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영화제 15일 개막

인터넷·극장 함께 진행
어수웅기자 jan10@chosun.com
 

▲ 네덜란드 후거브뤼그 감독의‘호텔’
인터넷과 극장에서 함께 즐기는 영상축제, 제 7회 서울영화제(SeNef 2006)가 15일부터 9월 17일까지 온·오프라인에서 열린다. 지난해까지 ‘서울 넷페스티벌’이란 이름을 갖고 있던 이 영화제는 온라인에 한정된 듯한 인상을 벗어나기위해 올해부터 ‘서울영화제’로 명칭을 바꿨다. 하지만 디지털과 뉴미디어에 바탕을 둔 새로운 영상문화의 가능성에 주목하겠다는 취지는 변함없다. 영화제가 열리는 4개월 동안 온라인(www.senef.net)에서 작품을 볼 수 있고, 9월 8일부터 17일까지는 서울 종로 일대(극장은 추후 발표 예정)에서 오프라인 영화제가 열린다.

올해는 경쟁부문과 비경쟁부문을 합쳐 광고·영화 등 총 22개국 137편의 영상물을 준비했다.

비경쟁부문은 ‘플래시 인터랙티브 광고제작그룹 특별전’, 2006년 독일 월드컵의 열기를 먼저 느낄 수 있는 ‘축구 만세’, 인도문화를 소개하는 ‘디지트래픽 인도’, 에로·호러 등 잠 못 이루는 밤에 즐길 수 있는 ‘세네프의 잠 못 이루는 밤’ 등으로 구성됐다. 또 디지털 익스프레스(국제)와 넥스트 스트림(국내)으로 나뉜 경쟁부문은 모두 89편이 자웅을 겨룬다. 다니엘 헤니, 귀네스 펠트로가 출연하는 감성적인 광고 ‘빈폴’은 웹 작품 부문에 상영되고, 완벽한 도미 요리를 위해 처절한 망상에 사로잡히는 남자의 이야기 나홍진의 ‘완벽한 도미요리’는 영화 부문에서 수상을 노린다. 심사위원은 정지우 감독, SF작가 듀나 등 모두 다섯 명. (02)518-4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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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 행복한데 왜 만족하지 못할까?

>>‘유부남 이야기’
>>‘타네씨, 농담하지 마세요’

우리는 초조함을 입에 물고 삽니다. 대개 심심한 것을 참지 못하다 사고를 치기도 하고요. “내 삶에도 반전과 활기가 필요해”하고 노래를 부르다가 그만 일탈이라는 위험한 선택을 합니다.

아르헨티나의 젊은 작가 마르셀로 비르마헤르가 쓴 ‘유부남 이야기’(histrorias de hombres casados)를 권해드립니다. 왜 멀쩡하던 30대 남자들이 어느 날 자기 목을 옥죄는 수렁으로 빠져들고 마는지, 이 책에 그 해답이 담겨 있습니다. 모두 일곱 편의 작품들이 엮였는데 일단 ‘세르비뇨 거리에서’라는 작품부터 읽어보십시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남자는 마누라 대신 아들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러 갔다가 그곳에서 금발 미인인 학부모를 만나 연애를 하게 됩니다. 마침 그때 아내는 다리에 생긴 뾰루지 때문에 병원에 갔다고 하네요. 항상 일은 그렇게 시작되지요. 저자는 “참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행복의 절정에 있으면서도 혹시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며 또 다른 길을 찾아나서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72쪽)는 것입니다.

비르마헤르가 독자를 공략하려고 장만한 무기는 두 가지, 유머와 섹스입니다. 심각하지 않으면서도 아슬아슬한 삶, 그 정 중앙에 화살을 날립니다. 그것들을, 우연과 반전과 복선에 섞어서 매우 재미 있는 이야기의 틀을 짭니다.

아참, 비르마헤르의 별명이 ‘우디 앨런과 서머싯 몸을 한데 합쳐 놓은’, 혹은 ‘한번 잡으면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요’라고 합니다.

프랑스 작가 장 폴 뒤부아의 장편 ‘타네씨, 농담하지 마세요’(Vous plaisantez, Monsieur Tanner)도 권해드립니다. 일단 너무 재미 있습니다. 이 책은 독신으로 사는 남자가 삼촌으로부터 엄청난 대저택을 유산으로 물려 받는 대목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래 살던 집을 팔아서 만든 돈으로 15년 동안이나 비워있던 그 대저택을 하나씩 수리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손으로 집을 지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모른다고 할 만큼 집에 손을 대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시종일관 익살과 해학을 잃지 않는 저자는 주인공 타네 씨가 기와공, 굴뚝 수리공, 미장공, 도장공, 배관공, 보일러공 등을 차례로 불러들여 1년 동안 일을 하면서 산전수전을 겪게 된다는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저자는 결국 우리네 삶이란, 얼굴 생김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은 결코 슬픈 일도 고통스러운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또 저자는 “우리는 절대로 집을 가질 수 없다. 그 안에 들어와 살 뿐. 즉 생활할 뿐.”(78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수리를 할 때는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안에 자리 잡은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집이나,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나 ‘서로에게 은밀하고 조용한 생태계가 되어줄 수 있다’(212쪽)는 것입니다. 황혼기에 접어든 부부처럼요.

아참, 집수리를 하다 보면 리비도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성적 욕망이 깨끗이 사라진다고 하네요. 저자는 ‘집수리의 공사판은 성이라는 것에 설 자리를 주지 않는 이 시대 최후의 보루다.’(87쪽)라고 외칩니다. 경험 있으십니까?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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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11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네씨는 읽어보고 싶더라구요.

stella.K 2006-05-11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그래요.^^
 

99세까지 88하게 사는 비결, 뇌를 속여라!

크리스 크로울리 & 헨리 S.로지 / 매일경제신문사 / 520쪽 / 1만5000원

 

 

 

80대의 나이가 되어도 40대처럼 살 수 있다고 말한다면 필시 노인들에게 건강기능식품을 판매하는 사기꾼이나, 허풍 심한 의사가 삶의 막바지에 이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하는 사탕발림 같은 소리처럼 들릴 지 모른다.

미국 최고 노인학 전문의 헨리 S. 로지(46) 박사와 노변호사 크리스(76) 두 사람이 공동으로 쓴 <Younger Next Year>라는 책은 이런 거짓말 같은 호언장담을 서슴지 않는다. 실제로 이 책은 50~60대 환자를 15년 동안 진료하면서 쓴 헨리 박사의 진실 보고서임과 동시에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윈드서핑과 스키, 항해를 즐기는 크리스의 생생한 경험담이기도 하다.

이 두 저자는 ‘정상적인 노화는 정상이 아니다’라고 역설하며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를 거부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뇌를 속이는 것이다. 헨리 박사는 생물학적으로는 은퇴나 노화는 없다고 주장한다. 단지 성장이나 퇴화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퇴화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우리가 몸에 보내는 신호를 바꿈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수백 만년 전 인류의 조상에서부터 지금까지 생물학적 진화를 거쳐오면서 우리의 뇌는 달리고, 사냥하고, 개척하고, 웃고, 놀고, 스스로 치유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살아남도록 만들어져 왔다. 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부실하게 영양을 섭취하고, 운동을 하지 않게 되면 우리의 몸은 그와 같은 상태를 ‘겨울’로 인식하여 최대한 빨리 삶을 종료하고 쇠퇴하라고 뇌에 신호를 보낸다.

다시 말해 퇴화의 파도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서는 사냥과 채집을 위해 봄에 하는 물리적인 일인 운동을 꾸준히 하여 우리의 뇌에 ‘봄’의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반응으로 인간의 몸이 더 강해지고, 날씬해지고, 효율적으로 변한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운동을 평생 1주일에 6일씩 해야 한다. 그리고 둘째, 1주일 중에서 4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상당한 유산소 운동을 해야 한다. 운동으로 땀을 흘리는 동안 쏟아지는 수백 개의 화학신호는 우리의 몸 구석구석에 ‘강화’와 ‘수리’의 메세지를 보내어 고장난 곳을 치료하고, 퇴화가 아닌 성장을 촉진시킨다.

길고 느린 저강도의 유산소 운동은 채집의 단계로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 대자연을 배회하거나 숲길을 걸어다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포도당을 연료로 사용하는 고강도의 유산소 운동은 사바나에서 무리를 지어 사냥하는 수렵단계의 육식 동물로서의 인간에 관한 기억을 불러 일으킨다. 이러한 운동이야말로 봄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로서 에너지가 넘치고 낙천적이고, 젊어지는 생물학적 변화를 불러 일으킨다.

세째, 근력운동을 추가해야 한다. 인간 자체가 근력운동을 하지 않는다면 근육 파열이 되고, 발목을 삐고, 다리가 부러지는 등 경미한 부상으로도 대자연에서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세가지 법칙들이 운동에 관한 것들이라면 나머지는 품격있는 노후를 즐기는 방법들이다. 네째, 소득보다 적게 쓰고 다섯째, 정크푸드에 안녕을 고하고 여섯째, 남과 나를 아끼고, 마지막으로 교류하고 헌신하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법칙들에 충실한다면 99세까지 팔팔(88)하게 살다가 2,3일만에 생을 마감하는(4) ‘9988234’의 인생을 누구나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두 저자는 약속하고 있다.

 

/이현주 헬스조선 기자 jooy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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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비전은 없고 분노만 있었다”

혼돈의 ‘여말선초’ 처음으로 해부한 김영수 교수
“공민왕은 불신·광기의 군주” 격동기의 복잡한 권력투쟁
정치학자 눈으로 쉽게 풀어


 
 
우리 역사에서 1352년부터 1392년. 고려 공민왕 때부터 조선건국까지 ‘여말(麗末) 40년’은 고려사이면서도 조선건국의 전사(前史)로서 더 큰 비중을 갖는 시대다. 대륙의 질서가 원(元)에서 명(明) 중심으로 바뀌고 있었고 고려 내부의 역학관계도 요동치고 있었다. 그 동안 이 시기는 공민왕 신돈 최영 이성계 정몽주 정도전 등 개별 인물을 중심으로 주목 받은 적은 있어도 ‘하나의 전체’로서 조명한 작업은 드물었다.

“역사에는 평화롭지만 평범한 시대가 있었고, 어렵지만 창조적인 시대가 있습니다. 여말은 전쟁과 폭정 속에서도 정치문화적으로 매우 창조적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정치와 사상을 입체적으로 해부한 최초의 저작 ‘건국의 정치’(이학사)를 펴낸 김영수 국민대 연구교수(46·사진). 97년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받은 박사학위를 재집필한 이 책은 분량도 두 배 이상 늘어난 840쪽이다. 3년간의 일본 동경대 유학을 포함한 10년의 공부가 추가됐다. 흔히 ‘여말선초’(麗末鮮初)로 불리는 한국사의 대표적인 격동기를 읽어내는 텍스트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책을 검토한 국사학계의 서울시립대 이익주 교수는 “아주 복잡한 시기의 복잡한 정치를 정치학도답게 권력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쉽게 풀어낸 것이 이 책의 장점”이라며 “특히 이 시기에 대한 체계적인 단행본은 사실상 처음 나온 것”이라고 평가했다.

책의 절반은 그 동안 역사학계에서 ‘개혁군주’로 불려온 공민왕의 정치를 해부하는 데 할애했다. “공민왕이 개혁의 의지를 가졌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설픈 개혁과 군신(君臣)간 신뢰의 파괴, 좌절과 연이은 실정(失政) 등을 보면 과연 그를 개혁군주라 부를 수 있을까 회의적입니다.” 김 교수가 복원해낸 공민왕은 오히려 불신과 광기의 군주다. 게다가 타락한 군주이기도 했다.

공민왕 후반기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신돈의 ‘대리정치’에 대해서도 지극히 부정적이다. “당시 부패한 정치상황에 대한 분노만 있었을 뿐 개혁을 이룰 만한 비전과 세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최근 끝난 TV드라마 ‘신돈’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해석이다.

여기서 반론(反論). 조선왕실의 입장이 반영된 ‘고려사’의 시각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 아닌가? 흔히 말하는 고려필망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 아닌가? “오히려 그 동안 학계는 ‘고려사’의 사료적 정확성을 폄하하면서 개인문집들에 바탕을 두고 당시 시대를 접근함으로 인해 전체로서의 여말선초를 보지 못했습니다.” 연구자 개인 취향에 맞는 인물들이 다소 과하게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탄생한 의미를 정신적 삶의 현세화, 정치적 삶의 윤리화, 폭정을 방지하기 위한 권력균형 세가지로 요약한다. 그러나 이 책은 완결본이라기보다는 새롭게 논쟁을 점화하는 신진학자의 도전으로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이한우기자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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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청춘아, 이병주를 읽어라

이병주 전집 한길사|전 30권|각권 9000원

▲ 생전 이병주 소설가의 집필 모습
나는 ‘이병주’라는 고봉준령을 오를 수 없다. 까마득해서 주눅이 든다. ‘소설 알렉산드리아’에 가기도, ‘관부연락선’을 타기도, ‘지리산’과 ‘산하’를 밟기도 힘이 부치고 ‘쥘부채’를 잡거나, ‘행복어 사전’을 뒤지거나, ‘그 해 오월’을 기억하기도 깜냥이 안 된다. 포기가 마땅하거늘 용심을 부리는 것은 가녀리나마 선생과 얽힌 추억이 있어서다. 선생이 내 손에 쥐어준 몇 톨 안 되는 말과 글의 이삭을 만지작거리자니 옷깃만 스친 그 인연조차 새삼 느껍다.

70년대 중반, 스물을 갓 넘긴 나에게 선생은 ‘문호(文豪)’로 다가왔다. 초기작 몇 편을 읽었을 뿐인데 내 마음은 송두리째 빼앗겼다. 그것을 ‘섬광에 눈 먼 자의 과장된 경념(敬念)’이라 나무라지 말라. 문학을 사랑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이제 이병주를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으로 나누자”라는 말까지 나온 것에 비하면 내 존경은 사사롭다. 인간과 역사, 전쟁과 이념, 정치와 애정이 종횡하는 작품 속에서 나는 막막한 미아였다. 선생의 문학적 편력이 겹쳐진 ‘허망과 진실’을 접한 나는 덧없는 인생과 배운 자의 허무에 몸서리쳤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 정약용과 사마천 등의 내면을 탐사한 이 에세이는 선생의 삶과 사상이 빚은 결곡한 마음의 지형을 엿보게 한다. 선생은 서문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은 ‘인생이란 결국 허망한 것’이라는 교훈을 가르쳐준다면서 이는 니체도 루신도 마르크스도 같다고 지적한다. ‘허망을 배운 사람은 이미 지옥을 보아버린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 허망을 뚫고 찾아낸 진실만이 지옥을 견디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란 인식이 굳어있는 것이다.’ 덧붙여 선생은 ‘허망하기에 진실이 아름답다는 것은 역설이 아니다.’고 말한다.

작가 이문열이 ‘허망과 진실’을 읽고서 ‘도스토예프스키의 평전을 써볼 생각을 포기했다’는 토로가 풍문처럼 들려올 즈음, 나는 선생이 언급한 라스콜리니코프의 히포콘드리아(우울증)가 내 평생의 숙환이 될 거란 예감에 젖었다. 선생의 저서는 전염성이 강했고 음영이 짙었다. 허망이 울증과 짝하며 나를 괴롭힐 때, 선생은 처방전을 쥐어줬다. 선생이 입버릇처럼 되뇐 ‘봉 상스 있는 딜레탕트’! 나는 그것을 ‘인생과 예술을 완미하는 양식인’으로 풀었다. 장강 같은 사유와 도저한 현학, 끝간 데 모를 박람강기로 내 덜미를 움켜잡은 선생의 행간에서 지금껏 꿈틀대는 구절은 ‘봉 상스 있는 딜레탕트’ 하나다. 반독재 투쟁과 민주화 운동이 안간힘을 쓰는 70년대의 겨울공화국에서 ‘완미’라니, 이 무슨 한가로운 사치인가. 날선 필봉을 휘두르던 한 언론인은 선생의 책을 끼고 살던 나를 그렇게 나무랐다. 그는 선생의 ‘회색’을 꼬집었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 어느 진영에 서서도 독자를 설득해내는 기막힌 변설 그리고 모든 추구를 도로에 그치게 하는 역사적 허무주의와 댄디한 망명의식은 현실의 고통과 모순을 희석하고 변혁에 동참하는 행위를 망설이게 한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나는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 이데올로기가 무슨 쓸모인가’라고 한 선생의 편에 서고 싶었고, 허망이 뼈에 저릴 때 그 좌절조차 완미하려는 한 인간의 내성(耐性)에 홀려있었다. 그렇게 내 청춘은 흘러갔다.

76년 지역의 문학 강연회에 초대한 인연으로 나는 용산 청과물 시장 한 귀퉁이 건물에 거처하던 선생을 자주 찾았다. 잔심부름을 시키는 선생이 고마웠다. 조도 낮은 집필실에서 3미터나 됨직한 책상에 수 천 장의 원고지를 쌓아두고 몽블랑 만년필을 혹사하던 선생이, 마냥 기다리는 나를 보고 “자네도 한번 피워보게’하며 건넨 것이 소련제 담배였다. 러시아어만 봐도 경기가 들던 시절 이를 도대체 어디서 구했을까. 선생의 도처가 경이였다. 일제의 학병으로 끌려가 쑤저우에서 군마(軍馬)와 지내다 걸린 동상 때문에 손가락을 자른 고통을 들으며 ‘8월의 사상’을 곱씹기도 했다. 레드 와인을 마신 후 멋들어진 붉은 콧수염을 쓰윽 문지르던 그 정경도 아슴하다.

▲ 손철주
선생은 ‘관부연락선’에서 운명적 정인(情人)으로 묘사된 서경애를 수소문해보라며 한때 교직에 종사했던 그녀의 본명을 귀띔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덮었다. 언론인 남재희는 ‘도덕과 부도덕의 경계를 허무는 선생의 행보’를 반추했지만, 나는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을 드러내는 청으로 받아들였다. 나의 편애와 독단은 선생을 진혼하지 못할지언정, 미망과 착종 속에서 방황하는 젊음들아, 그대들은 이병주를 읽어라. 내 추억은 이제 달빛에 물든 신화가 되고 있지만 그대들은 햇빛에 바랜 역사를 마주할 것이다. 

손철주·학고재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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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8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