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틈새로 따뜻한 기억들이…
"다툼·과장 넘치는 세상 자기 먼저 되돌아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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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일남씨는“단조로운 역사의 틈을 파헤쳐 사람들이 사는 뒷골목이나 그늘을 줄창 더듬었다”고 말했다. 한영희기자 yhhan@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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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툼의 언어와 과장된 말들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자신을 먼저 천천히 되돌아보는 마음이 아쉽습니다.”
최일남씨가 창작집 ‘석류’(현대문학)를 냈다. 소설집 ‘아주 느린 시간’(2000년) 이후 4년 만에 나온 이번 창작집은 8편의 단편을 담고 있다. 53년 ‘쑥 이야기’로 출발했으니 반세기하고도 한 해를 더했지만, 거두절미 핵심으로 들어가다가도 눙치고 어르는 우리 입말은 여전하다. 작가의 분당 집에서 “지금은 사라져버린 풍경을 복원하는 작품이 젊은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겠는가”라고 물었다.
“번갯불처럼 빨리 돌아가는 세상, 느릿느릿 시큰둥하게 한마디 던지는 늙은 작가도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라고 답했다. 이번 창작집은 주로 50~60년대를 배경으로 ‘속도’가 버리고 간 텁텁하고 맛깔진 우리 풍속과 정서를 자분자분 거두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냥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 오늘과 연계되어 있어요. 오히려 지금의 현실을 잘 알아야 지나간 이야기도 제대로 할 수 있죠. 빠른 가운데 천천히 가는 것도 있어야죠. 현실 부정이 아니라 느림이나 게으름의 미덕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작가는 그의 시대 중 무엇을 되살리고 있나?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해설에서 그를 일러 “해방공간에서 철들고, 6·25 적에 대학생활을 한 전중(戰中)세대”라며, 최일남 문학을 ‘전중세대가 살아낸 역사’라고 규정했다.
“거시적 담론보다는 소소한 일상에 집착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크고 중요한 줄거리보다는 자잘하거나 하찮은 것들이 더 기억에 남아요. 몸의 기억력이 마음의 기억력보다 따뜻하고 오래가는 법이지요.”
창작집 중 ‘버선’은 무명옷에서 나일론 일색의 옷문화까지에 대한 감칠맛 나는 고찰이며, ‘소주의 슬픔’은 술문화의 변천을 풀어놓는다. ‘아침에 웃다’는 콩나물 해장국집을 무대로 펼쳐지는 욕쟁이 주인할머니의 원시적인 욕잔치다.
“한 시대의 삶을 거시적으로 짚어내기 위해서는 술집 구석에서 과년한 딸의 혼사를 걱정하는 지아비의 모습까지 그릴 수 있어야 한댔어”(‘멀리 가버렸네’)라는 등장인물의 말에 작가의 생각이 잘 드러나있다.
이러한 미시적 접근법은 작가의 ‘글쓰기’ 의미도 드러낸다. “작은 틈새로 바라본 세계가 때로는 큰 테두리를 그리는 단서 구실을 한다”(‘명필 한덕봉’)는 것.
평균치 소시민의 일상에 눈길을 둔 최일남 소설의 절반은 감칠맛 나는 글에 있다. 예를 들어 “벽에 걸린 시래기 소쿠리를 눈으로 쓰다듬으며 솥뚜껑 여닫는 소리를 좇아 슬금슬금 들어선 부엌, 아니 정지는 온갖 평화의 냄새와 소리로 그득”(132쪽·‘석류’) 등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김화영 고려대교수는 “너무 크지 않은 사이즈의 국어사전을 꺼내어 그 갈피갈피에 손가락을 넣고 애완견의 털을 애무하듯 페이지를 뒤적이고 쓰다듬으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소설의 어휘와 어조와 가락을 느릿느릿 음미”하는 것이 그의 소설 읽는 재미라고 했다.
짐짓 옛날에 눈길을 둔 것 같지만, 작가는 정도에서 비껴난 것을 용납하지 않는 감각을 잃지 않는다. 가령 광복 직후 2대에 걸친 대서사(代書士) 집안 이야기를 그린 ‘명필 한덕봉’에서, “좌익은 말이 많은 만큼 선전문이 길고, 우익은 말이 뜬 만큼 선전문이 짧다” “ ‘민족’ 두 글자가 덕분에 제일 많이 곤욕을 치렀다”같이, 과거는 현실을 더 잘보기 위한 통로 역할을 한다.
“현실에 대해 직설적으로 발언하는 대신 작품 중간에 숨기려던 전략이 들켜버렸네요. 요즘은 개혁이니 보수니 하면서 서로 싸우는데, 양쪽 모두 과장된 말들로 갈등을 부추기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토론이나 타협으로 이끌어가는 것이죠. 10가지를 모두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 안 되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그 주장이나 갈등을) 자기 안에서 소화하는 일종의 체념이 필요한 때입니다.”
(최홍렬기자 hrchoi@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