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랑을 배운다 ㅣ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6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추리의 여왕이란 수식어가 그냥 붙은 말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물론 이 소설은 추리로만 자신의 소설을 다 표현할 수 없어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본격소설을 쓴 것 중 하나다. 하지만 역시 약간의 추리 기법이 여기서도 언뜻 보여진다.
무엇보다 애거사 크리스트는 인간의 심리를 예리하게 묘파하는 재주를 지닌 것 같다. 죽은 오빠대신 태어난 셜리. 동생이라 사랑하고 예뻐할 것 같지만 주인공 로라는 동생이 없어지길 바란다. 그래야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몇번이나 지신이 동생을 놓쳐 바닥에 떨어트리는 상황을 상상한다. 이는 어쩌면 가인과 아벨 콤플렉스의 또 다른 변형처럼도 보인다.
이 부분을 읽는데 솔직히 나 역시 약간의 마음의 찔림을 받았다. 솔직히 로라처럼 아기를 안다가 실수로 땅바닥에 떨어트리지는 않더라도 나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형제 또는 자매를 언덕 비탈에서 밀어 굴려버리던가, 방문 모서리 틈에 일부러 손가락을 끼게 만들어 다치게 만드는 일을 상상하거나 슬쩍 해 버리는 실수(?)를 누구든 하지 않나?
그러고 보면 아이들은 천사니 동심은 맑다는 둥 하는 말은 그렇게 되길 바라는 어른의 바람을 투사시킨 말은 아닐까 싶다. 아이들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는 그 아이를 키운 부모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보면서 자신들도 어렸을 때 이런 마음을 가졌던 적이 있음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한다.
사실 아기가 자라는 동안 부모는 가장 예민해져서 주의력이 최고조에 이를 것 같지만 의외로 그런 것에 취약하다. 비록 악의는 없다고 해도 은연 중 아이들에 대한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그것이다. 누가 듣거나 말거나 간에. 그럼 그것이 아이들에겐 비수가 되는 것이다. 어린 로라를 두고 그녀의 부모가 뭐라고 말하는지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라. 아무리 소설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부모들은 언뜻언뜻 비교하는 말을 서슴없이 잘 한다. 무의식스럽게.
그러다 어떤 계기에 이런 아이들의 형제에 대한 적의에 가까운 질투가 사랑으로 바뀌는 일이 있다. 로라는 그 계기가 바로 화재였다. 화마 가운데에서 건져낸 내 동생! 위험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건져냈기에 내 동생은 미워할 존재가 아니라 사랑해 줘야할 존재임을 깨닫는다. 거기엔 어떤 심리적 기저가 있는 것일까? 불에 데인 듯, 자신이 어떻게 이런 사랑스러운 동생을 두고 그런 못된 마음을 품을 수 있었을까? 자신을 자책하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그러니까 타인이 없어져 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은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의 양심이 불가항력적으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또 트라우마처럼 아니 어쩌면 원죄처럼 남아서 사랑인지 집착인지도 모를 사랑을 로라는 평생토록 동생에게 쏟아 붓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 소설에선 그다지 비정상적이지는 않다. 충분히 인지 가능한 거고 로라도 이것을 경계해서 마음엔 들지 않지만 동생이 선택한 남자와 결혼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하지만 그리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하는 동생을 보며 셜리는 동생을 위해 모종의 결단을 내린다. 물론 결정적일 때. 그리고 그것은 그래야만 동생이 행복할 수 있다고 정당성을 부여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 이야기는 성경에 입각한 인간의 원죄 의식과 정죄 의식을 애거서 크리스티 특유의 방법으로 풀어낸 이야기 같다. 또한 그것은 지나치게 의도적이거나 작위적이지도 않으며 특유의 통찰과 사유와 은유로 풀어간 가히 명작이다 싶다. 어찌보면 로라를 사랑하는 루엘린은 성경에 다윗의 죄악을 깨닫게 했던 나단 선지자는 아니었을까?
인간은 어느 때 가장 교만해지는가? 우린 흔히 뭔가를 할 줄 알고, 인정 받을 때 교만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 교만의 최고 절정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다. 원래 교만은 인간이 신과 같아 질려고 하는 마음을 일컬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해 주는 것이 뭐 그리 잘못된 것인가? 그게 아니라 그렇게 해 주는 순간 그 마음이 이미 신의 마음과 같아져서 바로 그것이 교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 소설에서 한 마디로 잘 표현되어 있다. "왜 우리는 자기가 남들에게 최선이 뭔지 안다고 생각할까요?"(306p)라고. 그러고 보면 애거사의 사유의 깊이는 가히 참 놀랍다 싶다. 어떻게 그것을 이렇게도 명징하게 서술할 수 있을까?
나는 앞의 2부까지는 로라와 셜리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펼쳐지다 왜 갑자기 3부에서 루엘린이 갑자기 나오는 것인지 다소 뜬금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끝까지 읽어봐야 그 내용을 다 알 수 있는 그녀의 영리한 서술 방식에 새삼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사랑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어디든 누구든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이 사랑이 참 쉽지가 않다. 사랑은 받을 때 보다 줄 때가 더 좋은 거라고 말하지만 주는 사랑에도 함정은 있다.

원래 이 책의 원제는 '짐 The Bunden'이라고 한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우리의 반감이라는 짐, 미움이라는 짐, 그리고 사랑이라는 짐 "을 신이 짊어진다고 말한다. 또 짧은 오솔길이라 생각하고 들어선 숲이 어디까지 계속될지 모르며 밖으로 나가는 지점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발길을 돌릴지 계속 나아갈지를 결정하는 일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과연 의미있는 말이다.
인간이 다루는 모든 이야기는 반면교사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랑 결핍이거나 사랑 과잉이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세상에서 이 작품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배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