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스펙트 버티고 시리즈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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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크레이스의 작품을 읽을 때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로스 맥도널드 상을 받았더랬지만, 로스 맥도널드보다 기교나 스타일, 진한 주제의식 면에서 오히려 그가 더 낫다." 반도체 집적 기술은 시간의 경과에 지수적으로(exponentially) 반응하여 발전하기 마련이지만, 문학의 깊이와 향취는 요즘 것이 옛 모범을 못 따라잡는 게 오히려 일반입니다.  허나 장르문학이라면 사정이 꼭 그렇지도 않은데, 어쩌면 로버트 크레이스는 고작 장르 작가였던(헉. 참고로 저는 맥도널드의 피조물 루 아처를 무척 즐겨 읽으며 청소년기를 보낸 충성스러운 독자입니다. 현재까지도) 그를 벌써부터 능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르의 펜스와 목줄을 넘어선 채 말입니다.

"그 아이는 신의 피조물이야."

릴랜드는 말버릇만 이런 게 아니라, 그 거친 직장에서 특정 업무를 관장하는 중년 사내치고는 참으로 뜻밖에도, 정말 신앙 같은 걸 갖고 있나 봅니다. 직장이 직장이다 보니 신이 어쩌구를 들먹거리면 조소의 대상이 되거나 리더십과 권위를 잃기 십상일 텐데, 메이스를 비롯 아무도 그를 함부로 못 봅니다. 경찰견, 군견을 다루는 영역에서 말 그대로 그는 "신"에 가깝기 때문이죠. 이 부서가 그리 높은 위상을 조직 안에서 점하지는 않는 듯합니다만(자신의 자조적 대사 중에 그 점이 암시되더군요), 여튼 그는 이 일에서 거의 "미국 최고 반열"입니다.

개의 후각에 대해서는 일반인들 사이에서조차 그 우수성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만, 로버트 크레이스의 냉철하면서도 사람 감성을 뚝뚝 누르고 찍는 듯한 문장을 통하니 새삼 경이롭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너희 허섭스레기 같은 인간들 열보다 낫다!" 릴랜드의 일갈이 아니라도, 이 작품에서 "해병" 매기의 맹활약과 품성과 "의리, 지조"를 보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듭니다. "넵! 말 안 해 주셔도 알겠습니다!" 매기는 잘 훈련된 군견으로서, 해병대에서 어느 특수 첨단 장비도 수행 못 할 일을 척척 해 낸 영웅입니다. 영화 <지 아이 제인>에 나온 데미 무어 저리가랍니다. 그뿐 아니라, "상관"과 동료들에게 무한대의 존중과 존경과 사랑을 받는 부하, 동료로서의 "그녀"입니다. 실제로 이 책에서는 내내 3인칭 여성 대명사 she, her 등으로 가리켜집니다.

매기는 해병 중의 해병 피트와 거의 영혼의 동반자 관계였습니다. 아, 웃지 마시길. 여튼 로버트 크레이스의 절제되면서도 "미친" 필치 속에 그녀를 계속 만나다 보면 거의 종교적 경외감까지 생긴다니까요. 심각하고도 감동적인 사연(아무리 픽션이라도)이므로, 잘 알지도 못하고 경솔히 비웃음 날리면 반드시 벌 받습니다, 네. 이런 매기는 어느날 적군의 자살 테러로 피트를 잃고, 자신도 심각한 부상을 당하면서 심각한 PTSD에 빠집니다. 안타깝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신"의 경지인 릴랜드 생각(곧 신의 생각)으로, 한때 최고였던 매기는 더 이상 쓸모가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 조직과 인간들을 위해 적당한 방법으로 퇴장해야 합니다. 안타깝지만 말입니다. 다름 아닌 릴랜드 같은 이가 이런 판단을 할 때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문외한인 우리 독자들도 눈치챌 수 있습니다.

매기는 피트를 잃었지만 스콧은 스테파니를 (비슷한 시점에) 잃었습니다. 스콧, 스테파니 둘 다 젊고 유능한, 장래가 촉망되는 경찰들이었습니다. 불가항력인 상황이었지만 스콧은 첫째 스테파니가 죽던 순간 자신이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고 오인했던 게 죽도록 괴롭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았으나 이미 그녀의 오해를 바로잡을 수는 없습니다. 스콧 자신도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자신만의 아픔에 시달리지만 무엇보다 그의 영혼을 짓누르는 건 죄의식과 설욕의 다짐입니다. 무엇으로든 만회를 해야 합니다.

매기 역시 피트 없이는 살 수 없는 영혼이었기에, 이런 스콧과 운명적 만남을 갖습니다. 이런 개가 흔히 그렇듯, 처음에는 낯선 스콧의 손을 물며 거리감을 유지하려 듭니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어떤 해병이었는지 잘 아는 동료들은 너무도 마음이 아프기에 함부로 어떤 조치도 못 취합니다.

스콧 제임스 순경은 엄청난 피를 현장에서 흘리고, 파트너 스테파니처럼 죽음 직전까지 갔습니다만 경이로운 생명력으로 살아 났습니다. 마치 그에게는 명견 매기가 저때 현장에서 자신이 지켜 주지 못해 죽은 스테파니의 화신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 영화 <존 윅>에서 주인공이 아내의 유일한 흔적처럼 개를 그처럼 싸고돌던 모습도 함께 연상됩니다. 후반부에는 은퇴한 경찰 멜론 씨를 찾아 스콧이 결정적 암시를 받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도 스콧은 자신의 주변 그 누구와건 끈끈하고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맺는 인물(아직 나이가 젊은데도요)임이 확인됩니다. 좋은 사람 곁에 좋은 사람만 모인다고, 멜론 씨도 더할 나위 없는 호인입니다. p348에 멜론 씨 대사 중 매기가 공을 안 따라간다는 말을 듣고 "창피"하다는 말이 나오는데, 매기 같은 특별한 개의 취향을 미리 못 파악한 게 창피하다는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shame에 우리말로 "유감"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제 생각으로는 원문에 이런 의도로 해당 단어가 쓰인 게 아닌지..

아니, 상실한 누구(그녀가 비록 인간이라 해도)를 가름할 대용품으로 이 대단한 경찰견 매기가 그 자리에 놓였다고 하면, 스콧으로서는 엄청 화를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매기를 향한 그의 사랑과 의리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순수한 것이지 어떤 대체재 행위 같은 게 아니기 때문이죠. 처음에는 몰라도 그는, 특히 작품 후반에 이르러서는, 분명 매기를 매기로서 좋아하기에 이른 게 맞습니다. 근거라면,... 달갑지 않은 낯선 형사들이 와서 뭘 꼬치꼬치 캐묻고 돌아갔으며, 조이스 카울리 형사나 버드레스 등이 그(스콧)에게 씌워질 듯한 불리한 혐의(후반부에 나옵니다) 때문에 마음 아파할 때도, 스콧은 대번에 "매기와 헤어질 일"만 걱정하는 게 첫 반응입니다. 지금 살인자로 몰려 모든 걸 잃기(이미 중징계 정직 처분이 내려졌기에 잃은 게 많습니다만) 직전인데도 말입니다.

스콧이건 조이스 카울리(아무래도 고독한 젊은 남성 주인공에게는 이런 냉철하고 매력적인 여자 형사가 곁에 작품 구조상 배치되어야 합니다. 스테파니는 이미 작품 초반에 죽었으니...)이건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는, 대체 그 끔찍한 총기 습격 사건이 누구에 의해 저질러졌는지 진상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공교롭게도 그 사건이 벌어진 지척에서 어느 일당(LA에 흔한 마약 중독 불량배들로 짐작되지만)이 이 사건을 목격했을 가능성이 큰데, 무슨 까닭인지 결정적 증인이나 단서 구실을 할 만한 이들이 죽어갑니다. 그리고 스콧에게 그 누명까지 덧씌워지니, 이 장편은 1) 명견 매기와의 우정 2) 경찰 습격 사건의 진범 추적 3) 제3의 음모, 셋업 등 세 줄기 사연이 촘촘히 직조되는 모양새입니다. 로버트 크레이스의 작품들이 언제나 그렇듯 미스테리로서 높은 완성도 못지 않게, 식지 않은 가슴을 지닌 독자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반드시 깔려 있습니다. 스콧과 매기의 활약을 보며, 우리 독자들도 저 똑똑하고 예쁜 매기가 우리를 무슨 수상쩍인 국외자(suspect)가 아닌, "팩(무리. pack. 이 작품의 핵심 주제어 중 하나죠)"으로 봐 줬으면 하는 동감 동참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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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의 연구 - 일본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하여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박용민 옮김 / 헤이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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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인들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일본인이 과연 누구이며 그들 자신이 의식하는 약점이 무엇인지를 치밀히 파고들어간 "일본론"의 고전으로까지 정평이 난 필독서로 꼽히는 명저입니다. 마치 <국화와 칼>이나,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처럼, 혹은 한국의 이어령 선생이 쓴 화제작 <축소 지향의... >처럼, 예리하고도 흥미롭게 민족성의 감춰진 이면을 파헤치지만, 그 고전들과는 또 달리 일본인 스스로가 자신들의 인습과 기질에 대한 냉소적 반성을 드러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저자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이미 고인이 된 분이지만, 이 책은 마치 최근에 쓰이기라도 한 듯 현대적 풍취를 물씬 풍깁니다. 아니, 어쩌면 작금에 출판되는 흔한 시사물보다 훨씬 현대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한국인들(널리 이웃 여러 나라 포함)이 늘 아쉽게, 혹은 개탄스럽게 여기곤 하는, 완고하고 시대에 뒤처진 그들 자신의 바람직하지 못한 개성에 대해, 저자는 편협한 우익 세력을 전혀 의식 않는다는 듯 자유롭고 발랄한 비판을 퍼붓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 열거한 책들과는 조금 달리, 역자께서도 지적하지만 이 책은 저자의 독특한 인문적 상상이 발랄히 개진되었다는 점에서 돋보입니다. 위의 인문서들은 심각하면서도 본격적인 문화인류학적 시야가 책 전편을 관통하고 시야도 비교적 넓게 전개됩니다만, 이 책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크게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합니다.

1) 주제는 "일본 사회의 의사 결정에 있어, 왜 개인의 자유로운 비판은 그 입지가 좁아지고, 실체조차 모호한 '공기(空氣)' 따위가 좌우하는가?"라는 한정된 의문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2) 그뿐 아니라, 저자가 습득한 서양 고전어 지식이나 세계관의 적용이 매우 유머러스한데, 이는 오히려 프랑스 철학자들의 저서 중 일류의 것들에서 부분적으로 목격되는 스타일입니다. 특히 2)의 경우, 다름 아닌 일본인의 눈으로 바라본 치부와 후진적인 면모에 대한 자성론이라는 취지와 맞물려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저자의 여유와 품격 그 방증입니다.

이 책은 비교적 저술 당시의 일본 사회 분위기가 잘 드러나는, 시사적인 성격도 유지하는 편입니다. 예컨대 당시 일본 수상(내각총리대신)이었던 다나카 가쿠에이가 중국과 수교 실무 협상을 추진했을 때의 여러 에피소드라든가, 자동차 산업의 환경 오염 물질 규제 추진 등에 얽힌 잡음과 촌극 같은 게 예화로 인용되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어쩌면 반중(反中) 노선을 표방하는 듯하다가도 외교의 큰 기조를 유지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거나, 유독 미국에만 저자세로 일관하는 그들의 최근의 외교 기조가 노출하는 약점이, 이 책에서도 (시대의 배경과 구체적 예증만 바뀐 채) 그대로 비판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민족성이라는 게 그리 쉽게 바뀌는 체질이겠습니까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보면 이른바 대심문관의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둘째 이반이 막내 알료샤를 설득하기 위해 창작하는 엽편 포맷으로 등장하는 이 풍자화는 너무도 유명하죠. 이 책에서는 그를 의식한 듯 우스꽝스럽게도 대심문관과 "자동차"와의 가상 대화를 통해, 문제가 생겼다 하면 대상을 타물, 객체화하여 다수의 의견에 편승한 후 사정 없이 타매하는 일본 특유의 사회 분위기를 신랄히 비꼬고 있습니다. 그들 말로 "공기"라고 불리는 대세가 일단 어느 방향으로 정해지기만 하면, 종전에 내세우던 당위론이나 원칙, 도덕 따위는 일단 실종된 채 "이중 기준(double standard)"가 활개를 치며 폭주하는 행태입니다.

논리나 원칙보다 중요한 건 "임재감"입니다. 특히 이 책에서 독자의 웃음을 크게 유발하는 대목은 "현인신과 진화론"을 두고 저자가 해학적으로 풀어주는 일본 의식 구조의 치명적인 모순입니다. 사색을 중시하고 세계관의 논리적 정합성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라면, 예컨대 신이 삼라만상을 일거에 창조했다는 관점과, 인간이 원숭이와 조상을 같이한다는 진화론이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둘 중 하나는 조화로운 사유의 체계에서 반드시 도태되어야 하며, 이 때문에 미국에서도 이른바 "원숭이 재판"처럼 떠들썩한 소동과 갈등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 책은 "바이블 벨트가 미국을 장악했다" 같은 시사적 언급이 나와서 저 개인적으로 아주 잠시나마 그 배경이 1990년대인 줄 착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이 실제 쓰여진 1970년대와 차이가 있다면, 이 시절은 지미 카터 같은 (근본주의자이긴 하나 특이하게도 리버럴인) 인물이 부각되기도 하던 분위기였으나,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초라면 이른바 "네오콘"으로 불리던 초 강경 보수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대라는 정도겠습니다. 참고로 이 책의 저자는 1991년에 타계했습니다. 이 책에는 미국 속어 "펀디"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마치 우리말의 "빨갱이"를 미국인들이 "코미"라고 하듯, 근본주의자를 멸시하여 부르는 일종의 속어입니다.

아무튼 다시 초월적 세계관과 현세를 포섭하는 논리 사이의 조화 이슈로 돌아가서, 저자는 일본인이라면 "진화론"을 배우고 수용하는 데 아무런 심적 갈등이 없으리라는 (누구나 동의할 만한) 점을 우스꽝스럽게 지적합니다. 아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의 섭리를 옹호하는 사회에서도 "원숭이 이야기"가 연상하는 불경스러움을 그토록 타매하고 이단시했건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지상에서 인민을 다스리는 현인신"을 모시는 국가에서 대대적인 탄압과 검거 선풍이 일어나지 않는다니 어찌 기괴한 결과가 아니겠냐는 겁니다.

저자는 "이 모두가 그저 '공기'에 의해 사실 당부를 결정하고 마는 풍토"에서 그 답을 찾습니다. 허나 독자인 제가 생각하기로는 소위 현인신론이건 진화론이건 그 속에 담긴 논리와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지도 않은(못한) 채, 그저 주변에서 대세라고 믿는다 싶으면 마치 수천 년 전부터 의심 없는 진리로 숭배나 해 온 듯 생각 없이 추종하는 미개한 생리가 진짜 주범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세, "공기"가 그렇다는데 논리적 충돌이나 모순 따위가 다 뭐란 말입니까?

이는 한국이라고 조금도 다를 바 없어서, 소위 창조과학이란 수상쩍은 입장과 (이상하게 상업적으로 변질된) 진화론 진영에 가담하여 저질스러운 논쟁을 벌이는 자들이 기실 자신이 옹호한다고 떠드는 주의주장에 대해 손톱만큼의 소양도 갖추지 못하고 폭주하는 꼴 역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뭘 알아서 목청을 높이는 게 아니라, 자기 딴에는 그게 대세라고 여겨 열성으로 가담하면 (없던) 사회적 권력과 자존감이 절로 생긴다고 착각하는 천박하고 저능한 심리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저자는 "정말로 일본사회를 지배하는 건 일관된 원칙이 아니라 '임재감'이란 말을 책 곳곳에서 반복합니다. 대세가 그리 결정되었으면 앞뒤 안 돌보고 진행하는 맹목이 이미 주인으로 행세한다는 뜻입니다. 임재감이나 "공기"나 비슷한 뜻인데, 마치 "외국어를 모르면 자국어도 모르는 사람"이란 괴테의 명언을 실증이라도 하듯, 저자는 이 "공기"란 단어를 pneuma(헬라어), ruach(히브리어), air(영어) 등 다양한 외국어로 시범적 번역을 행합니다. atmosphere도 그 자리에 넣었으면 어땠을까 싶었는데, 일단 대세가 결정되면 사람들이 종전 자신의 소신과 입장까지도 까맣게 잊고 무슨 대단한 각성이나 한 듯 군중심리에 이끌린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생리와도 유사한 구석이 많습니다. 남경 대학살 등에서 드러난 잔혹한 행태도 이로써 설명되는 부분이 크겠죠.

저자가 예로 드는 역사적 에피소드 중 야마토 군함 사건이 있는데, 무모한 조치인 줄 뻔히 알면서도 돌격을 감행하여 무고한 사상자를 대량으로 발생시킨 개탄스러운 일이라면, 2차 대전 당시 무다구치 렌야 같은 어리석은 사령관이라든가, 이보다 훨씬 전 노기 마레스케가 러일전쟁에서 명령한 인해전술 같은 게 있겠습니다. 특히 후자 노기 대장 같은 사람은 그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에 무관하게 일본에서는 충성의 화신으로 평가 받는데, 이 역시 사리를 구체적으로 따지지 않고 "공기"에 따라 당부가 결정되는 일본 사회의 후진성을 잘 드러낸다 하겠습니다.

일단 공기가 결정되면 마치 <1984>의 전체주의 체제처럼, 명백한 과거도 의식적 조작과 왜곡에 의해 소급적으로 변경되는 기만적 작태가 횡행한다는 게 또 특이합니다. 저자는 일본 사회에서 어느날 공산주의 혁명(1970년대니까 이런 가정이 있을 법합니다)이 성공한다 해도, 공기가 그리 결정되면 사람들은 아무 갈등 없이 이를 대세로 수용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덴노" 역시, 아득한 예전부터 공산주의자였음이 분명하다며 정작 그 개인의 의사는 완전히 무시된 채 정체성이 재 규정될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일본 덴노 가문은 오랜 시간 동안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러 왔는데(그 가문뿐 아니라 전통 일본의 풍습이 그렇습니다만) 어느날 집정자에 의해 불교 의식이 하루아침에 금압된 후에는 가문의 의례조차 자기 재량으로 거행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거죠. 현인신은커녕, 공기가 한번 정해지면 과거사까지도 왜곡되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으며, 누가 과연 진정한 일본의 통치자인지 여실히 입증하는 통쾌한 지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역자분의 방대한 주석 역시 본문 못지 않게 풍성한 내용을 담았다는 게 또하나의 장점입니다. 역자가 인용한 참고 문헌들도, 저자 자신이 본문에 자신의 소양으로 녹아낸 만큼이나 범위가 방대한데, 한국의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의 한 아티클이라든가, 저명한 인문학자의 저서에까지 그 시선이 두루 미쳐서 독자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헤브라이즘이 마치 서유럽 사상의 한 줄기나 되는 양 저자는 본류에 포함시켜 논의를 전개한다고 하시는데, 이 저자뿐 아니라 어느 진지한 서유럽의 철학자, 문학가, 인문학자들도, "기독교"라는 필터를 통해 유럽에 스민 헤브라이즘을 헬레니즘과 함께 대등한 사상의 양대 기둥으로 인정합니다. 역자는 왜 일본인들이 자아상을 파악할 때 서양인의 거울만 의식하는지 불만을 토로하시지만, 자신과 선명히 대조되는 타인의 개성을 주된 논거로 삼는 태도나 방법론은 효과도 클 뿐 아니라 상식에 비추어 타당하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그들이 탈아입구 강박에 젖든 말든 그들의 자유이며, 이 책 같은 데서 초점을 두는 건 그들의 단점이지 (은근 남들이 독특한 개성으로 봐 줬으면 하는 미숙하고 유치한 심리가 끼든 말든) 장점이 아닙니다. 장점도 아닌 단점을 우리와 공유한다는데 하필 그럴 때만 저들이 이웃인 우리를 주시한다손 쳐도 또 그게 무슨 뿌듯한 체험이겠습니까?

Basileia tou Theou를 두고 저자 야마모토 씨는 "새로운 신적 체제"라고 옮깁니다. 책에는 라틴 문자(로마자)로 표기되었으나 원어는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인데, 소문자가 아니라 (정관사 등을 빼고) 단어들이 대문자로 시작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공기"라는 기괴한 신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이성과 논리와 건전한 토의, 소통에 의해 질서가 형성되는 인간적 사회의 건설을 지향해야 함은, 비단 일본뿐 아니라우리 모두가 유념해야 할 중대한 가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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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 그의 생애와 사역
F. F. 브루스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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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조직적인 교단으로서 기독교가 원활히 기능하는 데에 초석을 놓은 행정가였고, "서신"을 통해 교리 원형의 기반을 닦은 "신학자"였으며, 불 같은 정열로 지중해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닌 활동가였고, 마음에 티끌만큼도 신앙에의 동요가 없었던 성스러운 사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생전에 직접 조우한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 앞에 홀연히 나타나 눈 앞의 비늘을 떨구어 준 그 성스러운 체험을 잊지 못 해 모두와 함께 진리를 공유하기 위해 일생을 헌신했습니다. 이전 그의 행적을 보면 "믿음에의 길"과는 다분히 먼 경력을 구축했던 그였기에, 이런 갑작스러운 회심이 어떤 동기에서 비롯했는지, 그의 심원하고도 치밀한 논리를 갖춘 교리의 본체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논의와 연구의 대상으로 남습니다.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저자 F F 브루스 교수의 통찰과 연구가 참으로 원대하고도 심오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본인이 직접 남긴 저술의 양은 기독교 신약 성경 텍스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만큼이므로, 진지한 학자가 일생을 두고 연구해도 시간이 매우 부족합니다. 그런데 이 두꺼운 책에서는, 그 방대한 텍스트를 거의 모두 인용, 분석해 가며,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언급과 논술을 일일이 연결하거나 통합하여, "바울은 누구였고 무엇을 말했는지" 정연하고도 구체적인 하나의 체계를 완성합니다.

물론 신약은 신약만으로 고립된 맥락에 머물지 않고, 모든 구절이 구약과의 역동적 연계점을 마련하기에, 브루스 교수의 시야는 홀리 스크립트 66권 전반을 아우릅니다. 책 어느 페이지를 펼쳐 봐도, 거의 중복 없이 요소요소에서 새롭고 엄정한 논변과 성찰을 서술하며, 성경 구절의 구체적 전거에 의지하지 않는 대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절 매 장의 논지는 "사도 바울"로 귀결합니다. 신앙심의 깊이와 사색의 습관화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타고난 두뇌 자체가 명석해야 이런 책을 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잘 알려진 바처럼 벤야민 지파 소속입니다. 저자 브루스 교수도 여러 번 언급하듯, 바울은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에 대해 대단한 자긍심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I am a citizen of no mean city."라는 유명한 말에서도 드러나듯, 그는 타르수스의 가장 번영한 구역에서 나고 자라 충분한 교육을 받고 넉넉한 재산을 모았으며 사회적 평판도 훌륭한 편이었습니다.

벤야민 지파는 솔로몬 왕 사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질 때 유다 왕국 편에 섰고, 그 전이나 그 후나 대체로는 거대한 유다 지파와 우호적 관계였습니다. (원래의) 이름도 하필이면, 그들 겨레(12지파)가 세운 최초의 군주 사울인데, 사울 왕 역시 벤야민 지파였고 이 때문에 그들은 현실 정치에서 유다 지파에 뚜렷이 구분 안 되는 입장이었을 뿐이었는데도 여튼 역사적으로는 도드라진 표지를 지닌 이 "벤야민 소속"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어 왔습니다. 바울 역시 이런 종족의 분위기를 그대로 계승하는 인물이었던 듯합니다.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하는 자." 이는 무엇보다 바울 본인이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회고하며 규정한 표현입니다. 다메섹은 오늘날 통용되는 지명으로는 "다마스커스"가 더 익숙한 고도이자 수천 년에 걸쳐 정치적, 상업적 중심지로 번영해 온 고장입니다. 그전까지 기독교도들을 잡아들여 당국에 고발하고 기존 질서 유지(정통 유대교의 대제사장 등의 입장)에 열심히 기여해 온 바울은, 바로 이 다메섹에서 예수의 특명을 받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저자의 배경 설명을 보면, 특히 초기 기독교 교단에서 "헬라 파"에 속했던 이들은 유대 밖으로 내몰리게 되는데, 유대 지역 밖이라고 해서 산헤드린의 적의와 응징의 손아귀로부터 자유로운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제사장들의 눈밖에 나 검거되고 재판 받고 십자가형을 선고 받을 때, 빌라도 총독이 마지막까지 그에게 방면의 기회를 주려 드나 오히려 율법학자들이 거세게 반대하며, "그를 놓아주는 건 제국의 질서에 반역하는 행위"라며 오히려 총독을 협박하려 드는 장면이 있죠.


이처럼 형식상으로는 타 민족의 식민 통치에 굴종하는 모양새였으나, 그 실질을 따지고 보면 오히려 로마의 행정, 군사력을 갖고 놀며 종래의 기득권을 철옹성으로 만드는 게 바로 그들의 노회한 행태였습니다. 헬라파라고 해서 언제 국외에서의 "범죄자 송환"에 걸려 들어 처벌을 받을지 모르는 형편이었고, 바로 이 일을 바울이 앞장 서서 해 냈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줄리어스 시저가 이집트(역시 속국)에 보낸 서한에서는, "유대의 자치권을 최대한 존중하여, 행여 불순분자가 그곳에서 도피처를 마련하면 즉각 적발하여 이송하라"는 내용까지 다 있다고 합니다. 저자 브루스 교수의 박학다식함에 대해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됩니다.

근대 형법의 원칙 중 하나가 "성문형법주의"입니다. 명시적으로 국가의 형법전에 "죄"라고 규정되지 않으면, 범죄가 성립하지 않고 처벌도 불가하다는 뜻입니다. 라틴어로는 nulla poena sine lege라고 쓰는데, 브루스 교수는 이 언명을 신학에도 적용하여 심오한 논변을 전개하는군요. 인간은 율법의 수명 이전에도 얼마든지 죄를 짓고 타락한 생활을 자의적으로 벌였으나, 율법이 주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죄에 대한 분명한 의식과 그 대속행위가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헌데 바울, 혹은 바울을 그런 방향으로 해석하는 브루스 교수는, 오히려 죄를 엄벌하는 율법 규정이 있은 후부터 사람들을 죄로 "유인"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죄인에 대해 사형을 선고하는, 신의 뜻에 반하는 제도까지 자리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로마서 7장 9절을 인용하며 "계명에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는 텍스트에는 바로 이런 뜻이 함축되었다는 게 저자의 설명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의의를 전면 부정하는 건 당연히 아니며, 아무 자각이 없던 인간에게 죄가 무엇인지 의식하게 된 건 전적으로 율법의 공로라고 평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가 젊은 수도사였던 시절 어두운 숲 속에서 악천후와 뇌우를 만나 죽음에의 공포를 온몸으로 느끼고 신에 대한 각성을 선명히했다며 고백한 바 있습니다. 헌데 훨씬 전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의 청소년기를 회상하며, 율법이 무엇인지 죄의 본질이 어떠한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흔적을 서한에다 가감없이 털어놓습니다. 모든 신앙은 그 출발점이, "내 죄를 어떻게 씻어내며 용서받는가"의 깨달음과 회한에서 마련된다고 봅니다. 뻔뻔스럽게 죄를 짓고도 그저 형식적인 몸놀림, 입에 발린 거짓 뉘우침, 남 보란 듯이 벌이는 위선 따위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우리는 사도 바울의 행적으로부터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태생적으로, 세속의 폭압적 권력에 대한 고발자요 반항아였습니다. 그는 물론 서한 중에서 "지상의 권력에 대한 존중 의무"를 신도들에게 설교하기도 했으나, "불법의 사람" 등의 표현을 통해 민중의 양심을 억압하는 독재자에 대한 단호한 경계를 촉구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책 p255에서 언급하는 폭군 가이오는 우리가 흔히 칼리귤라라는 별명으로 알고 있는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입니다. 황제는 겸허한 마음으로 직분을 수행하여야 하며, 가이오(칼리굴라)처럼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자는 스스로를 망칠 뿐 아니라 세상의 질서까지 무너뜨릴 수 있음을 그는 지적했다고 저자는 평가를 내립니다.

칼리굴라의 뒤를 이은 사람이, 오늘날까지도 그 정체나 자질에 대해 논의가 설왕설래 중인 클라우디우스입니다.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베스트셀러 소설로도 잘 알려진 그는, 지혜를 감추고 세상을 속이며 은밀히 포부를 떨친 현자였는지, 아니면 그저 덜 떨어진 바보가 운이 좋아 치세를 유지했는지 여전히 베일에 가린 통치자이기도 하죠. 라틴어로 claudere는 "막다"라는 뜻인데, 오늘날 영단어에도 clandestine(비밀스러운) 같은 게 그 어원의 먼 후손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자는 대체로 부정하고 있지만 혹 사도 바울이 정말 "막는 사람, 압제자"라는 뜻으로 당대 황제의 이름을 비꼬았다면, 상당한 소양이나 언어적 재치를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혹은 claudicare라고 해서 "절뚝거리다"라는 동사를 그(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이름에 빗대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실제로 당대에 저 황제를 마뜩지 않게 보던 이들이 그의 신체적 특징을 조롱하며 입에 올렸던 바이기도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그끄제 올린 리뷰 중에서 크레타인 에피메니데스가  "크레타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했을 때 자기지시의 역설이 발생한다는 사항을 언급한 적 있습니다. 놀랍게도 사도 바울 역시 그의 서한 중에서 이 유명한 토픽을 거론합니다. 브루스 교수는 그의 풍부한 지식을 원용하며(교수 역시 20세기의 신학자이므로 괴델 이후 전개된 인접 학계[철학]의 아포리아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갖춘 분이죠), 바울이 자신 종족(히브리 중 벤야민 지파)이나 기독교(그가 막 완성해 가던 도중의 종교)의 신을, 스토아적인 범신론 관점에서 파악하는 걸 단호히 거부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신은 또한 어떤 형태를 갖출 수 없으며, 이로부터 헬라적인 우상 숭배와 단호히 절연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신과 인간 사이의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관계 회복은 회개, 죄사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재삼 분명히합니다.

신령한 은사는 여전히 현대의 신앙인들에게도 수수께끼의 영역으로 남습니다. 바울은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지적 소양과 상식을 갖춘 이였으나, 이른바 방언과 관련된 "생리적 현상"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었다고 저자는 단언합니다. 단 저자는 1861년 이래의 의학적 연구 성과를 기준으로, 브로카 부위의 제1대뇌반구 세번째 전뇌회의 자극을 통해 방언이 가능할 수 있음을 언급합니다(p297:10). 어디까지나 저자의 입장이고 견해입니다.

그리스도는 옛 창조의 머리뿐 아니라. 새로운 창조(신약과 새로운 계명)의 머리에서도 여전히 송영(頌榮)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교회는 몸이며, 그리스도는 그 교회의 머리"라고 한 바울의 표현은 이전 경전의 텍스트에서 찾아 보기 힘든 바울만의 독창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저자는 신중히 말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 곧 교회라는 생각은, 마치 기에르케의 유기체설이나 헤겔의 변증법적 통합을 연상케도 하는데, 저자는 영지주의나 스토이시즘, 심지어 유대교의 전례에서 영향 받았다기보다, 공동체 전체를 놓고 한 인격으로 취급하는 히브리 전통 사상의 먼 가지라고 정리합니다. 그리스도를 우주적 보편적 존재로 보고, 종족이나 지역의 협소한 범주에 가두지 않을 것을 단호히 천명한 바울의 태도를 보며, 우리 현대인들도 인류 공영과 평화의 실천에 대해 시사 받는 바가 클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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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
홍성담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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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 난장입니다. 세상에 어쩜 이리도 질서가 무너질 수 있으며, 선한 마음을 지닌 뭇 백성들이 도무지 감당을 못 할 만큼 불의(不義)한 만행이 일상처럼 벌어지다뇨. 죄악과 증오가 온 누리를 가득 채우는데, 누구 하나 나서서 정의를 외칠 마음도 먹지 않고, 참혹한 죽음이 사태를 이뤄도 책임 지는 자 하나 없습니다.

"세상이 이모냥으로 썩었는디 뭐하러 싸우는겨? 그냥, 좋은 것이 좋지 않다냐."

이 소설, 아니 대설(大說) 속에 나오는 목소리는 위악(僞惡)의 반어(反語)로, 위선과 횡령과 눈가림과 사술과 범죄와 살상에 둔감해져 버린 우리 비겁한 소시민들을 호되게 질타합니다. 마치, "양심도 정의감도 배알도 애저녁에 갖다버린 니네들, 밥음 뭐하러 먹고 X은 뭐하러 싸냐? 차곡차곡 썩은 양분을 뱃 속에나 젱여 둬!"라며 나무라는 것 같습니다.

왜 국민 앞에 약속한 바를 지키지 않고 떳떳지 못한 자리보전을 하러 드는가. 왜 무고한 어린 노동자의 건강과 생령과 땀을 모독하고 소수의 더러운 잇속만 싸고 도는가. 사십여 년 전 뜻있는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식언의 독재자더러 이제 그만 물러나고 민중 대동의 세상을 열자며 거리로 분연히 쏟아져 나왔습니다. 권력은 이에 대해 피 묻은 몽둥이, 살점 떨어지는 칠성판을 들이대며 화답했습니다. 이미 천도(天道)가 무너지고 인륜이 능욕당하는 세상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구타당하고 거짓 진술을 강요당했습니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눈가리고 아웅 식의 재판을 거쳐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내 나가기만 해 봐라. 고것과 세상에 다시 없을, 거한 정사를 나눌 터이니."

여기서 정사는 육욕과 배설에의 본능이라기보다, "생명"을 향한 몸부림입니다. 거대하고 때 묻고 눈 멀고 이성을 잃은 권력은, 정직하게 살아 숨 쉬며 쌕쌕 호흡을 고르는 맑은 동화 작용을 놓고, 그저 보기만 해도 화가 치밀어오른다는 듯, 총을 겨누고 칼로 저며냈습니다. "죽음, 죽음,.... " 오로지 죽음만이, 실성을 한 표독한 야수가 탐하는 바였습니다. 시인은, 화가는 말합니다. "내 허벌나게 그걸 뿜어댈 것이여!" 정사(情事)는 이제 생명과 부활과 정의와 심판을 위한 화려한 제의요, 둘만이서 벌이는 열락의 군무입니다.

그 시절로부터 사십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갑자기 어디선지 모르게, 무슨 곡절로 죽었는지도 몰라 구천과 이승 사이를 떠도는, 한맺힘은 고사하고 아직 자기 감정의 빛깔도 짐작 못 할 어리디어린 넋들이, 찾아옵니다.

"너희들 어디서 온 것이냐? 그 젖은 옷은 뭐다냐? 감기 들어."

이번에는 물 냄새가 납니다. 물은 물인데 냄새가 이상합니다. 누군가가 절로 좔좔 흘러야 할 물줄기를 콱 막아 놨습니다. 아니고서야 세상에 물처럼 이치에 순응하는 게 또 어디 있다고, 이처럼이나 불순하고 폐색된 기(氣)가 풀풀 묻어나올 리 없습니다. 거 참, 누군지 힘 한 번 좋고 마음 한 번 단단히 비틀렸습니다. 어디 몹쓸 짓을 할 데가 없어 물길에다 이런 장난질을 친답니까?

난장입니다. 참으로 난장판입니다.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아오르고 인력으로 막아내지도 못할 재앙이 사태처럼 몰아닥칠 때, 우리는 차라리 맞불을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이놈의 썩은 세상, 아예 밑둥부터 콱 뒤집어져서 못된 모리배놈들 도적놈들 씨를 말리는 수밖에 없다. 난장판의 도둑질, 난장판의 학살, 난장판의 부역(附逆)울 탈탈 태워 죽이려면, 우리 민초들도 난장의 한판 굿으로 대거리하는 수밖에 없겠다! 작고 미미한 개인의 사연인 소설을 떠나, 이제 온 민중이 거대한 역사의 바른 물줄기에 합류하는, 입을 모아 개벽을 외치는 대설이 폭발합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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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하고도 신들린 듯한 화자의 어조에 넋을 잃고 읽어내려간, 말 그대로의 대설이었습니다. 후기에 보면 저자 홍성담(물론 우리가 잘 아는 그 화가이십니다) 선생을 직접 만나뵌 소회가 살뜰히 정리되었는데요. 대한민국 민중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이신 줄만 알았는데 그렇게나 유장한 말솜씨에 웅대한 넋을 담은 분이라시네요. 어떤 사람이 손끝으로 화필을 놀려 그윽한 뜻을 전하는 재주도 하늘이 점지해야 가능한데, 마치 구약성경에 나오는 에언자처럼, 민중과 궁중 사이를 오가며 지혜의 변설을 즐기던 즉흥시인처럼, 말과 글의 재능 역시 출중하기란 참으로 드물게 보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환상적 리얼리즘"이란 다분히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언어도단이라는 느낌까지 드는 이 규정은, 그러나 도무지 눈 뜨고 볼 수 없는 극악무도한 현실에, 필사적으로 아름다움과 질서를 부여하려는 선한 민중의 희구를 여실히 담은 외침이고 실천입니다. 영화 <판의 미로>를 보시면 이 유파의 정신과 지향점이 어디인지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 주 전 열린 미국 영화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요 부문을 휩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시선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던 스페인 현대사를 언제나 주시합니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체제의 폭압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김지하 시인, 그의 정신을 예술로 실천으로 계승한 홍성담 화가(대설가), 우리 민중은 그들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 우리가 인간임을 재삼 자각하며, 행여 역사의 바른 물줄기가 엉뚱한 진로를 틀어 무고한 생명에 더 이상 해를 끼치지 않게, 고개를 곧추세우며 정의와 빛과 태양의 자취를 좇습니다.

난장(亂場) 속에 꽃 피는 희망과 정의와 사랑의 아득한 외침이 바로 이 책 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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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제션 - 그녀의 립스틱
사라 플래너리 머피 지음, 이지연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사자(死者)와 생전에 못다 이룬 소통을 이어가고 싶어하는 마음은,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에게 당연히 들게 마련입니다. 그 상대가 부모, 자식일 수도 있고, 연인 혹은 배우자일 수도 있으며, 평생의 지기 혹은 (뜻밖에도) 잠시 자신을 스쳐지나간 타인일 수도 있습니다. 미처 마치지 못한 감정의 청산, 그 폭과 깊이는 반드시 대면한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고 세상을 뜬 이에 대해, 미진한 어떤 감정의 잔여를 해소하려는 충동과 욕구, 바람을 계속 가진 다는 건 대개 어리석은 미련 이상으로 취급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또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사회적으로 공인되다시피한 의식(儀式)을 통해, 망자(亡者), 혹은 남아 있는 자의 한을 풀어 주려는 모습은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발견됩니다. 한국에서는 글쎄요 굿판이 그 기능을 어느 정도 수행하고, 서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망인보다는 유가족 등의 감정 해소, 승화에 보다 초점을 두더군요.

이 소설 첫 몇 페이지를 넘기며 제게 대뜸 생각났던 건 캐서린 제타존스와 가이 피어스 주연의 영화 <데스 디파잉 액트>입니다. 이 영화에는 "영매"를 직업으로 삼는 메리란 여인과 그 어린 딸이 나오는데, 능숙한 몸짓과 언변, 뛰어난 미모로 대중을 사로잡는 전문가이지만 그 실체는 사기꾼입니다. 사기꾼이 아닐 수 없는 게, 세상에 어떻게 그런 재주가 가능하겠습니까. <사랑과 영혼> 같은 유치한 상업 로맨스와는 달리, 이 영화는 초현실이나 영계와의 접속이 엄연히 불가능함을 전제로 삼은 후 대중에게 생의 더 깊숙하고 진득한 면을 보여 주게 하려는 보다 성숙한 연출과 주제의식이 돋보였죠.

그 영화에서는 두 가지 직업이 나오는데, 하나는 마술사고 다른 하나는 앞서 말했듯 영매입니다. 전자건 후자건 눈속임과 총체적 기만 행위에 기반하는 건 똑같으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사회와 대중은 이런 행위를 "직업"으로서 공인합니다. 뻔히 알면서도 돈까지 내어가며 속는 이런 무익한 세레모니를 용인하는 이유는, 그런 헛수고라도 걸쳐야 우리의 아픈 마음과 감정이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 속에서 영매 행위는 더 이상 사기가 아니고, "로터스"라는 모종의 약물 복용을 수단으로,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의 직업 노동자들이 "죽은 이의 혼"을 자기 몸에 모신다는 설정이 나옵니다. 물론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픽션 속 상황이지만, 유럽에서는 이처럼 죽은 자와 교감한다는 일종의 샤먼을 통해 신비한 영적 교감을 이루는 행위, 의식을 mediumistic channeling이라 하여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풍습의 일환으로 자리잡게 했습니다. 물론 터무니없다며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는 층이 절대 다수이지만 말입니다. 여기서는 레나드 여사라는 사업주가, "바디"라고 불리는 직원을 다수 고용하여 고객을 유료 접대하고 영업처럼 일을 이어갑니다.

눈치챌 수 있겠지만 이는 일종의 매춘에 대한 은유입니다. 소설 속에서 "바디"들은 몸이 훤히 비치는 "유니폼"을 입고 업무에 종사하며, 로터스를 복용하고 죽은 자의 영을 모시고는(이걸 이 한국어판에서는 "점유"라고 번역했습니다. 말 그대로 "빙의, 포제션"입니다) 고객과 소통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당연하지만 포제스된(possessed) 동안에는 내 몸은 물론 내 정신도 내 것이 아닙니다. 매춘까지는 아니라도 사람들은 때로, 돈을 지불한 고객에게 자연스럽지 못한 감정을 자아내어 가며 일에 몰입해야 하는데, 이를 두고 이른바 "감정 노동의 고초"라 규정하는 것도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입니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바디들의 고충", 채 1년을 못 버티고 직장("엘리시움 소사이어티")를 나와야 하는 풍속도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소설 중반 이후에는, 레나드 부인과의 고용 계약 조건을 어기고 아예 "2차(한국식 속어로 표현하자면 말입니다)"를 뛰는 바디들의 행태도 언급이 되니 말입니다.

바디들에 대한 사회적 처우도 열악한 편입니다. 어떤 고객은 대놓고 깔보는 투로 "당신이 받는 얼마 안 되는 급여 세 배를 지급하겠다"며 자신의 요구를 말합니다. 물론 나쁜 의도는 아니었으나, 그 무례한 매너 속에 이 직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충분히 반영된 겁니다. 레나드 부인은 동요하는 유리디스(=에디)에게 "영웅이 되어 보겠다며 경찰을 찾아가고 법정에 서 봐야, 당신 같은 계급의 증언을 누가 무게 있게 들어 줄 가능성도 높지 않다"고 합니다. "어떤 손님들은 정해진 바디만 계속 찾죠." 창녀에의 개념 환기가 어렵지 않게 이뤄지는 대목입니다.

책 표지에 "그 남자의 죽은 부인이 되어 사랑을...." 같은 문구가 있기 때문에, 혹 그 흔하고 흔한 "탤런티드 리플리 모티프" + "신분 상승 욕구에 눈이 먼 밑바닥 여성의 사기 결혼담" 정도로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는 않은데, 소설 속에 줄곧 서술되는 1인칭 주인공 에디의 심리나 행동이 그런 면을 연상도 시킵니다. 결론을 말하면 스포일링이라서 조심스럽습니다만, 에디는 흔히 보는 소셜 클라이머 형은 아닙니다(단언컨대요). 그러나 변호사 패트릭(잘생기고 돈 많다는 건 알았으나 구체적 직업은 p120에서야 처음 밝혀지더군요)의 죽은 부인 실비아의 빈 자리를 자꾸만 자신이 차지하려 들고, 패트릭의 회사에서는 물론 문제의 지인들 헨리 부부에게조차 자신을 "실비아"로 인식시키려는 거동에서, 우리는 이 아슬아슬한 주인공에게 어느 정도까지 신뢰를 줘야 할지 갈등하게 됩니다.

아니, 에디는 믿을 수 있는 영혼 맞습니다. 에디가 OO에게 협박까지 해 가며 로터스를 팔라고 했을 때, OO는 "이 바닥에서 이처럼 오래 버틴다는 자체가, 성실하고 도덕적인 인간성을 보여 준다고 여겼기에, 에디를 잃지 않기 위해" 처음에는 거절하고, 다음에는 OO까지 합니다. 무슨 직업이든, 한 자리를 오래 지키고 단골도 확보하며 고용주에게 깊은 신임을 얻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이런 그녀를 언니처럼 스승처럼 따르는 도라, 왠지 자꾸 의지하려 드는 리 등의 태도를 봐도 에디는 좋은 사람 맞습니다. 일종의 서술 트릭에 의해, 우리는 저 변호사 패트릭이 가공할 만한 이중 인격자, 요즘 특정 장르물에서 흔히 보는 싸이코패스가 아닌지 처음부터 의심하면서 책을 읽게 됩니다. p210에서 패트릭은 누가 죽은 아내를 불러낼까 걱정하는 대목까지 나오니 더하죠. 착한 여자가 악질 프레데터한테 걸려 몸 뺏기고 마음 망치고 마침내 살해되거나 하는 패턴을 너무 자주 봐 와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건 영리한 작가의 페이크 모션이었으니... (더 이상은 언급 않겠습니다)

(스포일러)
악당은 전혀 생각지도 않던 곳에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독자는 일견 멀쩡해 보였던 에디의 과거에 꽤나 지독한 무엇이 그녀를 "포제스"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 소설은 흔한 통속적 일반화로 주체성의 회복 따위를 메시지로 전달한다기보다(그런 범주에 안 들어갈 작품이 또 몇이나 되겠습니까?), 원치 않고 인정하기 싫은 자아를 애써 부인하며, 타인의 시선이 만든 외형, 내가 원하는(혹은 착각하는) 자아상, 그리고 가장 외면하고 싶은 자신의 약점 사이에서 고민, 방황하는 우리 모두의 발버둥을 하나의 우화로 포착한 것입니다.

에디는 욕실에서 거울을 보며, 혹은 수면 아래의 나신을 보며, 저건 다른 누구라고 해도 믿을 타인임을 느끼기도 하고, 형편없이 왜곡된 상을 보고 몸서리를 치기도 합니다. 주체성을 찾는 노력이 아니라, 너무나도 잘 아는 자신의 추함을 잊기 위해, 억지로 남의 탈 속으로까지 도피처를 찾는 몸부림입니다. "바디"는 무엇보다 나 아닌 남이 되는 직업이기에, 자신이 너무도 싫었던 에디는 이 직업을 천분으로 삼아 그토록 오래 수행할 수 있었던 거죠.

소설은 인간 본성의 이기적이고 기만적인 면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을 곳곳에서 보여 줍니다. p207에서 캄캄한 이목구비를 한 레나드 부인에 대한 묘사는, 사회에서 돈벌이와 권력 행사를 위한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성공한 중년들에게, "진짜 자아"란 일찍부터 휘발되었음을 풍자하는 대목입니다. "그 모든 게 다 연기"라며 애나는 진즉부터 레나드 부인의 실체를 에디에게 고발합니다. p226 애나가 에디에게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죽은 거에 가까운 상태로 내려오기"를 강요한다면 맹 비난하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 (스포일러 주의!) 에디는 고향을 떠나올 때 극심한 자기 혐오로 이미 "죽은 상태"였던 겁니다. (그러니 아무 영이나 그 몸에 내려앉고 점유하죠)

여기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캐릭터는 그 형사입니다. 사실 그는 일 때문만에 엘리시움 12호실에 온 게 아니라, 자신의 죽은 딸과 만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던 거죠. "사람들은 동정하는 척하면서 추한 호기심을 만족하려는 거에요."(p221). 형사는 에디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두번째 기회는 없을 수도 있다"며 경고하는데, 이미 그는 에디가 껍데기만 남은 "바디"였음을 형사 특유의 직감으로 알아차렸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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