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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심청 - 사랑으로 죽다
방민호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새삼 다시 읽을 필요가 없을 것 같은 이 이야기를 나는 어른이 되어 다시
읽었다.
저자는
왜 우리가 잘 아는 심청전을 ‘연인
심청’이란
새 옷을 입혀 독자들 앞에 내놓은 것일까?
무엇보다
저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설화 그대로를 복원해내고 있다.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원작에 없는 윤상이란 캐릭터를 첨가 시켰다는 정도다.
그렇게
하므로 심청이 얼마나 희생적이고 이타적 인물인가를 더 강하게 어필한 것으로 보여 진다.
보통
설화는‘전래
동화’란
이름으로 주로 어렸을 때 많이 읽고 성인이 되어서는 여간해서는 접하질 않게 된다.
왜
그럴까?
어렸을
때 이미 전래 동화로 접해 온 터라 굳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다시 알아야할 필요성 못 느껴서일까?
물론
그것도 이유는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심청전만
해도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효를 강요받는다는 것이 부담스럽지는 않는가?
부모님
살아실제 섬기기를 다하라고 하지만 이 말을 실제로 지키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심청전을 읽으면 왠지 마음이 편치가 않다.
누구든
심청이 되기를 원하지만 누구도 그 인물에 도달할 수 없음을 통감하니까.
그래서
우린 심청전을 박재된 이야기로만 취급할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새삼 심청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효도하는
심청’이
아니라 ‘사랑하는
심청’으로
재해석된다.
하지만
난 현대의 페미니즘 영향 때문일까?
그
보다는 왠지 억압 받는 여성으로써의 심청이 더 많이 느껴져 읽으면서도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그것은
심청의 아버지 심학규의 캐릭터 때문이었던 같은데,
이
작품에서의 심학규는 원작 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자신의 욕망이 충실하면서 한편으로는 한 없이 나약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두
눈이 멀쩡한 아비여도 매번 동냥젖을 물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렵게 동냥젖을 먹여 키웠다는 그 사실로 심청은 아비에게 효도할 것을 강요받는
인물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것엔
어떤 심리적 기저가 숨어 있는 것일까?
태어날
때부터 어미를 잡아먹은 운명과 아비가 자신을 동냥젖으로 어렵게 키웠다는 이 원죄 의식이 심청을 옥죄진 않았을까?
그렇다고
해서 그 운명을 거스르기 보단 아비를 위해 죽는 것이 당연하듯 인당수에 자신을 수장시키는 숙명을 택하기까지 한다.
바로
이러한 설정이 편치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자식을 그만큼 키운다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키웠으니 그만큼의 봉양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한 세상을 편히 살려고만 하는 심학규가 왠지 정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자식으로부터 일정 정도의 봉양은 가능하겠지만 인당수의 수장은 아무리 설화라고는 하지만 과분하고 동시에 과장 돼 보인다.
거기엔
또한 남존여비의 사상이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춘향전만
해도 그렇다.
여자에게만
정조를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모진 시련과 고난을 견디다 보면 사랑도 이루고 축복 받고 잘 산다는 인과응보,
사필귀정의
논리가 숨어있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여자의 희생을 무조건 당연하게 그리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심청의
어미는 심청을 낳다 죽었고,
심청은
아비에게 희생을 하며 동시에 그 아비 때문에 사랑도 이루지 못한다.
또한
귀덕 어멈은 자신의 젖을 희생해 청이를 키워야 했고,
그
반대 선상에 있는 뺑덕 어미는 몸을 함부로 굴린 덕에 성병 보균자인 동시에 피해자며,
한평생
창녀와 도둑의 굴레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극단적인 인물군상은 하나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에 쓰일 법한 인물이라기 보단 오히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논란의 여지가 아주 많아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대에 들어와서는 수많은 계약이론을 탄생시키는 듯도 하다.
이를테면
사랑에 이런 저런 계약 이론을 끼워 넣는 것이다.
심청전
같은 설화를 들이대면서 효도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
자식도 인간으로 누려야 하는 가치와 권리가 있으므로 아무리 부모 된 자라도 그것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지도 모른다.
또한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했는가?
그렇다면
그 자식도 응당 부모에게 효도할 거라고 말하고 싶어지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누구도 효를 강요하면 안 된다고 선을 그어 버리는 지도 모르겠다.
아는
것이 병일까?
이렇듯
성인이 되어 읽은 심청의 이야기는 어릴 때 읽은 그것 보다 순수하거나 더 이상 아름답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난 어느 순간 내가 너무 이런 시각에 경도되어 있었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저자의 해설을 읽을 때였는데 그 부분을 읽으니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겠단 생각도 든다.
저자는
말한다.‘이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할 줄 아는 이타적 사랑 밖에 없다.
<여인
심청>은
이타적 사랑의 이야기다.
그것을
실천해가는 운명 개척의 이야기(398~399p)’라고
했다.
그렇다.
여인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 자식을 낳는 것을 두고 이타적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 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여성의 자궁을 이타적 사랑의 근원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바로
이런 사랑이 아니면 세상을 구원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 고난당하고 부활한 것이 아니겠는가?
인당수에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과 연꽃으로의 부활은 예수님의 그것과 흡사해 보인다.
그런데
또 드는 생각은 이 심청전의 최초의 설화자 즉 원작자는 누구였을까를 생각해 본다.
작자
미상일 테니 정확히 누구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남자였을 거란 짐작은 어렵지 않다.
그
시대도 여자와 어린 아이는 인간으로 대접도 못 받았던 시대였을 테니.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여자 보단 남자가 더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리고
남자가 아니면 이런 여인상을 그릴 수가 없다.
남자의
로망은 시대를 불문하고 뮤즈였다.
그래서
고래로 저마다 이야기를 다룰 줄 아는 남자는 구원의 여인상을 즐겨 쓰길 마다하지 않다.
그렇다.
이
세상을 구원할 방법은 사냥 기질에 영역 확장의 기질만 가지고 있는 남성성만을 가지고는 구할 수 없다.
희생을
전제로 한 이타적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다.
어쨌든
현대에 들어와서 ‘자기희생’이니
‘이타적
사랑’은 또
얼마나 생뚱맞은 것이 되어 버렸는가?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반면교사 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역설하고 있다.
그러니
이야기에서의 자기희생과 이타적 사랑은 얼마든지 변용가능하다.
그런데
남자들은 이렇게 구원의 여인상을 즐겨 쓰면서 자기희생이나 이타적 사랑을 여성에게 슬쩍 미루는 것처럼도 보인다.
또
그런 점에서 어찌 보면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은 자궁 달린 남성 즉 구원하는 남자 또는 이타적 사랑을 보여주는 최초의 남성상을 보여주는 건
아니었을까?
진정한
작가정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작가는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믿는 우리들 현대인의 어리석음에 관한 것...
상상적인
것,
환상적인
것,
마음속에서만
작용하는 것,
마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397p)고 했다.
나는
그의 말에 무조건 동의한다.
그래서
그렇게도 눈을 뜨길 원했던 심학규는 눈을 뜨자 자신의 어리석음을 통탄한 나머지 산속으로 숨어들었고,
윤상은
심청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그 마음의 작용에 따라 인두로 눈을 지지는 고통 속에 죽어갔어도 고귀하게 희생할 줄 알았나 보다.
그렇다면
애초의 어줍지 않은 나의 페미니즘의 사고방식을 잠시 내려놓고 저자의 의도와 생각에 깊이 침잠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아무튼
난 이 책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저자
특유의 문체와 사유의 깊이에 감탄했고,
새로운
캐릭터와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작가의 몫이긴 하지만 기존에 있었던 이야기를 재해석 해 오늘날에 재조명 하는 것 또한 역량 있는 작가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평론과 학자의 길을 걸었던 저자가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유감없이 펼쳐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200번이나
고쳐 쓴 작가의 노고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