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텐진 갸초(달라이 라마).빅터 챈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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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이 떠난 빈 자리가 너무 컸던 탓일까 그분의 추천 도서 중 한 권인 <용서>를 천천히 읽었다.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제목으로 하는 책을 접할 때에는 왠지 옷매무새를 정갈히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 들곤 한다.
처음에 제목만 보고 판단했던 나의 선입견과는 달리 책의 내용은 현학적이거나 딱딱하지 않다.
오히려 지극히 담담하고 진솔한 이야기 전개가 나를 놀라게 한다.
우리는 가끔 진리를 논할 때에는 으레 어렵고 난해한 문장으로 읽어야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대초원에서 커다란 산을 보는 느낌, 잔잔히 흐르는 시내에서 파도와 같은 커다란 울림을 듣는 느낌.  이 책은 그랬다.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맑은 물에 내 영혼을 헹구는 것과 같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몸과 마음이 파랗게 젖어드는 느낌은 책을 손에서 놓는 그 순간까지 계속 되었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곁에 머무르며, 그와 대화하고, 같이 여행하며, 존경의 시선으로 그를 관찰했던 빅터 챈에 의해 씌어진 이 책은 달라이 라마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빅터 챈의 이야기이다.
권위적인 종교 지도자의 모습이 아닌 평범하고 인간적인, 때로는 짖궂고 장난기 가득한 달라이 라마의 모습에서 망명 정부의 지도자로서의 고뇌와 적개심은 찾을 수 없다.
공(空)의 개념과 상호 의존적 인간 관계, 자비와 용서에 대하여 과장되거나 종교적 ’선전’의 차원에서 역설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일관된 행동과 진심어린 인간애로써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언으로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실체적 진실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육신에 갇힌 우리의 영혼은 가장 가까운 육신과도 화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단 한 발자욱도 내딛지 못한다.  어쩌면 베를린 장벽보다도 휴전선 철책보다도 더 높은 벽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자신이 느끼는 것을, 그 영혼의 몸짓을 자신의 몸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영혼과 육신의 슬픈 별리이다.  자신의 영혼을 바라보고 늘 관심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겠는가.
나의 영혼이 나의 육신과 화해를 하고, 나아가 자연과 합일을 이루고, 우주와 내가 하나 될 수 있음을 달라이 라마를 통하여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좁은 몸뚱아리에 내 영혼을 가두고, 나와 너를 분리하는 것은 나와 온 우주와 일체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철저히 봉쇄하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몸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면서 외로움과 불안감, 집착과 미움을 키우는 일이다.
모든 사람이 바라는 행복은 나와 너를 구별짓지 않고, 오직 나의 마음이 너에게 닿을 때 충만함과 행복에 이를 수 있음을 성인들은 알고 있었다.  너를 위하는 길이 나의 행복을 찾는 지름길이니 결국 철저한 이타주의는 동시에 철저한 이기주의이다.  그러므로 성인들은 곧 위대한 이기주의자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어쩌면 달라이 라마의 용서는 먼저 나를 용서하라는 가르침이었다.
내 영혼이 내 육신을 용서하고, 내 육신은 또 내 영혼을 용서하여 결국은 온전하게 내가 하나가 되는 것.  그리고 조금씩 너와 화해하는 것.  그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양자 물리학의 끈 이론(string theory)에서도 상호 의존성과 공(空)의 개념을 조금씩 증명하고 있다.  먼 훗날 우리는 2500년 전 붓다의 ’깨달음’을 과학적으로 증명된 ’진리’로 인식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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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허둥지둥
켄 블랜차드.스티브 고트리 지음, 조천제.황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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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자기계발서를 읽을 때 나는 책이 주는 병폐, 또는 책의 무용론을 말하고 싶다.
사회 경험이 부족한 학생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간결하고 명쾌한 논리에 감탄하고 말 것이다.
게다가 성격은 좋지만 일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늘 허둥지둥 하는 주인공 밥과 그의 멘토 역할을 하는 CEO(chief Effecriveness Officer : 최고효율성책임자)의 이야기 형식으로 꾸며져 독자들은 재미와 교훈을 동시에 얻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책이 있을까 싶을 것이다.
더구나 그 실천 방안이라는 것이 많기나 한가.  달랑 세 가지 뿐이니 맘만 먹으면 언제든 실천할 수 있겠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일의 동기와 목적이 타당한지 판단하여 부합하는 사람들과 제때에 순서에 맞게 진행하며, 일을 할 때는 헌신적으로 하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만 지키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 또는 성공의 가도를 달릴 수 있다니 독자들은 그야말로 이 책이 성서에 비견될 만큼 혹하지 않겠는가.
또 있다.  책의 분량도 작아서 일단 읽기 시작하면 한두 시간 만에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책만 있다면 굳이 두껍고 어려운 책을 끙끙대며 읽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단순하고 명쾌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할 수만 있다면.....
모르긴 몰라도 이 책의 저자도 그렇게 명확하고 획일적인 삶을 살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이다.  사회 경험이 일천한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성공의 마스터키를 뒨 듯한 환상을 품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다는 아니지만 서구 문명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모든 경험을 플로우 챠트와 같이 획일적으로 정리하는 습성이 있다.  조건과 초기치만 설정되면 피드백 과정을 거쳐 정해진 순서에 따라 결과가 도출되는 식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명확하지도 않다.
이 책에서 말하는 행동 강령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행착오와 좌절을 맛본 사람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 과정을 준비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인생의 과정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지름길, 또는 큰길 위를 걸을 때보다 샛길을 걷는 시간이 훨씬 많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 비록 샛길을 걷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바라는 무지개는 태양이 비치는 한 샛길에서도 언제든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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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 너머에 - 아직도 가야 할 길 그리고 저 너머에
M. 스캇 펙 지음, 손홍기 옮김 / 열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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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무겁고 난해한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는 자신이 목적하는 바가 따로 있겠지만, 그 기저에는 지적 허영심 내지는 우쭐함이 잠시라도 머물게 된다.
재미와 감동을 우선으로 하는 문학 작품들의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텍스트와는 달리 철학이나 심리학과 같이 추상적이고 모호한, 독자의 지적 수준에 따라 때로는 암호 해독가가 되어야만 하는 이러한 부류의 책을 좋아라 하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많은 독서인 중에 소수가 된다는 것.
물질만능의 시대에 형이상학을 탐독한다는 것.
이런 수단으로 지적 허영심을 너무나 쉽게 충족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기주의자'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사회 봉사자들도 마음 한켠에는 봉사를 통한 뿌듯함을 충족하려는 이기심이 상존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그렇고 봉사자들도 그렇고 본 목적이 그것 하나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람의 심리나 일상 생활은 그만큼 복잡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저자 스캇 펙 박사에게 끌리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저자의 나이 마흔에 썼다는 <아직도 가야할 길>을 내가 처음 읽게 되었을 때, 기존의 심리학 서적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몇 가지 차이점을 보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라고 믿기 어려운 문학적 재능과 불완전한 존재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심, 그리고 많은 임상 경험과 사유가 없었으면 불가능할 법한 쉽고 평이한 문장 전개가 그것이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프로이트, 카를 융, 애들러 등의 심리학 서적을 이해하는, 어쩌면 그 벽을 넘어서는 계기가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스캇 펙 박사의 책이라면 더 이상 그 필요성에 선택 기준을 두지 않게 되었다.  그야말로 조건 없는 책읽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예순이 되어 자신이 그동안 출간했던 책들의 내용을 정선할 필요성을 느껴 집필한 책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이 그것은 요약이 아닌, 자신의 사상과 견해를 '통합(synthsis)'하는 과정이요, '넘어 섬'을 의미한다.
책의 구성은 총3부로 되어 있는데,
개인과 사회가 가진 병리 현상의 근저에 있는 원시적이고 나태한 단순 사고를 비판한 1부와 우리가 훌륭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복잡한 선택의 문제를 다룬 2부, 그리고 적절한 지적, 감정적 대가를 치르고 났을 때 우리가 어떤 곳에 다다를 수 있는가에 대하여 쓰고 있는 3부가 그 주요 내용이다.
사실 스캇 펙 박사의 책 중에 이 책을 처음으로 선택한 독자라면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그저 고통 없는, 곧 언제나 편안하고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기에 저자는 이 책에서 깊이 있는 사고를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깊이 있는 사고를 한다는 것은 피상적인 사고를 하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다.(P.86)
저자가 강조하는 '생각하기'의 중요성이 삶을 이해하고 충만한 삶을 영위하는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그가 지은 다른 책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모든 중요한 일에는 다양한 이유들이 존재하는 까닭에 우리는 생각하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질문은 너무 중요한 것이어서 네 스스로 그 대답을 찾아야 하는 경우도 있단다.(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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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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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내게도 나조차 통제할 수 없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독서에 대한 편향성이다.  일상이 바쁠 때에는 오히려 팍팍한 일상을 책에서나마 보상 받으려는 심산으로 가볍고 부드러운 소설이나 시 또는 신변잡기적인 수필에 매료되지만, 시간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여지없이 철학에 빠져들곤 한다.
학창시절부터 시작된 이러한 독서 습관이 때로는 두렵기까지 하다.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졸업 무렵까지 장장 5년을 철학 서적에 묻혀 살았던 기억.  그에 따르는 행동의 편향성(금욕적 스토이즘에 가까운).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도 당시의 대학생들이 즐겨 출입하던 학사주점이나 당구장 또는 카페에서 노닥거리는 모습을 보면, 속으로는 늘 '인간 쓰레기' 또는 '밥벌레들'로 치부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나는 그야말로 대부의 '돈 클레오네'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되어 나만의 세계에서 나와 배치되는 외부적 환경과 싸우곤 했다.  일단 그런 습관에 빠져들면 벗어나는 데만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었다.  그런 까닭에 사회에 진출한 이후에도 그런 습관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부던히도 애를 썼었다. 나는 어쩌면 선천적으로 삶의 근원적인 질문에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동하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에는 심리학 관련 서적에 넋을 놓아, 나를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선택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어느 여행기도 그렇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에는 작가가 여행한 여행지의 정보를 얻으려는 목적보다는 내가 현 시점에서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막연한 동경, 책을 읽으면서 맛보는 일상탈출의 짧은 휴식이 우선이 되는 경우가 많다.   막상 우리가 여행을 떠나고자 결심한 순간에는 전문 웹사이트나 여행 전문서적을 뒤지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하기에 여행기는 일종의 성인들을 위한 동화와 같은 것이다.  큼직큼직한 총천연색 사진과 약간의 감상, 그곳의 역사적 배경을 적당한 지면에 할당하는 작업.  여행작가로서의 임무는 그것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가끔 신영길이나 오다나처럼 아마추어 여행작가는 절제되지 않은 문체로 자신들의 감정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전업작가에게서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전업작가에게 여행기는  자신의 직업적 특권으로 누릴 수 있는 손쉬운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또는 그녀의) 명성과 역사적 지식을 배경으로 한 권의 책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는 또다른 기회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것은 나의 목적이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계획할 무렵의 작가는 각종 문학상을 휩쓴 소설가로, 교수로, 방송인으로 또는 한 여자의 남편으로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했었다.    소설가로서의 본업에 충실하고자 모든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캐나다 밴쿠버에서 1년을 보내기로 결심한 작가는 비어 있는 일정 동안 시칠리아 여행을 계획한다.  사실 여행이란 장소와 환경만 바뀐 또 다른 일상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에 도착하여 시칠리아로 떠나는 여정에서의 혼란과 시칠리아 북쪽의 작은 화산섬 리파리에서의 평범한 일상.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에서 아그리젠토에 이르는 여러 도시들과 그곳의 사람들, 작가의 감상이 곁들여진 음식과 여행지의 역사적 배경.  절제되고 평이한 문체.
가끔 이러한 여행기를 읽을 때는 옆에서 이국의 지명을 지도에서 찾아주는 비서를 따로 두고 싶을 때가 있다.  낯선 지명이 나올 때면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지명을 찾고야 마는 내 성미가 독서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보고 들은 진기한 것들'에 더하여 '잃어버린 것들'을 보태 적는다고 했다.
나는 그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곰곰 생각하고 있다.
작가가 말하는 '잃어버린 것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서두에 잠깐 등장하는 자신의 과거였을까 아니면 많은 지면을 차지했던 여행지의 지난 과거였을까?
아무튼 나는 내가 바라는 소기의 목적이 이 책을 통하여 이루어졌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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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 칼릴지브란
칼릴 지브란 지음, 강은교 옮김 / 이레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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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정수는 역시 시가 아닐까 ?
소설이나 수필, 희곡이나 평론 등 여타의 다른 쟝르의 문학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전해지는 중저음의 느낌을 글로 옮기려 할 때,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듯한 막막함.  그렇게 며칠이고 불면의 밤이 지나서 잿더미 속에 묻힌 몇 알의 낱알을 보석처럼 건져내는 것.  하세월이 지난 후 한알 두알 모아진 그 곡식을 눈앞에 펼쳐 보이는 것.

  이 말들이 비록 모호하다 해도 결코 명백하게 말하려고 애쓰지 말라.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만물의 끝이 아니라 시초.
  그러므로 바라건대 그대들 언제나 시초로서 나를 기억하기를.
  생명, 살아 있는 모든 존재란 결정(結晶)으로부터가 아니라 안개 속에서 잉태되어지는 것.

칼릴 지브란이 그의 산문시 <예언자>를 쓸 때 그런 기분이었을까?
정든 고장 오펄리즈 시를 떠나는 알무스타파.
선택받은 이이며, 가장 사랑받은 이, 또한 시대의 여명이었던 예언자 알무스타파.
작가 자신이 직접 전하기에는 너무나 길고 깊었던 이야기들.
한계를 느꼈음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 안에 전할 자신이 없었음이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생명이 탄생하고 파괴되는 십이지(十二지)의 약속된 기한.
우주가 순환하는 그 열두 해의 기나긴 기다림 속에서 얻은 소중한 깨달음을 남겨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많은 이야기들.  돌아갈 그의 배는 안개에 휩싸여 오고 있었다.
사랑, 결혼, 아이들, 나눔, 먹음과 마심,일, 기쁨과 슬픔, 집, 옷, 매매, 죄와 벌, 법, 자유, 이성과 열정, 고통, 자기 인식, 가르침, 우정, 말하기, 시간, 선과 악, 기도, 쾌락, 미, 종교, 죽음 등 남겨진 사람들의 질문은 끝이 없는데, 이제는 가야할 때.

  어제란 오늘의 추억이며, 내일이란 오늘의 꿈임도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대들 속에서 노래하고 명상하는 것은 우주에 별이 흩뿌려지던 최초의 순간, 그 속에 아직도 살고 있는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대들 가운데 누가 그 사랑의 무한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
  그리고 누가 아직 바로 그 사랑을, 무한함에도 존재의 핵심에 둘러싸여져 이 사랑의 생각에서 저 사랑의 생각으로 움직이지도 않으며, 한 사랑의 행위로부터 다른 사랑의 행위로 움직이지도 않는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가?
  사랑이 그렇듯 시간도 무한하며, 결코 나누어지지 않고, 자취도 없는 것이란 말인가?

이 책은 화가로, 철학자로, 시인으로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칼릴 지브란의 산문시이며 오펄리즈시에 남겨진 사람들이 떠나는 알무스타파에게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의식주의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종교와 죽음의 근원적 질문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깊은 성찰을 통한 깨달음을 감성적 언어로 전하고 있다.
레바논에서 태어나 서구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살았던 그는 이 작품을 통하여 '현대의 성서'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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