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역습
김용운 지음 / 맥스미디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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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이론은 어떤 의미에서 탈근대의 상징입니다. "A라는 원인이 있으면 B라는 결과가 생긴다." 뉴턴이 만유 인력 법칙 등 우주의 신비를 벗기는 노력의 초석을 놓았을 때, 이런 선형적(線形的) 세계관은 이성 만능의 희망과 비전을 계몽주의자, 지식인들에게 심어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사백여년이 지난 지금, 이 근대적 패러다임은 곳곳에서 도전을 받는 중입니다.

한국이 자랑할 만한 대석학 김용운 교수님의 이 책은 이른바 카오스 이론을 바탕으로, 작금의 도도한 세계 역사 물결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사실 저의 이 표현은 카오스 이론의 본질에 비추어선 어폐가 있긴 하죠), 원대한 통찰과 비전으로 우리 독자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내용입니다. 박사님께선 1927년생, 우리 나이로 아흔의 고령이신데도, 이 방대한 신저를 저술하셨고, 이 책에는 바로 몇 달 전에 터진 샬로츠빌 사건이라든가,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 IS의 과격 행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 양상 최근의 사정,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 외세가 끼어들어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게 된 시리아 내전 등 최신의 정보가 모두 반영되기까지 한 내용입니다.

책을 이렇게 쓰시려면 CNN 등 외신까지 모두 실시간으로 접하고 정보를 업데이트해야 가능한 경지입니다. 새파란 젊은이인 저도 정력과 시간이 부족한 과업을, 연부역강하신 이 대석학은 마치 숨쉬기 운동이나 하시듯 쉽게 해 내십니다. 심오한 통찰을 담은 저술이야 박사님 같은, 하늘이 낸 극소수 천재 두뇌라야 가능하겠으나, 외신을 보고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우리 같은 평범한 이들도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더욱 부끄러워지는 겁니다. 읽고서 정말 너무도 감탄스러웠습니다.

카오스 이론은 무작정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그보다는 결과의 확률분포적 도출이라든가, 단순계에서 통하던 법칙이 이 복잡계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전혀 예상 밖의 결과가 평지돌출할 수 있음을 언제나 명심하여 의사 결정하라는 충고에 그 맥락이 더 가깝습니다. 복잡계에 적용되는 카오스 이론 중 몇몇은 이미 실용적으로 높은 효율을 증명까지 해 냅니다. 기술이나 산업 분야를 넘어, 역사와 현금의 국제 정세를 살필 때에도 이 이론을 적용해 보자는 게 박사님의 제언입니다. 또, 단순 인과율을 통해 모든 미래가 예측 가능하다는 근대적 오만을 이제는 폐기할 때가 되었다는 뜻도 됩니다.

어떤 지도자가 극히 무능하고, 거듭된 실책과 비위를 저질러 자격을 상실했다는 것과, 그 지도자가 권좌에서 비참하게 끌려내려온 사실, 이 둘 사이에 항상 직접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악인은 즉시 천벌을 받아 죽어야 하며, 악함과 약함이 별개가 아닌 동일 결함일 수 있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어느 실직자는 그 순간 자신의 실체를 파악하고선 자살에 이르러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고, 이들 중 상당수는 멀쩡하게 그 부조리한 행태를 이어가며 민폐를 끼칩니다.

여튼 어떤 분은 그 자리에서 내려욌는데(=끌려내려졌는데), 이 역시 저자께서는 복잡계의 예측 불능이란 본성이 현실로 화한 예라고 보시는 듯합니다. 저자께서는, 아마도 뒤에서 웃고 있을 미스터 X의 존재도 슬쩍 언급하시는데, 세계 지도자 중 이니셜이 x로 시작하는 이가 그리 많지도 않습니다(^^ 물론 그저 미지의 존재라는 뜻으로 X를 거명하셨을 수도 있죠. 누가 감히 박사님 같은 대석학의 진의를 감히 일도양단으로 추단하겠습니까. 이 역시 카오스 법칙에 따라 감히 몇 가지 가능성을 거론할 뿐입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사실 역시 기존의 여론 조사 기법이나, 언론 기관 등의 통찰, 기대 등으로는 전혀 감 잡을 수 없었던 의외의 결과였습니다. 브렉시트는 또 어떻습니까? 근대 이후 세계는 이성과 뚜렷한 목적을 가진 이들이 때로는 무력으로 충돌하고, 때로는 현명한 지도자들이 자국민을 설득하고, 때로는 국민 의사를 선제적으로 대변하여 과감한 선견지명으로 국정을 이끌고 세계 정세를 안정시켰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독재국가는 물론 소위 민주 선진 국가들에서도, 어떤 군중 심리나 대중 추수, 선동적 술수에 리더들이 즐겨 의지합니다. 의지한다기보다 그들 역시 국가와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도 모르면서 미친 곡예를 이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에측이 안 됩니다. 지도자의 자질도 부족하고, 그 전에 시대의 성격이 바뀌어 더 이상은 과거 방식으로 통제가 안 된 세상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박사님은 특히 대중의 한(恨)에 주목하십니다. 종래 한(恨)의 정서는 우리 한국(韓國)인들 고유의 품성과 무의식으로 여겨졌으나, 박사님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불특정 다수, 혹은 특정 종족이나 인종이 품은 resentment(단, 책 어느 한 군데에서는 s가 두 번 겹쳐진 오타가 발겭됩니다. 다음 판에선 교정되길 기대합니다)가 작금의 세상을 움직이는 큰 동력 중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흑인은 신대륙에 노예로 끌려와 수백 년 간 경멸과 차별 받아 온 한이 있습니다. 반면 백인 중 상당수는 1960년대 민권 운동 이래 일부 흑인들이 정치적으로 협잡을 일 삼아 부당한 특권을 챙겼다며 역 차별에 대한 깊은 분노를 품었습니다. 샤를로츠빌의 대립상은 "헤이트(너희가 싫다!)와 카운터헤이트(우리 역시 그런 너희가 싫다!)의 극명한 충돌"이라는 게 박사님의 규정입니다.

이슬람 역시 한을 품었습니다. 석유로 인해 챙기는 막대한 이익 중 상당 부분은 미국과 유럽 백인 자본이 이유 없이 자기들에게서 뺏어간다는 피해의식입니다. 현세가 고단한 일반 민중은 지금의 생과 사가 큰 의미 없고, 교리에 충실하다 죽은 자에게 허여되는 천국행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살 테러가 그리도 빈발한데, 당사자에게는 멸사봉공 이념의 장엄한 실천이므로 아무 회한이 없습니다. 이러니 지구촌에 편안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 등의 거룩한 희생을 기리며 교육을 받았으므로 이런 현상에 대해 마냥 냉연한 반응으로 일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성과 대화와 타협으로 갈등이 종식될까요? 종래의 진보 좌파 진영은 이른바 "정치적 공정성"을 내세우며 그런 이상을 제시합니다. 보수 진영은 힘의 논리를 앞세워 이른바 sham peace가 부른 불건전한 교착 상태를 일거에 타파할 것을 주장합니다. 해결책과 비전은 서로 극과 극이지만, 이들 양 진영은 이미 효용이 다한 어떤 근대 사관, 세계관에 기반했다는 게 다릅니다. 그러나 박사님은 이미 미래의 패러다임인 카오스 이론에 깊이 천착하시어, 저 같이 새파랗게 젊은 독자층이 간신히 인식 기반으로 기대는 근대 합리주의를 이제는 폐기할 때가 되었다며 담대한 선포를 하십니다. 박사님의 견해가 맞고 아니고를 떠나, 사고와 철학의 근본 지평 설정에 이처럼 유연하실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놀랍습니다.

원인이 복잡하고 인풋(input)부터가 측량이 어려울 만큼 다발적인데, 어떻게 단순한 결론을 뻔뻔스럽게 도출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변했으면 우리들의 사고와 관점 역시 변해야 합니다. 경영에서는 이미 모든 것을 바꾸고 폐기, 전복하라는 파괴적 혁신이 대세입니다. 복잡계의 관측, 혹은 참여는 복잡계의 본성(이 말도 사실 어폐가 있습니다만 일단요)에 맞추어야 한다는 게 이 심오한 대저로부터 우리 평범한 독자들이 암시받을 수 있는 한 가닥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근대, 근대, 혹은 탈근대 중 어느 지평에 발을 디디고 있습니까? 겸허히 자문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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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연 토익 950 최상위 문제 실전 모의고사 유수연 토익 실전 모의고사
유수연 지음 / 사람in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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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익의 LC에서는 대개 그리 어렵지 않은 단어, 문장, 대화들이 제시, 사용되므로 응시자들이 아주 큰 부담을 느끼지는 않습니다만, 현재 수준에 머무르고 발전 못하는 이들은 딱 거기서 멈추기 때문에 점수가 오르지를 못 합니다. "나도 좀 하는데?"같은 어설픈 자기 만족이 아니라, 못 푸는 문제는 왜 못 푸는지를 알고 좀 번거롭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부숴 나가야만 합니다. 이런 책을 누구한테 보여 주면, "이런 건 몰라도 돼."라든가, "실제 토익은 이렇게 안 나와(더 쉽게 나온다는 뜻)."라든가, 만점 맞을 생각 말고 딱 여기까지만 하라는 등, 아주 전형적인 중위권 그룹의 물귀신 멘트가 꼭 나옵니다. 그런 말 듣는 사람들도, 어차피 공부는 하기 싫고 자기 한계를 계속 마주치는 고통도 느끼기 싫고, 얼씨구나 하고 저런 싸구려 팁(만)을 수용하기 때문에 도통 그 점수에서 발전을 못하는 거죠. "껍질이 깨지는 아품 없이는" 그 어떤 성취도 이뤄질 수 없습니다.

이 책은 확실히, 종래 자신이 계속 도전하다 미끄러지던 그 지점의 난점이 무엇인지 분명히 짚어서 보여 줍니다. "당신은 이 이유 때문에 900. 950점의 벽을 못 넘었던 것이다."라고나 하듯이요. 그 약점을 객관적으로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는데, 이 책은 극복의 방법까지, 혹은 지름길까지 가르쳐 줍니다. 유수연 시리즈만의 탁월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끔한 지적에 그치지 않고(그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솔루션까지 반드시 제공된다는 게, 언제나 느끼는 바이지만 참 대단하십니다.

LC 테스트를 위한 음성 파일은 일단 http://www.saramin.com  에 가셔서, 페이지 왼쪽 아래 영어 자료실에 들어간 후 이 책 제목인 <유수연 토익 950....>을 클릭한 후, 압축 포맷을 받아야 하는데 회원 가입을 꼭 해야 합니다. 파일은 mp3 포맷 세 개인데, 책에 테스트가 세 개 세트이므로 그에 따라 나눠 놓았습니다. 따라서, LC 파트를 통으로 모두 진행해야 하며, 구간별(문항별) 분류가 없으므로 적절히 눈치껏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파일 하나 크기가 40Mb 후반대입니다.

실전처럼 LC가 다 나오고 RC 파트가 다 끝난 후, 답만 먼저 알려 주고 그 뒤에 해설이 실렸습니다. 제가 이 책 보면서 느낀 건, 답이 맞다고 해도 그걸로 만족하지 마시고, 뒤에 실린 해설을 꼭 읽어 보십시오.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저자의 인사이트가 풍성하고, 이런 고수의 팁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실력이 늡니다.

고난도 문제 엄선이라고 하나 모든 문제가 다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 예로 TEST 1의 1번 같은 건 평이합니다. 해설을 보면 "포괄적인 설명이 대개 답이다." "그림에 없는 단어가 들리면 곧바로 소거하라"(사람이 안 보일 경우에)같은, 토익의 전통적인 팁이 여럿 실려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유수연 책이라고 해서 딱히 뭐가 다를 바 없죠.

4번에서 "조명기구가 설치 중이다"가 틀린 이유는, 현재 진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치는 이미 앞선 시제에 이뤄졌기에 현재완료 같은 게 무난하겠고, 만약 is being ~ed 같은 단어 하나하나가 명확히 안 들린다면 이걸 정답으로 잘못 고를 분들도 꽤 많을 듯합니다. 천장에 조명 기구가 있다는 자체는 사실이기 때문이죠. 그 앞의 2번은, 반대로 be being ~ed가 언제나 정답이 되는 경우는 그럼 언제인지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근거가 확실하므로 듣기에만 그저 멋있는 설명이 아니라, 실전 문제 풀이에 분명 도움이 됩니다. 단 6번의 경우, 두 사람이 사진에 등장하는데 과연 등을 지고 걷는지, 얼굴을 보인 상태인지 좀 모호하다는 게 아쉬웠습니다.

7에서 31까지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장 올바른 걸 고르는 형식인데, 고난도 문항 pool이니만치, 처음에 다소 동문서답 같이 들려도 "우회적 답변"으로 볼 수 있는 걸 고르는 유형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우회적 답변에 포함될 만한 게 사실 무한정이겠으므로, 핵심은 명백한 오답을 먼저 제거해 나가는 겁니다. 이 유수연 시리즈는 "명백한 오답"울 소거하는 요령 제시가 아주 탁월합니다.

8번에서 사실 저렇게 짧은 답은 대개 정답이 아닐 수 있지만 통념의 허를 찌르는 출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질문은 현재 진행형인데 답이 과거가 될 수 없다는 게 저자의 해설입니다. 그러나 많은 응시생들은 "일시 장애가 있었으나 지금은 해결되었다는 투로 답할 수 있지않을까?" 같은 의문을 가질 겁니다. 만약 그런 의도라면 but으로 연결되는 반대 사실 멘트가 아마 이어지겠습니다.

"신규 프로젝트 예산 건은 아직 승인되지 않았나요?"
"이사님이 막 그것을 받았습니다."

이 역시 우회어법으로 정답이 되는 케이스인데, 일단 "이사님"이란 분이 "승인"의 주체입니다. 따라서 상황이 근접되고, 승인되었나 아니냐를 물었으나 책임자의 수중에서 지금 진행 중이라는 뜻의 답변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따라서 답변의 비정형성을 원망할 게 아니라, 이런 유형에 마인드를 적응시켜야 옳겠습니다. 실무 영어에서도 예스 노 식의 초등학생 답변, 대화만 오가는 게 아니듯 말입니다. 우회어법에는 통상보다 좀 더 나아가서, "회피성 답변(테스트 1의 16번)"도 이에 포함될 수 있다는 점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반문 답변(27번 등)", "대안 제시(29번 등)"도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동일 어휘가 그대로 들리면 일단 답이 아니다, 연상 어휘도 마찬가지이다, 발음이 비슷하지만 다른 단어일 때 일단 제외시켜야 한다, 등도 토익 수험가에서 많이들 지적해 왔던 팁들입니다. 그래도 유수연 책에서 보니까 뭔가 권위나 믿음이 느껴집니다.

테스트 1의 RC 149번에서 이 안내문이 발견될 만한 곳은 "공공장소"라고 나오는 게 답인데, 지문에는 시립 공원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인 장소 제시가 한 단계 위에서 포함될 만한 유개념을 고르는 게 포인트입니다. free of charge가 no admission fee와 단어 하나도 일치 않으면서 정확한 rephrasing이 되기에 답이 이것밖에 없다는 점,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테스트 2 RC에서 101번이 어렵습니다. 명사가 동명사보다 우선이란 점에서 losing보다는 losses가 와야 한다는 게 책의 해설입니다. 그러나 긍정문에서 "어떠한 ~라도"의 뜻인 any 뒤에, 이 문제의 보기(이며 정답)인 losses 같은 복수형이 올 수 있냐는 게 고민거리입니다. 이 때에는 "losses arising"을 하나의 명사어구로 보고, 전체를 단수 취급하는 게 어떨까 생각합니다. 원칙들이 충돌하는 경우이므로 우선 순위가 잘 납득 안되는 분들은 꽤 고민이 될 겁니다. 102번 같은 경우 few도 좋으나 수 일치가 안 되어서 오답입니다. 가능성이 최소라고 했지 전무한 게 아니지 않냐는 어느 수험생의 항변도 있던데, 문법이 의미보다 더 선순위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104번 같은 경우 참 어렵습니다. 형용사 앞에는 부사가 와서 annoyingly가 꼭 정답 같지만, rattling noise가 하나의 명사어구를 이루니 역시 형용사 annoying이 와야 한다는 겁니다. 이걸 이해 못 하는분도 많습니다. "아니 왜 꼭 그렇게 파악해야 하는가?(평범하게 형+명으로 볼 수도 있지 않냐는 취지)" 이에 대한 답은 사실 없고, 원어민들의 감각이 더 우선이란 말 말곤 사실 논거가 없습니다. 그래도 (a)가 정답이라는 책의 태도는 백퍼센트 타당합니다. 105번에서 어떤 분은 "여자가 세상의 절반인데, 왜 primary인가? 절반이 바로 최우선이 되는가?" 같은 항변을 합니다. primary는 여기서 "중요한, 주요한, 무시 못 할" 정도로 해석해야 하겠습니다. 


test 2의 106번에서 본문 중 Jade will rapidly moved... 중 moved는 move로 고쳐져야 합니다. 뒤의 해설 파트에서는 바르게 move로 되어 있습니다.

test 2에서 rattling noise를 두고 이른바 "종류 형용사"로 규정하여, 이런 것은 다시 다른 형용사가 앞에서 수식할 수 있다는 명쾌한 설명이 나왔더랬습니다. test 3의 102번(물론 RC) 같은 것도, living relative에서 living이 "종류 형용사"이기 때문에 그 앞에는 sole이 아주 자연스럽게 위치합니다.

test 3 RC의 104번 같은 건, 일단 firm's board committee(혹은, 그 안에서의 변화)가 "약속"의 주체이지 객체가 될 수 없으므로 답은 능동태라야만 하겠습니다.

106번은 답이 (b)인 걸 쉽게 알 수 있으나, 압권인 건 그 뒤의 해설입니다. of 같은 건 앞의 section과 뒤의 division 모두 "부서"를 나타내므로 답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 설명이 혹 아니라도 이걸 답으로 고를 분은 거의 없겠으나, 이 전치사의 성격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는 계기가 분명 되었습니다. 이처럼 친절하고 정확하고 자세한 설명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연구가 선행되어야 가능한 건지요.

107번은 sinificance와 authoriry 사이에서 고민하는 분들이 꽤 될 겁니다. 저자는 collocation으로 접근하여, 뒤의 over라는 전치사가 전자와는 쉬이 안 어울린다고 설명합니다.

110번 같은 경우 목적어에 주목하라고 해설에서는 주문합니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estimate, verify 같은 동사를 두루 포괄하는 게 assess이므로 이걸 답으로 골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122번 해설을 보면 "허가로 책자에 있는 본문과 사진이 제공되었다"고 해석했으나, 저는 "사진과 본문이 제공된" 게 아니라, "사진과 본문에 허가가 제공되었다"고 해석해야 정확할 것 같았습니다. 우리말로는 그게 그거라고 여길지 모르나, 타 영어 시험이나 수업 시간에 에세이 쓸 때 이런 문법을 안 지키면 바로 감점이더라구요.

128번에서 "접속부사는 어디까지나 부사일 뿐 결코 접속사가 아니다" 같은 해설은 참으로 탁월합니다. 생긴 게 비슷하다고 하는 일까지 동일한 건 아니죠. 특히 문법적으로는요.

129번은 물론 답은 (a)지만, (d)가 혹 to the contrary였다면 이것 역시 답이 될 수 있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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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순종 세계기독교고전 59
앤드류 머레이 지음, 김원주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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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은 기독교인의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덕목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유독 이 "순종'이란 덕목을 놓고 여러 주옥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저자인 당신께서 철저히 행동에 옮긴 미덕이기에 그의 글을 읽는 교인들이 더욱 신실한 마음으로 교화되는 게 아닐지 저는 생각합니다.

같은 저자께서 쓰신 다른 저작 <순종의 학교>가 있습니다. 온유하고 덕망 높으신 선생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녀들에게 조용히 가르치는 덕목이 바로 "순종"이며, 이 거친 세파에서 온갖 불합리를 겪으면서도 "섭리에는 더 깊고 오묘한 어떤 계획이 있으려니" 하며 그를 따르는 우리들이 바로 학생이고, 생생한 교훈을 삶 속에서 배우게 하는 세상은 바로 "순종의 학교"가 아니겠습니까. 혹은, 성도들이 모인 교회 역시 순종의 학교라 불려 백번 타당하고요.


앤드류 머레이의 청신하고 울림 가르침 중 단연 새겨들을 만한 부분이, 이를테면 이런 구절들입니다. "양들이 순종하려고 애 쓴 후에 양순해지던가요? 또, 늑대가 사나워지려고 잔뜩 용을 쓴 후에 비로소 포악해지던가요? 아닙니다. 순하건 포악하건, 이는 모두 그들의 천성일 뿐입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대번에 우리는 마음에 동요가 일어납니다. 어떤 분은 "그럼 나는, 과연 양인가, 이리인가?" 양을 자처하자니 그간 숱한 고비에서 불순종했던 거칠고 모진 행실이 떠오릅니다. 그렇다고 늑대인가? 물론 나는 이웃에게 불성실하게, 냉정하게, 잔인하게 대한 적이 많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악한 처신 하나로 일관한 것도 아닙니다. 여튼 완전한 늑대가 아니라서 안도하기도 하지만, 지금 "완전한 순종"을 가르치고 계신데 양을 온전히 닮지도 못한 게 또 분명하니, 우리 마음은 여전히 불편합니다.

"왜 우리는 굳이 수고를 들여야 양처럼 순종할 수 있나요? 하나님의 자녀되기에 많이 부족해서입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우선 우리는 누가 뭐래도 자랑스런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한편,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는 그간 완전한 순종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천성으로 양처럼 순종하기엔 또 늑대를 상당히 닮았습니다. 이제 양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 알았습니다만, 그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머레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합니다."

이게 결국은 모든 답을 대신하고, 그 자체가 해답입니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율법 일체의 번거로움을 폐하고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너희에게 새 계명, 언약을 줄 테니,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유일한 계명이다."

얼마나 간명한 가르침입니까? 또, 사랑은 진정 모든 증오와 갈등과 번민과 탐욕을 일시에 잠재우는 특효약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사랑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역시 우리는 온전한 양이 아니므로, 수고가 그 길을 걷는 데에 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우리가 아무리 혼자 수고를 들여도 그 길이 쉬이 찾아지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이 책 역시 거듭남(중생. 重生)의 오묘한 이치를 거듭 강조합니다. 머레이 목사께서 펴드시는 성경 대목은 바로 로마서 7장입니다. "하려고 하는 뜻이 내 속에 잇으나, 하려고 해 보면 할 수 없음을 나는 안다." 어떻습니까? 마음은 구름 같습니다. 의지는 충만합니다. 그러나 신의 일개 피조물인 내가 너무도 미미한 존재이기에, 매번 우리는 땅에 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께 기대어야 하는 겁니다. "아버지, 제가 이처럼이나 힘 없고 미미하니 저를 살려 주소서.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나이다." 바로 이런 깨달음으로 인해, 장 칼뱅은 구원 역시 인간의 행위가 개재되는 게 아니라, 절대적으로 신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다고 단언하고, 교리로서 이를 정립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물론 우리는 육신의 삶, 세상의 삶을 떨쳐 내고 주님 안에서의 정결한 생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온전한 양(羊)이 아니기에, 그저 가만 앉아서는 경건한 삶이 불가능합니다. 허나 노력만 한다고 다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또 문제입니다. 바로 이때 성령의 은혜가 모든 것을 마무리짓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기도에 내려주시는 주님의 응답입니다. 내가 양의 천성에 가까워지려 수없이 울부짖고 어버이께 기댄 끝에, 예정된 구원을 주께서 비로소 내려 주는 겁니다. 구원은 다른 게 아니라, 우리 마음이 양처럼 어린이처럼 깨끗해지는 겁니다.

"착해지기만 하면 다인가요? 돈도 벌고 똑똑해지고 남들 보란 듯 살아야죠."

바로 그게 틀린 사고방식입니다. 물론 잘산다고, 많이 배웠다고 죄악이 되는 건 아닙니다(그나마 대부분은 잘살지도 못하고 배운 바도 거의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딴청이나 피우고 허세나 떨면서 정작 중요한 언약과 계명은 내팽개치는 게 이들 간악한 무리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미 간단하면서도 본질되는 길을 이미 가르쳐 주셨는데 우리는 이를 모른 체 한다는 게 우습다는 겁니다.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못합니까? 왜 완전한 순종이 힘듭니까?"

이는 질문과 답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벌써 순종이 어렵고 힘들다는 투정 속에, 불순종의 죄가 슬슬 꼬리를 드는 겁니다. 한편, "그렇다. 순종이 답이다. 순종하면 성령께서 어느새 임하시고, 믿음과 사랑도 덩달아 내 안에 풍성해진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벌써 길이 보이는 겁니다. 머레이 목사님 말씀은, 어리석은 우리들이 제 길을 찾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서, 지름길 하나를 넌지시 알려 주는 겁니다. "안 보이면, 힘들면, 일단 순종부터 시작하는 게 어떤가?"

과연 명답입니다. 구약의 욥이, 그 부지런하고 유능한 분(욥 자신)의 신상에 온갖 재앙과 불운이 닥칠 때, 어떻게 했습니까? 물론 그는 이런 일을 당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현인, 선인이었기에 처음에는 원망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속으로 욥이 이런 원망도 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구약은 그럴 경우 못난 우리들이 너무도 절망(도저히 우리는 욥 같은 성인의 경지를 못 따라하겠으므로)할까 싶어 이를 적절히 배려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입니다. 여튼 그래서, 욥은 어떻게 했나요?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욥은 잃었던 걸 모조리 찾고 더 번영했을 뿐 아니라, 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고, 무엇보다, 이게 중요합니다만, 악마를 철저히 부숴 버린 승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렇게 하셔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우리 죄를 씻으려면, 대신 씻어 주시려면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그때 대속해 주지 않으셨으면 벌써 이천 년 전에 다 죽었을 겁니다. 그 크신 사랑 덕분에 아직도 생을 이어가고, 그 와중에도 또 죄를 짓고 방자하게 굽니다. 이제 다시 순종 없이는 예수님의 희생이 무위로 돌아갈 판입니다.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순종이란 이처럼이나 중요합니다. 어리석고 한심한 우리는, 예수님이 그처럼 쉬운 말로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말을 말로 꼬고 비틀고 청개구리 짓을 합니다. 사랑이 어려우면 어떻게 할까요? 앤드류 머레이는 다시 쉬운 말로 바꿔 주는 겁니다. "주님께 순종하라." 과연 탁월합니다. 곤경에 부닥치면 어떻게 합니까? "순종합니다." 어떻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성령이 임해서입니다."

순종을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지 마십시오. 정말 마음이 있다면 일단 순종부터 하고 보는 겁니다. 이 작은 순간에도 성령은 이미 임하시어 우리를 돕습니다. 순종은 알고 보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쉽습니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숨 쉬는 게 가장 어렵고, 우리가 순종 못 하는 이유는 바로 영혼에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요 병은 우리가 못된 마음을 품는 사이에 사탄이 몰래 씨를 뿌리고 간 겁니다. 어째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은 저 구석에 버려 두고, 사탄이 던져 준 달콤하고 해로운 사탕만 입 안에 고이고이 굴리면서 자발적으로 건강을 해칩니다.

우리는 보호를 받습니까? 양은 목자의 보호를 받습니다. 선한 마음은 그 자체가 무한한 축복이나, 늑대의 이빨에 그 자체로 대항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늑대가 찢는 건 고작해야 양의 살갗이며 그 마음까지 침노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순교자들은 모진 형벌을 받아가며 죽음을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죽는 건 고작 육신이나, 사는 건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베드로서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둘째는 믿음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이런 보호는 오로지 온유하신 주님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에서 비롯합니다. 주님은 심지어 우리의 반항과 일탈까지도 우리의 자유에 일임합니다. 이처럼 그의 사랑이 무조건적이기에, 우리도 그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겁니다.


순종, 오로지 순종입니다. 시늉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 책 제목을 다시 보십시오.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완전한 순종" 순종에는 티끌만한 사심도 계산도 위선도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 역시 주님께 온전히 순종한다는 착한 마음이, 내 영혼을 완전히 감싸고 돈 후에야 제 자리를 잡습니다. 머레이 목사님은 다시 갈라디아 서를 인용합니다. "육신에 따라 살지 말고, 오로지 성령에 의지해 살라." 그러나 어리석은 우리들은 성령의 임재하심을 눈 먼 듯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을 의지할 수 있습니까? 바로 순종입니다. 무조건으로 복음과 말씀과 주님께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절로 성령이 우리 미천한 피조물들의 갈 길을 알려 주십니다. "완전한 순종", 이 위대한 신학자는 믿음의 본체를 이처럼이나 알기 쉽고 실천에 바로 옮길 수 있는 덕목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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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를 바꾼 위대한 과학 - 만유인력.원자 구조.상대성 이론.빅뱅.진화론.유전 법칙.DNA
아놀드 R.브로디.데이비드 엘리엇 브로디 지음, 김은영 옮김 / 글담출판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과학이란, 바른 방법론과 신중한 절차에 기댄 한 어떤 것도 위대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위대한 과학은 또한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모든 발걸음이 인류 역사를 앞으로 나가게 한 위대한 몸부림입니다. 해서, 정도의 차이가 다소 있을지야 모르나 저 장구한 과학 발전의 자취에서 가장 위대한 일곱 개의 이벤트, 이정표를 꼽는 작업은 무척이나 어려울 듯합니다. 이 지난한 과제에 누군가가 과감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듯 나서서 그 깔끔한 결과를 우리 평범한 독자들에게 추려 줄 수만 있다면, 그 역시 위대한 봉사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저자분들의 약력을 보십시오. 공저자 두 분은 형제 사이인데, 한 분은 병리학자, 세포 생물학자로 세계적 권위를 지닌 분이고, 다른 분은 이름난 변호사이자 과학 작가입니다. 주된 종사 분야는 크게 다른 듯 보이지만, 사실 이 두 분은 성장기를 함께하며 자연과학과 그 역사에 대해 열정과 탐구의식을 공유도 한, 드물게 보는 권위자들이자 멋진 호흡을 이루는 한 팀이기도 합니다. 특히 변호사는 청중에게 진실, 혹은 진실에 가까운 어떤 사항을 호소력 있게 공감시키는 게 직업상의 주된 사명입니다. 어려운 과학 내용을, 정확한 소양을 바탕으로 삼고 우리 무지한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납득시켜 준다면 민완 변호사보다 이에 더 적임자인 분도 또 없을 듯합니다.

이 책은 아마존닷컴이 갓 창립되었을 시절 일약 베스트셀러에 올라, 아직 도서 전문 쇼핑몰 정도에 머물었을 무렵 사이트의 인지도와 인기 흐름과 함께한 내역이 있기도 합니다. 모르긴 해도 몰의 관심도를 높이는 데 한몫 했을 이 책에 대해 아마존 측에서도 잊지 못할 듯하고요. 과학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힘든 과제이며, 아마존 역시 인터넷에서 책을 판다는 컨셉이나 BM이나 관행이 일반에 대단히 낯설게 느껴지던 장벽을 아직 뚫고 나가야 할 단계였습니다. 이 책은 그 한참 후 개정판이 나왔는데, 이번에서야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저자들의 유려한 설명과 정확한 비전이 우리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중심에서 끌여내려진 지구".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여겼음에도 그 우주의 중심에는 다름 아닌 지구가 놓였다고 여긴 걸 보면, 우리 인간은 말로야 섭리를 앞세워도 기실 지극히 자기 중심적 존재인가 봅니다. 이 책은 인류 역사를 바꿔 놓은 과학 업적 첫째 타자로, 비교적 근대로 내려와 뉴턴의 만유 인력 법칙 발견 등을 꼽습니다. 물론 이 첫째 장에는 아이작 뉴턴 경만 나오는 건 아니고, 뉴턴 경 자신이 겸허히 고백했듯 "자신에게 어깨를 빌려 준" 거인들에 대한 서술도 자세합니다.

저자들은 비단 과학사뿐 아니라, 인류사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합니다. 특히 1장은 몽골 킵차크 한국(영문 서적에서는 주로 Golden Horde라고 표현하죠)이 유럽을 휩쓸 때 함께 이곳을 짓밟은 공포의 질병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는데, 저자 형제분 중 한 명인 아널드 R 브로디 박사님의 기여가 더 크지 않았을까 짐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로 구태여 첫 챕터의 막을 연 건, 그만큼 유럽 문명의 기반이 매우 허약했던 시대상을 회고하며, 이런 시대를 떠받들던 게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얼기설기 점성술에 끼워맞추던 개탄스러운 수준을 짚기 위함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에 완고한 일부 기독교 세력의 패착도 끼는데, 용감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등의 혁신적 발상 전환은 그야말로 인류에게 단지 지성의 더 환한 축복을 내린 데 그치지 않고, 역사, 생활 양식에의 총체적 개혁까지를 유도했습니다.

뉴턴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명만 꼽아도 그가 선정되어 지나침이 없을 만한 천재입니다. 학설 체계를 인위적으로 구획하기란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지만, 만유인력도 그렇거니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고안해 낸 (물론 독일의 라이프니츠도 독립적 경로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만) 미적분법이야말로 이후 문명사에 무한한 응용의 도구를 안긴대 업적임에 틀림 없습니다. 바로 앞 부분에 케플러라는 천재의 기괴한 개성도 잠시 언급됩니다만, 뉴턴 역시 그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으로서는 약점이 많은 위인이었습니다. 책은 2012년의 위대한 광학상의 업적 중 하나인, 가시광선 입사시 굴절률이 0로 나온 최초의 성공례도 잠시 소개하는데(개정판 맞죠 ㅎㅎ), 이 쾌거에서 다시 확인되는 건 오히려 뉴턴의 위대성입니다.

2편은 원자 구조론의 소개입니다. 먼저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가 나오고, 돌턴 등의 고전 모델이 잠시 언급되지만, 독자의 흥미를 돋우는 "본편'은 양자 역학 세계입니다. 우리말로 "양자 도약"이라 옮겨지는 퀀텀리프는 사실 영미에서는 (사람들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일상에서 흔히 쓰는 표현 중 하나죠. 이 2편이야말로 "어려운 걸 쉽게 풀어주는" 저자분들만의 장기가 잘 증명되는, 책의 백미이자 압권이라 부를 파트입니다. 닐스 보어, 러더퍼드, 마리 퀴리 같은 시대의 거인들이 교차로 무대에 오르며, 그야말로 역사를 바꿔놓은 대발견과 이론의 구축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우리 독자들은 차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2009년의 LHC에 대한 언급도 있고, 이론 자체는 훨씬 전(지금으로부터 반 세기 전)에 나온 힉스 보손도 비교적 자세히 들여다 본 후,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한 회고를 통해 과학자 간 국제 연대가 깨어지고 만 아픔도 감성적으로 풀어 줍니다. 잠시 동안, 며칠 전 뉴스를 탔던 로봇 관련 외국 학자들의 카이스트 보이콧 선언(철회되었습니다만)도 생각이 나더군요.

아인슈타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철학자 에른스트 마흐입니다. 물론 뻬어난 "발상"을 과학으로 다듬은 업적이야 오롯이 아인슈타인의 것입니다만, 저자들도 그런 평가를 하고 있듯 그는 실제로 철학자와 과학자 사이의 경계를 끊임 없이 넘나들었고, 이 점이 바로 그를 동시대 과학자들보다 한층 위대하게 부각한 정신적 자질입니다. 누가 닐스 보어나 하이젠베르크를 들어 "철학자"라고는 잘 하지 않지 않습니까. (간혹 철학사 서적에서 하이젠베르크의 인문 유산에 대해 천착하긴 합니다만)

상대성 이론은 물론 아인슈타인 본인이 제안도 했고 본인 당대에 거의 남김 없이 해명도 이뤄졌습니다만(이 역시 흔한 사례가 아닙니다), 그 대중적 이해는 여전히 답보 상태이며, 근 백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일부 영리한 대중 작가들에 의해 "보다 나은 설명 방법"이 제시되곤 합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임은 우리 독자들이 바로 알아챌 수 있습니다. 특히 압권은 상대성 이론을 갈릴레오의 전통 프레임으로 변환했을 때 어떤 모습인지 친절히 풀어주는 대목입니다. 일상은 뉴턴 역학에 의해 거의 부족함 없이 커버된다고도 하지만, 그 일상의 많은 부분은 또한 미해명의 상태로 남았기에 이런 천재가 20세기에 출현이 가능하기도 했던 겁니다. 그의 해명이 워낙 매끄럽고 빈틈이 없던 터라 양식 있는 그 어떤 과학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책에서는 2011년 나사의 "증명"이 이 거대한 행보에 화료점정 구실을 했다며 특별히 기립니다. (역시 개정판의 흔적)

다음 파트는 빅뱅에 대한 설명입니다만 이보다 앞서 천체 물리학 일반의 지난 자취에 대해 간단한 조망이 나오네요. 허블, 배로, 조르주 르메트르 등 이 분야 대중서에서 자주 만나던 친숙한 인명들이 행진합니다. 앞서 아원자 단위의 세계를 다루는 "표준 모형"도 소개되었지만(우리가 이 이름으로 아는 가장 잘 알려진 이론 체계), 빅뱅 이론은 그보다 훨씬 앞서 "표준 모형"의 지위를 이미 얻었습니다. 이 책에는 (당연하지만) 노벨 상 수상자들의 면면이 자주 언급되는데, 1979년에 로리트가 된 스티븐 와인버그 같은 이의 업적 덕분에, 이미 빅뱅 이론은 정황 증거를 수북이 갖춘 가설이 아닌 정설에 가까운 지위입니다.

우연히 발견된 우주배경복사, 과연 광막한 우주에는 우리 인간 외에 어떤 지성적인 생명체가 살고 있을지요. 미치오 가쿠 같은 이들이 자신의 대중서에서 흥미롭게 설명해 준 대로, 우주에는 과연 종말이 닥칠지, 그간 팽창을 거듭해 온 추세와 중력 간의 숙명적 대결에서 결과는 과연 어떻게 나올지, 이 분야의 과제는 파고파도 끝이 없습니다.

우주와 생명에 대한 전통적 관점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는 이유에서 다윈의 업적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보다 앞서 저자들은 세균들과 고세균(古細菌)들이 따로 분류되는 입장(물론 현대의 다수설입니다)을 지지하며 칼 우즈(2012년 타계)의 탁월한 안목과 전위적인 세계관을 특별히 높이 평가합니다. 이런 태도는 앞선 시대 비슷한 행보로 일거에 패러다임 혁명을 몰고온 찰스 다윈과의 개성 유비를 끌어내려는 의도임을 우리 독자 누구나 눈치챌 수 있습니다.

앞서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통해 행한 "예언"도 이후 학자들에 의해 하나하나 "증명"되었듯, 책은 최근에 이뤄진 각종 화석상의 증거 발견과, 현생 종의 생태 속에서 관측되는 "자연 선택과 진화의 빠르고도 놀라운 양상"에 대해 언급, 소개합니다. 이 중 재미있는 건 인류의 기원을 400만 년 이전까지 끌어올린 아르디(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의 사연입니다. "아르디"는 에티오피아 말로 "바닥. 기본"이란 뜻이죠. 좀 특이한 건 판 구조론 등이 이 진화론 파트의 일부로서 같이 다뤄진다는 건데, 두 이론이 많은 증거를 구조적으로 공유할 뿐 아니라, 진화론만큼이나 유독 지독한 박해와 차별을 받은 지질학에 대한 이 저자들의 시선 때문이기도 합니다.

세포와 유전법칙, 그리고 DNA 토픽은 서로 한데 묶일 만도 하건만 저자들은 이를 각각 6장, 7장으로 나눠 놓았습니다. 이는 아널드 R 브로디 박사의 주전공 분야에 인접하기도 한 만큼 각별히 할 말이 많아서일 수도 있고, 실제 읽어 보면 타 대중서와는 전망의 방향과 컨셉이 다소 다르다는 점도 감지됩니다. 점균류의 경우 우리가 중등 과정에서 배운 대로 동물과 식물의 특징을 겸유하는데, 사실 이처럼 모든 학문 분야에서 배중률을 관철하려는 태도는 참 무모하기까지 합니다. 점균류의 경우 학자들이 놀라워는 하면서도 인식 과정의 모순은 거의 느끼지 않고 수용하는 반면, 양자역학이나 빛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얼마나 거부감이 컸습니까. 개선이나 폐기의 운명을 맞을 것은 현실을 더 이상 설명 못하는 패러다임이지 현실이 아닌데도 우리는 종래의 선입견에 완강히 매달리는 우를 범합니다. 반면 학창 시절 공부 못 한 한이 그렇게라도 풀릴 수 있다는 듯, 기존 이론체계가 무조건 붕괴 대체된다는 근거 없는 소리를 하는 바보도 종종 발견됩니다.

볼복스처럼 개체들이 서로 달라붙어 살아가는 다세포 유기체 패턴이, 과연 생존에는 얼마나 더 유리한 효과를 볼까요? 저자 본연의 전공 영역인 만큼 특히 대식 세포 파트에 가면 저자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도 나오는 등 서술은 한층 활기를 띠고, 세포론은 이어 멘델의 초기 유전 연구에 바톤을 넘깁니다. 이런 유전자의 "본체"가 DNA임을 알게 되는 데까지는 다시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어느 학문이건 종전과는 다른 차원에의 도약을 위해 넘어야 할 "문턱"이 있는데, 저자(들)의 솔직한 견해는 바로 이 DNA의 존재 규명, A, G, T, C 4대 분자의 발견이야말로 과학사 최대의 대사건으로 보는 게 아닐까 싶게 아주 서술이 자세합니다. 이에는 유전학 뿐 아니라, 물리학과 화학의 위대한 콜라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도 합니다만 말이죠. 왓슨과 크릭 두 익히 알려진 전설, 젊은(젊었던) 천재들 외에도, X선과 양자역학을 방법론으로 도입한 모리스 윌킨스의 업적 역시 자세히 다뤄집니다.

인류의 여정은 불과 400만 년 레벨을 넘지 못할지 모르나, 그 지적 탐색의 스케일은 140억년에 달한다고 저자들은 단언합니다. 책은 따라서 이 7대 업적이 향후 어떤 추이로 과감한 도약(퀀텀 리프?)를 이룰지 그 특유의 폭 넓은 시야로 담대하게 짚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신생 이스라엘로부터 제의 받은 대통령 취임을 정중히 거절하며, 정치는 수 년의 단위지만 방정식은 영원의 문제라고 한 건 참으로 명언입니다. 따라서 과학은 인류의 역사를 바꿔 놓은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본체일 수 있고,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류의 이 같은 담대함이야말로 유한한 개체의 의의를 영원에 가깝게 만드는 거룩한 몸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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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캐니언 정말 노아 홍수 때 생겼을까? FIELD TRIP SERIES 1
양승훈 지음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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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캐니언에 다녀오신 적 있습니까? 이름 그대로 장쾌한 스케일과 기괴한 형상에, 진정 "그랜드"란 형용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누구에게도 들죠. 본디 그랜드캐니언은 신대륙에 소재한지라 당연히 기독교도들을 몰랐을 테고, 기독교도들 역시 그랜드캐니언을 몰랐겠으며, 성경에 "감자"가 나오지 않듯 그랜드캐니언 역시 "홀리 스크립트"에 등장할 리 없습니다. 즉 그랜드캐니언은 애초에 "비블리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심 깊은 청교도들이 북미 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하고, 그때로부터 다시 한참이 지나 미국 중서부의 이 절경에 도달하고선, 그 신묘한 경관에 자연 신의 섭리를 덩달아 떠올리는 게 당연했지 싶습니다(말은 이렇게 했으나 유럽인으로서 최초로 이를 "발견"한 사람은 스페인 제국 신민이었던 켑틴 카데나스라고 책에 나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할 생각이 없고, 반대는커녕 흔연히 동참까지 하고 싶어집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보면 말라키아 수도사가 이런 말을 인용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늘은 위에, 땅은 아래에.
기적 중에 기적이로다."

하물며 이런 절경을 두고 어찌 섭리의 신통함을 연상치 않기가 쉽겠습니까(물론, 냉철한 지성으로 엔트로피의 랜덤 워크를 먼저 염두에 둔다면 그 역시 멋진 일입니다). 또, 미국 기독교인들은 그야말로 구절양장의 교리와 입장들을 지녔으며, 프로테스탄트라고 한들 결코 신앙 고백과 신조가 세세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유독, 극히 일부 근본주의자들만이 이 아름답고 웅장한 지형에 대해 왜곡된 의미를 부여하며,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이 협곡의 역사가 불과 몇 천 년 전"이라는 반지성적 결론을 강변합니다. 그 몇 년 전이라 함은 노아의 홍수 시절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축자주의 입장을 취한다고 해서 모두 반지성적이라거나 극단, 편협의 비난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은총 중 하나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 지성의 작동 결과, 우리는 현재 우리가 발 디디고 선 지구의 나이, 우주의 이력이 대략 어느 정도인지 상당한 논거를 가지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미래에 또 어떤 과학적 천재가 나와 인류에 새로운 눈을 띄워 줄지야 아무도 모르긴 하겠으나, 현 단계에서 가장 뻬어난 지성들이 합의를 어느 정도 이룬 이상 단번에 뒤집힐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이만큼이나 인식의 지평을 넓힌 것 역시, 신앙인이라면 그에 대해서도 "전지전능한 신의 은혜"라 못 새길 바 없습니다. 이 역시 넓은 의미에서 신이 인간에게 계시한 바인데, 어찌 가볍게 기각,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현재 자연과학의 성과가 이처럼이나 힘들여 일궈 놓은 바를, 문자 그대로 자연과학 지식을 가르치는 게 주 목적이 아닐 성경 구절의 포괄적 문언 몇 마디를 들어 배척한다면, 이는 상당히 우려스럽고 개탄스럽기까지 한 현상입니다. 이른바 창조과학이 한국에서 일정 반향을 일으킨 건 대략 삼십여 년 전입니다. 여기 가담하신 분들이 한국(그 교육 열풍 극성스럽기로 유명한)에서 단연 몇 손가락 안에 들만한 지성인들이 많았기에, 그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지금 이 책의 저자께서도 (유감스럽게도) 그 그룹에 열성으로 참여하신 분이었죠.

학문적 성취 높은 정통파 물리교육자이며 동시에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는 젊은 시절 정말로 신앙과 학식의 조화로운 지점을 한때 발견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창조과학이나 근본주의는 그시절이나 지금이나 결코 기독교의 주류였던 적이 없습니다. 계몽주의와 이성의 재발견 역시 처음에는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주도했고, 교회의 주류는 처음에야 마음이 불편했겠어도 인류 문명의 도도한 발전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이들 상당수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론의 학습에 대해 별 갈등을 못 느낍니다. 교단의 주류가 이를 승인하고, 그 이전에 상당수 신도들이 넉넉히 세속화된 이유도 한몫 합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저자께서 통렬한 반성과 회심의 계기로 이 책을 저술하셨기에, 독자로서 공감하며 그 취지에 대해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고요.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자연과학, 그 중에서도 지구과학 부교재로 아주 유익하게 읽었다는 점 고백하고 싶네요. "부교재"라기보다, 외려 표준적 교과서보다 더 설명이 자세하고 도판이 미려하여, 그간 긴가민가했던 지식 사항이 말끔히 정리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랜드캐니언의 사진, 연구 결과가 세심히 반영된 도판, 그래픽 등은 어디서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그래픽은 텍스트만큼이나 작성자의 학식과 명철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라, 막힘 없이 훤히 진상을 뚫는 대가의 명강의를 청취한 느낌이었습니다.

최고 수준 과학자이기도 한 저자이시니만치 명칭 배경에 대해 어떤 정서적 거부감(이교풍이라는 등)을 느끼진 않으시겠으나, 너무도 이질적인(서유럽인 기준으로) 힌두의 신들 이름(이들 중 상당수는 근래 들어 부쩍 컨택이 잦은 인도 문화 유입 때문에 친숙하기도 합니다), 북미 원거주인 토착어 등을 딴 지층 명 때문에 당혹감이 적지 않다는 솔직한 느낌도 실려 있어 독자로서 웃음을 머금게도 되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무슨 잘 알지도 못하는 브리튼 섬, 스위스나 독일의 산맥 이름을 딴 학술명칭이 처음에야 생경한 건 당연하죠.

Know the Canyon's history, Study rocks made by time.

무슨 소리냐 하면, KTCHSRMBT란 두문자를 순서대로 외우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열풍인 공시(공무원 선발 시험)에서 주목을 받곤하는 두문자 암기법이 떠오르기도 하죠(사실 본질이 같아요). 카이바브, 토르웹, 코코비노 사암(sandtone. 沙岩), ... 하는 식의 9대 주요 지층(그랜드 캐니언의)을 일단 암기하고 있어야 연구의 프레임이 잡힐 텐데, 전문가들도 정작 이게 쉽지 않은가 봅니다.

상식적으로도, 대홍수가 났다고 하면 넓고 얕은 하상(河床. 강바닥)이 형성되지 싶습니다. 반면, 콜로라도 강과 그 아래 캐니언은 전형적인 구불구불 사행천입니다. 사행천이 무엇인지는 중학교 2학년만 되어도 다 배우는 내용이죠. 우리들 인간 개체의 평균 수명이 워낙 짧다 보니, 수백만 수억년은 고사하고 몇 천 년 단위의 변화마저도 이해가 어렵고, 모르면 진리 앞에서 겸손해지긴커녕 오히려 짧은 지식을 들이대며 당치도 않은 만용을 부리기 일쑤입니다. 근본주의자이건, 그 반대로 무지하기 짝이 없는 안티 기독교 분자들이건 이런 어리석음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랜드 캐니언은 지질학과 지구과학에 많은 연구 과제와 영감을 던져 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독립된 연구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간 5, 6백만년 전 형성설이 확고한 주류설이었으나, 대략 십 년 전에 1700만년 전이라는 입장이 새로 대두했다고 합니다. 왜 방사성 연대 측정법으로 명확하게 못 가리는가 하면, 이런 계곡의 경우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에 어느 대목에서 연구자들이 함정에 빠지거나 오도될지 장담을 못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방법론이 발전하거나, 새로운 법칙이 정립되기도 합니다. 자연 과학 어느 분야라도 흔히 패턴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진지한 과학자들 사이에선 "몇 천 년 전" 설이 더이상 고려대상이 아닙니다만, 여전히 한국의 "창조과학자들" 중에서는 끈덕진 반론을 펴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튼 상대가 논리로 반격해 오면 정당한 논리를 동원하여 논파, 혹은 설득할 필요가 있고, 무작정 권위만을 앞세워 묵살하거나 과학 외적 논변으로 뭉개고 드는 건 안될 일입니다. p202에서 일단 저자는 반대측 선교사분의 입장을 예거하며 그에 대한 반대논리를 전개합니다. 사실 독자야 이미 진부를 마음 속에 확신합니다만, 그래도 무작정 대세에 기대는 건 비겁한 태도 아니겠습니까? 천에 하나 상대측에 일말의 타당성이 있을 수 있다 가정하고(귀무가설?), 일단은 경청하고 듣는 게, 이 저자분의 결론(학계 주류설)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양측에서 동시에 인용하는 R G 셰퍼드 박사의 논문 내용도 <사이언스>에 등재되었던 것이라 우리 독자들에게는 그 구체적인 전개에 대해 큰 흥미가 생깁니다. 셰퍼드 박사의 결론은 유속(流速)이 증가함에 따라, 측방침식뿐 아니라 하방 침식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건데(p204), 홍수가 얼마든지 깊은 강도 만들 수 있다는 게 이를 인용한 선교사분의 요지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실험은 사전에 인위적으로 수로를 만들어 두고 실시한 실험이므로, 애초에 홍수의 효과를 시뮬레이션하는 논지와 무관하다고 재반박합니다. 여튼 논쟁 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자연과학 지식은 많다고 헤야겠습니다. 또, 제아무리 한쪽 입장이 진리라는 쪽으로 심증이 기울어도, 그 과정 하나하나에 절대적 타당성이 부여된다는 게 역시 쉬운 일은 아니라는 점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정직한 느낌으로는 저쪽 반박(창조과학 측)도 만만치 않았다는 편이었거든요. 이겨도 뭔가 많이 맞고 이긴 기분이랄지요. 하긴 일부 맹목적 기독교 안티들처럼 뭘 모르면 그저 목소리만 높이고 악다구니만 써도 창피한 줄을 모르므로 편하긴 합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말입니다.

그랜드 캐니언은 협곡 지형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 협곡을 흐르는 물줄기를 가리키기도 하는 맥락으로 이 책에서는 쓰입니다. 지류, 지지류, 지지지류 등 다양햔 층위의 흐름에 대해서도 독자는 유의하며 책을 읽어나가야겠습니다. 저자가 거론하시는 핵심 논거 중 하나가 지류와 지지류(혹은 그 하위 레벨)가 만나는 "각도"인데(라디안 단위가 아니라 우리가 흔히 쓰는 "도[度]"입니다), 표본으로 대표성을 잘 갖춘 케이납 크릭의 예를 듭니다. 왜 이들은 90도 이상의 둔각으로 만나는가? 오랜 세월에 걸친 느린 침식 과정이 결정적 형성 요인이었음을 증명한다는 저자의 논변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저자의 태도는 마치 존 스튜어트 밀의 리캔테이션이나 파스칼의 겸허한 고백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책 말미에는 도널드 트럼프 같은 성향의 정치인을 지지하는 일부 근본주의 진영에 대한 거듭된 우려, 복음주의와의 차별성 등에 대한 소신 개진이 있는데, 이 역시 진지하게 읽고 독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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