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다른 일반적인 소설들과는 구성 방식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느껴졌다. 보통은 하나의 흐름이 쭉 이어지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책에서는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 또는 로봇의 입장을 개별적으로 구분하여 서술한 것이 개인적으로 독특하다고 느껴졌다.

대략적인 기억들을 더듬어보면, 콜리와 연재 그리고 연재의 엄마인 보경, 연재의 누나 은혜 등과 같은 인물들 각각의 스토리들이 소개되는데, 이것들 중에는 각 캐릭터들만의 고유의 스토리도 있지만, 등장인물들간에 겹치는 사건 등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동일한 사건을 각자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이야기의 맥을 중간에 놓치지 않고 쭉 이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연재의 엄마인 보경에 대한 이야기부터 나오는데, 읽어보면서 캐릭터별로 어떤 기질과 특징이 있는지를 좀 더 파악해보도록 해야겠다.
.
.
.
읽다보니 보경이라는 인물은 과거에 배우로 활동했을 정도로 외모가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인해 얼굴에 상처가 생기고 이로 인해 왕성했던 배우활동에 지장이 생기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외면의 상처뿐만 아니라 내면의 상처까지 유발시키고 말았는데, 어떤 일이 발단이 되어 그 상처들을 조금씩 회복해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회복도 잠시였다. 예상치 못했던 또다른 일로 인해 다시 마음에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된다. 결국 돌고 돌아 자신이 꿈꿔왔던 삶과는 다소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는데, 참 이런 것들을 보면서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하나 내 마음이나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기 정말 힘들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내가 꿈꾸는대로 인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루 다 말하기 힘들정도로 굉장히 많은 요소들이 필요한데, 솔직히 이런 요건들을 완벽하게 갖추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인생은 절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하는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작년에 읽었던 유현준 교수의 책에서 저자가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정확한 문장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으나 핵심은 바로 ‘차선이 모여서 최선이 된다‘는 말이었다. 내가 매번 최선의 선택지를 선택할 수 없기에 내가 생각했던 최선보다는 조금 못미치는 차선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국 이런 선택들이 모여서 결과적으로 최선을 만들어간다는 말이다. 실제로 유현준 교수도 자신의 책에 고백한 바에 따르면 ‘자기 인생도 결코 자신이 처음에 생각하고 꿈꿨던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차선책을 선택하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식으로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현재 처한 상황이 비록 못마땅하거나 꿈꿔왔던 것과는 차이가 있더라도 그 처한 상황에서의 최선을 늘 추구하는 것이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냥 힘겹다고 인생의 끈을 무작정 놓을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이렇게 예쁨 받는데 더 많은 사람에게 왜 예쁨 못받겠어?‘ 라는 생각

모친은 인생의 2막이란 원래 아무도 모르게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보경이 보기에는 시대의 흐름에 탑승하지 못한 예견된 추락일 뿐이었다.

여기가 왜 지하인줄 알겠어? 식물은 땅에 뿌리를 내리니까, 이곳에 네가 뿌리를 내려야 지상에 꽃으로 필 수 있다는 말이야.

인간은 숨이 끊겼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삶의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게 생겼다. 선남선녀가 목숨을 계기로 만났으니 사랑에 빠지기는 쉬웠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꽤 가쁘게 흘러갔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자 자연스럽게 회복도 빠르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만난 사람은 편안했다.

"3%였잖아요."

"사람은 기계와 달라서 꺼진다고 완전히 멈추는 게 아니니까요. 3%라는 뜻은 말 그대로 살 수 있다는 뜻이에요."

소방관과 약지에 반지를 나눠 낀 후부터 보경의 삶은 자신이 그려왔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배우의 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다급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의 시선보다 단 한 사람의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이었다.

삶이 이따금씩 의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벽에 부딪혀 심한 상처가 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방향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이 1%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3%도 살았는데 80%는 왜 못살아. 당신 왜 이러고 있어."

모친의 요리 솜씨로 시작됐던 인생은 긴 레일을 돌고 돌아 다시 모친의 요리로 돌아왔다.

요리는 연구하지 않아도 혀가 시키는대로 따라가면 금세 모친이 내던 맛이 났다.

죽음이 확률로 계산되지 않고 예견되지 않는 날들을 쭉 누릴 생각이었다. 연재가 쓰레기같은 기수 휴머노이드를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쟤가 뭐를 저렇게 갖고 싶어 한 게 처음인 것 같아서."

예전에는 휴머노이드가 갑자기 나타나서 멀쩡히 은행에 다니던 사람을 밖으로 내쫓더니 이제는 제 딸이 다 망가진 휴머노이드를 가지고 왔다. 어쩐지 눈은 뜨고 있으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빼앗긴 적 없는데 빼앗긴 기분이었고 버려진 적 없으나 버려진 기분이었다. 휴머노이드를 보면 그랬다.

사람은 이따금씩 강렬하게 무언가에 끌렸다. 그게 사람일 수도, 사랑일 수도, 음악일 수도, 물건일 수도 있었다. 그 강렬한 끌림 앞에서는 무엇도 걸림돌이 될 수 없다. 마지막 월급을 전부 꼬라박을 정도의 강렬한 끌림을, 어제 연재는 다 망가진 콜리를 보고 느꼈으리라.

때때로 어떤 일들은, 만연해질수록 법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 일에서 손을 놓아버리고는 했다.

몇천만 원을 웃도는 기계 다리 부착 수술보다 더 필요했던 건 인도에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로와 가게로 들어갈 수 있는 리프트, 횡단보도의 여유로운 보행자 신호, 버스와 지하철을 누구의 도움 없이도 탈 수 있는 안전함이었다. 휠체어를 끌어주는 휴머노이드나 사이보그 다리가 아니라.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지구가 너무 많이 바뀌어야 했다. 다수의 입장에서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전가하면 그만인 일이었으니까.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어떤 것도,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앞선 포스팅들에서 전문직의 유래와 역사 그리고 이와 관련된 다양한 이론들을 살펴봤었다. 독자인 내가 느낀 본문의 흐름을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전문직군이라는 것이 최초로 발생했던 초기에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사회 전반에 대한 어떤 소명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발전하다가 자본주의 사회가 들어서면서 어느순간부턴가 사회와 공공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훨씬 더 우선시하는 그런 추세로 변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소위말해 공익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돈 되는 일에 집중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시대 흐름이 무조건 잘못됐다고 단정적으로 결론짓기는 조심스럽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전문직들이 자신의 일을 대하는 태도가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주변 지인 중에 금전적인 채권채무 관계로 인해 변호사를 써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분이 계셨는데 그 금액이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지만 또 딱히 크다고 하기도 좀 애매한 그런 정도의 사건을 변호사 사무실에 맡겼던 일이 있었다. 이 변호사는 사건을 수임했으니 계약금 명목으로 몇 십만원 정도를 요구했고, 지인은 일단 그 금액을 송금했다고 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그 금액의 규모가 변호사 기준에는 그닥 큰 금액이 아니었는지 해당 사건에 대해 상대측에 내용증명을 한 번 보낸 후로는 딱히 이 사건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고 한다. 연락을 해도 해당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딱히 적극적이지 않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고 하니 뭐 말 다했다. 결국 지인은 내용증명 이후에 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조치들을 받지 못한 채 그냥 채권채무관계가 흐지부지 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계약금 몇 십만원만 날린 셈이다.

뭐 쓰다보니 얘기가 길어졌는데,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전문직들이 어떤 사건을 맡았을 때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는 결국 그 사건에서 얼마나 많은 금전적 이득을 챙길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뭐 어찌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극히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해당 사건에 걸린 금전적인 규모에 따라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아지는 사회가 되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씁쓸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추가로 생각을 덧붙여보자면 이거는 전문직 얘기와는 논외이긴 한데, 애초에 위와 같은 일들을 만들지 않도록 평소에 신경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법적으로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물론 해결되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각종 소송 등으로 인해 받는 부담해야 하는 적지 않은 금전적 부담, 정신적인 스트레스 등을 생각해본다면 사전에 이를 방지하는 게 가장 최선이 아닐까 싶다. 경영학의 품질관리 분야에 나오는 내용 중에도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는 비용(예방 비용)이 가장 적게 들고, 사건이 터진 뒤에 이를 수습하기 위한 비용(외부 실패 비용)이 가장 크게 든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뭐 결론은 금방 나온다.

전문직은 경제, 기술, 심리, 도덕, 품질, 그리고 이해 불가함 등 여섯 가지 측면에서 실패했다. 이런 결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 결합되어 더욱 큰 문제를 초래할 것이다. - P58

대부분의 사람들과 조직이 최상급 전문가의 서비스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 P58

부자 또는 보험을 충분히 든 사람만 의사, 변호사, 회계사, 경영컨설턴트 같은 일류 전문직을 다수 고용할 수 있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극소수가 지닌 전문성이 소수에게만 공급되는 것이다. 예컨대, 재력 있는 소수는 롤스로이스급 서비스를 받고, 나머지는 모두 걸어다녀야 하는 상황이다. - P58

대부분의 국가가 학교, 법률 제도, 의료 서비스 등 기존의 전문 서비스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한다. - P58

공공지출액이 삭감되면서 심각한 문제를 겪는 전문직 분야가 많다. 물론 모든 시민이 가장 뛰어난 전문가의 지식과 경험의 혜택을 향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이는 비현실적인 기대임에 분명하다. 전문성이 희소자원이라는 데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문성 자체의 공급은 절대 부족하지 않다. 희소한 것은 전문가다. 현재 전문가 업무를 조직하고 전달하는 방식으로는 직접 만나 소통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데서 제약이 발생한다. - P59

꼭 일류 전문가가 아니어도 된다고 눈높이를 낮춰도 비용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의료비용은 계속 치솟고, 학교는 한탄스러울 만큼 자원 부족에 시달리며, 중간급 변호사를 고용하는 비용은 다른 분야의 중간층 전문가마저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영세 기업은 힘이 없다. 소기업 소유자는 경영컨설턴트, 세무 전문가, 회계사를 확보할 만한 자원이 없다.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큰 조직도 전문 서비스가 엄청나게 비싸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CEO와 CFO들이 전문 서비스(특히 법률, 세무, 회계, 컨설팅) 비용을 크게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 P59

경제 문제는 전문직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 문제보다 시급하지는 않다. 경제 문제는 접근성 문제로, 서비스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비교적 적기 때문에 일어난다. - P60

전문가의 전문성은 불균등하게 분배된다. 전문성의 불평등 문제는 다른 불평등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다른 사회적배제 문제에서는 비교적 소수가 피해를 입는 반면, 전문 서비스에서는 절대다수가 배제된다. 이제까지 쌓아올린 인간의 전문성이라는 영광스러운 성채에는 극소수만 입장할 수 있다. - P60

전문직 서비스는 마치 정의가 그렇듯, 그리고 최고급 호텔이 그렇듯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 P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분야가 서로 철저하게 나뉘어져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었다. 또한 두 분야가 철저히 나뉘어 있다보니 오해와 충돌이 반복되는 현실에 대해서도 지적했었다.

독자인 나는 여기서 서로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을 때 오해와 충돌이 반복된다는 얘기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와닿았다. 인간관계에서도 서로간에 어떤 오해가 있을 때 이것을 대화나 기타 방법 등을 활용하여 그때그때 해결하지 않으면 그 오해는 눈덩이처럼 순식간에 불어나서 그 오해가 점점 커지고 그러다가 마치 풍선이 빵하고 터지듯이 서로간에 충돌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와 같은 원리로 갈등을 겪었다가 결국엔 대화를 통해 관계가 호전되었던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기에 더 그러지 않았나 싶다. 해당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까지는 하기 힘들지만 그때의 기억을 잠시 더듬어보자면 초반에는 대화가 오가기는 커녕 서로간에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오해가 쌓이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자 결국 내 쪽과 상대방 쪽 모두 심리적으로 힘들어졌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특정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대화의 물고가 터졌고, 오해를 품과 동시에 악화되었던 관계가 좋은 쪽으로 개선되었던 기억이 있다.

개인적으로 겪었던 사건이긴 하지만 결국 오해를 키우지 않기 위해선 가만히 있으면서 시간을 지체하기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상대방을 만나서 서로 대화하고 상대편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시간이었다.

잠시 곁길로 샜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오늘 시작하는 포스팅에서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두 분야가 서로 이해하기 힘든 근본 원인에 대한 저자의 지적이 나온다. 가장 먼저 저자는 두 분야 간에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공통된 언어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상대방의 언어가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라면, 어느 한 쪽이 자신이 표현하고자하는 바를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도록 도와주는 작업이 1차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본문에 직접적으로 나오는 사례는 아니지만, 이와 관련하여 그냥 개인적으로 문득 떠오른 사례 중 하나는 세종대왕이 한자를 어려워하는 백성들에게 훈민정음을 만들어 사용하게 한 것이었다. 한자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우니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만든 것이다.

이 사례를 오늘의 본문 내용에 빗대어 생각해보자면, 과학자들이 자신들은 잘 알지만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과학분야의 내용들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작년에 읽었던 유시민 작가의《문과 남자의 과학공부》라는 책을 보면 그저 난해하게만 느껴지는 과학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사람들을 가리켜 ‘과학 커뮤니케이터‘ 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요즘으로 치면 과학 유튜버로 유명한 ‘궤도‘ 같은 사람이 해당될 수 있겠다.

어쨌든 이런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을 통해 과학을 낯설고 어렵게만 느끼던 사람들이 과학에 좀 더 관심을 갖고 그 내용들을 이해해보려 도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조금은 오지랖일수도 있는데 여기서 좀 더 생각을 확장시켜보자면 자기 분야 이외의 것들을 이해함으로써 단지 자기 혹은 자기 분야만 생각하던 이기적이고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나 서로가 상대방의 입장과 생각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이 사회가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이런 노력들이 조금씩 쌓이고 쌓여서 학문의 분야를 막론하고 그 경계가 허물어져서 이 책의 제목과 같은 ‘통섭‘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모든 학자들, 즉 자연과학자와 사회과학자 그리고 인문학자가 하나의 공통된 창조적 정신에 따라 활기차게 활동한다는 해묵은 만병통치약은 계속 이야기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그들은 창조적인 자매들일지는 몰라도 공통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 P231

학문의 커다란 가지들을 통합하고 문화 전쟁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과학 문화와 인문학 문화 간의 경계를 국경으로 보지 않고 양쪽의 협동 작업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미개척지로 보는 방법뿐이다. - P231

오해는 미개척지를 무시할 때 발생하는 것이지 정신구조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 P231

우리 인류가 유전적 진화에 병행하여 문화적 진화를 덧붙였으며 이 두 진화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견해(유전자-문화 공진화, gene-culture coevolution) - P232

문화는 공동의 마음에 의해 창조되지만 이때 개별 마음은 유전적으로 조성된 인간 두뇌의 산물이다. 따라서 유전자와 문화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 연결은 유동적이다. 얼마나 그런지는 불명확하지만 말이다. 또한 이 연결은 편향되어 있다. 즉 유전자는 인지 발달의 신경 회로와 규칙적인 후성 규칙(後成規則, epigenetic rules) 을 만들어 내고 개별 마음은 그 규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조직한다. - P232

마음은 태어나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성장한다. 물론 자기 주변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성장한다. 하지만 그런 성장은 개체의 두뇌를 통해 유전된 후성 규칙들의 안내를 받아 이뤄진다. - P232

뱀에 대한 공포뿐만 아니라 매혹을 이끌어 내는 선천적 경향은 후성 규칙이다. 문화는 은유와 서사를 창조하는 그 공포와 매혹에 의존한다. - P232

문화는 유전자·문화 공진화의 부분으로서 각 세대 구성원 개인의 마음 속에서 집합적으로 재구성된다. 구전 전통이 글쓰기와 예술을 통해 증보되면 문화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고 세대를 건너 뛸 수도 있다. 그러나 후성 규칙이 주는 영향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유전적인 것이며 제거될 수 없기 때문에 일정하게 유지된다. - P232

어떤 이들은 주변 문화와 환경에 더 잘 생존하고 번식하도록 해 주는 후성 규칙들을 대물림한다. 그리고 그런 규칙을 전혀 갖지 않은 사람이나 있어도 약한 규칙을 가진 이들은 생존과 번식에서 밀려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좀 더 성공적인 후성 규칙들은 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그 규칙들을 규정하는 유전자들과 함께 개체군 내에서 널리 퍼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인간 두뇌의 해부 생리적 구조가 진화해 왔듯이 행동도 자연선택에 의해 유전적으로 진화해 왔다. - P233

어떤 문화 규범은 경합하는 다른 규범들보다 더 잘 생존하고 번식한다. 이 때문에 문화는 유전적 진화와 유사한 방식으로 진화하지만 그 속도는 일반적으로 훨씬 더 빠르다. 문화적 진화의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유전자와 문화 사이의 연결은 더 느슨해진다. 하지만 그런 연결이 완전히 끊어지는 법은 없다. 문화는 정확한 유전적 처방 없이 고안되고 전달되는 정교한 적응들을 통해 환경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 P2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론 장강명 작가님의 작품을 처음 읽어보았는데, 저자가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구조와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심도있게 고민하고 생각해본 흔적들을 작품속에서 엿볼 수 있었다. 특별히 이 작품에선 아직 사회에 발을 내딛지 않은 젊은 세대 혹은 사회초년생의 고뇌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잘 풀어낸 듯하다. 완독후에도 독자들이 다양한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기서 일일이 얘기할 순 없지만 이야기 속에 숨겨져있던 것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상황이 급속도로 전개되고 묘한 긴장감이 흘러서 읽는 맛이 느껴졌다. 간만에 몰입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
.
.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나서 개인적으로는 뭔가 속시원하다는 느낌보다는 이래저래 생각해볼 것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마지막에 나온 작가의 말에서도 ‘소설 속 등장인물의 주장을 어떻게 반박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작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만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볼거리를 적절한 방식으로 던져줬다는 측면에서 이 작품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이 책에 추천사를 써준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남겨줘서 독자인 내가 이 작품을 그래도 허투루로 읽진 않았구나라는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별도로 독서토론을 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만약 이 작품을 완독한 독자들끼리 한자리에 모여 토론을 한다면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와 생각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할 때는 허우적거리는 손을 잡으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거짓말이라도 서슴지 않을 인간

일어날 수 있는 각각의 상황에 맞게 대응 계획과 백업 플랜을 준비하는 능력

별마로천문대는 가로등이 하나도 없는 산봉우리에 있었다.

그 옛날 소년 왕은 이곳에서 여러 차례 ㅈㅅ을 강요당했다. 청령포에서, 나는 3년 안에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퇴로가 끊겨버려 후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ㅈㅅ선언을 이기려면 세연이나 세화 못지않은 정교함과 치밀함으로 꽉 짜인 논리를 준비하고, 이벤트를 계획하고, 마케팅을 벌여야 한다. 그런 작업들을 진행하는 중에 언젠가는 사표를 제출해야 할 시점이 올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머릿 속이 텅 빈 상태였다. 다만 철저히 보통 사람으로서 생활에 기반을 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먼 바다에서 공기가 태양에너지를 듬뿍 받아 힘을 키우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열대성저기압은 갑자기 태풍으로 발달해 육지를 향하고 강한 비바람으로 그 존재를 과시한다.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힘은 이제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에 태풍은 곧 몇 번 들이치리라 생각한다. 그때 그 에너지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은 일을. 그건 그 에너지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일단 인간의 생명에 암묵적으로 금전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과연 그 가치는 얼마나 될까?

위험한 직업과 덜 위험한 직업의 임금 차이를 비교함으로써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에 어떤 금전적 가치를 부여하는지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이 임금 차이는 학력, 경력 등 임금수준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소들을 배제하고 계산해야 한다. 이런 방법을 사용한 연구들은 대체로 사람의 생명이 1000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말기암 환자들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을 거쳐 마지막에 수용의 단계에 접어든다고 하는데, 재키는 자신이 아직도 부정과 분노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산만한 정신상태로 죽음을 맞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죽음은 도피가 아닌가?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 속의 인물에게도 모두 운이 따르지 않았던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시대였다. 1000년 전이거나 일제강점기거나 아니면 독재시대거나.

아무리 추잡한 것이라도 멀리서 내려다보면 그런대로 참을 수 있다.

재키는 살아있는 모든 것이 불쌍해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최후의 순간에도 그녀의 마음은 평안해지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도 가라앉지 않았다.

재키는 마지막 순간에도 연쇄살인마처럼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만 연민을 느꼈다.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ㅈㅅ한 유명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베르테르 효과‘

‘언젠가는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허락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생각

이 책이 다루는 가능성은 20대를 옹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위대한 과업이란 철저히 개인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위대하다는 개념이 변질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위대함의 본질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고, 스토리텔링 기법으로만 묘사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젊은이들에게는 과업을 찾는 일이 바로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길이다.

사람은 적수가 누구인지 알 때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 게 된다. _새뮤얼 헌팅턴

20대를 정의하는 각종 담론이 대체로 공허한 이유는 그 청년세대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들의 과업을 찾는 것이 바로 지금의 20대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인지도 모르겠다.

장편소설을 쓰는 작업은 마라톤 풀코스 완주와 비슷했다. 처음 시작할 때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고 자신이 없었던 게 그랬고, 매번 3분의 1지점 쯤에서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 하고 마음이 흔들리는 게 그랬다.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게 두 가지 있다. ‘계속 쓰다 보면 끝까지 쓸 수 있다‘ 는 것과 ‘계속 쓰면 점점 나아진다‘ 는 것이다. 3분의 2 지점을 통과하면 그다음부터는 저절로 끝까지 가게 된다는 점도 글쓰기와 마라톤의 공통점이다.

‘위대함‘은 실제로는 별 중요한 의미가 없는, 고리타분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다른 뜻을 교묘하게 섞어놓은 단어에 불과합니다. ‘역사의 흐름이 바뀔 때 우연히 해당 장소에 있을 것‘ , 그리고 ‘개인의 한계라고 알려진 선을 넘을 것‘ 입니다.

위대함은 삶의 목표로 추구하기에 적당한 가치가 아닙니다.

저는 현대에 대단히 중요한 과업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과업과 무관하게 사람이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무가치하다고 무시하는 일에 매달려 끝내 의미를 찾아내고야 마는

"꼭 랠리를 완주하세요. 어떤 숨은 선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는 마릴린 맨슨의 앨범 <메커니컬 애니멀스> 의 첫 곡입니다. ...(중략)... ‘코마 화이트‘는 같은 앨범의 마지막 곡입니다.

비극과 재앙은 그처럼 싸움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ㅈㅅ이 비인간적이라면,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팽창해 젊은이들을 궁지로 내모는 자본주의의 욕망은 인간적인 것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다" _아도르노

문제적 작품은 모두에게 동의받기 위해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게 살아 있는 것인가.

당대 문학은 현재 살아가는 삶의 지형도를 그림으로써 더 나은 삶의 길을 가늠하는 일이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중요한 것은 그 좌표를 통해 방향을 설정하고 길을 만든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