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이 블레이크에게 큰 위안을 주지는 않았을 것같다. "아! 그는 비주류 출신이니 이해해 줘."가 당사자에게 좋게 들릴 수 있는 경우를 상상하기는 힘드니까. 그렇지만 블레이크 자신의 말 "속한 적이 없으니 배신이 아니다." 역시 수치스럽게도 그와 정확하게 같은 말이었다. 그건 설명이라기보다는 ‘양해의 말씀‘에 가까웠다. 확신범이라면 딱히 하지 않아도 될 얘기였다. - P259
오늘날 필비나 버제스 같은 5인조의 인물들은 영화나 다큐멘터리의 인기 있는 소재가 되었다. 그 인기는 아버지 세대에 반항하는 록스타에 대한 선호와 비슷한 점이 있다. - P259
이들(필비와 버제스)이 개인으로서 비정치적인 매력을 획득한 것, 블레이크는 그렇지 못한 것, 그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일까. 필비와 버제스는 자신을 배신자라고 인정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도 않았고 정당화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래서 그들은 좋게든 나쁘게든 개인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었나 보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 배신자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어느 보호막 뒤에 서 있기를 선택한 인생에게는 그런 출구가 허락되지 않는 것 같다. - P260
말로 해 보거나 종이에 써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 P261
케네디 행정부의 국방장관을 역임한 맥나마라는 포드사 사장 시절 이렇게 말하곤 했다. "생각을 종이에 적어라. 아직 종이에 쓰지 않았다면 너는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명쾌하지만, 이건 종이에 적기 전의 생각이 전혀 그럴듯한 꼴이 아니라는 뜻일 뿐, 아예 없다는 판정이 아니다. 그 생각ㅡ부족하고 막연한 의식의 덩어리ㅡ도 존재는 한다. 단지 그 덩어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려면 종이에 써보는 수고를 할 수밖에 없다. - P262
사업가 워런 버핏의 인생목표 정리법 - P262
먼저 자신의 인생의 목표 25가지를 적는다. 다 쓰고 나면 그중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를 고른다. 이것이 ‘목표‘이다. 나머지 20개를 따로 옮겨 적는다. 그리고 제목을 이렇게 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말아야 할 20가지. - P262
즉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턱없이 짧다는 것이다. 생각했던 것의 5분의 1밖에 안 된다. - P262
보통 때는 잘 안 떠오르는, 예컨대 수줍은 나머지 여러 항목 속에 섞여서가 아니면 결코 혼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욕망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은 정신 건강에도 유익할 것이라 생각된다. - P263
나는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이 늘 재밌었다. "상실 뒤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느끼고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떠올린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P263
욕망은 매우 수줍지만 교활하기도 하다. 스파이나 마피아 두목처럼 감시가 소홀한 틈을 정확히 이용할 줄 안다. - P263
뇌의 90퍼센트가 놀고 있다는 것은 거짓이지만 집의 책 90퍼센트가 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높은 확률로 진실이라는 것이다. - P267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자리만 차지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보편적인 적대감에 매우 익숙해졌다. 정치에서든 생활에서든 말이다. - P267
체험되기 전에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 - P267
부재를 슬퍼하는 것보다는 옆에서 행복감을 얻는 편이 훨씬 나은 법 - P268
점수든 횟수든 뭔가를 세면서 보는 건 몰입도를 높이는 좋은 관전법 - P270
살아갈수록 현실감은 어떤 충격적인 깨달음의 결과라기보다는 하나하나 노력해서 얻고 유지하는 것에 가깝다고 느끼게 된다. - P271
그저 그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한다는 느낌 - P272
그는 살려고 하기 때문에, 일단 익숙한 것에 집중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나는 이런 노력이 그리 높이 평가받지 못하리라는 걸 안다. - P272
아마 그렇겠지만, 다음 라운드에서도 현실감을 한 점 한 점 따내야 하는 과정은 다시 시작되고, 그 일에 딱히 아무도 면제되지 못하리라는 것 역시 진실이긴 하다. - P272
기획자에게는 상업적인 감각과 의사소통 능력이 요구되는데, - P274
편승이란 이미 잘되고 있는 것 위에 슬쩍 올라타는 일인데, - P274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와 『팅커』 - P275
업계인들이 알다시피 어떤 책이 출간되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얘기 같은 건 없다. 진짜 민망함은 이제부터인데『팅커』가 너무 안 팔린 것이다. - P276
초쇄가 소진되는 데는 육 년이 걸렸다. 회사에 미안했다. 판매가 이 정도라면 저작권 계약 연장을 하지 않는 게 정상이다. 다른 일이 없었다면 책은 절판되었을 것이다. - P276
2011년 9월 게리 올드먼과 콜린 퍼스 등이 주연한 동명의 영화가 영국에서 개봉했다. 『팅커』라는 책의 운명은 다시 예정된 궤도를 벗어난다. 연말부터 반응이 달라지더니 2012년 2월 국내 개봉 후에는 외국 소설 베스트셀러 순위에 등장하게 되었다. - P276
몬티 파이선식의 개그로 표현하면, 잘생긴 영국 남자 배우가 두 명, 앗 아니 세명, 앗 아니 네 명, 앗 아니 다섯 명……… 출연해 준 덕이다. - P276
내가 읽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호모에로틱한 요소가 그렇게 강렬한 반응을 일으키고 새로운 르카레 독자 유입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될 줄은 상상 못했다. - P277
책이란 게 어떻게 팔릴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든다. - P277
"무언가를 소망하기를 멈추는 순간 당신은 그것을 갖게 된다." 앤디 워홀의 말이다. 이 말은 점쟁이의 말과 비슷해서 누구나 자기 삶에서 적합한 예를 두어 개는 떠올릴 수 있다. - P277
어쨌든 우연은 꼭 필요한 것이다. 헌책방에서 《팅커》를 발견했을 때의 계시 같은 느낌은 그게 우연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발생한다. - P277
책 장사는 결국 허영과 욕망을 파는 것인데, 우연이라는 요소가 한 축이 되지 않으면 욕망은 성립하지 않고 무너진다. - P278
자신에게 중요한 책 몇 권과의 만남을 회고해 보는 사람은 그 책들이 실로 우연히, 난데없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P278
존 르카레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이하 『팅커』) - P273
르카레 소설의 리얼리티가 정보부 근무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흔히 말하지만, 작가 본인은 그걸 내세울 만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중요한 건 묘사되는 감정의 진실성이지, 조직 배치도나 용어의 사실 부합 여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 P281
르카레는 진짜보다도 더 그럴듯한 스파이 용어들을 창조해 냄으로써 이미 자신의 작가로서의 능력이 경력상의 이점을 초과함을 증명해 보였다. 그 용어들은 뒷날 실제 정보 세계에서 사용하는 말이 되었다. 결국 스파이 소설가가 되기 위해 정보부에 근무할 필요는 없다. 그건 이 장르의 역사가 보여 준다. - P281
현대스파이 소설의 아버지 에릭 앰블러도, 르카레의 동년배 라이벌 렌 데이턴도 상상으로 스파이 업무를 그렸을 뿐이다. 오히려 정보장교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이언 플레밍은 007시리즈라는, 리얼리티에 치중했다고 볼 수 없는 소설들을 써내고 있었다. - P281
『실버뷰』는 르카레 사후에 미완성 원고로 발견되었다. 2021년 역시 작가인 아들 닉의 손질을 거쳐 출간되었다. - P281
닉에 따르면 『실버뷰』는 쓰다가 만 소설이 아니다. 원고는 완성되어 있었다. 단지 르카레가 육 년 가까이 이 원고를 계속 수정하면서도 발표할 결심을 하지 못한 것뿐이다. - P281
이것은 어느 의미로 볼라뇨 사후 발견되는 미완성 작품들과도 비슷하다. 겉으로는 이미 완성되어 있고 정서까지 끝나 있지만, 좀 더 확장과 심화 작업이 있기를 기대하며 작가가 서랍 속에 넣어 놓은 작품 말이다. - P282
실버뷰는 데버라와 에드워드 부부가 살고 있는 저택 이름으로, 독일어 ‘질버블리크‘를 직역해서 에드워드가 붙인 것이다. 질버블리크는 니체가 미쳐 버린 뒤 여동생의 간호를 받으며 살던 집이다. 이곳에서 인종주의자인 엘리자베트는 오빠의 사상을 난도질하며 뒷날 민족사회주의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왜곡시켰다. - P282
에드워드/르카레의 경고는 이런 것이다. 영국인들은 나치와 싸웠지만, 이들도 자신들만의 과거에 집착해 섬 바깥으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한 나치와 비슷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 P282
데버라는 총명한 학자지만, 자신의 애국심이 자신의 부족에 대한 일체감에 기초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는 불길한 징조이다. - P282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 『하워즈 엔드(Howards End)』 등 집 이름을 제목으로 택한 영국 소설들이 그렇듯 『실버뷰』 역시 ‘누가 영국을 상속할 것인가?" 라는 문제를 다룬다. - P283
끝에 실버뷰를 물려받게 될 젊은이들은 앞 세대들보다 훨씬 솔직하고 관용적이며 다문화적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르카레의 기획이 그 이상 뚜렷하게 드러나기도 힘들겠다고 느끼게 되는 지점에 도달한다. 이 젊은이들의 영혼이 데버라와 에드워드 중 어느 쪽을 더 닮았는지, 작가는 오해의 여지가 없게 표시해 두었다. - P283
르카레 소설의 독자들은 ‘나는 네 아버지를 알고 있다‘ 라는 말의 불길한 의미에 익숙하다. 실제로 로널드 콘월(르카레의 본명인 데이비드 콘월의 아버지)은 사기 사건으로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가족들을 수치와 경제적 곤란에 빠뜨렸다. - P284
르카레가 지배계급의 말석에 앉는 게 허락되었을 때 정체를 숨기는 직업, 스파이를 택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처럼 보인다. - P284
르카레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자주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아마 많은 아버지들이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아요.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존재하는 것 같다는 감정." - P285
어쩌면 『실버뷰』는 르카레를 평생 괴롭힌 ‘아버지 문제‘ 를 최종적으로 청산하기 위한 시도였고, 그는 이를 대작으로 완성시킬 영감이 찾아올 날을 조용히 기다렸던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날은 오지 않았고, 『실버뷰』 곳곳에 뿌려놓은 그의 아버지의 형상을 수습하는 일은 작가 르카레를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그의 아들의 손에 맡겨졌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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