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는 꼭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었다.
이런 영화를 꼭 봐야한다면 그 이유가 같은 것처럼, 이 영화를 보고 싶지 않다면 그 이유도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그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란 뜻일 것이다. 그래도 봐야한다면 나는 나문희란 배우 때문에 봐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결국 난 나문희란 배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말았다.
사실 노년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키려고 온갖 미사여구와 수식어를 갖다 부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래봤자 어떻게 하면 그 늙지 않게 보일 수 있을까의 다름 아니겠는가? 그런 것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잘 늙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거나, 노년도 자본주의로 떡칠을 하라고 부추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문희란 배우는 요즘의 (늙음의)미의 기준으로 볼 때 턱 없이 모자라는 배우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뽀글이 파마도 그렇고, 노인치곤 골격도 큰 편이며, 축 늘어진 목이나 갈퀴 같은 큰손 어느 것 하나 매력적인 게 없다. 그런데도 난 그가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는 빼놓치 않고 봤다면 거짓말이고, 아무튼 거의 챙겨보는 것도 사실이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신뢰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신뢰는 어디서부 나오는 걸까?
물론 노배우는 나문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도 브라운관을 사로잡는 일군의 노배우들이 있다. 난 그들의 힘주지 않는 연기가 좋다. 브라운관이 아닌 곳에서도 저렇게 살고 있을 것만 같다. 그걸 두고 관록이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이유 때문에 난 나문희 배우가 여러 가지 외모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이다. 또 그런 만큼 자본주의 안티에이징을 비판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사느라고 힘들었다. 늙어서 치장 거야 그 사람의 자유고 그래서 나쁘게 보일 건 없지만, 적어도 그런 사람 때문에 노화를 흉한 것으로 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남한테 크게 피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노화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봐야하는 것 아닌가.
오늘 날처럼 노인이 대우받지 못하는 때가 또 있을까? 옛날엔 충효 사상에 입각하여 노인이 존경을 받는 시절이 있었다. 자본주의가 도래하고 노동 시장이 확대되면서 그야말로 노인은 퇴물이 되고 말았다. 이제 노인은 쓸모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일까?
영화속 주인공 옥분은 노구에 수선집을 하면서 혼자 살고 있다. 늙었으니 편히 살아도 좋으련만 수선집이야 입에 풀칠은 해야 했으니 차마 놓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상가를 돌아 다니며 무슨 문제가 있으면 일일이 참견하고 구청에 민원을 넣고 그것으로인해 구청 직원들 사이에선 진상으로 통한다. 또한 그것이 노인네가 외로워서 그런 거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는 그런 옥분 할머니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것을 귀찮아하고 진상으로 보는 젊은이의 시각이 더 문제는 아닌지를 시종일관 주지 시킨다(난 이런 감독의 시선이 마음에 든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건 확실히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노인은 굼뜨다, 둔하다, 현실 감각이 없다. 그런 말이 과연 맞는 말일까? 자기 일 외에 나머지 것들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는 젊은 사람들이 더 문제는 아닐까?
그런데 옥분 할머니는 또 미스터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늘그막에 영어는 배워 뭐에 쓴다냐? 편하게 살지. 하지만 이것도 사회적 편견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영어를 잘한 채로 노년이 된 사람에겐 나름 존경을 표하지만, 많이 배울 것 같지 않으면서 갑자기 영어를 배우겠다고 하면 노망으로 본다. 왜 그럴까? 늘그막에 공부한다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안쓰러운 것이다. 암기력이 바닥을 친다. 가르쳐 달라고 졸라 댈까봐 겁이나는 것이다. 귀찮고, 잘 가르칠 자신도 없고. 더 나가서는 자신도 늙으면 좀 편히 살고 싶은데 늙어서도 뭔가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책임 의식도 무의식중 작용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사람쳐 놓고 늙은 사람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알게 모르게 구박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노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답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남이 뭐라 건 하고 싶은대로 하라다. 어차피 답이 없는 인생을 사는 건 늙으나 젊으나 똑같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왜 남의 눈치를 봐야하는 건가.
답이 없는 인생을 살아도 이유가 없는 삶은 없다. 옥분이 미스터리한 건 노인이 다 그럴 것이라고 하는 편견에 사로잡힌 일반적 시각 때문이다.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가 옥분이 왜 영어를 배우려고 하는지를 선남이 선녀에게 첫눈에 반하는 것만큼이나 빨리 알았다면 이 영화의 러닝 타임은 훨씬 더 줄어 들었을지도 모른다.
옥분에겐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오래 전 헤어진 미국에 사는 남동생과 대화 한 번 잘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동생은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 모르긴 해도 처음 옥분 할멈은 사는 동안은 동생을 만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지구 반대편 어디쯤에 피를 나눈 형제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 받고 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노년이 되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마음이 죽기 전에 동생을 한 번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고 그래서 영어를 배울 마음을 먹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런 이유와 목적이 있는 한 암기력 때문에 영어를 공부하지 못하겠다는 말은 더 이상 이유가 되지 않는다.
영어를 잘하는 반듯한 청년 민재가 처음엔 할머니의 영어 가르치기를 거절하다 어떻게 마음을 고쳐 먹고 독선생이 됐는지의 사정은 차치하고라도, 그의 영어 가르치기는 가히 박수를 받을만 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선생님이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다는 옥분 할머니야 말고 최고의 학생은 아닐까. 하다못해 외국인이 많이 모이는 클럽에 가서 외국인과 5분, 10분 동안 대화하고 오기를 기어코 해 내고야 마니 말이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가? 그것만큼은 시키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노인은 젊은이들 보다 친화력이 더 좋을 수 있다. 젊은이들은 그 자유로움 때문에 사람들을 금방 사귀고 친해진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난 옥분 할멈이 영어를 공부하는 것을 보고 좀 찔렸다. 저런 노인도 하는데 왜 나는 영어에 이렇게 관심이 없을까? 이유는 하나다. 옥분처럼 이유와 목적이 없거나 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유와 목적만으로도 그꿈은 이루지 못할 때가 있다.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게 될지라도 동생을 만나고자 하는 의지가 마지막 순간에 꺾일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절박함이다. 절박함은 모든 것을 해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게 옥분으로선 친구를 대신해 미국 의회에서 일제가 저지른 위안부 만행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생을 만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절박함이 있어야 뭔가를 해도 해낸다.
물론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또 적지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왜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하기도 한다. 언젠간 써 먹겠지 하며 하는 것이다. 남들이 하니까 하고. 그래서 좀 소모적이란 느낌도 없지 않다. 이것을 또 국가 경쟁력으로까지 확대 해석하면 답이 없다. 그냥 해야하는 거니까 하는 것이다. 또 그래서 말인데, 지금 우리나라는 유치원 영어 수업 금지 찬반 양론이 뜨거운데 이건 확실히 넌센스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유치원 영어 수업 금지라니. 없었던 거라면 모를까 이미 있어왔던 걸 없애버리는 게 과연 가능할까? 교육부는 우리나라 교육열을 너무 만만히 보는 것 같다.
어쨌거나 나에게도 옥분과 같은 절박함이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난 내가 영어를 못해서 그런지 영어 회의론자에 가깝다. 솔직히 그거 강대국의 패권주의에서 나온 거 아닌가? 그 패권이 바뀌면 어떤 언어가 만국 공통어가 될지 모른다. 그런데 영어에 목숨 건다는 게 웬지 과거 일제가 우리나라 말을 말살하고 이름마져 고쳐 쓰도록 만든 그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일본어는 강제였지만 영어는 많은 나라에서 쓰니까 정서적 합의가 있는 거 아니냐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자국의 언어를 자의적으로 속박시키거나 비하하게 만드는 건 아닐지. 그러니까 내 말은 영어를 배우는 건 자유고 권리이듯 영어를 배우지 않는 것도 자유고 권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영어 못하는 것이 구박의 사유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 옥분 할머니가 미국 의회에서 영어로 연설하는 장면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아, 정말 이런 중대 사안은 당사자가 영어로 하는 것이 더 호소력이 있는 것이겠구나. 그렇다면 영어를 배우는 게 유리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한 나라의 국가 원수도 영어에 아무리 능통해도 정상끼리 만날 땐 자국어를 쓰고 통역에 의해서 소통을 한다고 한다. 그것에 관해선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옥분 할머니의 경우도 영어를 안 한다고 해서 그게 전혀 결례가 되거나 호소력을 약화시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이러면 국수주의라고 하려나?ㅠ). 이건 그저 영화를 볼 때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장치로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삶에 대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면 늙어도 늙는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즈음 노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든 다 늙는다. 그것은 단순히 노화를 겪는다는 것과는 다른 것일 게다. 노인이 된다는 건 관록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고, 지혜의 사람이 된다는 것일 게다. 또한 옥분 할멈이 민재 형제에게 밥을 지어 먹이고, 구청에 민원을 넣는 것에서 세상에 좀 더 관심을 갖는다는 것의 다른 말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그늘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노인이 되면 어떤 모습이 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가를 생각하는 건 가급적 젊은 시절부터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늙어도 자신을 잃지 않으며 멋있게 늙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늙어서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그건 큰 오산이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 굴지의 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보면 정말 받을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제훈이란 배우와 함께 세대를 뛰어 넘은 연기를 펼쳤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런 로맨스 영화가 아니란 것이 나에겐 오히려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몇몇 장면은 좀 익숙한 클리셰란 느낌도 들지만 전체적으론 짜임새 있는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많이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