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페터 빅셀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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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책이다.
먼저 그것을 전제로 시작해보자.
작가는주변의 소소한 일상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기교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체로 말한다.
평범한 이야기를 전혀 평범하지 않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그의 칼럼은 독특하다.
재치와 위트를 적절히 구사하는 촌철살인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17C 프랑스 극계를 대표하는 고전주의 비극작가 장 라신느를 떠올렸다.
대표작 페드라(phaedra)로 유명한 그녀 말이다.
시니컬한 문체와 현실에서 한발 비켜선 작가.
독자는 저자를 잊고, 그 특별하지 않은 일상이 자신의 체험인 양 빠져들게 된다.

저자는 생활 속에서 그때그때 떠오른 단상과 직접 견문한 일화에서 미끄러져 나온  생각들을 掌篇이라는 형식을 통해 전달한다.   페터 빅셀은 그야말로 짧은 이야기(掌篇)의 마술사이다.
"그는 장편(掌篇)이라는 형식을 통해 얼마 안 되는 낱말들로 아주,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하는 위대한 이야기꾼이다."라고 말하는는 게오르그 파처의 평은 적절하다.
적절한 예화와 인용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깨어나게 하는 글이 많으며,  논리 전개가 날렵하고 행간은 깊다.  짤막한 일화를 통해 만나는 가르침은 때로 저도 몰래 무릎을 치게 하고 즉시 눈앞의 현실과 겹쳐 읽게 만든다.  하지만 화두는 항상 세상이 아닌 나에게로 향해 있다.  남을 탓하고 세상을 허물하기 전에 나 자신의 가늠이 어떠해야 할지가  늘 먼저다.  그러나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는 여유를 갖고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림을 기다리듯이.
그가 깨끗이 닦아둔 거울에 스스로를 비춰 본다면 중심을 잃고 휩쓸리기 쉬운 복잡한 현실에서 좌표를 점검하고 방향을 살피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아버지들도 팻말에서 팻말로 걸음을 옮기며, 지식의 신처럼 아이들에게 동물이름을 전달한다.  이름을 알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도 이미 동물들에게 감탄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그건 그렇고,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온 동물들도 이름은 독일어로 쓰여 있다.  동물들 스스로는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 모른다.  세상은 자기 이름을 모른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 부르면서 세상을 멀리하는 것이다.  알바니아인, 프랑스인, 터키인...... "(P.95) 


그의 글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얼마나 무뎌지고 무감각해졌는지 새삼 느끼게 한다.
아주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익숙함이란 무덤에 자라는  이름 없는 잡초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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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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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서 습관을 뒤돌아 보면 나이에 따라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어린 시절에는 지적 호기심이나 재미를 위해서, 청소년기에는 지적 호기심과 더불어 지적 허영을 위해서, 젊은 시절에는 물질적 성취나 성공을 위해서 책을 읽었다면 요즘은 나의 생각이나 사색의 결과가 작가와 얼마나 일치하느냐가 책을 읽는 동기와 감동의 기준이 되곤 한다.
책에서 읽지는 않았지만 "이럴 것이다." 또는 "그렇지 않을까?"하고 내내 생각해 오던 것을 처음 읽는 책에서 명쾌한 말로 쓰여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나는 짜릿한 흥분과 감동을 감출 수 없다.  나의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며, 책을 끝까지 정독할 힘을 얻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마치 오랫동안 사귄 친구와 마주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나는 모든 경계를 풀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작가의 의견을 수용하게 된다.
나의 생각과 일치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나는 기꺼이 작가와 친구가 될 수 있음이다.

나는 나의 존재를 자각합니다.(P.22)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나는 동시대의 어떤 작가나 성직자에게서도 이와 같이 자신에 찬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결코 자기과시나 허언이 아닌 이 한마디 말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너무 도덕적이 되면 삶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자신을 속이게 된다고 말하는 소로우의 확신은 반평생을 살아온 내게도 진실로 다가온다.  가식적이거나 덧씌워진 설명이 아닌 진실을 직시하는 소로우의 냉철함은 자연과 침묵 속에서 오랜 시간 사색한 사람만이 갖게 되는 특권이다.
"당신과 빛 사이를 그 무엇도 가로막게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을 형체로서만 존중하십시오.  천상의 도시를 방문할 때는 누구의 소개 편지도 필요 없습니다.  문을 두드리며 곧장 신을 만나기를 청하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당신 곁에 동행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이 세상에 홀로임을 기억하십시오."(P.23)

육체에 운동이 필요하듯이, 정신에는 몰입이 필요합니다.(P.95)
나는 얼마 전부터 TV를 보거나 인터넷 검색을 할 때 까닭 없이 쉽게 피로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을 소로우의 주장에 근거하여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인간이 태어날 때 온전했던 영혼(또는 영성)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각적 영상이나 생각에 의해 쉽게 손상을 입거나 분해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인간에게 너무나 유혹적인 것이어서 나이가 들수록 깊이 빠져들곤 한다.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보듯 1초에 24장의 그림이 지나가는 엄청난 속도는 인간의 영혼을 공기와 같은 작은 미립자로 산산이 흩어지게 한다.

초를 세분화하는 현대인의 습성은 생각에도 영향을 미쳐, 한가지 주제에 진득하게 매달릴 수 없도록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영혼은 깨지고 부서질수록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높아지게 되고, 영혼의 지구력은 약해져만 간다.  자연의 변화 속도가 비교적 느린 것은 아마도 인간의 영혼이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는 신의 배려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소로우가 문학에서 시를 좋아했던 이유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소설과는 달리 한가지 주제에 깊이 빠져들어 오랫동안 사색할 수 있게 하는 시는 영혼을 온전하게 유지시키고, 손상된 영혼을 치유하하는 탁월한 효과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태고적부터 시가 유일한 문학으로 자리를 지켜왔고, 소설은 발전하지 않았던 까닭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소설은 현대인의 취향에 맞춘, TV나 영화 대용에 불과한 것이다.   학문에서 수학이 일찍부터 발전한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수학만큼 몰입하기에 좋은 학문도 드물다.  잠깐 동안의 시간에도 오만가지 생각과 상상을 하는 현대인들은 모두 중증의 정신병자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그렇게 길들여졌고 아무 의심도 없이 그것을 수용한다.

하버드 신학대학을 졸업한 블레이크와 13년 동안 주고받은 소로우의 편지는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육체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하는 데는 즉각적이지만, 정신의 배고픔과 갈증을 충족시키는 데는 얼마나 게으른가? 하고 묻는 소로우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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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행복하게 - 자연과 공동체 삶을 실천한 윤구병의 소박하지만 빛나는 지혜
윤구병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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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명절을 쇠고 마음이 스산하여 집어든 것이 바로 이 책, 윤구병님의 새내기 농촌 체험기라 할 수 있는 <가난하지만 행복하게>였다.
어제는 점심을 먹고 햇살 좋은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소슬한 막새바람이 부는 한적한 공간에도 아이들 웃음 소리가 싱그럽다.
공원 한켠에는 키 작은 다복솔과 이름 모를 수입 활엽수들이 어색한듯 ’더불어 숲’을 이루고 있다.
작은 땅뙈기에서도 생명은 저리도 넉넉한데 나 같은 도시내기들은 한겨울처럼 외롭다.
삶이 시리도록 춥고, 작가의 글은 머리가 아리도록 아프다. 

 볕이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과 부드러운 바람.
이런 날은 항상 슬그머니 과거로 뒷달음질을 치려는 생각과 한바탕 드잡이질을 해야 한다. 
단풍이 들기 전까지는 생각도 현재에  발을 꽁꽁 묶어 놓아야 하는 도시의 시계는 잠시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생각도 이럴진대 일탈을 꿈꾸는 몸뚱아리야 더 일러 무엇하리요.

불현듯 저자가 부러워진다.
대학 교수로 15년을 살았던 생짜배기 ’도시 촌놈’이 어찌 농촌에 가서 살 생각을 했을까?
바람처럼 흩어지는 도시의 시간대(時間帶)에서 어느날 문득 유성처럼 내팽겨쳐졌던 것인가, 아니면 이 앙다물고 제 발로 도시 시간대의 인력장에서 벗어난 것인지... 
시간은 절대적 개념이 아니다.
오늘처럼 가을이 깊어가는 볕 좋은 날엔 부는 바람마저 도시의 그늘에서 속력을 더한다. 
덩달아 도시인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급기야 째깍이는 초침마저 바빠진다.
철모르던 사람이 철따라 흐르는 시골의 시간대에서 일머리가 트이고 일손이 익어가는 과정은 도시의 시간처럼 늘리거나 줄어들 수 없는 자연의 엄정한 시간에 따른다는 것을 작가는 세월에 묻혀 배우고 있었다.

 "생명의 시간 가운데 텅 빈 시간이란 없다.  사람이 마음대로 분으로, 초로 쪼개서 그 안에 특정한 인간 집단의 삶의 방식, 가치관, 관습과 도덕을 아로새길 등질적이고 획일적인 시간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도시인들은 문명을 통해서 그런 시간을 창조해냈다.  그 도시가 바빌론이건, 아테네건, 로마건, 뤄양이건, 도쿄건, 서울이건, 워싱턴이건 상관없이, 모든 도시는 도시인들이 추상해낸 등질적인 공간 표상에 따라 인간만을 위한 삶터로 바뀌고, 그 안에서 도시인들은 미개한 야만인들의 나라 아프리카를 두부모처럼 잘라내어 식민지를 만들거나 하룻밤 사이에 직선으로 삼팔선을 그어 야만스러운 미개인 ’조센진’들이 아들의 가슴에, 아비의 등에, 형제의 옆구리에 총칼을 들이대게 만든다."(P.296) 

더디게 흐르는 듯 보여도 생명의 에너지를 허투루 소비하지 않는 자연의 시간에 적응하는 것은 ’도시 촌놈’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탐욕만 키우는 도시의 시간대에서 물질과 향락의 노예가 된 도시인들이 세월따라 사랑과 정을 키우는 자연의 시간대에 적응한다는 것이 어줍잖은 말로 사랑을 고백하는 풋내기 첫사랑의 낭만처럼 쉬운 일일까마는 작가는 잘도 적응하나보다.
철학을 전공한 작가가 산 설고 물 설은 곳에서 잊혀져가는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공동체를 이루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야기들이 내게 푸근함으로 전해지기 보다는 날선 비수로 꽂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습니다.  사랑은 늘 현재입니다.  ’사랑했노라’는 말도 빈말이고, ’사랑하겠노라’는 말도 헛된 약속입니다.  사랑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늘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는 저세상이거나 관념의 공간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는 오늘 이 순간이고 지금 이곳입니다.  우리가 뿌리내리고 사는 구체적인 현실이고 더 어렵게 말하면 ’현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P.256)

언젠가 내가 아는 스님 한 분이 다 먹은 수박의 껍질을 다람쥐 친구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라며 즐거워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생명을 키우는 넉넉함이 한없이 그리운 날이다.
메말라 가는 사랑이 이 가을에 여무는 씨앗처럼 단단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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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게 나이 드는 법 - 죽을 때까지 삶에서 놓지 말아야 할 것들
전혜성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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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夜雪)            

踏雪夜中去

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때

 

不須胡亂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今日我行蹟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遂作後人程

뒤따르는 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니


 

백범 김구 선생께서 즐겨 읊으셨으며 그분의 좌우명이기도 했던 서산대사의 선시 야설(夜雪) 이다.
해마다 나이를 더하면서도 내 뒤를 이어 걸어갈 후손을 생각하기는커녕, 내 몸뚱아리 하나도 지탱하기에 버거움을 느끼면서 살아왔던 내 삶은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는 궁색한 변명으로는 무언가 설득력이 부족하다.
저마다의 재주는 제각각이라 할지라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언가 보탬이 되고자 하는 생각만으로도 우리네 인생은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19살의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떠났던 전헤성 박사의 <가치있게 나이 드는 법>을 읽었다.
1948년에 미국으로 떠나 올해로 여든한 살이 되었다니 그 지난한 세월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된다.  그럼에도 그녀는 학자로서, "동암 문화 연구소(East Rock Institute)"를 이끄는 사회 활동가로서, 6남매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현역이다.
"사람은 절대 재주가 덕을 앞서면 안 된다.(one’s skill should never exceed one’s virtue)"고 말씀하신 저자의 어머니와 "이 세상에 얼마나 이익을 주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위대함이 결정된다"고 가르치신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평생을 올곧이 살아온 저자의 모습은 천상 학자이다.  자신이 설립한 <동암 문화 연구소>를 통하여 전 세계에 한국 문화를 알리는 것과 뒤를 따르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팔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노력하고 있으니 말이다.
동암문화연구소는 전혜성 박사의 일가 자료 외에도 8만여건에 달하는 미국 내 주요 도서관 한국 관련 자료 소장 목록카드와 한국과 동양의 문화ㆍ예술ㆍ사회ㆍ여성ㆍ음식문화 등에 대한 행사자료, 차세대 재미교포 리더 양성을 위한 교육자료 등 다양한 자료를 국립중앙도서관에 제공하고 있다.


저자의 남편이자 초대 주미특명전권공사를 지낸 故 고광림 박사와 두 아들인 고경주, 홍주 박사는 2004년 ’미국에 가장 공헌한 한인 100인’에 뽑히기도 했었고,또 여섯 자녀가 모두 하버드대와 예일대를 졸업하고 가족이 취득한 박사학위가 11개에 달하며 이번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고경주, 홍주 박사는 차관보급에 임명됐으니 성공한 이민 세대로서 편안히 쉴 수도 있겠으나, 저자는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휘트니 센터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자신의 삶을 통하여 세상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작은 동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학자로서의 사명감과 소명의식은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돌아보게 했다.

1989년 저자의 남편이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신을 일으켜 세운 세가지 원칙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첫째는 마지막까지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정직하게 사는 것이고. 둘째는 얼마가 되었든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삶에 대해 수시로 평가하고 반성하는 것이었다. 나는 일생을 통해 이 세 가지를 잊지 않고 명심한다면 누구나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P.40)

내가 매일 아침 걷는 등산로는 매주 주말을 지나면 버려진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다.
대부분의 등산객은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줍는 사람이 없다.
내일 아침에는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서서 그것부터 줏어야겠다.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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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의 탐독 - 정성일의 한국영화 비평활극
정성일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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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아주 단순했다.
차안에서 우연히 듣게 된 책속의 한 구절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단순히 그랬다.  우연이 필연으로 만나는 그 한순간이 책과의 인연을 결정했다는 것, 전체 내용이 아닌 짧은 구절이 맘에 들어 책을 펼친다는 것은 지극히 낭만적이라고 받아들여질 충분한 근거가 되겠지만, 나는 그 대척점에 서서 무모했던 자신을 비난하며 책을 읽어 나갔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정은임 아나운서에게 쓴 애도의 글.
<정은임의 영화 음악>을 진행하던 아나운서와 게스트의 관계였던 작가가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애잔함을 넘어 짙푸른 울음과도 닮아있다.
"첫 문장은 백번을 고쳐서 다시 써도 도무지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쓸 생각이다.  그것만이 내가 당신을 잠시라도 불러 세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멋지게 쓰려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  슬프다기보다는 그냥 아프다."(P.39)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난 후 두 달 동안 낙타만 그렸다는 작가는 자라서 그토록 좋아하는 영화의 평론가가 되었다.
겉도는 관계로 스쳐 지나쳤을 법한 진행자와 게스트의 자리.  한 진행자의 죽음이 작가를 그토록 저리고 아프게 했던 까닭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분야에서 그들은 서로 만났고, 서로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경청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나는 그 프로의 애청자로서 아직도 고인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나의 서평은 여기까지가 다이다.

사실 나는 평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라고 하면 어폐가 있지만 자라면서 평론에 대한  거부반응을 꾸준히 느껴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통합된 작품을 갈가리 찢어 작은 조각마다 메스를 들이대는 해체적 분석은 끔찍하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거만하며 다소 무례하기까지 한 글(평론)을 좋아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싶다.  그럼에도 나는 평론을 읽을 때마다 알 수 없는 고까움을 느끼곤 한다.  그 중심에는 인내하며 끝까지 읽어야 할 필요성의 부재가 언제나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영화를 평하는 글은 그야말로 평론을 위한 평론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란 본시 현실 너머의 현실, 현실을 가장한 작위적 실체와 관객의 집단적 환상이 만나는 것인 만큼 평론은 무의미하다.  스크린 속의 스토리는 언제나 환타지일 수 밖에 없고, 관객은 그 시각적 환영에 몰입되어 현실을 잊는다.  영화를 본다는것은 일종의 감독이 만든 마술에 걸려든 관객의 최면 상태, 현실을 사는 관객이 일상의 따분함과 지루함 등 마주하기 싫은 모든 요소를 배제한 기형적 실체를 보는 집단적 광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적 잣대로 낱낱의 영화적 도구(또는 쇼트)를 분석한다는 것은 그 글을 읽는 독자(또는 관객)와는 거리가 먼 관심 밖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500 페이지를 훌쩍 넘긴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갖고 있는 영화적 소양과 그의 글에서 풍기는 알 수 없는 흡입력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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