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의 60번째 생일]세계가 감동한 ‘늙지 않는 고전’

1935년 ‘파리 수아르’ 신문의 모스크바 특파원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는 모스크바행 열차에 올랐다. 앞자리엔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자고 있었다. 그 뒤 생텍쥐페리에겐 작은 사내아이를 낙서하듯 그리는 버릇이 생겼다.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상을 받은 뒤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가 ‘전투조종사(Pilote de guerre)’를 발표한 뒤의 에피소드. 하루는 뉴욕의 한 식당에 갔다가 테이블보에 또 낙서를 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금빛 스카프를 두른 사내아이였다. 이를 본 미국인 편집장이 “그 아이를 주인공으로 동화책을 써보라”고 제안했다. ‘어린왕자(Le Petit Prince)’는 1943년 4월 이렇게 처음으로 세상 빛을 보았다.

비행사이기도 했던 그는 “이제 작가 일에만 충실하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찰 비행에 나섰다. 그리고는 코르시카 섬에서 지중해 상공으로 출격을 나간 뒤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1944년 7월 31일이었다. 자신이 떠나온 별로 되돌아갔다는 소설 속의 어린왕자처럼, 그렇게 그는 하늘에 박히듯 사라졌다.

어린왕자 초판은 1943년 미국 뉴욕에서 나왔지만 작가의 모국인 프랑스에선 1946년 4월 처음 출간됐다. 올해가 어린왕자가 프랑스에서 태어난 지 60주년 되는 해이다.

프랑스는 요즘 어린왕자의 ‘환갑연’을 베푸느라 들떠 있다. 생텍쥐페리가 태어난 지 100년 되던 2000년과 미국 뉴욕에서 출간된 지 60년 되던 2003년에 축하 파티를 치렀던 미국이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어린왕자 공식 웹 사이트는 물론 이 책을 처음 프랑스에서 출간한 갈리마르출판사 웹 사이트에 가보면 ‘어린왕자, 생일 축하해’ ‘1946~2006’이라는 그림과 글이 팝업창으로 떠오른다. 촛불 여섯 개가 켜진 케이크 앞에서 웃고 있는 어린왕자 옆엔 소설 속에 등장한 사막여우도 앉아 있다. 프랑스의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 웹사이트엔 어린왕자가 “양을 그려달라”고 비행기 조종사를 보채는 소설 앞 부분을 영화배우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도록 오디오 파일도 올라와 있다.

연극과 무용 등 어린왕자 공연도 올해 내내 계속된다. 오는 12월엔 구호단체인 ‘어린왕자’를 통해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모금하는 자리도 마련된다.

프랑스에선 요즘 ‘화가 생텍쥐페리’를 재조명해보자는 움직임도 한창이다. 갈리마르출판사는 그의 그림 500점을 담은 화집을 냈고 오는 9월엔 그의 미술 작품을 모은 특별 전시회까지 열린다.

▲ 프랑스 리옹에 있는 생텍쥐페리의 동상.
프랑스 사회에서 어린왕자 책 자체에 대한 인기는 다른 나라에 비해 떨어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랑스인에게 이 책은 프랑스의 자부심처럼 통한다.

1999년 여론조사기관인 CSA가 프랑스 성인남녀 101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어린왕자는 45%의 지지를 받아 금세기 최고의 문학 작품으로 뽑혔다. 같은 해 일간지 르몽드와 대형서점인 프낙(FNAC)이 프랑스인 6000명에게 ‘20세기를 대표하는 작품 50권’을 물어봤을 때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1위)에 이어 어린왕자가 4위에 올랐다.

생텍쥐페리 얼굴은 유로화가 도입되기 전 프랑스의 50프랑짜리 지폐에도 새겨져 있었고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같은 위인의 시신을 모셔놓은 파리의 팡테옹 신전에 가보면 첫 기둥에 생텍쥐페리에 대한 찬사가 적혀 있다.

프랑스인의 생텍쥐페리에 대한 사랑은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00년 6월 극에 달했다. 그의 고향인 프랑스의 리옹시는 ‘어린왕자의 도시’로 새단장했다. 사톨라스 공항은 이때 리옹-생텍쥐페리 공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00명의 비행사들은 전날 남프랑스에서 일몰을 기다리다가 일제히 이륙해 그의 소설 ‘야간비행(Vol de nuit)’에서처럼 날아서 리옹에 도착했다. 어린왕자란 이름의 열기구가 밤하늘로 날아오르고, 그의 비행 모습이 담긴 기록 필름이 대형 스크린에 투사되기도 했다.

프랑스가 이렇듯 국가적으로 어린왕자에 열광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어린왕자는 성경과 마르크스의 자본론 다음으로 많이 번역되고 읽힌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일간지 르 피가로는 최근 “어린왕자는 160개 언어로 번역됐고 프랑스에서만 1100만권이, 세계적으로 8000만권이 팔려나갔다”고 보도했다.

일본의 하코네에 있는 어린왕자 박물관엔 지난 5년간 100만명 넘는 관광객이 다녀갔다. 미국과 독일을 비롯해 국내에선 어린왕자가 오페라와 뮤지컬의 단골 메뉴로 선보인다. 어린왕자는 이제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이자 세계인의 마음의 고전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70년대 초 처음 번역돼 소개된 뒤 10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등록된 어린왕자 국내판은 100종이 넘는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의 구매팀 관계자는 “책과 만화, DVD 등 모든 장르를 따져볼 때 절판된 것까지 합치면 어린왕자 관련한 품목이 350여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며 “순수 문학서적만도 60~70종”이라고 말했다.

어린왕자에 대해서라면 나이와 국적을 불문하고 저마다 할 말이 많다. “그 책을 읽고 있으면 왠지 내가 착한 사람이 된 것 같아요”(30대 초반 기자) “내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그래서 내 인생과 사고가 어떻게 바뀌어가는지를, 너무 아름답게 표현했어요”(30대 중반 변호사) “자기가 길들이는 것에 책임져야 한다고 하는 부분, 섬뜩하더군요”(40대 초반 회사원)….

그렇다면 대체 어린왕자의 어떤 점이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걸까. 우선 줄거리를 보자. ‘소행성 B612호’라는 우주 속 작은 별에 장미 한 송이와 단둘이 살던 어린왕자는 장미가 까다롭게 구는 바람에 화가 나서 그녀를 버리고 혼자 우주 여행길에 나선다. 그러다가 지구라는 별의 사막에 추락한다. 마침 비행기 고장으로 사막에서 고생하던 비행사를 만나 대화가 시작된다. 그 뒤 여우도 만나고 뱀도 만나고 사업가, 허풍쟁이도 만난다. 그리곤 자신이 버린 그 장미야말로 자기가 책임져야 할 존재란 걸 깨닫고, 몸통은 사막에 버린 채 영혼만이 다시 외딴 별로 돌아간다는 단순한 줄거리다.

언뜻 보면 지극히 평범한 동화 같다. 하지만 어린왕자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다르다. 1970년대 후반 이 책을 처음 접했던 지금의 40대층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고 한다. 문체는 가볍고 삽화는 발랄한데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우수, 슬픔, 권태에 가깝다. 단지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하기엔 모자랄 만큼 우리 인간사를 꼼꼼히 묘사해놓았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이들에겐 동화요, 어른들에겐 철학서가 된다. 한 비평가는 “동심이란 원래 사물을 보고 놀랄 수 있다는 것”이라며 “이런 감성을 잃어버린 어른에게 많은 걸 일깨워준다”고 말했다.

최근 출간된 ‘어린왕자의 수수께끼가 풀린다’(CHO 미디어간)에서 요시다 히로시는 “어린이에게는 수수께끼를 던지고 젊은이에게는 경고를 주며 어른에게는 반성을 촉구하는 책”이라며 “인생의 전기마다 반복해 읽어야 한다”고 했다.

최근 어린왕자 번역서를 출간한 도서출판 이레의 원미선 주간은 “어린왕자의 힘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며 “중학생 때 읽고 대학생 때 읽고 나이가 들면서 읽을수록 새롭게 와 닿는 게 어린왕자”라고 했다.

지난 4월 25일 서울 창동에 있는 서울열린극장, 뮤지컬 ‘어린왕자’(서울시 뮤지컬단)가 공연되고 있었다. 평일 오후 관람석을 가득 채운 이들은 대부분 유치원생, 초등학생이었다. 금발머리를 하고 허리춤에 칼을 찬 어린왕자와 얼굴에 꽃잎을 단 장미가 무대 위를 뛰어다녔다.

“아저씨, 술은 왜 마시나요?” “잊기 위해 마셔” “뭘 잊으려는데요?”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배우는 건 슬픔과 좌절뿐이라고요.” “예쁜 장미는 내 옆에 있었지만 왜 난 가시만 봤지? 이제 내가 당신을 그리워해요. 내가 당신에게 길들여졌어요.” “절망이란, 좌절이란 없는 거야. 슬픔이 있기에 기쁨도 있는 거야. 화가의 꿈을 버리고 슬퍼했지만 비행사가 되지 않았다면 이런 기분 몰랐을 거야.”

연출은 익살맞기만 한데 대목마다 생각할 거리를 던졌다. 옆자리에 있던 한 학부모는 “여고 시절에 읽을 땐 이렇게 어려운 얘기인 줄 몰랐다”며 “아이들이 저걸 어떤 식으로 이해할까 궁금하다”고 말했다.

어린왕자가 별을 여행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현실감 없이 잘난 척만 한다. 권위만 따지는 왕,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술 마시는 술꾼, 별을 사모으기만 하며 돈을 밝히는 사업가, 탐험은 않고 아는 척만 하는 지리학자…. 그 속에서 사랑, 고독, 죽음, 돈, 권력을 얘기한다.

인구에 회자되는 명대사도 어린왕자의 힘이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서로를 길들이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같은 대목은 학창 시절 연애편지에 한번쯤 긁적거려 봤음직한 것이다.

▲ 영화 '어린왕자'.
글은 남의 얘기를 전하기보다 자기 얘기를 쓸 때 더 힘이 실리게 마련이다. 어린왕자는 사실 작가인 생텍쥐페리의 자서전이나 다름없다. 동심을 잃고 어른이 돼 버린 비행사도 그이고, 순수해서 무슨 말이든 솔직히 할 수 있는 어린왕자도 바로 그다.

‘모나리자’를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예술가이자 수학자, 과학자, 역학자였듯이 생텍쥐페리는 기자, 작가, 비행사, 발명가였다. 그의 증조카인 나탈리 데 발리에르는 자신의 책에서 “조종사이자 시인이자 철학자이고 기자이면서 마법사, 발명가였던 할아버지는 문학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며 “그의 글쓰기가 독창적인 것은 풍성한 이야기로 가득 찬 자신의 삶을 투영시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생텍쥐페리’를 주제로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던 단국대 불어불문학과의 정소성 교수는 “어린왕자가 우주를 날아다니는 것은 비행사였던 생텍쥐페리만이 쓸 수 있는 것”이라며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고 위기 상황에 있던 조국에 대한 불타는 애국심을 가진 사람의 혼이 투영된 자기 기록”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개인 생활이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책 속의 등장 인물은 전혀 다른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어린왕자가 버렸던 장미꽃은 작가의 부인을 뜻할 수도, 생텍쥐페리가 미국으로 망명한 뒤의 조국 프랑스을 뜻할 수도 있다. 이 모든 장치가 어린왕자를 지금껏 우리 곁에 살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된다.

“내가 죽은 것처럼 보일 거야. 하지만 그게 아니야.” 프랑스 리옹의 벨쿠리 광장에 있는 생텍쥐페리의 동상 앞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확인되지 않은 죽음 덕분에 영생을 누리고 있으니, 이 순간 등에 불을 붙여 별빛으로 우리에게 ‘안녕~’ 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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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5-19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갑니다

프레이야 2006-05-19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져갈게요..

승주나무 2006-05-19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어린왕자와 해후를^^ 가져갑니다

stella.K 2006-05-19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비연 2006-05-20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담아요...참 좋네요~

초록콩 2006-05-24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것 가져가도 돼지요^^근데 제가 리더스가이드에선 누군지 아시남유???
전 가끔 님 서재에서 놀다가는 데.ㅎㅎ

stella.K 2006-05-24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누구시죠? 리더스 가이드에선...? 조사들어 갑니다.
 

 

신화속에 담긴 한국인의 정체성


국문학자이자 민속학자인 김열규(75) 서강대 명예교수가 우리 전통 신화와 전설 속에 담긴 상징의 세계를 재미있게 풀어쓴 책 ’한국인의 자서전’(웅진)을 펴냈다.

김 교수의 50년 연구성과가 담긴 이 책은 ’어머니’ ’탄생’ ’자라고 크고’ ’사랑’ ’결혼’ ’세상살이’ ’죽음’ 등 일곱 개의 항목을 통해 한국인의 삶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한국인의 정체성과 정신세계를 풀어낸다.

책에는 우리의 첫 어머니인 물 어머니와 산 어머니를 시작으로, 어머니들이 신에게 아기를 점지해 달라고 거대한 남근석에 돌을 비벼댔다는 ’아기 빌이’ 신화, 옛 여인들의 입술 신화, 선덕여왕의 대담한 ’섹스 담론’ 등이 펼쳐진다.

또 오리 입부리, 바리데기, 번데기 무덤, 혼불 등 주옥같은 상징을 뽑아 한국인의 삶과 사랑, 죽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 교수는 한국인을 대표할 수 있는 상징으로 소금의 ’간기’를 꼽으면서 한국인의 집단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짠지 인생을 땀범벅으로 살아 온’ 한국인의 모습을 펼쳐 보인다.

특히 ’어머니’와 ’페미니티’(여성다움)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김 교수는 “한국인의 짠지 인생에서 그들은 소금 단지 구실을 도맡아 왔다”고 말한다.

저자는 “50년간 신화를 연구하면서 ’한국인이 누군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며 “이 책을 통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존재의 산산조각을 한 덩치가 되게 하는 ’영혼의 동아줄’ 같은 것을 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280쪽. 1만2천원.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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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5-19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풍경> <대중문화의 겉과속> <카스테라>
내일 어떤 것을 가져갈까요? 아쉽게도 무거워서 다는 못 가져가요 흐흐흐...

2006-05-19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6-05-19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그래요? 잘 모르겠네요.
 

◆슈테판 클라인 지음 | 유영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352쪽 | 1만3000원



우연과 필연의 문제는 철학의 고전적 주제다. ‘자유 의지’냐 ‘결정론’이냐는 대표적인 논쟁 거리였다. 실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노래방 가요 목록에는 ‘우연’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유행가만 10개가 넘는다. 2000만 명이 넘는 남자(여자) 중 지금 내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이 사람과 살을 섞은 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이었나.

그런데 바이오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독일 권위지 ‘슈피겔’에서 학술 담당 기자로 활동한 이 책의 저자는 우연이 ‘법칙’이란다. 하긴 2001년에 낸 다른 책의 제목은 ‘행복의 공식’이었다. 자신이 제시한 공식대로만 하면 행복해진다는 그 책은 21개 언어로 번역돼 베스트셀러가 됐다.

뉴턴의 혁명적 발견 이후 서구를 지배해 온 필연과 법칙, 확실성의 세계가 흔들린 건 20세기 물리학 때문이었다. 소립자가 일정한 법칙에 의해 일정한 값을 갖고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양자역학이 밝혀낸 것이다. 게다가 수학자 괴델은 ‘불완전성의 정리’를 통해 수학적 논리 체계로 모든 명제를 증명할 수 있다는 기존의 믿음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찰스 다윈은 자연의 다양성을 우연으로 설명했다. 어떤 생물도, 인간의 어떤 특성도 계획에 따른 것은 없으며, 목표도 의도도 없이 그저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이 없기 때문에 우연히 생겨난 것이 그대로 유지된 것이 바로 ‘진화’라는 선언이었다.

수많은 우연은 대부분 ‘복잡성’과 ‘자기 연관성’이라는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또 지구 생명의 시작서부터 컴퓨터의 개발까지 우연은 ‘창조자’로서 행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연을 뜻하는 영어 ‘chance’를 떠올리면 된다. 우연은 기회이자 행운인 것이다. 때로는 불안과 위험이지만, 우연은 필연이 갖지 못하는 가능성으로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자, 이제 아내(남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라. 당신의 가능성이 거기에 있을 테니.

(신용관기자 (블로그)qq.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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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하루동안 먹는 음식을 알려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주겠다, 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과거 내 대화의 52%를 차지한 것은 인용의 출처를 정확히 밝히는 것이었는데, 이런 것은 소위 핵심은 되지 못해도 핵심을 빛내는 악세서리로 빛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말할 때 종종 출처가 모호하게 기억나는 경우들이 있어 말하는 방법이 변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 어느 소설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어느 사람을 알고 싶다면 그 사람 집의 어느 부분을 보겠어?’라고 묻는다. 같은 질문을 친절한 ㄷ 씨에게 해보았더랬다. 그는 여러 모로 내게 가장 손쉬운 인터뷰 대상이고 그만큼 재미있는 분석 자료이기도 하다. 어떤 순간은, 그 사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백과사전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떤 항목은 펼쳐보고 싶어 너무나도 궁금하지만, 어떤 대목은 소름끼치도록 보기 싫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장이건 간에, 그 사람이라는 백과사전서는 내게 어느 부분이나 펼쳐 읽고 싶어진다. 마치, 기다리던 책을 알라딘에서 주문해 놓았고, `나의 계정’에 들어가 보니 `배송 완료’라고 쓰인 버튼이 깜박거리고 있는 것을 본 기분.


달리 묻자 그는 한 집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화장실, 이라고 말했더랬다. 화장실이라니, 순간 우리집 화장실이 생각났다. 가족들이 제각각 쓰는 샴푸와 린스, 바디 클렌저 등을 모두가 각자 취향대로 쓰는 이유로 수납장은 터져나갈 것 같고(정말 오만가지 플라스틱 병들이 다 모여있다) 휴지걸이 옆에는 언제나 책이 꽂혀 있는데, 그 책들 역시 서너권은 된다. 모두가 읽는 책들이 제각각 다른 까닭인데, 어찌보면 내가 사는 집의 키워드는 책이 될 것이다.


우리집에는 책이 넘쳐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면 하울이 정말 우울해 할 때에 검은 액체 같은 것이 넘실대면서 하울의 방에서 빠져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나는 우리집에서 검은 액체가 넘실대듯 책들이 걸어나가는 것을 상상해 본다. 부엌에도 책이, 거실에도 책이, 화장실에도 책이 있다. 읽을거리가 없는 공간은 이 집에는 없다는 듯. 하물며 내 방은, 정리를 한다고 애를 썼음에도(물론 아주 가끔) 불구하고 언제나 헛된 수고를 했다는 듯 책들이 넘실댄다. 비단 천여권의 책을 짊어지고 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소장한 책은 이삼백 여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리는 되지 않고 책들은 넘실댄다.


어릴적 살던 양옥집에는, 작은 다락방이 있었다. 그 다락방에서 엄마는 하루에 한 권씩 책을 꺼내다 주었다. 매일같이 한 권씩 나오는 이야기들, 어느날 그 전집을 다 읽어버려서 엄마는 책을 꺼내달라는 내게 `이제 다 읽고 없어’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게 있어서 그 다락방은, 책을 하루에 딱 한 권씩 찍어내는 공간이었는데 그 공간에서 더 이상 책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날의 상실감에 풀이 죽어있자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두권씩 퇴근길에 책을 사오셨다. 그 속에는 어느날 고무신을 신고 출근하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있었고, 기숙사에 가기 싫어 울던 금발머리 소녀가 있었고, 탑 위에 지어진 학교가 있었다. 나중에 나는 어두운 것을 무서워하는 꼬마 흡혈귀와 비밀노트를 쓰는 옛 러시아 공주의 이름을 가진 소녀와 귀머거리 바이올린 켜는 소녀를 만났다. 초콜렛 공장을 여행하는 아이와 구두속에 사는 난장이들, 빗자루를 빼앗긴 마녀도 만났고 일기를 쓰던 안네와는 조금 다른, 생선 잡이 배 속에 숨어 도망가는 유태인 소녀도 만났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책 속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는데, 더 이상 그 책들을 모두 보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주 아끼던 몇몇 시리즈는 아직도 보관을 하고 있는데 어떤 시리즈의 삽화는 정말 그린 이가 정성을 다한 것이 느껴진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초에 나온 그 책들이 독일 가정의 식탁을 그대로 그리고 있기도 하고(이를 테면 삶은 달걀 홀더, 독일 초등학교 교실까지도)주인공이 성장하는 모습에서 이전의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리기도 했다.


책을 거의 사지 않았던 것은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진학을 하면서였다. 도서관에 빠져버린 나는 신청만 하면 책이 들어오는 시스템에 맞추어 거의 책을 사지 않았고 당시 내가 읽던 책의 80%는 도서관에서 산 책, 당시 내가 구입한 도서의 90%는 도서관에서 읽은 다음 너무 좋아서 읽고나서 구입한 도서였다.


한 번은, 친구 한 명이 내게 소개팅을 주선하겠다며 운을 떼었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나와 코드가 맞을 거란 말을 하다가 말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네가 화장품 안사고 옷 안사고 모은 돈으로 책 사는 것처럼, 그 사람은 책 사려고 딱 책 사는 데에 필요한 돈 만큼만 아르바이트 해.’ 그 말에 나는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더랬다. 당시에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존경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고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을 읽지 않았거나 노르웨이의 숲 에서 여자아이가 쌌던 도시락 반찬(우메보시였다)을 모르는 이는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은, 책 이야기 말고도 할 이야기가 많아진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책을 읽는 것을 위험하다고 생각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종 어떤 남자들은 내가 읽는 책들을 무섭다, 라고 하거나 이상하다, 라고 말한다. 상종을 말자, 라고 생각한 것은 어설픈 치기일 수도, 자만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세계를 무섭다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이와 소통하지 않을 자유 정도는 내게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존중받고 싶지만 내 세계를 강요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지 않고 그녀의 작품세계가 그닥 궁금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아버지(금융위기 때에 지어진 괴상한 소설이다. 솔직히 말한다면, 그 책을 인쇄하느라 베어진 나무들이 아깝다)같은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혹평밖에 나오지 않지만, 그 책을 감동적으로 읽었다는 이를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누구나 자신의 취향이 있고 탐닉하는 세계가 있다. 단지, 내가 그, 혹은 그녀들을 존중하는 만큼만 나도 존중받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다.


어느정도 쉽게 읽히는 책들도 좋고, 어렵게 읽히는 책들도 좋지만 꼭 필요한 것은 `재미’이다. 내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책은 잘 읽지 못한다. 이를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들을 나는 재미 하나로 읽었다. 이반과 알료샤, 혹은 도박판의 절망, 늙은 노파, 이런 사람들을 읽던 겨울날 내도록 나는 행복했다. 그와 동시에 지금 읽는 닉 혼비의 소설들, 막 읽으려는 폴 오스터의 에세이도 그러하다. 재미 라는 것이 꼭 전자오락 할 때만 나오지는 않는다. 어쩌면 나는, 활자 중독일지도 모르겠다. 그 생각을 한 것은 읽을 거리가 없어 칠리 소스 뒷면의 구성성분을 읽던 순간이었다.


지금 내 방 책장에는 나라별로 정리된 책들이 꽂혀있다. 가장 넘쳐나는 폴더가 영국, 한국이며 최근에는 미국 폴더도 꽉 차기 시작했다. 독일, 이탈리아 쪽이 좀 한산한 것이 마음에 찔려 그 쪽에 장식을 하려고 구스타프 클림트의 매직 큐브(생각보다 정말 별로였지만)를 주문했었다.


지금 나의 계정에는 또 한 권의 책이 배송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두 권을 주문해야 할 것을, 어쩌다 보니 급한 마음에 한 권만 주문한 것. 우리 지역을 담당하시는 택배 아저씨가 이쯤 되면 우리집이 아주 친숙하게 느끼실 것 같기도 하다. 무슨무슨 택배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던 것을 알라딘입니다, 라고 벨을 누르신다니 분명하다. 고마운 마음에, 매일같이 걸음하시게 하여 미안한 마음에 미숫가루라도 하나 타서 드리고 싶기도 하다. 어느날 집에 있던 중에 알라딘입니다, 라는 말을 듣게 되면 꼭 그리 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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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정말 모를 일이랍니다

김광일 기자의 책 읽어주는 남자

남자가 말합니다. “난 너와 사랑에 빠졌어. 가슴과 머리, 그리고 온몸으로.” 잠깐 멈칫하던 여자가 대꾸합니다. “아, 루카스… 제발 다른 이야기하자. 밥 식겠다.” 아, 밥이 식다니요. 남자는 이제껏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말을 힘들여 쏟아내고 있는데, 도로시라는 여자는 음식이 식을까 걱정이나 하고 있네요. 삶이란, “빌어먹을.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183쪽)요.

최근 독일의 젊은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요헨 틸(Jochen Till)의 장편 ‘안녕, 오즈’(Nichts wie weg!)를 권해드립니다. 책 분량은 꽤 되지만 내용은 간단합니다. 루카스라는 독일 대학생이 홍콩을 거쳐 호주로 바캉스를 떠났다가 도로시라는, 꽤 괜찮은, 그러나 연애와 인생에 대해 상처부터 먼저 알아버린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눈 떠가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이 소설도 무쟈게 재미있습니다. 초록색 풋사과 같기도 하고, 초여름 햇빛에 녹아버릴 비누방울 같기도 한 문장들이지만, 요즘 서유럽 젊은이의 솔직한 감성들이 세련된 형태로 드러나 있습니다. 루카스는 도로시와 ‘조루성 첫 경험’을 하고 나서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그것은) 내 동정의 상실, 최대 순수의 상실, 그리고 내가 이 방면에서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믿음의 상실(이었다). 난 곧바로 정점에 도달하고 말았던 것이다.”(190쪽)

근데 맥 라이언과 케빈 클라인이 나오는 영화 ‘프렌치 키스’에서처럼, 너무도 기분 좋은 경험을 한 주인공이었지만, “빌어먹을”이라고 말하게 되는 사연은 있습니다. 루카스에게 먼저 다가간 것은 도로시였는데, 고개를 돌리는 것도 도로시거든요. “네가 키스도 못해본 채 살아가도록 내버려 둘 순 없잖아. 내가 기꺼이 너의 첫 키스 상대가 되어줄게…. 그러나 너를 좋아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방해가 돼. 당분간은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아.”

⑮세용 소설로 풋내를 맛보셨다면, 다음 코스로 ‘?세용’에 빠져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베로니크 올미(Veronique Olmi)라는 프랑스 희곡작가가 쓴 소설 ‘비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La pluie ne change rien au desir)입니다.

비 내리는 어느 여름날 오후 파리의 도심에서 한 여인과 그 여인의 전 남편이 만납니다. 특별히 용건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대개 프랑스적 소설이나 영화의 분위기가 그렇습니다만, 별 뜻 없이 스치는 스킨십이 모든 변화의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헤어진 지 5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어색한 분위기에 어정대다가 공원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테니스 코트도 회전목마도 비에 젖어 멈춰 있고, 두 사람은 우발적으로 입맞춤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호텔로 이끌어 들어가 정사를 나눕니다. 정열이 아닙니다. 그저 살아간다는 것이 제 옆구리를 드러낼 때 언뜻 보이는 상처들에 관한 뒷담화인 셈입니다.

이 소설은 마치 모든 어휘와 문장에 스타카토 음표가 찍힌 듯 짧게 끊어지고 연결되는 리듬감이 일류입니다. 그 속에 두 사람이 잊고 있었던 상처들이 때늦은 존재증명서를 들이밀면서 새로운 화해를 권합니다.

우리는 헤어지기 위해 만나는 것인지, 아니면 만나기 위해 헤어지는 것인지, 빌어먹을, 정말 모를 일입니다.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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