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순례길이다 - 지친 영혼의 위로, 대성당에서 대성당까지
김희곤 지음 / 오브제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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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레네산맥을 넘어서면 스페인 론세스바예스의 산티아고 성당이 나타난다. 산티아고 대성당과 그 이름이 같다. 이는 산티아고 성당이 스페인의 실질적인 관문이라는 뜻이다. 산티아고 성당에서 팜플로나 대성당으로 이르는 길은 중세 나바라 왕국의 길이다. 피레네 산줄기가 들판에 낮게 내려앉는 곳에 팜플로나 대성당이 성벽을 두르고 서 있다. 중세 팜플로나 대성당은 수도원과 병원과 대학을 갖춘 복합 종교 단지였다.  p.59

사도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걸어가는 길을 스페인어로 '카미노 데 산티아고'라 부른다. '산티아고의 길'이라는 뜻이지만, 흔히 '산티아고 순례길'로 알려져 있다. 이곳이 세계인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20세기 후반으로 교황이 방문하고, EU가 유럽 문화유적으로 지정하고, 파울로 코엘료가 순례길을 체험하고 출간한 책이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전 세계 젊은이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길을 따라 세워진 중세 요새와 마을, 석조 건물과 성당들이 옛 자태를 뽐내며 그대로 남아 있기에 과거의 길을 걷는 느낌도 준다.

<스페인은 건축이다>, <스페인은 가우디다>에 이은 김희곤 작가의 "스페인 3부작의 완결판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간 많은 책들을 통해 국내에 소개돼 왔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여행 가이드북 내지는 여행 에세이의 성격을 가진 책들이었다. 그러나 산티아고 순례길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다. 그곳에는만 놓여 있지 않다. 그 길이 아름답다는 사실보다 그 길이 그곳에 놓여 있는 이유가 우리에겐 중요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대성당과 대성당, 중세인들의 영혼으로 구축된 건축과 건축을 연결하는 길이다. 이 책에는 마드리드 건축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스페인 건축 전문가 김희곤이 직접 걸으며 조망한 산티아고 순례길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가가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하며 정리한 글들과 직접 그린 건축 스케치들, 직접 찍은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중세 사람들은 사람이 더 이상 걸어갈 수 없는 대지의 끝을피스테라라고 불렀다. 중세 모든 대성당과 성당들은 하나같이 동쪽에 제단을 세우고서 피스테라가 있는 서쪽을 바라봤다. 해가 지는 대서양에 면한 피스테라는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암시했다. 육체의 발길이 멈추는 무시아와 피스테라는 신화의 세례를 받은 역사적인 건축물과 유적들이 산티아고의 발코니처럼 남아 있었다.    p.309

최근에 <스페인 하숙>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 촬영지는 순례길 막바지에 자리한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라는 마을이다. 출연자들은 그곳에 알베르게(저렴한 숙박 시설)를 차리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그곳에 들러 먹고, 자고, 따뜻한 응원을 받는다. tvN 〈스페인 하숙〉의 김대주 작가는길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천 년의 건축물들이 영혼을 위로하는 길은 오직 산티아고에만 있다고 말하며, “세상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박물관은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방송을 통해서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심이 생겼다면, 이 책을 통해서 조금 더 깊이있게 728킬로미터 산티아고 순례길의 대장정을 체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역사로 시작해서 순례길을 걸으며 만날 수 있는 눈부신 건축물들로 시선을 돌린다. 대성당과 대성당을 잇는 순례길을 스폐인 건축 전문가가 걷고 있으니, 보통의 여행객들이 바라보는 시선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산티아고 순례길에 놓인 하나하나의 중세 건축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생생한 컬러 사진들과 실제보다 더 진짜 같은 건축 스케치들이 모여 실제로 스페인에 가서 보고 느끼는 것처럼 체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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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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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오분쯤 후, 볼 때마다 늘 경이롭게 느껴지는 제네바의 호수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때까지 뒤적거리고 있던, 취리히에서 구입한 로잔의 지방신문을 옆으로 치우려는 순간, 어떤 기사를 보게 되었다. 1924년 여름에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베른의 등산안내인 요한네스 네겔리의 유골이 칠십이년 만에 오버아르 빙하에서 발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사자들은 이렇게 되돌아온다. 때로는 칠십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얼음에서 빠져나와, 반들반들해진 한줌의 뼛조각과 징이 박힌 신발 한켤레로 빙퇴석 끝에 누워 있는 것이다.   p.34

사람들은 다양한 제각각의 이유로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삶을 시작한다. 그러니 멀리 타국으로 떠나는 이민이 아니더라도 고향을 떠난 것으로 인한 상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기억하는 고향의 모습도 변하겠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욕망이나 갈망에 의해 기억하는 고향의 모습이 있을 것이고 말이다. 이 작품 속에서 제각각의 이민자들이 품고 있는 그것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상실의 세계, 고향과의 단절, 마음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 어디에도 없는 일종의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 등등.. 작가는 이름도 없이 파묻힌 역사의 개별자들의 이야기를 보편적인 우리의 이야기로 투영시켜 보여주고 있다.

생전에 단 네 권의 소설을 남겼지만제발디언(Sebaldian)’이라는 용어가 생길 만큼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추종자를 양산한 20세기 말 독일문학의 위대한 거장 W. G. 제발트의 대표작인 <토성의 고리> <이민자들>이 작가 탄생 75주년을 맞아 새로운 모습으로 출간되었다. 본문 전체를 원문과 다시 대조해 전반적으로 표현들을 다듬고 몇몇 오류를 바로잡아 번역의 엄밀성을 높였다. 또한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주를 보강하고 외국어 고유명사의 표기법도 새로이 손보았다. 특히 흐릿했던 사진들의 화질을 개선하고 크기와 배열도 독일어판 원서에 가깝게 실었다. 제발트의 작품은 오래 전에 <현기증. 감정들>만 읽었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제발트 읽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그 전날 오후 늦게 눈이 내리기 시작했으며, 호텔 창가에 서서 찬찬히 내려앉는 어스름 속에 하얗게 떠있는 도시를 보자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고도 적어놓았다. 그는 나중에 이런 글귀를 추가했다.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p.185

<이민자들>은 네 명의 이민자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네 편의 공통 화자로 등장하는 나(작가의 분신)는 예전에 영국에서 세 들어 산 집의 주인이던 헨리 쎌윈 박사, 독일 고향 마을의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파울 베라이터, 미국으로 이주해 은행가 가문의 집사로 지냈던 친척 할아버지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와 1960년대 후반 영국으로 이주했을 당시 알게 된, 독일 출신의 유대인 화가 막스 페르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들은 모두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에 고향을 떠나 외국에서의 삶을 살았다. 타인의 삶을 재구성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작가는 여러 사람의 증언을 녹취하고 자료를 조사하고 사진을 수집할 뿐만 아니라 직접 그 현장을 여행한다. 그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을 실제로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살았던 곳을 찾아가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제발트가 서술하는 이야기가 모두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 독특한 점이다. 팩트와 픽션을 절묘하게 결합한 그의 작품에서는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발트의 작품에서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면 아마도 텍스트와 동행하는 사진의 존재가 아닐까 싶다. 그의 작품들에는 항상 사진을 텍스트의 한 부분으로 활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빽빽한 텍스트 만큼이나 문장의 중간중간에 사진들이 꽤 많이 삽입되어 있다. 이 작품에도 실종된 지 칠십이년 만에 빙하에서 유골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이 실린 신문,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었던 파울 베라이터가 목숨을 끊었다는 철로, 이민을 떠난 친척들의 사진, 외삼촌의 첫 직장이었던 에덴 호텔, 외삼촌이 현관 옷장의 거울에 끼워놓고 간 명함, 티스메이드라고 부르는 차 만드는 기계 등 오래된 과거의 흑백사진들이 칠십 여장이나 수록되어 있다. 이 사진들은 소설의 내용이 대부분 사실임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작가가 사진에 적합한 허구적 내용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모두 사실이라고, 혹은 허구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제발트의 작품이 갖는 독특한 매력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사진과 사물, 타인의 기억과 자료를 통해서 기억을 만들고, 불러내는 마법이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랜 만에 다시 읽는 제발트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다음 에는 <토성의 고리>를 만나봐야겠다. 봄이라는 계절은, 제발트를 다시 시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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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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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이런 식으로 산을 즐기는구나."

기무라 씨가 진지하게 말했다.

"기무라 씨도 이제부터예요. 음식에 집중해도 좋고, 꽃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좋고, 등산 일기를 쓰는 것도 좋고. 그림이나 카메라, 즐길 수 있는 요소는 무한히 있어요. , 좋지요?"   p.124

미나토 가나에가 산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다고 하면 누구나 미스터리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누군가 다치고, 죽고, 속이고, 배신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녀가 달라졌다. 누가 다치기보다는 치유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은 국내에 꽤 많이 출간되어 있고, 나도 거의 대부분의 작품을 읽었기에 그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책은 그러한 편견을 완전히 깨버리는 작품이었다. 미나토 가나에와 힐링이라는 단어를 연결시킬 수 있다니 놀랍기 그지 없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이별의 슬픔, 사랑의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 떨칠 수 없는 열등감 등 다양한 고민을 안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오르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모처럼 특유의 독기를 뺀 채 평소 취미인 등산을 소재로아무도 죽지 않는 소설을 그려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일본 NHK TV에서 두 시즌에 걸쳐 드라마화되어 영상으로도 사랑 받았다고 하는데, 각각의 에피소드가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연작 형식이라 드라마로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산은 생각을 하기에 딱 좋다. 동행이 있어도 말없이 한 줄로 걷고 있으면 자기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때 마음속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자기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으면 인생도 자기 발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일상생활에서는 외면하던 문제와 똑바로 마주 봐야 할 듯한 느낌이 든다. 이 발로 정상에 도착하면 가슴속에도 빛이 비쳐드는 것 아닐까 하는 기대가 가는 길을 격려해준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과 마주 보면서 걷는 것이 등산이라 생각했다.   p.361

백화점에서 근무하는 리쓰코는 입사 동기 친구들과 함께 첫 등산을 가기로 한다. 등산을 계획하게 된 이유는 바로 아웃도어 행사에서 등산화에 한 눈에 반했기 때문이다. 모처럼 좋은 신발을 샀으니 산에 한번 올라가볼까 싶어서 시작한 등산이었던 거다. 하지만 당일에 친구 한 명이 컨디션을 이유로 불참하고, 다소 어색한 관계인 친구와 둘이 산 정상을 향하게 되는데.. 안 그래도 결혼을 앞두고 고민이 많은 리쓰코는 무사히 등산을 마칠 수 있을까. 그 외에도 단체 미팅에서 만난 수수한 분위기의 남성과 등산에 나서게 된 화려한 사십 대 여성의 이야기도 있고, 아버지 덕에 세 살부터 등산을 시작했지만 어째서인지 정상에는 한 번도 오르지 못했던 여성의 이야기, 독신에 변변찮은 번역 일을 하며 아버지의 농사를 돕고 있는 서른다섯 유미가 잘 나가는 의사 남편을 둔 잔소리꾼 언니와 등산을 가게 되는 이야기 등등.. 저마다의 고민과 사정이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바위투성이의 길을 다 올라가면 단숨에 시야가 탁 트이고, 배낭을 내려놓고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손이 닿을 것만 같다. 선명한 녹색 습원을 지나고, 낯선 식물들과 알록달록한 꽃들도 지나치며 크게 심호흡을 한다. 공기를 배 속 가득 들이쉬면, 스트레스와 불만과 짜증이 쌓인 시커먼 뱃속이 아주 조금은 깨끗해지는 느낌이 드는, 바로 그런 것이 등산이다. 페이지 가득 싱그러움과 맑음이 가득한 느낌이랄까. 산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상큼한 기운이 이야기 속에도 가득해 책을 읽는 내내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이라는 걸 모르고 읽었다면 전혀 그녀의 작품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녀의 작품이 너무 독하고 어두워서 힘들었던 이들에게도, 혹은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도 색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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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온 - 두뇌 스트레칭 감성 일러스트북
상하이 탱고 지음 / 오브제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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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생각이 많아 머리가 아프거나, 빡빡한 일상 속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싶을 때 나는 그림책을 본다. 언어가 아니라 그림으로만 스토리를 전달하는 그림책은 매우 단순하다. 그리고 그 단순함이 어른들에게 필요한 순간이 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단순해지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자. 그저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복해지는 일들을 망설임 없이 했었다. 그 선택으로 인해 오게 될 결과에 마음 쓰지 않고, 내 행동으로 인해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하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점점 사회화가 되면서 이런 저런 신경 쓸 일들이 늘어나고 보니 어떤 상황에서든 단순해진다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게 되고 만다. 바로 그렇게 단순함이 필요할 때 펼쳐야 하는 일러스트북을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등에서 '언어를 뛰어넘은 그림', '그 자체로 언어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종이책을 출간한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터 상하이 탱고의 일러스트북이다. 이 책은 그가 5년 넘게 ''을 주제로 '하루 한 점'씩 그린 1,600여 점 중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170여 점을 선별한 소장 가치 높은 컬렉션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그림 자체에 이야기와 메시지가 녹아 있어 굳이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는 데 있다. 색과 글자로 의미를 한정 짓지 않고, 단순한 검은 선으로 된 세련된 드로잉만으로 언어와 국경, 인종과 세대를 뛰어넘어 유머와 위트를 전달하고 있으니 말이다. 얼핏 보면 매우 단순해 보이는 드로잉들이지만, 창의력과 역발상을 바탕으로 피로와 타성에 굳어버린 뇌를 시원하게 식혀주는 소나기 같은 반전을 선사하고 있다.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직장인들에게도, 학교와 집만 오가며 쳇바퀴 돌듯 일상을 보내는 학생들에게도, 고단한 육아와 집안일에 지쳐있는 주부들에게도... 가끔은 그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 이 책의 부제가 '두뇌 스트레칭 감성 일러스트북'인데, 딱딱하게 굳어 있는 우리의 뇌를 새로운 생각과 번뜩이는 아이디어, 창의력으로 빛나는 상상들로 스트레칭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개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상하이 탱고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것들은 이상하거나 기괴하거나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원래 있던 것, 익숙한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을 살짝 비틀어 만들어내는 위트와 아이디어들인 것이다.

이 책은 창의적 발상을 필요로 하는 광고인들이나, 카피라이터, 마케터, 디자이너, 미술학도들에게 반전의 매력을 환기해줄 자기계발서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상하이 탱고가 광고 크리에이터로 일하던 장점을 발취해 그린 그림들이기 때문에 아이디어들이 정말 가득하다. 글이 전혀 없이 그림으로만 이야기하는 책이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보기에도 좋을 것 같고, 스트레스 가득한 어른들에게도 힐링의 시간을 줄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상하이 탱고의 그림들이 ''을 주제로 하고 있기에, 잠들어 있는 머리를 꿈꾸게 하는 것 같다. 예측 불가능한 상상력의 세계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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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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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이 불우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응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사람들이 응원은 해도 자기 손을 내밀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나오키가 잘살기를 바라긴 하지만 관계를 맺고 싶진 않은 것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도와주면 좋을 텐데. 이게 그들의 진심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수염 난 에스닉 요리점 점장한테 가진 고마움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p.200

츠요시와 나오키는 서로에게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었다. 아버지는 형제가 어린 시절 사고로 돌아가셨고, 어머니 혼자 파트타임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며 그들을 키웠지만 어머니마저 과로로 돌아가셨다. 형인 츠요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시작했다. 어머니 역할을 대신해 동생을 먹여 살리고, 대학까지 보내는 것을 자신의 의무처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허리와 무릎이 좋지 않아 두 달 전에 이삿짐센터 일을 그만두게 되고 보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는 동생이 대학 진학을 거의 포기하고 몰래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나오키가 걱정 없이 대학에 진학할 마음을 먹게 할 돈이 필요했다. 물론 가난하다고 해서 남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오래 전 이사 일을 해주었던 혼자 사는 부유한 할머니네 집에 도둑질을 하러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들키는 바람에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곧 체포되고 만다.

이제 나오키는 홀로 살아가야 했다. 대학은 당연히 포기하고,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보려고 하지만 만만치가 않다. 이유는 어딜 가나 따라다니는 형이 살인강도범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츠요시에게 편지가 온 것은 졸업식을 이틀 앞두고,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편지지와 봉투 구석에 벚꽃 모양을 한 파란 검열 도장이 조그맣게 찍혀 있는 그 편지는 이후 계속 그의 발목을 잡게 된다. 그가 답장을 하지 않아도, 이사를 가도 어김없이 낙인처럼 벚꽃 도장이 찍힌 편지가 배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형에 대한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학교에서는 그가 학업을 중단하고 떠나주길 바라고, 아르바이트 점장은 그의 존재를 불편해하며, 음악에 걸었던 청춘의 꿈은 사라지고,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는 그를 내친다. 물론 그 편지에는 자신의 과오에 대한 뉘우침과 피해자에 대한 속죄, 나오키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나오키는 자신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버렸는지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차별은 당연한 거야.” 히라노 사장이 조용히 말했다.

나오키는 눈을 크게 떴다. 차별은 나쁘다는 이야기를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요?”

사장이 말했다. “당연하지. 사람들은 대부분 범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 하네. 사소한 관계 때문에 이상한 일에 말려들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따라서 범죄자나 범죄자에 가까운 사람을 배척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행윌세. 자기방어 본능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럼 저처럼 가족 중에 범죄자가 있는 놈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p.360

240만 독자들의 찬사를 받으면서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다. 국내에서 출간된 지 약 10년 만에 리커버 에디션으로 출간되었다. 일본에서는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두 번의 뮤지컬화, 연극화가 되었으며 최근에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랑을 받았다. 범죄자 가족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로, 미스터리나 범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 아니라 범죄가 벌어진 후 남겨진 이들의 삶에 주목하고 있다. 과연 살인자의 가족이 사회에서 차별을 받는 것이 편견인지 당연한 일인지, 범죄를 저지른 자의 속죄는 언제까지, 어디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극중 나오키가 근무하던 회사에서 형에 대한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었을 때, 사장이 그에게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차별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법에 따라 합당한 기준에 맞게 처벌을 받지만, 그 일로 인해 남겨진 가족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할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그러니 지금 나오키가 겪고 있는 고난까지도 형인 츠요시가 저지른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말이었다.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자신이 죄를 지으면 가족도 고통을 받게 된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은 범죄자의 가족 또한 피해자니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도덕적으로는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쓰며 대하다 보니 역차별이 될 수도 있고, 그렇게 차별이건 역차별이건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신경을 쓰는 일이 생기면 회사로서는 부당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처우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장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남겨진 나오키는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일까.

 

죄를 지어 끊임없이 편지로 속죄하는 살인자, 죄는 없지만 끊임없는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는 살인자의 동생과 그런 동생을 불편해하는 사람들. 사실 그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줄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가해자의 가족 입장에서 담담하게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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