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혼자 살걸 그랬어
이수경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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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모르는 사이였던 남녀가 만나 깊은 정과 공감을 나누고 가정을 꾸리며 그 결실로 슬하에 자녀까지 두는 부부의 결합이야말로,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 길지 않은 생을 이어가는 큰 보람과 행복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혼이 배우자 쌍방에게 큰 상처만을 남기고, 차라리 만남과 결합이 애초에 아니 이뤄지느니만 못했다는 후회만 쌓인다면, 그건 당사자뿐 아니라 곁에서 지켜보는 제3자의 마음까지도 안타깝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파탄에 이르게 된 혼인을 놓고, 어긋난 감정을 억지로 누르고 왜곡해 가며 남 보기에 윤리적이고 체면 서는 쇼를 벌이게 강요한다면, 마치 사과할 마음이 없는 자에게 억지로 사죄를 시키는 것만큼이나 인간의 양심 본연의 영역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자신의 마음이 치유될 뿐 아니라 자신을 아프게 한 상대방에 대한 묵은 감정까지 서서히 아물며, 상대방에 대한 자연스러운 용서가 이뤄질 뿐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이 편해집니다. 무작정 솔직해지는 게 상수는 아니라 해도, 덮어지지도 가려지지도 않는 걸 애써 덮는 데 쓸데없는 수고를 아끼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가 꽤 넉넉히 찾아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도 밝히듯 기업인으로서 성공한 인생이고, 외관상 아무 문제 없는 가정을 일군 남편인 저자가, 어떻게 해서 "가정행복코치"라는 직함으로 더 유명세를 타시고, 숱한 "문제 가정"들의 위기를 조언하며 위기에 처한 부부들에게 "구원자"라는 칭송까지 받을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이처럼 "실천형(실전형) 이슈"에 대해 자타가 공인하는 진정성 있는 해결사로 맹활약하시는 분들의 경우, 이를테면 여성 문제의 경우 본인이 이혼녀라든가, 경단녀로서 모진 고생 끝에 여성 CEO로 거듭났다거나, 여튼 우여곡절과 거듭된 실패가 사람을 더 강하게 키운 사례의 주인공이라야 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룰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 역시 부분적으로는 타당한 판단일 것입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남 앞에 서서 고민을 들어 주고 유효한 해답을 내놓으려면, 먼저 본인이 위기를 미리미리 잘 관리해서 흠 없는 진로를 걸어 온 분이라야, 남에게 뭐라고 충고와 조언을 베풀 자격도 생기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대중 앞에 자신을 살짝 비껴간 위기와 고비에 대해 진솔한 고백을 털어놓고, 그러한 고백담이 생기기까지 실로 뼈를 깎는 노력과 소통에 힘쓴 어느 남편, 지금까지도 한 여인만을 바라보고 사랑해 온 남편이야말로, 만인 앞에서 "행복 코치"를 자임할 자격이 생긴다 할 것입니다.

"키도 크고 예쁜 아내에 첫눈에 반했고, 십여 년 동안 큰 위기 없이 달달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아니었습니다. 결혼만 하고 나면 무작정 다 잘 풀릴 줄 알았지만, 아니었습니다. 결혼에 관해서 저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으며, 아내를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제 자신을 사랑했을 뿐이었습니다.(p20, p93)"

의지는 서서히 약해질 때 호되게 나무라면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갑니다. 더 체질이 강해지는 수도 있죠. 하지만 감정은 절대 그리 다스리면 안 됩니다. 일단 내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그 실상을 알고 내 안의 다른 아이를 다른 어른이 나서서 도닥이듯 분명하고도 정직한 진단을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하물며, 그것이 타인을 향한, 혹은 타인과 엮인 감정의 한 단락이라면, 더군다나 얼렁뚱땅 임시방편 가면과 가식과 땜질로 지나쳐선 안 됩니다. 이수경 저자님의 "성공 비결"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할 때 정확히 그 국면을 똑바로 보고, "이건 지금 분명히 잘못되어 가는 중"임을 서로(부부니까요) 인정한 후, 함께 부둥켜안고 눈물도 지어가면서 정직히 해법을 찾는 데에 있었습니다. 부부 간의 관계야말로, 초기에 잘만 다스리면 나중에 가래를 막을 일을 미리 호미로 잘 건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시인 롱펠로의 말을 인용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못이 되든 망치가 되든 둘 중 하나이다." 알쏭달쏭한 이 말을 두고, 저자는 명쾌하게 "내가 주도적으로 살면 내 삶의 주인이 되지만, 남의 손에 맡기면 피동적으로 만들어지는 삶을 살게 마련이다"라고 해석합니다. 여기서 다시 저자는 놀라운 결론을 이끄는데, 내가 지금 불행한 게 배우자 탓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이미 행/불행의 열쇠를 (배우자라는 그 사람에게) 넘겨 버렸으므로, 앞으로도 불행하고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다음이 더 탁견인데, 현재 "난 당신 덕분에 너무 행복해."라고 말하는 이 역시, 배우자에게 자신의 행복 키를 넘긴 건 마찬가지이므로, 그 행복이란 곧 불행으로 바뀔 위험이 다분하다고 하시네요.

부부가 아무리 일심동체라고 해도, 인격과 감정은 엄연히 자기 영역이 따로 있으며, 존중되어야 할 내밀한 부분도 여전히 남아있게 마련입니다. 이걸 억지로 무시하고 과도하게 조기 폭주하면, 반드시 뒤에 탈이 납니다. 내 감정 내 행복이 내 것이 아니라 당신 것이라는 무리수는, 그게 상대를 향한 헌신적인 사랑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터무니없이 높아진 일방적인 기대치를 뜻합니다. 상대는 준비도 안 되었는데, 나 혼자서 열심히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김칫국을 마신다면, 그만큼 지독한 이기주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게 사랑이라는 달달한 포장까지 뒤집어 쓰고 있으니 더 큰 문제입니다. 나는 지금 열심히 잘하려는데 왜 너는 몰라주느냐는 반응은, 억울함의 표시가 아니라 덜된 투정, 미리부터 부지런을 떠는 위선적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이 아닌 게 사랑인 척하고 있으니, 나중에 단단히 탈이 날 밖에요.

그래서 어르신들이 결혼 안 한 사람은 애 취급을 하는 겁니다. 부모 노릇은 좀 뒤의 문제고, 사람이 사랑이라는 달콤한 구름 위에서 생판 모르던 타인과 감정을 싹틔우고, 이를 대등한 인격체 간에 수습도 하고 갈등도 겪어 보고 다시 복원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되고 어른도 비로소 된다"는 뜻이죠. 저자는 겸손되이 "나는 어린아이나 다름 없었다"고 하시지만,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닐 겁니다. 사람이 자기 가정을 원만히 가꾸고 배우자와 성숙한 사랑을 일구는 일만큼 위대하고도 어려운 과업은 다시 없을 겁니다. 가정 경영의 달인이야말로 그 어느 CEO보다 유능한 인물입니다. "어른스럽게 상대의 배우자가 못 될 바엔 차라리 혼자 살아라!" 역으로, 결혼은 미숙한 인격이 생에 처음으로 맞는, 달콤하고도 가장 험난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혼, 절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 책을 읽고 알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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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경험
보도 키르히호프 지음, 서윤정 옮김 / 붉은삼나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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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과 모바일 기기가 발달하기 전엔, 종이(묶음)를 매체로 삼는 출판업이나 언론 섹터가 더 호황을 누렸던 건 분명합니다. IT 분야의 혁신이, 저들 업종에 본질적 위기를 몰고 온 걸까요, 아님 이런 기술적 진보와 원칙적으론 무관하게, 대중의 기호가 더 이상 전통적인 방식의 "이야기와 정보의 소비"를 원치 않게 된 걸까요. 마셜 맥루언식의 오래된 문제제기처럼, 메시지가 중요한가 아니면 메시지를 담은 미디어가 더 중요한가의 딜레마가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라이터 씨는 중년 연배와도 제법 오래 전에 헤어진, 노인이라고 해도 무리 없을 나이 많은 남성("공식적으로". p44:2)이며, 단 정황으로 보아 그닥 나이 들어 보이지는 않는 외모인가 봅니다. 그가 추억 속에서 그토록 자랑스레 여기는 "여자 친구"가, 예순을 넘기고도 마치 서른 살 먹은 여성 부럽지 않게 선명한 개성과 매력과 활기와 지성을 발산하듯, 모르긴 해도 이분 역시 근사한 스타일을 유지하며 품위 있게 늙어가는 중산층 신사 같습니다.

라이터 씨는 출판사를 경영하는 사장입니다. 아니, 사장이"었"습니다. 소설 후반부에는 이런 문장이 나오는데요. "거대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마지막 빙하처럼, 진부하고 평범한 것들의 열기에 녹아 버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의 출판사(p162) (하략)" 이 한 마디로 그가 어떤 경위로 출판업을 접었는지는 짐작이 됩니다. 소설은 내내 자세한 설명을 삼가는 톤입니다만, 이는 주인공 라이터 씨나, 느닷 만나고선 이내 뜻이 통해 (이 소설의 주된 사건 줄기가 된) 짧은 여행의 동반자 노릇을 해 준(물론 그녀가 더 원했다고 봐야 할) 레오니 팜이나, "말이 너무 많은 것"을 싫어하는(예를 들어 p30, p55 등) 사람들인 걸 감안하면, 사건이 아닌 심상과 감정의 단면만을 툭툭 던지며 진득한 메시지를 담아가는(우리의 공감을 유도하는) 작품의 포맷은 명과 실이 상부하는 셈입니다.

특이한 여름 신발을 신고 찾아와 계절을 앞당긴(혹은, 반대로 혼자서만 계절에 뒤처진- 이 대목은 라이터 사장이 그녀에게 왜 반했는지 암시하는 중요한 의의를 갖습니다. 자신이나 팜이나 똑같이, 자신의 시대에 속하지 않는 "아름다움과 멋"을 지닌 동질감을 인식하거든요) 레오니 팜은 뜬금없이 라이터 씨의 직업을 묻고 나선, 자신을 두고 "폐업한 모자 가게 사장"으로 소개합니다. "음.. 제 가게에서 모자를 사는 사람들이 점점 줄더라구요." 요즘은 거꾸로 다시 모자를 채용한 패션이 슬슬 뜨기 시작하는 추세입니다만, 남녀 불문하고 사람들이 더 이상 헤어를 모자로 가리지 않게 된 건 꽤 오래 전입니다. 그러니 라이터 씨의 은퇴와 팜의 폐업을 같은 선상에서 보기는 무리고요. 이는 자신의 일에 더 이상 열정을 못 갖게 된 이들 중년(노년)들의 핑계, 혹은 "위장된 이름(p18. 표면상 다른 문맥이긴 하지만 결국 같은 함의라고 봅니다)"이 아닐지 저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속한 세대도 다른 두 남녀가 (이때까지는) 오직 이 지점에서만 교점을 갖는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타인의 일을 장본인보다 더 생생히, 신이 나서 타인들에게 내레이션하는, "남자들이 그녀를 볼 때면 잠자리까지 같이 연상하게 마련(p29)"인 불가리아 금발머리 여성 마리나는 결국 동료(?)인 에리트레아 여성 아스터와 공동 운명체입니다. 정작 아스터는 자신의 엑소더스 스토리를 그닥 즐기지 않고, 마리나가 요란스레 독일인들 앞에서 거의 규격화, 상품화한 버전으로 방송에 재방송을 해 대는 모습도 싫습니다. 이런 아스터에게 라이터 씨가 끌리는 건 확실히 이유가 있습니다. (리뷰 후반부에, 제가 생각한 이유를 적어 보겠습니다)

이제 "방문객에서 동행인으로 격상된"(p50) 팜은 라이터 씨와 함께 차를 타고, 남부 독일에서 알프스를 지나 이탈리아 남단으로 먼 여행을 떠납니다. 이탈리아 반도가 남북으로 아주 무한정 길게만 뻗은 거리는 아니겠습니다만, 번거로운 중간 설명이 일절 생략된 채 둘은 해협을 사이에 둔 시칠리아 섬에 어느새 도착하여 회포를 풉니다. 애착과 가치를 두었던 인연, 업무, 열정의 대상이 모두 자신을 배반하고 떠났다는 핑계, 혹은 "위장된 이름"을 대지만, 쿨하게 이들을 먼저 떠나도록 손짓한 건 오히려 라이터씨(나 그의 일시 동반자 레오니 팜)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아무튼 이 도중에 그들은 한 이상한 소년을 만나는데, 라이터 씨의 표현에 의하면 "애매한 게 아니라 끔찍한 침묵의 사자(p134)" 같았다고 합니다.

두 남녀는 그간 작위적으로 불러들인 고독 때문에 견딜 만한 취미성 마음앓이를 하는 중이었습니만, 동행인이 생기자 단수에서 복수로 위상이 바뀝니다. p95에서 procedunt, p101에서 ambulant라며 서로 반대되는 뜻의 라틴어 동사(꼭 반대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튼 라이터 씨는 그리 의미 부여를 하네요)의 (3인칭) 복수형을 되뇌는 건 다 그런 "극복, 탈출"의 안도감을 그들 나름대로 표현한 겁니다. 지중해 저편에서 목숨만을 그저 건지기 위해 험한 꼴을 다 겪으며 바다를 건너는 난민들과는 사뭇 다른 의미겠습니다만. 저 동사들이 1인칭 복수("우리")가 아닌 3인칭 꼴을 하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겠고요.

앞의 저 소년이 일종의 예고편이었다면, 본편은 타오르미나 어느 식당에서 만난 부랑아 소녀였습니다. 이미 "단수(single) 신세"를 면해 복수(plural)이 된 그들이지만, 뭔가 이기적인 섬처럼 (아름다우나) 낯선 땅에서 스쳐지나가는 관광객이 되긴 싫었던 그들입니다. 그들은 소녀에게 속하고 싶었고, 이런 체험을 통해 서로에게 더 단단히 결속되고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저 부랑아 소녀를 가운데 두고 "의사 가족"을 이루려던, 작은, 꼭 진지하다고만은 할 수 없던, 소망이 "칼라 밑까지" 이미 내려간 겁니다. 입에서 오물오물 희망만 되뇌던 단계는 지나갔다는 뜻이죠.

이 소녀는 앞에서 말한 에리트리아 출신 난민 아스터의 "다른 분신" 정도로, 그들은 시칠리아의 풍광 속에서 받아들였던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칠리아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마련해 둔 영화 <대부>의 상징물처럼, 그들은 어쩌면 이기적으로 이 소녀의 마음은 아랑곳않은 채 자신들의 허한 마음을 채우는 매개체로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나마 소녀의 속마음에 공감한 건 팜이었으며, 어느 순간 전혀 근원이 다른 존재의 이질감, 거리를 확인하고야 만 라이터 씨는, 짧은 충돌과 몸싸움 끝에 팜과 소녀 모두를 잃습니다. 그는 그렇게 다시 "혼자, 단수"가 됩니다.

여담입니다만 주인공 라이터씨는 독일어 철자가 Reither인데, 이걸 한국어로 음사하면 "라이터"가 되어, 소설 곳곳에서 "담뱃불 붙이는 라이터"라든가, "차의 전조등" 같은 것과 내내 가까운 거리에서 착시를 유발합니다만, 이는 한국어판에서만 우연히 빚어진 재미있는 사정이겠습니다.

(전략)나이지리아 남자에게 담배 한 개비를 줬으나, 그는 그저 라이터란 이름을 라이더로 반복해서 부르며 화제를 바꿨다. (p256)

(전략)라이터를 가리키며 라이터라고 그의 이름을 말했다. 그래도 그녀(소녀)는 테이블 위 담배와 라이터만 바라보고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p168)

이 대목들 말고도, 숙소에서 라이터가 라이터를 떨어뜨렸을 때 소녀가 집어 주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도 주어와 목적어가 같은 꼴이라 묘한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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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리석은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 - 의도된 선택인가, 어리석은 판단인가! 선택이 만들어낸 어리석음의 역사
제임스 F. 웰스 지음, 박수철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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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리석은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 물론 맞는 말씀이겠거니 여겼으나, 이 두꺼운 책을 읽다 보니, 어리석음이라는 게 그저 살면서 종종 저지를 수 있는 과오를 가리키는 게 아니더군요. 이 두꺼운 책에서 다루는 "어리석음의 역사"란, "인간이 살아온 자취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의 본성 속에는 필연적으로 "어리석음" 자리했던 것이죠.

씁쓸하지만, 이 책에서 자세히 분석되고, 어쩌면 같은 패턴으로 이렇게 치명적인 실수를 반복할 수 있었을까, 그러면서도 당사자의 눈에는 이런 과오가 전혀 보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과연 인간의 본성에는 "합리성, 이성" 같은 게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절로 회의가 일었습니다. 그러나 멀찍이 거리를 둔 "타인들"의 어리석음을 구경하는 포맷이기에, 일단 읽기에 재미는 있었습니다. 이 감상과 각성이 그저 재미로만 그친다면 그건 독자의 손해이자 또다른 "어리석음"의 증명이겠습니다만 말입니다.

아낙사고라스는 자연철학자의 범주에 드는, 만물의 씨앗, 혹은 "누스(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인물로 우리가 중등교육과정 윤리 시간에 배웠던 인물입니다. 그는 "윤리적 사고"보다는 순수 사고, 자연과학에 보다 접근할 수 있는 중립적, 메타의 틀을 강조한 인물이었는데, 이런 사고 방식은 당대인들로부터 "신의 존엄을 경시하는 불경한 태도"로 간주되기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자연히 그는 "왜?"보다는 "어떻게?"에 대한 해명에 치중했는데, 흔히 요즘 인도 등 동양권에서 유학 온 젊은 인재들이 서양 학문을 배우며 "왜?"가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태도와도 통하죠. 그러나 자연과학은 본디 이런 (어느 정도) 기계론적 세계관, 사고방식에서 출발점을 마련해야 원활한 발전을 기할 수 있는 학문입니다. 아무튼 그는, 자신의 본향인 이오니아는 물론, 아테네를 비롯하여 그리스 문명권 전체의 어리석음을 비판한 셈이고, 오늘날 우리들의 눈으로도 "고작 신성을 간접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뛰어난 지성을 핍박한 그들의 어리석음"이 꽤나 눈에 거슬리는 게 사실이죠.

"기하학적이나 작았으며, 정돈되었지만 조각상처럼 정지되었다.(p59)" 이것이 그리스 문명의 한계를 꼬집는 저자의 한 마디 비평입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자치를 누리던 도시국가들은 (그 자체의 지위가) 최상의 영예였으나, 동시에 치명적인 한계였다." 이유는 명백합니다. 통일된 거대 정치 단위를 이루지 못했기에 페르시아 같은 멀리 자리한 제국으로부터도 생존에의 위협을 당했고, 결국은 아드리아해 건너편의 로마 제국에 종속당했죠. 흔히 서양 저자들은 그들 문화 고전의 토대를 완성한 그리스 문화를 무작정 에찬합니다만, 이 책 저자는 그리스적인 "고정성, 불변성, 비융통성"을 들어 그리스 고유의 어리석음으로 확정 진단합니다. "모든 것을 이상화하는 과정을 통해, 순수를 위해 삶의 다양성을 희생했으며, 단순한 합리적 체계를 선호한 나머지 복잡한 인간적 상황을 무시하고 말았다.(p107)" 의미심장한 비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어 저자는 고대 이집트로 무대를 옮깁니다. 이집트인들은 풍요로운 물산, 고립된 지형(외세의 침략이 용이치 않음)의 덕분으로 오랜 동안 발전된 문명을 이뤄 왔으나, 한번 잘 마련되어 원활히 작동한 시스템에 마냥 기대어 타성에 젖어, 환경과 상황이 바뀐 후에도 여전히 종래의 방식을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건 다를 바 없었습니다. 저자가 특히 이집트형 어리석음으로 꼽는 건, 도대체 서신 교환이나 개인 사이의 대화에서조차 "개성"이란 게 드러나지 않고, 과거에 있었던 그 무엇에 자신을 빗댄다(를 넘어 동일시한다)거나,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무심히 시간 밖에 머물러 들었다는 겁니다. 이런 점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대단히 얼빠진 행태처럼 보일 텐데, 물론 그 체계 안에서 편히 안주하는 이들에게는 사회적으로 갖추어야 할 당연한 예의, 매너, 품격처럼 여겨졌을 겁니다. 이런 태도를 버리고, 자신만의 감정을 표현하는 게 오히려 "어리석음"으로 간주되었겠죠.

중국에 대해서도 저자의 비판적 시선은 이어집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근 2500년 동안 해당 대륙의 거주민, 위와 아래를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행동 준칙을 정해왔을 텐데, 저자는 이를 두고 "너무도 상식적이며 시간밖에 벗어나 있는 듯 사건성을 결여한 태도로 사물을 바라보는 터라, 자연과학적 사고, 나아가 일체의 진보의 싹이 발달할 여지가 없었다"고 합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화약, 인쇄술, 나침판, 제지술 등 모든 놀라운 혁신이 중국에서 비롯했으나, 그 과실은 고스란히 서양이 따 먹었을 만큼, 그들의 발전과 혁신은 확장성, 연속성이 부족했습니다. 그 결과 현대에 이르러 큰 상처와 좌절을 겪은 그들이지만, 이제 어느 정도 과거의 "어리석음"을 수용, 내면화하고 거듭날지, 아니면 "서양 문화의 가장 나쁜 물질적 측면만을 모방하는 데 그치고 과거의 패턴으로 다시 돌아갈지(저자의 표현입니다)"는 여전히 그들의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중세 유럽의 "어리석음"은 새삼 뭘 지적할 것도 없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는 데 급급하여 거짓과 위선을 일삼았고, 문명의 보존에 애 쓴 만큼이나 그에 비례하여 모든 어리석음 역시 교회가 그 원천이었습니다. 이러던 암흑기가 끝나가며, 주로 알프스 이남의 이탈리아에서 (막강한 교회의 위세를 여전히 배후에 두고서도) 인본주의의 싹이 새로 트기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을 계기로 비로소 유럽 문명은 "인간다움"과 다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만, 저자는 "세속적 욕망, 물질주의와 도덕관념의 부조화(p262)"라는 숙제가 이 시기에서부터 여전히 해결 안 된 채 대물림되어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전한다고 지적합니다. 매우 타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죠.

17세기의 특성은, 이성 자체보다는 "이성에 대한 확신(p374)"였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계몽주의가 스스로 자신의 시대에 모든 무지몽매를 추방하고 전근대적 폐습을 일소한 건 아닙니다. 계몽주의스럽지 않은 일체의 타자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그 모순을 짚어 내었으나, 정작 이성과 합리를 내세운 자기 구조 안의 비정합성에 대해서는 맹신으로 일관했죠. 어쩌면 이 책의 주제인, "학습의 결과로 이뤄진 스키마의 구조적 부작용, 체질적 약점, 내재적 어리석음"은 그 전형이 이 시기에 배태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여튼 우리 인류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무엇이 발전, 진보, 개화인지,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진 상태로 상승한다는 게 무엇인지 목적의식만은 분명히 다집니다. 물론 현실도피성 몰입이 "더 나은 내일"이라는 식의 착각, 허풍은 가장 악성의 어리석음이겠지만 말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색다른 어리석음의 최신판을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그전부터 궁핍에 시달리던 인간은, 그 궁핍으로부터 절제, 검약, 반성이라는 미덕 하나는 확실히 얻어 발전시키고, "이상적인 인간형"을 사회 신참자에게 교습하는 데 반드시 이 덕목을 주입했습니다. 억지 춘향도 문제지만, 이제 고삐가 풀려 무작정 욕망의 충족을 위해 폭주하는 행태도 인격의 타락이나 공동체 질서의 와해를 부를 수 있죠. 픙요로워지기는 했으나 어느 선에서 욕망의 고삐를 당겨야 할지 결정하는 지혜("어리석음의 반대")는 아직 인간이 미처 배우지 못했습니다.

20세기 들어 자연이 가장 비밀스럽게 숨겨 오던 힘의 근원 하나가 밝혀지고, 나치 같은 집단 광신이 처참하게 몰락하는 과정에서 지구 전체의 신 질서 수립을 모색하려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이 등장하여 군비 경쟁에 몰입하고, 상대를 파괴하려다 자신의 존재까지 부정하려 들 수 있는 "오만, 힘에의 맹신" 같은 어리석음이 또 하나 등장했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은 다시금 문명 충돌의 파장을 낳아, 전세계 곳곳에 걸쳐 테러리즘의 만연, 극단적 폭력 투쟁이 그칠 날 없이 이어지는 비극을 낳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에서도 눈치챌 수 있지만 "어리석음"은 미개, 야만족 사이에서만 표징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다분히 역설적이지만, 저자는 이 두꺼운 책을 통해 인류사 전반이 "증명"한 어리석음을 논하며, "문명과 함께 비로소 탄생한, 문명화한 어리석음"을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문명 이전의 인간은, 혹 그런 자각 비슷한 게 있었다면, 스스로를 완성된 인식이나 개량된 생활 방식을 터득한 우월한 존재로 여기지는 않았을 겁니다. 반면 이런 "문명화한 어리석음"은, 스스로가 전혀 어리석은 줄 모르고 "틀에 박혀 버린 어리석음"을 자랑스럽게 반복한다는 점에서, 관찰자인 제3자가 보기에 더욱 희화스럽고, 그 어리석음의 자발적 교정 여지가 더욱 줄어든다는 점에서 위험합니다.

"자기기만은 개인의 자신감을 키워줌과 동시에, 집단 안의 협력을 촉진하는 효과적인 자기 방어 메커니즘이다.(p23)" 통렬한 비판이지만 지극히 타당한 지적,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목격되곤 하는 바보스러운 행태이죠. 자신의 삶 그 기반이 매우 취약하기에, 자기기만을 통해서만 생존 의지를 북돋울 수 있다는 건 우려스러울 뿐 아니라 당사자가 스스로 서글프게 여겨야 마땅한데, 예컨대 과학적 소양이 전무하면서도 단편적 암기사항을 주문처럼 되뇌면서 어리석은 주변 인물들에게 가짜 이미지를 심는다든가, 파탄 난 가정상을 위장 왜곡하려고 묻지도 않은 배우자 이야기를 꺼낸다든가 하는 허풍 허언의 기제도 이에 속할 것입니다. 어리석음을 요란히 연출하는 건 남 보라고 벌이는 쇼인데, 어리석은 쇼에 속아 주는 건 자신뿐이라는 게 지독한 역설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저자의 "어리석음"에 대한 정의로 다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p22에서 어리석음을, "학습에 의해(=인위적으로) 변질된 학습"으로 정의합니다. 그 결과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에 머물거나, 환경과 그 영향, 특정 변수가 발생시키는 결과에 대해 올바른 인과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을 파멸시키는" 단계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저자가 결론에서 강조하는 대로, 어리석음이 그저 어리석음의 단계에 머무는 게 아니라 "오만"에 까지 이르면, 그 결과는 인류 전체의 파멸이란 필연일 뿐입니다. 인간이 어리석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한 가지 방법, 기준은, 자신이 지금 그토록이나 확신을 품는 바에 대해 한 번이라도 "모두 틀렸을 수 있다"는 회의를 작동시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허, 겸손"은 자기 구원에의 길과도 통합니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길이 어쩌면 그처럼이나 간단한데, 이를 필사적으로 우회하는 걸 보면 우리 인간은 아직 갈 길이 멀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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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현대 미술 예술 쫌 하는 어린이 3
세바스티안 치호츠키 지음, 이지원 옮김, 알렉산드라 미지엘린스카 외 그림 / 풀빛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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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예술 쫌 하는 어린이"입니다만, 정말 어린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현대미술에 대한 확실한 관점이 잡힌다면 그 어린이는 커서 "예술을 쫌 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아주 큰 사람이 될 것만 같습니다. 현대미술뿐 아니라 그 이전의 사조를 대변하는 명작에 대해서도, 선이나 색, 명암과 구도, 소재 배경에 깔린 방대한 인문적 배경에 대해 막히지 않고 설명할 수 있는 "어른, 성인"은 손으로 꼽을 만큼 적습니다. 어린이들이 읽기에 매우 편한 형식, 설명, 디자인이지만, 책 내용이 너무 좋아서 "어른들도 쫌 읽고 교양을 쫌 갖출 수 있는" 멋진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채만식의 단편 중에도 "레디메이드 인생"이란 게 있습니다만, 미국에서 재능을 자랑한 마르셀 뒤샹은 "레디메이즈" 즉 기성품(평범한 공산품)을 갖고 기발하게 활용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천재 예술가였습니다. 그의 대표작 "분수"는 그저 평범한 변기 하나로 대 이슈를 유발한 문제작인데요. 아상블라쥬를 아예 새로운 예술 조류로 떠오르게 한 그의 재기 넘치는, 발칙한 행보는 이후 많은 후배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책에는 뒤샹이 여자로 변장한 모습, 체스에 몰두하며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얻은 명예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는 듯 쿨한 태도를 보인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일러스트가 여러 컷 담겨 있습니다. 변기 하나라고 해도 그 뒤에 숨은 예술적 동기는 일반인이 쉽게 동감하기가 어려운데, 이런 재미있고 친근하게 그려진 일러스트 덕분에, 뒤샹의 장난기가 어린 독자들에게도 쉽게 다가올 것 같아요.

실도 메이렐레스는 브라질 인들의 민속 설화를 이해하는 이들에게만 보이는, (혹은, 마음이 착한 이들에게만 보이는?) 자그마한(그 크기에 대해서도 관람객들은 아무 정보가 없답니다) 예술품(1969~70)으로 만인의 화제에 올랐던 분입니다. 한 변의 길이가 1cm도 되지 않는 작은 주사위 하나가 전부인데요. 그나마 박물관 바닥까지 엎드려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고 하죠. 제목은 "남십자성"인데, 아무것도 아닌 듯하나 두 조각의 나무가 맞닿아 불꽃을 일으키는 감사한 섭리를 오랜 세월 원주민들이 품어 왔고, 작은 주사위는 그런 신비와 겸허한 마음을 그 조그마한 몸체에 상징한다고 합니다. 전시관은 사방이 그저 햐얗기만 한 벽면인데, 관람객더러는 그 흰 벽면까지를 함께 제시하며 예술가와의 공감을 유도하는 거죠. 이런 설명을 들어도 어른들은 납득이 잘 안 되겠지만, 예술가처럼 마음이 깨끗한 어린이들이라면 오히려 더 잘 소통할 것 같기도 해요.

90페이지에 보면 "UR집"이라는 작품이 나옵니다. 그레고르 슈나이더의 작품인데, 수리인지 새로운 탐색인지 모를 만큼 여기저기를 고치고 이어붙이고 덧대며 그가 열여섯 살 꼬마 때 "지은" 집이라고 합니다. 이 집은 어디가 중심인지, 어디서부터 입구를 삼고 들어가며 전체를 둘러볼 수 있을지 난해한데, 제 생각으로는 에셔의 철학, 미학 세계와도 한 맥이 닿아 있지 않나 여겨지네요. 책에는 그런 설명이 없으나, 독일어 접두사 ur-는 원(原), 바탕 같은 뜻입니다. 집 이전의 어떤 구조물에 대해 그 해체에 가까운 탐색을 함으로써, 집이 인간에게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파악하려 든 거겠죠. 작가가 어린이들과 비슷한 나이 또래에 만든 작품아라 더 호기심이 생길 만합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는 꽤 오래 전부터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지요. 요안나 라이코프스카(p146)가 바르샤바 시내에 만든 "야자수"는 사실 지중해를 바라보는 팔레스타인, 레바논 일대에서나 자라는 식물인데, 에술가의 창의로 꽤 싸늘한 편인 동유럽 중위도에서 만나게 되었네요. 어느 지방이든 고향을 떠나 살아온 이들에게, 고향을 대뜸 떠올리게 하는 풍광을 자신이 현재 사는 장소에 재현시키고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 다만 이 "야자수"가 독특한 건, 유대인들에게는 "아우슈비츠"라는 끔찍한 아픈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른 예술은 바른 역사 인식과도 뗄레야 뗄 수 없는 과제이고 영역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업사이클링 정신일까요, 아님 구조의 해체를 통해 감춰진 본질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일까요? p190의 가브리엘 오로스코는 멀쩡한 시트로엥을 해체시켜, 가운데를 잘라내고는 다시 좌우를 이어 붙였습니다. 저는 작품 자체보다 이 "작품"에 대한 저자님(세바스티안 치호스키)의 설명이 더 재미있었는데요. "마치 다이어트를 한 몇십 kg한 후의 모습 같지만, 너무 모습이 심하게 바뀌어 더 이상은 못 달려요."가 그것입니다! 오로스코는 해변에서 169개의 고래뼈를 모아 "움직이는 매트릭스"를 만들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작가는 " 그 전시된 작품 밑에서 책을 읽기라도 하는 관람객은, 졸면서 서늘한 파도가 머리 위를 넘실대는 꿈을 꿀 거에요."라고 하십니다. 예술가의 창의력을 능가하는, 유쾌하고 신선한 "해석'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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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건축 예술 쫌 하는 어린이 1
알렉산드라 미지엘린스카.다니엘 미지엘린스키 지음, 이지원 옮김 / 풀빛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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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 집. 우리가 별 노력 없이 남들이 지은 집을 사서 그 안에 들어가 거주하기만 하면 될 것 같아도, 한 채의 집이 지어지기까지는 많은 이들의 노력과 고민과 생각이 쏟아부어져야 합니다. 살림을 사는 집도 그러하거니와, 관공서, 박물관, 연주회장, 찻집 등 다양한 건축물이 있는데, 이들 역시 그저 직접, 당장 무슨 쓸모로 쓰일 것이냐만 생각해서 지어지는 건 아닙니다. 때로는, 건축가가 남달리 많은 생각을 한 후에야 그 고민과 정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지어지는 집도 있는데, 그런 집들은 보기만 해도 기발한 상상과 감각이 잘 드러나 유쾌하기까지 합니다.

요즘 어린이들은 개성 없고 획일적인 아파트단지에서 자라나 일생을 답답한 환경에서 보내기 일쑤이지만, 그럴수록 사람의 희망과 노력이 곳곳에 반영된 창의적인 건물, 집들의 모양을 두루 접하면서 감수성의 폭을 키울 필요가 있죠. 커서 정말 건축가가 될 아이들도 있을 테고, 혹은 그 인접 분야에서 사람이 살고 일하는 공간의 효율적이고 심미적인 활용을 고민하면서 자아실현을 이어갈 이들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 책에 실린 서른 다섯 가지 특별한 집들은, 특히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마음껏 상상력을 불어넣으며 창의적인 어른이 되게 도와 줄 훌륭한 교재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이 특히 뛰어난 점은, 그저 특이한 건축물 35개를 나열한 게 아니라, pp.12~13에 이 건축물들이 어떤 재료로 지어졌는지, 예를 들면 콘크리트, 목재, 유리, 모래 등 소재에 대한 정보를, 35개 모두에 공통된 기호(그림)을 정해 놓고 어린 독자들에게 그 자재에 대해서도 상상과 통찰이 가능하게끔 배려했다는 점입니다. 뿐 아니라, 욕실, 부엌, 작업실 등 모든 집에 배치되기 마련인 공통 부분 구조도 같은 기호(역시 그림)를 써서 표시하고, 나아가 "이 집은 산에 있는지, 숲에 있는지, 바닷가에 있는지" 그림 기호만 봐도 알 수 있게 쉬운 약속을 정해 놓았습니다.

서른 다섯 개의 집들은 어느 한 지역, 나라에만 분포한 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샘플을 찾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집이 어디쯤 있는지 지도(세계 전도) 위에 표시해 주면 어린 독자들이 이해하기에 좋을 텐데, 이 책은 네 폭의 지도를 통해 35개의 건축물들이 세계 어디쯤 자리헸는지를 먼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단, 35채 중 21건이 유럽에 위치했기에, 유럽 지도가 큰 축척으로 표시되어 이 사정을 반영한 건 어쩔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만큼 "창의적인 건조물"이 아직까지는 유럽에서 더 자주, 보편적으로 시도되는 편이라고 봐야하겠지요.

독일 프랑크푸르트(암 마인)에는 불어서 만든 집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숨을 호호 불어넣어서(ㅎㅎ) 집을 부풀린 건데, 이렇게 하면 집을 가방 안에 집어 넣었다가 바람만 넣어 다시 키운 후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힘들게 불 필요야 없지만, 요즘은 강아지집(고양이라도)을 이런 식으로 제작해서 반려동물을 위한 상품도 팔곤 하죠. 원하는 땅 어디에도 설치할 수 있겠으나, 실제 사람이 거주한다기보다 그 안에서 "차를 마시는 용도"로만 쓴다고 합니다. 뜨거운 차라면 호호 불어가면서 마실 테니 그 나름 다양한 정서 교차를 경험하는 셈이죠.

슐레지엔은 본디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리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빼앗겼고, 이를 독일 제국이 관장하다 2차 대전 나치의 패망과 함께 현재는 폴란드에 귀속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그토록 많은 왕가, 제국들이 탐낸 건 탄광 때문인데, 현재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양 산업이지만 책에서는 갖은 고충을 무릅쓰고 깊은 갱도에서 탄을 캐내던 그들을 "영웅"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노동의 소중함을 깨우친다는 점에서 참 바람직한 서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프세모 투카시크라는 이는, 이 폐광의 구조물을 구입해서 그들의 노고를 기리는 "빼빼다리 위에 지은 집"을 멋지게 건축했다고 합니다. 여러 모로 지난 역사의 땀방울을 상기시켜 주는 조형물입니다.

안달루시아 감시탑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지붕도 없고 딸랑 두 개의 새하얀 벽만 남긴 채, 나머지 시설은 계단을 통해 지하에 모두 배치했다는 게 특이합니다. 안달루시아 감시탑과 다른 점이라면, 멀리서 봤을 때 이 두 벽이 새하얀 돛처럼 보인다는 점이겠습니다. 하긴, 건축가 에밀리오 암바스는 처음부터 안달루시아 감시탑을 "하얀 두 돛을 단, 대양을 유영하는 한 척의 배"로 보았기에, 이런 착상으로 집을 지을 마음을 먹었던 게 아닐까 추측할 수도 있죠.

한국에는 해남에 땅끝마을이 있습니다만, 칠레에는 지도의 맨끝, 세상의 끝이라고 여겨진 콜리우모라는 반도 마을의 벼랑에다가, "세상의 끝에 있는 집"을 지은 마우리시오와 소피아 두 분 건축가가 있네요. "세상의 끝"은 사실 지구가 둥글다는 걸 알고, 또 아인슈타인이 "절대방위, 절대좌표"라는 게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한 후에는 낡은 관념입니다만, 우리들이 해남을 쉽게 "땅끝"으로 여기고 동의하듯, 사람이 그곳을 "더 나아갈 수 없는 한계, 새로운 시작"으로 간주하면 어디라도 "땅끝"이 될 수 있습니다. 인생도 이와 같아서, 자신이 현재 특정 시점을 새출발로 잡고 전환, 재충전의 계기로 삼는다면, 언제든 그 순간에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집"은 그런, 인간의 사고와 희망과 인생관을 일일이 반영하는 집약된 몸짓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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