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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리석은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 - 의도된 선택인가, 어리석은 판단인가! 선택이 만들어낸 어리석음의 역사
제임스 F. 웰스 지음, 박수철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7년 10월
평점 :
"인간은
어리석은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 물론 맞는 말씀이겠거니 여겼으나, 이 두꺼운 책을 읽다 보니, 어리석음이라는 게 그저 살면서
종종 저지를 수 있는 과오를 가리키는 게 아니더군요. 이 두꺼운 책에서 다루는 "어리석음의 역사"란, "인간이 살아온 자취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의 본성 속에는 필연적으로 "어리석음" 자리했던 것이죠.
씁쓸하지만,
이 책에서 자세히 분석되고, 어쩌면 같은 패턴으로 이렇게 치명적인 실수를 반복할 수 있었을까, 그러면서도 당사자의 눈에는 이런
과오가 전혀 보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과연 인간의 본성에는 "합리성, 이성" 같은 게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절로 회의가 일었습니다. 그러나 멀찍이 거리를 둔 "타인들"의 어리석음을 구경하는 포맷이기에, 일단 읽기에 재미는 있었습니다. 이
감상과 각성이 그저 재미로만 그친다면 그건 독자의 손해이자 또다른 "어리석음"의 증명이겠습니다만 말입니다.
아낙사고라스는
자연철학자의 범주에 드는, 만물의 씨앗, 혹은 "누스(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인물로 우리가 중등교육과정 윤리 시간에 배웠던
인물입니다. 그는 "윤리적 사고"보다는 순수 사고, 자연과학에 보다 접근할 수 있는 중립적, 메타의 틀을 강조한 인물이었는데,
이런 사고 방식은 당대인들로부터 "신의 존엄을 경시하는 불경한 태도"로 간주되기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자연히 그는 "왜?"보다는
"어떻게?"에 대한 해명에 치중했는데, 흔히 요즘 인도 등 동양권에서 유학 온 젊은 인재들이 서양 학문을 배우며 "왜?"가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태도와도 통하죠. 그러나 자연과학은 본디 이런 (어느 정도) 기계론적 세계관, 사고방식에서 출발점을 마련해야
원활한 발전을 기할 수 있는 학문입니다. 아무튼 그는, 자신의 본향인 이오니아는 물론, 아테네를 비롯하여 그리스 문명권 전체의
어리석음을 비판한 셈이고, 오늘날 우리들의 눈으로도 "고작 신성을 간접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뛰어난 지성을 핍박한 그들의
어리석음"이 꽤나 눈에 거슬리는 게 사실이죠.
"기하학적이나
작았으며, 정돈되었지만 조각상처럼 정지되었다.(p59)" 이것이 그리스 문명의 한계를 꼬집는 저자의 한 마디 비평입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자치를 누리던 도시국가들은 (그 자체의 지위가) 최상의 영예였으나, 동시에 치명적인 한계였다." 이유는
명백합니다. 통일된 거대 정치 단위를 이루지 못했기에 페르시아 같은 멀리 자리한 제국으로부터도 생존에의 위협을 당했고, 결국은
아드리아해 건너편의 로마 제국에 종속당했죠. 흔히 서양 저자들은 그들 문화 고전의 토대를 완성한 그리스 문화를 무작정
에찬합니다만, 이 책 저자는 그리스적인 "고정성, 불변성, 비융통성"을 들어 그리스 고유의 어리석음으로 확정 진단합니다. "모든
것을 이상화하는 과정을 통해, 순수를 위해 삶의 다양성을 희생했으며, 단순한 합리적 체계를 선호한 나머지 복잡한 인간적 상황을
무시하고 말았다.(p107)" 의미심장한 비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어
저자는 고대 이집트로 무대를 옮깁니다. 이집트인들은 풍요로운 물산, 고립된 지형(외세의 침략이 용이치 않음)의 덕분으로 오랜
동안 발전된 문명을 이뤄 왔으나, 한번 잘 마련되어 원활히 작동한 시스템에 마냥 기대어 타성에 젖어, 환경과 상황이 바뀐 후에도
여전히 종래의 방식을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건 다를 바 없었습니다. 저자가 특히 이집트형 어리석음으로 꼽는 건, 도대체 서신
교환이나 개인 사이의 대화에서조차 "개성"이란 게 드러나지 않고, 과거에 있었던 그 무엇에 자신을 빗댄다(를 넘어
동일시한다)거나,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무심히 시간 밖에 머물러 들었다는 겁니다. 이런 점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대단히
얼빠진 행태처럼 보일 텐데, 물론 그 체계 안에서 편히 안주하는 이들에게는 사회적으로 갖추어야 할 당연한 예의, 매너, 품격처럼
여겨졌을 겁니다. 이런 태도를 버리고, 자신만의 감정을 표현하는 게 오히려 "어리석음"으로 간주되었겠죠.
중국에
대해서도 저자의 비판적 시선은 이어집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근 2500년 동안 해당 대륙의 거주민, 위와 아래를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행동 준칙을 정해왔을 텐데, 저자는 이를 두고 "너무도 상식적이며 시간밖에 벗어나 있는 듯 사건성을 결여한 태도로 사물을
바라보는 터라, 자연과학적 사고, 나아가 일체의 진보의 싹이 발달할 여지가 없었다"고 합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화약, 인쇄술,
나침판, 제지술 등 모든 놀라운 혁신이 중국에서 비롯했으나, 그 과실은 고스란히 서양이 따 먹었을 만큼, 그들의 발전과 혁신은
확장성, 연속성이 부족했습니다. 그 결과 현대에 이르러 큰 상처와 좌절을 겪은 그들이지만, 이제 어느 정도 과거의 "어리석음"을
수용, 내면화하고 거듭날지, 아니면 "서양 문화의 가장 나쁜 물질적 측면만을 모방하는 데 그치고 과거의 패턴으로 다시
돌아갈지(저자의 표현입니다)"는 여전히 그들의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중세
유럽의 "어리석음"은 새삼 뭘 지적할 것도 없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는 데 급급하여 거짓과 위선을
일삼았고, 문명의 보존에 애 쓴 만큼이나 그에 비례하여 모든 어리석음 역시 교회가 그 원천이었습니다. 이러던 암흑기가 끝나가며,
주로 알프스 이남의 이탈리아에서 (막강한 교회의 위세를 여전히 배후에 두고서도) 인본주의의 싹이 새로 트기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을 계기로 비로소 유럽 문명은 "인간다움"과 다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만, 저자는 "세속적 욕망, 물질주의와 도덕관념의
부조화(p262)"라는 숙제가 이 시기에서부터 여전히 해결 안 된 채 대물림되어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전한다고 지적합니다. 매우
타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죠.
17세기의
특성은, 이성 자체보다는 "이성에 대한 확신(p374)"였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계몽주의가 스스로 자신의 시대에 모든 무지몽매를
추방하고 전근대적 폐습을 일소한 건 아닙니다. 계몽주의스럽지 않은 일체의 타자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그 모순을 짚어 내었으나,
정작 이성과 합리를 내세운 자기 구조 안의 비정합성에 대해서는 맹신으로 일관했죠. 어쩌면 이 책의 주제인, "학습의 결과로 이뤄진
스키마의 구조적 부작용, 체질적 약점, 내재적 어리석음"은 그 전형이 이 시기에 배태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여튼 우리 인류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무엇이 발전, 진보, 개화인지,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진 상태로 상승한다는 게 무엇인지 목적의식만은
분명히 다집니다. 물론 현실도피성 몰입이 "더 나은 내일"이라는 식의 착각, 허풍은 가장 악성의 어리석음이겠지만 말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색다른 어리석음의 최신판을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그전부터 궁핍에 시달리던 인간은, 그 궁핍으로부터 절제, 검약,
반성이라는 미덕 하나는 확실히 얻어 발전시키고, "이상적인 인간형"을 사회 신참자에게 교습하는 데 반드시 이 덕목을 주입했습니다.
억지 춘향도 문제지만, 이제 고삐가 풀려 무작정 욕망의 충족을 위해 폭주하는 행태도 인격의 타락이나 공동체 질서의 와해를 부를 수
있죠. 픙요로워지기는 했으나 어느 선에서 욕망의 고삐를 당겨야 할지 결정하는 지혜("어리석음의 반대")는 아직 인간이 미처
배우지 못했습니다.
20세기 들어
자연이 가장 비밀스럽게 숨겨 오던 힘의 근원 하나가 밝혀지고, 나치 같은 집단 광신이 처참하게 몰락하는 과정에서 지구 전체의 신
질서 수립을 모색하려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이 등장하여 군비 경쟁에 몰입하고, 상대를 파괴하려다 자신의 존재까지
부정하려 들 수 있는 "오만, 힘에의 맹신" 같은 어리석음이 또 하나 등장했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은 다시금 문명 충돌의 파장을
낳아, 전세계 곳곳에 걸쳐 테러리즘의 만연, 극단적 폭력 투쟁이 그칠 날 없이 이어지는 비극을 낳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에서도 눈치챌 수 있지만 "어리석음"은 미개, 야만족 사이에서만 표징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다분히 역설적이지만,
저자는 이 두꺼운 책을 통해 인류사 전반이 "증명"한 어리석음을 논하며, "문명과 함께 비로소 탄생한, 문명화한 어리석음"을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문명 이전의 인간은, 혹 그런 자각 비슷한 게 있었다면, 스스로를 완성된 인식이나 개량된 생활 방식을 터득한
우월한 존재로 여기지는 않았을 겁니다. 반면 이런 "문명화한 어리석음"은, 스스로가 전혀 어리석은 줄 모르고 "틀에 박혀 버린
어리석음"을 자랑스럽게 반복한다는 점에서, 관찰자인 제3자가 보기에 더욱 희화스럽고, 그 어리석음의 자발적 교정 여지가 더욱
줄어든다는 점에서 위험합니다.
"자기기만은
개인의 자신감을 키워줌과 동시에, 집단 안의 협력을 촉진하는 효과적인 자기 방어 메커니즘이다.(p23)" 통렬한 비판이지만
지극히 타당한 지적,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목격되곤 하는 바보스러운 행태이죠. 자신의 삶 그 기반이 매우 취약하기에, 자기기만을
통해서만 생존 의지를 북돋울 수 있다는 건 우려스러울 뿐 아니라 당사자가 스스로 서글프게 여겨야 마땅한데, 예컨대 과학적 소양이
전무하면서도 단편적 암기사항을 주문처럼 되뇌면서 어리석은 주변 인물들에게 가짜 이미지를 심는다든가, 파탄 난 가정상을 위장
왜곡하려고 묻지도 않은 배우자 이야기를 꺼낸다든가 하는 허풍 허언의 기제도 이에 속할 것입니다. 어리석음을 요란히 연출하는 건 남
보라고 벌이는 쇼인데, 어리석은 쇼에 속아 주는 건 자신뿐이라는 게 지독한 역설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저자의 "어리석음"에 대한 정의로 다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p22에서 어리석음을, "학습에
의해(=인위적으로) 변질된 학습"으로 정의합니다. 그 결과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에 머물거나, 환경과 그
영향, 특정 변수가 발생시키는 결과에 대해 올바른 인과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을 파멸시키는"
단계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저자가
결론에서 강조하는 대로, 어리석음이 그저 어리석음의 단계에 머무는 게 아니라 "오만"에 까지 이르면, 그 결과는 인류 전체의
파멸이란 필연일 뿐입니다. 인간이 어리석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한 가지 방법, 기준은, 자신이 지금 그토록이나 확신을 품는
바에 대해 한 번이라도 "모두 틀렸을 수 있다"는 회의를 작동시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허, 겸손"은 자기 구원에의
길과도 통합니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길이 어쩌면 그처럼이나 간단한데, 이를 필사적으로 우회하는 걸 보면 우리 인간은 아직 갈
길이 멀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