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이 불일듯 일어나는 과정에서

한 탤런트가 유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말이 많은 것 같다.
누구는 마녀사냥이라고 했다가 삭제했고,

누구는 미투 운동이 음해 세력이 있다고도 하고.
미투 운동을 오히려 지지할 것 같은 사람들이 그러고 나오니까
좀 실망이다.

또 누구는 죽은 자가 비겁하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는 비난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섣부른 동정도 하고 싶지 않다.
지금 가장 상처 받았을 사람은 유가족들, 특별히 그의 아내와 딸일 것이다.
그들도 여자다.  

 

앞으로 이 보다 더한 일이 생기더라도 미투 운동은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성범죄 가해자(로 지목받던)가 죽는 건 이번이 처음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피해를 입고 죽어간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요즘처럼 기도가 간절해지는 때도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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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1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3-12 18:18   좋아요 1 | URL
뭐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나라는 한참 뒷걸음질 치게 될겁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남성주의 벽이 두텁다는 걸
실감하게 될 것이고.
선진국일수록 여성이 대우 받잖아요.
상처 받은 사람 상처에 소금 뿌리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ㅉ
 
길 위의 독서 - 바람구두 인생 서평
전성원 지음 / 뜨란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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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자를 알게 된 건 오래 전 알라딘이 서재라고 하는 개인 블로그를 개설한 초창기 때였다. 지금이야 개인 블로그 하나쯤 운영하지 않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때는 뭐하는 물건인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운영을 해야 할지도, 누구와 인사를 하고 친구를 맺어야 해야 할지 모를 때 그는 수줍게 내 서재에 다가와 먼저 인사를 했었다.

 

그는 지금도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란 긴 제목의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게 무려 2000년부터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개인 홈피를 운영하면서 알라딘 서재가 생기자 함께 운영을 한 것인데, 저자의 서재를 방문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서평이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쓰기도 많이 쓰지만 다방면의 글들이 올라와 있다. 알고 봤더니 그는 <황해문화> 편집장이었다. 어쩐지. 예사롭지 않은 글은 직업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런 그가 나의 서재에 먼저 다가와 인사해줬다는 건 나에게 꽤 자존감을 높여줬던 것도 사실이다. 내 허접한 서재에 뭐 그리 볼 것이 있다고. 게다가 내가 성격상 낯가림이 좀 있는 편이라 아무나 덥석덥석 아는 척 하는 성격도 못되는데 이렇게 먼저 손내밀어줬으니 고마울 밖에.

 

그렇게 시작된 저자와의 인연은 짧다면 짧고 기다면 긴 시간을 같은 알라디너로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어느 곳이나 그렇듯 떠나는 사람이 있고 머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머무는 사람은 떠나는 사람을 지켜봐야 한다. 머무는 사람은 떠나나는 사람을 강제할 수 없다. 물론 그 토록이나 많은 글을 쓰는 걸 보면 그는 자신의 홈피를 근거지로 또 어디선가 활발한 활동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또 나의 성격이란 늘 다니는 경로로만 다니는 습성이 있어 평소 그의 글을 좋아함에도 굳이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사람에게 정말 촉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보다. 누군가를 생각하다 보면 그 사람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도 그랬다. 이 책이 나오기 전 문득 생각이 나곤했는데 그의 책이 예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어디선가 무엇을 하고 있겠거니 했더니 세상에 나오려고 이렇게 출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글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의 실하면서도 각잡힌 글을. 그의 글은 감히 따라할 수는 없지만 읽는 것만으로도 생각이 정리되고 서평의 좋은 모범을 보는 것 같다. 물론 보고 싶으면 그의 서재로 가 살짝 보고 나오면 된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뿐 주인 없는 서재에 가기란 생각 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의 기운과 손이 닿지 않는 집이 흉가가 되듯 서재 또한 주인이 없어 소통하지 못하면 그저 방기될 뿐이다. 뭐 꼭 그게 아니더라도 나 역시 아날로그 세대라 그런지 좋은 글은 책으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인터넷에서 야금거리고 있는 건성에 차지 않는다. 책은 사각사각 책장 넘기는 맛도 있고.

 

하지만 책이라는 게 그만큼 내가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마음에만 있지 못 읽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 무수히 많은 책중에 내가 그 책을 읽는다는 건 그야말로 억겁의 인연이 있어야 읽는다는 말도 될 것이다. 이 책도 나에게 그런 것이다. 그런 걸 보면 평소 저자가 덕을 많이 쌓았거나 아니면 알라딘에서 내게 먼저 아는 채 해 준 공덕 때문일 것이다. 타이밍도 기가 막히다. 마침 어느 고마운 알라디너가 책 선물을 하고 싶다기에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이 책을 지목해 덥석 받아버리고 야금야금 읽었다.

 

뭔가의 인연이 있는 사람의 책을 읽는다는 건 오랜 친구로부터 몇 통의 편지를 받는 느낌과 맘먹는다. 전기도 전신도 그리 발달하지 않은 시절 편지는 인간관계의 끈을 이어주는 주효한 매체였을 것이다. 나 어렸을 때만해도 편지 한 통을 받으려면 평균 4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니 편지 한 통을 보내고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 일인지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선 감히 상상도 못할 것이다.

 

책은 어느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란 한 사내의 신산한 삶의 고백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분명 서평 집이면서 신산한 삶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하다니. 그 뜻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틀리지 않다면, 사람이 인생을 4, 50년쯤 살면 뭔가 갈무리를 하고 싶어진다. 내가 어느 집 자식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경험하고 누구를 만나왔는지 어떤 형식으로든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쓰고 싶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회적 분위기는 그것을 쉽게 허용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아직 젊은 사람이 무슨 자서전이냐고 타박을 놓을 수도 있고, 설혹 쓴다고 하더라도 자기 살기도 바쁜 세상에서 남의 삶을 들여다 볼 시간도 마음도 없는 것이다.

 

나도 2년 전 책을 낼 기회가 있었을 때 호기롭게 이참에 나의 독서 경험을 빙자한 일종의 자서전을 모의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내 전 생애를 통해 볼 때 밥 먹고 잠자는 일 외에 가장 오래 해 왔던 일이 그거였으니까. 하지만 내 책을 내준 출판사 사장 겸 편집장이 그냥 여태까지 써왔던 서평을 다듬으면 좋겠다는 말에 두 말도 않고 모의를 접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얼굴 붉혀지는 이야기지만 그러지 않기를 다행이란 생각이 들고, 이미 난 내 책에서 내 지나 온 삶을 언뜻언뜻 얘기했으니 아쉬움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저자는 언제고 본격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써 봐도 좋지 않을까? 그렇잖아도 그는 <황해문화>를 벌써 20년째 편집 일을 하고 있다. 매번 그것을 발행하기까지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긴 하다. 모르긴 해도 그는 아마 10년 내에 이 일을 감행하지 않을까?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 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겨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하러 우리가 책을 읽는가?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독서를 그저 취미로 생각하는 사람에겐. 또 아직 자신의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을 만나지 못한 사람에겐. 한 권의 책이 나의 내면을 깨는 도끼가 되려면 우린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른다. 나의 내면은 그렇게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니며 깨줄 책은 쉽게 찾아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가능성을 믿기에 우린 꾸준한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닐까? 동시에 독서는 부단한 축적물이기에 그런 책을 못 만났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그거야 말로 오만일 것이다.

 

책을 꾸준히 읽어 온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책을 읽었던 크게든 작게든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있다. 그것이 뭔가의 행동을 하게 만들고 결정짓게 만든다. 그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살아 온 사람들은 더더욱. 그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가?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왔고 커서는 노동을 하다 대학을 갔으며 거기서 운동(데모)을 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몇 개의 경로를 거쳐 지금의 <황해문화> 편집장이 됐다고. 그게 과연 책없이 가능했을까?

 

젊었을 땐 책을 전투적으로 읽었던 것 같다. 책을 무조건 빨리 많이 읽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 드니 그것이 좀 달라졌다. 저자가 왜 이렇게 썼을까를 생각해 보고, 나라면 이것을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읽은 책에 나의 지나간 삶을 조금 조금씩 묻어 놓는다. 매일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제의가 되고, 그가 쓰는 문장은 제물이 된다. 그래서 나이 들어 갈수록 그의 글은 더 깊어지고, 비문이 적어지며, 신중해진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했던 카프카의 말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또한 그건 정확히 자서전이 아닌 고백록이나 참회록쯤이 될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이렇게 자기 삶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거나, 이 책처럼 책속에 넌지시 묻어놓는 저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비근한 예로 (이미 쓴 적이 있긴 하지만)나는 몇 년 전에 읽은 인디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 이석원의 두 번째 에세이가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에세이가 소설 같기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는가 다소 놀란 적이 있다. 물론 그것이 어떤 사람 보기엔 다소 부담스럽게 여길지 모르지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난 이렇게 솔직한 글을 쉽게 내칠 수가 없다.

 

속 얘기는 웬만치 친하지 않으면 얘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책에 썼다는 것은 그 책을 읽은 독자하고만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와 작가는 한층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 또 그것은 그만큼 자신을 객관화 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책을 보는 기준이 달라진 건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떤 책은 정말 지적이고 매끄럽긴 한데 삶이 드러나지 않는 책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독서를 하고 책을 썼을 텐데 삶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독서의 재생산물인 글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작가가 아닌 독자가 쓰는 것으로서(독후감이 됐건 서평이 됐건) 어떻게 나의 삶을 드러내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지적 허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많이 감동하는 책은 그만큼 많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의 저자도 그런 말을 말했다. 교양이란 한 인간을 세상 속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성장하도록 만드는 모든 것을 의미하며 진정한 소유는 이 세계 속에 나만의 고유한 자리를 갖는 것이요, 자신만의 자유로운 시간을 소유하는 것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교양)을 바탕으로 세상과 교류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세상을 소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314p) 이것은 책을 읽지 않고 사색하지 않는 사람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마침내 그만의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란 그만의 세계를 탄생시켰을 것이다.

 

블로그 활동을 하다보면 자신의 본명 대신 닉네임을 쓰고, 자기 블로그에 이름을 붙이는 경우를 보게 된다. 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내 블로그에 이름 하나 제대로 붙여줄 생각을 못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물었던 것 같다. 닉네임의 뜻이 뭐냐고. 그런데 그에게 만큼은 묻지 못했던 것 같다. 바람구두야 천재 시인 랭보에게서 따온 것일 테고, 그 긴 블로그 이름은 뭘 뜻하는 거냐고 묻지 못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블로거들이 물어봤을까? 거기에 나의 궁금증까지 더하기가 뭐했다. 그의 블로그를 탈탈 뒤져보면 알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언젠가 자연스럽게 알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그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아쉬웠었다.

 

그런데 이렇게 책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의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의 서평 글에서. 그는 말한다. 우리를 에워싼 체제의 외부를 상상하려면 너무도 익숙한 기존의(자본주의적) 문화와 결별하는 절차와 형식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문화망명이라고 불렀다.(290p) 다른 설명이 뒤에 나오지만 이것만 읽어도 그의 서재명의 뜻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의 글엔 그다운 저항 정신이 깃들어 있다.

 

한 권의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이냐는 사람 저마다 선택하기 나름이겠지만, 확실한 건 그 책에 대한 사전 정보와 얽힌 사연을 알게 되면 훨씬 의미 있고 읽기가 수월해진다. 그래서 이런 서평집이 요긴해지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편집의 달인(?)답게 읽은 책을 요약을 잘 해 놓고 있어 굳이 그 책을 힘들 게 읽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 책을 직접 읽어보지 않고 아는 척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많다. 독서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효율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반대로 이게 그런 내용이었어? 하며 읽어 볼 마음이 비로소 생기게 만드는 것도 있다. 그래서 서평집은 유용하다. 사실 저자와 나는 독서 취향이 많이 다르다(물론 저자가 한 수 위다). 다르기 때문에 책을 보는 시야가 더 넓어진 느낌이었고, 실제로 몇몇 책은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결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책이었을 텐데 보관함에 넣어 놓기도 했다. 한마디로 서평집은 지은이의 독서와 삶이 녹아져 있어 읽는 맛이 다르다. 우리가 이런 기쁨과 보람이 없다면 뭣 때문에 서평집을 읽겠는가? 이 책은 특히나 더 기쁘고 반가웠다.

 

이 책을 읽으니 앞으로 당분간은 촉을 곤두세우며 저자를 궁금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는 또 어디선가 변함없이 열심히 책을 편집하며 왕성히 글을 쓰며 부단히 소통을 꽤하고 있을 것이다. 난 그런 그에게 말없는 응원과 우정 어린 관심을 보낼 것이다.

언제나 건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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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3-11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하루에 백권 이상이 출간된다는 말을 듣고(요즘은 하루에 몇 권 출간되는지 모르겠고.) 책의 홍수 시대에 사는 것 같아 꼭 책을 낼 만한 역량 있는 사람만이 책을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르게 생각해요.
모두가 한 번씩 책을 내서 자신과의 대화 시간을 가져 뭐가 반성할 점이고 뭐가 후회할 점인지 아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나만 해도 글을 쓰면서 저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거든요. ㅡ그런데 이게 착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성추행 사건이 있던 누구가 그렇게 많은 책을 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그 사건으로 인해 그 책들을 수거해 판매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출판사의 결정 소식을 들었어요. 그의 글쓰기는 그를 조금도 성숙시키지 못한 모양이에요. 그의 글쓰기는 가짜였던가 봐요. 그래서 저는 헷갈리게 되었어요.

stella.K 2018-03-11 18:38   좋아요 0 | URL
저도 언니와 같은 생각을 해요.
분명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 좋은 경험이 되죠.
그런데 책이라는 게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도 참 그렇더라구요.
결론은 모두가 내되 역량있는 사람이 되서 내야되는 것 같았요.ㅋ

예전에 어떤 분이 그런 말씀하더군요.
어떤 사람은 멋진 집을 지어놓고 막상 자신은 그집에서
살지 않는다고.
자신이 쓴 글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사상누각인 거죠.
그글이 아무리 훌륭해도.
사상누각이 아니라 결국 자신을 해치게 되는 거죠.
이번 미투 운동은 여러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2018-03-11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1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입] Loving Vincent (러빙 빈센트)(한글무자막)(Blu-ray)
Cinedigm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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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다림 끝에 이 영화를 봤다.

영화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흐가 어쩌면 타살됐을지도 모른다는 가정하게 그의 삶을 다시금 반추하고 추적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단순히 생각해서 고흐를 연상시키는 정교하게 그린 애니메이션? 또는 그래픽 노블 뭐 그런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실사 영화에 편집 과정에서 고흐의 화풍을 덧입힌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여기에 여러 명의 화가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것은 전에 보았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13점을 가지고 만든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을 연상시키기도한데 그보다는 좀 더 진화한 방식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어쨌든 실사 영화에 고흐 화풍을 덧입혔으니 그 작업이 만만치 않았겠다 싶다. 영화속 장면과 고흐의 그림을 조화하도록 짜임새 있는 스토리가 인상적이기도 하다. 이렇듯 이 영화에 드린 공력이 어느 정돈지 알 것도 같은데 나 개인적으론 약간은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고흐풍의 순수 그래픽 노블 같은 질감을 기대했는데 실사 영화에 그림을 덧입히니 그림도 아닌 것이 영화도 아닌 것이 뭔가 어정쩡한 느낌이다. 나만 이런가?

 

고흐를 가리켜 고독한 영혼의 소유자라고 많이 추켜세우던데, 타살됐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에서 시작된 영화는 결국 고흐의 고독만을 더 확연히 부각시키고 끝나버린다. 요즘 추세는 외로움과 고독은 다르다며 고독을 찬양도 한다만, 뭐든 지나치면 독이라고 그것도 적당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고독을 즐겼던 사람은 또 있는데 그건 철학자 니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행복한 삶을 산 것도 아니다. 우린 고흐나 니체가 나름 행복한 삶을 살을 것이라며 섣불리 그들의 삶을 평가하는 걸 조심하고 있는데 그것은 후대 사람의 경의를 표하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고, 실상 고독은 그렇게 즐거운 것은 아니다. 물론 고독이 해롭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홀로 있음으로 해서 영혼의 성숙을 이루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이 주는 만족도 한계가 있는 법이고. 

 

영화 말미에 돈 맥클레인의 공전의 히트곡 '빈센트'가 나오면서 고흐의 일종의 프로필 같은 것이 그의 그림과 함께 흐르는데 상당히 인상적이기도 하거나와 놀라운 것은 그가 죽기 전 8년 동안 800점의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당 2점이 채 안되는 건데 실로 엄청난 작업량이다. 그걸 보면서 내가 또 알아야 할 것은 난 너무 게으르다는 것. 고흐의 고독 후에 오는 게 이거였다니. 이 영화가 잔인한 걸?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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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3-11 12: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흐에 관심 있어서 고흐에 대한 책을 읽은 적 있는데 다작에 놀랐었지요.
뛰어난 예술가들은 재능은 기본이겠지만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노력파라는 거죠.
하루키도 그렇고. 어쩌면 노력이 재능보다 우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요즘 듭니다.
노력이 재능을 키우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stella.K 2018-03-11 18:48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런데 전 너무 게으른 것 같아요.
재능이 없으면 노력이라도 해야하는데...ㅠ
전 아무래도 짧고 굵게 보다 가늘고 길게 살 것 같아요.ㅠㅋ
 

 

http://v.media.daum.net/v/20180225050302701

 

 

미투 운동은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는데 벌써부터 이 문제가 붉어져 나왔다. 이를테면 고은의 시를 교과서에서 삭제할 거냐 말 거냐에 관한 논란이다. 삭제를 찬성하는 쪽이야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도 같고, 반대하는 입장에선 작품과 그 사람은 따로 봐야하는 거 아니냐는 시각이다. 나야 이 갑논을박의 현장에 있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마 있었더라도 뒷목을 몇 번 잡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사람 보기에 좀 고루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작가에게 있어서 글쓰기란 하나의 제의 또는 제사와도 같은 거 아닐까? 유명 작가의 글쓰기 강좌나 작가의 글 쓰기에 관한 고백이 담긴 책을 보면 하나 같이 자기 글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작가는 자신이 쓰는 글 앞에 자신의 명예와 인격을 걸 수 있어야 하고 필요하면 자신의 목숨이라도 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작가로 살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사람과 그 사람의 글을 따로 볼 수가 있을까?

 

물론 그런 말은 한다. 그렇게 따로 보아야 그 사람의 문학적으로 이루어 놓은 업적을 보존할 수 있다고. 근데 그거 다른 시각에서 보면 사상누각 같은 거 아닌가? 무엇보다 작가 자신이 자신의 글과 명예를 실추시켰다. 그것을 일반인은 그렇게 보면 안 된다고 하면 그게 설득이 된다고 보는가? 예를들어 아무리 좋아했던 연예인도 그가 성범죄거나 도박중독자라면 그때부터 오만정이 다 떨어지는 법이다. 문화계 인사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는 거다. 

 

무엇보다 이런 논의 자체를 작가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이다. 그런 논의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거명될 때마다 그는 어디선가 숨어서 그래도 자신이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다고 자위하고 있을지, 어떤 식으로든 지신의 이름이 거명되는 것이 괴로운 건지, 아니면 모든 것을 토론의 당사자들에게 맡긴다고 체념할지 그 마음을 알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작가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상처를 줬다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만약에 반대로 그 작가가 남자가 아니고 여자였다고 해도 과연 이런 갑론을박을 펼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나도 여자지만 그것에 쉽게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면서 새삼 우리 사회가 얼마나 남성주의적 사회인지를 또 한 번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과 관련해서 나도 얼마 전 뉴스 인터뷰 영상을 봤는데, 교과서에서 빼자는 쪽은 학부모쪽이었고, 그건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니냐고 했던 건 어느 대학 교수였다. 어떤 쪽에 경중을 두게 되는지는 시청자의 판단의 몫이긴 하지만 적어도 학부모를 대표한 쪽은 여자였고, 삭제를 반대하는 쪽은 남자였다. 이걸 반드시 남녀가 사안을 받아들이는 차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남녀의 차이를 떠나 도덕과 양심의 눈, 인간에 관한 예의란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미투 운동이 다른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왜 문화계만 벌써부터 면죄부 내지는 예외 조항을 두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같거나 비슷한 분야에서의 성폭력 가해자들도 어부지리로 묻어 가는 건 아닌가? 원래 이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욕망의 금기를 깨고, 인간의 오욕칠정에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쪽은 남자가 아니었나? 그것에 여자를 동조하게 만든 것도 남자고. 그 결과 역학적인 측면에서 여성이 성폭력을 당하는 쪽은 전혀 모르는 남자가 아닌 잘 알고 지내는 남자에게서 나온다는 증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문제는 누가 해결을 해야 옳은 것인가?

 

미투 운동을 가볍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거야 말로 혁명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불씨를 쏘아 올린 것에 지나지 않다. 이 혁명이 제대로 성공을 할지 안 할지는 지금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어떤 여자는 그런 일을 당해 보지 않아 미투 운동을 마냥 속시원한 마음으로 보고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여자들은 크던 작던 그런 기억 하나쯤은 묻고 산다. 나도 매일 미투 운동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어렸을 때부터 최근까지 알게 모르게 당해왔던 언짢은 기억들이 건드려지고 있어서 괴롭다. 물론 건드려진 건 이번 미투 운동이 처음은 아니다. 그동안 오랜 세월을 두고 수시로 건드려져 왔고 그때마다 애써 잊어버리려고 노력해왔을 뿐이다.  

 

글쎄, 이번 고은 사태를 어떻게 봐야할런지 모르겠다. 같은 미투는 아니지만 우린 아직 미당이나 춘원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당대 출중한 지식인이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그들이 일제에 부역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부 평론가를 제외하고 그들의 문학을 애써 부인한다. 그게 옳은 태도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분명한 건 그 사람의 하는 일이 그 사람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다된 죽에 코 빠트린다고 평생 그렇게 훌륭한 글을 쓰고도 사람의 됨됨이 하나가 올바르지 않아 그것을 망치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벌써 2년 정도 된 일이다. 누구라고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내 책이 나오고 한 알라디너를 오프에서 만난 적이 있다. 알라딘 초기 땐 몇 명의 알라디너를 오프에서 만나긴 했지만 이후로는 누구도 만난 적은 없다. 그런데 사실 이 알라디더 몇 년을 두고 한 번씩 나에게 만나자고 했었다. 난 그것을 미루고 미루다 내 책을 계기로 만난 것이다. 특별한 기대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책을 냈고, 그 사람은 읽었으니 작가와 독자의 만남. 또는 같은 알라딘 서재를 쓴다는 동료 의식 뭐 그런 거 외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하지만 너무 기대가 없다면 그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 사람 글도 잘 쓰고, 무엇보다 여성을 대변하는 한 인디 잡지에 자신이 잠재적 가해자인지도 모른다는 고백을 하기도 하고 또 그런만큼 가끔씩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글도 올려 여성에 대해 뭔가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그 첫 만남에서 깨졌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했고, 그는 술을 잘 마셨다. 아무리 술 기운이라고는 하지만 그리고 꼭 그럴 것은 아니겠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여관 가자는 말을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순간 좀 움찔했지만 이 사람은 술이 취한 그야말로 심신미약 상태니 내가 그것에 예민할 필요가 있나 해서 못 들은 척 했다. 하지만 이것도 명백히 성희롱 아닌가? 그런데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들은 성희롱을 당하고도 그 즉시 반응하지 못한다. 그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모를뿐만 아니라 예민하게 굴어 좋을 건 없으니 거의 대부분은 무시하고 못 들은 척 한다. 하지만 그것이 한 번 쌓이고, 두 번 쌓이면 이것은 남자들로 하여금 그래도 되는 것처럼 되어버린다. 

 

아무튼 그후 아무 일도 없었다면 그것도 묻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머피의 법칙이었을까? 안 좋은 언쟁들이 몇번인가 겹쳤고, 그러다가도 내가 혹시 오해하고 예민했나 싶어 사과도 하고 가급적 관계를 회복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시 만날 것도 아닌데 온라인에서나 전처럼 잘 지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도 그 머피의 마법은 풀리지 않았다. 한 번은 댓글로 대판 싸웠는데 비록 온라인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몇 년 동안 알아왔던 사람이 맞나 싶은 게 싸우는 태도나 수준이 형편없고 야비하기까지 했다. 또 나중엔 화가 단단히 났는지 잔뜩 독이 올라 반말로 일관했다. 실제로 만나서 싸웠다면 내가 한 대 쳐 맞을 수도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상당히 언어가 공격적이었다. 순간 그때 생각이 난 건 그 사람이 그 인디 여성잡지에 썼다는 잠재적 가해자의 고백이었다. 난 그게 그의 참회록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쓴 의미는 뭐였을까? 

 

아무리 화가나도 그렇다. 반말을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오프에서 처음 만나던 날 그는 나에게 그랬다. 자신은 상대가 어린 고등학생이어도 절대로 말을 내리지 않는다고. 그게 자랑거리 같지는 않지만 뭐 그만큼 자신이 예의 바르고, 사람을 대하는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처음 만나는 고등학생에게 그 정도는 누구든지 한다. 중요한 건 화가 났을 때도 자기를 잃지 않는 것이다. 화가나 반말로 일관했다는 건 그게 자신의 싸움의 법칙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상대가 볼 때 헛점을 보여 이미 지는 싸움을 한다는 반증이다. 역시, 그는 전에 자신은 싸움을 하도 많이 해 봐서 어떻게 싸우는지를 안다고 한적이 있다. 자신을 온전히 지키지도 못하면서 누구와 싸워 이기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여태까지 제대로 싸워보기는 한 건가? 다른 말도 많지만 더 이상의 언급은 회피하겠다.

 

요는 사람 마음은 똑같다는 것이다. 자신이 쓴 글이 자신의 삶과 일치하지 않으면 고은 아니야 고은 할아버지가 글을 써도 사람들은 읽지 않는다. 나 역시 이미 오래 전부터 그의 글은 읽지 않는다. 옛날엔 참 많이 즐겨 읽었는데. 그가 무슨 글을 써도 하나도 진심으로 와 닿지 않는 것이다. 지금도 그는 여전히 간간히 글을 올리며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 솔직히 난 멘탈이 약해서 그런지 작년 내내 이 문제로 혼자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지금은 그나마 어려운 시간이 많이 지났고, 더구나 미투 운동을 보면서 그와의 일들을 좀 더 많이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이날까지도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아무튼 고은 사태가 어떻게 귀결이나든 대중의 반응은 싸늘할 것이다. 왕이 되려는 자 왕관의 무게를 견디라는 말이 있다. 똑같은 말을 하고 싶다. 작가가 되려는 자 글의 무게를 견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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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8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3-01 19:04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말과 행동을 어떻게 해왔나 싶기도 하고.
마치 그렇게 해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하고
전혀 죄책감도 없이 살아왔더는 게 참...ㅠ

syo 2018-02-28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여기나 저기나.....
알라딘에도 미투 바람이 한 번 몰아쳐야 하는 건 아닐까요.

stella.K 2018-03-01 13:30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점이 좀...
아니면 뭐 저만 그러는 수도 있구요.ㅠ

2018-02-28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01 1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01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01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01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8-03-01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의 글이 무게 있게 다가오네요.

저도 요즘 미투 운동에 대한 소식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어요.
고은 시인은 소문으로 들었긴 한데 막상 사실이 밝혀지고 나니 놀랍더군요. 어떻게 글은 훌륭한데 사람은 훌륭하지 않을 수 있는 건지 헷갈리더군요.

stella.K 2018-03-01 18:24   좋아요 0 | URL
사람은 겉으로 모른다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고.
사람 참 어려워요.ㅠ
 

며칠 전, 후배와 작은 언쟁이 있었다고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게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그때 우리는 교보문고를 나와 가까운 커피숍에서 수다를 떨고 나오는데도 그 친구는 아직도 뭐가 안 풀렸는지 뜬금없이 자신이 무슨 책을 보니 사람이 화가 나는 건 상대가 화를 나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화를 내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란다.   

 

왜 그 말을 하는지에 대해선 역시 구구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적어도 그 친구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을 나에게 투사하고 있었고, 선배인 나에게 그런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그 친구와의 만남이 썩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약속 시간에 늦었고, 그전부터 나의 뭐 하나 꼬투리 잡아 나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으니까. 도대체 그 친구가 읽었다던 책이 뭔지 모르겠다. 난 그때 누가 쓴 무슨 책이냐고 물어봤어야 했던 건데 그 보단 그 친구의 말본새가 하도 어이가 없어 더 이상 듣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니까. 

 

사실 그 말처럼 무책임한 말이 또 있을까? 그러니까 그 친구의 말에 의하면 화가 나도록 자극한 사람에겐 책임이 없고 화를 낸 사람만이 문제가 있다는 건데, 도대체 그렇게 말한 그 이름모를 책의 이름모를 원저자는 어쩌다 그런 말을 했을까? 뭔가의 맥락이 있었을 것도 같은데 만일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면 난 그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알아 그 위험한 발언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하고 싶다.

 

인간은 그렇게 선택이 용이한 존재가 아니다. 특히 오늘 날의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은. 물론 나도 그 얘기를 들어보기는 했다. '인간은 정말 그렇게 생겨 먹어서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기로 이미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말. 이것은 그 옛날 빅터 프랭클이 저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수용소 나와서 이와 비슷한 말을 한 것 같긴 하다. 그 친구가 설마 이 위대한 실존주의 정신의학자의 이론이 그 순간 생각나서 그런 건지는 할 길은 없다. 물론 빅터 프랑클의 로고 테라피는 그후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확장시켜 왔을 테니 그중 한 사람이 얻어 듣고 자기식의 해석을 그 친구가 나에게 써 먹었는지도 모르지. 

 

아, 그런데 이건 정말 함부로 써 먹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이 말이 어디까지 확대 해석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요즘 미투 운동이 한창이다. 그나마 가해자들이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런 무책임한 사이코가 없으라는 법 없다 나는 그렇게 행동한 게 잘못인 줄 몰랐다. 난 병맥히 친근감의 표시를 했을 뿐이다. 상대가 모멸감을 느꼈다면 그건 그 사람이 그러기로 선택했을 뿐이지 내 책임은 아니다. 이렇게 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못 됐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된다는 말인가?

 

물론 오해하기 좋아하고 유난히 성격 나쁜 사람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덮어 씌우려는 음모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과연 그럴 목적이라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는 것 아닌가. 나의 옳음을 증명하고 상대의 입을 닫게 만드려는 음모를 획책하기 위해 하는 공부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DNA부터가 못 먹고 못 배운 것을 한으로 여기는 구조로 되어있다.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런 건 이해할 수 있다. 워낙에 못 먹고 못 살았으니까. 그러나 이제 겨우 잘 살기 시작한 우리 대는 좀 배우는 의미가 남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너와 나의 더 넓고 깊은 소통을 위해, 공동체를 위하고 대변하기 위해 우리의 지식을 쓰여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그 친구는 소위 말하는 우리나라 최고 학부를 나왔다. 나는 그 친구에 비하면 나이만 많다는 것뿐이지 하나 잘난 것이 없다. 그런 나를 상대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했다는 게 영 석연치가 않다. 차라리 그때 내 앞에서 최대한 말을 아꼈다면 오히려 내가 잘못했나 반성했을지도 모른다. 말하기는 더디하고 듣기는 속히 하라고 했는데 나도 그 친구에게 그러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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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6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26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26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2-27 13:41   좋아요 0 | URL
넵.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