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 그의 생애와 사역
F. F. 브루스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도 바울은, 조직적인 교단으로서 기독교가 원활히 기능하는 데에 초석을 놓은 행정가였고, "서신"을 통해 교리 원형의 기반을 닦은 "신학자"였으며, 불 같은 정열로 지중해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닌 활동가였고, 마음에 티끌만큼도 신앙에의 동요가 없었던 성스러운 사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생전에 직접 조우한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 앞에 홀연히 나타나 눈 앞의 비늘을 떨구어 준 그 성스러운 체험을 잊지 못 해 모두와 함께 진리를 공유하기 위해 일생을 헌신했습니다. 이전 그의 행적을 보면 "믿음에의 길"과는 다분히 먼 경력을 구축했던 그였기에, 이런 갑작스러운 회심이 어떤 동기에서 비롯했는지, 그의 심원하고도 치밀한 논리를 갖춘 교리의 본체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논의와 연구의 대상으로 남습니다.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저자 F F 브루스 교수의 통찰과 연구가 참으로 원대하고도 심오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본인이 직접 남긴 저술의 양은 기독교 신약 성경 텍스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만큼이므로, 진지한 학자가 일생을 두고 연구해도 시간이 매우 부족합니다. 그런데 이 두꺼운 책에서는, 그 방대한 텍스트를 거의 모두 인용, 분석해 가며,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언급과 논술을 일일이 연결하거나 통합하여, "바울은 누구였고 무엇을 말했는지" 정연하고도 구체적인 하나의 체계를 완성합니다.

물론 신약은 신약만으로 고립된 맥락에 머물지 않고, 모든 구절이 구약과의 역동적 연계점을 마련하기에, 브루스 교수의 시야는 홀리 스크립트 66권 전반을 아우릅니다. 책 어느 페이지를 펼쳐 봐도, 거의 중복 없이 요소요소에서 새롭고 엄정한 논변과 성찰을 서술하며, 성경 구절의 구체적 전거에 의지하지 않는 대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절 매 장의 논지는 "사도 바울"로 귀결합니다. 신앙심의 깊이와 사색의 습관화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타고난 두뇌 자체가 명석해야 이런 책을 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잘 알려진 바처럼 벤야민 지파 소속입니다. 저자 브루스 교수도 여러 번 언급하듯, 바울은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에 대해 대단한 자긍심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I am a citizen of no mean city."라는 유명한 말에서도 드러나듯, 그는 타르수스의 가장 번영한 구역에서 나고 자라 충분한 교육을 받고 넉넉한 재산을 모았으며 사회적 평판도 훌륭한 편이었습니다.

벤야민 지파는 솔로몬 왕 사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질 때 유다 왕국 편에 섰고, 그 전이나 그 후나 대체로는 거대한 유다 지파와 우호적 관계였습니다. (원래의) 이름도 하필이면, 그들 겨레(12지파)가 세운 최초의 군주 사울인데, 사울 왕 역시 벤야민 지파였고 이 때문에 그들은 현실 정치에서 유다 지파에 뚜렷이 구분 안 되는 입장이었을 뿐이었는데도 여튼 역사적으로는 도드라진 표지를 지닌 이 "벤야민 소속"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어 왔습니다. 바울 역시 이런 종족의 분위기를 그대로 계승하는 인물이었던 듯합니다.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하는 자." 이는 무엇보다 바울 본인이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회고하며 규정한 표현입니다. 다메섹은 오늘날 통용되는 지명으로는 "다마스커스"가 더 익숙한 고도이자 수천 년에 걸쳐 정치적, 상업적 중심지로 번영해 온 고장입니다. 그전까지 기독교도들을 잡아들여 당국에 고발하고 기존 질서 유지(정통 유대교의 대제사장 등의 입장)에 열심히 기여해 온 바울은, 바로 이 다메섹에서 예수의 특명을 받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저자의 배경 설명을 보면, 특히 초기 기독교 교단에서 "헬라 파"에 속했던 이들은 유대 밖으로 내몰리게 되는데, 유대 지역 밖이라고 해서 산헤드린의 적의와 응징의 손아귀로부터 자유로운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제사장들의 눈밖에 나 검거되고 재판 받고 십자가형을 선고 받을 때, 빌라도 총독이 마지막까지 그에게 방면의 기회를 주려 드나 오히려 율법학자들이 거세게 반대하며, "그를 놓아주는 건 제국의 질서에 반역하는 행위"라며 오히려 총독을 협박하려 드는 장면이 있죠.


이처럼 형식상으로는 타 민족의 식민 통치에 굴종하는 모양새였으나, 그 실질을 따지고 보면 오히려 로마의 행정, 군사력을 갖고 놀며 종래의 기득권을 철옹성으로 만드는 게 바로 그들의 노회한 행태였습니다. 헬라파라고 해서 언제 국외에서의 "범죄자 송환"에 걸려 들어 처벌을 받을지 모르는 형편이었고, 바로 이 일을 바울이 앞장 서서 해 냈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줄리어스 시저가 이집트(역시 속국)에 보낸 서한에서는, "유대의 자치권을 최대한 존중하여, 행여 불순분자가 그곳에서 도피처를 마련하면 즉각 적발하여 이송하라"는 내용까지 다 있다고 합니다. 저자 브루스 교수의 박학다식함에 대해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됩니다.

근대 형법의 원칙 중 하나가 "성문형법주의"입니다. 명시적으로 국가의 형법전에 "죄"라고 규정되지 않으면, 범죄가 성립하지 않고 처벌도 불가하다는 뜻입니다. 라틴어로는 nulla poena sine lege라고 쓰는데, 브루스 교수는 이 언명을 신학에도 적용하여 심오한 논변을 전개하는군요. 인간은 율법의 수명 이전에도 얼마든지 죄를 짓고 타락한 생활을 자의적으로 벌였으나, 율법이 주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죄에 대한 분명한 의식과 그 대속행위가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헌데 바울, 혹은 바울을 그런 방향으로 해석하는 브루스 교수는, 오히려 죄를 엄벌하는 율법 규정이 있은 후부터 사람들을 죄로 "유인"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죄인에 대해 사형을 선고하는, 신의 뜻에 반하는 제도까지 자리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로마서 7장 9절을 인용하며 "계명에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는 텍스트에는 바로 이런 뜻이 함축되었다는 게 저자의 설명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의의를 전면 부정하는 건 당연히 아니며, 아무 자각이 없던 인간에게 죄가 무엇인지 의식하게 된 건 전적으로 율법의 공로라고 평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가 젊은 수도사였던 시절 어두운 숲 속에서 악천후와 뇌우를 만나 죽음에의 공포를 온몸으로 느끼고 신에 대한 각성을 선명히했다며 고백한 바 있습니다. 헌데 훨씬 전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의 청소년기를 회상하며, 율법이 무엇인지 죄의 본질이 어떠한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흔적을 서한에다 가감없이 털어놓습니다. 모든 신앙은 그 출발점이, "내 죄를 어떻게 씻어내며 용서받는가"의 깨달음과 회한에서 마련된다고 봅니다. 뻔뻔스럽게 죄를 짓고도 그저 형식적인 몸놀림, 입에 발린 거짓 뉘우침, 남 보란 듯이 벌이는 위선 따위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우리는 사도 바울의 행적으로부터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태생적으로, 세속의 폭압적 권력에 대한 고발자요 반항아였습니다. 그는 물론 서한 중에서 "지상의 권력에 대한 존중 의무"를 신도들에게 설교하기도 했으나, "불법의 사람" 등의 표현을 통해 민중의 양심을 억압하는 독재자에 대한 단호한 경계를 촉구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책 p255에서 언급하는 폭군 가이오는 우리가 흔히 칼리귤라라는 별명으로 알고 있는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입니다. 황제는 겸허한 마음으로 직분을 수행하여야 하며, 가이오(칼리굴라)처럼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자는 스스로를 망칠 뿐 아니라 세상의 질서까지 무너뜨릴 수 있음을 그는 지적했다고 저자는 평가를 내립니다.

칼리굴라의 뒤를 이은 사람이, 오늘날까지도 그 정체나 자질에 대해 논의가 설왕설래 중인 클라우디우스입니다.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베스트셀러 소설로도 잘 알려진 그는, 지혜를 감추고 세상을 속이며 은밀히 포부를 떨친 현자였는지, 아니면 그저 덜 떨어진 바보가 운이 좋아 치세를 유지했는지 여전히 베일에 가린 통치자이기도 하죠. 라틴어로 claudere는 "막다"라는 뜻인데, 오늘날 영단어에도 clandestine(비밀스러운) 같은 게 그 어원의 먼 후손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자는 대체로 부정하고 있지만 혹 사도 바울이 정말 "막는 사람, 압제자"라는 뜻으로 당대 황제의 이름을 비꼬았다면, 상당한 소양이나 언어적 재치를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혹은 claudicare라고 해서 "절뚝거리다"라는 동사를 그(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이름에 빗대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실제로 당대에 저 황제를 마뜩지 않게 보던 이들이 그의 신체적 특징을 조롱하며 입에 올렸던 바이기도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그끄제 올린 리뷰 중에서 크레타인 에피메니데스가  "크레타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했을 때 자기지시의 역설이 발생한다는 사항을 언급한 적 있습니다. 놀랍게도 사도 바울 역시 그의 서한 중에서 이 유명한 토픽을 거론합니다. 브루스 교수는 그의 풍부한 지식을 원용하며(교수 역시 20세기의 신학자이므로 괴델 이후 전개된 인접 학계[철학]의 아포리아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갖춘 분이죠), 바울이 자신 종족(히브리 중 벤야민 지파)이나 기독교(그가 막 완성해 가던 도중의 종교)의 신을, 스토아적인 범신론 관점에서 파악하는 걸 단호히 거부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신은 또한 어떤 형태를 갖출 수 없으며, 이로부터 헬라적인 우상 숭배와 단호히 절연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신과 인간 사이의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관계 회복은 회개, 죄사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재삼 분명히합니다.

신령한 은사는 여전히 현대의 신앙인들에게도 수수께끼의 영역으로 남습니다. 바울은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지적 소양과 상식을 갖춘 이였으나, 이른바 방언과 관련된 "생리적 현상"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었다고 저자는 단언합니다. 단 저자는 1861년 이래의 의학적 연구 성과를 기준으로, 브로카 부위의 제1대뇌반구 세번째 전뇌회의 자극을 통해 방언이 가능할 수 있음을 언급합니다(p297:10). 어디까지나 저자의 입장이고 견해입니다.

그리스도는 옛 창조의 머리뿐 아니라. 새로운 창조(신약과 새로운 계명)의 머리에서도 여전히 송영(頌榮)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교회는 몸이며, 그리스도는 그 교회의 머리"라고 한 바울의 표현은 이전 경전의 텍스트에서 찾아 보기 힘든 바울만의 독창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저자는 신중히 말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 곧 교회라는 생각은, 마치 기에르케의 유기체설이나 헤겔의 변증법적 통합을 연상케도 하는데, 저자는 영지주의나 스토이시즘, 심지어 유대교의 전례에서 영향 받았다기보다, 공동체 전체를 놓고 한 인격으로 취급하는 히브리 전통 사상의 먼 가지라고 정리합니다. 그리스도를 우주적 보편적 존재로 보고, 종족이나 지역의 협소한 범주에 가두지 않을 것을 단호히 천명한 바울의 태도를 보며, 우리 현대인들도 인류 공영과 평화의 실천에 대해 시사 받는 바가 클 듯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장
홍성담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난장, 난장입니다. 세상에 어쩜 이리도 질서가 무너질 수 있으며, 선한 마음을 지닌 뭇 백성들이 도무지 감당을 못 할 만큼 불의(不義)한 만행이 일상처럼 벌어지다뇨. 죄악과 증오가 온 누리를 가득 채우는데, 누구 하나 나서서 정의를 외칠 마음도 먹지 않고, 참혹한 죽음이 사태를 이뤄도 책임 지는 자 하나 없습니다.

"세상이 이모냥으로 썩었는디 뭐하러 싸우는겨? 그냥, 좋은 것이 좋지 않다냐."

이 소설, 아니 대설(大說) 속에 나오는 목소리는 위악(僞惡)의 반어(反語)로, 위선과 횡령과 눈가림과 사술과 범죄와 살상에 둔감해져 버린 우리 비겁한 소시민들을 호되게 질타합니다. 마치, "양심도 정의감도 배알도 애저녁에 갖다버린 니네들, 밥음 뭐하러 먹고 X은 뭐하러 싸냐? 차곡차곡 썩은 양분을 뱃 속에나 젱여 둬!"라며 나무라는 것 같습니다.

왜 국민 앞에 약속한 바를 지키지 않고 떳떳지 못한 자리보전을 하러 드는가. 왜 무고한 어린 노동자의 건강과 생령과 땀을 모독하고 소수의 더러운 잇속만 싸고 도는가. 사십여 년 전 뜻있는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식언의 독재자더러 이제 그만 물러나고 민중 대동의 세상을 열자며 거리로 분연히 쏟아져 나왔습니다. 권력은 이에 대해 피 묻은 몽둥이, 살점 떨어지는 칠성판을 들이대며 화답했습니다. 이미 천도(天道)가 무너지고 인륜이 능욕당하는 세상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구타당하고 거짓 진술을 강요당했습니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눈가리고 아웅 식의 재판을 거쳐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내 나가기만 해 봐라. 고것과 세상에 다시 없을, 거한 정사를 나눌 터이니."

여기서 정사는 육욕과 배설에의 본능이라기보다, "생명"을 향한 몸부림입니다. 거대하고 때 묻고 눈 멀고 이성을 잃은 권력은, 정직하게 살아 숨 쉬며 쌕쌕 호흡을 고르는 맑은 동화 작용을 놓고, 그저 보기만 해도 화가 치밀어오른다는 듯, 총을 겨누고 칼로 저며냈습니다. "죽음, 죽음,.... " 오로지 죽음만이, 실성을 한 표독한 야수가 탐하는 바였습니다. 시인은, 화가는 말합니다. "내 허벌나게 그걸 뿜어댈 것이여!" 정사(情事)는 이제 생명과 부활과 정의와 심판을 위한 화려한 제의요, 둘만이서 벌이는 열락의 군무입니다.

그 시절로부터 사십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갑자기 어디선지 모르게, 무슨 곡절로 죽었는지도 몰라 구천과 이승 사이를 떠도는, 한맺힘은 고사하고 아직 자기 감정의 빛깔도 짐작 못 할 어리디어린 넋들이, 찾아옵니다.

"너희들 어디서 온 것이냐? 그 젖은 옷은 뭐다냐? 감기 들어."

이번에는 물 냄새가 납니다. 물은 물인데 냄새가 이상합니다. 누군가가 절로 좔좔 흘러야 할 물줄기를 콱 막아 놨습니다. 아니고서야 세상에 물처럼 이치에 순응하는 게 또 어디 있다고, 이처럼이나 불순하고 폐색된 기(氣)가 풀풀 묻어나올 리 없습니다. 거 참, 누군지 힘 한 번 좋고 마음 한 번 단단히 비틀렸습니다. 어디 몹쓸 짓을 할 데가 없어 물길에다 이런 장난질을 친답니까?

난장입니다. 참으로 난장판입니다.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아오르고 인력으로 막아내지도 못할 재앙이 사태처럼 몰아닥칠 때, 우리는 차라리 맞불을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이놈의 썩은 세상, 아예 밑둥부터 콱 뒤집어져서 못된 모리배놈들 도적놈들 씨를 말리는 수밖에 없다. 난장판의 도둑질, 난장판의 학살, 난장판의 부역(附逆)울 탈탈 태워 죽이려면, 우리 민초들도 난장의 한판 굿으로 대거리하는 수밖에 없겠다! 작고 미미한 개인의 사연인 소설을 떠나, 이제 온 민중이 거대한 역사의 바른 물줄기에 합류하는, 입을 모아 개벽을 외치는 대설이 폭발합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


장엄하고도 신들린 듯한 화자의 어조에 넋을 잃고 읽어내려간, 말 그대로의 대설이었습니다. 후기에 보면 저자 홍성담(물론 우리가 잘 아는 그 화가이십니다) 선생을 직접 만나뵌 소회가 살뜰히 정리되었는데요. 대한민국 민중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이신 줄만 알았는데 그렇게나 유장한 말솜씨에 웅대한 넋을 담은 분이라시네요. 어떤 사람이 손끝으로 화필을 놀려 그윽한 뜻을 전하는 재주도 하늘이 점지해야 가능한데, 마치 구약성경에 나오는 에언자처럼, 민중과 궁중 사이를 오가며 지혜의 변설을 즐기던 즉흥시인처럼, 말과 글의 재능 역시 출중하기란 참으로 드물게 보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환상적 리얼리즘"이란 다분히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언어도단이라는 느낌까지 드는 이 규정은, 그러나 도무지 눈 뜨고 볼 수 없는 극악무도한 현실에, 필사적으로 아름다움과 질서를 부여하려는 선한 민중의 희구를 여실히 담은 외침이고 실천입니다. 영화 <판의 미로>를 보시면 이 유파의 정신과 지향점이 어디인지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 주 전 열린 미국 영화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요 부문을 휩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시선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던 스페인 현대사를 언제나 주시합니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체제의 폭압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김지하 시인, 그의 정신을 예술로 실천으로 계승한 홍성담 화가(대설가), 우리 민중은 그들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 우리가 인간임을 재삼 자각하며, 행여 역사의 바른 물줄기가 엉뚱한 진로를 틀어 무고한 생명에 더 이상 해를 끼치지 않게, 고개를 곧추세우며 정의와 빛과 태양의 자취를 좇습니다.

난장(亂場) 속에 꽃 피는 희망과 정의와 사랑의 아득한 외침이 바로 이 책 속에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제션 - 그녀의 립스틱
사라 플래너리 머피 지음, 이지연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사자(死者)와 생전에 못다 이룬 소통을 이어가고 싶어하는 마음은,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에게 당연히 들게 마련입니다. 그 상대가 부모, 자식일 수도 있고, 연인 혹은 배우자일 수도 있으며, 평생의 지기 혹은 (뜻밖에도) 잠시 자신을 스쳐지나간 타인일 수도 있습니다. 미처 마치지 못한 감정의 청산, 그 폭과 깊이는 반드시 대면한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고 세상을 뜬 이에 대해, 미진한 어떤 감정의 잔여를 해소하려는 충동과 욕구, 바람을 계속 가진 다는 건 대개 어리석은 미련 이상으로 취급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또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사회적으로 공인되다시피한 의식(儀式)을 통해, 망자(亡者), 혹은 남아 있는 자의 한을 풀어 주려는 모습은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발견됩니다. 한국에서는 글쎄요 굿판이 그 기능을 어느 정도 수행하고, 서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망인보다는 유가족 등의 감정 해소, 승화에 보다 초점을 두더군요.

이 소설 첫 몇 페이지를 넘기며 제게 대뜸 생각났던 건 캐서린 제타존스와 가이 피어스 주연의 영화 <데스 디파잉 액트>입니다. 이 영화에는 "영매"를 직업으로 삼는 메리란 여인과 그 어린 딸이 나오는데, 능숙한 몸짓과 언변, 뛰어난 미모로 대중을 사로잡는 전문가이지만 그 실체는 사기꾼입니다. 사기꾼이 아닐 수 없는 게, 세상에 어떻게 그런 재주가 가능하겠습니까. <사랑과 영혼> 같은 유치한 상업 로맨스와는 달리, 이 영화는 초현실이나 영계와의 접속이 엄연히 불가능함을 전제로 삼은 후 대중에게 생의 더 깊숙하고 진득한 면을 보여 주게 하려는 보다 성숙한 연출과 주제의식이 돋보였죠.

그 영화에서는 두 가지 직업이 나오는데, 하나는 마술사고 다른 하나는 앞서 말했듯 영매입니다. 전자건 후자건 눈속임과 총체적 기만 행위에 기반하는 건 똑같으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사회와 대중은 이런 행위를 "직업"으로서 공인합니다. 뻔히 알면서도 돈까지 내어가며 속는 이런 무익한 세레모니를 용인하는 이유는, 그런 헛수고라도 걸쳐야 우리의 아픈 마음과 감정이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 속에서 영매 행위는 더 이상 사기가 아니고, "로터스"라는 모종의 약물 복용을 수단으로,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의 직업 노동자들이 "죽은 이의 혼"을 자기 몸에 모신다는 설정이 나옵니다. 물론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픽션 속 상황이지만, 유럽에서는 이처럼 죽은 자와 교감한다는 일종의 샤먼을 통해 신비한 영적 교감을 이루는 행위, 의식을 mediumistic channeling이라 하여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풍습의 일환으로 자리잡게 했습니다. 물론 터무니없다며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는 층이 절대 다수이지만 말입니다. 여기서는 레나드 여사라는 사업주가, "바디"라고 불리는 직원을 다수 고용하여 고객을 유료 접대하고 영업처럼 일을 이어갑니다.

눈치챌 수 있겠지만 이는 일종의 매춘에 대한 은유입니다. 소설 속에서 "바디"들은 몸이 훤히 비치는 "유니폼"을 입고 업무에 종사하며, 로터스를 복용하고 죽은 자의 영을 모시고는(이걸 이 한국어판에서는 "점유"라고 번역했습니다. 말 그대로 "빙의, 포제션"입니다) 고객과 소통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당연하지만 포제스된(possessed) 동안에는 내 몸은 물론 내 정신도 내 것이 아닙니다. 매춘까지는 아니라도 사람들은 때로, 돈을 지불한 고객에게 자연스럽지 못한 감정을 자아내어 가며 일에 몰입해야 하는데, 이를 두고 이른바 "감정 노동의 고초"라 규정하는 것도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입니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바디들의 고충", 채 1년을 못 버티고 직장("엘리시움 소사이어티")를 나와야 하는 풍속도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소설 중반 이후에는, 레나드 부인과의 고용 계약 조건을 어기고 아예 "2차(한국식 속어로 표현하자면 말입니다)"를 뛰는 바디들의 행태도 언급이 되니 말입니다.

바디들에 대한 사회적 처우도 열악한 편입니다. 어떤 고객은 대놓고 깔보는 투로 "당신이 받는 얼마 안 되는 급여 세 배를 지급하겠다"며 자신의 요구를 말합니다. 물론 나쁜 의도는 아니었으나, 그 무례한 매너 속에 이 직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충분히 반영된 겁니다. 레나드 부인은 동요하는 유리디스(=에디)에게 "영웅이 되어 보겠다며 경찰을 찾아가고 법정에 서 봐야, 당신 같은 계급의 증언을 누가 무게 있게 들어 줄 가능성도 높지 않다"고 합니다. "어떤 손님들은 정해진 바디만 계속 찾죠." 창녀에의 개념 환기가 어렵지 않게 이뤄지는 대목입니다.

책 표지에 "그 남자의 죽은 부인이 되어 사랑을...." 같은 문구가 있기 때문에, 혹 그 흔하고 흔한 "탤런티드 리플리 모티프" + "신분 상승 욕구에 눈이 먼 밑바닥 여성의 사기 결혼담" 정도로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는 않은데, 소설 속에 줄곧 서술되는 1인칭 주인공 에디의 심리나 행동이 그런 면을 연상도 시킵니다. 결론을 말하면 스포일링이라서 조심스럽습니다만, 에디는 흔히 보는 소셜 클라이머 형은 아닙니다(단언컨대요). 그러나 변호사 패트릭(잘생기고 돈 많다는 건 알았으나 구체적 직업은 p120에서야 처음 밝혀지더군요)의 죽은 부인 실비아의 빈 자리를 자꾸만 자신이 차지하려 들고, 패트릭의 회사에서는 물론 문제의 지인들 헨리 부부에게조차 자신을 "실비아"로 인식시키려는 거동에서, 우리는 이 아슬아슬한 주인공에게 어느 정도까지 신뢰를 줘야 할지 갈등하게 됩니다.

아니, 에디는 믿을 수 있는 영혼 맞습니다. 에디가 OO에게 협박까지 해 가며 로터스를 팔라고 했을 때, OO는 "이 바닥에서 이처럼 오래 버틴다는 자체가, 성실하고 도덕적인 인간성을 보여 준다고 여겼기에, 에디를 잃지 않기 위해" 처음에는 거절하고, 다음에는 OO까지 합니다. 무슨 직업이든, 한 자리를 오래 지키고 단골도 확보하며 고용주에게 깊은 신임을 얻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이런 그녀를 언니처럼 스승처럼 따르는 도라, 왠지 자꾸 의지하려 드는 리 등의 태도를 봐도 에디는 좋은 사람 맞습니다. 일종의 서술 트릭에 의해, 우리는 저 변호사 패트릭이 가공할 만한 이중 인격자, 요즘 특정 장르물에서 흔히 보는 싸이코패스가 아닌지 처음부터 의심하면서 책을 읽게 됩니다. p210에서 패트릭은 누가 죽은 아내를 불러낼까 걱정하는 대목까지 나오니 더하죠. 착한 여자가 악질 프레데터한테 걸려 몸 뺏기고 마음 망치고 마침내 살해되거나 하는 패턴을 너무 자주 봐 와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건 영리한 작가의 페이크 모션이었으니... (더 이상은 언급 않겠습니다)

(스포일러)
악당은 전혀 생각지도 않던 곳에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독자는 일견 멀쩡해 보였던 에디의 과거에 꽤나 지독한 무엇이 그녀를 "포제스"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 소설은 흔한 통속적 일반화로 주체성의 회복 따위를 메시지로 전달한다기보다(그런 범주에 안 들어갈 작품이 또 몇이나 되겠습니까?), 원치 않고 인정하기 싫은 자아를 애써 부인하며, 타인의 시선이 만든 외형, 내가 원하는(혹은 착각하는) 자아상, 그리고 가장 외면하고 싶은 자신의 약점 사이에서 고민, 방황하는 우리 모두의 발버둥을 하나의 우화로 포착한 것입니다.

에디는 욕실에서 거울을 보며, 혹은 수면 아래의 나신을 보며, 저건 다른 누구라고 해도 믿을 타인임을 느끼기도 하고, 형편없이 왜곡된 상을 보고 몸서리를 치기도 합니다. 주체성을 찾는 노력이 아니라, 너무나도 잘 아는 자신의 추함을 잊기 위해, 억지로 남의 탈 속으로까지 도피처를 찾는 몸부림입니다. "바디"는 무엇보다 나 아닌 남이 되는 직업이기에, 자신이 너무도 싫었던 에디는 이 직업을 천분으로 삼아 그토록 오래 수행할 수 있었던 거죠.

소설은 인간 본성의 이기적이고 기만적인 면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을 곳곳에서 보여 줍니다. p207에서 캄캄한 이목구비를 한 레나드 부인에 대한 묘사는, 사회에서 돈벌이와 권력 행사를 위한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성공한 중년들에게, "진짜 자아"란 일찍부터 휘발되었음을 풍자하는 대목입니다. "그 모든 게 다 연기"라며 애나는 진즉부터 레나드 부인의 실체를 에디에게 고발합니다. p226 애나가 에디에게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죽은 거에 가까운 상태로 내려오기"를 강요한다면 맹 비난하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 (스포일러 주의!) 에디는 고향을 떠나올 때 극심한 자기 혐오로 이미 "죽은 상태"였던 겁니다. (그러니 아무 영이나 그 몸에 내려앉고 점유하죠)

여기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캐릭터는 그 형사입니다. 사실 그는 일 때문만에 엘리시움 12호실에 온 게 아니라, 자신의 죽은 딸과 만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던 거죠. "사람들은 동정하는 척하면서 추한 호기심을 만족하려는 거에요."(p221). 형사는 에디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두번째 기회는 없을 수도 있다"며 경고하는데, 이미 그는 에디가 껍데기만 남은 "바디"였음을 형사 특유의 직감으로 알아차렸던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재들의 창의력 - 창의력의 대가들에게서 배우는 57가지 성공 습관
로드 주드킨스 지음, 마도경 옮김 / 새로운제안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창의력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창의력을 실생활에서 가장 잘 발휘할 법한 사람들한테서 뭘 보고 배울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법을 누구에게 배우지도 않고 척척 실행에 옮기는 이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질투 때문에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경쟁에서 살아남고 남들보다 앞서 가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무능해서 언제나 남보다 뒤처지면서 그 한심한 결과와 실패한 생에 대한 너저분한 핑계, 합리화 고안에만 희한한 소질을 보이는 인간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남의 창의력을 보고 배운다는 말이 모순일 수도 있으나, 여튼 그런 창의력으로부터 자극을 받고 종전의 나와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는 건 보통 멋진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쓰레기인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는 데 인문의 핑계를 동원한다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면 천재들은 최상의 자신을 만드는 데 어떤 조건이나 타이밍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실천에 옮길 뿐입니다. 이 책에서 예로 드는 장 주네 같은 경우, 교도소에서 무작정 쓰고 또 써서 여튼 불멸의 대작을 남기긴 한 사람입니다. 그의 인생은 별로 보고 배우고 싶은 생각이 안 들지만(ㅎㅎ), 여튼 문예 부문에 불멸의 업적을 남기기는 한 그이기에, 그런 예리한 정신을 지배했던 "천재스러운 그 무언가"로부터 우리는 분명히 자극을 받습니다. 자극을 받았다면, 나의 정신 무장, 내가 지금 추진해 나가는 과제에 손톱만한 그 무엇이라도 선(善)의 기여로 변형 못 할 바 없습니다.

자기가 좋아하지도 않는 일에 평생을 바치며 시간과 정력을 좀먹힌다면 실로 끔찍한 처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긴 소질도 없는 분야에 망상과 집착을 쏟으며 최악의 마스터베이션에 빠지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며 그때 이렇게 했었더라면, 그랬어야 하는데라며 후회하는 것보다(p45)" 바보스럽고 소모적인 건 없습니다. 카이사르는 결단을 현실에 투영하기 위해 퇴로를 끊었고, 세잔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소중한 이들과의 연을 끊었어야 했습니다. 그런 선택이 당사자에게 꼭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니며, 윤리적 기준에서 별반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이 책의 교훈은 다만 이상의 실현과 내면의 갈등이 쌍생아처럼 붙어다니는 경우가 많다는 걸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뛰어난 사람들은, 먼저 자기 자신을 창조합니다. 책에는 철학자 미셸 푸코의 유명한 말이 소개됩니다. "현대인의 임무는 자신의 내적 자아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발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근거도 없이 허상을 날조하여 타인을 속이라는 게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내면과의 정직하고도 치열한 대결을 통해, 일신우일신하는 자세로, 고정된 자아상이 아닌 환경과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자아를 구축하라는 뜻이죠. "발견"은 본디부터 거기 고정되어 있는 걸 수동적으로 조우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참된 나의 모습이, 마치 땅 속에 묻힌 광물처럼 수백 수천 년 동안 고정된 실체입니까? 그렇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는 뜻입니다. 오로지 "죽은 자"만이, 나에 의해서건 타인에 의해서건 "발견"될 수 있습니다.

어느 인간이라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 인간은 생존 경쟁에서 도태되고 죽습니다. 이런 "나"를 어느 타인이 그 가치에 주목하고, 일일이 장점을 짚어 주며 찬양하고 판테온에 모시면 좋겠지만, 자기 할 일 젖혀 두고 나의 천재성과 자질을 현창할 만한 여유가 있는 타인은 없습니다(있다면 부모님 정도?). 그렇다면, 나의 가능성과 뛰어남을 극한치까지 상승시키고, 빛내며, 완성할 자는 오로지 나뿐입니다. "나"라는 예술 작품을 창조하고 세상에 뽐낼 수 있는 이는 오로지 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어제 통하던 방법이 오늘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 내일은 시대에 뒤떨어진 일개 장애물로 바뀝니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에 대처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어떠해야겠습니까? 천재들은 남들이 생각지도 못 한 방법과 도구를 찾아내어, 아무도 상상 못 한 용도로 사용하여 난국을 타개하고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합니다. 고 정주영 창업주가 폐 유조선을 어떤 방식으로 재활용했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도구와 창의는, 목표에 도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지름길일 뿐 아니라, 때로는 그 자체가 예술 작품입니다.

천재들은 때때로 뻔뻔스럽습니다. 보통 돈은 더럽다며, 물욕을 내세우는 자는 속물이라며 비난을 가하기도 하지만, 현대의 천재들은 아이디어와 작품 하나를 내놓을 때마다 천연덕스럽게 "돈"을 요구합니다. 참 밉살맞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책을 읽는 당신은, 천재가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천재의 창의력을 마음껏 발산하며 경쟁에서 살아남는 성공자, 부자가 되고 싶습니까? 당연히 후자일 겁니다. 전자는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도 유전자 재조합이 이뤄질지 장담 못 하는 겁니다. 사람의 창의력은, 강렬한 물욕이라든가 분명한 동기가 정해져야 기발하고 놀라운 형태로 발휘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돈 청구하려고 손을 벌리자니 왠지 면구스러워서...." 벌써 이렇게 정신이 위축되고 체면을 따지기 시작하면 좋은 아이디어도 덩달아 나오다가죽어버립니다. 심인성 부전 기제로 당신의 두뇌에 괜히 기를 죽이지 마십시오.

천재는 무엇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부심으로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헤겔은 일찍이 "예술가는 군주의 기상을 가져야 한다"고 했고, 맹자는 군자의 호연지기를 논한 바 있습니다. 이와 대조되는 상태라면, 남 눈치를 비루하게 살피는 속물주의입니다. 고골의 단편 <초상화>에 나오는 주인공 화가는 본디 천재로 태어났으나, 귀족들의 천박한 기호에 이리저리 영합하고 손재주를 상업적으로 더립힌 끝에, 나중에는 하늘로부터 받은 재주를 모두 잊고(잃고) 평범한 사람으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비위를 맞춰도, 내 마음 내 눈에 안 차면 쓰레기!라며 과감히 침을 뱉을 수 있는 호방한 안목과 기개가 있어야, 비로소 세상을 바꿔 놓을 미친 히트작이 나올 수 있습니다.

천재는 무엇보다,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남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라야 합니다. 성공하는 기업도 마찬가지여서, 시장의 후발주자, 추종자, 카피캣은 이제 선발자가 흘리고 간 이삭도 못 줍는 신세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세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부터 뜻대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일시적 기분으로 갈팡질팡 정신을 못 차리는데, 시장이, 세상이, 과연 나의 브랜드와 상품에 주목을 하겠습니까? 마음의 안정과 질서가 모든 창의력의 근본이라는 가르침, 이 책의 대단원을 과연 장식하고도 남을 만큼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가의 사기 - 우석훈의 국가발 사기 감시 프로젝트
우석훈 지음 / 김영사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헤겔은 일찍이 국가를 일러 "인륜(人倫)의 최고 형태"라고까지 철학적 지위를 부여한 적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 고립하여 생존할 수 없기에, 군집을 이루고 각자의 몫을 배분 받으며 사회가 긍인하는 방식의 틀 안에서 자아 실현의 꿈도 허용될 뿐입니다. 사회와 질서가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일 개체의 존속도 보장될 수 없기에, 우리는 어느 집단에건 소속과 정체성을 의존하기 마련이며, 그 최종의 보루가 바로 국가라는 대집단입니다. 헌데, 이 국가가 선량한 시민(혹은 국민)에게 저열한 속임수나 부리고 있다면, 공조직에 여태 전적인 신뢰를 부여하고 살아 온 우리들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 박사가 쓴 이 책은, 하다못해 자잘한 생필품의 가격 책정이라든가, 기후와 환경 오염, 재정 정책, 내집 마련 에의 희망, 일자리 창출, 외교, 국방, 교육, 주식 투자 등 거의 시민 생활의 전 분야에 걸쳐, 국가가 어떻게 국민을 속이고 극히 일부 계층의 편익만을 위한 "조직적 사기"를 전개했는지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저자는 스스로 자신의 이번 책을 "국가의 거짓말을 폭로한 최초의 사회경제학 보고서"라고 평가합니다. 저자의 그런 평가에 얼마나 수긍하고 동조하며 마침내 결연한 행동에까지 독자가 이르게 될지는, 각자가 주의 깊게 텍스트를 살피며 치열한 사유를 일궈 낸 후에 판단할 일이겠습니다.

저자는 제1장에서, 일상의 사소한 과정 속에서까지 시민이 기업과 체제에 속으며 코 묻은 돈을 뜯기는, 의롭지 못한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고발합니다. 경제학자답게 저자는, 노벨 상도 일찌감치 받은, 시카고 학파(책을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저자와 이 학파의 성향이란 극과 극으로 다르죠)의 유명한 멤버인 개리 베커 교수의 경제학 만능론을 인용하며 화두를 꺼냅니다. "세상의 대부분 범죄는 금전으로부터 시작하고, 치정 (범죄) 역시 금전에서 비롯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소리 같은데 저자가 구태여 이 말로 논의를 시작한 건, 본인도 경제학자이면서 "세상에는 경제 논리로 설명 안 되는 게 얼마든지 있음을 제발 좀 인정하자"는 말을 꺼내고 싶어서인 듯합니다. 음, 그 역시 옳은 말씀입니다.

경제논리로 모든 현상에 접근하면, 때로 중대한 오류를 범하거나, 인간으로서 최상위에 놓아야 할 가치를 훼손하거나, 아예 문제의 본말이 뒤집혀 극심한 혼란, 무질서까지 초래할 수 있습니다. 대형 마트에 걸린 플래카드의 현란한 문구도 믿을 수 없으며, TV 지상파에서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우수성도 언제 그 정반대의 사례가 밝혀져 신뢰가 붕괴할지 모릅니다. 저자는 경제학자답게(?) 2008년의 경제 위기 도래 직전 주식을 모두 팔고 폭락을 피했으며, 강남에 집값 오를 타이밍을 용케 맞혀 제법 큰 차익을 얻었습니다. 주위에서 비결을 묻습니다. 그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자신도 운과 요행에 상당수 기대어 그런 결과가 나온 줄 자인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벌어 본 사람도 "이렇게 하면 되더라" 식으로 확언, 자신을 못 하는데, 시중에 범람하는 그 많은 광고는 과연 얼마나 논거를 갖고 사람을 현혹하는 걸까요? 광고에 안 속는 게 똑똑한 시민 되기의 첫걸음임을 저자는 쉽고 친근한 말투로 독자에게 설득합니다.


1980년대 후반 들어 국가는 국민들더러 주식 사라고 부추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빚까지 내어 주식에 투자하기도 했는데, 마냥 오를 것같이만 보이던 증시 상황은 1990년대 초반 들어 몇 번이나 폭락을 거듭했습니다. 분노한 투자자 일부는 정부종합청사나 증권거래소 앞에 몰려가 정부의 해명과 대책 마련도 촉구했습니다. 저자는 한국의 증시, 나아가 세계 어느 나라의 주식시장 메커니즘도, 기본적으로 기관과 큰손, 내부자라는 갑(甲) 앞에 개미라는 을(乙)이 호구처럼 뜯어먹힐 수밖에 없는 구조임을 통렬히 지적합니다. 물론 운이 좋아 대박을 칠 수도 있습니다만, 한 번의 운수를 믿고 카지노에 상주하던 어리석은 도박꾼이 이내 업소의 술수, 애초에 불리하게 정해진 승률의 술수에 놀아나며 개털이 되고 마는 이치와 같다고 주장합니다. 지질 게 빤한 게임에 왜 참여하냐는 겁니다.

2008년 들어 보수 진영에 정권이 넘어간 후, 언제부터인가 "경제를 살립시다" 같은 구호가 난무하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10년 전을 회고합니다. 너도나도 경제 지상주의를 거론하며 당장이라도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듯 떠들었지만, 결국 재미를 본 건 시대착오적인 소수 토건족 말고 누가 있었느냐는 게 저자의 신랄한 지적입니다. 이런 부도덕한 일부 사업가와 결탁한 게 (소수이긴 해도) 정직하지 못한 공무원들인데, 이 책 제목 "국가의 사기"는 지금부터 본문과 본격적으로 연계를 맺으며 우리 나라의 공적 섹터가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지목합니다. 저자는 "나도 한때 공무에 몸 담았지만..." 같은 말로, 어디까지나 직접 경험한 바에 의해 논의를 전개함을 다시 강조합니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유명한 문학작품(이자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고위 공무원이자 타락한 사업가였던 코마로프스키의 예를 들며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는 지위를 이용해(요즘의 어느 시사 사건과도 잘 통하는군요) 여인을 겁탈하고, 부패한 제정 러시아 체제에서 쏠쏠한 금전적 이득을 챙기는 짐승 같은 인간입니다.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약삭빠른 판단과 처신으로 다시 공산당 간부직을 차지하며 또다시 부정한 이익을 추구합니다. 저자는 바로 이 코마로프스키 같은, 영혼 없는 공무원들이 한국에도 고위직 곳곳에 포진하여, 국민의 세금을 좀먹고 행정의 효율과 본의를 흐리는 암초 노릇을 한다고 지적합니다.

한국에는 정보를 조작하고 여론을 호도하는 이른바 "물 브라더스"가 있다고 합니다. 수도 시설은 본디 정부나 공공 섹터가 오로지 국민의 이익만을 위해 엄정히 관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2001년 수도법이 개정되어 지자체로부터 민간 업체로 업무를 위탁할 수 있게 제도가 바뀌었다고 합니다(p179). 이렇게 함으로써 결과는 엉뚱하게 오히려 수자원공사의 권한만 비대하게 불린 셈인데, 이 공고한 클랜은 현재 누구도 깰 생각을 못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사실이라면 정말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네요. 한국에서 보통 홍수가 일어나면, 이게 댐 같은 게 부족해서가 아니라 빗물 펌프의 부적절한 운용이나 양적 부족에 기인한다는 게 저자의 관점인데, 이런 사실을 가능하면 호도, 은폐하려는 게 "물 브라더스"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 역시 큰 관점에서 "국가의 사기"입니다.


과연 이과형/문과형 인간이 날때부터 따로 존재할까요? 반은 농담조로 저자는 이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표시합니다. 과거 우수 과학 인재를 느닷 최고권력자(독재자)가 모셔와서는 국책 기관이나 대학에 "꽂아" 주던 풍조가 있었는데, 이를 두고 나이 든 축에서는 "박정희 노스탤지어"를 품기도 한다며 저자는 조소를 머금습니다("유신 사무관" 이야기도 곁들이면서요). "과학기술의 공익성"에 대해, 저자는 국가 예산 투입해서 수출 기업 지원하던 정책(지금 이러면 큰일나죠)을 용도 전환만 했을 뿐 근본적으로 다른 게 뭐냐면서, 모두가 국가 섹터에 의해 어용으로 조작된 "신화"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통박합니다.

저자가 부르짖으며 경각을 촉구하는 바는 저 "위선의 왕국"입니다. 연구 성과나 효용도 불확실한 프로젝트를 암암리에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서로 부실과 비위를 눈감아 줘 가며 예산을 빼 먹는, 거대한 카르텔이 학계에 존재한다고 폭로합니다. 국민 중 대부분은 "과학 기술 예산? 어련히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잘 쓰일까. 난 모르긴 해도 함부로 폄하할 건 아니고 응원이나 보내줘아지."처럼, 의심 않고 믿어버리는 철벽의 성역이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예산은 우리만 타먹어야해!" 나면서부터 이과형 인간이 (좀 다른 의미로) 씨가 따로 정해지기라도 했는지, 이 꿀단지에는 아무도 함부로 손 대서는 안 됩니다. 일부 학계와 공직자가 결탁해서 이뤄지는 클랜화... 누가 과연 고양이의 목에 먼저 방울을 달까요?

"침묵이 길어지면 사기꾼들이 돌아온다." 결국은 깨어 있는 시민들이 나서서 의심하고 들여다보고 끊임없이 감시의 눈길을 번득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버스 준공영제는 마냥 시민을 위한 정책 같지만, 실은 "땅 짚고 헤엄치기"처럼 부도 위험 없이 날로 먹자는 짓이나 같으며, 세상에 재벌보다 속편한 게 버스 회사 사장 아들 노릇이라고 저자는 신랄히 비꼽니다. 믿음직하게 여긴 게, 알고보니 평범한 시민들 주머니를 체계적으로 털어가는 "국가의 사기"였다니, 여간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의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지, 우리 시민들부터도 그저 당연히만 여겨온 잘못된 상식을 하나하나 털어 감시하고 비판과 개선을 촉구할 일 아닐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