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만들었다고 했을 때 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원래 크리스찬이었나? 아니면 최근 무슨 심경에 변화가 있었나? 난 후자에 좀 더 심중을 두고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작품을 나오는 것마다 챙겨봤던 건 아니지만 그의 작품을 보면 이 사람이 별로 신앙과 관련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인 작품을 만들었다면 필시 뭔가의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건 아닐까.
속단할 수는 없고, 난 그가 아직도 변함없이 넌크리스찬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이 더 설득력 있어질테니까. 나중에라도 그가 크리스찬이라는 게 밝혀진다면 그때가서 사과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난 오히려 넌크리스찬 감독으로서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는 게 더 믿음이 갔던 것도 사실이다. 나도 크리스찬이긴 하지만 만일 크리스찬 감독이 만들었다면 그의 신앙적 올바름 때문에 조금이라도 신앙적인 관점을 견지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또한 넌크리스찬이 이런 작품을 만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더 객관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가 종교를 모독하거나 비아냥 거릴 목적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 작품은 <침묵>이란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의 일련의 작품들은 그렇게 성스럽거나 거룩하지 않다. 인간의 속되고 비열한 면을 까발기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소설의 어떤 점에 꽂혀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모르긴 해도 감독은 늘 인간을 견지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다. 즉 인간의 속 되고 비열한 면을 비신앙이 아닌 신앙에서 찾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보는 사람의 차이겠지만 한간에 떠도는 말에 의하면, 이 작품은 굉장히 종교적일 것 같지만 실상은 신앙인으로 하여금 믿음을 흐리게 만들고, 나아가 배교를 유도하는 적그리스도적 작품이라고 몰아가기도 했다는데 그건 좀 오버하는 것 같고, 그보단 신앙, 비신앙을 떠나 배교와 순교를 앞에 놓고 고뇌하는 인간을 성실하게 그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감독은 신학자나 목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을 대변하기 보단 인간을 대변하는 것이 더 맞는 자세인 것 같다. 더구나 그는 문제제기만 할뿐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식의 답을 달든 그건 관객의 몫일 것이다. 그러므로 감독을 두고 신앙인의 믿음을 교란시키고 배교를 유도한다고 하는 건 확실히 넌센스다. 그런 점에서 감독은 처음부터 순교에 성공한(?)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배교는 순교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즉 죽음이 두려워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 영화의 전제는 그렇다.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순교할 믿음이 없어서라고만 볼 수 없다) 그는 영화속 등장인물 키치지로처럼 배교 즉 순교에도 성공하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무리에서도 배제된 사람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듯 하다. 즉 감독은 순교를 거부하면 배교자가 되는 것이고, 신앙에 실패한 사람이 되는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난 이 영화를 보면서 김훈의 <흑산>이 생각이 났다. 이 작품 역시 배교자에 관한 이야기다. 언제나 그렇듯 문학은 인간의 성공엔 관심이 없다. 늘 실패와 상처, 인간의 어두운 이면에 관심이 많고 이를 정당화 하는데 관심이 많다. 그런 점에서 배교는 신앙의 관점에서는 실패일지는 모르지만, 신 앞에서 실존을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인간 본위의 승리인지도 모르겠다. 또 그런 점에서 훨씬 설득력이 있고.
구주를 영접했다고 해서 모든 신앙인이 순교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신앙인이지만 누군가가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려 한다면 나는 과연 순교를 할 수 있을까? 난 이 말에 자신있게 답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신을 배반한 것이 될까? 그렇게 흑백논리 보단 신 앞에 죽음으로 나의 믿음을 증명하지 못한 것을 평생 자책하며 고뇌하는 실존주의자로 살아가게 될 것 같다.
또 그런 게 있을 수 있다. 나는 죽어도 좋지만 나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면 과연 그런 사람을 두고 순교할 수 있을까? 뒤집어서 나 하나가 배교하면 많은 사람을 살릴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유혹은 잔인하게도 영화속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향해 있다.

영화 <사일런스>나 김훈의 <흑산>의 대척점에 있는 작품이라면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나 전기 소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책들은 확실히 또 다른 관점에서 훌륭한 책이다. 또 다른 관점이란 당연 순교적 관점에서다. 알다시피, 손양원 목사는 신앙으로 민족 자존을 높인 분이기도 하고, 자신의 두 아들뿐만 아니라 자신도 순교한 위대한 신앙인이다. 그뿐인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자를 양자로 들여 돌봐주기도 했다. 아무리 기독교가 사랑과 용서의 종교라고는 하나 쉽지 않은 일이고 그래서 그를 존경을 넘어 영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솔직히 이제사 고백하는 거지만 난 수년 전, 손양원 목사의 전기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그것을 대본으로 써서 공연한 적이 있다. 물론 나로선 큰 기쁨이었고, 영광이었지만 마음 한켠에 부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이렇게 순전한 믿음이 있을 수 있을까? 나라면 순교할 수 있을까? 감히 할 수도 없으면서 이런 걸 대본으로 써서 공연하는 건 온당한 것일까? 혹시라도 이 공연을 본 사람이 감명을 받고 신앙의 불모지에 가서 순교한다고 그러면 어쩌나 벼라별 생각을 다 했었다. (물론 내가 이것을 공연할 생각을 했던 건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 분의 생애가 생각 보다 안 알려진 것 같아 널리 알려보자는 생각에서 였다.)
그런데 이야기가 너무 드라이 한 것도 사실이다. 어찌보면 손양원 목사는 너무 옳기만 해서 인간적인 느낌이 덜 느껴지기도 한다. 도무지 고민이나 고통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아니, 없다기 보단 다른 여타의 사안에 가려 상대적으로 덜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린 이 옳기만한 분을 어떻게하면 이해해 볼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유교에 영향 받음이 크다. 실제로 손양원 목사는 기독교를 믿기 전 유교 가정에서 나고 자랐다. 그런 가풍에서 그의 믿음은 유교에서 기독교로 옮겨졌을 것이다. 유교 중에서도 대덕목이라 할 수 있는 충효 사상.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긴다. 그런 의미에서 손양원 목사는 장자의 믿음을 가졌던 것 같다. 장자는 부모를 섬기고 돌봐야 하는 의무를 가졌다. 그런 것처럼 무엇이 아버지 하나님을 잘 섬기고 받드는 것이 될까 골똘하지 않았을까? 순교는 어느 날 갑자기 하게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당시는 인간의 감성 보다는 이념과 이성이 중시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일제 강점기 말이었고 그것이 끝나자 공산주의가 널리 퍼지기도 했다. 그에 따라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첨예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손양원 목사의 사모 정양순은 여자임에도 불고하고, 일본 순사에 의해 끌려가는 남편에게 하나님을 배반하면 내 남편이 아니며 구원을 받지 못할 거라고 했다. 아무리 부창부수라지만 그만큼 배포와 강단이 손양원 목사 못지 않다. 올망졸망 자라고 있는 자녀들이나 교회 교인을 생각하면 쉽게 외칠 수 있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 그런 것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백마디 말 보다 행함으로 보여주는 것을 더 중시했던 깨어있는 양반의 의식이었다면 오히려 손 목사 부부가 보여주는 결의에 찬 믿음의 행위가 교인들에게 믿음의 본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고 외치던 사람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누가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당시의 기독교가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인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손양원 목사를 지지하고 돕기 보단 오히려 경멸하고 싫어했다. 아마도 손양원 목사는 그에 대한 반발과 책임의식이 상당했을 것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양원 목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전혀 눈물도 흘릴 줄 몰랐느냐면 그렇지 않다. 그도 아플 줄 알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인간이다. 그는 실재로 두 아들을 잃고 아비로서 눈물을 흘렸고, 그 아픈 마음을 추스르느라 잠시 사람을 피해있기도 했다. 그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고 외쳤던 건 순교하겠다는 강한 믿음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고, 필요하면 교인들도 그렇게 하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아들이 실천하게 될 거라고 그는 상상했을까? 그는 어쩌면 그 때문에 교인들 앞에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믿음이나 사랑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불어 순교 역시 그렇다. 기독교는 순교는 신비한 것이라고 했다. 교회는 이 순교의 피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도 했다. 한마디로 인간 이해의 영역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손양원 목사의 전기 보단 영화 <사일런스>가 훨씬 인간적이고 이해하기가 쉬워 보인다.
손양원 목사의 전기가 순교하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면, 영화 <사일런스>는 배교하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영화를 보면서 생각한 것인데 애초 원작자의 사고나 서술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손양원 목사의 전기를 쓴 사람은 그의 따님인 손동희 권사다. 그분은 작가가 아니다. 그분 역시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은 사람으로서 신앙적 올바름을 위해 전기를 쓴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고 해서 인간적 고뇌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순교에 성공(순교에 실패한 사람들이 보기에)했다고 해서 그들을 무조건 영웅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순교자는 순교자 나름으로 고통과 고뇌가 있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는 그것을 너무 드러내지 않는 것이고, 대신 그의 딸 손동희의 증언에서 드러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비해 <사일런스>의 원작자인 엔도 슈사쿠는 작가다. 그는 그 작품을 통해 박해 받는 17세기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을 완벽히 구현해 내기를 바랐을 것이다. 거기엔 당연 신앙의 정절, 신앙적 올바름 보단 고통 당하는 인간에 초점을 맞춤은 당연하다. 요는 순교나 배교나 인간에겐 둘 다 쉬운 것이 아니며, 따라서 어떤 것이 어떤 것 보다 나쁘고 좋고를 따지는 건 의미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 속 로드리게스 신부와 키치지로는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치지로는 늘 로드리게스의 발목을 붙잡았으니까. 로드리게스는 순교하기를 바랐지만 기치지로 때문에 할 수 없었고, 마치 신앙인들속의 첩자인 양 그가 있는 곳을 일본 관원들에게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순교하려 했던 로드리게스가 더 우위를 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가 전반엔 로드리게스 신부의 고뇌와 갈등을 그렸다면 후반은 키치지로에 좀 더 치중해 보인다. 말했던대로 배교자는 실패자 또는 정말 배신자일까? 그것은 키치지로가 영화에서 쓰여지는 방식이다.

순교자가 주가 되는 이야기엔 배교자는 나오지 않는다. 나오더라도 거의 존재감이 없거나 순교자를 돋보이게 만드는데 사용되어질 뿐이다. 또한 그 순교자를 통해 신이 찬양되어지거나 신앙적 올바름에 치중되어 있다. (난 이를 비판할 생각은 전혀 없다. 순교자는 지어낸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 실재로 있었던 인물이니까. 그러니 내가 무슨 수로 그것을 비판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 영화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순교자가 신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배교자는 인간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 로드리게스는 일본 관원의 끈질긴 회유와 협박 끝에 결국 배교를 하고만다. 그것은 특별히 자신의 스승 페라이라 신부(리암 니슨 분)가 배교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일본에 귀화하여 반그리스도교적 사상을 전파한다. 하지만 그건 결코 그가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 그건 굴욕이고 신앙의 정절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패배를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로드리게스나 페라이라 신부가 일본으로부터 회유와 협박을 받았다면 왜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배교 후에 일본으로 귀화하였느냐는 것이다. 배교란 포로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나라만 해도 대원군의 가톨릭 박해 사건인 병인박해 때만 하더라도 외국인 선교사들을 본국으로 철수시켰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순교하거나.
아무튼 그랬을 때 기치지로가 로드리게스를 또 한번 자극한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영화의 흐름상) 지금까지는 로드리게스의 진상 역할을 했다면 이번엔 그의 정체성을 일깨운다. 당신은 그렇게 배교자로 있지만 당신 마음 속엔 한번도 그리스도를 배교한 적이 없다는 걸 안다며 그러니 나의 죄를 고백할 테니 사해달라고. 물론 처음엔 그도 그럴 권한이 이제 자신에게 없다고 강하게 반대하지만 기치지로에 의해 그의 정체가 자극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우린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다고 배교했던 것이 다시 바뀌지 않는다고 냉소할 것인가? 아니면 안과 밖이 같아야지 그런 식이라면 가톨릭을 농락하는 것 아니냐며 비판할 것인가?
세월이 흘러 로드리게스가 죽었을 때 그는 여전히 배교자로 일본식 염을 했다. 그때 그는 조그만 십자가를 손에 품는다(물론 그건 기치지로에 의해 비밀리에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 장면은 또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워낙에 온전한 아니 평온한 신앙을 갖기가 어려운 시대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실과 진실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정말 로드리게스는 겉으로 보기엔 일본에 귀화한 외국인으로 죽지만 그는 동시에 평생 그리스도를 차마 마음속에서 버리지 못한 비운의 신앙인으로 죽었다.
여기서, 어찌보면 일본은 배교를 다소 쉽게 보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들은 당시의 신도들이 어떤 신앙을 가졌는가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저 가톨릭 신앙을 상징하는 동판을 밟고 지나갈 것인가 아닌가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것은 또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 동방요배를 강요했을 때의 양상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의 유무와 상관없이 일본이 있는 동쪽을 향해 목례만 하라고 강요했다.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선 얼마나 뿌리치지 못할 유혹인가? 그리고 훗날 그것이 신앙의 정체성에 얼마나 많은 혼란을 가져왔던가. 또 동시에 그 정도 가지고는 일본은 신앙의 씨를 말려버리지 못했다. 교회는 순교의 피 위에 세워졌다. 그건 확실히 신앙의 승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의 반대쪽 지점의 배교란 신앙의 실패를 의미하는가?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잠시 심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