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고귀한 가치로 정치적 폭력에 맞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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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야코프 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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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반트 세대. 1990년대 이후 독일 문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소위 신세대를 이르는 말이다. 구동독 자동차 트라반트에서 따왔다는 이 언명은 그러니까 말 그대로 역사적인 상징인 것이다. 야나 헨젤, 요헨 슈미트, 율리아 쇼흐, 그리고 어떤 작가보다 독보적인 위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작가, 야코프 하인<사진>. 이들은 거의가 1960년대 후반이나 1970년대 초반 생들이다(흥미롭게도 1990년대 이후 한국 문단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신세대 작가들의 출생시기도 이들과 비슷하다).
독일 신세대 작가 가운데서도 야코프 하인이 유독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가 유명한 독일 작가 크리스토프 하인의 아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동시대 어느 작가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감수성과 냉소적이고 유머러스한 문체를 통해 과장된 공포와 포장된 비애감을 완전히 거세시키고 있다. 건조한 문체는 감각적인 수사를 극도로 배제하면서 포악스럽게 ‘보이는’ 현실의 이면들을 핥아간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동독 출신 야코프 하인의 ‘나의 첫 번째 티셔츠’는 일종의 성장 회고록이다. 그런데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야코프 하인의 시선은 지난 날 겪었던 억압적인 현실과 피폐한 삶의 기록에 닿아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시간들은 도저히 하나의 흐름 속에서 재구될 수 없는 다층들로 벌어져 있으며 뒤틀려 있고 쪼개져 있다.
이 조각들은 ‘장벽 이전’을 모르는 세대들과 이를 마지막으로 경험한 세대의 경험적 차이에서 오는 낯설음과 ‘장벽 이후’ ‘통일’의 이름 앞에 어떻게도 완벽하게 동화될 수 없었던 이질감 속에서 독특한 빛을 발하고 있다. 감옥보다 더 심한 공포에 시달리게 만든 ‘협박’과 ‘감시’, 그리고 이를 직감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던 저주받은 육신의 소유자, 야코프 하인.
‘나의 첫 번째 티셔츠’는 티셔츠를 ‘니키’(동독)라고 부르던 시간과 ‘티셔츠’(서독)라고 부르게 된 시간의 ‘사이’에 대한 전무후무한 자기 고백을 담고 있다. 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만들어진’ 것들, 역사적 실체를 강요하는 담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허상, 끊임없이 영웅이 되기를 강요했던 교육, 매체가 흘렸던 수많은 거짓말들을 너무도 ‘투명하게’ 내뱉어 놓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가 민방위교육을 받으면서 느꼈던 치욕은 어린 시절 반공교육이랍시고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거나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운동장으로 뛰어가던 기억이 있는 우리에게는 너무도 친숙한 것이다(고백하건대 난 항상 구석에 숨어서 친구와 공기놀이를 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도 하기 전에 알아야 했던, 아니 알기를 강요당했던 ‘국가’에 대한 것들이 결국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나를 간단한 몇 가지 에피소드로 예리하게 드러낸다.
막혀 있고 차단된 현실 속에서 그에게 펑크, 록, 언더그라운드 음악은 정체된 이데올로기들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며 ‘다시’ 자유란 무엇인가. 인간이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하는, 아니 놓칠 수 없는 ‘마지막의 것’이란 무엇인가를 알게 해준 광기의 언어였다. 어쩌면 그것은 독일의 89세대뿐만 아니라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공통적인 문화적 감수성일 것이다. 붉은 기를 달지 않았다고 초인종을 눌러 대는 감시자(국가) 아래서 살았던 야코프 하인의 성장기와 엄청난 정치적 폭력과 닫힌 문화구조 속에서 간신히 숨을 헐떡이며 살아야 했던 한국의 신세대의 그것이 결코 다르지만은 않을 것이다.
웃음이 부족한 사회에서 자라나 희극배우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야코프 하인과 가식적인 가면을 쓴 폭력과 언어에 조용히 맞서는 소설가로 남고 싶다는 배수아(이 책의 번역자)의 투명한 영혼이 너무도 행복하게 조우하고 있어 손에서 책을 쉽게 놓을 수가 없다. 이 떨림을 조금 더 지속하고 싶다면 다음 문구를 적어도 세 번 이상 되뇌면서 야코프 하인(트라반트 세대)의 독살스러움을 즐기시라. 절대로 심각한 표정을 짓지 마시길….
“만일 내가 이미 실수를 했다면, 나는 그 실수를 그대로 수단으로 삼겠다. 전략으로서의 실수란 무능함의 표시가 아니라 진지한 삶을 향한 아주 능숙한 테크닉이 될 것이다.”
(최성실·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