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전에 본 어릿광대는 무엇일까
정진영 옮김/황금가지/전3권/각권 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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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작가들이 꿈꾸는 전미 도서관상을 지난해 받은 뒤 수상 연설을 하고 있는 스티븐 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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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공포를 낳고 이야기를 창조한다. 인간의 무의식과 상상력은 어둠 앞에서 캄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둠을 백지로 삼아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어둠의 깊은 곳에서 희생자를 노려보는 누군가의 눈빛을 상상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전율에 떤다.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공포 소설가 스티븐 킹의 책을 펼치는 행위는 마치 그 무시무시한 어둠의 세계에 발을 푹 내디디는 것과 같다. 어둠 속에 웅크린 채 먹이를 기다리는 ‘그것’을 찾아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어보라고, 킹의 장편 소설 ‘그것(It)’이 속삭인다.
1957년, 미국의 도시 데리에 폭우가 쏟아지던 날, 여섯살 짜리 사내 아이가 처참하게 살해됐다. 아이는 도로 위로 넘쳐난 물길에 띄운 종이배를 따라가다가 배수구 앞에서 왼쪽 팔이 잘린 채 쓰러졌다. 배수구 속으로 사라진 종이배처럼 그 가여운 아이의 미소도 사라졌다. 아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묘하게도 풍선을 든 서커스단의 어릿광대였다.
1984년, 같은 도시에서 한 동성애자가 다리 밑에서 살해됐다. 용의자로 붙잡힌 한 저능아는 결백하다고 외치면서, 어릿광대를 봤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그의 진술을 무시했다.
1985년, 한 사내가 집에서 샤워를 하다가 욕조에서 면도날로 팔목을 그은 채 발견됐다. 그런데 그는 마치 유언처럼 피로 두 글자를 벽에 썼다. ‘It(그것)’. 도대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도시 전체가 어떤 악령이나 괴물의 손아귀에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상상력에 바탕을 둔 소설 ‘그것’은 바로 그것을 찾아가는 다양한 인간들의 내면 상태를 파고드는 심리 스릴러다. 배수구에 괴물이 숨어 있다는 황당무계한 설정에 기초한 이 소설을 본격 문학의 잣대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이 소설의 주인공 중의 한 명인 소설가 빌은 작가 스티븐 킹의 대변자처럼 이렇게 말한다. “소설에 사회성 같은 의식이 왜 필요한 거죠?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면 그만이지 정치, 문화, 역사 이런 것들이 소설의 필수 조건이 돼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나요? 제 말은…소설을 소설 자체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그냥 재미있는 허구로서의 대중 소설로만 폄하하기는 어렵다. 우선 1800여쪽에 이르는 전 3권의 방대한 분량(원서는 1039쪽)이 웬만한 대하소설 못지않다. 공포 소설이라면 대부분 단순한 구성에 간소한 등장 인물의 배치를 선호하지만, 이 소설에는 복잡할 정도로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등장한다. 각 인물들의 개인사에 얽힌 무의식에 대한 탐사로 인해 자칫 지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세 권으로 구성된 소설은 첫 권을 넘겨야 겨우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작가는 소설에 사회성이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했지만, 이 소설에는 미국 중산층의 안온한 일상에 스며있는 권태와 절망이 드러나 있고, 그 근저에 숨어있는 상상의 폭력이 살인마라는 은유의 장치를 통해 묘사된다.
이 소설이 던지는 공포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내면에 숨은 채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심리적 장애물에 가깝다. 작가의 분신은 지하실에 숨은 괴물을 퇴치하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공포 소설을 쓰면서 종교적 희열에 빠진다고 고백한다. 공포 소설은 인간이 존재와 우주의 근원을 찾아가는 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이 소설 속의 살인마를 단지 ‘그것’이라고 부르는 단순 호칭은 너무나 복합적이기 때문에 적절한 대응어를 찾지 못하는 무의식의 괴물을 부르기 위해 역설적으로 선택한 단순 기호인 셈이다.
공포 소설의 전형적 수법답게 이 소설에서 두려움은 점증법을 통해 발현된다. 하나 둘씩 희생자가 늘어나는 가운데, 소설 속의 도시에 얽힌 비밀스런 역사가 서술된다. 도서관의 한 사서를 통해 한 도시에 얽힌 허구의 역사가 진행된다. 1741년 340명의 마을 사람들이 통째로 실종됐고, 1930년 170명, 1958년 127명의 어린아이가 사라졌다는 것. 그러면서 개수대의 배수관으로 물이 빠지는 소리가 종종 심상치 않게 들린다. 이쯤되면 독자들이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질 만하다.
이 소설에서 ‘그것’은 당연히 맨 마지막에 정체를 드러낸다. ‘그것’은 현실 속의 인간과는 다른 종의 생물체와 같기도 하고,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상상 동물 같기도 하다. 한마디로 모호한 괴물이다. 인간들이 상상하는 난폭한 야행성 동물일 수도 있고, 살아움직이는 수렁이기도 하다. 또한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것은 늘 아이들을 배불리 먹었다. 어른들 중 상당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것의 하수인 역할을 해 왔으며, 그것은 그들 중 일부를 몇 년을 두고 먹어 치우기도 했다. 어른들도 나름대로의 공포가 있고, 그들의 분비선을 톡톡 두들겨 열어 놓으면, 공포를 담당하는 화학 분비물이 전신에 퍼져 저절로 간이 맞았다.
그러나 어른들의 공포는 대개 지나치게 복잡했다. 그에 비해 아이들의 공포는 훨씬 단순하고 강했다. 아이들의 공포는 대개 하나의 가면으로 능히 끌어낼 수 있었다… 미끼가 필요한 경우에도 광대의 얼굴 하나면 충분히 먹혀들었다. 이 세상에 어릿광대를 싫어하는 아이가 있을까?”
이런 유의 공포 소설을 혐오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소설에 난무하는 성행위와 살인, 식인 장면에 진저리를 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의 한 인물은 공포 소설을 가리켜 ‘쓰레기 같은 포르노’라고 비난한다. 그 인물은 책의 초반부를 읽자마자 책장을 덮어버린다. 작가는 이 소설을 펴든 독자들 중에서 일부는 그럴 것이라고 예상한 듯이 그런 장면을 집어넣는다. 아무튼 이 소설은 너무나 두껍기 때문에 스티븐 킹의 열렬한 애독자에게만 읽힐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 킹의 애독자는 1만명 수준으로 집계된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 소설은 1986년 출간 되자마자 베스트셀러 선두에 올랐고, 1990년 TV 미니 시리즈로도 방영됐다고 한다. 킹은 1974년 소설 ‘캐리’를 발표한 뒤 현재까지 500여편의 장·단편 소설을 발표했고, 전 세계 33개국에서 모두 1억권 이상의 판매 기록을 수립했다. 킹은 이름대로 공포소설의 왕이다. 그러나 그는 문학성 높은 단편에 주는 오 헨리 문학상을 받았고, 지난해에는 그 동안의 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전미도서관상까지 거머쥐었다. 엄청난 돈까지 벌어들인 작가가 권위있는 문학상까지 차지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학적 공포다.
(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