으로 알고들 있죠.
시기적으로는 이 책에 나온 대로 <트리뷴>에의 오웰 기고가 더 앞섭니다.
5장은
태평양 서안 여러 지역에서 식민주의 시대의 본격 종식을 알리는 여러 상징적인 사건을 다루는데, 그 자체로는 야사라서 정치적
중요성을 갖지 않지만, 저자의 이야기솜씨가 너무 구수해서 꼭 주제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사연을 따라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격동기
홍콩 행정장관으로 잘 알려진 둥젠화의 부친 이야기부터 해서, 둥젠화가 자금 사정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대륙(그때도 그 정도 여유가
있었나 보죠? 아직 본격 개혁개방 성과가 나타나기 전인데)에서 융자를 받고 "입 안의 혀처럼 굴며 태도를 바꾸었다"는 서술이
특히 눈에 띕니다. 대처 당시 수상이 덩 주석과의 회동을 마치고 충격을 받아 넘어졌다거나, 찰스 왕세자가 정부 이관 과정에서
각별히 불쾌감을 표시한 것 등, 영국 왕실로부터 훈위도 여럿 받은 저자의 감정도 곳곳에서 느껴지는 대목도 있죠. 핏케언 제도의 성
추문, 베트남에서 미국과 프랑스가 나란히 겪은 치욕 등, 이 챕터는 이차 대전 후 정신 못 차리고 과거로 회귀하려던 식민주의의
참패상을 (이 책 전체의 주제와 연결하여) 서술합니다.
저자는
본디 지질학자입니다. 6장에서는 그래서인지, "엄청난 표면적을 통해 태양 에너지를 흡수 혹은 복사하는 태평양"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태풍 등 기상 현상의 결정적 인자를 다룹니다. 저자가 특별히 존경심을 품었을 길버트 워커의 발견, 자연재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일본이 보유한 슈퍼컴퓨터, 또 이를 최근에 능가한 중국 측의 시설 등, 방대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한 태평양의 "심기"를
헤아리기 위한 각국의 노력과, 그에 비해 여전히 압도적 위력을 자랑하는 태평양의 위력도 실감나게 표현되네요.
7장은
호주 이야기입니다. 책에는 고프 휘틀럼이 총독과 알력을 겪으며, 이 상호 파면 소동을 통해 비로소 오스트레일리아가 영국으로부터
"사실상 독립"을 이뤘다는 식으로 리버럴 성향의 해석을 내립니다. 제가 눈여겨 본 건 특히 이 대목인데, 앞서 말한 대로 저자는
켐브리지를 졸업하고 여러 수훈도 입은 신분입니다. 영국인임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죠. 헌데 여기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좌파 진영을
노골적으로 옹호합니다. 저자의 편향되지 않고 공정한 집필 태도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죠. 사실, 고프 휘틀럼은 꼭 동시대인들로부터
지지만 받은 정치인은 아니었습니다. 책에도 나오듯 그가 물러나고 오히려 반대노건이자 라이벌이었던 맬컴 프레이저가 장기집권을 할
정도였죠(저자는 자기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명백한 팩트를 흐릿하게 표현합니다). 여튼 저자는, 오늘날까지도 일부
비뚤어진 백인들이 가진 "인종차별 경향"을 끝까지 비판하며, 이런 이들이 목소리를 내는 이상 오스트레일리아는 결코 태평양 사회의
일원이 못 될 것이라며 다소 강경하기까지 한 고발로 마무리짓습니다. 이민자 정책에 대해서도 그의 입장은 확고한 리버럴
쪽입니다(각주를 보세요). 이 외에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건축, 설계에 얽힌 뒷이야기부터 해서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많습니다.
플라스틱
쓰레기 섬 이야기는 불과 며칠 전에도 신문에서 보도되었을 만큼, 어머니 가이아를 노하게 할 만한 인간들의 우행 그 상징입니다. 이
책의 8장과 9장은, 왜 이 책이 "태평양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 자격이 있는지를 증명해 주는, 아름답고 유익한 서술로 채워진,
농도 높은 태평양의 내력을 담았습니다. 전통 이론은 태양 광선을 통해 전해진 에너지로 광합성을 식물이 이루고, 이를 먹이사슬
최하에 둔 채 고등 생물이 진화했다는 쪽이었습니다만, 심해에서 전혀 햇빛을 못 받고(엄청난 압력에까지 시달리는) 일부 생명체가
어떻게 독자적인 생존을 이뤘는가, 그 답은 바로 콜린 캐버너가 최초 제기하고 증명까지 마친, "황을 산화시키는, 갯지렁이 체내의
박테리아" 이론이 마련해 주었습니다. 저자는 9장의 래리 앨리슨에 대해서도 그렇고, 저 앞 3장에서 서핑 도구 제조업자 조지
클라크에 대해서도 그렇고, 괴짜 기업가에 대해 그리 고운 시선을 주지 않는 태도네요.
중국과
미국은 앞으로 과연 어떻게 관계를 설정해야 할까요? 10장은 빼어난 전략가들의 보이지 않는 (자국에의) 기여가 역시 저자 특유의
쉬운 문체로 서술됩니다. 앤드루 마셜 같은 탁월한 이가 창안한 전략, 이에 대해 A2/AD로 대응한 중국 측의 맞수(마치
만리장성 건축을 연상케 합니다. 책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만) 과정을 보면, 세상이 이처럼이나 우리가 모르는 배후에서 치열한
계산과 잇속을 챙기며 무섭게 돌아가는 점 뼈저리게 각성합니다, 정작 태평양에 면해 있으면서도 내부 갈등과 근시안적 편견으로
미래는커녕 현재까지도 망치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은 어떻게 교정되어야 할까요? 저자의 진단대로 미래는 태평양 시대인데, 한국은
"태평양 공동체"에서 얼마나 큰 지분, 발언권, 비전을 예비했는지 그저 답답해지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