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면 오빠의 3주기다. 특별히 기억할 것도, 챙길 것도 없다. 그냥 이렇게 기억하는 것으로 대신할 뿐이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짧은 생애를 살다 갈 줄은.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될 것도 모르고 누군가 자기 보다 먼저 간 사람에게 연민을 보내곤 했겠지. 지금의 나처럼. 사실 엄마와 난 오빠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그때 오빠는 강릉의 호스피스 병원에 있었기 때문에 임종은 언니네 가족들과 평소 땐 존재감이 없다가 막판에 빛을 발휘하는 내 동생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는 서울에서 내려 온 동생에게 나와 엄마를 부탁한다고 하곤 떠났다고 한다. 난 실제로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그렇게 말하고 떠났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고개가 절로 가로저어질 지경이다. 자기가 살아생전에 언제부터 나와 엄마를 끔찍이 여겼다고 그런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떠났을까.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한동안 잊혀지지 않아 난 한동안 오빠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의 기억은 어쩌면 그리도 집요하고 끈질긴 것인지. 형제를 잊는데 걸리는 시간은 빠르면 2년, 길면 3년이라더니 그것 또한 조금도 비껴가지 않는 것 같다. 그동안 엄마 문제로 오빠는 어느새 저만치 밀려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삶과 죽음의 문제는 나의 의식 어디쯤을 맴돌고 있었다. 

 

이제 내일이면 나는 오빠 보다 긴 생애를 살게 된다. 나는 또 얼마를 살다가 오빠가 갔던 길을 가게 될까? 지금으선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저 그는 나 보다 짧은 생애를 살다 갔다는 것만 인식시켜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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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7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6-08-18 13:00   좋아요 2 | URL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좋은 책 많이 보고,
글도 미루지 말고 빨리빨리 쓰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고
모든지 참지 말고 쌓아두지 말고, 본능에 충실해져 봐야지 하는데
그게 또 생각만큼 안 되요.
인내해야지, 참아야지,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지,뭐 이런 쪽으로만
저의 회로는 장착이 된 것 같습니다.ㅠ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7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구... 힘내요. 애도의 기간이 왔으니 진심으로 애도하시고 다음날에는 다시 밝은 모습으로 봐요. 스탤라 님...

stella.K 2016-08-18 13:02   좋아요 0 | URL
애도 끝!
짠 나타났지요. 어제와 다름없이.
요즘 곰발님 글 읽는 낙으로 사는 거 아시죠?ㅋㅋ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8 16:53   좋아요 0 | URL
어제 글 하나 저장해 놓긴 했는데 요거 까면 한동안 알라딘 마을 시끄러울 것 같아서 간 좀 재고 있습니다... ㅎㅎ

2016-08-18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8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8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9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9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9 1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9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6-08-17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가면 잊혀진다는 말은 위로가 되라고 하는 말일뿐, 아니더라고요.
저도 어제 무심코 오징어 땅콩 과자 봉지를 보는데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지 뭐예요.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과자거든요.
3주기...아직도 기억이 생생할 것 같아요.

stella.K 2016-08-18 13:09   좋아요 0 | URL
그러실 거예요. 근데 아버지하고 형제하고는 다르긴 하더라구요.
저도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거의 5년은 간 것 같아요.
뭐만 해도, 어디만 가도 왜 그렇게 생각이 나던지.
나인님 지금 한창 생각나실 때죠.
근데 시간의 힘을 믿어보자구요.
전 많이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이러다 누군가를 보내야할 때가 또 오겠지만...
주위에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가 있더라구요.
나인님도 저로 인해 조금이나마 위로 받으셨으면 해요. 힘내자구요.^^

2016-08-18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6-08-18 13:10   좋아요 0 | URL
오, 그런 소설가가 있었군요.
고맙습니다.^^

blanca 2016-08-1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만 해도 그냥 행간의 복잡한 심정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아 가슴이 시큰해지네요. 저는 아직 덜 컸나 봐요.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 너무 무섭고 제가 잘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죽음`의 문제는 풀 수 없는 건데 자꾸 부딪히게 돼요. 이 글이 뭔가 담담하게 격려가 됩니다.

stella.K 2016-08-19 12:56   좋아요 0 | URL
그랬다면 다행이어요.
그래도 이만큼 쓸 수 있는 것도 그 복잡한 심정을
많이 뒤로 했으니까 쓰는 거랍니다.ㅎ
우리가 계획에 의해서 세상에 나온 건 아니잖아요.
그게 신의 관점에선 뜻이 있어서 태어났다고는 하는데...
얼떨결 세상에 와 열심히 주어진대로 살고 또 얼떨결에 가는 거죠.
혹시 브랑카님께 원치 않는 때가 올지라도 너무 당황하거나
슬퍼하지 말이요. 그냥 누구나 가는 길을 가는 것 뿐이니까.^^

페크pek0501 2016-08-2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는 게 두렵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앞으로 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누구의 죽음이 있는 건지...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갖겠다는 생각으로 현재를 미래를 살아야 하겠죠?

오랜만에 로그인하고 댓글 씁니다. 아무리 더워도 찜통이어도 알라딘은 여전하다는 게 위로가 되는 날입니다.

stella.K 2016-08-21 13:3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죽음을 생각하란 말도 있지만
사는 동안만큼은 삶은 산자의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잘 살아야죠.
이제 더위도 막바지입니다.
자주 뵈어요.^^
 

<살인의 추억>을 다시 한 번 보았다. 개봉 당시 보고 이제 본 것이니 다시 보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세상의 모든 영화는 아니어도 적어도 예전에 괜찮게 보았다고 하는 영화들은 두 번 이상은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전에 보지 못했던 장면과 대사와 그것들이 주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살인의 추억은>을 처음 봤을 땐 그 내용을 따라가느라 바뽰던 것 같다. 그후 난 뭐 때문인지 시나리오 대본집까지 사서 봤던 것 같다. 근데 하나도 기억에 없다. 그걸 왜 샀는지도 잘 모르겠다. 분명 유명해서 샀을 것 같긴한데...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몇년 후 대본집을 샀을 때만해도 봉준호 감독이 그렇게 유명한 감독인 줄은 잘 몰랐다. 그러다 8년 전쯤  얼떨결에 시나리오 학원을 다닌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봉준호 감독은 거의 신으로 통했다. 당시 내가 배웠던 선생님도 영화 감독이셨는데 그분은 거의 시간마다 "밥은 먹고 다니냐?"를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땐 그 대사가 이 영화에서 씌였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이 시간마다 떠올린 대사였는데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단지 확인을 안해 봤을 뿐. 그런데 이번에 확인하고 새삼 그 선생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상은 물론이고 인품이 좋으셔서 시나리오에 뜻이 있었다면 한 번 정도는 더 그 선생님에게서 배웠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래 볼 생각이었다. 그 선생님께 배웠던 5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워크숍 작품 하나 

완성 못하고 종강을 맞은 게 좀 아쉬웠다. 그래서 순수 창작은 그렇고 당시 내가 좋아했던 소설 하나를 각색해서 다시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근성이 없었던 건지, 정신을 차렸던 건지 그때 이후 시나리오 공부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은 작품에 들어가게 되서 당분간 학원을 떠나게 됐다는 사이트 공지를 보았다. 그런데 또 얼마 후 선생님은 다시 복귀해 시나리오를 가르치고 계셨다. 선생님의 작품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어 본 적이 없으니 모르긴 해도 부침이 많은 영화판에서 선생님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셨던 것 같다.

 

지금은 또 그 보다 세월이 한참 더 많이 흘렀으니 이제 영화 같은 건 감히 만들 생각을 못하시는 걸까? 그때나 지금이나 후배 감독들이 치고 올라오는데 무슨 수로...  모든 건 때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도 전성기가 있으셨겠지.

 

선생님껜 차마 진지는 드시고 계시냐는 말은 못할 것 같다. 그렇게 묻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는가. 그냥 지금 평안하신지, 건강은 하신지 여쭙고 싶긴 하다. 어쩌다 이런 옛 추억을 떠올리게 되었을까?

 

봉준호 감독은 봉테일이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디테일의 완벽을 추구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당시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시나리오는 과학이라고.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말이 실감이 난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아귀가 딱딱 맞는 것이 서늘할 정도다.

 

어찌보면 이 영화는 수컷의 동물적 감각에 대한 영화 같기도 하다. 다 잡은 사냥감을 눈 앞에 두고 결국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동물의 안타까운 포효를 듣는 것도 같다. 악에 대한 응징, 정의에 대한 수호.뭐 이런 것까지 읽히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이란 모티프에서 나온 영화가 아닌가. 만일 그 사건이 영구미제가 아닌 해결된 사건이라면 영화도 달라졌겠지.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너무나 완벽해서 영화의 교과서로 쓰일만 하다.

 

 

미제의 사건을 다뤄 처음 봤을 때는 그렇게 긴 영화일 거라고 생각 못했던 것 같다. 이제 보니 러닝타임이 2 시간이 넘는 영화였다.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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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16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은 먹고 다니냐는 아마 시나리오에 없었을 겁니다. 송강호 애드립이라고 하더군요..

stella.K 2016-08-17 13:43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그런데 이미지 또 바꾸셨군요.
이 이미지가 좋은 것 같아요. 귄해요.ㅋㅋ

cyrus 2016-08-16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낙 유명한 영화라서 그런지 검색하면 영화를 해석한 글들이 엄청 많아요.

stella.K 2016-08-17 13:46   좋아요 0 | URL
아직도 그런가...? 이 영화 10년도 더 된 영환데.

yamoo 2016-08-18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봉 감독이 유명해 지기 전에 2번 봤습니다. 제가 갖고 있던 한국 영화의 편견을 날려준 고마운 영화죠^^

영화가 뜨니, 이 영화를 분석한 책들도 엄청나더이다~ 이 영화가 들어간 평화 평론집은 쌔고 쌨구요~ㅎ

stella.K 2016-08-18 13:11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평론집이 있는 줄 몰랐어요.
그쪽엔 별로 관심이 없으니...
 
나눔의 세계 : 알베르 카뮈의 여정
카트린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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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김화영 교수의 강연을 참석한 적이 있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카뮈 전문가다. 그 강연회를 다녀 오고 나서 당장 이 책을 질러버렸다. 그만큼 카뮈에게 매료당한 것도 있고, 김화영 교수의 강의가 워낙 유려해서 혹시라도 놓쳤을지도 모를 내용을 이 책에 있지 않을까 해서다. 그것은 김화영 교수가 카뮈를 다룬 가장 최신간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날의 김화영 교수의 강연과 책은 그다지 관련성은 없어 보인다. 그냥 이 책은 그날 김화영 교수의 강연회를 빛내주기 위한 소품이라고나 할까? 무엇보다 이 책은 일반책 보다 훨씬 크고 양장이다. 문학 앨범인 만큼 글은 별로 없고 사진만 풍성하게 많다. 솔직히 이런 책을 내가 좋아할 리 없다. 무거워 한 번 들을 때마다 손목에 무리가 가고, 편하게 누워서나 기대어 앉아서 볼 수도 없다. 오로지 책상 앞에 정자세로 앉아 봐야한다. 정말 카뮈가 아니라면 이런 책은 나에게 쉽게 용서 받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표지도 그렇긴 하지만 어느 정도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그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그는 미색은 아니다. 하지만 남자답게 생겼으며 인상이 진지하면서도 좋다. 이런 상을 두고 누구의 말처럼 귄한 상이라고 하는 걸까? 그래서 한때 시몬느 보부아르로부터 사귀자는 청탁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고 한다. 글쎄, 아무래도 그는 한미한 가문의 사내로서 보부아르가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그녀는 복수하는 의미에서 카뮈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퍼트리고 사르트르에게로 갔다고 한다. 그런 걸 가지고, 여자가 한을 품으면 어찌된다는 고리짝 여혐발언 같은 건 하지말자. 차도녀라면 그 정도 뒤끝은 보여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왜냐고? 나는 소중하니까.

 

하지만 그런 그도 첫 번째 결혼은 실패했다고 한다. 좋은 여자일 것 같아 결혼했지만 알고 봤더니 마약쟁이었고, 마약을 구하기 위해 몸을 팔기도 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아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재혼해 딸 아들 쌍둥이를 두었는데 그 딸이 이 책을 엮은 카트린이다.

 

사르트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람들은 흔히 사르트르와 카뮈를 라이벌로 여기기를 좋아하지만, 카뮈는 늘 그렇게 비교되는 걸 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는 모든 면해서 사르트르가 자신 보다 우위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르트르는 유서 깊은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수재중의 수재만 통과한다는 국가시험을 통과해 당당히 교수가 되기도 했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과 자신이 비교될 수 있냐는 것이다.

 

하지만 신은 일견 공평하기도 하다. 그렇게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이 완벽할 것 같은 사르트르도 아쉬운 것이 있었으니 그는 사시였다. 그리고 빼어나게 잘 생긴 것도 아니다. 그런데 비해 카뮈는 매력적이었으며 단명했다. 사르트르는 장수했고. 그러고 보니 공평한 것도 아닌가? 게다가 카뮈는 돈과도 별로 인연이 없는 듯하다. 그가 출판이나 강연 등으로 적지 않은 돈이 은행에 있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단다. 그나마 노벨문학상을 받는 바람에 그 상금으로 엑상프로방스에 조그만 시골집을 사서 어머니와 함께 편하게 글을 쓰겠다는 바람도 이루지 못하고 어느 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의 어머니도 그 충격으로 6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카뮈가 사르트르와 비교되는 것을 거부했던 것엔 그의 가정환경도 한몫했을 것이다. 포도농장의 감독이었던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에 징집돼 일찍 전사하고, 어마니 역시 말을 잘하지 못하며 정신적으로도 온전치가 못했다고 한다. 집안은 늘 가난했고. 그랬다면 그는 불행했을 거라고 사람들은 짐작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가난했지만 불행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지중해가 주는 기후와 햇빛 때문이었다.

김화영 교수는 카뮈를 이해하려면 이 지중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지중해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문명의 발상지다. 기독교의 반대되는 지점에 헬레니즘이 있다. 기독교는 병적이고, 사변적이며, 낭만주의를 대표하지만 헬레니즘은 구체적이고 확실한 지향점을 펼쳐 보인다. 그러면서 문학은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순간 귀가 좀 번쩍 뜨였다. 이건 별로 깊게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기도 한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던 기독교가 헬레니즘에선 저렇게 인식되는구나 한 것. 또한 이는 카뮈가 지중해의 햇볕아래서 춤추던 조르바와도 중첩되기도 한다. 아무튼 그는 그 햇빛 아래서 가난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카뮈하면 흔히 <이방인>이나 <페스트>를 떠올리겠지만 난 오래 전부터 <시지프의 신화>를 떠올렸다. 그것은 내가 그 책을 독파해서가 아니다. 실은 독파하는데 실패했다. 사춘기 시절의 일이다. 그 책을 이해하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책에 손을 댔던 건 바로 실존주의 때문이다. 그게 그렇게 멋있게 들릴 수가 없었다. 이 책에서 그 한 자락을 만났다.

“......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 올리는 한 차원 높은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만사가 다 잘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잖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96p) 그 얼마나 멋진 말인가.

 

카뮈는 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훗날 정오의 사상을 구축해 나갔다. 그는 지중해에는 안개의 비극성과는 판이한, 태양의 비극성이 있다고 했다. 아마도 그래서 <이방인>을 쓰지 않았을까? 그의 세계는 삶과 죽음이 인접해 있다. 이를테면 투우사가 아름다운 건 소의 정수리에 창을 꽂아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한 번에 삶과 죽음을 가르는 그 분명함을 설명했다. 그의 문학은 항상 젊었다. 그것은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문학도 사람과 함께 나이 먹어가는 유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의 흐름을 뒤집어 놓은 것이 죽음이라고 <최초의 인간>에서 밝히기도 했단다.

 

또한 그의 사상은 따로 또 같이의 문학이었다. 그것만이 이상적인 예술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사랑이 없는 반항은 온전한 반항이 아니라며 사랑과 정의의 함수관계를 그의 책 <결혼, 여름>에서 밝히기도 했다. 그것은 정오의 사상과도 그 맥을 같이 하는데, “정의를 실현하려는 요구가 오래가면 그것을 낳아준 사랑을 메마르게 한다.”, 절도를 지향하는 집념을 표현하기도 했다(111p).

 

카뮈는 앙드레 지드와 함께 프랑스 국어사전에 가장 많은 예문을 싣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명쾌하며 감동적인 표현을 하는 작가라고 한다. 그는 늘 사랑 받지 못하는 건 운이 없는 거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건 불행이다.’라고 했단다. 그런 그가 낭만주의자가 아니라니. 모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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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6-08-18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카뮈 사진 보니 눈이 정말 초롱초롱하네요.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김화영 교수의 강의도 궁금합니다.

stella.K 2016-08-19 13:02   좋아요 0 | URL
오, 고마워요 브랑카님. 이 글에 댓글이 없어서 좀 우울했었는데...ㅋㅋ
강의 정말 좋았어요.
솔직히 그때 제가 거의 뒤에 앉아서 들어서 정말 귀를 쫑긋 세우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거든요. 게다기 교수님이 앉아서 강연을 해서
얼굴도 볼 수 없고 오로지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어요.
전 그러면 거의 듣기를 포기하는데 아무래도 문학에 관심이 많고
더구나 카뮈라 정말 한마디도 허투로 흘려 듣고 싶지 않았어요.
카뮈는 정말 멋진 남자같아요.^^
 

 

하도 많이 들어 본 이름이라 내가 프랑스와 오종 감독의 작품을 한 작품이라도 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작품이 처음이다.

 

이 작품 그야말로 발칙하고 조금은 충격적이다. 그나마 이야기가 시종 위트함을 잃지 않아서 그럭저럭 보는대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위트함 때문에 과연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그 그럴수도 있다는 것의 전제는 성 정체의 경계가 무너지면이란 전제다.

 

이미 유럽 같은 나라는 남성과 여성을 태어나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선택하도록 한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남자라고 해서 남자로 자라는 것이 아니고, 여자라고해서 여자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남자라고 해도 자신이 자신을 느낄 때 여자라고 판단되어지면 여자인 거고, 여자도 자신이 남성성이 더 많으면 남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거다. 나로선 잘 용납이 안되는 부분이긴 하지만 이미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럴 경우 문제는 없겠느냐는 것이다.

 

  

서로 너무 친해서 어렸을 때 피의 맹약을 하는 것도 철없을 때 한 때 그럴수도 있다하지만 그런 건 어리석은 일이며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그것은 영원한 친구없을뿐더러 자신의 운명을 올가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너무 우정, 우정해도 언젠가 둘 중 하나는 먼저 떠나게 되어 있다. 그때 그 공허함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하필 죽은 친구의 남편이 여성 복장에 집착을 보이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여성으로 하기를 원한다.

 

프랑스는 이미 성이 개방된 나라다. 동성애는 이미 자연스러운 거고, 트랜스젠더를 원할 수도 있고 그걸 굳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 복장을 하는 건 어느 정도 봐 줄 수 있더라도 남자가 여장을 하는 건 그 나라도 별로 자유롭지는 못하는가 보다. 그래서 주인공의 친구의 남편은 수시로 여자와 남자를 오간다. 친구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친구의 남편은 자신이 여자인 것 같다고 그러고, 주인공은 친구의 남편을 좋아하는데 자신이 이 사람을 여자로 좋아하는지 남자로 좋아하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결국 그래서 온전한 섹스에도 이르지 못한다.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긴 한데 그 과정이 극적이긴 하지만 억지스럽지는 않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친구의 남편은 온전한 친구로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을 발칙하면서도 나름 유쾌하게 그렸다. 친구의 남편으로 나오는 로망 뒤리스의 연기가 일품이다. 그는 남자역을 자연스럽게 한다. 당연하다. 그런데 여자역은 더 잘한다. 남자들이 대체로 하이힐을 못 신는데 로망 뒤리스는 영화를 위해 연습을 많이 했는지 하이힐 신고도 여자 보다 더 멋지게 거리를 활보하고, 여자다운 몸짓도 능수능란하다. 나는 보수적인 사람이라 이렇게 성정체를 다루는 영화가 익숙치는 않다. 하지만 영화와 상관없이 늘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하는 감독의 정신은 높이 사 줄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은 역시 뭔가 걱정스러운 여지는 있다. 둘은 좋아서 친구가 되기도 하고 애인이 되기도 한다지만, 친구의 아이는 자기 부모를 어떻게 인식을 할까? 엄마로? 아니면 아빠이면서 엄마로? 이런 시대 아이들도 엄마와 아빠를 굳이 따로 구분하지는 않게될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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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12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종 영화 보면 알모도바르 영화와 느낌이 약간 비슷한 구석이 있지 않습니까 ?
오종 영화 나왔을 때 한동안 재미있게 보긴 했었는데..
이젠 딱히 어느 장르에 환장하고 그런 때는 지났나 봅니다..
잘 안 보게 되네요..

stella.K 2016-08-12 15:41   좋아요 0 | URL
그렇죠. 영화를 보는 것도 다 때가 있나 봐요.
저도 끝까지 보게되는 영화가 별로 없어요.
그나마 이 영화는 끝까지 보게 되더라구요.
나름 재밌었어요. 내 취향은 아니지만...^^

기억의집 2016-08-12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글 읽으니 생각나는 게.. 우리 옆동네 아파트에 여장아저씨 있어요. 근데 그게.... 참 이 영화의 남자처럼 여자처럼 보이는게 아니고(전 이 영화 안 봤는데 스텔라님이 여자인척 잘 연기한다길래) 우락부락한 남자 모습 그대로 여자분장을 해요. 키도 작고 몸은 우락부락한 남자가 화장은 찐하게 하고 미니스커트에 망사스타킹 그리고 이 남주처럼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것을 종종 봅니다. 솔직히 첨엔 받아들이기 힘들더라고요. 남자가 여장차림을 하니깐. 그런데 뭐 어쩌겠습니까. 내 이웃아저씨가 여자처럼 살겠다는데... 지금은 차라리 여성호르몬을 맞지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여성 호르몬 맞으면 우락부락한 근육이 금방 사라진다는데...맞으면 지금처럼 남자처럼 들 보이지 않을까하는. 이 생각도 차별이긴 하지만 주변 시선이 곱지 않아서. 아저씨 나이가 오십은 넘어보이는데.. 나름 본인도 정체성에 고민 많았겠지요????

stella.K 2016-08-12 15:54   좋아요 0 | URL
와, 전 영화에선 봐도 아직 실제로 본적은 없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 영화로 봐도 좀 편치는 않는데
실제로 보면 어떨까요? 기억님도 좀 괴로우시겠어요.
전 저 영화에서 저 남자 배우 좀 훈련 받았다고 생각해요.
몸짓이 여자 뺨치겠더라구요.
실제로는 기억님이 보신 사람들이 더 많을 거라고 봐요.

기억의집 2016-08-12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렸다면 괴로울 것 같은데... 이것저것 읽다보니 저런 분들은 본투비더라구요. 그렇게 태어난 분들인데... 받아들여야한다고 생각이 들어요. 혹 워렌의 싸울 기회 읽어보셨어요? 그 책속에 워렌이 상원의원이 되기 위해 유세할 때 유세 모임중에 겉보기에 만만치 않아보이는, 공화당같이 보이는 한 백인남자가 트렌스젠더에 대해 물은적이 있어요. 그러자 워렌이 트렌스젠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야한다고 평등할 기회를 줘야한다고 그런 식으로 말해요. 워렌은 이 남자가 공화당원일 거라 생각하고 자기를 공격하는 말을 하려는 줄 알았는데 그 남자가 자기 아들이 트렌스젠더라고 그런 말 해줘서 고맙다라는 대목이 나와요. 저는 진화생물학책도 드문드문 읽어서인지 지금은 받아들이게 되더라구요....

stella.K 2016-08-12 16:1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하긴 우리가 그들을 뭐라고 할 권리는 없죠.
하지만 전 아직 그런 쪽으론 아는 바가 없어선지 솔직히
그들을 이대로 봐줘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게되요.
취향의 문제라면 어떻게 못하는데 일종의 호르몬 같은 병의 문제라면
치유가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동성애도 권리를 주장하긴 하지만 또 동성애서 다시 돌아가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어요.
영화에서도 보면 의사를 찾아가 보라고 설득하기도 하죠.
그런 걸 보면 프랑스도 완전히 성개방이 된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다양함을 존중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그 다양함을 받아들이기엔 버거울 때도
있어요.

기억의집 2016-08-12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화관련책 읽어보면 호르몬조차 명령할 수 있는 유전자의 명령 같더라구요.

yamoo 2016-08-18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꼭 보도록 하겠습니다! ㅎ
영화 `플루터에서 아침을`이라는 영화가 있지요...명작입니다.

영화를 안 봐 정확하지는 않지만 스텔라 님의 영화 리뷰만으로는...저 로망 뒤라스는 CD를 연기한 듯합니다. CD는 트랜스젠더와는 완전 다르죠. 자신의 성 정체성을 정확히 인식하면서도, 이성(여성)의 복장을 탐하는 성향을 일컫습니다. 여자 옷을 입으면 완벽히 여성처럼 행동하지요..ㅎㅎ 우리나라에도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이 1만 여명을 헤아린다고 합니다..ㅎ

stella.K 2016-08-18 16:40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저도 예전에 플루토에서 아침을` 본적 있어요.
보기전엔 약간의 선입견이 없지 않았는데 의외로 잘 만들어서
재밌게 본 기억이나요.

진짜 그런 사람이 있더라구요. 그걸 CD라고 하는군요.
맞아요. 로망 뒤라스가 그 연기를 한 거죠.
그런데 남성적 매력이 물씬한데 여장만 하면 여성역을 너무나 잘 소화하더라구요.
재능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군요. 하여간 야무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려.^^
 
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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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주의는 아니지만 김훈 작가의 작품은 나름 꽤 읽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것이 <내 젊은 날의 숲>을 끝으로 한동안 그의 작품을 읽지 못했다. 나는 그 작품을 읽기도 했지만 출간 당시 강연회도 참석 해서 거기서 작가의 다음 작품에 관해 들을 수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흑산>이었다. 물론 그때는 구체적으로 제목을 언급했던 것은 아니지만, 천주교 박해 관한 소설을 쓰게 될 것 같고, 쓰게 된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을 지키는 쪽이 아닌, 목숨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신앙을 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의 입장을 쓸 것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확실히 작가답다고 생각했다. 들어나지 않는 이면의 것을 쓰는 것이 김훈 작가의 글 쓰는 방식은 아닌가. 독자는 자신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만만히 보이는 작가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런 내가 <내 젊은 날의 숲> 이후로 그의 작품을 읽지 않게 되었다. 그는 약속을 지키듯 <흑산>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나의 게으름 탓도 있지만, 난 왠지 <내 젊은 날의 숲>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도 오래 전에 읽어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 미흡하고, 미진했다. 게다가 <흑산>에 대한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읽었던 작품이 마음을 채우지 못하면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여도 다음 작품을 선택하기란 꺼려진다. 그런 내가 몇 년만에 그의 작품을 읽는다.

 

읽고나서 역시 김훈이다 했다. 작가는 살아 있었다. 아마도 그는 역사 소설을 쓸 때가 가장 그답지 않나 싶다. ‘화장도 좋고, ‘언니의 폐경도 좋은데 다 그것에는 못 미친다. 하지만 그가 역사 소설만 썼다하면 따라오는 오명이 있는데 그것은 마초.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나와도 그저 작품의 부속품 정도로 나온다고 해서 마초라고 해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찌질한 마초도 다 있을까?

 

인간의 세계에서 신앙을 가진 게 죄라면 죽음으로 그 죄값을 치르는 것도 좋은 일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 또한 마초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사내대장부가 죽음을 두려워 할까. 그러나 그렇게 해서 죽는 거라면 그건 허세일 뿐이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순교는 아닐 것이다. 어찌 사람의 생과사를 마초에 비할까. 그래서 살면 마초가 아닌 것이고, 죽으면 마초가 되는 것인가? 그것처럼 어리석은 이분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말했다. 마초는 허세로서 자신의 문학을 단순히 그렇게 부르지 말아 달라고. 이건 모르긴 해도 초기 그의 문학을 평했던 평론가들이 부르기 좋은 말로 그렇게 불렀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마초하면 김훈이란 등식은 이제 성립하지 않는다. 그저 남성의 고독한 실존을 그렸을 뿐이다.

 

남들은 순교라는 이름으로 죽어갈 때, 그 누군가는 배교로 목숨 하나를 구했다. 그리고 순교하는 신도를 지켜 본다는 게 마음 편한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하여 본 것이다. 그렇게 구차한 목숨 하나 구했다고 어찌 배교했다고, 비겁하다 할 수 있을까? 나도 신앙인이지만 박해로 인해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면 쉽게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이렇게 교회 다니기 좋은 시대에 그 안에서 온갖 비리의 냄새를 풍기고도 그것이 배교인지도 모르고 교회를 다니는 게 더 문제는 아닐까.

 

책을 읽다보니 내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을 알았다. 배교했다고 해서 다 살아남는 것도 아니라는 것. 배교는 배교대로 하고 끝내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 그들은 이승에서도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 저승에서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 영혼은 또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한 것인가. 나는 어떨까? 나는 신잉인으로 죽으면 부활을 믿고, 천국의 소망이 있지만 그런 박해의 시대에 감히 야소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사학죄인이 되기를 기꺼워 할 수 있을까?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지금도 이 지구 어디에선가는 예수 믿는데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곳이 있다. 즉 순교자가 있다는 말이다. 나는 가끔 교회 다니는 게 비정상 같다는 생각도 든다. 교회는 병든 사람이 위로 받자고 다니는 건데 죽기를 강요 받고, 겁박하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박해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배교할 사람이 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순교는 확실히 신비다. 그것을 아무리 이해 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때로 믿음을 이해의 영역에서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하는 건 얼마나 무모한가. 

 

복음이 전파되려면 그곳에 먼저 피의 순교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참 무서운 분 같다. 그리고 순교의 터 위에 교회는 세워졌다. 내가 죽어야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나의 후손과 공동체가 구원을 받는다. 아마도 이 마음 가지고 순교하지 않았을까? 생명은 나 하나만을 생각하면 결코 버릴 수 없는데, 나의 후대와 공동체를 생각하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이를 몸소 보여주신 분이 또한 예수가 아닌가.

 

배교하고 살았다고 그를 쉽게 비겁자라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때는 박해를 피하려고 배교가 불가피 했는지 모르지만 모든 건, 이 또한 지나간다. 박해 후 또 신앙을 회복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아니 그는 배교했을지라도 그의 후손은 신앙을 받아 들였는지 알 수 없다. 그건 그저 그 사람의 실존인 것 같다. .

 

소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배교자로서 순교자와 배교자들을 지켜 본 정약전은 그냥 그 시대를 담담히 살아낸 실존주의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배교자가 되어 가정을 지켜내는 가장이길 바랐을 뿐이다. 그것이 실질적인 명분이었는지 아니면 살기 위한 핑계였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아무튼 그것이 김훈이 말하는 마초와 가부장의 차이일 것이다. 그는 또 말했다. 가부장이 오늘 날 잘못 왜곡되어서 그렇지 진정한 가부장은 가문과 식솔들을 지켜낸다고. 그 옛날 가장들은 가정과 식구를 지켜내지 못한 것을 치욕이요 불명예로 여겼다. 눈 앞에서 오랑캐에 끌려가는 자신의 아내와 누이와 어린 자식을 지켜보면서 울부짖지 않을 가장이 어디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가부장은 나름의 독특함으로 발전하고 왜곡되어져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잠시 세월호 선장을 생각했다. 점점 바다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갑판의 끝에 매달려 구조 받던 그 선장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그는 책임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건 심판 받아 마땅하지만, 난 그때 그것을 보면서 왠지 그의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이해관계를 떠나 그는 본능적이고 원초적으로 살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건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비난을 받던, 벌을 받던 그건 나중의 일이다. 그가 바보가 아니라면 구조 받던 그 순간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살고 싶었을 것이다. 살아야 그 다음도 도모할 수 있다. 아니면 얻어 걸렸다고 수장됐어야 할 목숨이 얼떨결에 구조되었던 걸까?

 

아무튼 그는 세월호의 희생자수만큼이나 죽어 마땅하지만 생으로 귀환한 그는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비며, 늙은 부모의 자식일 것이다. 다른 사람은 그를 비난하고 욕해도 그의 가족들은 그를 비난할 수 없고, 그렇게라도 살아 있음을 다행으로 여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들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을까. 심판 이후 모든 것은 그와 그의 가족들이 감당해야 할 몫일뿐 우리는 어떤 것도 그에게 그 이상도, 그 이하의 것도 바랄 수가 없다. 모르긴 해도 그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세월호 희생자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게 그에게는 앞으로의 실존이고, 삶의 몫인 것이다. 배교자는 배교자의 삶이 있는 것처럼.

 

난 김훈의 문체를 좋아한다. 그의 문체는 아름다운 것도, 시적이지도 않다. 특히 이 작품은 피와 살점이 툭툭 패이는 것만 같다. 또한 적절히 녹아있는 성애장면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 것을 보면 사극 같은데서 등장인물이 추국을 당하고 그 다음 장면에서 사지육신 멀쩡한 것으로 나오는 걸 보면 참 이미지가 문자를 못 따라 가는구나 싶기도 하다. 

 

그의 문장은 한번도 성공한 사람을 대변하거나 표현해 준 적이없다. 쓰는 것마다 실패하는 자를 대변하고 그의 고독하고도 처절한 실존을 표현해 왔다. 어설픈 성공보다 차라리 처절한 실패가 더 났다는 말은 그의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실패하는데 성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작가다. 그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난 그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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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7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6-08-08 12:57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저는 반대로 에세이는 자전거 여행인가
그거 달랑 읽은 거 같아요. 근데 소설은 읽히더군요.
아직 안 읽은 것도 많아요.

2016-08-07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6-08-08 13:01   좋아요 0 | URL
오, 정확히 보셨네요. 맞아요.
김훈 자신도 역사 소설가는 아니라고 밝히고 있지요.
단지 역사를 재료로 할 뿐이라고 했어요.
아마도 그는 역사의 인물을 통해 남자를 재해석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뭐 남자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징징거리는지도 모르구요.
아무튼 전 그가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단백한 문장이 좋더라구요.
읽어 주셔서 고맙슴!^^

2016-08-08 0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