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도 천재는 아니었다
김상운 지음 / 명진출판사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불과 일년  전만 하더라도 '애들은 열심히 놀고 건강하면 되지 공부하라고 들볶을 필요까지야....' 했던 내가 막상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조금씩 생각이 바뀌는 걸 보면 나도 영락없는 한국의 학부형이다.
동네의 작은 서점에 들러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 눈에 들어온 것이 겨우 '아버지도 천재는 아니었다' 라니....
예전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 지인들은 그럴 것이다.
"너도 별 수 없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애보다 부모가 더 몸이 달을테니 두고 봐라." 
서점을 나서는 내 뒷꼭지가 불편하다 느꼈던 것은 괜한 자격지심이었을 게다.
책의 내용은 우리가 흔히 보았던 성인용 자기계발서에서 더 나아간 것이 없다.
방송기자로 일하는 저자가 "왜 나를 천재로 낳아주지 않았냐?"는 딸의 푸념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저자 자신이 딸과 대화를 하듯 다정한  문체로 자신이 겪었던 에피소드를 섞어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생각의 힘과 몰입의 중요성, 목표의식과  마음관리의 방법 등 우리가 흔히 접하는 자기계발서의 내용과 특별한 차이를 느끼기 어렵지만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읽을 수는 있겠다.
공부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내가 느끼는 공부의 핵심은 동기의식과 지속성이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그 분명한 이유를 납득해야 하고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공부가 재밌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랑같지만 나는 학창시절에도 공부가 재밌었고 지금도 여전히 공부는 재밌는 오락처럼 느끼고 있다.
아마도 내가 중학교  1학년 시절이지 싶다.
당시 내가 다녔던 남자 중학교에는 유난히 여선생님의 수가 적었다.   지금이야 오히려 남자 선생님의 수가 적다고 아우성이지만 그때는 예체능 과목을 빼면 여선생님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교생 실습을 나오시는 선생님들 중에 여선생님이 있으면 모든 학생들의 관심이 그분께 집중될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 사회 과목을 담당하는 교생 선생님이 실습을 나왔다.
늘 뒤에서 담당 선생님의 수업을 참관만 하시더니 하루는 교생 선생님이 직접 수업을 하신단다.  사춘기 사내아이들이 다 그렇겠지만 싱글벙글 하는 아이들 표정에서 들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교생 선생님의 자기 소개와 짧은 수업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시간.
나는 기회가 왔다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더구나 선생님은 어떤 질문이라도 상관없다고 말씀 하지 않으셨던가. 
"선생님, 코샤크족이 뭐예요?"
일순 교실이 조용해지고 선생님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더니 말조차 더듬으셨다.
조금 경력이 있는 분들이라면 대충 얼버무리고 마셨을테지만 처음 강단에 서신 그 선생님은 그럴만한 융통성이 없었다.   선생님은 종이 울리기도 전에 출석부 챙기는 것도 잊은 채 교실을 뛰쳐나가셨다.  그 이후 수업이 몇번 더 있었지만 질문은 받지 않으셨고 책을 읽으실 때는 나를 요주의 학생으로 생각하셨던지 강단을 내려와 내 주위를 맴돌았다.
가끔 퇴근시간에 나와 몇몇 친구들을 불러 학교 앞 빵집에서 빵을 사주시기도 하며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다 그때의 질문 덕분이었다.
물론 나는 질문을 하기 전에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고골리의 < 대장  불리바>나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여러 번 읽었던 나는 코샤크족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설명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나는 '공부는 정말 재밌는 것이구나' 라고 진심으로 느꼈다.
비록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공부에 한번쯤 미쳐본 사람만이 그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아직도 공부가 재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원의 바람을 가르다 - 고도원의 아침편지 '신영길의 길따라 글따라' 몽골 여행기
신영길 지음 / 나무생각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낙    화
             이 형 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아름다운 이별을 기대하며 여행을 떠나던 적이 있었다.

이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늘 홀로 떠났던 여행. 

여행지의 사람들과 풋사랑처럼 정들고 뒤돌아설 때 한 줄기 눈물을  기대하는 여행.

내게 여행은 이별의 기억을 간직하는 짙푸른 슬픔이었다.

그랬다.  여행은 시인이 노래하듯, 가야할 때를 기약하고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내 여행의 기억은 만남보다 이별이 먼저 떠오른다.

책의 맨 뒷장을 펼쳤다.  내가 그랬듯 작가의 이별을 먼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별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얼마 전에 읽었던 작가의 작품 <나는 연 날리는 소년이었다>에서 그가 보여준 풋풋한 감상과 아마추어 작가다운 신선함에 한껏 매료되었었는데......

몽골 초원을 향하여 떠났던 그의 여행은 바람과 말과 초원과 칭기즈칸과 별과 먼지, 그리고 이름 모를 야생화의 반복과 기성작가의 못된 습성을 조금씩 닮아가고 있었다.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신선하지만 조금 부풀려진 감성, 옅은 미소를 떠올릴만한 과장된 표현에서 독자는 자신의 현실을 잊고 작가와의 여행을 기꺼이 허락할 수 있건만.....  작가의 감성이 메마른 탓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한 권의 책을 낸 그가 기성작가의 흉내를 내고 싶어서였을까.  자신의 느낌과 억지춘향으로 지면을 채운 인용문이 뒤섞여 여행의 감흥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여행지에서 메모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썼음직한 글들도 간혹 보이지만 그마저도 다른 인용문들에 가려 빛을 보기 어려웠다.

지금은 작고한 조병화 시인이 자신의 회갑을 기념하여 발간한 책에서 앞에 쓴 내용을 수없이 반복하며 지면을 메운 모습을 접한 후에 다시는 그분의 책을 사지 않았던 경험이 있다. 

책을 덮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쓸 말이 없을 때는 한줄의 글로 줄일줄 아는 용기가 작가를 작가답게 하지 않을까?  자신의 욕심으로 꾸민 한 권의 책보다는 한줄의 메모가 읽는 이의 가슴을 적실 때가 있음을 그는 몰랐던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연 날리는 소년이었다
신영길 지음 / 나무생각 / 200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꿈속에서 꿈을 꾸듯 여행 속에서 또 여행을 떠나는 이치가." 작가 신영길의 글은 그렇게 시작하여 "가장 뚜렷하고 아름다운 아이콘을 남기려고, 북극성처럼 빛나는 화인을 내게 남기려고, 그렇게 내 안에서 아프게 타는 냄새가 진동했나 보다."라고 끝맺는다.

평생 '글'이란 것을 써보지 않았던 그가,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고 방황하던 그가 자신을 찾아 먼 이국땅 바이칼 호수를 찾아 떠나는 명상여행.

몽골의 울란바토르 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이루쿠르츠크의 바이칼 호수로 향한다.

십대의 중학생에서부터 육십 대의 은퇴한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일터에서 전혀 다른 일과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칠십여 명의 일행과 함께.

작가는 눈 쌓인 평원에서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순백의 자작나무 숲을 거닐며, 깊이를 알 수 없는 바이칼 호수에 누워, 별이 쏟아지는 광야에서 시를 노래하고, 사랑을 외치고, 화석처럼 굳어진 전설을 떠올린다.

 

  "마음을 닫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내 무지함이 탄로날까봐, 내 안의 황페함이 드러날까봐 두렵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닫고 사는 때가 있다.  어느 때, 무슨 연유로 자물쇠를 걸게 되었는지조차 기억에 없다.  마음을 열려고 해도 이제는 열쇠를 찾지 못해서 열지 못한다."(P.167)

 

아마추어 작가의 글은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조금은 과장된 표현이 그렇고, 지나친 감상(感傷)이 그렇다.

바이칼 호수보다 깊은 자신의 밑바닥, 그 내밀한 본능이 그렇고, 서툰 몸짓이 그렇다.

그래서 신선하다.  서편제를 사랑하던 작가는, 안도현과 고정희의 시를 읊고, 사랑을 찾아 떠난 '정임'을 그리워한다.  그 뚜렷한 바이칼의 얼음 파도에 사랑의 무늬를 새긴다.

 

  "그곳에 내가 있었다.  거룩한 곳 바이칼에.  눕고 싶었다.  바다처럼 누웠다.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었으면, 나 자신이 신의 원고지가 될 수 있다면....."(P.105)

 

 

자신을 찾아 떠났던 명상여행.  작가의 글은 '고도원의 아침편지'에 '신영길의 길따라 글따라'라는 코너에 소개된 것을 모아 출간한 것이라 했다.

글의 조탁이 때론 기계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글쟁이가 아닌 순수 아마추어의 신선한 글이 설원의 자작나무 숲을 지나쳐 한파가 몰아치는 세밑에 내게로 왔다.

그의 글은 숨어드는 내 가면의 삶을 꺽꺽 토하게 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늘바람 2010-03-12 15:32   좋아요 0 | URL
음 일고 싶네요.

꼼쥐 2010-03-12 20:4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여행기입니다.
책을 읽으면 즐거운 시간이 되실듯....

L.SHIN 2010-03-19 19:27   좋아요 0 | URL
아! 바이칼 호수라니!
요즘 지구과학 책을 보면서 바이칼 호수에 호기심이 일었는데,
여기서 보다니 반갑습니다. 책 구경 하러 가야겠습니다.^^

꼼쥐 2010-03-19 22:00   좋아요 0 | URL
네, 즐겁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내 생각을 차근차근 살펴보면 옛사람의 생각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생각의 방향이나 영역 면에서 일정한 틀을 유지하는 것은 굳어진 화석처럼 반복되는 관습 속에는 행동과 더불어 생각도 대물림되고 있음이다.

책에 비유하자면 초판에서 내용만 살짝 바뀐 개정증보판 정도라고나 할까?

이런 까닭에 과학의 놀라운 발전에 비해 인문학의 수준이 늘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진실이라고 믿어온  생각들은  여전히 진실이라 믿고 따르게 되고, 타인의 생각이 내 생각인 양 수용하는 데 너무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스펙트럼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행위, 즉 '의심'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은 잊혀진 지 오래다.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혀지고 있다.
그러므로 √3이 무리수임을 증명하기 어렵듯이 우리가 잘 알고 있고 당연하다 여겼던 것들은 오히려 설명하기 어렵다.  간혹 우리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잘못된 내 생각의 몇몇을 바로잡아 본다.

 

1. '기적'과 '절망'의 거리는 우리의 생각처럼 멀지 않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생각보다 일찍 오면 '기적'이 되고, 조금이라도 늦게 오면 절망이 된다. 

    우리는 그 거리를 알지 못한다.

2. 시간은 항상 일정한 속도로 흐른다.

   우리는 가끔 게으름으로 뻗대면 시간이 천천히 흐를 것이라 믿는다.

3. 중독은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과 마주할 용기가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중독이 좋아하는 대상으로 끌리는 현상이라 이해한다.

   중독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을 끊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4. 사랑을 지속하기 어려운 것은 일상에서 비이성적 시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과도하게 커졌기 때문이다.

   이성과 감정은 늘 균형을 유지하려는 속성이 있다.

5. 우리는 돈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을 넘어선 탐욕을 미워하는 것이다.

6.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순간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것은 분산된 가능성이 한곳으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은 추락할 여력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바닥을 딛지 못하는 허공에서 우리는 희망을 말하곤 한다.

7. 사랑에 욕심이 개입하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헌신할 것을 강요한다. 

   일말의 욕심도 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경우는 '신의 사랑'이 유일하다.

8. 버릇없는 행동은 예절을 지켜야 하는 까닭을 납득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우리는 그의 무례함만을 보고 있다.

9. 우리는 웃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웃고자 하는 그의 노력을 부러워 하는 것이다.

   웃음에는 항상 노력이 따른다.

10. 삶이 두려울 때는 현실이 어려울 때나 행복할 때 둘 다에 해당한다.

    우리는 현실이 어려울 때만 삶이 두렵다고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독서일기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예전부터 좋아해온 몇몇 책들을 다시 읽어보기로 결심한 건 쉰세 번째 생일을 맞은 2년 전이었는데, 겹겹이 포개지고 복잡한 과거의 세계들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암담한 혼돈을 반영하는 듯한 모습에 또 한 번 깊은 인상을 받았다.  소설 속의 한 구절이 불현듯 어느 신문 기사에 통찰력을 제공하는가 하면, 이런저런 장면에서 반쯤 잊었던 일화가 떠오르고, 낱말  하나를 단초 삼아 긴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나는 그 순간들을 기록해보기로 했다.
그러다가 1년 동안 한 달에 한 권씩 다시 읽는다면 개인적인 일기와 일반적인 책의 중간쯤 되는 뭔가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P.9)

이 책의 성격에 대하여 작가는 위와 같이 밝히고 있다.
자신의 개인적 일기와 작가가 선정한 12권의 책을 통한 사색.  작가의 시선을 통해 한 자 한 자  일깨워진 그 12권의 책은 나의 일상에서 마치 1년을 살았던 것처럼 익숙하다.
평생을 독서광으로 살았던 작가의 해박함과 놀라운 기억력,  일반 독자의 수준과는 너무나 먼 거리감으로 그의 시선을 좇아 한 해를 순환한다는 것은 내게는 힘겨운 일이었다.
어른의 발걸음과 억지로 보조를 맞춰야 하는 세 살 배기 어린애의 심정으로  이 책을 읽었다. 
작가가 언급하는 작가만도 수백 명에 이르고, 한 번쯤 읽었음직한 작품도 나의 기억력은 그를 따라가기 어려웠지만, 그의 독특한 발상과 같은 주제에 대한 통시적 언급은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의 6월은 아르헨티나 작가 아돌프 비오이 카사레스의 소설 <모렐의 발명>으로 시작되었다.
시간에 얽힌 실제하는 삶.  그 4차원의 일상을 작가는 영상과 같은 2차원의 평면에서 영원성을 부여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다.  작가의 일상은 활자화된 2차원의 평면에서 시간이 정지된 채 멈추어 있다. 
7월.  H.G. 웰스의 <모로 박사의 섬>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사악한 신과 잔혹한 괴물의 이중성.  운명이 인간과 짐승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8월. 인도에 사는 백인 소년이 라마승과 정신적인 유대감을 나누며 친구가 되어 서로 우정을 쌓고, 순례를 통해 점차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러디어드 키플링의 작품 <킴>.
순례자의 발걸음처럼 결국 끝이란 없다.  인간은 그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9월.  결국에는 아무것도 소멸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샤토브리앙의 작품 <무덤 저편의 회고록>
현재가 항존(恒存)한다고 생각하는 우리.  '사건'이라는 항존하는 유령을 필요로 하는 대중.  필사의 운명을 지워버리려는 몸부림.  죽음이 우리를 건드리더라도 우리를 파괴하는 건 아니며 단지 우리를 보이지 않게 만들 뿐이다.
10월.  아서 코넌 도일의 작품 <네 사람의 서명>
권태로움에 대한 치유로 균형을 모색하는 것.  균형 회복은 모든 추리소설의 주제일 것이다.
11월.  금슬 좋은 부부 사이였던 에두아르와 샤로테 사이에 에두아르의 친구인 대위와 오틸리에가 끼어들면서 그들 사이에 싹트는 애정의 반응을 묘사하는 괴테의 작품 <친화력>
우리는 운명이 우리를 위해 이미 골라놓은 가능성을 선택한다.
12월.  케네스 그레이엄의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안락함을 묘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그레이엄의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의 집과 조국,  고향을 추억한다.
1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이상주의적 인물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적 인물 산초를 통하여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내면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읽으며 삶이 의미있다고 우리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믿고, 인정하고, '맹세로' 다짐할 것을 요구한다.
2월.  이탈리아의 소설가 디노 부차티의 작품 <타르타르 스텝>
군대라는 폐쇄적인 공간과 명예욕에 찌든 인간상에 대해 통렬히 비판한 부차티의 작품은 오직 자신에게만 주어진 시간의 길을 걸으며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 자신의 역량을 입증하려는 주인공 도르고는 우리의 삶과 너무나 닮아있다.  "모든 작가와 화가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단 하나의 똑같은 주제만을 말한다."고 했던 부차티의 말처럼.
3월.  10세기 말 일본의 황후를 모시던 궁녀인 세이 쇼나곤의 <필로우 북>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네 일상을 보여주는 헤이안 시대의 저작. 그 기억의 편린.
4월.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 <떠오름 Surfacing>
한 여성이 퀘벡 북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이야기.  폭력과 죽음의 떠오름.  역사를 지닌 것은 뭐든 제거하고 오로지 야생의 자연하고만 소통하고자 하는 주인공.
5월.  브라질 작가 마차도 데 아시스의 자전적 작품 <브라스 쿠바스의 유고 회고록>
죽음을 통해 우리가 왜 태어나는지에 대한 해묵은 질문의 답을 직관적으로 통찰하는 사후에 쓰는 회고록.  마차도 데 아시스가 생각하는 사후는 자아성찰을 위한 완벽한 공간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쓴 작가 안정효를 생각했다.
놀라운 기억력을 지닌 작가.  어쩌면 알베르토 망구엘의 머리 속에는 수많은 작가의 이름과  작품 속 구절들이 백과사전처럼 정렬되어 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곳에는 시각적 이미지가 아닌 잠재된 언어의 자연스런 나열이 훨씬 자연스러우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