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에번 핸슨
밸 에미치 외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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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 뼈에 사무쳐서 눈물이 나려고 한다. 나에게는 아무도 없다. 안타깝게도 그건 상상이 아니다. 가공을 거치지 않은 100퍼센트 천연 유기농 현실이다. 셔먼 선생님이 있지만 선생님은 시간제로 돈을 받는다. 아버지가 있지만 나한테 눈곱만큼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이 나라의 반대편으로 이사 가지 않았을 거다. 엄마가 있지만 오늘 저녁에는, 어제 저녁에도, 그 전날 저녁에도 부재중이다. 농담이 아니라 곰곰이 따져보면 누가 있을까?

내 앞의 컴퓨터 화면 위에는 이름 하나뿐이다. 에번 핸슨. 나다. 나에게는 그것뿐이다.   p.40

 

뮤지컬 팬들에게는 이미 어느 정도 알려져 있겠지만,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표를 구하기 힘든 작품 중 하나는 바로 <디어 에반 한센(Dear Evan Hansen)>이다.

2017년 브로드웨이 최고의 화제작으로 제71회 토니상 9개 부문 노미네이트, 최고의 뮤지컬상을 포함 6개 부문 수상했고, 2018 그래미 어워드에서도 수상했다. 라라랜드와 위대한 쇼맨의 작사/작곡가로 잘 알려진 Benj Pasek Justin Paul이 작사와 작곡을, 뮤지컬 <렌트> <넥스트 투 노멀>의 연출을 맡았던 Michael Greif이 연출로 참여한 뮤지컬이다. 사회 불안 장애를 앓는 학생이 스스로에게 쓴 편지로 인해 친구가 자살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나는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보다 책이나 소설을 훨씬 더 잘 이해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킥젝 선생님의 비평적인 분석 전략을 방금 전에 목격한 실제 행동에 아무 문제없이 적용할 수 있다. 우리의 아름답고 지당하신 여주인공 조이 머피가 점심을 쓰레기통에 버린 건 화자에 대한 평가를 상징하는 행동이다. 조이 머피의 눈에 에번 핸슨은 쓰레기인 것이다.   p.145

 

고등학생인 에번 핸슨은 사회불안장애를 겪고 있다. 주기적으로 심리 치료를 받고 있으며, 항우울제를 먹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그에겐 너무도 어렵기만 하다.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아빠는 꽤 먼 곳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셨으며, 엄마는 병원 일과 수업 때문에 너무 바빠서 집에 거의 없다. 심리 치료사는 에번 핸슨에게 '나에게 쓰는 편지'라는 숙제를 내주었었다. 새 학기 첫날도 어깂 없이 투명인간처럼 보내고, 혼자 컴퓨터실에서 숙제인 편지를 쓰고 있는데, 학교의 문제아 코너가 나타나 그 편지를 가로채버린다. 편지를 돌려받지 못해 불안한 에번은 코너가 자신의 편지를 사람들에게 유포해서 웃음거리가 되어버릴 최악의 상황을 상상한다. 하지만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고, 어떠한 폭탄도 터지지 않은 채 하루, 이틀이 지나간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전해지는 코너의 자살 소식, 게다가 코너의 가족들은 그의 옷에서 발견된 에번의 편지를 유서로 오해하게 된다. 에번 핸슨에게,로 시작해서 너의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한 친구인 내가,로 끝나는 그 편지를 코너가 에번에게 쓴 편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졸지에 에번은 코너의 절친이 되어 버리고, 작은 오해로 시작된 그 일은 점점 눈덩이처럼 커지게 된다.

 

가족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에번은 자신이 코너의 비밀친구였다는 거짓말을 시작하게 되는데, 거짓말은 거듭될 수록 점점 몸집이 불어나 상황은 점점 더 제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외로움으로 사무치던 한 사람이,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유쾌하고, 따뜻하고, 뭉클하게 펼쳐진다. 사회불안장애를 겪는 한 아이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일에 휘말려 조금씩 사회성을 갖게 되는 과정을 통해 어느 누구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또다시 기본값으로 설정된 반응을 보인다. 장난치는 거겠지. 내 앞에서 까부는 거겠지. 하지만 나의 직감은 아니라고 한다. 그가 한 얘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 사건은 벌어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얘기에 담긴 정신과 그의 전달 방식은 묘하게도 진짜처럼 느껴졌다. 그가 진심을 담아서 하는 얘기 같았다.   p.233

 

사실 뮤지컬 <디어 에반 한센(Dear Evan Hansen)>이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음악 때문이었다. 뮤지컬 넘버들이 굉장히 현대적이면서도 대중적이라, 한번 들으면 그 멜로디가 계속 귀에 남는다. 라라랜드와 위대한 쇼맨의 곡을 만들었던 작가, 작곡가의 음악이라 더욱 매력적이고, 가사들이 모두 희망적이고, 힘을 주는 메세지를 안고 있어 듣고 있으면 정말 심장이 쿵쿵 뛰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 작품은 곧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인데, 뮤지컬 넘버들이 너무 좋아서 제2 <라라랜드>가 되지 않을까 기대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에 뮤지컬을 원작으로 하는 소설이 나올 예정이라 가제본으로 미리 만나보게 되었는데, 너무도 뭉클하고, 따뜻하고,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음악으로만 들었던 내용을 소설을 통해서 깊이 있게 알게 되니, 책을 읽고 나서 다시 듣는 뮤지컬 넘버들의 감동은 그야말로 두 배가 되었다.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핫한 뮤지컬이라 언젠가는 국내에서도 공연이 될 것 같은데, 그 전에 소설과 영화로 먼저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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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태어났으니 산다 - 열심히 살기는 귀찮지만 잘 살고는 싶은 나를 향한 위로의 한마디
해다홍 지음 / 놀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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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가 소중하고 사랑 받을 만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존재가 굳이 소중해질 필욘 없다. 그냥 내가 나로서 살아 있어도 충분한 환경이었으면 좋겠다는 것, 그게 전부다. '장점 찾으면 좋은 거지, 좋게 생각해' 따위의 말은 지겹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할까? 큰돈을 벌지 않아도, 인형처럼 생기지 않아도, 모든 분야에 다재 다능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나대로 존재하고 있는데.    p.17

일단 태어났으니 산다? 열심히 살기는 귀찮다? 뭐 이런 무기력한 제목이 다 있나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그럴 때 있지 않나. 충전해도 방전되는 배터리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쉽게 지쳐버리고, 일상이 무기력해지는 그런 경험 말이다. 뭐든 잘해야 한다는 강박과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압박을 잠시 잊고 싶은 순간, 당신은 좀 대충대충 살 필요가 있다.

네이버 블로그 방문자 약 12만 명, 페이스북 페이지 구독자 약 5천 명 그리고 수백 명의 독자들이 선택한 독립출판물까지, 연일 화제를 일으키며 대중의 진심 어린 지지를 받은 해다홍 작가의 이야기가 새 옷을 입고 출간되었다. 이 책은 일과를 끝내고 집에 들어가는 길엔 얼른 들어가서 누울 생각에 설레고,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그래도 '일단 태어났으니 살고 있는'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웃픈' 마음을 위로해 준다. 열심히 살기는 귀찮지만 잘 살고는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세상엔 노력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보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사실 더 많다... 열심히 하면 다 되는 시대는 지나 간지 오래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그래도 우리는 자신을 방어하며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최선을 다했던 많은 사람이 노력이 부족했다는 식의 자책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다. 자책하며 땅굴 파고 싶을 땐 그냥 남 탓, 세상 탓을 해서라도 스스로를 지키기를.   p.73

어른이 되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고, 상처를 받더라도 감정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어른이라고 별 수 없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쿨한 척 돌아서지만 해묵은 감정들을 한쪽에 쌓아두거나, 아무한테도 말 못하고 혼자 끙끙대거나, 결국 스트레스로 고스란히 쌓이게 된다.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왜 그렇게까지 애써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마음도 함께 비집고 나오게 마련이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고,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얼른 퇴근하고 싶고, 사소한 것에 쉽게 싫증 나고, 사소한 것에 쉽게 동요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평범한 모습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런 책이 필요하다. 일상의 무게에 지쳐 아무것도 되지 않을 자유를 원하지만, 막상 아무것도 아닌 나를 받아들일 자신은 없는 '요즘 것들의 감성'을 제대로 저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말한다. 요즘 가장 부러운 건 절박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왜냐하면 그럼 자신의 구차한 모습 따위는 안 봐도 되니까. 품위를 잃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고, 생각보다 구차하고, 처량하다. 그래서인지 이 책 속 이야기들이 모두 부정적이고, 우울한 내용들이지만 만화를 읽으면서 그렇게 어둡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누구나의 속마음이 그러하지 않을까. 매사에 불평이 많다고 해서 삶에 대한 애착까지 없는 건 아니니 말이다.

소심하지만 너무도 유쾌한, 귀여운 투덜거림들이 공감이 되고, 위로가 될 것 같다. 편안하고 친근한 그림체로 가끔은 익살스럽게 또 가끔은 진지하게 풀어내는 일상의 소소한 고민들이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때로는 버겁고 비뚤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의 일상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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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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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에 독이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나의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칠지 모른다고 짐짓 독기를 담아 위협한다. 벗이 한숨을 쉬며 대꾸한다.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와 나마저 가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자라 모래알이 될 터인데, 허무하고 허무한데, 독은 차서 무엇 하느냐?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하고 허무하다.   p.13

오랜만에 정말 '지독한' 작품을 만났다. 오백 페이지가 넘는 빽빽한 단어들은 시종일관 ''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책을 읽는 시간도 힘겹거니와,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나 조차도 어떠한 형태의 독에 잠식되는 듯한 기분이다. 리트머스 종이에 살짝 닿아도 순식간에 전체 색깔을 바꿔 버리는 그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이 작품은 독자들을 서서히 물들인다. 독과 약, 선과 악, 성과 속,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 속으로. 그리하여 ''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를 눈앞에 펼쳐 보인다.

기본적인 서사는 한 남자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독을 몸에 지니고 있던 그는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그 독을 더욱 키우고, 그 독을 약으로 사용하고, 그러다가 독과 약을 동시에 품고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또한 이 작품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독과 약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극중 몽구는 말한다. 일상적인 삶이라는 건 너절하기 때문에, 삶이라는 음식에 죽음이라는 소스가 살짝 뿌려지는 거야말로 정말 근사한 거라고. 그래서 비소 먹고 죽은 고기를 먹고, 복어 회에 복어 독을 조금 떨어트려 혀에 톡 쏘는 맛을 느끼는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분명 판타지가 아닌 현실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비일상적인 분위기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고 있다. 서사가 뚜렷한 이야기들만 읽다가 이렇게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글을 읽으려니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게 천천히, 꼭꼭 씹으면서 읽어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독이 아닌 게 없거든. 살아남으려면 자기만의 독을 가지고서 세상과 싸워야 해. 하지만 ''에 대항해서 우리를 지키게 하는 ''도 얼마든지 있어. 독이 약이 되고 약이 독이 되는 거야. 너는 늘 두통에 시달리느라 거기에 신경이 집중 되어 있지.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한 순간도 멍하니 보내는 일이 없이 항상 깨어 있는 거야. 네 두통은 너를 마비시키지 않고 각성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는 독이자 약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이 세상 모든 것은 사랑을 만나면 약이 되고 원한을 만나면 독이 돼.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우리의 하루하루는 독과 약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이지.    p.198~199

지난 해 겨울, 화자인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구급차에 실려 한 종합병원으로 옮겨진다. 그곳 응급실에서 위세척을 받고 하제와 해열제를 투여 받은 후 집중 치료실에 수용되었다. 담당 의사에 따르면, 위에서 보툴리누스 균과 프토마인 균이 검출되었으며, 그 균들로부터 방출된 독소가 몸에 흡수되면서 혈액을 통해 장기를 공격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몸 전체가 독성 물질에 감염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는 한동안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혼몽한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다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입원한 지 며칠 만에 처음으로 상체를 약간 일으켜 같은 병실 안에서 한 남자, 조몽구를 발견하게 된다. 그 남자는 낮은 어조로 뭔가를 쉬지 않고 읊조리고 있었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웅얼거리는 그 소리는, 저주 같기도 하고 주문 같기도 했다.

조몽구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한 체질이었고,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 강한 독성 물질로 작용하는 것처럼 알레르기와 습진 등 잦은 병치레를 했다. 그리고 또한 원인 모를 두통에 시달렸는데, 그로 인해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폐소공포증처럼 문이 잠겨 있는 공간에선 패닉 상태가 되었으며, 두통을 어쩌지 못해 쩔쩔 매며 불안정한 성장기를 보낸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게 되고, 독의 세계에 심취되어 몰두하고 있는 환경운동가이자 행위 예술가인 삼촌과 함께 살아가게 되는데, 그로 인해서 두통이 발생한 원인이 아니라 두통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독에 맞서 싸우는 대신 독과 더불어 살아가게 될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게 된다. 소설은 조몽구의 자전적 진술을 서술자인 ''가 전하는 형태로 진행되는데, '독으로 시작되어 독으로 끝나는 소설'이라는 작품 해설의 문구처럼 시종일관 자기 안의 독과 세계의 독에 대해서 한 남자의 외로운 고군분투기를 그리고 있다.

 

최수철 작가는 10여 년 전부터 ''에 대한 작품을 구상해왔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래서 이 소설은 오랜 시간 사유의 결과물이자 실험적인 작가 정신의 결정체처럼 보인다. 하지만 평범한 독자 입장에서 읽기에는 상당히 버거운 시간이었다. 극중 인물의 표현대로 해보자면 '페이지마다 독이 묻어 있어 책장을 모두 넘기고 나면 그로 인해 중독되고 탈진하게 될 지도 모르는' 그런 작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 속의 독에 취할 자신이 있다면, 끝까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비로소 작가가 전하려는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독의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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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 배틀왕 미스터리 과학 도감 2
아마나 / 네이처 & 사이언스 엮음 / 서울문화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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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과학 도감 그 두 번째 이야기는 수중 생물이다. 단순히 수중 생물들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 배틀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되는 시리즈라 더욱 흥미진진하다. 이 책은 연안 생물, 바다 생물, 극지방 생물, 심해 생물, .호수 생물 등 다양한 수중 생물들을 서식지 별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바위가 많은 바닷가에 살고 있는 생물들은 몸을 숨길 곳이 많아 매우 다양한 종류가 살고 있다고 한다. 날카로운 가시투성이의 가시복, 강력한 독을 지닌 불가사리인 별불가사리, 커다란 집게발로 탕탕 큰소리와 파동을 만들어 내는 딱총새우, 독을 지닌 바다의 달팽이 군소 등이 있다. 먼저 대표 선수들의 랭킹과 주요 능력 등을 보여주고 수중 생존 전략과 방어 자세, 번식 방법 등을 알려 준다. 그리고 나면 가상의 배틀이 만화로 그려져 있는데, 첫 번째 배틀은 가시복과 샌드타이거상어의 대결이다. 상어의 뾰족한 이빨이 부풀어 오른 가시복을 뚫을 수 있을지 흥미롭게 대결이 펼쳐진다.

수중 생물들의 사냥 방법, 번식 방법, 천적, 공생 관계 등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생한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어 과학 도감으로서도 아이들이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바닥이 얕은 바다인 연안에 사는 희귀한 생물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난바다에 살고 있는 공포의 생물들, 남극과 북극을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인 극지방의 위험한 생물들, 수심이 200미터 이상 되는 심해에서 생활하는 신비한 생물들, 염분이 거의 없는 담수로 이루어진 강, 호수, 연못에 사는 오싹한 생물들까지 독특한 수중 생물들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다.

만화로 표현된 수중 배틀 과정은 매우 세밀하고 역동적인 일러스트로 그려져 있어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듯한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 한참 동물과 수중 생물, 곤충 등에 빠져 있는 아이들이 피규어를 가지고 놀 때도 항상 싸우고, 대결을 벌이곤 하기 때문에 이 또래 아이들이 읽기에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 외에도 아기자기한 테마들이 많았는데, 대표 선수로 선정된 수중 생물 외에 비슷한 종류의 생물들이 소개되어 있는 페이지도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 같다. 가시복의 친구들로는 적의 입보다 몸을 크게 해서 잡아 먹히지 않도록 방어하는 뿔복, 복섬, 흰점꺼끌복, 거북복 등이 소개되어 있다. 날아다니는 물고기인 날치의 친구들로는 몸이 매우 가늘고 긴 동갈치, 학꽁치, 꽁치아재비 등이 있다. 날카로운 이빨의 포식자인 향유고래의 친구들로는 잠수 실력이 뛰어나 깊은 바다에서 먹이를 잡아먹는 민부리고래, 황제펭귄, 에델바다표범이 있다고 한다.

다양한 동식물, 생물들을 다루고 있는 과학 도서들이 많이 있겠지만, 이렇게 마치 게임처럼 즐길 수 있는 시리즈라면 아이들이 더욱 흥미를 잃지 않고 집중하지 않을까 싶다. 생생한 사진을 통해 다양한 수중 생물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태적인 특징과 수중 생존 전략 등을 배우고, 그들 가운데 순위를 매기고 배틀을 시키는 등 재미있는 요소들이 너무 많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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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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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 이야기를 털어놓자 이런 일들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자주 다른 가정에서도 벌어지는 평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 모든 글은 가장 극적인 것을 포함한 어떤 행위도 정상적인 것처럼 만들어버리나 보다. 하지만 애인에게 털어놓은 것을 제외하면, 이 장면은 여전히 언어도 영상도 없는 듯한 이미지로 가슴속에 간직되었기 때문에, 이를 묘사하려고 사용한 단어들이 낯설고 무례하기까지 느껴진다. 이것은 남들을 위한 하나의 장면이 되었다.   p.26~27

'6월의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는 강렬한 문구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서사를 담고 있다. 그녀가 열두 살 이던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바탕 말다툼을 벌이셨고, 이내 어머니의 비명과 울음소리와 함께 목격한 것은 아버지가 어머니의 목덜미를 틀어쥐고 낫을 들고 있던 모습이었다. 그 장면에서 그녀가 느낀 것은 두려움과 슬픔이 아닌 '부끄러움' 이었다. 물론 그날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그 사건은 그저 '나쁜 꿈'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고, 비극은 다시 되풀이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녀는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비극의 장면을 도처에서 본다.

 

부모가 아이를 앞에 두고 다투는 것은 어느 가정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겠다며 소리를 지르고, 목을 조르고 때리는 장면을 바라보는 열두 살 소녀의 모습은 어쩐지 쉽게 와 닿지 않는다. 더 이상한 것은 아버지가 평상시에 폭력을 휘두르던 가장도 아니었고,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처럼 그녀의 부모들 역시 그날 일을 전부 잊기로 결정한 듯 행동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에르노는 열두 살의 어느 일요일 정오를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들을 마치 일기처럼 글로 써낸다. 그럼에도 감정적이지 않고 매우 건조하게, 마치 남의 일기를 두고 분석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냉혹하고 담백하게 쓰고 있다. 내 부모가 부끄럽고, 내 가난이 부끄럽고, 아무리 노력해도 품위 있고 우아한 생활이란 내 가족들에게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건조한 문장들 속에서 아프게 읽힌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또한 6월 일요일의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    p.137

누구에게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 혹은 규정해버린 어느 순간, 어떤 기억이 있지 않을까. 그것이 차마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어떤 것이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에르노는 그러한 부끄러움을 글로 옮기면서 말한다. ', 모든 글은 가장 극적인 것을 포함한 어떤 행위도 정상적인 것처럼 만들어버리나 보다' 라고. 누군가에게 털어놓거나, 그것을 글로 쏟아 내면서 불가능하고, 끔찍했던 장면도 생각보다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평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에르노는 기억과 그것을 표현해내는 글이라는 수단과 그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찾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담담하게 응시하고 있다. 부끄러움이란 달리 말하면 불편함일 것이다. 숨기고 싶은 것을 드러내야 하는 데서 오는 수치스러움과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기억을 끄집어내는 데서 오는 고독과 슬픔 또한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 책은 부끄러움에 대한 작가의 내밀한 고백이다. 교육받지 못한 부모, 가난한 집, 부끄러움은 자신에게 너무나 당연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그날 이후 부끄러움은 자신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고 말이다. 철저하게 객관적인 회상을 통해서 에르노는 자전적 글쓰기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이 작품을 발표했다. “타인의 시선을 견딜 수 없는 책. 나는 그런 책을 쓰고 싶었다.”고 말하는, 가장아니 에르노다운 글쓰기를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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