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 둘째 조카 지0이가 오랜만에 우리 집에 다녀갔다. 뭐 딴 일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고 언니네가 강릉에 살고 있고, 서울 서 친구들이랑 자취를 하고 있으니 일 년에 한두 차례 언니를 시켜 철 지난 옷들과 당장 입어야 할 옷들을 교체해 가는 모양이었다. 그에 대한 맞교환 장소를 이번엔 녀석의 외가인 우리 집으로 정한 것그럴수밖에 없었던 건, 언니는 얼마 전 집에서 쓰던 믹서기가 고장났고 마침 우리 집엔 안 쓰는 믹서기가 있어서 그것도 얻어 갈겸 하루 날 잡아 온 것이다. 그외 다른 볼 일도 있고.  

 

형부와 우리집이 절연되지만 않았어도 녀석과 내가 이렇게 오래도록 만나지 못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언니와 같이 산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집은 형부를 무던히 품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혈연으로 맺어진 내 집 식구도 때론 품어지지 않는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남의 집 사람을 품기란 정말 쉽지 않다는 걸 형부를 보며 새삼 깨달았다. 형부와 절연이 되니 언니도 멀어지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조카 녀석들만큼은 그렇게 되길 원치 않았다. 솔직히 미운 거야 언니 내외지 아이들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애들이 부모 따라가지 누굴 따라가겠는가. 하지만 녀석들이 외가를 나몰라라 하니 섭섭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차치하고라도 외할머니와 두 외삼촌들이 녀석들에게 어떻게 했는데 이러고 나오나 옛말이 하나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싶었다. 하늘로 둔 머리 검은 짐승 거두지 말라는.

그래도 그렇게 되고 한동안 지0이한테만큼은 몇 번 문자를 보내긴 했었다. 성격대로라면 할머니와 외삼촌들이 너희들에게 어떻게 했는데 본데없이 구냐고 야단을 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고, 나름 점잖게 외할머니에게 전화 좀 하라고만 했다. 물론 녀석들이 그렇게 나오겠다면 외가고 뭐고 다 끊어야 하는 것 같기는한데 엄마를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는 오빠가 생각지도 않게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때였고, 그런 와중에 맏딸 내외와 절연을 해야했으니 노인네가 참 복도 지지리도 없다 싶었다. 그러니 이럴 때 조카 녀석들이라도 가끔씩 전화라도 하면 엄마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어질 텐데 그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문자를 보냈는데도 녀석은 답신은커녕 아예 내 문자를 씹는 것이었다. 나도 참 오지랖이다 싶었다. 물론 오기로 녀석에게 문자를 보낸 것도 사실이다. 과연 녀석이 얼마만에 연락을 할 건지 두고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건 또 무슨 스토킹인가 싶어 그만두었다. 대신 어떻게 애들을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았을까 언니와 형부한테 더 강한 혐오와 증오심을 불태웠다. 


그러던 중 작년엔 느닷없이 엄마가 대장암에 걸려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래도 요즘엔 의술이 좋아서 좀 늦게 발견해서 그렇지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그 수술 직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동생을 시켜서 언니한테만큼은 이 사실을 알리라고 했다. 물론 처음엔 연락하지 말라고 단속을 시켰던 것도 사실이다. 딸에게 알려지는 것까지는 좋지만 사위에게까지 알려지는 게 싫었던 것이다. 장모도 부몬데 사위가 알면 뭐가 어때서 그러는가 싶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위를 홀대해서 장모가 벌받는 거라고 생각할 것 아니냐는 거다. 그런 식으로 엄마는 원망인지 자책인지도 모를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엄마가 막상 수술을 받고 나오자 생각이 바뀐 것이다. 당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엄밀히 말하면 사위가 미운 거지 딸이 무슨 죄인가, 사위 때문에 딸조차 못 봐서야 쓰겠는가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땐 또 뭐 때문인지 동생도 크게 반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찬성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엄마가 당장 죽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고비를 넘겼는데 이제와 새삼 무슨 연락인가 싶었다. 하긴 저렇게 고비를 넘겼어도 노인네 밤새 안녕이라고 엄마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 무조건 반대하기도 뭐했다. 나야 언니와 한 배에서 나왔지만 엄마야 언니를 직접 낳지 않았는가. 
 

결국 엄마는 수술 직후 언니와 지0이를 병실에서 극적으로 만났다. 그때 나는 집을 지키고 있느라 감격적인 상봉(?)에 동참하지 못했지만, 그동안 그렇게 지0이와 엄마를 만나게 해 주려고 문자질을 해도 안 되더니 때 되면 이렇게도 만나는 걸  그동안 나는 무슨 뻘짓을 했던 걸까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 후 오래지 않아 나도 언니를 곧 만나긴 했지만,  지0이를 만나기까지는 그 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녀석은 뭐 하느라고 바쁜 건지 그때 병원을 다녀간 이후 외가엔 도무지 코빼기도 비치 않았다. 솔직히 언니와 난 자매지간이어도 어렸을 때부터 그리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만났다고 반가울 리는 없었고, 녀석에 대해선 막상 만나면 반가울 수도 있을텐데 그 때 내가 했던 뻘짓 때문인지 녀석은 선뜻 외가엘 못 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언니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동안 녀석은 나름 바쁘게 살았던 모양이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녔던 관계로 그동안 미처 다 이수하지 못한 과목의 학점을 따느라 비번 때면 그 먼 강릉을 오르내려야 했고, 그런 와중에 갑상선 항진증에도 걸려 그야말로 피똥을 싸고 살았나 보다. 그러니 외가에 언제 오겠느냐는 거다.    

 

그런데 지난봄, 엄마의 생일을 맞아 녀석이 축하전화를 했다. 물론 내가 받은 건 아니지만 곁에서 들으니, 우리들이 돈을 모아 할머니께 부쳐 드렸으니 찾아 쓰시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 말에 엄마는 입이 귀에 걸린 것이 안 봐도 보였다. 그런데 녀석의 그 말이 왠지 나에겐 들어보라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우리도 이렇게 할머니 생각하고 있다구요.'라고.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전화를 끊을 때쯤 뜬금없이 이모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엄마는 위로 반, 이해시키는 것 반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순간 마음이 묘했다. 그동안 그 뻘짓으로 인해 내가 녀석에게 얼마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까 싶었던 것이다. 단순히 짐작으로 아는 것과 이렇게 정확히 말로 들으니 가슴이 서늘해지는 게 어른 노릇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통감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은 후 가끔씩 녀석을 생각나면 불쾌해지곤 했다. 자식도 품 안에 자식이란 말이 있듯이, 이모 조카 지간도 다 어렸을 때나 그런 거지 크면 별것도 아니다 싶었다. 어떻게 제 따위가 나를 두고 감히 외할머니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생각할수록 괘씸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괘씸하면 지는 거다. 지금쯤 녀석은 외할머니 생신 날 이모인 나를 두고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내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날 녀석은 불쑥 우리 집엘 쳐들어 온 것이다.

 

4년만에 만났지만 녀석은 여전히 예뻤다. 어느덧 20대 말에 접어들었는데도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큼하고 싱그러웠다. 그래도 녀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 나이 때 내가 더 이상 젊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부디 녀석의 젊음이 오래가기를 빌어주고 싶었다. 녀석은 조카 셋 중 제 엄마도 아버지도 닮지 않은 유일한 아이이기도 했다. 닮았다면 제 친할머니를 닮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 사돈어른을 두 번 정도 뵌적이 있는데, 여성스럽고 고운 인상이 젊었을 때 미인이란 소리 꽤 듣고 살았을 것 같았다. 물론 난 형부도 언니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둘 중 아무도 닮지 않은 녀석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 나머지 두 녀석도 싫지는 않았지만 이 아이만큼 마음이 가지는 않았다. 맏이는 남자아이라 멀쑥했고, 막내는 늦둥이로 태어나 제 부모는 어떨지 몰라도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조카라 그런지 특별히 정이 갔던 것은 아니다. 성격도 제 부모를 닮아 어딘지 뚝뚝하기도 하고. 그런데 비해 녀석은 상냥하고 싹싹했다. 

언니 모녀는 바통터치라도 하듯 하나는 들어오고 하나는 나가는 형상으로, 언니는 일찌감치 안녕을 고했고 
녀석도 바쁜 건 마찬가지긴 했지만 밥 한 끼 정도는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오랜만에 저녁을 같이 했다. 그날은 또 엄마가 때이른 김장을 해 김치 속 쌈을 따로 떼어 놓고 수육 대신 돼지고기를 구워 같이 곁들여 먹었다. 녀석은 젓갈이 적당히 들어간 외할머니나 제 엄마가 한 김치를 좋아했다. 하지만 같이 지내는 친구들은 젓갈 들어간 김치를 안 좋아해 오랜만에 할머니의 김치 속 쌈을 빠져들듯이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러던 중 나는 지난여름 책을 낸 사실을 녀석에게 불쑥 꺼내고 말았다. 이건 아직 언니한테도 알리지 못한 거였다. 그걸 녀석한테만큼은 털어놓는 것을 보면 내가 아직도 녀석을 좋아하긴 좋아하는가 보다.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 마음은 또 어쩌고.  사실 지난번 추석 때 왔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언니한테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뭐 때문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한테만 알려주는 거야. 이건 엄마도 아직 몰라." 
그러자 녀석은 시쳇말로 대박사건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좋아했다.
 "책 제목이 뭐예요?"
 "네 멋대로 읽어라."
 "오, 제목 좋은데요? 절대로 안 잊어버리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그런 말 많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녀석을 깔깔대며,
 "에이, 그 말 제가 제일 먼저 했었어야 하는 건데... 이모 책 서점에서도 팔겠죠?"
녀석이 그렇게 묻는 것을 보면 저자 증정본에 저자는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자신의 책을 살 수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긴 나도 몰랐다. 책을 냈다는 이유만으로 얼마 되지도 않은 원고료를 내 책을 사는데 다 탕진해 버려야 하는 건 아닌가 했었으니까.  

 "꼭 한 번 사 볼게요."
녀석은 예의가 바른 건지 아니면 내가 어려운 건지 웬만하면 이모인 나에게 책 동냥을 할 만도 한데 그러질 않았다. 그게 또 왠지 섭섭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과연 말대로 녀석은 자기 돈을 내고 내 책을 사 볼까 의문스럽기도 했다. 나와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 축하는 해도 아직까지 사 보겠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오히려 나와 친분있는 블로거들이 사서 보겠다고 해서 좀 놀랐다. 나도 그렇긴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작가에게 공짜로 책 선물 받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녀석이 그러는 걸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꼭 읽겠다고 하면 한 권 줄 수도 있어."
 그러자 녀석은 눈을 더욱 빛내며 그제야 한 권 얻기를 간절히 바라는 표정을 지었다.
 "늦더라도 꼭 읽을게요. 제가 원래 책을 빨리 읽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나는 속으로 그건 나를 닮았구나 했다. 나는 결국 온전히 내 책으로만 담겨 있는 책 박스에서 한 권을 꺼내 첫 장에, '사랑하는 조카 지0에게. 이모가.' 그리고 그날의 날짜를 적어 한 권 줬다. 물론 내가 '사랑하는'이란 닭살 돋는 멘트를 쉽게 날리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녀석한테만큼은 하고 싶었고, 속으로 이로써 이모와 조카 지간의 지난날의 어색함은 퉁치자 했다. 나는 책을 녀석의 손에 넘겨 주면서,
 "SNS에 꼭 올려라. 친구들한테도 이모가 책을 냈다고 선전도 하고."
녀석은 방금 내 책의 홍보 요원이 된 것도 모르고 그러겠다며 좋아라 하며 친구를 만나야한다며 총총히 사라졌다.

       

나는 언니와 그다지 친하진 않지만 언니가 한 가지 잘한 일이 있다면 조카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정말 그것 하나만큼은 잘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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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7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17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프리쿠키 2016-12-17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솔한 얘기들을 들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조카처럼 저도 작가님과 이렇게 sns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stella.K 2016-12-17 18:03   좋아요 1 | URL
아유, 쑥스럽습니다.
전 쿠키님처럼 겸손하시고 친절하신 분을
이웃으로 둬서 그저 감읍할 다름입니다.
고맙습니다.^^

blanca 2016-12-17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근 차근 정경을 그리며 읽게 돼요. 그 어떤 미화된 표현보다 스텔라님의 조카에 대한 마음이 진솔하게 다가왔어요. 좋은 글 잘 읽고 가요. 제 조카 이름도 지~이라서 더 와닿아요.^^

stella.K 2016-12-18 17:49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쓰고 보니 제가 그 조카를 참 좋아하고 있었더라구요.
어른도 똑같은 마음이란 걸 그 조카가 훗날에라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어른도 사랑에 반응이 없으면 아무리 나이 어린 조카에게라도
삐질 수 있다는 걸.ㅋㅋㅋㅋ
짧지 않은 글 읽어 줘서 고마워요.
브랑카님 조카님도 지자가 들어간다니 저도 반갑네요.^^
 

 

 별점: ★★★

 

미장센이 과히 나쁘지는 않은데 스토리 전개는 어딘가 모르게 흔한 동화적이다. 굳이 제목을 정하라면 '사랑으로도 못 막은 죽음' 아니면 '사랑은 더 이상 마법이 아니다.'이랄까? 사랑으로 안락사하려는 사람의 마음을 돌이켜 죽을 때까지 잘 살았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면 이 영화는 그야말로 흔해빠진 신파가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도 끝까지 죽음의 의지를 꺾지 않기 때문에 소설이 될 수 있었고,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낭만적인 사랑이 어느 정도는 통했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는 여전히 사랑이 중요하지만 전부는 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작품이 각광을 받았다는 건 사랑 너머 더 중요한 무엇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일 게다. 그중 하나가 인간답게 죽을 권리. 안락사의 문제는 이제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이 문제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가 나오지 않고 있다가(사실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기적절하게 나와줬을 뿐) 나왔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나 같아도 내가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을 때 죽고 싶다. 살 가망이 없다면 말이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새롭게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죽을까봐 겁내하거나 생명을 경시하거나 하는 극단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뭐 이런 차원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더라도 마지막 에필로그는 안 그래도 동화적인데 굳이 없어도 되는 건 아니었나 싶다. 소똥에 미끄러져 넘어졌는데 그 자리에 금 하나가 떡하니 놓여있더라 이런 거하고 비슷한 격 아닌가? 물론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 준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별점: ★★★☆

 

한마디로 말하면, 김지운 감독의 영화는 쓸데없이 멋있다. 느와르가 다 그렇지만.

 

그의 영화는 내용이나 줄거리와 상관없이 보는 것만으로도 '그냥 잘 만든다.' 그런 생각 밖엔 들지 않는다. 제목도 잘 정했다. 첩자를 밀정이라고 하지 않나? 첩자라고 그대로 썼다면 간지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했고, 내가 좋아하는 공유가 나온다. 난 아무래도 송중기 보단 남성미 물씬한 공유가 더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 영화는 공유 보단 송강호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특히 기차신은 압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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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12-11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텔라님의 별점에 개인적으로 공감합니다.
아마 미비포유는 읽어보진 않았지만
소설이 훨씬 나았으리라 예상이 됩니다.
밀정은 송강호의 갑작스런 심경변화가
전혀 공감되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조정래의 <아리랑>에서의 밀정은 엄청 공포스런 존재에 해피엔딩은 없었으니까요.

쓸데없이 멋진 송강호를 만들려다
별점이 많이 깎였네요^^;

stella.K 2016-12-19 15:10   좋아요 1 | URL
저는 책도 그다지 안 끌리더라구요.
허리우드 영화처럼 쓰지 않았을까?
문체의 깊이 없이 영화처럼 읽히는 그렇고 그런 소설.
그런 거라면 영화로 보는 게 낫겠다 싶더군요.
참고로 남녀 주인공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송강호가 그랬나요?
저는 오히려 감독이 밀정이 누군지 관객들도 잘 못 알아 보도록
교란효과를 노렸던 건 아닌가?
아님 송강호가 피도 눈물도 없는 나쁜 놈은 아니었구나 그냥 그 정도로만
봤는데. 느와르잖아요. 깊이 생각하고 볼 영화는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그냥 김지운 감독의 똥폼이 좋았던 거죠.ㅎ

그런데 쿠키님 영화 은근 많이 보시나 봅니다.
만날 책 읽을 시간 없다고 하셔서 그런가 했는데
영화도 보시고. 하실 건 다하시는데요?ㅎㅎ

북프리쿠키 2016-12-19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텔라님~예전에 20대 초반에 똥폼잡는다고 어려운 영화들 쌓아놓고 보던 시기가 있었어요.
꾸역꾸역 보는거 있잖아요. 지겨워서 몸이 배배 꼬이는데도..ㅎㅎ
총각땐 영화 참 많이도 봤습니다.
영화나 책이나 몸을 움직이지 않는 정적인 취미라..몸을 움직이는 취미를 갖고 싶긴 한데..
타고난 게으름은 어쩔수 없나 봅니다.
직장핑계, 애핑계 이래저래 대지만 좋아하는 것은 우짜든동 시간내서 하는 것 같습니다^^;

stella.K 2016-12-19 15:15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럴 줄 알았습니다.
성격이 그런 거죠. 활동적이지 않고 정적인. 저도 그래요.ㅋ
뭐든지 한번 그러고 지나가는가 봅니다.
그래도 총각 때 영화 안 보셨으면 뭐 다른 거 하셨을 것 아닙니까?
나이 50쯤 넘어가면 또 다시 영화 보게 될 겁니다.
지금은 직장과 가정이 중요하니까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영화는 지금까지 세 번 정도 영화화 된 것 같다. TV 시리즈로도 만들어지고일단 소피 마르소가 안나 역을 맡은 버전을 뒤늦게 챙겨 봤다. 이것도 순전히 박웅현 때문이다. 물론 그는 영화로 만들어진 안나 카레니니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책에서 이 작품을 다루었고, 그의 말의 향연에 굴복해 영화라도 먼저 챙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물론  중학 시절 책을 사긴 했다하지만 두께에 압도 돼 결국 읽다가 포기했다.

 

영화가 생각 보다 그다지 감동스럽지는 않다. 박웅현은 가정을 이룬 사람이나 가정을 이룰 사람이 꼭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글쎄내가 볼 땐 이 작품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봐야할 작품은 아닌가 생각한다. 솔직히 대문호인 톨스토이를 비판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더구나 원작을 읽지 않고 영화만 보고 깐다는 게 말이 되는가 싶기도 하겠지만, 여기에서는 캐릭터에만 집중해서 보고, 작품 전체에 대한 느낌은 언제고 원작을 보고 다시 하는 걸로 하자.

 

언제나 그렇지만, 영화고 (동화를 포함한)소설이고 지간에 왜 미남과 미녀만이 사랑의 역사를 쓰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하거나 못 생긴 사람은 이야기 축에 끼지도 못하던가 끼어도 들러리다. 물론 이게 이야기의 법칙 중 하나긴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역시 또 한 번 나의 잠자고 있던 불만이 일깨워지는 느낌이었다.  

                     

 

또한 영화가 너무 연극적이다. 물론 당연한 것이고 19세기만 하더라도 낭만적인 사랑을 했을 것이다. 사랑이 전부인 것만 같고, 그 시대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로미오처럼 구애를 하고사랑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가진 그 무엇이라도 다 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다. 글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세기가 달라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 시대의 사랑을 보면 오글거리는 것도 사실이다. 또 그러니만큼 아무도 19세기적 사랑을 하지 않는다. 그저 이런 영화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거나, 그 시대엔 그렇게 사랑을 했구나 하며 신기해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난 모르긴 해도 톨스토이 할배가 여자를 잘 알고 작품을 썼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론 남자로써 여자를 그만큼 묘사한 것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시대 여자들이 뭐 그리 대단한 대우를 받고 인권을 위해 투쟁을 했겠는가. 그저 남자의 꼭두각시. 들러리 정도밖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엄밀히 말해 안나는 겉모양만 아름다울 뿐이지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결혼은 해야 하니까 했을 뿐이고, 아이는 생기니까 낳았을 뿐이며, 부잣집 귀부인이니까 그렇게 살았고, 사랑을 단호히 거부하거나 쟁취하려고도 않았다. 그저 웬 알지도 못한 장교 청년이 사랑한다니까 거부하는 척 하다가 마음을 홀랑 드러내 줬고 집에서 나가자고 하니 그러겠다고 할뿐이다. 남편은 차치하고라도 아들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선택한 사랑인데. 자식을 두고 집을 나와야 했다면 그 자식 생각해서라도 더 열심히 사랑하고 살아야 했던 것 아닌가. 물론 아들에게 다 이해받을 수는 없겠지만, 엄마도 엄마의 인생과 사랑이 있었노라고 말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난 솔직히 톨스토이가 안나를 그렇게 밖에 그리지 못한 것에 좀 화가 나기도 했다. 어쩌면 여자가 그리도 덜 여물고 멍청할까. 사랑은 선물이 아니라 선택이다. 그 나머지도 책임져야하고 감내해야 할 것들은 감내해야 한다. 사랑을 해줬더니 아들이 보고 싶다고 징징거린다. 결혼한 여자를 사랑한 것은 어떻게 책임진다고 해도 아들이 보고 싶다고 징징거리는 여자는 속수무책이다. 게다가 나중엔 아편에 중독되고 자실까지 한다. 솔직히 이런 여자를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나는 톨스토이의 의도가 읽혀지기도 하는데, 아마 톨스토이뿐만 모든 소설가가 거의 다 그럴 거라고 보는데 주인공을 어떻게 불행에 빠트릴 것인가. 될 수 있으면 처절하게 불행에 빠트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희극일 때 보다 비극일 때 더 여운이 오래남고 기억되는 것이고 보면 얼마나 잘 주인공을 불행에 잘 빠트리느냐에 따라 소설가의 능력은 입증될 수 있는 것이다. 보라. 안나를 사랑했던 장교도 그렇고, 안나의 남편도 그렇고. 얼마나 이성적이고 담담한가. 오직 안나 혼자만의 선택이고 괴로움인 것처럼 하다 죽음조차 막지 못해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가.

 

하지만 톨스토이는 안나를 그렇게 그리는 것이 논란의 여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모르긴 해도 톨스토이가 21세기를 산다면 안나 카레니나는 다른 캐릭터가 되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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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12-09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피마르소의 미모대비 작품자체는
그저 그랬습니다 저도ㅎ
키이라나이틀리 주연의 안나까레리나가
궁금해집니다^^;

stella.K 2016-12-09 19:56   좋아요 0 | URL
올레 tv 평점에서 지금까지 젤 높은 건 비비안 리가
나온 영화더군요.
암튼 비교하며 보는 것도 좋긴한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러닝 타임도 생각 보다 길지 않더군요.
꼭 긴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만
이렇게 평범한 걸 보면 충분히 표현을 못한 걸까 아니면
역시 원작을 못 뛰어넘는구나 싶기도 해요.^^

cyrus 2016-12-09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 소피 마르소의 모습이 있는 포스터가 붙여져 있어요.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저 포스터를 흘깃 쳐다보면 야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는 저 영화가 뭔지 몰랐고, 야하게 생긴 여자가 소피 마르소라는 것도 몰랐어요. ㅎㅎㅎ

stella.K 2016-12-10 13:2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좀 야하긴 하지. 근데 저 장면만 야해.
얼마나 건전한 영환데. 등급이 15세잖아.
트로이카가 있었잖아.
소피 마르소, 부룩 쉴즈. 피비 케이츠.
소피 마르소는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 같더군.
책받침 배우였짢아.ㅋㅋㅋ
 

 

박웅현의 책을 읽다가 문득 내가 이 영화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이 영화는 잘 알려진 대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 소설이 번역되어 나온 지는 대략 20년이 넘은 걸로 알고 있다한창 상종가를 치고 있었을 때 나도 한 권 사서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읽고 나서의 나의 느낌은 과유불급이었다. 비슷한 시기 나는 창작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거기서 알게 된 원생으로부터 멋모르고 말했다 어떻게 그 책을 두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고 구박 아닌 구박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죄라면 내가 유치원을 나오지 않은 것과 들은 것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지적여 보인 나의 외모 탓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거짓말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이 영화를 오래도록 보지 않고 있었던 것도 원작에서 은혜를 못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작에 훨씬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좋은 영화는 계속 줄을 이었으니 잊히는 것도 당연했다. 하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혔다 어느 날 문득 툭 튀어나와 보게 되는 게 영화 아닌가? 마치 잊힌 앨범을 생각지도 않은 때 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에 보니 왜 이 영화를 두고 사람들의 평가가 그러한지 알 것도 같다. 나는 이 영화에 별 세 개를 주겠다. 네이버 영화의 평점은 평균 네 개인데 쿤데라의 작품을 영화화 한다는 건 모험이란 점에서 다들 감히 (영화감독 나부랭이가) 쿤데라의 작품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정도 만들었다면 동정표로 네 개를 줄 수도 있겠지만 평점은 평점이다이런 쉽지 않은 원작을 별 세 개면 가히 성공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배우도 짱짱하지 않은가? 다니엘 루이스와 줄리엣 비노쉬가 출연했다는 것만으로도 이건 충분히 예술 영화로 손색이 없다.   

 

         

 

내 책에도 그런 얘기를 썼지만, 나는 문학이 영화와 이종교배가 가능한 요즘의 행태가 못 마땅했다. 물론 예술이란 측면에서 크게 보자면 필요한 일이긴 하겠지만(그리고 그것을 누구도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문학은 더 문학다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쉽게 영화화 하겠다고 덤비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화 하겠다고 하는 또라이 같은 감독이 있을 수 있는데 그가 진짜 예술을 사랑하고 영역을 확장시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그런 점에서 결코 자기를 쉬 열어 보여주지 않았던 쿤데라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고.

 

이 영화가 실패한 성공작이 될 수밖에 없는 건 문학은 문학적 서사와 문체가 있는데 이것을 영상으로 표현하려니 오히려 밋밋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서사와 문체는 작가 고유의 권한 아니던가. 박웅현의 발대로라면 쿤데라는 그 작품에서 키치를 말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선 키치 보다는 어쩐지 세 사람의 존재 방식에만 집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토마스와 테레사, 사비나. 원작엔 프란츠도 있지만 영화에선 그다지 비중 있게 나오지도 않는다. 그나마 후반으로 갈수록 영화는 토마스와 테레사에게만 집중되어 있다.

 

사실 토마스와 테레사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결코 성립될 수 있는 커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력 있는 의사와 시골 웨이트리스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점에서 키치를 말하자면 우리나라가 더 앞서는지도 모르겠다그건 또 차치하고, 언제나 그렇지만 커플은 서로 다른 점 때문에 커플이 된다토마스는 여자만 보면 환장하는 뜨거운 남자지만 테레사는 한 사람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타입이다. 누가 들으면 웃긴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난 이 영화가 사랑의 온도 맞추기 과정? 뭐 그런 거란 생각이 든다. 즉 토마스는 테레사를 만남으로 그 바람벽이 차츰 가라앉지 않는가? 테레사도 딴 남자와 관계를 갖지만 그건 그 남자가 좋아서가 아니라 토마스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다. 즉 누구는 끌어 내리고 누구는 끌어 올려 수평을 맞추는 것.

 

그렇지 않더라도 토마스의 바람벽은 언제나 갈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차츰 노쇠해지니까. 그의 뜨거움도 언젠간 식지 않겠는가. 남자와 여자는 원래 잘 맞지 않는다고 한다. 그 맞지 않는 사람끼리 맞추며 살려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그런데 그리도 철학적인 쿤데라도 극적인 것을 좋아했던 걸까? 이제 겨우 서로 행복을 느끼며 살만하다 싶을 때 토마스와 테레사는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이러한 일이 현실에서 기인된 것인지 아니면 드라마가 그러니까 현실이 따라하는 건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부모님도 그랬으니까. 20년 가까이 서로 토닥거리며 살다가 이제 겨우 부부의 정을 느낄 만하다 싶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의 오빠도 오랜 세월을 계약직으로 떠돌다 겨우 정규직으로 전환을 앞두고 홀연히 저 세상으로 갔다. 살만하던가. 생의 의미를 깨달을 즈음 돌연 죽음을 맞이하는 게 인간인 것인가 아니면 그 시기 죽음을 맞이하려니 그 죽음을 앞두고 생이 찬란해 보이는 걸까. 법정 스님이 그런 말을 했단다. “근원적으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한 날 한 시에 간 토마스와 테레사는 변화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겠지. 나의 아버지도, 오빠도. 아무튼 난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영화를 보았다.

 

거기에 러시아와 폴란드의 불안한 정세가 끼어들기도 한다. 프라하의 봄.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 이름을 따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지금 광화문과 청와대에서 데모하는 양상을 보면 정말 격세지감이다. 과연 우리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니 원작이 읽고 싶어졌다. 지난 번 윤동주의 전기 영화를 봤을 때도 그렇고 우리에게 문학은 이런 식으로 소비가 되겠구나 싶기도 하다. 어떤 건 영화를 봐도 꼭 원작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안 드는데, 어떤 영화는 꼭 원작이 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는 것. 영화와 문학이 공생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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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06 1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소설 원작의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을 먼저 봐요.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소설을 읽으면, 영화에서 원작 내용을 누락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거든요.

stella.K 2016-12-06 17:55   좋아요 0 | URL
이상적인 자세라고 생각해.
그런데 난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을 보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 그나마 원작도 잘 안 보지.
선행학습 하는 거지 뭐.ㅋㅋ

yureka01 2016-12-06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원작에 비해 실망했던 경험이 많았습니다..문학은 문학이고 영화는 영화이더군요. 실제 그런 영화평도 좀 있긴 하거든요.

stella.K 2016-12-06 17:59   좋아요 1 | URL
그건 그래요. 그런데 이젠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어요.
영화 작업은 원작과 다른 재창조 작업은 아닐까 그러니까 어떤
작품은 원작과 다른 것으로 봐야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요.

북프리쿠키 2016-12-06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중에
기억에 남는 영화는 <향수>가 떠오르는군요.
문학과 영화는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지만
스텔라님 말씀처럼 원작과는 다른 재창조의 새로운 분야이기에 그저 원작만을 충실히 따르는 영화는 십중팔구 실패할 위험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파트리크쥐스킨트의 <향수>의 영화화는 예술이었습니다ㅎ

stella.K 2016-12-07 13:28   좋아요 1 | URL
아, 맞아요. 저도 향수 봤어요.
그로테스크한 게 정말 잘 만든 영화죠.

아무래도 원작과 좀 달라야 문학은 문학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이문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너무 같아 버리면 사람들은 둘 중 하나만 보지 않겠어요?
그게 영화일 확률은 아주 높을테고...ㅋ

hnine 2016-12-08 2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대학생때였던가, 극장에 혼자 가서 봤는데 그때만해도 영화가 너무 적나라하다고, 소위 야한 영화라고 혼자 보며 당황했더랍니다 ㅋㅋ
저 난해한 영화 제목, 지금도 완전히 이해못하겠어요.

오~~ 영화 안나 카레리나에서 소피 마르소로 대문 사진을 바꾸셨네요!

올해가 stella님에게는 잊지 못할 한해가 되겠어요. 더 좋은 일 많이 많이 생기길 바랍니다.


stella.K 2016-12-09 19:2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솔직히 지금도 그렇게 밖에는 봐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포르노와 에로는 한끗 차이라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ㅋㅋ
소설도 만만찮게 어렵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지금 다시 읽으면 좋아지려나 모르겠어요.

엊그제 안나 카레니나 봤는데 소피 마르소가 정말 예쁘게 나와
잠깐만 걸어 두기로 했어요.ㅎ

올해는 좀 남다르긴 했어요. 고맙습니다.
h님도 한해 마무리 잘 하십시오.^^



2016-12-09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09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6-12-09 1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저는 책으로 읽었어요.
아무리 원작이 있어도 영화는 감독의 새로운 작품이겠지요.
예전에 박완서 작가인 것 같은데 자기 작품을 원작으로 해서 만든 드라마가 맘에 안 들면 화를 내기도 했대나 봐요. 원래의 자기 작품과 다르다는 것이죠. 그런데 드라마는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라는 걸 받아들인 다음부턴 상관하지 않았다는 그런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네요.

잘 지내죠?

stella.K 2016-12-09 14:1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심지어 예전에 저 연극할 때 제 작품 연출가가
지 맘대로 재단해서 작품이라고 올리는데 화가 나더라구요.
이런 식일 것 같으면 작가가 뭐가 필요하냐고
노발대발 했는데 나중에 지내놓고 보니 그것도 내 작품에 대한 하나의
해석일뿐인데 내가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후회가 되더군요.
그 친구한테 좀 미안했어요.
작가의 작품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자기 작품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걸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어요.ㅠㅋ
 

1
지난여름부터 다롱이가 내 방에 들어와 자지 않는다. 다롱이는 요크셔테리어 수컷으로 벌써 13년째 키우고 있는 반려견이다. 생후 2개월이 채 될까 말까 했을 때 사촌 고모가 우리 집에 반강제적으로 떠맡겨 키우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개를 좋아해 우리 집이 줄곧 개를 키워 온 건 사실이지만, 오빠의 사업 실패로 가산을 말아 먹고 지금의 다세대 주택으로 이사를 온 후 더 이상 개를 키우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무슨 미친 운명인지 모르겠다. 개 없이 3년을 버티고 견뎠건만 역시 개를 키우던 집은 어떻게든 다시 키우게 마련인가 보다 했다.  

 

개가 없으면 집안은 깨끗해서 좋긴 한데 그 삭막함은 느껴 본 사람만 안다. 어쨌거나 개를 다시 키우게 되니 정막 했던 집안이 생기가 도는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요크셔테리어 종이 그렇듯 다롱이는 잔신경이 많아서 밤이고 낮이고 현관 출입문을 공략했다. 그러는 통해 거실에 침대를 두고 줄곧 거기서만 생활하는 엄마로선 밤이면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는 밤이면 녀석을 직접 들어다 내 방에 눕히곤 했다. 이것을 한동안 하고 나니 언제부턴가 녀석은 알아서 제 발로 내 방에 들어와 자기 시작했다. 내 방이 제가 잘 곳이라는 걸 안 것이다. 밤에 잠자기 전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이 살짝 들어와 자는데 얼마나 기특하고 사랑스러운지. 그래. 너는 역시 파블로프 개의 후예였어.” 하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 자신에 대해서도 뿌듯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조선시대엔 반상의 법도가 있듯 예전엔 개가 아무리 좋아도 개와 사람이 한 공간에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을 시절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애견 산업이 팽창하면서 그건 예사로운 일이 됐다. 뭐 개를 한 공간 안에서 키울 수 있다고 치자. 개를 한 이불 속에서 잔다? 정신 차리고 생각하면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든다. 개에게도 자기 집이 있어 잠만큼은 꼭 거기서 자도록 훈련시켜야 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긴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이 나곤 한다. 워낙 깔끔하신 분이셨다. 살아생전 아들 집에 놀러 왔다가 개를 안에서 키우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그렇다고 그 앞에선 뭐라 할 수는 없고(아들, 손주들이 좋아한다는데 그것을 뭐라 말하랴), 당신 집으로 돌아가 알만한 사람을 붙들고 얼마나 말이 많았을까, 안 봐도 훤하다. 더구나 그런 개를 한 이불을 덮고 잔다고 하면 지금도 저세상에서 혀를 끌끌 차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쩌랴 추운 겨울이면 녀석이 춥다고 이불 속을 자꾸 파고 들어오는 걸.

 

그래서 말인데, 사랑은 가는 사랑 보다 오는 사랑이 훨씬 더 강하다. 사랑해서 스킨십을 할까? 아닐 수도 있다. 스킨십을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외삼촌의 아이들을 꼭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그것도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다. 미국에 사는 외삼촌이 아이들을 데리고 잠시 귀국했다. 미국 사람들이 워낙 스킨십의 대가들 아닌가. 첫째가 딸이었는데(워낙 오래된 일이라 이름도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를 보자마자 좋다고 모가지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고 하는데 그 순간 무장해제되는 느낌이었다사람도 이럴진대 그 작고 앙증맞은 존재가 이불 속을 파고드는데 무엇으로 내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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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게 나에 의해서 길들여졌다고 생각했던 다롱이가 지난여름이 되면서 나를 배반한 것이다. 더워도 너무 더운 게 화근이었다아무리 더워도 밤에 잘 때 방문을 열어 놓고 잘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창문은 조금 열어 놓고 자긴 한다. 방문을 꼭 닫고 자는 건 다롱이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지 않으면 왠지 녀석이 자다가 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면 그동안 내 방에 자도록 훈련시켜 놓은 게 일순간 무너질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이른 아침까지 내 방에서 자는 습관이 무너지고,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몽유병 환자처럼 어슬렁 돌아다니거나 시도 때도 없이 현관 밖에서 무슨 소리만 나도 벼락같이 짖을 것이다.  그러면 애초 녀석을 키우기 시작했을 때 엄마의 불평을 다시 듣게 될 것이다.

 

사실 13년 동안 한 방에서 자면서 내가 편하게만 잤던 건 아니다. 봄이나 여름 같은 경우 해가 일찍 뜨는 관계로 녀석의 각성 시간이 빨라지면, 나는 새벽에 잠이 쏟아지는데 자기는 다 잤으니 문 열어 달라고 문을 박박 긁으면 열어 주지 않고는 못 배긴다. 물론 닦달질해서 얼마를 잡아 둘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 잡아 놓느니 얼른 열어주고 다시 잠을 자는 것이 더 낫다. 어떨 때 자다가 깨면 주객전도라고, 녀석이 이불 한가운데 떡 버티고 자고 나는 그 가장자리로 밀려나 잘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녀석과 같이 자서 불편하기 보다 녀석의 그 꼬물락거리는 게 좋아 여태 데리고 잔 것이다. 녀석이 얼마나 훈련이 잘 되어 있냐면, 어쩌다 새벽에 화장실을 가게 되면 내가 나올 때까지 그 앞에 기다리고 있다 나오면 다시 들어가 자곤 했다.

 

그런데 뭐든지 뜻을 이루려면 0.1mm의 틈도 잘 노려야 한다.
솔직히 녀석도 내 방에 들어와 자는 것이 썩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겨울 같은 경우 비교적 해도 늦게 떠오르고 이불 속에 푹 감겨 자느라 늦게까지 잔다고 하지만, 여름은 아무래도 들어와 자는 게 갑갑했을 것이다. 그래도 내 방에 들어와 자는 게 의무니 어쩔 수 없이 자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문고리 잡고 문 열어 주기가 싫어 언제부턴가 문을 느슨하게 닫고 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는 아직 살인적인 더위가 몰려오기 전이었다. 그때부터 녀석은 잔머리를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단 내 방에 들어와 자는 척하고 2, 3 시간 자고 나면 그 조금 느슨하게 닫힌 문을 공약하는 것이다. 어쨌든 난 오늘도 이 방에 들어와 잤으니 이제 문 열어 주시오 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그 시간이 새벽 1시도 됐고, 2시도 됐다. 그렇게 같은 시간에 나를 괴롭히고 이내 살인적인 열대야가 시작됐으니 내 방에 꼭 들어와 자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았다. 더워서 문을 열어 놓고 자는데 굳이 내가 그 방에 들어가 잘 필요가 있느냐는 뜻으로 버티는 것이다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배반이 아닐지도 모른다. 열대야는 예전에도 있었다. 그래서 방문을 열어 놓고 잔 때도 있었다. 그땐 세상없어도 잠은 자던 데서 자야 한다는 생각에 내 방에서 잤을 것이다. 그런 녀석이 이제 나이도 먹고 늙으니 그런 식으로 해이해진 것 같다.

 

이때부터 녀석은 너무나 당당하게 엄마의 침대에서 자기 시작했다. 그 꼬락서니를 보니 그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나와 어떻게 잠을 잤을까 배신감도 느껴지고 괜히 민망한 느낌도 교차했다. 그러면서 녀석이 이제 살면 얼마나 살겠나 이제부터라도 자고 싶은 곳에서 맘대로 자도록 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기도 했다. 그리고 엄마가 말은 그렇게 해도 잠이 없고 보면 엄마한테도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TV가 종일 방송을 시작하고부터 그 적적한 불면의 밤을 한결 수월하게 보내겠지만 그래도 그것도 생명 없는 물체이고 보면 그래도 살아 꼬물락거리는 생명체가 더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쩌다 잠결에 깨서 바깥에서 엄마가 다롱이에게 뭐라고 말을 하며 뚜덕이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면 역시 내가 녀석을 엄마에게 양보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사실 이 생각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처음 다롱이를 데리고 잘 때부터도 내가 엄마한테 너무 야박하게 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었다 
아유, 이놈의 새끼 때문에 이불 속에서 다리도 맘대로 못 뻗겠고 아주 불편해 죽겠어. 다시 네 방에서 잤으면 좋겠어.”
연로해지면서 불평이 많아진 엄마는 어느 날 결국 한 마디 하는 것이었다.
자식이 네 방에서 잘 땐 몰랐는데 괜히 밤에도 잠을 못 자면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고, 오줌 안 쌀 것도 싸서 화장실에서 냄새만 풍기고...”

 

엄마한테서 그런 말을 들으니 좀 의외긴 했지만 한편 반갑기도 했다. 솔직히 다롱이를 다시 데리고 잤으면 했는데 이렇다 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 그럼 더위도 한 풀 꺾였겠다 다시 내가 데리고 자 보지 뭐.”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자기 전에 엄마 침대에서 자는 다롱이를 불러들였다. 그러자 다롱이는 그동안 안 불러줘서 못 잤다는 듯 내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역시 개는 개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자던 자리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불을 끄고 자려니 조금 있다 녀석은 부스스 일어나 이곳저곳을 퀵퀵대며 무슨 냄새를 맡는 척하다가 결국 방을 나가겠다고 방문을 긁적거리는 것이었다. 그건 또 다롱이가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하기에 눈치가 보인다 싶을 때 하는 주특기이기도 했다나는 몇 번 종주먹을 댔지만 무엇으로 녀석의 고집은 쉬 꺾이지 않았다. 결국 더 이상 못 버티고 방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전에는 그렇게 하면 들어먹기도 했지만 나와는 벌써 꽤 오래 떨어져서 잤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내 말은 듣지 않았다.

 

아침에 엄마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어젯밤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엄마는 다롱이를 나무라기는커녕 나에게 힐난조로,
너도 참 순진하기도 하다. 다롱이의 고집을 누가 꺾겠니?”
아니, 엄마가 그랬잖아. 내 방에 들어가 잤으면 좋겠다고.”
그거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다롱이가 들어 먹겠니?”
엄마는 그러더니 자는 척하는 다롱이를 쓰다듬으며,
그렇지 다롱아. 너 사람 말 원래 안 듣지?”
하는데 엄마는 그런 식으로 나를 놀리는 것이다. 

 

나는 엄마와 그렇게 오래도록 같이 살았으면서도 가끔 이해 못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럴 때다. 기껏 엄마 생각해서 한 일인데 이럴 땐 딴소리를 한다. 다롱이는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의 손길 따라 몇 번 꾸물거리더니 이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무래도 어제 나와 실랑이를 한 피곤이 아직 안 풀렸다는 뜻 같기도 할 것이다. 나만 다롱이를 잡아 끄는 것이 아니라 엄마도 같이 몰아주면 말을 들을 것도 같은데 엄마는 현재로선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동안 이 집에서 녀석의 영토만 넓혀준 것 같다. 어쩌다 사람이 개의 눈치를 살피는 존재가 되어버렸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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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16-12-05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찡하네요. 엄마의 마음이 ^^

stella.K 2016-12-05 14:53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누구든 아무리 오래 같이 살아도 모를 게
사람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흐~

페크pek0501 2016-12-09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의 스텔라 님의 댓글을 보니깐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게 인간이라는 말을 하고 싶군요. ㅋ

stella.K 2016-12-09 14:07   좋아요 0 | URL
같이 살면 살수록 모르겠는 게 사람인 것 같아요.
그게 심지어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라도 말이지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