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오베린(Russell Oberlin)이나 파울 아벨 도 나씨멘토(Paulo Abel do Nascimento) 혹은 지미 스캇(Jimmy Scott)과 같이 Falsetto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옛날 카스트라토의 목소리를 내는 경우(매우 드문 경우고, 이름하여 endocrinological castrato라고 함. Kallmann's syndrome이라고 불리움)는 호르몬 분비의 이상으로 인하여 변성이 되지 않은 경우인데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카운터테너는 아주 특별한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 특별한 교육이라 함은 첫째, 가성발성의 특수한 발성법과 둘째, 이들 카운터테너들이 주로 부르게 되는 바로크 오페라 및 이들을 위해 특별히 쓰여진 레파토리의 연구이다.

보통 카스트라토와 카운터 테너를 음악용어에서 엄격히 구별하는데 이는 소리내는 방법이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카스트라토는 변성기를 겪지 않은 남성이 소프라노 파트를 담당한 경우이고 카운터 테너는 변성기를 이미 거친 남성이 가성에 의해 여성의 알토 파트에 상당하는 음역을 담당하는 경우를 말한다. 가성에 의한 발성은 그 음역에 한계가 있어 카스트라토 만큼 높은 음역을 구사하기 힘든데 이로 인해 그들은 알투스(Altus)라고도 불린다. 모든 성악이 그렇듯이 음역은 개인마다 차이를 보이는데 일부 카운터테너들은 옛날 카스트라토 못지 않게 넓은 음역을 노래하는 테크닉을 구사한다. 유럽의 일부 성당 합창단과 궁중에서는 옛날 가성 발성을 남자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교회음악에 필요한 높은 성부를 담당하게 하였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my.netian.com/~bjaehoon/second.htm, 재훈이의 classic park, 카운트테너와 카스트라토 참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카운터 테너의 역사는 유럽 음악사와 전통 아랍 음악의 종교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전서 14장 34절에서 "...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 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어 볼 찌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라고 한것에 의해서 중세의 교회에서는 여자들의 교회 안에서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모하메드도 어느 날 한 남자가 노래하는 것을 듣고 젊은 여자들을 현혹시킬 위험이 있으니 크게 노래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여러 상황이 남성이 남성들 앞에서 혹은 여성이 여성들 앞에서 노래하는 경우를 제하고는 지금까지도 일부에서는 성별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연주를 제한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아마도 8세기경부터 가성(Falsetto)의 사용이 일반화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연주상에서 남녀의 구별을 뛰어 넘는 유일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서기 822년 술탄(회교도의 군주를 칭하는 말) 하룬 아르 라쉬드 시대에 당시의 유명한 가수 Ziryab이 당시 술탄의 지배하에 있었던 코로바도 (현 스페인 도시)에 와서 그 유명한 가성발성을 전하였고 이 기술은 트르바도르(당시의 방랑시인들)에 의해 다시 널리 퍼져 급기야는 로마 교황청에 근무하는 성악가들에게도 전해졌다.

당시 여성들의 교회 내의 음악활동을 금했던 상황에서는 이 발성법으로 인해 교회 내에서도 양질의 변화있는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600년 까지 가성이 거의 모든 성악 부문에서 압도적인 추세를 이루다가 사회의 구조와 상황의 변화에 의하여 그 역할은 카스트라토(Castrator, 남성 호르몬을 억제시켜 변성기 전의 소리를 낼 수 있도록 거세된 가수)에 넘겨졌다.

Farinelli가 이에 속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 훈련을 받아 음악이 영글은 데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남성의 신체적 특징(넓은 가슴, 단단한 성대등)에 힘입어 여자들이 흉내내기 힘든 예술의 경지에 이른 그들의 발성법은 그 이후 오페라 혹은 오라토리오에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였다.

카스트라토가 비인간적인 방법에 만들어 진다는것 때문에 그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19세기에는 거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유럽의 일부 성당 합창단과 궁중에서는 옛날 가성 발성을 남자 어린이에거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교회 음악에 필요한 높은 성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1922년 마지막 카스트라토였던 알레산드로 모레스키(Alessandro Moreschi)가 죽자 성인 남자 가수가 여성과 비슷한 소리를 내는 그 어떠한 발성법도 그와 함께 사라진 것으로 여겨 졌으나 1940년대에 알프레드 델러(Alfred Deller)와 80년대의 아리스 크리스토 펠리스(Aris christofellis)등에 의해 가성 발성은 다시 그 아름다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독일 등의 유럽 각국에서 일어난 바로크 오페라의 부흥은 이들 새로운 기성 가수들인 카운터 테너들에 의해 그 깊이를 더해갔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my.netian.com/~bjaehoon/second.htm, 재훈이의 classic park, 카운트테너와 카스트라토 참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인 2004-07-23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운터테너를 좋아하시나보군요. 저도요. 누굴 제일 좋아하세요?

stella.K 2004-07-23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세훈, 글구 임주혁(?)이던가? 그 정도 밖에 몰라요. 근데 제가 글을 쓰는데 필요할 것 같아 올려 본 거예요.^^
음악 하나 들었으면 좋겠는데, 누가 링크 좀 안 걸어주나요?^^
 

영화 ‘파리넬리’에서 등장하는 여성의 음역을 노래하는 남성 가수는 바로 ‘카스트라토’입니다.

이들은 16∼18세기 유럽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성악가로, 사춘이 이전에 거세하여 음질적으로도 소년이나 성인 여성에 비해 씩씩하고 순수하며 또 음역도 훨씬 넓습니다..

그래서 16세기 이후 가톨릭성당에서 많이 쓰였으며 17∼18세기의 이탈리아오페라에서도 많이 쓰였습니다.

그 후 성당에서는 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행위를 금지시켰으며 오페라에서도 19세기 이후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죠.

20세기 후반 카스트라토가 사라지자 수술이 아닌 피나는 성악훈련을 통해 여성음역을 정복하려는 남성 가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영국 성악가 알프레드 델러(1912∼1979)를 기원으로 하여 현재 많은 카운터테너들이 활동하고 있다.

오늘날의 카운터테너는 카스트라토와는 다르며 가성(팔세토)을 구사하는 남성가수를 가리킵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in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ira95 2004-07-23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렇군요.. 옛날 대학다닐때 < 파리넬리 > 를 봤는데 남자 선배들이랑 봐서 낯 뜨거웠던 기억이 나네요....

stella.K 2004-07-23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기 낮 뜨거운 장면이 있었나요? 아, 저는 TV로 봐서 중요한 장면은 다 짤렸겠군요. 흐흐.

비로그인 2004-07-23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 무더운 날, 영화 <파리넬리> 중, "울게 하소서"가 떠오르는 날...

stella.K 2004-07-23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러주세요, 냉열사님의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코스비가족/블루문특급/외계인알프
맥가이버/브이/레밍턴스틸


 

 

 

 

 

 

 

소머즈/600만불의 사나이/미녀삼총사
A특공대/전격제트작전/에어울프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04-07-22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만 옛날 영화들이 그립다. 얼마 전에 끝난, <탐정 뭉크>도 좋고 <스몰빌>도 좋지만, 이 영화들 얼마나 좋았었는가?

잉크냄새 2004-07-22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맥가이버, V, A특공대 가 제일 재미있었죠.
특히 V의 남자 주인공 이름이 저랑 비슷해서...ㅎ

mira95 2004-07-22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레밍턴스틸>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ㅋㅋㅋ 아직도 기억나네요^^

바람구두 2004-07-22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상당히 익숙한 모습...
 
 전출처 : mannerist > [조광화 희곡집] 悲劇精神의 復活(下)

 21/  96. 11. 11.

연극을 통해 관객과 대화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연극에서 실지로 이루어지는 것은 관객과의 교감이다.


작가들은 보통 세상에 할 말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쓰고,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다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다 더 본질적이고 강력한 현상은 정서의 나눔이다. 생각은 정서의 교감이 발생한 후에야 정리된다.


지식인 시대의 작가들은 일종의 사상가들이었고, 작품을 통해 생각을 나누는 것이 일반론이었다. 주제라는 것도 작가의 세계관이 반영되는 문장들이었다. 정서는 그 주제나 생각을 다루는 데서 파생되는 부수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관객을 실지로 압도하고 있는 것은 무엇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무엇으로 환기되는 정서인 것이다. 정서 그 자체가 주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공연장에서 커뮤니케이션 통로는 정서다. 그리고 나의 정서의 핵은 열정과 열정의 상실이다. 나의 주제는 열정 자체와, 그 열정을 상실함으로 일어 나는 복잡한 심경이다.




22/ 96. 11. 12.

생의 열정과 강력함을 억누르는 것들은 무엇인가? 도덕과 정의의 기만성이다. 이른바 합리적 사고라 하는 진리들의 폐단. 그것들은 연극에 치명적이다.


도덕과 정의를 폐기하면 이 사회의 혼란을 무엇으로 막느냐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은 이데올로기들이 강화될수록 혼란은 더욱 늘어만 왔었다. 마치, 법조문이 하나 늘어 갈수록 범죄가 늘어 가듯이. 상식과 금기와 권위의 부정어법은 개인에게 니힐리즘에 빠지도록 유혹한다. 사회를 위하여 개인의 생명력을 희생하였다. 이제는 생이 보상받아야 한다.


니체에 의지하여, 니힐리즘을 이기는 길은 권력(강함)에의 의지다. 역시 니체에 의지하여, 예술의 존재 이유는 우리가 진리로 망가뜨려지지 않기 위해서다. 이 기만의 세상을 희생시키는 길은, 최소한 멸망의 속도를 늦추는 강력한 제어 수단은, 활동적 생명의 힘이다.


연극은 위기라는 절망감의 유행. 무엇보다 연극에서 생명을 되살리는 일이 시급하다. 그래야 관객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뤄진다. 배우들의 표출하는 강력한 생의 힘으로 관객들을 충격시켜 그들의 억눌린 생명을 해방시킨다. 그것이 연극의 효용이다.




23/

웃음의 유행.


이제 무거움의 연극은, 비극은 외면당하는가? 외면당하는 것은 칙칙한, 기운 빠지는, 죽은, 관념의, 껍데기 등등의 연극이다. 무거움의 묘사가, 추함의 묘사가 강력하다면 외면당할 이유가 없다. 생명의 힘을 가진 비극은 여전히 관객을 사로 잡을 것이다.




24/ 96. 11. 15.

다가오는 가상의 세계. 그럴수록 절실한 생체의 역동성.




25/ 96. 11. 18.

내가 신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곳에 정열에 가득 찬 원형적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26/

비극은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비극은 생명으로 가득 찬 정열의 불러 일으킨다.


비극의 마력은 그곳에 숭고한 정열이 꿈틀 댐으로써 가능하다. 셰익스피어 비극은 무엇으로 가치있는가? 그곳에는 일찍이 보기 힘들던, 이후에는 더욱 사라져 간, 정열적 인간들만이 가득하다.


반면에 희극은 약함을 숨기고 위선과 기만에 찬 정열들을 비웃는 것이다.




27/

비극의 부활. 즉, 비극정신의 부활.


전형적 허리우드 영화에서 보듯이, 스펙터클로 위장된, 요란한 갑옷으로 위장시킨 가짜 영웅들은 정열을 타락시켰다. 진정한 비극은 인간의지의 숭고함, 섬세함, 강력함으로 우뚝 선 정열적 인간의 등장으로 부활할 것이다.




28/

정열이란 의지가 농염해져 감지할 수 있는 형태로 발산된 것이다.




29/

정렬의 효용.


진정한 정열의 인간은 만인에게 잠자던 정열을 촉발시킨다. 마치 태양이 만물을 자극시켜 생명을 일으키듯이. 그리하여 만인은 그 정열로 인해 생의 환희를 경험하게 된다. 비극은 우리가 잊어가고 있는 정열을 환기시키는 일이다. 비극의 정열은 병든 의지를 회복시킨다.




30/

정열이 갖춰야 할 덕목. 균형과 자제.


이상적인 정열은 만인에 폭력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타 정열의 희생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 그 스스로 정열적일 그때에야 위대하다. 그러니, 니체의 초인은 일면 뻔뻔스럽다.




31/

정열의 종류.


a. 생명 자체의 정열 - 스스로의 의지로 가득 찬 정열. 삶을 고양시키고 숭고해진다.


b. 파괴적 정열 - 정치적 권력 지향이 일으키는 잔인함.


c. 흡혈귀적 정열 - 옛 정열들이 이룩한 형식이나 조직에 숨어 자신의 약한 정열을 위장하는 자들. 일종의 죽은 이데올로기들. 무너진 가부장들의 생존방식. 권위적 지도자들의 위선. 말하자면 가짜 정열. 약한 정열이 택하는 비열한 실현 방법.


d. 소비적 정열 - 욕망, 충동, 감각에 자극된 격정 등. 정열을 가다듬어 숭고해지기는 커녕, 있는 정열마저 탕진하는 퇴폐.


e. 기만당한 정열 - 가짜 영웅에 자극받은 헛된 노력.


현대인의 정열은 d나 e가 대부분이다.




32/

정열을 기만하는 자본주의, 또는 상업주의의 전략.

a. 가짜영웅 - 허리우드 영화에서 미화된 폭력, 사회적 명사들, 정치권력자들, 재력가들. 무엇보다 그들의 입장에서 적용되는 ‘정의’라는 외침. 정열이 타락한 결과물.


b. 정열의 탄압 - 조직과 자본을 위한 희생. 희생을 합리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의 도덕. 건전한 사회유지라는 명목으로 억압당하여 이윽고 왜곡되고 마는 개개의 정열들.


c. 정열의 상품화 - 가상현실. 정열은 수많은 가상 물질들에 소비된다. 결국, 재투자 없는 자원은 탕진된다. 자신의 생명감을 상실한 채 허상에 탐닉하는 퇴폐.




33/

정열을 기만하는 연출 중심의 연극.


공연성을 주장하는 당대 연출 중심의 연극들이 도달한 곳에서 정열은 기만당한다. 그들의 초라하지만 마취시키는 변명들은 웃음, 재밌음, 볼 거리, 탈언어, 무대적 역동성 등이다. 그러나 소홀히 다룬 것이 있었다. 배우의 정열이 제거된 것이다. 그 빈 자리는 기고만장한 연출자의 정열로 채워졌다. 무대는 그럴 듯한 포장들로 가득 찬다. 그럴수록 배우는 왜소해진다. 배우들은 연출가가 고안한 갖가지 아이디어, 장식들에 의지해 간신히 서있다.


자신감에 찬 연출들은, 배우의 정열을 외면하고, 자신의 위대성을 증명하기 위해 갖가지 껍데기들로 무대를 채운다. 곧 이어 연극은 쇼로 타락하였다.




34/

정열의 확인.


강한 정열은 단지 스스로를 높일 뿐이다. 약한 정열은 고난을 통해 그 반발력으로 감지된다.


35/

의지 대 폭력. 정열 대 완력. 의지는 생명 자체다. 폭력은 생명을 위협한다. 정열은 감화시킨다. 완력은 강요한다.


위선적 인간은 위장되고 미화된 폭력에 감동한다. 미화된 폭력은 사실 약한 정열의 증거다. 약한 정열은 폭력을 통해 자신을 강요하고 합법화한다. 그러나 위장을 벗기면 비열한 의도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연약한 정열을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위선자들은 폭력적이라고 돌팔매질을 한다. 미화된 폭력에의 감동은 비굴하다. 권력에 아부하는 것이다. 위장 제거에 경악함은 그들의 비굴을 들켰기 때문이다. 구역질이 난다.




36/

작가는 그 모든 정열들을 관찰하여, 위장된 신화를 걷어 내서, 정열의 원형들을 정직하게 드러 낸다. 배우는 그 정열을 만끽한다. 연출은 배우를 돕는다. 그때에야 비극은 부활한다. 숭고하도록!




37/ 96. 11. 19

고전적 비극이 정열을 환기시키는 방법. 성격적 결함을 가진 영웅이 강력한 고난을 당한다. 그 힘겨운 짐을 지느라 정열이 불려나온다. 이때 고난은 측량되지 않는 정열을 알아볼 수 있게 도와주는 계측기가 된다. 즉, 고귀한 성품과 고난은 정열을 가리키는 지시문이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후세들은 비극의 본질이 성격과 고난인 줄 알았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하여 가짜영웅이라는 괴물을 조제하였다. 이윽고 정열을 보는 감각이 무뎌져 간 관객들은 비극이 따분한 것으로만 여기게 되었다.


비극정신의 삶의 열정 자체에 고양되는 것이다.




38/ 96. 11. 21.

연극이 실험을 거듭하여 발전할수록 기개를 잃어 간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비록 세련되었다 해도 사로 잡지 못하는 연극이 늘어 난 것 아닌가. 조급해진 연극은 기개를 대신한 마취적 감각으로 관객에 아부하는 것 아닌가.




39/ 96. 12. 11.

문학적 연극은 시대에 뒤떨어졌는가?


아니다. 단지, 껍데기의 연극이 도태할 뿐이다. 비언어적 연극들도 쇼로 타락한다면 껍데기가 된다. 문제는 생동감으로 살아 있는 공연이냐 아니냐다. 진정한 연극은 인간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작가는 이상을 제시하고, 연출은 현실과 타협하고, 배우는 하루하루성실하게 살아 가는 생활인이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때 연극은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작가에 충실한 작가이기 어려운 시대다. 바로 이 시점의 대학로는, 포장만 남은, 그래서 허탈한 볼거리만 가득 찬,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오한 주제인 양 위장한, 우리들을 기만하는 연극이 주류다.


그러한 연극들은 진정한 극작가를 거부한다. 아니, 거추장스럽게 여긴다. 그들의 기만술이 들통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젊은 작가들이 수난을 당한다. 수난이라니? 우리 연극의 희망에게?




40/

갓 등단한 작가들은 기만의 연극으로부터 대학로 오리엔테이션을 받는다. ‘연극은 문학이 아니다’고. 그리하여 성공하고픈 신인작가들은, 공연이 되는 텍스트를 쓰고픈 신인작가들은, 구세대 작가들의 고리타분에서 벗어 나고픈 패기 찬 작가들은, 뭔가 새로운, 뭔가 연극적인 텍스트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작가정신이 아닌 연희적 테크닉을 나열하는 데 그치고 만다. 연희적 테크닉은 작가의 진정한 몫이 아닌데도 말이다. 작가가 텍스트에서부터 문학성을 포기한다면 작가는 없다. 대본작가가 있을 뿐이다.


대학로에 들어선 신진작가들은 인간에 대한 통찰과 세계관을 키울 의지를 제거당한다. 기만의 연극들은 당장 아쉬운 값싼 볼 거리 만들기를 부추긴다. 대본쟁이로의 강요. 이것이 우리 젊은 작가들의 운명이다.


아니 젊은 극작가는 없다. 사실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지 못하거나 공인받지 못한 작가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기만의 연극은 작가가 그의 세계를 세울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설혹 그 씨앗을 품었더라도, 애써 가능성을 발견해 주고 키워 주는 일이 없다. 실망한 작가는 대본쟁이가 되거나, 대학로를 떠난다.




41/

그러나, 작가들이여, 오만해지라. 연극적 氣의 바탕을 마련하는 극작가들은 그가 품은 기개와 이상만큼 오만할 필요가 있다. 힘찬 기운이 있다면, 아무리 문학적이고 말로 가득 찬 텍스트일지라도, 연극 창조자들을 자극시켜 창작욕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작가들이여, 기만의 연극을 누치 보지 말라. 눈치를 살피는 일은 연출이 할 일이다. 귿르은 극단 재정과, 관객의 기호와, 배우의 능력과, 기술적 한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연출의 엄살과 충고와 엄포에 귀를 닫아라. 눈치를 볼 사람은 연출이지 작가가 아니다. 우린 당당하게 자신의 세계를 주장하고, 연출은 현실의 제약 때문에 눈치를 준다. 그것이 각자의 역할이다.


부디, 연극이여, 작가의 오만을 관용으로 받아 주기 바란다. 그들의 오만은 천성이다. 큰 고기라야 다양한 요리를 내놓을 수 있다. 자신의 세계를 보이고픈 극작가들이여, 마음껏 오만해지십시오.


42/ 98. 1. 13.

무엇보다도 이 시대를! 이 시대의 관객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