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지만 행복하게 - 자연과 공동체 삶을 실천한 윤구병의 소박하지만 빛나는 지혜
윤구병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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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명절을 쇠고 마음이 스산하여 집어든 것이 바로 이 책, 윤구병님의 새내기 농촌 체험기라 할 수 있는 <가난하지만 행복하게>였다.
어제는 점심을 먹고 햇살 좋은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소슬한 막새바람이 부는 한적한 공간에도 아이들 웃음 소리가 싱그럽다.
공원 한켠에는 키 작은 다복솔과 이름 모를 수입 활엽수들이 어색한듯 ’더불어 숲’을 이루고 있다.
작은 땅뙈기에서도 생명은 저리도 넉넉한데 나 같은 도시내기들은 한겨울처럼 외롭다.
삶이 시리도록 춥고, 작가의 글은 머리가 아리도록 아프다. 

 볕이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과 부드러운 바람.
이런 날은 항상 슬그머니 과거로 뒷달음질을 치려는 생각과 한바탕 드잡이질을 해야 한다. 
단풍이 들기 전까지는 생각도 현재에  발을 꽁꽁 묶어 놓아야 하는 도시의 시계는 잠시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생각도 이럴진대 일탈을 꿈꾸는 몸뚱아리야 더 일러 무엇하리요.

불현듯 저자가 부러워진다.
대학 교수로 15년을 살았던 생짜배기 ’도시 촌놈’이 어찌 농촌에 가서 살 생각을 했을까?
바람처럼 흩어지는 도시의 시간대(時間帶)에서 어느날 문득 유성처럼 내팽겨쳐졌던 것인가, 아니면 이 앙다물고 제 발로 도시 시간대의 인력장에서 벗어난 것인지... 
시간은 절대적 개념이 아니다.
오늘처럼 가을이 깊어가는 볕 좋은 날엔 부는 바람마저 도시의 그늘에서 속력을 더한다. 
덩달아 도시인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급기야 째깍이는 초침마저 바빠진다.
철모르던 사람이 철따라 흐르는 시골의 시간대에서 일머리가 트이고 일손이 익어가는 과정은 도시의 시간처럼 늘리거나 줄어들 수 없는 자연의 엄정한 시간에 따른다는 것을 작가는 세월에 묻혀 배우고 있었다.

 "생명의 시간 가운데 텅 빈 시간이란 없다.  사람이 마음대로 분으로, 초로 쪼개서 그 안에 특정한 인간 집단의 삶의 방식, 가치관, 관습과 도덕을 아로새길 등질적이고 획일적인 시간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도시인들은 문명을 통해서 그런 시간을 창조해냈다.  그 도시가 바빌론이건, 아테네건, 로마건, 뤄양이건, 도쿄건, 서울이건, 워싱턴이건 상관없이, 모든 도시는 도시인들이 추상해낸 등질적인 공간 표상에 따라 인간만을 위한 삶터로 바뀌고, 그 안에서 도시인들은 미개한 야만인들의 나라 아프리카를 두부모처럼 잘라내어 식민지를 만들거나 하룻밤 사이에 직선으로 삼팔선을 그어 야만스러운 미개인 ’조센진’들이 아들의 가슴에, 아비의 등에, 형제의 옆구리에 총칼을 들이대게 만든다."(P.296) 

더디게 흐르는 듯 보여도 생명의 에너지를 허투루 소비하지 않는 자연의 시간에 적응하는 것은 ’도시 촌놈’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탐욕만 키우는 도시의 시간대에서 물질과 향락의 노예가 된 도시인들이 세월따라 사랑과 정을 키우는 자연의 시간대에 적응한다는 것이 어줍잖은 말로 사랑을 고백하는 풋내기 첫사랑의 낭만처럼 쉬운 일일까마는 작가는 잘도 적응하나보다.
철학을 전공한 작가가 산 설고 물 설은 곳에서 잊혀져가는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공동체를 이루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야기들이 내게 푸근함으로 전해지기 보다는 날선 비수로 꽂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습니다.  사랑은 늘 현재입니다.  ’사랑했노라’는 말도 빈말이고, ’사랑하겠노라’는 말도 헛된 약속입니다.  사랑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늘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는 저세상이거나 관념의 공간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는 오늘 이 순간이고 지금 이곳입니다.  우리가 뿌리내리고 사는 구체적인 현실이고 더 어렵게 말하면 ’현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P.256)

언젠가 내가 아는 스님 한 분이 다 먹은 수박의 껍질을 다람쥐 친구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라며 즐거워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생명을 키우는 넉넉함이 한없이 그리운 날이다.
메말라 가는 사랑이 이 가을에 여무는 씨앗처럼 단단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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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게 나이 드는 법 - 죽을 때까지 삶에서 놓지 말아야 할 것들
전혜성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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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夜雪)            

踏雪夜中去

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때

 

不須胡亂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今日我行蹟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遂作後人程

뒤따르는 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니


 

백범 김구 선생께서 즐겨 읊으셨으며 그분의 좌우명이기도 했던 서산대사의 선시 야설(夜雪) 이다.
해마다 나이를 더하면서도 내 뒤를 이어 걸어갈 후손을 생각하기는커녕, 내 몸뚱아리 하나도 지탱하기에 버거움을 느끼면서 살아왔던 내 삶은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는 궁색한 변명으로는 무언가 설득력이 부족하다.
저마다의 재주는 제각각이라 할지라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언가 보탬이 되고자 하는 생각만으로도 우리네 인생은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19살의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떠났던 전헤성 박사의 <가치있게 나이 드는 법>을 읽었다.
1948년에 미국으로 떠나 올해로 여든한 살이 되었다니 그 지난한 세월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된다.  그럼에도 그녀는 학자로서, "동암 문화 연구소(East Rock Institute)"를 이끄는 사회 활동가로서, 6남매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현역이다.
"사람은 절대 재주가 덕을 앞서면 안 된다.(one’s skill should never exceed one’s virtue)"고 말씀하신 저자의 어머니와 "이 세상에 얼마나 이익을 주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위대함이 결정된다"고 가르치신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평생을 올곧이 살아온 저자의 모습은 천상 학자이다.  자신이 설립한 <동암 문화 연구소>를 통하여 전 세계에 한국 문화를 알리는 것과 뒤를 따르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팔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노력하고 있으니 말이다.
동암문화연구소는 전혜성 박사의 일가 자료 외에도 8만여건에 달하는 미국 내 주요 도서관 한국 관련 자료 소장 목록카드와 한국과 동양의 문화ㆍ예술ㆍ사회ㆍ여성ㆍ음식문화 등에 대한 행사자료, 차세대 재미교포 리더 양성을 위한 교육자료 등 다양한 자료를 국립중앙도서관에 제공하고 있다.


저자의 남편이자 초대 주미특명전권공사를 지낸 故 고광림 박사와 두 아들인 고경주, 홍주 박사는 2004년 ’미국에 가장 공헌한 한인 100인’에 뽑히기도 했었고,또 여섯 자녀가 모두 하버드대와 예일대를 졸업하고 가족이 취득한 박사학위가 11개에 달하며 이번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고경주, 홍주 박사는 차관보급에 임명됐으니 성공한 이민 세대로서 편안히 쉴 수도 있겠으나, 저자는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휘트니 센터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자신의 삶을 통하여 세상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작은 동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학자로서의 사명감과 소명의식은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돌아보게 했다.

1989년 저자의 남편이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신을 일으켜 세운 세가지 원칙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첫째는 마지막까지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정직하게 사는 것이고. 둘째는 얼마가 되었든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삶에 대해 수시로 평가하고 반성하는 것이었다. 나는 일생을 통해 이 세 가지를 잊지 않고 명심한다면 누구나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P.40)

내가 매일 아침 걷는 등산로는 매주 주말을 지나면 버려진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다.
대부분의 등산객은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줍는 사람이 없다.
내일 아침에는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서서 그것부터 줏어야겠다.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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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의 탐독 - 정성일의 한국영화 비평활극
정성일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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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아주 단순했다.
차안에서 우연히 듣게 된 책속의 한 구절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단순히 그랬다.  우연이 필연으로 만나는 그 한순간이 책과의 인연을 결정했다는 것, 전체 내용이 아닌 짧은 구절이 맘에 들어 책을 펼친다는 것은 지극히 낭만적이라고 받아들여질 충분한 근거가 되겠지만, 나는 그 대척점에 서서 무모했던 자신을 비난하며 책을 읽어 나갔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정은임 아나운서에게 쓴 애도의 글.
<정은임의 영화 음악>을 진행하던 아나운서와 게스트의 관계였던 작가가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애잔함을 넘어 짙푸른 울음과도 닮아있다.
"첫 문장은 백번을 고쳐서 다시 써도 도무지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쓸 생각이다.  그것만이 내가 당신을 잠시라도 불러 세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멋지게 쓰려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  슬프다기보다는 그냥 아프다."(P.39)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난 후 두 달 동안 낙타만 그렸다는 작가는 자라서 그토록 좋아하는 영화의 평론가가 되었다.
겉도는 관계로 스쳐 지나쳤을 법한 진행자와 게스트의 자리.  한 진행자의 죽음이 작가를 그토록 저리고 아프게 했던 까닭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분야에서 그들은 서로 만났고, 서로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경청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나는 그 프로의 애청자로서 아직도 고인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나의 서평은 여기까지가 다이다.

사실 나는 평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라고 하면 어폐가 있지만 자라면서 평론에 대한  거부반응을 꾸준히 느껴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통합된 작품을 갈가리 찢어 작은 조각마다 메스를 들이대는 해체적 분석은 끔찍하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거만하며 다소 무례하기까지 한 글(평론)을 좋아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싶다.  그럼에도 나는 평론을 읽을 때마다 알 수 없는 고까움을 느끼곤 한다.  그 중심에는 인내하며 끝까지 읽어야 할 필요성의 부재가 언제나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영화를 평하는 글은 그야말로 평론을 위한 평론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란 본시 현실 너머의 현실, 현실을 가장한 작위적 실체와 관객의 집단적 환상이 만나는 것인 만큼 평론은 무의미하다.  스크린 속의 스토리는 언제나 환타지일 수 밖에 없고, 관객은 그 시각적 환영에 몰입되어 현실을 잊는다.  영화를 본다는것은 일종의 감독이 만든 마술에 걸려든 관객의 최면 상태, 현실을 사는 관객이 일상의 따분함과 지루함 등 마주하기 싫은 모든 요소를 배제한 기형적 실체를 보는 집단적 광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적 잣대로 낱낱의 영화적 도구(또는 쇼트)를 분석한다는 것은 그 글을 읽는 독자(또는 관객)와는 거리가 먼 관심 밖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500 페이지를 훌쩍 넘긴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갖고 있는 영화적 소양과 그의 글에서 풍기는 알 수 없는 흡입력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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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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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독특한 책이다.
아니, 독특한 사람이라고 해야 옳겠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지만, 자신만의 독서법이 있고, 책에 대한 취향이 있고, 자신만의 독서관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자신의 선에서 끝날뿐이고, 타인이 수긍할만한 독서론으로 인정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날이 책의 매출이 떨어진다고는 하나 여전히 독서 인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만의 독서법과 독서론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지知의 거장’으로 불리우는 작가의 광적인 지적 욕구와 다독과 속독으로 대변되는 그의 독서법은 부러움과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는 듯하다.
요즘 내가 선택한 독서법과 견주어 볼 때, 나조차도 선뜻 동감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은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지난 날에 읽었던 책 중에 다시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읽고 있으며, 그 내용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고 있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음악적 책읽기’인데 작가는 이 방법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듯하다.  오히려 책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피고 끝까지 읽어야 할 책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여, 도움이 되지 않을 책은 과감히 그만두고, 읽어야 할 책은 빠른 속도로 읽는 ’회화적 책읽기’를 권하고 있다.  나는 그의 독서법을 비판할 의향은 전혀 없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하고 있는 작가의 열정이 그저 부러울뿐이다.
  "아마도 끊임없는 삶의 연속선상에서 보는 것,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 이 세 가지를 반복하고 피드백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 날 정신적인 비상을 이루는 때가 찾아와 모든 것을 직관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야말로 나의 생활을 지탱해 준 기대이자 신념이었다."(P.185)
수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인간의 한계를 실험하듯 다양한 전문 분야를 넘나들며 글을 쓸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 더하여진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학창시절 이후 문학이나 교양 서적을 거의 읽지 않고 있다는,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작가의 거침없는 발언이 결코 지적 오만이나 거드름으로 비춰지지 않는 까닭은 그는 이미 평범함을 넘어선 ’비범함’의 단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리라.
"세상에는 시간이 많은 사람과 너무 바빠서 정신없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많을까.  시간이 많은 사람 쪽이다.  그리고 출판계의 상당한 부분이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의 시간 보내기용 소비(시간도 돈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을 위한 책이 서평에서도 지속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추세이다."(P.215)
........................(중략)......................................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이 좋아하는 책과 그들이 쓰는 ’맛깔 나는’ 문장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런 사람들이 쓰는 서평은 기본적으로 읽지 않는다.  읽더라도 대충 훑어보며 책 제목은 재빨리 체크하고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읽는 정도이다.  나의 서평은 그렇게 취미로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 세상에는 서평을 취미로 쓰는 사람들이 일생 동안 한 번도 펼쳐 볼 일이 없는 책 가운데, 그들이 좋아하는 책보다 몇 배나 귀중한 책이 산더미처럼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P.216)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얼마나 시간이 많은 사람인가' 하는 자괴감으로 마음이 내내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만의 독서론을 갖게 되기까지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할까' 하는 반성도 같이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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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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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리뷰는 그동안 내가 써왔던 글과는 방법을 조금 달리해야겠다.
나는 고집스럽게도 분석적 리뷰를 싫어했었다.  주제와 인물, 구성 등 소설의 각 요소를 일률적으로 분석하는 리뷰는 소설에 대한 일종의 모독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설은, 어쩌면 문학 전체가, 자연스러운 녹아듬 또는 조화로운 혼합이기에 분류하고 분석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독자가 리뷰를 씀에 있어서도 자신의 삶에 녹아든 조화로운 감동을 글로 옮기는 것이 적당하리라.  분류하고 분석하는 방법이 비록 읽는 이가 쉽게 이해하고 필요한 부분만 읽을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으나 이는 자연과학에나 어울릴 법하다.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방식을 나는 이 책의 리뷰에 적용하고자 한다.
여러 이유가 있었고 고민도 많았지만 내 사고의 틀에서 달리 더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 그 주된 이유가 될 것이다.  아마도 사회주의 국가에서 나고 자란 작가의 의식이나 글쓰기 방식이 나를 그렇게 유도했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집필 의도와 주제

실화를 바탕으로 썼다는 이 소설은 미리 설정한 듯한 부자연스러움이 다소 흠이라면 흠이지만 작가의 혼과 열정이 배어 있는 좋은 작품이다.  무엇보다 작가는 삶의 근원을 인간의 욕망이라 규정하고 그 전면에 부와 권력 그리고 욕정을 내세우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이야기의 화자가 죽은 자라는 것인데, 삶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탐구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감안하면 그 까닭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숲 안에 있을 때에는 숲을 바라볼 수 없듯 작가도 삶 안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삶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판단했으리라.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작가는 ’생명의 연약함과 탐욕의 강대함’을 쓰고자 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탐욕 앞에 작고 무기력한 인성과 사랑이 결국에는 승리하게 된다는 것을 믿고 싶었나 보다.

주요 등장 인물

나(딩샤오창)
매혈을 비롯한 갖은 악행으로 마을 사람들의 원성을 한몸에 받고 있는 아버지(딩후이)와  삼촌(딩량)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열두 살의 나이에 독살 당했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후에 아버지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현의 최고 책임자인 가오 현장의 딸과 음혼(陰婚:영혼 결혼식)을 추진한다.  가오 현장의 딸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간질로 죽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눈과 꿈을 통하여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아버지(딩후이)
정부 주도로 매혈이 시작되자 사설 채혈소를 차려 마을 사람들로부터 규정량 이상의 혈액을 채취하고, 불결한 주사기를 사용함으로써 마을에 열병을 퍼뜨린 주범이다.  ’혈액 왕’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매혈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많은 사람들이 열병으로 죽어가자 정부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관을 판매하기도 하며, 결혼을 못하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 돈을 받고음혼을 주선함으로써 상상할 수 없는 부를 획득한다.  나의 여동생과 어머니를 데리고 딩씨마을을 떠나 신시가지로 이사를 한 후 공원묘지를 조성하여 더 많은 재산을 모으려 했으나 할아버지에 의해 살해된다.  작가는 아버지를 물욕의 화신으로 상정하고 이야기 전체를 이끌어 간다.

할아버지(딩수이양) 
한평생 학교에서종을 치는 일을 담당했던 할아버지는 선생님 중에 결원이 생겼을 때 이를 대신해서 아이들을 돌보고 어문 수업을 가르치기도 했던 까닭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탐욕에 물든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배척되고, 부도 권력도 소유하지 못한, 늙고 노쇠한 인물로 그려진다.  작가의 입장에서 인성의 상징인 할아버지를 통하여 삶에서 인성의 미약함과 숨겨진 정의를 독자들의 동정심에 호소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할아버지는 나의 음혼식날 아버지를 죽이고 감옥에 갇히셨다가 마을로 다시 돌아온다. 

삼촌(딩량)과 링링 
삼촌과 링링은 매혈로 인해 열병을 얻고,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에 놓인다.  둘 다 결혼을 했었지만 마을에서 열병에 걸린 사람들만 학교에 격리시키자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삼촌과 링링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사촌 동생의 아내였던 링링을 사랑하는 삼촌.  그들의 불륜은 학교에서 생활하던 마을의 다른 열병 환자들에게 발각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할아버지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잃는다.  이 기회를 틈타 쟈껀주와 딩유에진이 마을 사람들을 꾀어 마을을 관리하는 위치에 오른다.  역설적이게도 욕정에 사로잡힌 삼촌과 링링은 열병으로 인해 서로를 만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쟈껀주와 딩유에진   
딩씨마을에서 열병에 걸려 학교로 격리되었던 쟈껀주와 딩유에진은 딩후이가 딩씨마을을 떠난 후 딩량이 링링과의 불륜을 계기로 마을을 관리하는 책임자의 위치에 오른다.  할아버지를 협박하여 딩후이가 지니고 있던 관인을 자신들의 손에 넣게되자 학교의 모든 물건을 자의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분배하고,  관을 짜기 위한 벌목을 허가한다.  쟈껀주는 자신이 죽기 전에 할아버지를 찾아 딩후이가 딩씨 마을에 다시 오면 죽이겠다고 말하며 딩유에진이 갖고 있는 관인을 자신이 죽은 후에 자신의 관 안에 같이 묻어줄 것을 요구한다.  죽어가면서도 권력욕에 눈이 먼 상징적 인물로 그리고 있다.

맺음말
삶은 죽은 자의 꿈이었고, 산 자의 현실이었다.
인간의 탐욕으로 빚어진 절망과 불행의 구렁텅이를 관조적 입장에서 정직하게 밝히는 것, 그것이 작가의 입장이었기에 산 자가 말하는 삶의 모습은 더이상 필요치 않았다.
할아버지의 꿈은 나의 현실이었고, 이야기는 그렇게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전개된다.
작가의 혼과 열정이 느껴지는 작품.  작가는 집필 후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두 줄기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늑골을 뽑아가기라도 한 듯이 온몸이 흐느적거렸다.  고독과 절망의 강력한 압박에 무력감이 느껴졌다.  인간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드넓은 대해에, 새 한 마리 날아오지 않는 외딴 섬에 홀로 버려진 것 같았다."(P.456)
틀에 짜맞춘 듯한 구성, 아무리 아들이 미워도 아비가 어찌 자신의 아들을 살해할 수 있을까 의문을 품게 하는 비현실적 요소가 소설의 맛을 조금 떨어뜨리는 감은 있지만 중국 농촌의 비애를 알게 된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P.S.  불행하게도 오타가 너무 많아 독서를 방해할 정도이다.

른 아침이라 그런지 해는(P.61)
찻잔에 차를 따라 놓기만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갖춰지는 셈이었다.(P.65)
교정 안에 가득했던 흰 눈이 사람들의 발에 밟히면서 한 조 진흙땅이(P.89)
수십 명의 사람들이 앉거나 선 채로 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P.91)
교정 안에는 따스함과 고함이 가득했다.(P.148)
여러분들 내게 미안해할 일이 있으면 있었지(P.182)
간통 현장에서 붙잡힌 일과 관련된 문제도 아니라는 사실을 것을 알게 되었다.(P.216)
그토록 성대한 연극 내막을 알지 못한 채(P.219)
얼굴의 종가 조금 가려웠지만 감히 손을 올려 긁지 못하고(P.274)
링링과 내가 함께 묻힌다 해서 누가 감히 다시 파내기라 하겠냐 말이야?(P.331)
다음 침대 맡에 앉아 삼촌의 자는 모습을(P.332)
한밤중이 되면 간신 잠이 들지만, 잠들 무섭게 해가 창문과 문틈으로(P.380)
그가 할아버지 낮은 목소리로 아저씨라고 불렀다.(P.391)
자신을 따라온 학생들게 끊임없이 뭔가를 지시하고 있었다.(P.400)
작은 구멍가게는 이미 문을 닫은 오래였고(P.403)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우리 집 딩씨마을에 있다는 사실뿐이었다.(P.431)
온통 모래 성이인 황허 고도에(P.433)
리얼마을이 햇빛 아래 더없이 고하게 펼쳐져 있었다.(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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