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주인공으로 한 두 편의 영화 

 

 

아주 가끔 울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특별히 울만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럴 땐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카타르시스라는 감정의 여과를 거치고 싶을 뿐이다. 그러려면 슬픈 영화를 보는 것도 한 방법이긴 하다. 그것도 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보는 것은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어찌하다 보니 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두 편 연속으로 보게 되었다. 두 작품 모두 좀 오래된 일본 영화다.

 

<우리 개 이야기>는 알고 봤더니 몇 년 전에 본 영화다. 다시 보니 여전히 재미있긴 하다. 몇 개의 에피소드를 연작으로 엮었는데 웃기기도 하고, 잔잔한 감동도 있지만 다소 산만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래도 볼만하다. 하지만 마지막 에피소드는 보지 않았다. 어느 집 반려견이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영화를 처음 봤을 땐 끝까지 다 봤다. 하지만 이번에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 땐 우리 집 다롱이(요크셔 테리어종 수컷)가 건강하고 아직 젊었을 때다. 하지만 지금 다롱이는 많이 늙어서 어느 때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괜히 다롱이 생각하고 감정이입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물론 다롱이는 아직 그럭저럭 잘 지내는 편이다. 게다가 저 <퀼>을 먼저 본 지라 견생의 마지막을 두 번씩 연이어 보고 싶지 않았다. 

 

<퀼>은 어떻게 찍었을까 싶게 정말 잘 찍은 영화다. 감독이 재일교포다. 이 영화는 흔히 맹인 안내견으로 키워지는 골든 레트리버 종의 일대기를 다뤘다. 알다시피 골든 레트리버 종이라고 다 안내견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여느 개와 다른 양상을 보여야 안내견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는다. 이를테면 주인이 불렀다고 해서 우르르 쫓아가면 오히려 탈락이다. 멀뚱멀뚱 뭐야, 왜 그러는데? 해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퀼은 일생동안 세 가정을 거친다. 태어난 집에선 5마리 중 하나로 태어났는데 특이하게도 옆구리 쪽에 새의 날개 모양을 한 얼룩이 있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주인이 퀼의 이 멀뚱 거리는 특성 때문에 맹인 인내견으로 키워야겠다고 해서 훈련소로 보낸다. 그곳 규정에 따라 퀼은 파피 워커 즉 대리 가정에서 남은 1년을 보내고 첫 생일 날 다시 훈련소로 보내져 훈련을 받는다. 그 후 본격적인 임무 수행을 위해 어느 시각장애자의 가정으로 보내진다. 바로 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이 슬프다. 그건 퀼뿐만 아니라 모든 개에겐 안 좋은 것 같다.


퀼은 임무수행을 위한 이 세 번째 가정에서 생을 마쳐야 한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 오히려 퀼이 주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이쯤 되면 서서히 눈물이 비어져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퀼이 착하게 살아온 보상인지 퇴역 후 다시 떠나 온 두 번째 가정으로 보내져 거기서 무지개다리를 건넌다. 보기에 따라선 눈물샘이 제대로 폭발해 주최하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언제 어느 때 볼 것인지 선택을 잘해야 한다. 울고 싶지 않다면 보지 않는 쪽이 나을 수도 있다. 어찌나 슬프던지 본지 며칠 지났는데도 그 잔상이 남아 지금도 생각하면 울컥한다.  


그걸 보면서 오래 전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올 때 차마 데리고 오지 못한 마당에서 키우던 개가 생각이 났다. 그 개는 정말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종견이었다. 딱히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다.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도 이미 한 번의 파양을 겪고 온 터라 여간해서 마음을 열지 않았다. 사람과는 눈도 안 마주치고 어디든 구석으로만 숨고 싶어 했다. 그래도 마음을 열 때까지 마냥 기다렸다. 그러고 보면 잡종견이라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못해도 한 달은 족히 넘었던 것 같다. 일단 주인이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는지 완전히 마음의 문을 열 고부턴 주인의 기척만 났다 싶으면 방방 뛰고 한바탕 난리를 피웄다. 딱히 예쁘게 생긴 것도 아니어서 정을 많이 주지도 않았다. 그런 걸 6, 7년쯤 키웠던 것 같다. 


그 사이 IMF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집을 팔아야 했다. 이사를 가면 이 녀석을 데리고 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러려면 단독주택을 구해야 하는데 시골로 가면 모를까 수중에 쥔 돈 가지곤 서울에서 그런 집을 구한다는 건 꿈같은 일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 집을 산 사람이 집을 새로 지을 목적으로 사긴 했지만 당장은 그럴 생각이 없으니 전세 기간 2년을 더 살아도 좋다고 해서 더 살았다. 녀석에겐 천운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2년 동안은 녀석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우리로서도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참 무책임한 동물이다. 닥치면 어떻게 되겠지 싶었는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사 날은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궁하면 통한다고 고맙게도 인천에 사는 막내 이모네가 마당이 있으니 데려가 키우기로 했다. 개를 보내기로 한 날 이모와 이모부가 아침 일찍 우리 집에 왔다. 끌려가는 녀석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나는 내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좋은 주인 만나 가는 것에 위안을 삼으려 했지만 그거야 내 생각일 뿐 녀석은 또 파양 당하는 것으로 알 테니 그 배신감이 어땠을지 인간이 참 죄가 많다 싶었다.


녀석이 없는 마당을 보며 잘 있겠거니, 잘 살겠거니 했다. 그런데 녀석의 운이 그것 밖엔 안 되었던 걸까, 그렇게 이모네로 간지 하룬가 이틀 만에 이모가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개가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엄마는 그 즉시로 이모네를 갔고 녀석이 옛 주인의 목소리를 듣고 혹시 어디 숨어 있다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하루 종일 머플러를 흔들어 가면서 찾았다고 한다. 옛 주인의 냄새를 좀 더 널리 퍼뜨리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찾았지만 그땐 개장수가 아직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던 때라 모르긴 해도 그들에 의해 붙잡혔을 거란 추측만 했다. 이모는 준비도 없이 개부터 데려 오는 게 아니었다고 자책했다. 뒤늦게 이제 목줄을 사다가 해 줘야지 했단다. 그런데 지하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음식 배달을 시키는 과정에서 부주의로 대문이 살짝 열린 틈을 타고 탈출했다는 것이다. 녀석은 어떻게든 이 집만 탈출하면 우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더욱 아팠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신이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그건 인간을 위해 개를 만드신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한쪽에선 개의 조상은 늑대고 오랜 세월 녹대를 길들여 온 사람이 개를 만들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어떤 게 맞든 그 모두는 어쨌든 개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개를 어떻게 대해 왔을까 생각하면 할 말이 없다. 본의 아니게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기도 하니 말이다. 개를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면 키우지 않는 것이 맞다. 인간이 쳐해진 운명에 따라 개의 운명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마땅한 주인을 만나지 못해 버려지고 안락사당하는 개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 개와 사람이 공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근데 이 글을 쓰다 보니 우리나라가 어느샌가 모르게 반려견을 키운다는 명목하게 외래종에 점령당했다는 걸 알았다. 예전에 우리 잡종견은 너무 흔히 볼 수 있는 개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라졌다. 시골은 좀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많던 잡종견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아무래도 서울은 점점 마당이 사라지고 있으니 그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혹시 본 사람이 있다면 제보 바란다.      


두 영화 모두 개가 정말 애잔하고 사무칠 정도로 사랑스럽다. 울고 싶은 날 있으면 이 영화를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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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11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 드라마 소설로 눈물을 흘리지 않은데 강쥐나 멍멍이가 주인공이면 심장이 뒤흔들려요. 키웠던 개를 두번 하늘나라로 보낸이후 두번다시 품속에 강쥐를 안아주질 못합니다. 잡종견 지능 엄청 높은데 ㅋㅋ 외래견이 늘어난건 펫샵 오너들이 프리미엄을 더 받을수 있어서라고 ,,토종이 좋은데 ^ㅎ^

stella.K 2020-12-11 20:56   좋아요 0 | URL
아, 그 이유도 있겠네요. 프리미엄. 거기다 서울은 마당이 점점
없어진 이유도 있다고 끝까지 우기고 싶은.ㅋㅋ

많은 사람이 스콧님과 같은 이유에서 다시 안 키운다고 하죠.
하지만 이제 개의 수명도 많이 늘었고,
쓰진 않았지만 저도 다롱이 이전에 말티즈를 15년 가까이 키우고
천국 보내줬는데 키우는 동안은 정말 행복했다고 생각합니다.
슬픔 때문에 행복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하는데 좀 심하신가 봐요. 아웅~
개는 키워 본 사람만이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반려 가정을 찾지 못해 버려지는 개를 생각하면 말이죠.
저는 능력만 되면 다롱이 이후에 더 키워보고 싶긴한데
지금으로선 장담할 수가 없네요.

아, 정말 토종 잡종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어요.ㅠㅠ


hnine 2020-12-11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는 정말, 사람이 주지 못하는 것을 주는 생명체 같아요.
어릴 때 위에 말씀하신 잡종견과 십년 이상 한집에 살다보니 그야말로 한 식구였어요. 그 개가 명을 다하고 죽자 아버지께서 산에다 갖다묻어주시고 가끔 묻은 곳에 가보기도 하셨지요.
주인 없는 개 안락사 시키는 문제는 정말 아니라고 봐요. 인간이 무슨 권리로 살아있는 동물을 맘대로 죽일수 있는걸까요.

stella.K 2020-12-12 19:49   좋아요 1 | URL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저의 아버지도 살아생전에 개를 참 좋아하셨어요.
그런데 그때는 반려견이란 인식이 없던 시절이라
h님 아버님처럼은 못하셨습니다.

진짜 안락사 문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안락사를 안 시키면 폭증하는 개를 감당할 수가 없다고도 하니.
끝까지 책임지는 의식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아요.

cyrus 2020-12-12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보다 시골에 잡종견이 많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시골 개들은 보신탕 재료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stella.K 2020-12-12 20:50   좋아요 0 | URL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근데 어느 때가 되면 씨가 말라서 보호하고 복원해야 한다고
할 날이 올 것 같아. 참 우리나라는...ㅠ

페크pek0501 2020-12-12 19: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슬픈 글을 쓰시다니... 안 그래도 코로나19로, 연말로 마음이 편치 않은 때인데요...

그리고 스텔라 님이 서재의 달인에 선정되지 않은 게 이상하네요. 이번 해에 글을 적게 올리셨나요?

stella.K 2020-12-12 19:57   좋아요 2 | URL
ㅎㅎ 미안해요. 저 영화 정말 보지 마세요.ㅠ

전 안 될 줄 알았어요. 갈수록 게을러져서 쓴 게 몇편 되지도 않아요.
선물이 좋으면 열심히 썼을 것 같은데 딱히 꼭 받아야겠다는 의지도 없고.ㅋ

희선 2020-12-13 0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은 사람을 기다리는 개 《하치 이야기》도 무척 슬퍼요 그런 개가 많은가 봐요 어쩌다 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먼 곳에서 살던 집을 찾아간 개도 있다고 하지요 개는 사람한테 마음을 다 주는데 사람은 그러지 못하죠

이 글 보는 것만으로도 슬프네요 함께 살던 개를 떠나 보내는 사람 마음도 무척 아프겠습니다


희선

stella.K 2020-12-13 11:49   좋아요 2 | URL
맞아요. <히치 이야기>도 있었죠.
저도 본 것 같긴한데 내용이 기억이 안 나네요.
보면 기억이 날 것 같은데...ㅠ

정말 마음이 아파요. 그래서 계속 돌봐주고 싶은데
저희는 다롱이가 우리가 돌봐줄 수 있는 마지막으로 반려견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저의 어머니도 이미 노령이시고, 저도 개를 전적으로 돌볼만큼
아주 건강한 편은 아니라 앞으로 다른 개를 맡아 키울거란
장담을 못하겠어요. 개는 정말 돌봄이 필요한데...ㅠ
 
이토록 고고한 연예
김탁환 지음 / 북스피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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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나는 '이토록 고고한 연애'인 줄 알았다. 그런데 '... 고고한 연예'다.
연예하면 요즘 연예인들의 예능 프로에서의 활약상이나 아니면 그들의 험담을 연상시키지 않나. 그런데 연예의 사전적 의미를 보니, '대중 앞에서 음악, 무용, 만담, 마술, 쇼 따위를 공연함. 또는 그런 재주.'라고 나와있다. 그런 연예가 조선 시대에도 있어다는 게 새삼 놀랍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조선 시대 광대들의 삶을 이름이다.


이 책은 마치 저자의 소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의 외전 같기도 하고 연작 같기도 도하다.  <서러워라,......>에서는 모독과 김만중과 그의 유명한 작품 <구운몽>와 <사씨남정기>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이 작품에서는 그림자로만 나오고 전작이 모독과 김만중의 서사라면 이 작품은 모독과 달문의 서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서러워라...>를 통해 소설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다면, 이 작품은 소설 쓰기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캐릭터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예를 다뤘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어쩌면 작가는 두 소설을 통해 소설 쓰기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달문이다. 그는 처음 연암 박지원의 소설에 나온다. 18세기 광대였고 그 모습이 괴이하여 우는 아이 눈물을 뚝 그치게 만드는데 이만한 인물이 없었다고 한다. 즉 울음을 안 그치면 달문이 와서 잡아가라고 할 거라고 겁을 주면 뚝 그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대마다 그런 인물이 하나씩은 전해 내려오는가 보다. 나 어렸을 땐 그 대상이 망태 할아버지였는데 말이다. 아무튼 김탁환 작가는 바로 이 달문을 소설로 형상화했다.  


작가는 오히려 달문의 외모에 대한 괴이함 보다는 그의 인물됨에 초점을 맞춘다. 생김에 대한 묘사를 보면 얼핏 조커가 연상된다. 하지만 그의 인물됨을 보면 한마디로 대인배를 넘어 금상이 가질 법한 자질을 가졌다. 그런데 그가 광대이기 전에 거지라는 것이다. 거지라면 뼛속까지 거지일 텐데 과연 이런 고귀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가능할까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또 그렇게 말하면 듣는 거지 기분 나쁘다고 할지 모르겠다. 우리 거지들 중엔 왜 그런 사람이 있으면 안 되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금수저라고 그 인간성까지 금수저란 법 없지 않은가. 내내 읽으면서 달문의 그런 사고방식과 인간됨은 어디서 온 건지 알 수가 없고 인간 된 도리에 대하여 조금도 막힘이 없고 고민이 없다.  


그는 거지지만 산대놀이의 리더이기도 하다. 산대놀이는 탈을 쓰고 하는 일종의 가면극이다. 이것을 언제 누구에게서 배웠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사람이 자기 밥그릇은 타고난다지 않는가. 어쨌든 그런 재주가 있으니 잘 갈고닦아서 거지 팔자를 면할 수도 있을 텐데 그는 그것을 불가피할 때나 사용할 뿐 광대 보다 거지이기를 더 좋아한다. 이쯤 되면 그와 함께 동고동락하는 다른 거지들은 달문을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 듯싶다.  그 정도라면 저 노트르담의 꼽추인 콰지모도나 희랍인이라던 조르바를 넘어 조선 시대 예수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독이 누군가의 모함에 빠져있을 때 달문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독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사지로 뛰어든다. 그런데 그곳이 하필 금상을 만나는 자리다. 


그뿐인가, 달문이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그의 구체적인 행적은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라.) 그렇게 기괴한 모습을 하고 워낙에 거지로 산지라 몸에 밴 거지 특유의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데도 그를 아는 기생들은 하나 같이 그를 연모한다. 이쯤 되면 작가가 구라를 쳐도 너무 친다는 느낌도 든다. 그런데 역시 인간의 뇌는 팩트를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는 하다. 작가가 그렇게 묘사를 하니까 긴 기민가 하면서도 믿게 되는 것이다. 안 믿으면 어쩔 것인가. 어차피 소설 아닌가. 문제는 소설이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아니라 거짓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믿을만한가 하는 것이다. 즉 소설의 관건은 얼마나 독자를 그럴듯하게 속일 수 있느냐인 것이다. 잘 속이고, 깊이 속이고, 많이 속이면 속일수록 독자는 기꺼이 그것에 환호한다. 대신 어설프게 속이면 화를 내고 분노한다. 


캐릭터는 일상에선 있을 법하지 않지만 어딘가 있으면 하고 바라는 존재가 캐릭터가 된다. 독자는 바로 인물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래서 어디선가 누군가의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나타나는 인물에  빠져드는 것이다. 달문과 모독의 관계도 보라. 달문과 모독이 내내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 하지만 그 과정이 모독이 꼭 무슨 일이 생기면 달문이 나타나 문제 해결을 해 주고 떠난다. 또 그러기를 세 번쯤 반복하는 것 같다. 그건 이야기의 법칙 중 하나다. 그것 이상을 넘어가면 떠날 거란 달문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다.


가끔 작가들 중에 그런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어느 순간 내가 만들어 논 등장인물들이 살아서 자기네들끼리 말을 하고 무엇인가를 하는데 그럼 난 그것을 받아 적을 뿐이라고. 그게 실제로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려면 캐릭터를 깊이 파야한다. 작가 스스로가 인물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으면 결코 독자를 매료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캐릭터에 대해선 빙산의 일각의 법칙을 말하기도 한다. 즉 말 그대로 우리가 작품에서 보는 인물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수면 밑으로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달문이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6백 페이지를 별 무리 없이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건 작가가 달문에 대해 여러모로 연구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이 작품은 달문을 위한, 달문에 의한, 달문의 소설 즉 인물 중심의 소설이다. 뭐 인물 중심의 소설이든 아니든 캐릭터는 너무나 중요하다. 사실 매설가인 모독이 처음부터 달문이 하도 특이한 인물이라 소설로 쓰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 그를 글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봉착하고 또한 쥐 영감과 그의 아들의 응원으로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모독이 초기엔 별 볼 일없는 작가 지망생에서 확실한 작가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난 이 부분에서 왠지 김탁환 작가의 그림자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도 지금까지 조선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모르긴 해도 누군가의 성원과 격려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 


역사 소설의 묘미는 당시 사회 문화상을 읽는 재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책방은 오늘 날로 치면 서점에 해당하겠지만 출판 인쇄가 발달하기 전이었으니 판매 보단 대여의 의미에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 거라는 건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소설은 어떻게 유통되었을까. 거기에 쥐 영감이 있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쥐 영감의 임무는 아무 소설이나 가게에 내놓을 수 없고 읽힐만한 소설을 가려내는 소위 감별사의 역할이었다. 얼핏 오늘 날로 치면 평론가일까 했는데 그 보단 기획이나 편집, 마케팅 등의 일을 하는 인물은 아닐까 한다. 그런 일은 오늘날엔 서점이 아니라 출판사가 하는 일이다. 그런데 비해 달문이 했다던 산대놀이나 운심의 칼춤에 관한 묘사는 상대적으로 적은 듯하여 그 점은 좀 아쉽다.


하지만 '고고한 연예'는 맞는 것 같기는 하다. 당대의 연예인들 즉 기생을 포함한 광대들을 우습게 보면 큰 코 다친다. 그들은 자신의 웃음을 팔았지 자존심을 판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삶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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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09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 이리뷰도 읽었고 댓글도 달았는데 오늘 와서 보니 내댓글 사라져버린 ㅜ.ㅜ
역시 북플에서 뭔가 쓰면 날아가버리나봐요.

스텔라 케이이님 이달의 당선작
추카 추카~

stella.K 2021-01-09 21:06   좋아요 0 | URL
엇, 정말요?
지금이라도 무플을 방지해 주시니 감읍할따름입니다.ㅠ

저도 스콧님의 이달의 2 관왕을 감축드립니다.^^
 

오랜만에 사브리나를 봤다. 사춘기 때 처음보고 그간 본 기억이 없으니 거의 백만 년만에 봤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1954년작이니 거의 로코의 원조는 아닐까. 

솔직히 보면서 욕 좀하려고 했다. 아무리 완벽한 작품이라도 흠은 있게 마련이니. 흠이라면 백인만 나오는 영화라는 정도랄까. 오늘 날로 보면 큰 흠이긴 하다. 안 그래도 트럼프 땜에 백인우월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지 않은가. 내가 알기론 감독이 백인우월주의자로인 걸로 알고 있다. 어찌나 부를 자랑하던지. 자가용만 7대가 있다고 하지 않은가.

 

근데 영화 자체로 보면 매력적이긴 하다. 프랑스 샹송 <장미빛 인생>을 변주하면서 적절히 잘 사용했다. 또한 그 노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뜻의 노래가 아니었다. 유리잔이 장미빛이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본 거라나 뭐라나. 그래도 이 영화는 충분히 장미빛 인생이다. 사랑하는 나날처럼 장미빛 인생이 어디있겠는가. 게다가 오드리 헵번의 머리는 한때 유행을 했다. 또한 그녀가 입고나온 옷은 지금 봐도 굉장히 세련됐다. 벌써 70년 가까운 영환데도 말이다. 이 영화를 흑백으로 봤다는 게 좀 아쉽다. 나중에 컬러로 복원됐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영화가 문제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사브리나는 부잣집 운전 기사의 딸이다. 어쩌자고 주인집 바람둥이인 둘째 아들을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순진한 처녀라니. 자기는 가난한 운전 기사의 딸일뿐이라고 자학하기 일보직전이다. 게다가 첫째 아들을 연기했던 험프리 보카트는 사브리나를 사랑하면서 자신이 정말로 사랑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멍청이다. 나중에 동생이 파리로 다시 떠나는 사브리나를 잡으라고 말하자 그제야 그럼 그래볼까 하며 꽁지가 빠지게 쫓아가는 모양새라니.

 

영화에선 바람둥이 보다 절도있고 진중한 험프리 보가트가 더 진실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으로 포커스를 맞추는 것 같은데 이런 사람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나중에 결혼하면 아내를 외롭게 할 가능성이 많은 타입이다. 아니 사랑해서 결혼해 주고 옷 사 주고, 좋은 집에서 살게 해 주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여자를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가끔 이상형이 어떻게 되냐는 말에 나만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고 다소 철없이 대답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말이 정답이긴 하지 않는가. 결혼하고도 끝까지 사랑해 줄 남자는 멍청한 첫째 아들 보다 바람둥이 둘째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사랑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잖냐고 말하면 할 말은 없다. 그건 그렇다.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삶이다. 사랑과 안락한 삶이 최고의 결혼이겠지만, 차선으로 가난하지만 사랑하는 것과 사랑은 없지만 안락한 삶이 보장되는 것이 그나마 낫고, 사랑도 안락한 삶도 보장 받을 수 없는 결혼이 가장 최악일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상대의 눈에 띄려면 멋을 부리라고 부추기도 한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사람은 예쁘고 잘 생긴 것만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는다. 예쁘고 잘 생긴 것만큼 옷도 잘 입고 지성도 뛰어나야 한다. 주인집 두 아들을 보라. 그나마 사브리나가 프랑스 최고의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금의환양 하니까 그때야 발정난 개처럼 주위를 어슬렁 거리지 않는가. 그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 같긴하다. 그래도 좀 아쉽긴 하다. 그런 것 없이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것을 보면 사람 좋아하는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냥은 좋아할 수 없는가 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지켜보길 바란다. 그녀가 걸을 때 얼마나 안정되면서도 우아한 보폭으로 걷는지. 거의 체조선수급이다. 배우는 만들어지는 거라고 분명 그 걸음걸이는 그냥 걷는 것이 아닐 거라고 본다. 오드리 헵번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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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12-01 00: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드리 헵번은 발레리나가 되려고 했는데, 키가 커서 발레를 못하게 됐다고 합니다 발레를 해서 걸음걸이가 좋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희선

stella.K 2020-12-01 15:43   좋아요 2 | URL
아, 그랬군요. 저도 그 생각은 했어요.
하긴 1950년대니 체조 보단 발레가 대중에게
잘 알려지긴 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체조 선수를 연상했던 건
나중에 오드리 헵번이 큰 아들의 집무실을 나가는 장면이
있는데 엉덩이가 생각 보다 크고 걸음걸이가
힘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발레는 아니겠구나 싶었죠.ㅋ

레삭매냐 2020-12-02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드리 헵번의 <사브리나> !

오드리 헵번 나오는 영화는
오로지 <로마의 휴일> 밖에는
모르는 닝겡이네요.
그나마도 하도 오래 전에 봐서
기억이 가물가물...

걸음걸이 주목하겠습니다.

stella.K 2020-12-02 19:17   좋아요 0 | URL
ㅎㅎ 어렸을 때 봤을 땐 그냥 오드리 헵번이
좋아서 자세히 안 본 것 같습니다.
첫번째 볼 땐 그저 스토리에만 치중해서 보는
경향이 있어놔서.
<로마의 휴일>도 다시 봐야하는데...

scott 2020-12-02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드리 첫번째 남편과 연애할때여서인지 사브리나에서 미모가 절정!이였던것 같아요 ㅎㅎ

stella.K 2020-12-02 20:47   좋아요 0 | URL
헉, 그런가요? 모르시는 게 없군요.^^
근데 첫째 남편이 누군가요?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소설 조선왕조실록 12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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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바람이 무섭다고, 이제야 김탁환에 빠져 지내는 요즘이다. 오래전 <노서아 가비>를 읽을 때만 해도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좋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 책이란 언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나 의미가 다른 것 같다. 지금도 역사에 크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이가 드는지 역사 소설이 가끔 당기기도 한다. 특히 이 책은 내가 관심 있어하는 글 쓰기 그것도 소설에 관한 성찰과 물음을 하고 있다.    


글 쓰기에 관한 책이야 지금도 여전히 인기 있는 종목이긴 하지만 주로 자기 계발서나 에세이 또는 전기류로 많이 나오지 소설로 나오기는 드문 것 같다. 김탁환 작가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소설이란 장르에 그것을 담아냈다. 그것도 서포 김만중의 작품을 모티브로 했다. 조선 시대 고문학이 그의 전공이고 보면 그도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런데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역사 소설가들에 대해 조금은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김탁환 작가도 대중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평단의 평가는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소설가라기 보단 스토리텔러라는 약간의 비아냥. 


물론 순수 문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장르로 보자면 별로 맞지 않아 보인다. 요즘 순수 문학이 그렇게 환영받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자세는 문학을 너무 작게 보는 시도는 아닐까 싶다. 역사 자체가 스토리텔링이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얼마든지 상상이 가능한 것이 역사 소설이다. 하지만 이만큼 잘 쓰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눈에 보이는 듯하고, 손에 잡히는 듯하다. 왜 독자들이 김탁환, 김탁환 하는지 알 것 같다. 좋은 작가는 독자가 먼저 알아보는 법이다. 고맙지 않은가. 김탁환 같은 역사 소설가 (그는 현대물도 쓰지만)를 통해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 그것은 또 '제탁 월드'를 구축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서포 김만중의 <사 씨 남정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더 정확히는 서포 김만중과 희빈 장 씨와 작중화자라 할 수 있는 모독에 관한 이야기다. 짐작하겠지만 모독은 실제 인물이 아니다. 작품을 위해 가공한 인물이고 그것은 김탁환 작가의 페르소나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꼭 같지는 않아도 그와 비슷한 이름이 그 시대에 흔히 불려졌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 시절 양반들이나 성에 이름을 붙였지 보통의 사람은 예명인지 별명인지 본명 인지도 모를 이름으로 불려졌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모독도 그리 신분이 높은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모독의 직업은 매설가. 조선시대엔 소설가를 그렇게 불렀나 보다. 물론 이 한 작품으로 조선시대 매설가를 다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사람이었을까 알고 싶어 진다. 모르긴 해도 그들은 그 시대 의원이나 예인들처럼 중인 이상의 신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재담가, 이야기꾼으로도 불렸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직업이 쉽지 않은 것처럼 매설가가 되는 것도 역시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선 팔도의 있는 책, 없는 책을 다 주워 읽는 것도 모자라 대국의 책까지도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오늘날 남의 나라 소설을 읽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만 당시론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 시대에 매설가의 권위는 거의 절대적이지 않았을까. 그때는 매설가가 아니면 양반이고 평민이고 어디서 이야기를 접하겠는가. 그 시대 작가와 독자들은 아직 문명의 이기를 경험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문득 그렇다면 문명의 이기 앞에 소설가들은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라디오가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소설가들은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을 거라고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라디오에서 성우를 내세워 이야기를 들려주니 비로소 이야기가 재밌다는 걸 알았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소설을 더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극장이 생기면서 소설가들은 그때야 불안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활동사진이란 것이 큰 스크린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데 자기네들도 빨려 들어가겠는데 영화를 보지 무슨 소설을 읽겠냐며 이제 소설의 시대는 종말을 고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건 라디오 쟁이들도 마찬가지다. 극장이 생겼는데 무슨  라디오 극장 같은 것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게다가 TV가 등장하기까지 했다. 그것의 등장 때문에 라디오는 물론 극장의 인기도 예전 같지 않아 졌다. 이쯤 되면 소설가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그 모든 것들은 약화되었을지 모르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심지어 오늘날 SNS와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시대인데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 시대 매설가들의 인기와 자부심은 상상을 초월했을지도 모른다. 가히 제왕은 아니었을까. 그러니 오늘날 '제탁 월드'처럼 누구누구의 월드는 이미 그 시대에부터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재미만 보장이 된다면 세책방에 내놓으면 되는 일이다. 서로 간에 질투와 경쟁은 있을지 몰라도 오늘날처럼 문명의 이기 때문에 약화를 경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오늘날 문학판의 복잡한 카르텔의 문제도 없지 않았을까. 글 쓰는 게 권력이 되고 누군가의 비호를 받아야 한다니. 상업주의를 견제하고 문학의 권위를 높인다는 명분을 내세울지 모르겠지만 작가는 독자를 즐겁게 해 줄 의무가 있고 그런 점에서 소설가를 포함한 모든 스토리텔러들이야 말로 가장 대중적이야 하고 상업적이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역설을 주장하고 싶어 진다.


물론 현대의 모든 작가들이 카르텔에 편승하지는 않는다. 어떤 작가는 누가 무슨 상을 받고 누구에게로부터 사사를 받았는지와 상관없이 하이틴 로맨스 같은 B급 소설을 쓰는 작가들도 있다. 또한 그런 책을 내주는 출판사와 서점이 있고 읽어주는 독자들이 있다. 그게 꼭 의미 없는 독서라고 어떻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책들 중 당대엔 B급으로 취급받던 책도 있다. 이 B급이라는 것도 요즘에나 정의 내린 거지 당대엔 굳이 그런 구분이 필요 없지 않았을까.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가 가장 그 시대를 대변해 주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B급이라고 말하는 마이너 한 형태가 그 시대엔 가장 보편적 형태는 아니었을까 감히 상상해 본다. 또 그런 점에서 지금의 서점은 아직 공평한 것 같기도 한다. 매대의 구조를 생각하면 그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서점은 돈 되고 고급 취향만을 취급하지는 않는다. 온갖 잡다한 책들을 다 구비해 놓고 있지 않은가.      


김탁환 작가는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서포 김만중을 통해 답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매설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하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질문은 꽤 오래전부터 있어 오지 않았을까.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서포 김만중도 소설을 썼지만 그를 두고는 매설가라기 보단 문필가라고 했을 것이다. 그는 대사헌까지 지냈던 것을 보면 학식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가 문필가로서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서는 모독과의 대비를 보면 짐작이 가기도 한다. 매설가는 그냥 이야기를 팔아먹고사는 존재일 뿐이다. 결국 매설은 양반도 쓸 수 있는 거지만 그런 문필가를 통해 그 격을 한층 높이지 않았을까.


서포 김만중이 <사씨남정기>는 희빈 장 씨를 겨냥해서 쓴 작품이다. 임금의 성은으로 희빈이 된 것도 부족해 황후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던가. 그것이 얼마나 인륜을 거스르는 파렴치한 짓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 썼다. 물론 오늘날 장희빈에 대해선 다른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선이 유교 사회이고 보면 지식인이었던 김만중이 그런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조정이란 곳은 온갖 거짓과 술수가 난무한 곳이고 보면 일일이 상대하여 싸우는 건 피곤하지만 이걸 소설로 쓴다면 글감은 넘쳐났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김만중이 누군가를 겨냥한 소설을 써도 되는지다.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는 글을 써도 쓸 것이 많을 텐데 굳이 그런 글을 쓰는 건 그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을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당장 그 책은 오늘 날로 말하면 불온서적으로 읽거나 소지하는 것만으로 참극을 면치 못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도 책의 존재를 말살하기 위해 분서를 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과연 그렇게 하면서까지 자신의 책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지식인의 양심 때문었을 것이다. 또 매설만큼 사람과 시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르가 또 있을까.   


본노가 없이는 글을 쓸 수 없고, 스스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면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작가가 있다. 분노 거기엔 반드시 분노를 유발하게 만드는 부조리한 인물과 상황이 있고 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싸우는 건 작가의 일이 아니다. 작가는 오직 글로만 싸울 수 있다. 그러므로 글은 그들의 무기다. 그건 결코 행복한 일은 아닐 것이다. 행복한 글을 쓰므로 독자도 행복하고 작가도 행복하면 좋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세상은 고대로부터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두 세계의 작가는 있을 수 있지만 김탁환 작가는 이것을 굳이 나누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작가의 딜레마는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자신도 완벽하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고발하고 훈계 아닌 훈계해야 하는 존재.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전지적 시점을 견제해야 하는 작가의 맹점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보통의 매설가 모독은 자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속죄하고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독이 맞다. 솔직히 왜 하고 많은 이름 중에 모독일까 조금은 불편했다. 작가 후기를 읽으니 김탁환 작가는 자신을 지독한 자기 모독적 존재라고 했다. 그래서 모독이란 이름을 쓰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고. 무엇이 그토록 스스로를 모독하게 만드는 것일까. 자존감을 가져라. 자기를 사랑하라. 이기적이 되라고 부추기는 시대가 아닌가. 하긴 그는 세월호 침몰 당시 너무 괴로워 앓아누울 정도였다고 했다. 그리고 소설 <목격자>에서 침몰하는 조운선에 죽어가는 사람의 이름에 자신의 한자 이름인 '제탁'을 끼워 넣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고 했다. 침몰하는 세월호를 보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이 한없이 부끄러워서. 책에서도 보라. 모독의 정인이 자신을 완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속이고 이용하려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무라기보단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려 하지 않던가. 이 또한 어쩌면 자기를 모독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새삼 소설가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모독해야 쓸 수 있는 존재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니 부쩍 김만중의 <구운몽>과 <사씨남정기>가 읽고 싶어 졌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봤지만 감히 읽을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국어 강의를 들어도 언급된 책을 읽을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는 건 그럴 수도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잘못된 것인가 알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김탁환 작가에게 어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아니면 어디서 우리나라 고전에 대해 읽어 볼 생각이라도 해 보겠는가. 앞으로도 내가 읽을 그의 책이 몇 권은 더 남아 있다는 게 나로 하여금 뭔가의 기대와 행복감을 갖게 만든다. 내친김에 우리 고전도 관심을 갖고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뒤에 그가 참고한 자료 목록이 나오는데 과연 그는 자료 벌레고 아무나 역사 소설 쓰는 게 아니구나 싶다. 작가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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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1-27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시대 한글로 쓰여진 문학 정말정말 좋아하는데 특히 구운몽 사씨남정기는 스토리 구성 재미가 뛰어난 고전이죠.
stella k님 페이퍼를 읽으니 다시 읽고 싶어졌네요.

김탁환은 리심, 노서아 가비 정도만 읽어봤는데,,,,
이렇게 한국적인 소재 한국 전통문학을 토대로 한 작품을 써내는 것만으로도 칭찬해줘야 할것 같아요.
옆나라 일본은 헤이케, 겐지 이야기, 괴담류 모노가타리 형식에 일본 전통 고전을 현대 작가들이 끊임없이 활용하고 이어가고 있는데 ,,,

stella.K 2020-11-28 16:13   좋아요 0 | URL
스콧님은 어떤 면에선 성향이 약간 비슷한 것 같네요.
하루키도 그렇고, 저도 노서아 가비 별로라서
리심도 있었는데 안 읽었어요. 마침 전 신경숙판으로
읽었던지라 김탁환까지 읽는 게 별로 안 땡기더라구요.
이 책이나 방각본 살인사건인가 백탑파 시리즈 1권부터 읽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더군요. 백탑파에 이덕무나 박지원 같은
조선의 걸출한 문인들이 나오잖아요.
그냥 무협 소설류 같아서 별로 관심도 없었습니다.

근데 스콧님은 도대체 안 읽은 책이 뭔가요?
여긴 독서 고수들이 많은데 스콧님도 예외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

페크pek0501 2020-11-29 1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선 맘에 드는 작가가 생긴 거 축하드려요. 유익하고 기쁜 일이죠.
옛날엔 화가도 얕보고 환쟁이, 라고 했잖아요. 지금의 예술가 위치와 많이 달랐죠.
역사 소설을 쓴다고 해서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그런 글을 써야 독자들이 쉽게 역사에 접할 수 있을 것 같아 저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누군가는 칼럼도 얕보더라고요. 소설 밑이라는 거죠. 게다가 문학이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우회해서 상황으로 보여 주는 소설이 있는 반면 메시지를 바로 직선으로 날리는 칼럼도 있어야 한다고 봐요. 짧은 글로 메시지를 읽어야 하는 것도 필요하거든요. 매번 메시지를 소설을 다 읽어야만 알 수 있다면 피로하죠. 신문에 칼럼이 많은 이유죠.

평론가들이란 소설가가 되고 싶었으나 그게 안 되니깐 평론가가 된 거라는 말이 있어요. 이게 맞는 경우가 있기도 하겠지만 누군가는 평론가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평론을 쓰는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댓글이 길어졌어요. 이만 스톱...ㅋ

stella.K 2020-11-29 18:46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 우린 좀 글을 포괄적으로 넓게 볼 필요가 있는데
너무 시야가 닫혀 있어요. 이건 좋고 저건 별로다란 인식이
필요없는 것 같은데. 옛날이나 어떨지 몰라도 요즘 칼럼 우습게 보면
안 되는데 말이어요.

평론가에 대해선 그런 말이 있긴하죠.
조선 시대 땐 세책방마다 평론가에 해당하는
쥐영감이 있었나 봐요. 뭐 평론가라기 보다
이 책을 팔아도 될지 안 될지 감별사 노릇을 했나 봅니다.
재밌죠?^^

레삭매냐 2020-12-02 1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적해 주신 대로 순수문학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본질은 매설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김탁환 작가는 오래 전 책 읽기 시작하던
시절에 자주 만났더랬는데...
<노서아 가비>를 마지막으로 끊었나
봅니다.

stella.K 2020-12-02 19:29   좋아요 1 | URL
그래도 주요 작품들은 다 읽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됐죠.
전 솔직히 어느 작가가 막 좋다가도 어느 순간
권태로워질까 봐 그게 좀 불안하더군요.
전 김훈 작가가 여전히 좋긴한데 어느 순간 잘 안 읽게되더군요.
싫어서라기 보단 여지를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그래야 좋아하는 게 오래도록 유지될 것 같다는 변명 아닌 변명 같은 변명을...
김탁환은 워낙에 써 놓은 책이 많아서 오래 좋아할 것 같습니다.ㅋㅋ
 

 

최근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가 다시 나왔다. 이번이 세 번째 출간이다. 출판사는 그대로다.

 

1995년 처음 출간해서 절판이었다 20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서 소량 복간됐다. 워낙에 양이 적어 누구는 사네 마네 한동안 서재가 술렁였다.   

 

그때 나도 이책을 살까말까 한동안 꽤나 망설였다. 샀다고 해서 읽으리란 보장도 없지만 귀가 얇아 소진되면 다시 못 보는 건 아닌가 싶어. 하지만 곧 사람들의 불만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포장이 불량이네. 번역이 아쉽다는 등. 안 사길 잘 했다 싶었다. 

 

이번에 나온 건 단순히 복간을 한 것이 아니라 개정 작업을 한 것이란다. 오류를 바로잡고 한글 맞춤법과 러시아어 표기법을 적극 반영했다는 게 출판사측 설명이다. 그러니 그때 안 사길 더욱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솔직히 그렇다고 이번엔 꼭 사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니다. 좀 잔인하고 비참할 것 같아서 읽을 자신이 없다. 그래도 고맙긴 하다. 아무리 유명한 책이라도 한 번 절판되면 복간이든 개정판이든 내기 쉽지 않을텐데 이렇게 내주니 말이다. 이미 알겠지만 이 책의 특징은 역사소설이 아니라 기록문학이라는 것이다. 관심있는 사람은 이번 기회에 사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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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20-11-24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몇 년 전에 그렇게 산 사람 여기 한명 추가요...ㅠㅠ 표지도 제대로 못 봤는데 개정판이라뇨...

stella.K 2020-11-24 19:33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표지는 지난 번과 같던가 비슷한 느낌이던데
고민되시겠어요.
책 좋아하는 사람은 초판부터 개정판까지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는가 본데 뒷북소녀님도 이책에 개정판도
장만해 보심이...^^

레삭매냐 2020-11-24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놔... 그 때 샀는디 -

물론 처음에 조금 읽다가 포기했다는.

stella.K 2020-11-24 19:41   좋아요 0 | URL
그때 매냐님 사신 거 저도 기억나는 것 같아요.
재미없던가요? 아무래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죠?
책은 좀 그런 난제가 있는 것 같아요.
기껏 샀는데 나중에 개정판 나오면 억울하긴 해요.
근데 전 이 책이 나중에 개정판이 나오지 않을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어요.
결국 적중했지만 출판사에겐 미안하지만 역시 못 사겠더군요.ㅠ

페크pek0501 2020-11-24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6권 읽기를 포기하는 사람, 여기 있어요.
저는 천 쪽짜리까지만 읽겠습니다. 이번에 <닥터 지바고>1,2권을 마련했지요. 총 천 쪽쯤 될 거예요.
언제 읽을지는 알 수 없다는...

stella.K 2020-11-24 19:45   좋아요 1 | URL
오, 닥터 지바고! 저도 요며칠 웬지 생각나는 책이었는데.
죄와벌도 문동판으로 다시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냥 생각만 있습니다. 나중에 중고샵에서 발견되면 모를까.ㅋ

2020-11-24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0-11-24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러시아 문학 번역 1세대 김학수님 번역이네요.
이분이 번역하신 ‘부활‘은 최고에요.
바뀐 철자법이나 현재 어위에 맞게 고치고 재복간된것도 대단하고 소수 독자들만 구입할텐데 다시 출판한 열린책들도 대단하네요.
저는 수용소 군도 세로로 된거 읽다가 눈알 빠지는 줄 ㅎㅎ

stella.K 2020-11-25 16:51   좋아요 1 | URL
헉, 그런 것꺼정...?!
저도 부활을 두 번인가 세 번 읽은 것 같은데
김학수 번역본을 기웃거려 봐야겠군요.ㅎ

그렇죠? 정말 소수의 독자만 읽을텐데...
세로줄이면 초판 때 읽었나 봐요.
1995년으로 나와있던데 그땐 세로줄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보다 오래 전에 나왔었나봐요.
정말 세로줄 쉽지 않은데 그렇다면 왠지 스캇님 저랑 연대가
비슷한 줄도 모르겠다는 의혹이...?!ㅎㅎ
암튼 대단하세요.^^

scott 2020-11-25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가 읽으셨던 책 물려받았어요 솔벨로우도 세로줄로 완독 법정스님 책도 세로줄 ㅎㅎ전혜린 수필 번역서도 세로줄 제 친구들은 전혜린이 전혜빈인줄 알아요

stella.K 2020-11-25 17:52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시군요. 아버님이 책을 무척 좋아하시는가 봅니다.
전혜린이 전혜빈...!ㅎㅎㅎㅎ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전 전혜린은 가로줄로 읽은 것 같습니다.
잘 기억은 나지않지만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로줄이었을 걸요?
그때 툴툴거리면서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가로줄로 읽으면 왠지 어른이 된 것 같아서 꾸역꾸역 읽었는데
역시 쉽지는 않았죠. 어린이 문고본은 가로줄인데 말입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