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고 김주혁의 마지막 유작 중 하나라서일까? 아니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흥부전'을 재해석 했다고 해서일까? 살짝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평점은 생각 보다 그리 높지는 않았다. 결국 감안해서 봐야했다. 

 

얼핏 <왕의 남자>가 생각나는 영화다. 그건 아마도 정진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보단 남사당패가 임금 앞에서 연회를 한다는 설정이 같아서가 맞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두 영화 모두는 백성이 곧 나라의 근간임을 바탕에 깔고 있기도 하다. 그런 비슷함 때문에 혹시 감독이 같은가 했더니 아니다. <왕의 남자>는 이준익 감독임을 잊고 있었다.

 

시도는 좋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흥부전의 재해석이다. 이 얼마나 신선한 발상인가?

더구나 '글로 세상을 바꾼 자'란 부제가 있다. 정말 그럴까?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헌종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 시절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게 뭐 그리 많았겠는가? 글을 깨친 사람도 그리 많지도 았았을 때이니. 그러므로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도 같다.

 

난 특히 흥부(정우 분)가 비록 청탁 글이긴 하지만 어떤 영감을 받아 미친 듯이 써 나가는 장면을 보면서 부럽지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작가는 누군가가 자신을 몰아치는 듯한 느낌으로 글을 썼다고도 하던데, 왜 그 놈의 영감은 나에겐 없는지 모르겠다. 특히 우리가 잘 아는대로 흥부전에선 자기 형수가 휘두른 밥주걱에 흥부가 얼굴에 붙은 밥풀을 먹지만, 이 영화에선 당대 간신 조항리(정진영 분)의 동생 조혁(김주혁 분)이 그것을 대신하고, 그것을 흥부가 자신이 쓴 <흥부뎐>에 에피소드로 쓰고 있다. 그 얼마나 참신한 발상인가.  

 

누군가 성령을 받을래? 잡스럽지만 영감을 받을래? 하면 난 어떤 영을 선택할까?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선택이 불가하다. 성령을 받으면 이 세상에선 그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다 천국으로 가지만, 영감을 받으면 우리나라의 6백 년된 소나무처럼 죽지도 못하고 계속 산다면 글쎄.. 그래도 후자를 택하게 되지 않을까? 글이야 쓰니까 먹고는 살겠지. 까이 꺼 600년..? 눈 깜짝할 새다.ㅋ 그래도 이 나이 먹도록 아무 일도 없는 것을 보면 헛된 공상이지 뭐냐? 그냥 성령 받고 죽어 천국 가는 게 맞을 듯 싶다.ㅠ

 

이 영화는 완급조절에도 실패한 영화다. 조금 더 디테일 했더라면 좋았을텐데 뭔가 시간에 쫓기는 듯도 하고, 전반적으로도 앞에서 말했던 것을 제외하면 이야기도 그다지 새롭지 않다. 

 

사실 난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체로 긍정하는 쪽이다. 그렇지 않다면 작가는 더 이상 존재치 말아야 하는지. 또한 글로 세상을 바꾸는 건 주로 필화 사건으로다. 이것을 통해 역사에 묻힐뻔한 사건들이 수면 위로 부각이 되기도 했다. 문득 보고 있는데 김지하 시인의 <오적>이 생각나기도 했다. 80년 대 민주화 운동 때 <오적>에 필적할만한 글을 쓰다 감옥에 들어 간 작가도 많고. 저항할 것이 아니라면 작가들이 뭐 때문에 글을 쓰겠는가?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더니 그나마 이 영화는 고 김주혁이 살린 영화라고나 할까? 그가 죽지 않았다면 범작에 그쳤겠지. 난 아직도 이 배우가 고인이 된 것이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어디에선가 영화를 찍고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그리도 짧은 생을 살다가 말도 없이 세상을 훌쩍 떠나간 건지. 또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 보다 늦게 세상에 와서 일찍 세상을 떠나 갔을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왜 또 오늘을 살고 있을까 싶다. 

 

그나마 마지막 엔딩이 그의 죽음을 예견했을까? 흥부가 모든 것을 종결하고 세상을 주유할 때 이미 세상을 떠난 조혁에게(그는 형 조항리의 칼에 맞아 죽는다) 어르신, 그곳은 행복하시오? 할 때 조혁이 행복은 무슨...하며, 행복할 것도 불행할 것도 없으니 꿈을 꾸라고 말한다. 김주혁의 말이기도 했을까?

 

이 영화엔 요즘 대세 국민 남동생 정해인이 헌종으로 나온다. 그는 아무래도 난 놈(?)임엔 틀림없는 것 같긴하다. 관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은 귀골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특이한 건 가수 김완선이 대비 역으로 나왔는 게 좀 놀라웠다. 별로 대비스럽진 않지만 연기를 못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맞는 역할을 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성희롱 사건에 휘말렸나 본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몸 가짐, 마음 가짐 잘해야지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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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5-03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식을 전해 듣고 젊은 분의 죽음이 참 안타깝다고 생각했어요.

글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저의 대답 : 당연히 변화시켜야 하죠. 그렇게 믿어요.

좋은 글은 세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글인데. (남들이 못한 것을) 제대로 해석하기만 해도 좋은 글이고, (남들이 놓친 것을) 문제 제기만 해도 좋은 글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우선 무엇에 대해 제대로 해석해야 하고
거기서 무엇이 문제인지 문제 제기를 해야 하고...
그러면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참고로, 저는 칼럼 한 편을 읽고 인식의 변화를 가진 경험이 있습니다.
미투 운동에 대해 쓴 글도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깨우침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을 소설로, 또는 영화로 만들어도 마찬가지의 효과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2018-05-03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3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3 1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18-05-05 0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는 사람이 적은 세상이라서 오히려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씀이 참 역설적이면서도 탁월합니다. 한번도 생각 못했던 관점이네요. 글읽는 사람이 많아도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도 하니 결국 ‘글로 세상을 바꾸는‘건 가능하네요.ㅎㅎ 저도 후자를 선택하겠습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600년은 모르겠지만 대량 30-40대의 나이에 머물면서 highlander처럼 600년 정도 살면서 다가올 미래를 보면 즐거울 것 같습니다. 아무렴 똥밭을 굴러도 이승이란 말이 괜히 나왔겠습니까??ㅎㅎㅎ

stella.K 2018-05-05 18:48   좋아요 0 | URL
그러시면서 좋아요는 없으시다니. 섭섭한데요?ㅠㅎㅎㅎ

저 자신으론 80년 살면 잘 사는 거겠지 하다가도
작가라면 나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궁금하거든면
600년 살면서 그 변해가는 세상을 글로 남기고 싶더라구요.^^

서니데이 2018-05-08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드라마와 영화에서 정해인씨가 많이 보이는 것 같은데요. 이 영화에서도 나오는 모양이네요.
언제 처음 봤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드라마였던 것 같기도 하고, 영화였던 것 같기도 하고요.^^
stella.K님, 연휴 즐겁게 보내셨나요.
오늘은 따뜻하고(조금 덥고), 바람불면 시원하고(조금 춥고) 구름도 많이 지나가는 날이예요.
기분 좋은 하루 보내세요.^^

stella.K 2018-05-08 19:22   좋아요 1 | URL
아, 서니님! 잘 지내죠?
정해인 탄탄한 조연 시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전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봤어요.
누구하고 좀 닮아서 헷갈렸는데 그게
샤이니의 이준호는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비교해 보면 이준호가 훨씬 빠지더군요.ㅎㅎ

cf도 점령했잖아요. 한동안 자주 볼 것 같아요.
옛날에 이승기 못지 않은 인기를 구가할듯.
인기있을 때 바짝 조이겠죠.ㅋ

오늘은 날씨가 좀 꾸물꾸물했네요.^^
 

 

 

 

난 노희경 빠다. 그런 내가 이 드라마를 안 볼 리가 없다. 물론 노희경 말고도 잘 쓰는 작가들은 많다. 하지만 작품은 항상 좋은 건 아니다. 그래서 가끔은 보다가 다른 데로 채널을 돌리거나 영화를 본다. 하지만 노희경 작가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난 이 작가가 김수현 작가만큼이나 아니 그 보다 오래 작품을 썼으면 좋겠다.

 

노희경 작가는 이번엔 경찰 지구대를 배경으로 드라마를 썼다. 이 작가는 또 언제 거친 경찰 지구대를 조사를 했을까? 놀랍기도 하다.

 

드라마의 기능중 하나는 사회적 기능일 것이다. 이 드라마는 어쩌면 그녀가 쓴 작품중 가장 사회성이 짙은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요즘  한창 이슈인 미투 운동에 부응이라도 하듯 성폭력을 다루기도 한다. 물론 지금까지 드라마가 직간접적으로 여성의 성폭력을 다뤄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미투 운동 때문일까? 노 작가가 성폭력을 다뤘다는 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지구대 시보인 한정오(정유미 분)는 고등학교 때 성폭력을 당한 전력이 있다. 단순히 스펙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경찰 시험을 통과했을 때만해도 성폭력 사건은 그녀가 수시로 접해야 할 사건이라는 걸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사건을 다룰 때마다 옛 상처가 건드려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 그녀가 경찰로서 일하려면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진정한 경찰로 거듭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난 13회였던가? 어느 학교에서 성폭행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건을 지구대에서 초동대처를 잘해 무사히 잘 넘어갔다. 그로인해 그 학교 학부모들은 지구대 경찰관들이 치하를 받는 자리를 마련했고, 그 자리에 한정오도 함께한다. 그때 한 학부모였던가? 아이들이 성폭행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지구대 사람들에게 형식적인 조언을 부탁한다. 그러자 그들 역시 형식적인 답변을 하거나 그냥 넘겨버릴 뿐인데 유독 한정오는 심각한 어조로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해 오히려 학부모들로부터 심한 질타를 받는다.

 

한정오는 좀 더 적극적인 성교육을 통해 성폭력에 취약한 학생들을 보호하자는 취지였는데, 오히려 듣는 학부모는 마치 한정오가 자신의 아이가 잠재적 가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아 반발을 한 것이다. 단순한 반발이 아니라 징계를 받도록하겠다고 들고 일어나는 정도가 되어버리고 만다.

 

사실 한정오의 입장에선 경험(?)에서 나온 실질적인 조언이었임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들은 성폭행이 날로 심해져 가는 것은 알겠는데 설마 내 아이가 성폭행 가해자나 또는 피해자가 될 거라고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성폭행은 가해든 피해든 다 남의 일인 것이다. 

 

한정오의 조언 중에 남자 아이들도 이젠 콘돔 사용법을 익혀야 하고, 학교에서도 이를 적극 가르쳐 줘야한다고 했다. 그리고 혹시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된다면 사후 피임약을 사용할 것을 홍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조언을 들을 준비가 안 돼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정말 우리나라 성교육의 실태는 어디까지 왔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난 얼마 전에 읽은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은 질문들>이 생각이 났다.

 

부모가 내 아이를 붙들고 성교육을 가르칠 수 없으니 학교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조차 제대로 가르칠 리 만무하다. 결국 아이들은 야동을 통해 배운다. 그러나 야동은 야동일뿐 그건 성교육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내 아이는 야동도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대다수다. 학교에서 가르친다고 해도 적극적이 아닌 소극적인 대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성폭행을 어디서부터 줄여 나가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만일 우리나라 부모들이 이 책에서 소개한 뉴질랜드의 진보적인 성교육 방법을 소개 받는다면 어떨 것인지 일견 궁금하기도 하다.

 

네덜란드 정부는 22세 모든 여성이 부모의 동의 없이도 무료로 골반 검사, 피임, 낙태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중략) 또한 네덜란드에서는 친밀한 신체 접촉을 할 때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자위와 오럴 섹스, 동성애, 오르가슴을 공개적인 토론 주제로 삼았다. (중략) 네덜란드 정부는 성교육 커리큘럼에 상호작용기술을 추가하여 어떻게 하면 기분 좋은지 상대방에게 정확히 전달하는법과 분명하게 경계선을 긋는 법을 가르쳤다. 그 결과 2005년에는 네덜란드 청소년 다섯 명중 네 명이 첫 번째 성경험은 자신이 한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즐거웠다고 답하게 되었다.(351~352p)  

 

나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노 작가가 그 부분을 다룰 때 혹시 이 책을 참조하여 쓰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이 책 생각이 많이 났다. 사실 이 책은 성교육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교육을 성교육에서부터 담아내자는 취지가 더 강하다. 그리고 꼭 우리나라가 네덜란드의 성교육 방법을 따라가자는 것도 아니다. 분명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에 맞는 성교육이 있을 것이다. 그게 좀 더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정말 우리의 아이들이 콘돔 사용법을 알게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더 빈번한 성행위가 이루어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 누구는 원치않는 임신을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사후 피임약이 있다는 것을 알면 피해를 최소화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할 생각과 의지가 있다면 성폭력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여성이 성폭력을 당하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것은 그냥 기분 더럽다. 엿 같다. 그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디어에서도 성폭력을 다루면 사건에만 치중해서 보도하지 그 당사자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선 간과하거나 소극적으로만 다루고 만다. 물론 일견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실수로 뒤통수를 맞아도 사과를 받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인데, 왜 성폭력을 당하고도 말할 수 없고, 그에 합당한 사과를 받을 수 없느냐는 것이다.

 

나는 요즘 김형경의 <세월>을 읽고 있다. 알다시피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그녀 역시 과거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바로 이 책 1권 거의 말미에 보면 그 내용을 담고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그 사실을 고백했을 때 단번에 쓰지 않았다. 그 부분을 고백해야 할 부분에서 작가는 일단 팬을 놓을 수 밖에 없었고, 몇번인가의 쉼호흡 끝에 그 부분을 써 내려갔다. 

 

그녀가 성폭력을 당했던 것은 역시 모르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대학 때 연극 서클의 선배로부터 당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것도 술이 취해 여관방에서. 모르는 사람들은 그러게 술은 왜 마시냐고. 그러니까 당하는 것 아니냐고. 여자에게 고의성의 혐의를 두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여자의 음주가 성폭력을 은폐하거나 축소시킬 수 있는 빌미가 될 수 있을까? 여자가 의지적으로 마셨던 것이 아니라, 가해자쪽에서 의도적으로 마시게 한 것이라면 어떻게될 것인가? 그리고 책은 다분히 그런 의도가 있음을 설명한다. 그리고 성폭력 피해 순간을 묘사한 장면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 그 남자가 이제부터 자신에게 하려는 행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한꺼번에 알아차린다. 그 여자는 몸을 비틀며 소리 지른다. 그 남자는 여자의 두 손을더 힘껏 누르며, 제 입으로 비명을 지르는 여자의 입을 막는다. 여자는 고개를 뒤튼다. 입에 와 닿는 그의 입을 견딜 수 없다. 그는 점점 더 난폭해지고, 그 여자는 점점 더 필사적이 된다. 이런 일을 당하려고, 이런 모욕을 당하려고, 넉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어머니의 돈으로 등록을 한 것이 아니다. 여자는 그런 생각을  한다. 

그건 전투다. 삼십 분, 혹은 한 시간쯤 지속되는 전투.

그 여자는 손이 묶이고 몸이 짓눌리는 상황에서, 계속해서 몸을 비틀어 달아난다.

                              (중략)

여자는 다시 잠을 깬다. 그 남자가 또 그 여자 위에 있다. 그제야 그 여자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위험을 감지하는 기능이 잘못된 그 대책 없음을 깨닫는다. 그가 포기한 것이 아니었구나, 그저 잠깐 휴식이었던 모양이구나. 공포는 두 배쯤 되고 절망은 세 배쯤 된다. 그래도 그 여자는 최선을 다해 피한다. 다시 손이 머리 위로 묶이고 몸이 짓눌리고 입으로 입이 틀어막힌다. 고개를 저으며, 몸을 비틀며, 다리로 허공을 차며......

                                                                    (429~430p)

 

 

이책의 주인공 그 여자는 한 날 한 방안에서 같은 남자로부터 두 번의 성폭행을 당한다. 말 그대로 여자는 어리석은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싫을 것 같으면 1차 성폭행이 있고 당장 자리를 피하지 왜 2차까지 갔느냐. 두 번 해 주길 기다린 것 아니냐고 자기식의 왜곡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성폭행 가해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다. 상대가 소극적이니까 내가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하는 망상. 그러나 나중에 주인공이 어떤 피해의식을 갖게 되는지 보자.

 

그때부터 그 여자에게 성이란 다만 부정적이고 불길한 무엇이 아니라 전투이고 치욕이다. 전투중에도 패전군의 부대에서 치르는 전투다. 내내 수세에 몰리다가 온몸에 상처를 입고 탈진하여, 두 팔을 들고 투항하거나, 힘들게 모욕을 참아내거나, 혹은 혀를 깨물고 자결하는 게 차라리 더 낫지 않을까 싶은, 그런 전투다. 하늘을 향해 배를 들어내고 자빠지면, 그것만으로도 치명적인 패배가 되는 거북이나 말똥구리나 풍뎅이같은, 그런 전투다. 그렇게 성은 부정적이고 왜곡된 형태로 자리 잡는다. 그 후로도 오래도록.    

                                                                         (431p)  

 

이렇게 성폭행으로인한 상처가 깊은데 여자가 겉으로 반응하는 건 굉장히 소극적이다. 훗날 그 여자가 남자에게 했던 말이 뭔줄 아는가?

"그 일은 없었던 걸로 생각할게요. 그러니 내게 부담 갖지 말아요." (445p) 

 

그러면 남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그 말을 믿거나, 내가 그렇게 별것 아니었나? 오히려 더 자신을 증명하려 들거나 둘중 하나일 거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소극적인 반응만 가지고는 이 여성 성폭력 피해는 해결할 수 없다.

 

이 소설이 처음 나온 건 1995년이다. 그로부터 20년이 훨씬 넘어서야 미투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미투 운동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운동이 아니다. 그동안 성폭력 사건은 많이 있어왔다. 그런데 알다시피 이 문제는 그냥 하나의 사건으로만 인식될뿐 인식의 변화는 이끌어내지 못했다. 김형경 작가는 요즘의 미투 운동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작가는 그것을 고백하면서 우리나라의 전래 동화 '선녀와 나무꾼'이 얼마나 남성주의적 사고로 쓰였는가를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남자의 나뭇꾼의 시각에서 쓰였지 옷을 잃어버린 선녀의 입장을 하나도 대변하지 못하며, 오히려 최초의 성폭행 문학이며, 아름답고 슬프지만라고까지 냉혹하고 잔인한 이야기라고 지적한다. 

 

나는 그것과 더불어 뻑하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남녀가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여관이나 모텔에서 다음 날 침대에서 벌거벗은 채 잠에서 깨는 그렇고 그런 클리셰도 없어졌으면 좋겠다. 클리셰가 없을 수 없겠지만 이건 단순한 클리셰가 아니다. 이거야말로 전형적인 남성주의적 연출 방식이며 여자들이 은근  성폭력을 원하고 있다고 조장하고 있는 것 같아 불쾌하다. 남자는 여자가 원치 않으면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지 말아야 하다. 하지만 부부끼리의 성폭행은 또 얼마나 많은가.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서, 사실 한정오는 옳은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아니 적어도 성교육에 새로운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문제는 그런 의견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에 학부모들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좀 꺼림한 건, 드라마에서 학부모로 설정된 대부분은 엄마들이라는 것. 이해 못할 것은 없지만 아버지들은 예나 지금이나 늘 성교육의 사각지대에 있다. 또한 그로인해 징계를 받지 않으려면 한정오는 학부모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정말 엿같은 경찰 세상이다.

 

그런데 경찰은 그들만의 위로의 방식이 있는 것 같다. 사수인 오양촌(배성우 분.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좀 깡패스럽다)이 한정오를 나무라는듯 하지만 현실적인 충고를 한다. 그런 식으로 학부모를 흥분시킬 것이 아니라 정하고 싶다면 교육청 홈페이지에 얘기하고, 너는 하나라도 범죄에 대해 연구하라고. 하지만 난 너의 뾰족함이 좋다고. 배성우를 아주 좋아하지 않지만 이 드라마에선 그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낸다. 이 드라마를 통해 경찰의 애환을 드러내주니 요즘 경찰들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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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30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5-01 14:57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전 남자들이 자기 할 거 다해놓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해 자기 합리화하고
왜곡하는 거 그것부터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남자는 할 말없느니까 나중엔 나 좋아하냐고
그러던데 말인지 막걸린지 질리겠더군요.
남자도 성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의 아픔이 어떤 건지 똑바로 봐야하구요.
남자적 사고 방식의 이야기 구조도 좀 발라내야 하구요. 흐~

서니데이 2018-04-30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드라마 이제 끝난건가요. 한번도 못봤네요.;;
오늘까지 4월인데, 이제 1시간도 채 남지 않았어요.
오늘은 바람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는데, 어제보다 기온이 조금 더 올라갔더라구요.
stella.K님, 4월에는 좋은 시간 보내셨나요.
5월에는 기다렸던 기쁜 일들이 자주 찾아오는 시간 되셨으면 좋겠어요.
편안한 밤 되세요.^^

stella.K 2018-05-01 14:49   좋아요 0 | URL
아뇨. 아마 이번 주에 종영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이런 드라마는 드라마 잘 안 보시는 서니님이라도
한 번 봐 줄만하죠.
나중에 tv다시보기로라도 함 챙겨보세요.

고마워요. 서니님도 멋진 5월 되세요.^^

페크pek0501 2018-04-30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라서 여자로 태어나서 슬픈 일, 괴로운 일은 정말 싫은데 현실은 그렇더군요.
미투 운동을 관심 있게 보면서 너무 많은 폭로에, 너무 많은 상처에 충격을 받았어요.
어떻게 여자라고 해서 늘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할까요? 남자들은 2차, 3차 가서 술을 마셔도 되고 여자는 그렇게 하면 욕 먹고... 이 불공평함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남자들을 단체로 교육시켜야 할까요?

stella.K 2018-05-01 14:53   좋아요 0 | URL
<세월>이란 소설 읽으면서 할 수만 있으면
이 남성주의 편향의 이야기가 뭔지 싹 속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끔찍한 세상을 만든 건 남자면서
여자들에게만 조심해라 그러는 거 옳지않다고 봐요.
성교육은 남자들이 더 많이 구체적으로 받아야 할 텐데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어요.ㅠ

cyrus 2018-05-01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폭력 사건을 바라볼 때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편견의 문제점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줘야 해요. 이렇게 알려줘도 일부 부모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stella.K 2018-05-01 19:03   좋아요 0 | URL
맞아. 이 드라마 보면서 없는 얘기 썼을 리는 없고
의식의 변화가 이렇게 어려운 걸까 싶기도 하더군.ㅠ

transient-guest 2018-05-05 0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현재의 사회구조와 왜곡된 힘의 논리라면 ‘남자라서‘ 더더욱 성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단순히 섹스와 임신을 다루는 차원이 아닌 보다 더 감성적으로 다뤄져야 하는데 문제는 그걸 제대로 가르칠 사람이 없다는 거죠. 저는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인 관념에 치우친 성교육도 큰 문제라고 봐요.

stella.K 2018-05-05 19:00   좋아요 0 | URL
이렇게 말하면 좀 외람되긴 한데
남자들은 아랫도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면서
그것으로 여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가 몇 명을 평정했노라고 자랑하잖아요.ㅋ

혹시 기회되시면 저 소설 읽어보세요.
작가가 되게 잘 썼구요,
남자들이 여자를 쟁취하는 방식이 이런 거겠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여자는 좀 더 인격적이고 잰틀하길 바라는데.
근데 일견 작가가 말하는 그 남자가 나름 순수하기도 해요.
제가 알기론 영화평론가 하재봉으로 알고 있는데,
문제는 그 순수가 남자가 생각하는 것과 여자가 생각하는 게
다르다는 거죠.
여자가 볼 땐 독선, 독점이런 것으로 보이거든요.
 
시, 현대사를 관통하다 - 19세기 말 이후 한국 현대사와 시의 만남
이성혁 외 지음 / 문화다북스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지금까지 역사와 문학을 같은 프레임에 넣고 보려고 했던 시도는 여럿 있어왔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적 사건 즉 스토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소설이나 평전이 채택하는 방식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시로 역사를, 그것도 근현대사를 돌아보려고 했다는 건 이전에도 있어왔는지 모르겠으나 나로선 꽤 신선한 시도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고 이병주 작가는 자신의 책에서, 역사가 생명을 얻자면 섭리의 힘을 빌릴 것이 아니라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했다. 이는 사실을 추구하는 역사와 달리 사실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을 추구하는 게 문학(22p, 이병주, <변명> 296)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문학 그것도 시라는 장르는 어떠한가? 과연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까? 물론이다. 시는 어떤 예술 장르보다 가장 넓은 범위의 세계를 담아낼 수 있다. 그 이유는 시가 여러 문학 장르 중에서도 모든 제약에서 가장 자유롭기 때문이다. 정해진 스토리 라인이나 구조를 따를 필요도 없고, 아예 플롯이 없어도 되는 시는 상상력의 정점과 깊이 있는 사유를 보여주며, 제한 없이 폭넓게 세상을 담아내기 때문이다(23p).

 

나는 이 책을 처음 펼쳐들었을 때 역사 그것도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시의 콜라보레이션쯤으로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즉 역사도 알고, 시도 알고 일석이조의 학습효과 뭐 그런 거 말이다. 물론 약간의 그런 느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 속에서 시인들은 어떻게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는가를 다시 한 번 짚어 볼 수 있는 시간이어서 나름 좋았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과 시가 있다. 우린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서 일제 강점기 암울했던 시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무수히 많이 물어보았을 당대의 시인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윤동주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임에 틀림없지만 그가 살던 시대 전후해서 많은 시인들이 시대를 노래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김소월도 있었고, 백석도 있었다. 임화도 있었고, 이육사도 있다. 또한 친일파로 알려진 서정주도 있고, 이광수도 있다.

 

나는 이 책을 읽다가 서정주와 이광수 같은 친일 문학인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단초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하상일 문학평론가의 글을 읽다가였는데, 그는 친일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판단 기준은 내재적 비판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 가지를 제시했는데, 첫째는 일제 강점기 일본어로 쓴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 친일이라는 편협한 언어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썼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일본어냐 조선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일본어라고 해도 반일 정신을 드러낸 작품이 있는가 하면, 조선어로 썼음에도 불구하고 친일 협력을 드러낸 작품도 아주 많다는 것이다.

 

둘째로, 일제 말 일본에 의해서 조직된 친일 단체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로 규정하는 태도는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국보국회를 만들어 작가들을 강제로 소속시켰는데, 그 단체 내부에서의 구체적인 활동 양상과 당시 발표한 작품의 내용을 기준으로 친일 여부를 판단해야지, 단지 이런 단체의 소속 여부를 갖고 무조건 친일 협력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로, 창씨개명 역시 친일의 지표로 삼는 것도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하다. 물론 창씨개명은 친일적 요소가 아주 많았고, 실제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친일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광수 같은 경우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을 철폐하는 의미에서 창씨개명을 지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창씨개명을 무조건 친일로 볼 수 없는 건 그 대표적인 예로 윤동주를 들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윤동주의 일본식 이름은 히라누마 도쥬다. 그것은 그가 연희 전문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지 일주일 전 <참회록>에서 자신의 과오를 깊히 성찰한다(131~132p).

 

사실 우리는 대대로 윤동주는 사랑하면서, 미당이나 춘원에 대해선 석연치 않은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왜 윤동주는 되면서 미당이나 춘원은 안 되는 것일까? 이제 우린 미당이나 춘원에 대한 생각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필요도 있지 않을까? 불평등과 차별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는 당해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그것이 철폐된다면 창씨개명 아니야 그 보다 더한 일을 했더라도 당대를 살아보지 않은 우리는 뭐라고 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민족의 정체성 보다 앞서는 건 차별 철폐라는 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들에 대한 연구를 좀 더 활발하게 진행시켜도 좋지 않을까? 그들은 당대 지식인이다. 그들이 그렇게 쉽게 자신과 나라를 팔아 먹었을 거라곤 나 역시 쉽게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당대 시인들은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러니만큼 지금까지 난 시인들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건 아닌가 반성도 해 보게 된다. 솔직히 옛날에 험악한 시절을 살았을 땐 문인들도 결코 가만있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다. 지난 번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 문인들이 시국선언도 하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오늘 날 같이 부요하고 평화로운 시대에 저항할 이유나 필요를 모르는 시인들은 어디서 그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언어의 유희를 즐겨보겠다고 시를 쓰지 않는가? 괜히 시 한 편으로 감옥에 들어가고 하는 건 김지하 같은 시인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 날의 시인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함민복 시인은 그의 소설을 통해 자신의 시 한 편의 가치는 몇 백 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조하기도 했다. 오늘 날의 시인의 쓸모는 뭘까? 어느 시대고 시인과 고독. 또는 시인과 가난은 자웅동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가난과 고독이 있기 전에 저항이 먼저 있었음을 또한 상기하게도 한다.

 

이 책을 읽다 재밌는 부분을 발견했다. 언젠가 이승만이 처음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 자유경제원이라는 곳에서 그의 체제를 찬양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 백일장을 개최한 적이 있었나 보다. 그때 장민호라는 사람이 1등에 뽑혔는데 그 후 바로 체포된 사건이 발생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시가 가로로 읽으면 이승만을 찬양하는 것이 되지만 세로로 읽으면 그를 비판하는 글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시인의 살아있는 저항정신이요 풍자가 아니겠는가? 과연 오늘 날의 세대에도 이런 시인을 만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시인은 있어야 한다. 그들만의 청정한 언어로 세대를 정화시키고 그들로부터 깨어있기를 촉구 받아야 한다. 시인들에게 부단한 응원과 애정을 보내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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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4-28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로 읽기와 세로 읽기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다니... 묘하군요.

2018-04-28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8 2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라마하우스, 콘텐츠케이 제공>

 

아무리 드라마라고 해도 남의 사랑엔 그다지 관심이 없는지라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쫌 보다 말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계속 보게 된다. 안판석의 드라마는 희안하게도 약간 우중층하다. 전에 봤던 <풍문으로 들었소>도 화면이 꼭 밝다고마는 할 수 없었다. 뭐 PD마다 자기 고유의 연출 색깔이 있을 것이고, 안판석도 그중 하나일텐데 그걸 뭐라고 해야할지, 왜 그런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6회째였나? 윤진아가 전 애인과 심한 몸싸움을 하는 바람에 스마트폰이 내동댕이쳐지고 그 바람에 고장이 났다. 아무튼, 진아와 준희는 어느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지하철역에서 헤어지는데 잠시 있다 준희가 전동차 타는데까지 헐레벌떡 내려온다. 마침 진아는 전철을 기다리는 중. 그는 진아에게 새로운 핸드폰을 살 때까지 자신의 핸드폰을 빌려주기로 한다. 그리고 곧 전동차가 오고 진아는 올라 타고, 준희는 밖에서 손으로 전화하라고 하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전동차가 제속도를 낼 때까지 같이 달려준다.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단 1초라도 진아의 모습을 자기 눈에 더 담아두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게 은근 나의 마음을 뺐는다. 남이 볼 땐 닭살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역시 게으른 사람은 사랑을 못하겠구나 싶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어도 지하철역 앞에서 한참 아쉬운 작별을 하고도 애인을 그냥 보내기가 아까워 기어이 지하철 전동차 타는데까지 들어 와 주는 남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또한 그런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역시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더니 움직여도 한참 많이 부지런히 움직여줘야겠구나 싶다. 하지만 사랑하면 그 정도 하는 거 당연한 거 아닌가...?ㅋㅋ

 

그 장면을 보면서 (아무리 드라마라지만)이들은 절대로 헤어지지 못하겠구나 싶다. 또 우린 바로 절대로 헤어지지 못할 것 같은 상대에 대한 로망이 있지 않나? 하지만 지금까지의 드라마의 법칙을 보면 남녀가 너무 살갑게 사랑하면 신이 질투해 둘을 갈라놓게 만들기도 한다는데 이 드라마는 웬지 거기까지는 안 갈 것 같고, 난 이 드라마를 어디까지 보게 될지 나도 잘 모르게 됐다.

 

그런데 웬지 이 두 사람을 보면 실재로도 저렇게 사랑을하게 될 것만 같은 다. 느낌적 느낌이 든다. 그래서 왠지 송송 커플만큼이나 화제를 낳게될 것만 같은데, 내 예감을 틀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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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8-04-21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손예진 배우에 대해 호감도 비호감도 아닌 상태였는데 여기서 참 예쁘더군요. 중간중간 잠깐씩 본 거긴 하지만요. 챙겨볼 것 같진 않지만 남자배우도 예쁘고^^; 두 사람 잘 어울려서 진짜 좋은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싶었어요. 호호^^

stella.K 2018-04-23 13:37   좋아요 0 | URL
ㅎㅎ 그렇죠? 요즘은 정해인이 대세여요.
어느새 CF를 거의 다 점령했더군요.
둘이 잘 어울려요.^^

페크pek0501 2018-04-22 0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관심을 갖고 봐야겠군요. 내일 재방송을 찾아야겠어요.
드라마는 갈등을 보여 줘야 하니까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사건이 생기거나 방해꾼이 나타나 둘이 헤어질 뻔한 장면이 연출될 듯. 그러다가 이별 또는 해피엔딩이겠지만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봐야겠군요.

드라마 작가는 이런 생각을 할지 몰라요. ‘자, 보시라. 갈등을 이들이 어떻게 풀어 나갈지 잘 지켜 보시라.‘라고.

이런 전개의 기술보다 더 훌륭하게 생각되는 건 캐릭터의 일관성인 것 같아요. 각 인물들에게 딱 자기 캐릭터에 맞는 대사만 주는 작가의 솜씨. 거의 신의 한 수처럼 여겨져요. 그래서 드라마 작가들이 존경스러워요. (하늘은 왜 내게 이런 재능을 안 주셨는지... 크응)

stella.K 2018-04-23 13:44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게요. 왜 신은 내가 원하는 재능은 안 주시는지 모르겠어요.ㅋㅋㅋ
이 드라마에서 방해꾼은 윤진아의 전 애인 이규민이죠.
직업이 변호산가 하는데 어찌나 진상으로 나오는지.
변태, 또라이기도 있어보이죠.
그가 그러면 그럴수록 서준희는 더욱 남자다워지고
둘의 사랑은 불타오르죠.
이규민의 역할은 이제 끝난 거 같구요,
사랑의 불똥은 이제 가족들에게로 옮겨간듯 해요.
저는 이 드라마를 언제까지 봐야하나 고민중이어요.ㅋㅋ
 

 

                     

 

생각 보다 별로다. 괜찮았다. 좋았다. 말 많았던 <신과 함께>를 보았다.

이 영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난 좋게 봤다. 글쎄, 생각 보다 별로란 말을 염두해 둔 덕분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썩 괜찮은 측면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난 우리 영화가 아직도 건재함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이 영화는 그 영역을 한층 확장시켜 나간 것 같아 좋았다. <전설의 고향>이나 <구미호> 같은 호러 영화나 만들 줄 알았지 본격 저승 세계를 다룬 적이 있었나? 내 기억엔 없지 싶다. 이는 주호민 작가의 원작 웹툰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감독이 누군가 했더니 <국가대표>, <미녀는 괴로워>등을 만든 김용화 감독이다. 그런 일련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면 선택하는데 후회할 것 같지는 않다.

 

영상이 다소 만화적이긴 하지만 풍부한 상상력과 CG가 그럴 듯하다. 얼핏 주인공이 자홍 역을 맡은 차태현 같기도 하지만, 사제복 같은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이승과 저승을 왔다갔다 하는 하정우에 좀 더 비중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하정우를 많이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옷을 그렇게 입으니 쫌 멋있어 보이기도 한다.   

 

사제복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원래 복식사에서 보면 치마는 처음 남자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그건 카톨릭 신부들의 상징이기도 하다. 나도 어렸을 때 한때는 카톨릭 신자였던 관계로 사제복을 입은 신부를 자주 볼 수가 있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내가 다녔던 성당의 주임 신부님이 배가 적당히 나온 할아버지 신부님이였다. 그런데도 사제복을 입으면 배가 가려지면서 좀 멋있어 보이기는 했다. 그러니 젊고 풍채가 좋고 지적인 신부님이라면 어쩔뻔 했겠는가. 성당 미사실 한쪽 귀퉁이의 속죄소에 여신도들이 줄을 서지 않았을까?ㅋ

 

앞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주호민의  웹툰<신과 함께>를 영화화한 것이다. 제목만 언뜻 들으면 영화 <신과 함께 가라>가 생각이 난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쯤 봤는데 물론 서로 전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이 영화를 아직 안 봤다면 한번쯤 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미 봤다면  말나온 김에 한 번쯤 더 볼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만든 영화다. 물론 두 영화는 아무런 연관성은 없다.

 

오히려 영화를 보다보면 데이비드 핀쳐 감독이 쵸서의 캔터베리 서사사에서 7대 죄악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던 <세븐>이 생각나기도 한다. <신과 함께>도 7가지 죄악이 나온다. 그런 점은 같지만 <세븐>은 서양식으로 인간의 죄악을 다루었고, <신과 함께>는 동양식으로 다루었다. 또한 <세븐>은 영계를 다루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실적이며 그로테스크한 것이 갈수록 포악해지고 죄악에 둔감한 인간의 죄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수작이다.

 

주호민 작가는 언제 또 우리 신화를 탐독했을까. 그도 그렇지만 감독이 각본도 맡았는데 원작 그대로 하지않고 자기식의 새로운 인물을 창조했다. 이를테면 원작에서 주인공의 직업은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영화에선 소방관으로 좀 더 역동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불에 갖힌 소녀를 구하다 사고로 죽어 저승에서 재판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이야기의 설정 자체도 흥미롭다. 저승법에 의해 49일 동안 7가지 죄악에 의거한 재판을 한다. 살인, 나태, 거짓, 불의, 배신, 폭력, 천륜.  이렇게 7개의 지옥에서 7번의 재판을 무사히 통과한 망자만이 환생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게다가 염라대왕은 저승차사 세 명, 강림(하정우)과 혜원맥(주지훈), 덕춘(김향기)에게 천 년 동안 49명을 환생시키면 그들 역시 인간으로 환생시켜 주겠노라고 한다. 그러니 19년만에 나타난 마지막 49명째가 될지도 모르는 소방관 자홍(차태현)에게 거는 기대는 상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최승이 단테의 <신곡>을 소설로 풀어 쓴 3부작이 생각났다. 지옥과 연옥에 관한 부분은 읽었지만 천국은 책만 사 놓고 아직 읽지 못한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리고 역시 <단테의 지옥여행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테의 지옥여행기>도 충분히 무섭긴 하다. 특히 구스타브 도레가 그린 삽화가 내용의 으스스함을 더한다. 물론 영화도 충분히 지옥답다. 그 무서운 지옥을 어떻게 보여주느냐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어차피 이승은 물질계지만 지옥은 사후 세계다. 죽어보지 않고서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그곳을 갔다오거나 말거나 영계는 우리의 관심사인 건만큼은 사실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나는 사후세계에 대해 관심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면 뭐에 관심이 많아서 보게될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죽고 난 후 그 영혼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있지 않을까? 이건 아무래도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임엔 틀림없는 것을 것이다.  

 

내가 이 영화에 꽂힌 것도 오래 전 나의 아버지가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는 오빠가 통과했을지도 모를 곳에 대한 상상 때문이기도 하다. 나 역시 죽으면 통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내세관이 기독교적 관점과 동서양의 그것이 조금 다르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가리지만(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선 살아있을 때 얼마나 착하게 살았느냐에 촛점을 맞춘다. 아무래도 이런 스토리는 권선징악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이런 스토리 때문에라도 세상이 조금이라도 착해진다면 바라건대 이런 이야기는 자꾸 나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너무 그래도 관객들은 식상해 하겠지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진행 방식도 마음에 든다. 원래 이야기는 이건가 싶으면 저것이고, 저것인가 싶으면 새로운 무엇이 나오는 것이 좋은 이야기 방식이다. 그건 충분히 흥미롭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보게 만든다. 세 명의 차사는 저승 재판에서 자홍의 옳음을 계속 증명하고 응원해야 하지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자홍 역시도 까 보면 잘한 것이 하나도 없는 죄인이다. 그래서 판관들은 할 수만 있으면 자홍의 죄를 들추어 그를 지옥으로 보내고 싶어한다. 그래서 벌의 구렁텅이에 빠질 것만 같지만 또 그럴 때마다 옳음이 증명되 극적으로 구제를 받곤한다. 만화 같지만 흥미롭다.

 

          

 

그런데 아무래도 영화를 짠하게 하는 건 자홍의 동생이 죽기 전 어머니와의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모르긴 해도 이제 대표 어머니 역은 나문희에서 자홍모 역을 맡은 예수정으로 넘어간듯도 하다. 이 배우는 맡는 역마다 약하지만 강한 어머니상을 맡는다. 이 영화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어찌보면 가장 한국적인 어머니상을 보여주지 않나 싶기도 하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것도 자홍이 죽기 전 어머니를 뵙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책이 깔려있다. 무엇보다 이 어머니는 말을 하지 못한다. 게다가 첫째인 자홍뿐만 아니라 곧이어 둘째 아들도 총기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처량함을 예수정 배우는 잘도 연기했다. 그러니 그런 어머니를 두고 이승을 떠난 두 아들의 마음은 또 어떻겠는가? 가끔 꿈에 죽은 사람이 보이곤 하는데 이를 두고 현몽이라고 하는가 보다. 둘째 아들 수홍이 어머니를 위로한다고 꿈에 나타나는데 그때 어머니의 혀가 풀리고 모자가 얘기를 하는데 순간 뭉클했다. 나도 가끔 아버지와 오빠가 꿈에 보고 울다가 깨곤 하는데, 현몽이란 정말 있는 걸까? 

 

관객을 안타깝게 하는 건 자홍이 죽기 전 언젠가는 누룽지 기능이 되는 전기밥솥에 편지를 넣은 어머니를 위한 선물을 전하지 못한 것인데 그걸 보면서 역시 어머니는 밥으로 대비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우리나라 인사법 중에, 밥은 먹었냐, 밥은 먹고 다니냐 뭐 이런 것인데 그 질문을 남자가 할 땐 밥을 사 주겠지만, 여자 그것도 어머니가 하면 그 어머니는 꼭밥상을 차려온다. 못 먹고, 못 살아서라고 생각했는데 오래도록 그것이 지배하는 걸 보면 그것 이상의 뭔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밥은 모성의 하나로 대비되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물론 여기선 누룽지지만. 자홍모는 누룽지를 잘 만드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것을 자홍은 전기밥솥이 대신하길 바란다. 역시 인간이 기계를 이기지 못하는 것 같다. 또한 영화든 드라마든 모성 이야기를 하면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것도 있다.   

 

영화는 정말 꿈 같은 것이긴 한가 보다. 자홍이 7가지 심판을 다 통과를 해서 드디어 환생 티켓을 따낸 것 같은데, 역시 염라대왕은 그냥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거 웬만하면 세 명의 저승차사에게 환생할 기회를 줄 일이지 후편을 예고하며 끝나니 역시 이번 생에서도 환생은 어려운 듯 싶다. 기대가 되긴 하는데 이런 거라면 16 또는 8부작 정도하는 시리즈물로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환생이란 게 참 그렇긴 하다. 어쨌거나 그렇게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 환생을 한 누군가는 이번 생을 살고 있다면 세상은 조금 나아져야 할 것도 같은데 여전히 죄에 매여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 보다 그냥 극락왕생이 낫지 않나? 저 저승차세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만할 이유가 있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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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4-21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인 가구 인구가 늘어나도 ‘어머니=집밥’으로 연결된 모성을 강조하는 프레임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가정’에 대한 향수를 소환하는 소재로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쓰일 거예요.

stella.K 2018-04-21 13:27   좋아요 0 | URL
그건 뭐 거의 이야기의 법칙이지.
그런 엄마가 또 좋은 엄마잖아.
자식이 잘못하고 들어와도 암말 않고 밥상 차려
밀어 주면 이 세상 다른 사람은 다 욕해도
엄마만은 나를 믿어주는구나. 그래서 세상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것 아니겠어?
결국 내편, 나에게 힘을 주는 사람의 상징이 엄마라서 그런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