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뇌과학자 엔델 털빙(Endel Tulving)이 제시한 일화 기억(episodic memory)과 의미 기억(semantic memory)의 개념에 대해 간략히 살펴봤었다. 해당 개념을 다시 정리해보자면 ‘일화 기억‘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고, ‘의미 기억‘은 어떤 대상과 개념을 다른 대상과 개념에 연결시킴으로써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기억을 두 종류로 나누어 생각하는 이유는 유전자에도 기본 단위가 있듯이 문화에도 어떤 기본 단위가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저자는 문화의 기본 단위를 기억이라는 것에서부터 찾아보려는 듯하다.

오늘은 이 두 종류의 기억이 뇌에서 어떻게 작용하여 의미를 만들어 내고, 이런 것들이 결과적으로 인간 사회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초반부만 잠깐 읽어봤지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빠르게 생각하고 넘어가는 모든 과정들을 세세하게 쪼개보니 그 사고(思考) 과정이 아주 복잡한 단계들을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뇌라는 게 참 신기하고도 놀라운 것이라는 걸 다시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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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기본 단위를 찾아나가기 위해 제일 먼저 저자는 개념이라는 것을 위에서 언급했던 ‘의미 기억‘의 연결점(node) 또는 참조점으로 간주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개념들은 일반적으로 ‘단어‘를 통해 식별된다고 한다. 이후에 이런 단어들로 구성된 언어를 통해 복잡한 정보가 생성되며 전달된다고 한다. 또한 연결점이라는 것은 언제나 다른 연결점들과 맞닿아 있는 속성이 있기에 이런 연관 관계를 통해 ‘의미‘라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좀 복잡하게 보일 수 있는데,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자면 일단 단어로 표상되는 ‘개념‘이라는 것이 하나 있고, 이런 개념들이 다양한 형태로 조직된 것이 ‘정보‘가 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개념과 정보들간의 관계 속에서 의미라는 게 창출된다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을 듯하다.

여기서 문장의 형태로 조직된 ‘정보‘라는 것은 다른 말로 어떤 ‘명제‘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복잡성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단순한 ‘개념‘보다는 한층 더 높은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제보다 상위에 있는 것으로 도식(圖式, schema)이라는 단위가 등장하는데, 이는 쉽게 말해 명제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이야기 단위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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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머리가 좀 지끈지끈 아파오지만, 한편으로는 중구난방으로 머릿속에 흩어졌던 개념들의 위계질서를 잡아볼 수 있었기에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또한 문화의 단위를 찾고자 하는 이들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 또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각의 개념들의 위계질서와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잘 몰랐던 그리스-로마 신화의 다프네를 쫓아다니는 아폴론 이야기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의미 기억은 일화들 내에서 비롯되며 거의 언제나 뇌가 다른 일화들을 상기하도록 만든다. - P245

뇌는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한 종류의 일화를 기호를 통해 표상되는 개념으로 집약하는 강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비행기와 화살표의 윤곽만으로도 "공항은 이쪽 방향이다." 라는 의미가 성립되며 두개골 위에 교차된 대퇴골만으로도 "이 물질에는 독성이 있다."라는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P245

두 유형의 기억을 염두에 두고 문화의 단위를 찾아보자. 우선 개념을 의미 기억의 ‘연결점(node)‘ 또는 참조점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때 연결점은 의미 기억에서 뇌의 신경 활동에 궁극적으로 연관될 수 있다. - P245

개념과 그 기호는 일반적으로 단어를 통해 식별된다. 따라서 복잡한 정보는 단어들로 구성된 언어를 통해 조직되고 전달된다. - P245

연결점은 거의 언제나 다른 연결점들과 맞닿아 있어서 한 연결점을 상기하면 다른 점들도 상기할 수 있다. 이런 연관을 통해 우리가 ‘의미‘라고 부르는 것이 생겨난다. - P245

이 연결점들은 더 많은 의미들이 포함된 정보 위계를 이루며 조직되어 있다. 예컨대 사냥개의 일종인 ‘하운드‘, ‘산토끼‘ 그리고 ‘뒤쫓다‘는 모두 연결점들인데 그 각각은 유사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대상을 집단적으로 기호화한다. - P245

‘하운드가 산토끼를 뒤쫓다.‘는 하나의 명제이며 이 명제는 정보의 복잡성 측면에서 단어 다음으로 복잡하다. - P245

명제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 도식(圖式, schema)이다. 오비디우스가 들려준 사랑을 위해 다프네를 쫓아다니는 아폴론 이야기가 이런 도식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잡히지 않는 산토끼를 끊임없이 뒤쫓아 다니는 하운드도 이런 범주에 들어간다. 이런 딜레마는 다프네와 산토끼라는 한 개념이 하나의 명제로 이뤄진 또 다른 개념인 월계수로 변했을 때 해결된다. - P245

새로운 일화들과 개념들이 기억 장치에 첨가되면 그것들은 변연계와 피질계를 통해 확산 · 탐색의 절차를 밟는다. 이런 탐색을 통해 이전에 창조된 연결점들과 맞닿게 된다. 연결점들은 다른 중심점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공간적으로 고립된 점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수많은 신경 세포들의 복잡한 회로로서 뇌의 전 지역에 걸쳐 중첩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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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경마장에 있는 말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복희라는 인물이 새롭게 등장했다고 언급했었다. 오늘도 복희와 관련된 얘기가 계속 이어진다.

처음 밑줄 친 부분에서 복희가 말들과 교감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느껴졌다. 여기 나온 말 뿐만아니라 어떤 동물이든 간에 그들과 잘 교감하기 위해서는 물론 다양한 것들이 필요하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진심이 담긴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 서로 직접적인 언어가 통하진 않더라도 그 내면의 마음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 관계에서도 진심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복희는 천천히 목덜미를 쓸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말의 체온과 숨결을 더 자세하게 느끼기 위해 선배의 목소리를 따라 눈을 감고, 소리가 피부를 통해 전달될 수 있도록 낮고 조용히 말을 걸었다.

경주마는 수명이 짧다. 선수로서의 수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수명이 짧았다.

달리지 못하는 말은 말이 아니다.

인간 역시 이따금씩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할 때가 있었으나 언제나 회생 가능했다. 하지만 말은 말 취급을 받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었다. 달릴 수 없는 말은 지구에서 살아갈 이유를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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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다른 일반적인 소설들과는 구성 방식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느껴졌다. 보통은 하나의 흐름이 쭉 이어지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책에서는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 또는 로봇의 입장을 개별적으로 구분하여 서술한 것이 개인적으로 독특하다고 느껴졌다.

대략적인 기억들을 더듬어보면, 콜리와 연재 그리고 연재의 엄마인 보경, 연재의 누나 은혜 등과 같은 인물들 각각의 스토리들이 소개되는데, 이것들 중에는 각 캐릭터들만의 고유의 스토리도 있지만, 등장인물들간에 겹치는 사건 등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동일한 사건을 각자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이야기의 맥을 중간에 놓치지 않고 쭉 이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연재의 엄마인 보경에 대한 이야기부터 나오는데, 읽어보면서 캐릭터별로 어떤 기질과 특징이 있는지를 좀 더 파악해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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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니 보경이라는 인물은 과거에 배우로 활동했을 정도로 외모가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인해 얼굴에 상처가 생기고 이로 인해 왕성했던 배우활동에 지장이 생기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외면의 상처뿐만 아니라 내면의 상처까지 유발시키고 말았는데, 어떤 일이 발단이 되어 그 상처들을 조금씩 회복해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회복도 잠시였다. 예상치 못했던 또다른 일로 인해 다시 마음에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된다. 결국 돌고 돌아 자신이 꿈꿔왔던 삶과는 다소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는데, 참 이런 것들을 보면서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하나 내 마음이나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기 정말 힘들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내가 꿈꾸는대로 인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루 다 말하기 힘들정도로 굉장히 많은 요소들이 필요한데, 솔직히 이런 요건들을 완벽하게 갖추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인생은 절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하는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작년에 읽었던 유현준 교수의 책에서 저자가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정확한 문장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으나 핵심은 바로 ‘차선이 모여서 최선이 된다‘는 말이었다. 내가 매번 최선의 선택지를 선택할 수 없기에 내가 생각했던 최선보다는 조금 못미치는 차선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국 이런 선택들이 모여서 결과적으로 최선을 만들어간다는 말이다. 실제로 유현준 교수도 자신의 책에 고백한 바에 따르면 ‘자기 인생도 결코 자신이 처음에 생각하고 꿈꿨던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차선책을 선택하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식으로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현재 처한 상황이 비록 못마땅하거나 꿈꿔왔던 것과는 차이가 있더라도 그 처한 상황에서의 최선을 늘 추구하는 것이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냥 힘겹다고 인생의 끈을 무작정 놓을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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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지수라는 인물이 새롭게 등장한다. 지수는 연재와 같은 반 친구인데, 가정형편이 평범한 연재와는 달리 부모님의 든든한 지원으로 영어 유치원은 물론이고, 외국 생활까지 하다 온 친구였다. 물론 연재도 특정 분야에 있어 특출난 재능이 있었지만 그외의 것들에 있어서는 지수보다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린 연재는 자신과 나이는 같지만 여러면에서 앞서있는 지수같은 친구들을 보며 자괴감이 들곤 하는데, 이것이 비단 이 소설 속 연재만의 느낌은 아닐 듯하다. 특출난 극소수의 인원 몇 명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한 번 쯤은 해보았을 고민이지 않을까?

하지만 연재에게 자괴감을 느끼게 했던 지수는 우연한 계기로 인해 연재와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는데, 이런 걸 보면서 사람 일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는 소설 속 설정 상 어느정도 의도된 것이겠지만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딱히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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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복희라는 인물이 새롭게 등장한다. 이 인물은 기존에 나왔던 인물들과는 별개로 경마장의 말을 관리하는 사람인듯 보이는데,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어떤 역할을 할 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렇게 예쁨 받는데 더 많은 사람에게 왜 예쁨 못받겠어?‘ 라는 생각

모친은 인생의 2막이란 원래 아무도 모르게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보경이 보기에는 시대의 흐름에 탑승하지 못한 예견된 추락일 뿐이었다.

여기가 왜 지하인줄 알겠어? 식물은 땅에 뿌리를 내리니까, 이곳에 네가 뿌리를 내려야 지상에 꽃으로 필 수 있다는 말이야.

인간은 숨이 끊겼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삶의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게 생겼다. 선남선녀가 목숨을 계기로 만났으니 사랑에 빠지기는 쉬웠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꽤 가쁘게 흘러갔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자 자연스럽게 회복도 빠르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만난 사람은 편안했다.

"3%였잖아요."

"사람은 기계와 달라서 꺼진다고 완전히 멈추는 게 아니니까요. 3%라는 뜻은 말 그대로 살 수 있다는 뜻이에요."

소방관과 약지에 반지를 나눠 낀 후부터 보경의 삶은 자신이 그려왔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배우의 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다급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의 시선보다 단 한 사람의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이었다.

삶이 이따금씩 의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벽에 부딪혀 심한 상처가 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방향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이 1%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3%도 살았는데 80%는 왜 못살아. 당신 왜 이러고 있어."

모친의 요리 솜씨로 시작됐던 인생은 긴 레일을 돌고 돌아 다시 모친의 요리로 돌아왔다.

요리는 연구하지 않아도 혀가 시키는대로 따라가면 금세 모친이 내던 맛이 났다.

죽음이 확률로 계산되지 않고 예견되지 않는 날들을 쭉 누릴 생각이었다. 연재가 쓰레기같은 기수 휴머노이드를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쟤가 뭐를 저렇게 갖고 싶어 한 게 처음인 것 같아서."

예전에는 휴머노이드가 갑자기 나타나서 멀쩡히 은행에 다니던 사람을 밖으로 내쫓더니 이제는 제 딸이 다 망가진 휴머노이드를 가지고 왔다. 어쩐지 눈은 뜨고 있으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빼앗긴 적 없는데 빼앗긴 기분이었고 버려진 적 없으나 버려진 기분이었다. 휴머노이드를 보면 그랬다.

사람은 이따금씩 강렬하게 무언가에 끌렸다. 그게 사람일 수도, 사랑일 수도, 음악일 수도, 물건일 수도 있었다. 그 강렬한 끌림 앞에서는 무엇도 걸림돌이 될 수 없다. 마지막 월급을 전부 꼬라박을 정도의 강렬한 끌림을, 어제 연재는 다 망가진 콜리를 보고 느꼈으리라.

때때로 어떤 일들은, 만연해질수록 법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 일에서 손을 놓아버리고는 했다.

몇천만 원을 웃도는 기계 다리 부착 수술보다 더 필요했던 건 인도에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로와 가게로 들어갈 수 있는 리프트, 횡단보도의 여유로운 보행자 신호, 버스와 지하철을 누구의 도움 없이도 탈 수 있는 안전함이었다. 휠체어를 끌어주는 휴머노이드나 사이보그 다리가 아니라.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지구가 너무 많이 바뀌어야 했다. 다수의 입장에서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전가하면 그만인 일이었으니까.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어떤 것도,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다 왔잖아. 조금만 더 힘내.

반드시 그곳에 가리라는 마음을 먹자 몸에 힘이 생겼다.

완벽한 차단이란 존재하지 않으리라. 분명 어느 틈으로는 그 화려한 경기를 볼 수 있을 거라 믿었고, 그 믿음은 오래 걸리지 않아 현실이 됐다.

가족 둘이 모이면 다른 가족의 흉을 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대화가 흘렀다.

가족의 대화란 게 또 그렇듯이 주제도 흐름도 없이 그때그때 튀어나왔다.

"시긴 진짜 빨리도 간다. 1년이 하루처럼 흐르는 것 같아. 징그럽게 빨리도 가."

은혜가 그곳에 오래도록 있고 싶어서 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공간이 은혜가 오래 머물 수 있도록 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gyro sensor. 기본적으로 회전하는 물체의 역학운동을 이용한 개념으로 위치 측정과 방향 설정 등에 활용되는 기술이다. 스마트폰, 리모컨, 비행기나 위성의 자세 제어 장치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플라스틱보다 가벼운 카본

들개는 살아 있었다. 숨은 쉬고 있지 않지만 살아 있는 지상의 어떤 생명과도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일부러 할 말 없게 대화를 툭툭 끊는 것

"말하는 꼬라지 진짜 별로다."

다르파가 네 발 달린 휴머노이드라는 걸

어쩔 수 없는 차이는 숨겨지지 않았다.

급이 높은 아이들의 진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는다는 것에 있었다.

"좋아. 내가 오늘부터 아주 끝장나게 너랑 친구해준다."

희박한 반전에 기대를 걸 만큼 체력과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연재는 타인의 삶이 자신의 삶과 다르다는 걸 깨달아가는 것이, 그리고 그 상황을 수긍하고 몸을 맞추는 것이 성장이라고 믿었다. 때때로 타인의 삶을 인정하는 과정은 폭력적이었다. 그러니 연재에게 남은 방법은 딱 하나였다. 수업이 마치자마자 온 힘을 다해 뛰어가는 것.

삶의 격차라는 것이 어느 틈을 비집고 생기는 것인지 한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똑같이 학교에 다니고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공부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어떤 아이들에게는 다가갈 수조차 없을 만큼 차이가 났다. 우리 부모님도 돈을 벌고, 우리 부모님도 나를 사랑하는데 왜 우리는 같은 나이에 이만큼 차이가 나는 걸까.

세상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들이 각기 다른 몸값을 지니고 나왔다. 연재는 그것이 정말로 필요해서 생긴 것인지 생김으로써 필요해진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세상은 연재와는 상관없이 빠른 속도로 많은 것을 탄생시켰다. 그제야 삶의 격차가 어느 틈을 비집고 생겼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건 연재의 균열이라기보다 부모님, 그리고 그 부모님보다 더 먼 부모님의 삶 어디에선가부터 천천히 시작된 균열일 것이다. 연재가 스스로 절대 여밀 수 없는 크기로 말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힘은 결국 문명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냥 처음부터 같이 가면 될 걸 미련하게 힘을 왜 빼."

"요즘 세상에 공부만 잘해도 모자랄 판에 공부 빼고 다른 거 다 잘해서 뭐 먹고 살 건데?"

이제 찌를 던져 낚시 바늘을 틈에 걸기만 하면 됐다. 지수가 팔짱을 꼈다. 아빠에게서 들은 거래의 기술 중 하나인데, 본디 상대방의 환심을 사려면 그만큼 매혹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였다.

인생이 언제 한 번쯤 순탄하게 풀리나 생각했는데 그날이 오늘인가 싶었다.

사람들은 돌고래의 지능은 익히 알면서도 말 역시 돌고래와 지능이 비슷하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했다. 말은 인간으로 치자면 6세 정도의 아이큐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손에는 말들이 좋아하는 당근과 각설탕을 함께 준비했다. 각설탕이 말에게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단걸 좋아하는 말들에게 각설탕은 스트레스를 최단시간 안에 풀어줄 수 있는 좋은 수단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당보다는 스트레스가 최악이었다.

선배는 말의 목덜미를 두드리며 복희에게 이곳을 쓸어보라고, 만져주면 가장 좋아하는 부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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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포스팅들에서 전문직의 유래와 역사 그리고 이와 관련된 다양한 이론들을 살펴봤었다. 독자인 내가 느낀 본문의 흐름을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전문직군이라는 것이 최초로 발생했던 초기에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사회 전반에 대한 어떤 소명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발전하다가 자본주의 사회가 들어서면서 어느순간부턴가 사회와 공공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훨씬 더 우선시하는 그런 추세로 변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소위말해 공익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돈 되는 일에 집중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시대 흐름이 무조건 잘못됐다고 단정적으로 결론짓기는 조심스럽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전문직들이 자신의 일을 대하는 태도가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주변 지인 중에 금전적인 채권채무 관계로 인해 변호사를 써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분이 계셨는데 그 금액이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지만 또 딱히 크다고 하기도 좀 애매한 그런 정도의 사건을 변호사 사무실에 맡겼던 일이 있었다. 이 변호사는 사건을 수임했으니 계약금 명목으로 몇 십만원 정도를 요구했고, 지인은 일단 그 금액을 송금했다고 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그 금액의 규모가 변호사 기준에는 그닥 큰 금액이 아니었는지 해당 사건에 대해 상대측에 내용증명을 한 번 보낸 후로는 딱히 이 사건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고 한다. 연락을 해도 해당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딱히 적극적이지 않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고 하니 뭐 말 다했다. 결국 지인은 내용증명 이후에 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조치들을 받지 못한 채 그냥 채권채무관계가 흐지부지 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계약금 몇 십만원만 날린 셈이다.

뭐 쓰다보니 얘기가 길어졌는데,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전문직들이 어떤 사건을 맡았을 때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는 결국 그 사건에서 얼마나 많은 금전적 이득을 챙길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뭐 어찌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극히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해당 사건에 걸린 금전적인 규모에 따라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아지는 사회가 되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씁쓸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추가로 생각을 덧붙여보자면 이거는 전문직 얘기와는 논외이긴 한데, 애초에 위와 같은 일들을 만들지 않도록 평소에 신경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법적으로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물론 해결되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각종 소송 등으로 인해 받는 부담해야 하는 적지 않은 금전적 부담, 정신적인 스트레스 등을 생각해본다면 사전에 이를 방지하는 게 가장 최선이 아닐까 싶다. 경영학의 품질관리 분야에 나오는 내용 중에도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는 비용(예방 비용)이 가장 적게 들고, 사건이 터진 뒤에 이를 수습하기 위한 비용(외부 실패 비용)이 가장 크게 든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뭐 결론은 금방 나온다.

전문직은 경제, 기술, 심리, 도덕, 품질, 그리고 이해 불가함 등 여섯 가지 측면에서 실패했다. 이런 결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 결합되어 더욱 큰 문제를 초래할 것이다. - P58

대부분의 사람들과 조직이 최상급 전문가의 서비스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 P58

부자 또는 보험을 충분히 든 사람만 의사, 변호사, 회계사, 경영컨설턴트 같은 일류 전문직을 다수 고용할 수 있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극소수가 지닌 전문성이 소수에게만 공급되는 것이다. 예컨대, 재력 있는 소수는 롤스로이스급 서비스를 받고, 나머지는 모두 걸어다녀야 하는 상황이다. - P58

대부분의 국가가 학교, 법률 제도, 의료 서비스 등 기존의 전문 서비스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한다. - P58

공공지출액이 삭감되면서 심각한 문제를 겪는 전문직 분야가 많다. 물론 모든 시민이 가장 뛰어난 전문가의 지식과 경험의 혜택을 향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이는 비현실적인 기대임에 분명하다. 전문성이 희소자원이라는 데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문성 자체의 공급은 절대 부족하지 않다. 희소한 것은 전문가다. 현재 전문가 업무를 조직하고 전달하는 방식으로는 직접 만나 소통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데서 제약이 발생한다. - P59

꼭 일류 전문가가 아니어도 된다고 눈높이를 낮춰도 비용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의료비용은 계속 치솟고, 학교는 한탄스러울 만큼 자원 부족에 시달리며, 중간급 변호사를 고용하는 비용은 다른 분야의 중간층 전문가마저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영세 기업은 힘이 없다. 소기업 소유자는 경영컨설턴트, 세무 전문가, 회계사를 확보할 만한 자원이 없다.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큰 조직도 전문 서비스가 엄청나게 비싸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CEO와 CFO들이 전문 서비스(특히 법률, 세무, 회계, 컨설팅) 비용을 크게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 P59

경제 문제는 전문직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 문제보다 시급하지는 않다. 경제 문제는 접근성 문제로, 서비스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비교적 적기 때문에 일어난다. - P60

전문가의 전문성은 불균등하게 분배된다. 전문성의 불평등 문제는 다른 불평등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다른 사회적배제 문제에서는 비교적 소수가 피해를 입는 반면, 전문 서비스에서는 절대다수가 배제된다. 이제까지 쌓아올린 인간의 전문성이라는 영광스러운 성채에는 극소수만 입장할 수 있다. - P60

전문직 서비스는 마치 정의가 그렇듯, 그리고 최고급 호텔이 그렇듯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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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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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장강명 작가님의 작품을 처음 읽어보았는데, 저자가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구조와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심도있게 고민하고 생각해본 흔적들을 작품속에서 엿볼 수 있었다. 특별히 이 작품에선 아직 사회에 발을 내딛지 않은 젊은 세대 혹은 사회초년생의 고뇌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잘 풀어낸 듯하다. 완독후에도 독자들이 다양한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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