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 돌베개인문.사회과학신서 51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198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강추!! [서평] 박세길 저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 휴전에서 10.26까지 >를 읽고 / 1998. 10., 314쪽, 돌베개


저자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시리즈 3권 중 제2권은 한국전쟁 직후부터 친일 군사쿠테타범 박정희의 사망까지를 다루고 있다. 한국현대사가 1945년 8.15 해방에서부터 한국전쟁까지가 첫번째 커다란 획을 그었다면,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로 이어지는 기간은 예속과 굴종, 부정과 부패, 압제와 착취라는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자리잡는 두번째 단계라 할 수 있다.
한국현대사의 두번째 커다란 획을 가르는 과정은 미국에 의한 정치군사적, 경제적 종속과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친일파 출신의 범죄자들의 압제와 착취, 그리고 미국과 친일파 권력집단에게 기생하는 매판자본가들의 육성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53년에서 1979년에 이르는 한국현대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몇 가지 특징과 교훈을 재발견하였다.

특징은 첫째, 한국의 정치 및 군대가 외세(미국)에 반영구적으로 종속되었고 미국은 자신들의 군사패권전략을 위해 끊임없이 한미일 군사동맹체제를 시도했다는 점. 둘째, 한국의 경제 역시 미국과 일본, 특히 1970년대로 갈수록 일본에 의해 구조적으로 철저하게 종속되었다는 점. 셋째, 한국의 자본은 그 속성상 매판자본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 넷째, 그 과정에서 친일/친미파 집단의 대리인이자 권력중심인 이승만과 박정희 일당은 미국의 사전 승인, 동의 하에 집권하거나 집권을 연장하였다는 점. 다섯째, 집권세력은 단 한번도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은 적이 없으며 부정부패와 정경유착, 정치자금과 뇌물이 구조화되었다는 점. 여섯째, 한국 내 정치경제 상황은 미국의 세계 정치경제군사전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 일곱째, 친일 군사 독재의 압제권력의 무기는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와 부정부패에 의한 뇌물이라는 점. 여덟째, 한국의 민중들은 어떠한 탄압에도 굴함없이 저항하며 스스로 국가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나선다는 점이다.

교훈은 특징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첫째, 미국과 일본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종속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국가적, 민중적 수탈이 지속된다는 것. 둘째, 특히 군 작전지휘권 환수와 미군 일변도의 무기, 군사전략,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주국방은 요원하며 항상 미군의 군사패권전략에 좌우되어 위험을 초래한다는 것. 셋째, 기술자립과 금융독립성을 유지해야만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국내경제를 관리할 수 있다는 것. 넷째, 정치 군사 경제 언론 학계에서 친일파와 그 후예들은 청산해야만이 자주국방도 자립경제도 가능하다는 것. 다섯째,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야말로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의 근본이라는 것. 여섯째,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끝장내기 위한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노력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 일곱째, 민중들의 불굴의 의지와 본성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현대사의 두번째 과정을 구조적으로 규정했던 기본 요소는 참혹했던 한국전쟁의 결과였다. 한국전쟁이 남한에 끼친 최악의 결과 중 한 가지는 저자의 주장처럼 '저항세력의 괴멸과 권력에 대한 굴종'이었다. 
"미국과 이승만, 친일파는 한국전쟁을 통해 남한에 존재하는 일체의 항일독립세력과 저항운동의 씨앗을 말려 버리고자 했다. 그 결과 이땅의 항일세력과 민중운동은 괴멸적 타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미국은 휴전과 동시에 남한을 자신의 요구에 맞게 개조시키는 작업을 서둘러 진행시켰다."(p.13)

그리고 한국전쟁은 남한의 정치 및 군대가 외세에 반영구적으로 종속되는 구조를 정착시켰다. 
"한국전쟁을 경과하면서 남한에 대한 외세의 지배가 고정화된 가장 중요한 징표는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이라고 할 수 있다. 주한미군은 1949년 6월 일시 철수하였지만 한국전쟁을 계기로 다시 이 땅에 밀려들어 오게 되었다.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을 공식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1953년 10월 한미 양국간에 체결괸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가장 중요한 조항인 제4조에 따라 미국은 우리 민중의 의사는 물론이고 남한 정부의 아무런 협의 없이도 자유자재로 자신의 병력을 이 땅에 주둔, 배치시킬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지니게 되었다."(p.14)

또한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경제는 미국에 의해 철저하게 종속되었다. 그것은 미국과 이승만 일당에 의해 원조경제와 잉여농산물, 부실한 농지개혁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승만 일당은 미국의 원조와 잉여농산물, 권력기구 등을 통해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을 무수히 수령하여 악용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이 남한 땅에 쏟아부은 원조액은 31억 달러를 넘었지만 사실 이 액수는 한국전쟁 중에 미국이 파괴한 남한 재산의 총액을 간신히 넘어서는 것이었다.[한국경제의관점, 이내영] 물론 이러한 원조조차 대부분이 국방비에 충당되었다."(p.22)

미국은 자신들의 정치군사적, 경제적 이익이 보장되는 한 이승만 일당의 반민족성, 반민주성, 반통일성, 반민중성 어느 하나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이 조금이라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되면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사적, 경제적 물리력을 가차없이 휘둘렀다.

1952년 한국전쟁 와중에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서 불법적으로 집권연장을 꾀했던 이승만은 불과 2년 뒤인 1954년 대규모 부정선거를 감행한 후 폭력을 동원해 '사사오입' 개헌을 강요했다. 이윽고 1955년 대통령 선거에서 또다시 부정선거를 통해 조봉암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런 후에 진보당과 조봉암씨에 대한 사법살인을 자행한 것이다.
이승만은 1948년 5.10 단독선거에서부터 1952년, 1954년, 1956년, 1960년까지 모두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즉, 이승만 정권은 정통성은 커녕 정당성도 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진보역량과 민중역량이 궤멸되어 산발적인 저항과 반발 수준에 머무르던 민중들은 단 7년 만에 다시금 역사의 주인으로 일어서기 시작했다. 운명의 순간은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 벌어졌다. 이승만은 부정선거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총칼로 짓밟으려 했고, 마침내 이승만 정권은 민중들의 질풍노도와 같은 4.19 혁명에 의해 무너졌다.
그러나 4.19 혁명은 미완성이었다. 살인마이자 범죄자 이승만은 미국의 품으로 도망갔고, 이승만 정권 아래서 수많은 범죄를 저지른 친일파 군부, 정치인, 관료, 매판재벌은 아무도 처벌, 청산되지 않았으며(폭력경찰 일부만 처벌), 각종 악법과 제도도 그대로 존속하였던 것이다. 결국 기존 친일파들이 잔존하는 가운데 의원내각제와 장면 내각이 출벌하였다. 장면 내각은 혁명도, 개혁도 어느 하나 이루어내지 못한 채 이승만 정권과 똑같이 부정부패했고 미국은 경제기술원조협정을 통해 한국경제를 직접 좌우하기 시작했다.
4.19 혁명 이후 압제와 탄압이 약해진 틈을 뚫고 민중들과 시민들은 스스로 각성되어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고, 친미와 반공을 사슬을 끊고 민족통일의 열망을 끌어올렸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핵과 유엔, 그리고 달러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면서 천하무적을 자랑했던 미국도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뚜렷한 쇠퇴의 기미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소련의 경제,군사력이 강력해졌고, 동아시아(중국, 한반도)에서 불붙기 시작한 민족해방운동의 기운은 1950년대를 넘어서면서 순식간에 중동 아랍과 남미, 아프리카 등지로 확산되어 갔다.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남한의 이승만 정권처럼 미국의 원조정책이 흔들리면서 붕괴되거나 궁지에 몰리는 친미 독재정권이 속출하고 있었다. 베트남의 고딘 디엠, 터키의 멘데레스 정권 등이 그 예이다. 이와 함께 이라크처럼 반제국주의적인 정권이 등장하기도 했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미국은 이들 나라에 깊숙히 개입하여 허약한 정권은 갈아치우고 반미 정권은 허물어뜨리는 방법을 통해 보다 강력한 친미 정권을 세우는 조치를 단행했다. 아울러 해당 나라 민중의 자주적 독립과 사회의 민주적 개혁에 대한 열망은 무참하게 짓밟혀졌다. 이같은 조치는 대부분 반동적인 군부를 매수하여 쿠테타를 종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961년 박정희 친일파 정치군부의 5.16 군사쿠테타는 이러한 세계사적 배경과 미국의 군사패권전략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 등장 이후, 한일국교정상화와 한국군이 베트남 파병이 미국이 주도 하에 하나의 군사적 목표를 위해 동시에 추진되었다. 한일국교정상화는 일본의 자본과 군대를 남한에 진출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동북아시아에서의 일본의 반혁명적인 역할의 강화를 보장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서의 의의가 있었다.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중국 포위 및 공격을 위해 저렴한 비용과 자국군의 희생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추진되었다.
박정희 일당은 민족적, 국익적 관심은 전혀 없이 굴욕적, 망국적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을 폭력적으로 강행했고, 그에 따른 군인 월급과 군수물자산업 그리고 일본 원조와 차관에서 개인적인 뇌물과 정치자금 조성에만 골몰했다. 그리고 그렇게 손에 넣은 거액의 자금을 바탕으로 박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방대한 억압기구를 통해 반대세력을 감시하고 억압하거나 매수함으로써 자신의 통치기반을 결정적으로 강화시켜 나갔다. 박 정권은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함으로써 1967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 3선 개헌을 강행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은 비상계엄 발동과 주한미군의 사전 허락 하의 군대투입을 남발하면서 이루어졌다.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미국의 경제원조 감소는 원조에 의해 지탱되고 있던 한국의 경제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이승만 정권 말기부터 본격화된 이러한 위기는 장면 시대를 거쳐 박 정권에 이르러서도 수습되지 않은 채 도리어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모로 보나 1960년대 초까지 한반도의 남북에서 전개되었던 상황은 명백히 남쪽이 열세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처럼 날로 악화되는 위기를 수습하고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미국은 '경제개발'이라는 무기를 치켜 들었다. 물론 미국은 남한에서의 경제개발을 추구하면서 단순히 위기를 수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격적 수탈이라는 더욱 큰 이익을 목표로 삼고 출발했다.
결국 1960년대 경제개발은 남한의 경제가 원조로부터 탈피하여 자립성을 획득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과는 정반대로 제국주의에 의한 본격적인 수탈의 길을 여는 것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경제개발은 한국군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남한 민중의 어깨 위로 떠넘기고자 하는 미국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었다. 미국의 직접적인 주도 하에 이루어진 이른바 경제개발이 최우선적으로 역점을 둔 것은 차관과 금융지원에 의한 '매판자본'의 육성과 불평등무역과 직접투자에 의한 민중에 대한 수탈이었다.
한일국교정상화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이 때에 밀려들어 온 일본 자본은 미국과는 또 다르게 한국경제의 요소요소를 장악해 들어가면서 궁극적으로 이 나라 민중에 대한 무자비한 수탈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쟁에서 실패를 맛본 미국은 심각한 정치경제적 위기에 직면함과 동시에 도덕적 위신마저 실추되는 결정타를 얻어맞게 되었고, 휘청거리며 내리막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69년 닉슨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주한미군 일부를 철수하고 군사원조도 중단했다. 물론 이를 대체하기 위한 목적으로 핵무기 추가배치를 서둘렀다.
이에 발맞추어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시작으로 학생, 농민, 도시빈민 등 민중들의 민주주의와 생존권을 위한 저항이 촉발되었다. 그 영향으로 1971년 대통령 선거와 총선에서 민주역량이 높아졌다. 광범위한 폭력 부정선거로 인해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베트남 전쟁의 패배로 미국은 중국 전복을 포기하고 소련 봉쇄로 전환했다. 1970년대 초 미국은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시키고 나아가 중국을 반소진영에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한반도에서의 대결상태를 일시적인나마 은폐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것은 박정희 일당으로 하여금 기만적인 남북대화에 나서도록 사주했다. 이름하여 7.4 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된 것이었다.
남북의 민중이 흥분과 열광으로 공동성명을 맞이한 것은 한편으로 볼 때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공동성명 문안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부정하고 미국과의 사전 협의 후 곧바로 유신체제라는 더 광폭한 독재로 치달았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하는 등 박정희 일당의 반공 소동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완전 패배하고 철수한 1975년 4월에 한층 노골적인 모습을 취했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은 남한을 전면적으로 핵기지하고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 수 있는 한국군 지사병력을 대폭적으로 증강시키며 여기에 덧붙여 일본군을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이 주도하는 한-미-일 삼각동맹체제를 구체화시켜 나갔다. 미국은 한국군을 보다 직접적인 형태로 미군의 휘하에 편입시키기 위한 노력이 일치감치 시도하였다. 1971년 7월 주한 미 제1군단과 한국군 일부를 포함한 한미합동 제1군단이 창설되었다. 지휘권은 당연히 주한미군사령관이었다.[1970년대 한국일지, 청사 편집부] 부분적으로 시도되던 주한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직접적인 장악은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가 발족된 이후 전면화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전쟁정책에 편승하면서 급속한 성장을 자랑했던 남한 경제는 몇 걸음 못가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국제수지 적자와 실업자 증대로부터 벗어나고자 1971년 10월 한미섬유협정의 체결을 강요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섬유수출을 제한하였다. 그 결과 남한은 협정 체결 이후 5년간에 걸쳐 약 8억4천만 달러의 수출손실을 감수해야 했다.[민족분단과 통일문제, 김병오]
종전을 향해 치닫던 베트남전쟁 역시 전쟁물자 공급에 크게 의존하던 남한의 수출시장에 먹구름을 드리우는데 일조했다. 또한 1971년 한 해 동안 200개 이상의 차관기업이 일제히 파산하는 등 차관에 의존한 경제는 밑바탕에서부터 금이 가고 있었다.[프레이저 보고서,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이와 함께 급격한 유가인상 역시 원유의 전부를 해외에 의존하고 있던 남한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안겨다주었다.
미국의 압력에 의해 박 정권은 1972년 8월 이른바 '8.3 조치'라고 불려지는 긴급명령을 기습적으로 발표하였는데, 파산 직전에 놓여진 차관기업들은 가까스로 구출되었지만 이들 기업에 사채를 빌려주었던 소자산가들은 순식간에 재산을 강탈당해야만 했고, 은행대출의 증가에 따른 물가상승의 압박은 고스란히 민중의 어깨 위로 떠넘겨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미국과 박 정권은 외국인투자와 차관도입에 의존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하지만 모든 공업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기계, 부품, 소재 등은 제쳐놓고 값싼 숙련노동에 의존하는 최종 조립단계에만 치중한 것이다. 그 결과 부품, 소재 등은 계속해서 일본 등의 수입에 의존해야만 했고 따라서 전체 수입액은 계속적으로 증가했다. 또한 애초부터 경제성과 무관하게 추진되었다. 그리고 설비판매를 노린 외국자본의 박 정권에 대한 뇌물공세, 박 정권의 정치자금 획득을 겨냥한 차관도입 욕망, 그리고 기업을 담보로 금융특혜를 기대하는 국내 매판자본의 요구 등이 뒤엉키면서 중화학공업화는 시장수요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가운데 과잉, 중복투자가 행해졌다.

1970년대 내내 유신독재는 어느모로 보나 이성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1973년 8월 탄압을 피해 일본에서 망명투쟁을 벌이고 있던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이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강제 납치, 귀국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 지식인, 언론인들의 투쟁이 다시 일어났지만 박정희 일당은 민청학련 사건 날조로 맞섰다. 이에 대해 다시 거대한 저항이 시작되었고 박 정권은 동아일보사 탄압, 인혁당 재건사건 관련 피고인 8명 사형, 4대 전시입법을 제정하여 탄압에 나섰다.
1975년 4월 서울대 김상진 열사의 저항을 계기로 민주진영 전체는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이에 몹시 다급해진 박 정권은 5월 13일 기어코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시켰다. 긴급조치 9호에 대한 가장 처절한 투쟁은 1977년 9월에 있었던 청계 노동자들의 '노동교실 사수' 투쟁이었다. 그러나 청계 노동자들의 죽음을 각오한 투쟁은 그동안 긴급조치 9호에 억눌려 침체되었던 각계 민주세력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1978년에 접어들자 상황은 보다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이 해에도 투쟁의 도화선은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 즉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함평 농민투쟁으로 학생들의 유신철폐투쟁 또한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학생들과 재야인사, 해직기자, 해직교수들까지 저항에 나섰다.
1979년에 들어서자 재야 민주화운동세력, 농민들의 감자 피해보상 투쟁과 오원춘씨 납치 사건 규탄, YH무역 노동자 신민당사 농성투쟁으로 이어졌고, 박 정권은 급기야 김영삼 의원을 제명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대학생들의 거센 저항이 이어졌고 시민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하기 지가했다. 박정희 일당은 부산과 마산에서의 강력한 저항을 비상계엄과 군대 동원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민중들은 개의치 않고 연이어 거대한 저항으로 맞섰다.

그러던 중 10월 26일 유신정권의 괴수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 10.26 사건의 진상은 아직도 여전히 흑막에 가려져 있다. 다만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들이 사건의 배후에 미국이 존재했음을 암시해줄 뿐이다.

[ 2013년 10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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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보는 눈 - 왜 통일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이들을 위한 통일론 세상을 읽는 눈
이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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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종석 저 < 통일을 보는 눈 : 왜 통일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이들을 위한 통일론>을 읽고 / 2012. 06, 256쪽, 개마고원


2012년 봄 국회의원 총선거를 전후하여 국내 정치권, 특히 여당인 새누리당이 주도하는 '종북 논쟁'의 폐해를 절감한 유권자들이 많았다.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그런 한심한 국가적 에너지의 낭비를 지켜보고 있자니, 연말 대선에서는 다음 대통령의 자질 평가와 관련해 북한문제와 통일정책에 대한 비전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가늠자가 되어야 했음을 많은 이들이 느꼈을 것이다. 그 종북 논쟁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때마침 오랫동안 북한문제와 통일문제를 연구해온 학자이자 참여정부 시절 통일부장관을 역임한 저자가 그간의 연구 성과와 정책 현장 경험을 무르녹여 밀린 “숙제를 푸는 심정으로” 이 책을 내놓았다. 물론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저자는 한반도를 둘러싼 통일화경이 완전히 변했다고 지적하면서, 무엇보다 냉철히 봐야 할 것은 중국의 변화 발전에서 비롯된 통일환경의 격변을 말한다. 남한의 전통적인 한미관계를 중심으로 하더라도 한중관계와 북중관계 모두가 엄청나게 변화해 있는 현실을 제대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남한에서 '붕괴론'이나 '남침론' 등 대결 일변도로 북한을 바라봤던 과거의 도식적인 북한관과 통일관을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저자는 "통일비용이 너무 막대할 것이기에 차라리 통일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으나, "북한이 갑자기 붕괴해서 흡수통일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무려 수백 조의 비용이 들기 때문에 남한 역시 최악의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대신 "장기적인 화해협력 경로를 밟는다면 30년 동안 연간 1조 5,000억 원 정도만으로도 감당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이 비용은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투자적 성격을 지닌다고 말한다. 북한에 전기, 상하수도, 도로 등을 건설하는 데 사용될 것이므로. 게다가 이 사업은 한국 기업체가 맡을 것이기에 국내 기업들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그렇지만 저자는 기업들이 아닌 자영업자, 노동자, 농민, 학생, 주부에게는 어떤 이점이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는데, 이 부분은 저자의 한계 또는 실수라고 본다.)


저자는 어쩌면 거꾸로 "북한과의 대치와 분단 때문에 발생하는 손해를 따져 비교해보는 게 현실적일는지도 모른다"면서 남한이 치르고 있는 분단비용을 짚어 보인다.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되는 국방비의 과다한 지출, 안보불안으로 인한 한국 경제의 피해(한반도 리스크), 항시적인 사회적 불안심리, 한창 때 청년들의 군복무가 주는 사회적 손실, 종북 논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사상과 민주주의의 미발전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매년 수십 조원에 이를 것이다. 민족 동일성의 훼손이나 민주주의의 후퇴로 인한 비용 그리고 전체 국민의 스트레스로 인한 비용은 돈으로 환산할 수조 차 없다.

유형무형의 이 분단비용들은 남북이 완전한 평화를 이루기 전까지는 계속 지출될 것이다. 분단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과 통일을 이루는 데 드는 비용, 이 두 가지의 비교에는 사실 또 하나의 ‘계산’이 추가되어야 더 정확해진다.


그리고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통일에 드는 비용을 걱정하지만, "통일을 이룬 이후의 효과는 앞서의 그 비용을 넘고도 남는다"고 주장한다. 

먼저 중국을 중심으로 동북아가 세계 경제의 중심지가 되고 있는데 그 변화에 발맞추려면 남북의 화해와 협력은 꼭 필요하다. 그동안 남한은 북쪽이 가로막혀 사실상 섬나라나 다름없어도 미국·일본과 주로 교역했던 때는 그래도 별 문제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러시아와 더 많은 교역을 하고 있다. 통일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와 바로 국경이 닿는다면 교역은 더 활발해지고 한국은 드디어 반도 국가라는 장점을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동안 부산항은 10만㎢ 면적에 인국 4,900만이 사는 대한민국의 항구로서 세계 5위의 무역항이 됐는데, 통일을 한다면 5,500만㎢ 면적에 인국 40억이 사는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잇는 무역항이 될 수 있다.


남북이 경제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 효과도 대단하다. 경제학자들은 "내수와 무역이 조화를 이루는 규모의 경제를 이루려면 인구가 1억 명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남북의 인구를 합치면 7,300만 명이고 여기에 해외동포를 더하면 8,000만 명의 경제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어 이 규모의 경제에 가까워진다.

남북이 하나가 되는 경제공동체의 장점은 단순히 인구 증가에만 있지 않다. 북한은 남한과 달리 천연자원이 풍부해서 남북이 자원협력을 하면 연간 수백억 달러의 부를 창출할 수 있다. 값싸고 우수한 북한 노동력과 투자할 곳을 찾고 있는 남한 자본의 결합은 이미 개성공단에서 그 효용이 증명되었다. 2010년 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10년 9월까지 개성공단이 남한경제에 미친 생산 유발 효과가 5조 2,668억 원이며, 부가가치 유발효과도 1조 5,275억 원이었다고 한다. 국내에서 2만7547명의 취업자도 유발시켰다고 한다. 개성공단 하나로도 이런데 전면적인 경제 협력이 이루어지면 효과가 얼마나 될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저자는 바람직한 남북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인 "북한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잘못된 정보와 편견에 근거해서 북한을 바라본다면 어떤 정책이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남한 사회가 북한에 대해 흔히 갖는 모순적인 태도와 잘못된 인식을 짚고 있다. 

북한에게 그럴 역량이 없는데도 ‘통미봉남’을 한다고 걱정하는 태도, 천안함 침몰 사건에서 진상를 밝히려 하기보다도 이를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구태, 속출하는 북한의 국민소득을 1,000달러라고 과다하게 잘못 측정하는 것, 평화적인 대화를 바란다면서 대화의 당사자인 북한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이런 잘못된 태도와 인식이 왜 발생하고 뭐가 문제인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저자는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이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북한에 ‘퍼주기’만 했다는 주장도 조목조목 비판한다. 

우선 포용정책 이후에 북한의 대남도발은 꾸준히 감소했다. 금강산 관광사업이 시작되면서 북한군은 해군 함정을 금강산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육로관광이 시작되면서는 군부대도 후방에 배치되었다. 개성공단의 군사적 가치는 더 크다. 개성공단이 건설되면서 서부전선에 배치된 북한군의 전차와 자주포가 개성공단 이북으로 이동했다. 사실상 휴전선이 북쪽으로 올라간 셈이다. 전문가들은 개성공단의 안보적 가치는 국군 몇 개 사단과도 바꾸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고 한다. 

그런 여러 성과로 인해 노무현정부 5년간은 남북한 교전이 없었고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이명박정부 이후 대화가 단절되고 관계가 악화되면서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음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북한을 압박하여 개방으로 이끌겠다는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북한은 남한과의 관계가 단절돼도 중국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체제를 유지시켜 나갈 수 있다. 남북의 경제협력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북한은 중국과 경제특구를 공동개발하고 지하자원 개발권을 중국에 주는 등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모두에게 개방적으로 변하기는커녕 중국과 협력하면서 출구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다시 포용정책이 주목받고 있다. 새로 들어설 정부는 북한과의 대립 구도를 벗어나 화해와 협력의 길로 가야 한다. 이 책은 그 새로운 대북정책이 어떤 모습이 돼야 할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 시도되는 포용정책은 더 진화한 포용정책이 되어야 한다. 이제는 정부 차원의 교류를 넘어, 정당과 시민사회도 널리 참여하는 포괄적인 교류가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한반도 평화가 경제발전 및 복지증진과 직결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평화-경제-복지가 선순환을 이루도록 하는 폭넓은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기존의 한미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도 협력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경제 파트너로 한국 경제에 갈수록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협조 없이는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힘들다. 변화하는 정세를 고려해 동북아에서 다자협력 체제를 구축해야 한반도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이 또한 차기 정부의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책을 모두 읽고 나서 평가해보면, 저자 스스로 '종북 논쟁'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남한 내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편견과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북한에 대해 실사구시를 하거나 긍정적인 측면을 제시하게 되면 국가보안법이나 반북이데올로기 등 저자의 지위와 안정을 위협할 요인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저자를 이해해줄 수 있는 측면이 존재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극우적인 선입견이나 반북 이데올로기에만 편중된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해줄 만 하다.

또한 저자는 한반도와 남북 관계는 그냥 남북 만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과 미국, 남한과 미국, 한-미-일의 복잡한 삼각관계, 중국, 그리고 남과 북간에 또다시 구조적으로 아주 오래된 갈등관계에 놓여있다는 점을 간과 또는 누락하고 있다. 한국현대사 100년을 이어오는 역사적 과정이 함축되어 있는 것임을 저자도 잘 알고 있음에도 누락시킨 것은 이 책의 커다란 흠이다. 특히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논의하면서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린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원칙적으로 이 책이 불합격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이 자국의 동아시아 군사패권 전략이나 태평양 전략에 따라 얼마든지 한국 정부와 기득권층의 정책을 방해하거나 북한과의 정치군사적 갈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 2013년 10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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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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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바버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 저, 전미영 역 < 긍정의 배신 bright-sided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나 >를 읽고 / 2011. 04., 304쪽, 부키

<노동이 배신>과 함께 공부모임 교재로 채택된 책이다. 처음 책 이야기를 듣고 인터넷에서 책 소개를 간략하게 훑어보았을 때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고, 숙제하는 기분으로 책을 구했다.
그런데 책을 받은 후에, 목차를 읽어보고 소개글과 저자의 머리말을 읽으면서 급관심이 생겼났다.

예전에 <시크릿>을 읽으면서 <오프라 윈프리 쇼>를 보면서 현실을 넘어 서는 '마음'과 '태도'를 강조하는 그들에게 적지 않게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과 비슷은 처세술이나 긍정적인 심리를 특별하게 강조하는 책을 읽으면서 책 내용과 저자에 대해 늘 비판적이고 불만스러웠는데, 이 책을 통해 '긍정적 사고' 또는 '긍정주의'의 기원과 구체적인 사례 그리고 논리적인 관점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 책은 '무분별한 긍정주의를 고발'하는 책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20세기 후반기부터 서구사회와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사회.문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가 '긍정'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유방암 진단을 받고난 이후부터다. 그녀의 생각과 달리, 암을 선고받고 비관의 나락으로 떨어져 마땅할 듯한 투병자들 사이에 의외로 낙관과 긍정의 에너지가 가득한 묘한 분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암이야말로 인생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알게 해 준 선물이라는 투병자들의 수기, 불행하다고 느끼면 죄의식이라도 가져야 할 만큼 '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는 일상적 충고들, 한술 더 떠 단지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태도를 갖는 것만으로도 암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입증되지 않은 과학까지 결합해 핑크 리본과 곰 인형으로 상징되는 유방암 문화를 형성한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긍정주의'의 허구성과 폐해를 느낀 후, '긍정주의'가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으며 그 이론적, 역사적 흐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다양한 사례와 인물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긍정적 사고의 핵심에는 '불안'이 놓여 있다. 긍정적 사고를 위한 훈련은 수많은 모순적인 증거에 직면한 상황에서 믿음을 주입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훈련을 제공하는 이들은 '자기 최면'이나 '마인드 컨트롤' 또는 '생각 조절'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인다.
저자가 연구한 결과, 긍정적인 사고가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들어서였다. 그리고 20세기가 되자 긍정적 사고는 주류에 진입해 민족주의와 같은 강력한 신념체계들 속에서 자리를 마련했고, 자본주의의 필수요소로서 자기 가치를 설득해 나갔다. 긍정주의는 본격적인 산업의 일부로도 자리잡았다. 한국의 방송에서 인기 강사인 '김미경'씨는 한국판 지그 지글러(zig ziglar)라 할 수 있다.

'긍정주의'의 폐해는 무엇일까? 예를 들어 1994년 미국 최대의 통신회사 AT&T는 2년 동안 1만 5,000명을 정리 해고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당일, 직원들을 '성공 1994'라는 동기 유발 행사에 보냈다. 행사의 주연급 연사인 동기 유발 강사 지그 지글러가 전한 메시지는 이랬다. "(해고를 당하면) 그건 당신의 잘못입니다. 체제를 탓하지 마십시오. 상사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세요."
청년실업자들이나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은 직장인이 제도의 불합리성과 사회복지 제도의 미비함에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자신의 긍정성 부족을 탓하고 동기 유발에 더욱 매진하게 만든다면, 이러한 긍정주의는 경쟁과 구조조정이 일상화되고 시장에 모든 판단을 맡기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원하는 최적의 이데올로기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긍정적 사고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잔인함을 변호한다. 낙천성이 물질적 성공의 열쇠이고 긍정적 사고 훈련을 통해 누구나 갖출 수 있는 덕목이라면, 실패한 사람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는 정치행정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 제43대 대통령인 조지 w. 부시(george w. bush)는 고교 시절 치어리더였다. 미국의 발명품임에 분명한 치어리더는 긍정산업의 핵심인 코칭과 동기유발의 선조 격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이 거의 언제나 낙관론을 요구하고, 비관론과 절망과 의심을 싫어했기 때문에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부시 앞에서는 우려를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2001년 9.11 테러 이전, 여름부터 곳곳에서 테러를 의심할 만한 징후들이 감지되었음에도 연방수사국, 이민귀화국, 부시, 라이스 등 어느 누구도 그런 불편한 단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미국의 개신교는 신복음주의 '긍정주의 신학'으로 물든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들은 돈과 권력 이외에 전통적인 원죄, 은총, 회개 등이 중요하지 않다. 미국의 4대 종교 중 3대 종교는 확실한 '긍정주의 신학'이고 나머지 1개 교단마저도 그 범주에 들어간다. 한국의 개신교는 미국과 얼마나 다를지 궁금했다.

AT&T나 부시와 같은 사례와 흐름은 IMF 이후 한국사회에도 상륙한 것으로 보인다.  IMF 이후 경제적, 정서적 불안에 사로잡힌 한국인들에게 긍정주의와 황금만능주의는 짝이 되어 10년 넘게 한국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정치분야에서는 이명박 전대통령의 "내가 해봐서 알아"가 유사한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를 미국사회 전체에 수십 년 동안 긍정주의가 끼친 악영항의 결정판이라고 평가한다. 

그녀가 주장하는 인생에서의 진정한 가치는 긍정이냐 아니면 비관이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에서 출발하느냐 아니면 마음가짐에서 출발하느냐가 핵심임을 지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미소와 웃음, 포옹, 행복, 그리고 즐거움을 더 많이 보기 위해서는 '긍정적 사고'라는 대중적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류가 지금까지 해온 노력을 지속하는 것이다. 
"좋은 일자리와 의료 서비스처럼 사회적 안전망이 더 탄탄하고 파티와 축제, 길거리에서 춤을 출 기회가 더 많은 곳이 내가 그리는 유토피아다.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충족된다면(이는 내 유토피아의 전제다), 삶은 영원한 축하 무대가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이 무대 위에서 재능을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단지 희망하는 것만으로 그런 축복받은 상태에 이를 수는 없다. 우리는 스스로 초래했거나 자연 세계에 놓여 있는 무시무시한 장애물과 싸우기 위해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

나 역시 '긍정주의'에 대한 저자의 대안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십분 공감이 된다.

○ 인상 깊은 문장 : 

- "심리학자들이 각 나라 사람들의 상대적 행복도를 측정한 결과 놀랍게도 미국인들은 긍정성을 자랑스레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한창 활황일 때조차 행복한 축에 끼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각국의 행복도에 관한 100건 이상의 자료를 종합 분석한 자료에서 미국인의 행복지수는 23위에 머물러 네덜란드인과 덴마크인, 말레이시아인, 바하마인, 오스트리아인은 물론 음울한 사람들로 알려진 핀란드인보다 순위가 낮았다. 한편 세계 우울증 치료제의 3분의 2가 미국에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도 미국인들이 느끼는 고통을 시사해 준다." (머리말/ p.22) 

- "긍정적 사고는 분노와 공포라는 실체적 감정을 부정하고 쾌활함의 분칠 아래 묻어 두도록 요구한다. 불평을 듣느니 가짜 쾌활함을 상대하는 것이 나은 만큼 의료 종사자나 환자의 친구들에게는 몹시 편리하다. 하지만 환자 자신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점 발견에 관한 한 연구는 "유방암 환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선의를 갖고 이점을 발견하려 노력하는 것조차 둔감하고 서투르다고 보고, 되풀이해서 반감을 표시했다. 환자들은 그런 노력을 자기에게 지워진 고유한 짐과 과제를 경시하는 불쾌한 시도로 해석했다."고 밝혔다. 2004년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긍정적 사고의 신조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결과가 나왔다. 암 선고를 받고 이점을 더 많이 자각한 여성들이 그렇지 않은 여성들에 비해 (정신 기능의 저하를 포함해) 삶의 질이 더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1장 암의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pp.68~69)

- "심리학자들은 억압된 감정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정말로 그런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긍정적 사고가 '실패'해 치료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암이 퍼지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럴 때 환자가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충분히 긍정적이지 못했다고, 애초에 암이 생긴 것도 부정적인 태도 탓이었다고 자책하게 된다. 이 지점에 이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충고는 "이미 피폐해진 환자에게 추가적인 부담이 된다."고 종양학 간호사 신시아 리텐버그는 썼다. 뉴욕 슬로안케터링 기념 암센터의 정신과 의사인 지미 홀런드는 암 환자들이 일종의 희생자 비난을 경험한다고 밝혔다. 
- "10년쯤 전부터, 정신과 육체는 연결되어 있다는 대중적 믿음을 토대로 우리 사회가 환자들에게 불필요하고 부적절한 부담을 지운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느끼게 되었다. 나를 찾아온 많은 환자가 선의를 가진 친구로부터 "암과 관련된 글을 모조리 읽어 보았는데, 네가 암에 걸린 건 네가 암을 원했기 때문이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여기에 더해 환자가 "항상 긍정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암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하지만 너무 힘듭니다. 내가 슬퍼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화를 내면 결국 암세포를 더 빨리 자라게 할 테니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라는 말을 할 때면 나는 더더욱 고통스럽다."
긍정적인 사고에 실패한 암 환자는 제2의 병과 같은 부담을 더 지게 될 수도 있다."(1장 암의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pp.70~71)

- "[시크릿]은 언론으로부터 비교적 따뜻한 응대를 받았지만, 식자층의 경악과 조롱을 받았다. 비판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대체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문젯거리가 풍부했다. dvd에는 쇼윈도에 진열된 목걸이를 보고 감탄하는 여성이 등장하는데 다음 장면에서 그녀는 그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다. 그저 목걸이를 '끌어당기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던 게 전부였다. 책 내용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 동안 체중을 줄이려고 애썼던 저자는 음식 때문에 살이 찌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음식이 살로 갈 것이라는 '생각' 탓에 실제로 체중이 는다는 것이다."(2장 주술적 사고의 시대: 끌어당김의 법칙/ p.95)

- "긍정적 사고는 고용주의 손에 의해 19세기의 주창자들이 짐작도 하지 못했을 용도로 바뀌었다. 떨치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라는 권고가 아니라 직장에서의 통제를 위한 수단, 더 높은 실적을 내라고 들들 볶는 자극제가 되었다. 노먼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낸 출판사는 1950년대에 일찌감치 기업 시장으로 눈을 돌려 "기업 임원 여러분, 이 책을 직원들에게 주십시오. 커다란 이익을 낼 것입니다."라는 광고를 냈다. 광고는 영업사원이 이 책을 읽으면 자신이 파는 상품과 자기가 속한 조직에 새로운 신뢰를 갖게 될 것이며, 내근 직원들의 효율성도 높아져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사람이 현저히 줄어들 것이라고 장담했다. 동기 유발이 채찍으로 사용되면서 긍정적 사고는 순응적인 직원의 품질 보증서가 되었고, 1980년대 이후 다운사이징 국면에서 고용 사정이 악화됨에 따라 채찍을 쥔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4장 기업에 파고든 동기 유발 산업/ p.146)

- "급격히 성장하는 분야인 경제 자기계발서들도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다운사이징에 적응하도록 일조한다. 다운사이징 선전의 고전인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는 1000만 부가 팔렸는데 기업에서 뭉텅이로 사서 직원들에게 나눠 준 것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는 책을 읽기 싫어하는 독자의 손에 들어갈 가능성을 염두에 둔 듯 94쪽밖에 안 되는 얇은 두께에 활자도 큼지막하고, 어린이용 책에 적합한 우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4장 기업에 파고든 동기 유발 산업/ p.167)

- "2001년부터 2006년 사이에 주간 예배 참석자 수가 2000명 이상인 초대형 교회의 수는 배로 증가해 1210개에 달했고, 총신도 수는 약 440만 명에 이르렀다. 초대형 교회의 (그리고 많은 작은 교회의) 새로운 긍정신학은 고난과 구원에 관한 참혹한 이야기나 가차 없는 심판을 접어 두고 현생에서의,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 안에 가능한 부와 성공과 건강을 약속한다. 당신은 새 차와 새 집, 탐내던 목걸이를 가질 수 있다. 하느님은 당신이 번창하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2006년 [타임] 조사에서는 종파나 교회 규모를 막론하고 미국 기독교인들의 17퍼센트는 자신이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 운동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며, 61퍼센트가 '하느님은 사람들이 번창하길 바라신다'는 서술에 동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5장 하느님은 당신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p.178)

- "1920년대 대공황을 앞둔 시기에는 양극화가 심해지자 부자들의 무절제와 빈자들의 비참함에 격분한 노동운동가와 급진적 활동가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아주 성격이 다른 다양한 종류의 이론가들이 정반대의 메시지를 퍼뜨리고 있다. 그들은 고도로 불평등한 이 사회에는 아무 문제가 없으며, 노력할 의사가 있는 사람의 삶은 조만간 훨씬, 훨씬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말한다."(7장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경제를 무너뜨렸나/ p.249)

[ 2013년 9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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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만의 복권 - 조용수와 민족일보 재조명
고승우 지음 / 유니스토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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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고승우, 김민환, 김지영, 원희복 저 < 반세기만의 복권. 민족일보와 조용수의 재조명 : 민족일보 50주년 기념자료집 >을 읽고 / 2011. 11., 238쪽, 문예원

2012년 12월 4일.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 tv토론회에서 한국현대사 60년 만에 이정희 후보의 발언을 통해 처음으로 드러난 이름. "충성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누군지 알 거다. 한국이름 박정희. 군사쿠데타하고 굴욕적인 한일협정 밀어붙인 장본인"
이승만 정권이 1956년에 대선에 출마한 조봉암 씨를 사법살인하고 진보당을 해산시킨 것처럼, 박정희도 1961년 군사쿠테타 후에 조용수(趙鏞壽, 1930년생) 씨와 민족일보(民族日報)에게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민족일보 폐간 및 조용수 씨 사형 사건"은 한국언론사 가운데 가장 가혹한 언론 통제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우리 나라 언론사에서 많은 언론인이 필화를 겪었지만 신문이 폐간되고 그 신문의 발행인이 처형당한 예는 민족일보 사건뿐이다.

민족일보는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61년 2월에 창간됐으며,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애를 호소하는 신문" 등 네 가지를 사시로 내걸었다.
그러나 1961년 친일파 일본군 출신 군부였던 박정희 일당이 5.16 군사반란(쿠데타)를 저지른 후 92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됐고, 30대의 젊은 조용수 사장도 같은 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당했다.

그 이후 45년 만인 2006년 참여정부의 과거사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한 뒤 조용수 사장은 법원 재심 결과 무죄와 국가 배상 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2008년 1월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가 재심에서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던 조용수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것이다.
고승우 씨 등 저자는 2011년 민족일보 발간 5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민족일보 발간의 언론사적, 사회적 의미와 짧지만 민족일보가 진행했던 활동을 평가하기 위하여 기념집을 발간한 것이다.


김민환 고려대 교수는 '민족일보 사건의 성격과 언론학적 함의'라는 글에서, 민족일보는 중립화 통일론과 남북교류론 등으로 반국가단체의 목적사항을 선전 선동했다고 검찰이 공소장을 제출했으나, 민족일보가 제기한 중립화 통일론 자체가 사회주의를 지향한 것이 아니었으며 친북노선이 아닌 반공 반북노선을 기저에 깔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또한 민족일보 사건은 언론학적으로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며, 민족일보는 1960년 4.19혁명을 통해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사회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 지 자유 토론이 전개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수정주의적인 통일론을 펼친 대안언론으로의 역할이 컸다고 말했다.

원희복 경향신문 선임기자는 민족일보 사건이 재심 무죄 판결으로 그 진실과 법리논쟁, 국가배상이 사실상 마무리 됐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향후 과제에 대해 제시했다.
원 기자는 조용수는 대표적인 언론민주화운동, 통일운동가이면서 권위주의 정권의 사법살인에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보상법의 적용대상이 되지 않아 추모공원 안장대상이 되지 않고 이명박 정부들어 과거사 관련 단체들이 줄줄이 해체되면서 조용수 사장의 묘소를 민주공원에 옮길 곳이 없다며 조용수의 민주화공원 안장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할 문제로 꼽았다.

김지형 한양대 동아시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재심 무죄판결 이전까지는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이영근에 대한 연구와 혁신계와 민족일보의 관계에 대해 조명했다.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이영근이 미국 cia의 첩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민족일보]의 성격을 민족지로 볼 것인지 혁신계 대변지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음을 민족주의자인 이종률 초대 편집국장의 영입과 퇴사과정을 통해 조명해 [민족일보]가 혁신계 대변지로 변화됐음을 밝혔다.

고승우 6.15언론본부 정책위원장은 [민족일보] 폐간 이후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는 제대로 된 [민족언론]이 탄생할 수 없었고, 결국 1987년 6월항쟁에 힘입어 [한겨레신문]이 등장했고, 6.15공동선언의 열린 공간에서 [통일뉴스]와 [민족21]이 나왔다고 봤다.
특히 이명박 정권 들어서 민족언론이 위축됐다며 미디어악법에 의해 탄생시킨 종합편성채널이 연말에 뜨게 된다는데 민족언론이 더욱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민족언론의 재정적 자립성을 강조했다.
물론 한겨레는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를 지나오면서 창간 정신과 제호의 취지를 잊어버렸고, 창간 26년이 지난 현재 상업안보주의와 재벌기득권에 포섭된 보수야당의 대변지로 전락한 상태라고 보여지지만...

 

 


헌정유린 범죄집단 국정원에 뿌려진 삐라. 그 출처도 불분명한 녹취록에 의해 여론몰이와 마녀사냥을 당하는 통합진보당과 이석기 의원을 보면서 책꽂이에서 이 책을 꺼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교훈이 화석화되어 버린 느낌이다. 민주적인 헌법과 법, 제도가 존재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정치인, 언론, 사법기관, 시민들이 그것을 무시하면 그만인 것을.
분단 트라우마를 악용하는 자들과 분단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하는 한 남북화해나 평화, 통일은 커녕 초보적인 민주주의도 지켜내기 어렵다는 것을 지금 한국인들의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것은 [민족일보]의 사시나 기사 또는 군사독재의 탄압과정이 아니었다. [민족일보]를 창간하고 운영했던 조용수 씨가 5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의 나이가 만 31세, [민족일보]를 창간했을 때가 만 32세였다는 사실이었다. 그 나이 때 나는 무엇을 했나 기억하면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전에 김영삼 씨처럼 26세에 국회의원이 나타나기도 했다. 해외에서도 위대했던 20~30대의 인사들도 많았다. 로마시대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로마군 장수 스키피오의 나이도 26세였고,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이탈리아 원정군 총사령관이 된 것도 27세,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36세에 연방 하원의원이 되었다. 모두들 젊은 나이에 대단하다고 칭송했다.
그런데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만 29세에 공화국 원수가 된 것에 대해서는 일부에서 "어린 게 뭘 안다고" 식으로 말하는 걸까?

[ 2013년 9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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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콘서트 무죄 - 이정희와 이시우의 국가보안법 대담
최진섭 지음, 이정희.이시우 대담 / 창해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강추!! [서평] 이시우, 이정희 대담, 최진섭 저 < 법정콘서트 무죄 : 이정희와 이시우의 국가보안법 대담 >를 읽고 / 2012. 10., 366쪽, 창해

최근 국정원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과 노동해방실천연대 사건이 법원에서 무죄로 판명되었고, 이석기 의원에 대한 내란예비음모 사건은 국정원에서 검찰로 송치되었다. 공무원 간첩사건은 핵심 증거물을 국정원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고, 내란예비음모 사건 역시 이렇다 할 핵심 물증이 없이 프락치의 진술에 의존하는 상황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두 사건 모두 사건 발표 즉시 사실 관계 확인 없이 받아쓰기에 충실한 언론에 의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간첩과 내란용의자로 '각인'되어 앞으로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을 해나가는 것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졌다.

대담자의 한 사람인 이시우 작가 역시 경찰과 검찰, 그리고 기무사에 의해 국가보안법 및 간첩 혐의자로 매도당했던 경우이다. 특히 2007년 발표된 이시우 사진작가 사건은 ‘국가보안법 사건의 백화점격’이라고 알려졌다.
무려 20가지가 넘는 죄목을 가졌는데, 군사상 기밀 및 국가기밀 탐지·수집·누설, 이적 표현물 작성·배포, 조총련 소속 인물과의 회합·통신, 븍한 출판물의 입수·탐독·보관 등이었다. 검찰은 당시 이 작가의 '예술작품'에 10년이라는 중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당시 변호사였던 이정희(2013년 현재 통합진보당 대표)는 예술가로서의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이시우 작가와 의기투합해 법정에서 헌법과 양심에 근거하여 국가보안법의 무모함과 불합리함을 논리적으로 설득했고, 그 결과 2008년 1월 31일 1심 재판부는 28개 공소조항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리고 2011년 10월 13일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법조계에서는 국가보안법 사건으로는 두고두고 입에 오르내릴 기념비적인 무죄판결로 불리운다고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무죄로 판결난 위 사건에 대해, 이정희와 이시우가 다시 만나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는 대담형식으로 구성되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이시우라는 사진작가를 알았고, 사진작가 또는 예술가 중에서 작품을 창조하는 시간보다 몇 십, 몇 백배의 시간을 들여 구체적인 현장 조사와 이론적인 연구에 매진하는 예술가(사진작가)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시우 작가는 추상적인 철학이나 개념을 다루는 대신 구체적인 현실을 작품세계로 선택한 예술가였다. 그는 2001년 <자본론>을 주제로 사진작업을 준비하다가 미국에서 발생한 9.11 테러로 인해 한반도 정세를 고민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사진 주제를 미군으로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9.11 이후 보수화된 미국이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을 몰고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 뒤로 90여 군데가 넘는 전국의 미군기지와 일본과 독일의 미군기지 거의 전부를 찾아다니며, 핵무기를 조사하고 촬영했다.
사진작품을 찍기 위해 미군기지와 유엔사를 연구하면서 이시우 작가는 국내 어느 전문가 못지 않은 '정전협정 그리고 주한미군과 유엔사 전문가'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검찰은 그이 방대한 연구와 현장답사를 이적표현물, 고무찬양, 군사기밀누설의 각도로 접근했다. 그가 연구한 자료는 모두가 주한미군이나 국방부의 공식 기자회견, 정보공개청구, 국회/중앙도서관, 인터넷, 현장방문을 통해 얼마든지 접근 가능하고 수집 가능한 자료였다.
그런데 국방부와 주한미군은 자신들이 공개한 그리고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자료가 어디까지인지 전혀 알지 못했고, 검찰은 냉전적 사고방식과 국가보안법에 한정된 법률지식으로 이시우 작가를 옥죄려고 한 것이다.

이시우 작가는 검거 직후부터 묵비권 및 진술거부권의 행사, 48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 국가보안법 명상을 위한 3보 1배 및 걷기, 슬라이드 재판, 피고의 법정 미학강의 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 과정을 통해 국가보안법 재판의 신기원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국가보안법,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명하게 되었다.
또한 국가보안법 극복을 위한 예술의 한 방법으로, 주체사상전을 비롯한 ‘국가보안법 약 올리기 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이정희 대표는 이시우 작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시우 작가를 처음 만난 그해에 저는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지뢰피해자 문제, 미군기지 문제, 금지된 열화우라늄탄을 비롯한 무기와 핵잠수함 정박 문제, 한미연합사 문제 등 수많은 한미관계의 쟁점들과 미세한 법적 논점에 대해 어떤 정치학자도 밝혀내지 못한 문제를 파헤치고, 어떤 법률가도 하지 못한 분석을 해내고 있는 예술가를 보며, 법률가로서 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책임을 느꼈습니다. 이시우 작가의 변호인이 되고서야, 저는 정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극을 받았습니다."(p.23)

나는 이 책에서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관성"이라는 것을 배웠다. 이는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의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문정현 신부와 한상렬 목사가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때까지 수염을 기르겠다고 결심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나는 이 책에서 변호사로서, 정치인으로서 이정희의 진정성과 세계관을 알 수 있었다.
이석태 변호사를 멘토로 삼고 있다는 이정희 변호사는 이시우 작가를 만나 함께 재판을 치르면서 정치에 뛰어들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시우 작가는 이정희 대표에게는 "변호사를 하면서 만난 의로인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을 딱 한 명 꼽으라고 할 때" 해당하는 의뢰인이었다.

그녀는 "피고인만큼은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법률적 쟁점뿐 아니라 정전협정과 한미연합사, 한미관계, DMZ, 지뢰, 핵무기, 유엔사 등 관련한 공부를 많이 했다. 사진작가가 피고인이기 때문에 작품을 통해 변호하겠다는 생각으로 법정에서 진행한 '슬라이드 재판'에 대한 이야기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녀의 말을 통해 처음 러시아 말기 사실주의 작가 레핀의 작품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1884년)는 작품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이정희 대표가 2012년 5월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논란이 발생했을 때, 편안한 선택을 포기하고 마녀사냥을 당할 각오를 하면서 당원들과 부정혐의자를 방어했던 이유, 2012년 12월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로서 보였던 모습, 그리고 2013년 9월 이석기 의원에 대한 마녀사냥을 앞장 서서 막아내는 자세와 결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국가보안법.
대한민국 헌법에는 '평화통일'을 지향하지만, 국가보안법은 근본적으로 북한을 평화통일 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적으로 규정한다. 유엔에 가입되어 있고 상당수의 국가와 외교관계를 체결한 그 적은 국가보안법 상 '국가'도 아니고 '반국가단체'다.
그러면서 동시에 정부는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에서부터 시작하여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선언과 2007년 10.4선언을 통해 명백히 북한을 통일의 파트너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은 한국사회 내 모든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자기검열하도록, 서로 의심하도록, 서로 고발하도록, 서로 왕따시키도록, 서로 손가락질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전근대적인 마녀사냥을 통해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라는 그림을 현실화시켜버린다.

만일 우리가 평화와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통일을 지향한다면 아니 평화통일을 이루려면 국가보안법을 반드시 폐지시켜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평화통일의 염원은 요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국정원 등 극우보수세력이 저지른 불법 대선개입과 정치공작, '종북공세'와 'NLL 대화록' 사기 그리고 2013년 이석기 의원 내란예비음모 사건 조작을 통한 전국적인 '종북 마녀사냥'을 위한 치졸한 정치 공세와 불법행위를 방지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국가보안법은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지는 것 같다. 이시우 작가가 말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포장한 무관심'이라는 표현이 인상에 깊게 남는다. 나 역시 어떤 관성과 두려움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작가로서 예술혼을 작품에 불어넣기 위해 학자보다 더 공부하고 운동가보다 더 평화운동을 실천하고 철학자보다 더 철학적인 예술가와 그 예술가를 완벽하게 호흡한 변호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 인상 깊은 문장 :

- "피고인의 생각과 마음을 통역해주는 것이 변호사의 역할인 거죠."(p.73)

- "검사는 피고인의 진술 거부와 단식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진술 거부는 피고인에게 헌법상 보장된 권리를 행사한 것이고, 단식은 양심의 결정에 따른 행동일 뿐입니다. 이것이 이 사건에서 피고인에게 불리한 요소로 고려될 수 없고, 검사는 이에 대해 논평할 권한이 없습니다."(p.90)

- "국가보안법에 따르면 법적으로 북한의 노동당 당원 그리고 북한 주민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사실 자체 때문에 모두 처벌받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의 누구도 그걸 상정하지 않는다. 북한 주민 전체를 중대 범죄인으로 만드는 건 어불성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이 법으로서 유지되어야 할 기본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법은 오로지 적과 대치한 우리 편 진영을 지키기 위한 처단 도구에 불과하다. 이게 적나라한 국가보안법의 기능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p.110)

- "오늘날 포유류가 거대한 몸집을 갖게 된 것은 공기 중의 산소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먹이가 많아진 것이 아니라 공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질서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유의 공기가 우리를 거대하게 할 것이다."

- "무관심이란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의 위장된 표현입니다. 연이어 터지는 국가보안법 사건들에 무심한 사이 얼마 지나지 않아 뜻밖에도 그 다음 순서는 저였습니다."(p.266)

- "국가보안법을 코웃음치며 아직도 그런 법이 남아 있었는가 하고 화답하던 이들에게도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공포였습니다. 출소 후 재판을 위해 증인과 증거자료를 부탁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가 무관심이 아니라 사실은 두려움임을 알았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부탁한 것조차 부담스러워 할 때 저는 더 이상 부탁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증거 자료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 "표현의 자유에 앞서 선행하는 것이 소통의 자유입니다. 개인은 소외와 고립을 넘어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서 자신을 재구성해나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소통과 소통을 위한 표현은 개인을 긍정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전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통의 주관적 의지만으로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건 과정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시장이란 엄혹한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권력이 이 과정에 개입하면 겉보기엔 통제가 이루어질 수 있으나 사상과 표현은 지하로 숨어 들고 시장 외적 질서에 의해 주도됩니다. 사상은 상품보다 훨씬 비제도적이기에 지하화하는 것도 훨씬 쉽습니다. 인위적 조정인 폭력과 제도로 소통과 표현이 통제될 수 있을가요? 국가를 독점한 권력이 사상의 시장에 개입한 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입니다."(p.275)


[ 자유와 관성, 그리고 고통 : 이시우 1심 최후 진술문 중에서... ]

"중생이라도 오늘 깨달았다면 그는 부처요, 부처라도 오늘 닫혀 있다면 그는 중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소통을 포기한 상태가 관성입니다. 구속이나 통제가 아니라 소통이 필요 없다고 합리화하고 스스로 최면을 건 상태가 관성입니다. 그리하여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관성'이란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이전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일 수 있는 법은 이미 아닙니다. 저처럼 한 번씩 잡아들입니다. 이것은 어떤 효과를 발생시킬까요?

독일은 70년대 기차표 개찰구를 없앴습니다. 그러나 불시에 검표원이 표검사를 해서 표가 없으면 몇배의 돈을 몰립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불시검열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 표를 사서 승차합니다. 조삼모사입니다.
정부로서는 인력을 줄이고도 질서와 통제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 것이지만 복지가 향상된 것은 아닙니다. 타율 대신 자기검열이란 형식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국가보안법도 이젠 막무가내로 사람을 잡아들이진 않지만 불시검열처럼 한둘을 잡아들임으로서 사람들을 자기검열하게 하고 효과적으로 국가보안법의 통제를 유지합니다. 사람들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귀찮아서라고 합리화해둡니다. 국가보안법은 건재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애써 모른체 하고 살고 있습니다. 조삼모사 정책을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국가보안법은 자기기만을 초래합니다. 국가보안법이 무서워서 피한 것이 아니라 귀찮아서 피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역시 피해자입니다. 그들은 구속된 자보다 더 큰 통제 하에 순응하고 있으며 아픔이 있는데도 아픔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도 관성의 체계는 남아 테러방지법 같은, 이름을 달리한 국가보안법의 출현을 허용할지도 모릅니다. 관성에 대한 자각과 소통이 절실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관성은 숨어 있으며 드러나지 않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드러난 고통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고통까지 성찰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p.277)

[ 2013년 9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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