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부자들 ‘책 읽어주는 노예’ 두기도

찰스 디킨스는 낭독회 수입이 원고료보다 많아
‘소리 책’은 인류의 본래 독서방식

▲ 표정훈 출판평론가
책 읽기의 읽기는 본래 ‘소리내어 읽기’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소리내어 읽음으로써 비로소 텍스트가 완성된다고 보았다. 고대 로마의 부자들은 책 내용을 통째로 암기하고 있다가 주인의 명령에 따라 내용을 들려주는 노예를 두기도 했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책’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극장이나 공중목욕탕 등에서 낭송회가 열리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를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대표했던 메디치 가문의 통치자들도 책 읽어주는 학자들을 두었다. 서양에서 묵독(默讀)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가장 이르게 잡아야 10세기부터다.

근대적인 의미의 작품 낭독회를 말하자면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858년부터 유료 낭독회를 열기 시작하여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정기적으로 낭독회를 가졌고 1867년부터 2년 간 미국에서도 낭독회를 열었다. 미국의 사상가이자 작가 랄프 월도 에머슨은 보스턴에서 열린 디킨스의 낭독회에서 “온몸이 부서져 나갈 듯이 웃었다”고 회고했다. 모두 471회에 걸쳐 낭독회를 가진 디킨스가 낭독회로 벌어들인 고정 수입은 글로 벌어들인 수입보다 많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낭독의 전통이 없는가? 경기도무형문화재 제32호는 ‘송서’(誦書)와 ‘율창’(律唱)이다. 송서는 산문에 가락과 사설을 실어 읊는 것이요, 율창은 한시에 가락을 실어 노래하는 것이다. 송서와 율창은 일제 강점기 때도 부잣집 사랑채를 중심으로 유행하던 풍류였다. 선비의 글 읽는 소리에 반한 옆집 처녀가 흠모의 정을 품은 나머지 담을 넘어 선비의 방으로 뛰어들었다는 일화도 많다. 뿐만 아니다. 전문적으로 소설책 읽어주는 일을 했던 이업복(李業福)에 관해 ‘청구야담’(靑丘野談)은 이렇게 전한다. “이업복은 아이 적부터 소설책을 잘 읽었다. 그 소리가 노래 같기도 하고 우는 듯도 하고 웃는 듯도 하며, 호방한 선비 같기도 하고 아름다운 여인 같기도 하니, 책 내용의 배경과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 바뀌었다.”

조수삼(趙秀三)의 ‘추재기이’(秋齋紀異)에는 서울 동대문 밖에 살았던 “기이한 이야기를 전하는 노인” 즉 전기수(傳奇?)가 나온다. 전기수는 종로 일대를 정기적으로 돌아다니며 숙향전·심청전·설인귀전 등의 언문소설을 낭송했다. 전기수는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에서 낭송을 일부러 멈추었다. 그러면 청중들은 다음 줄거리를 재촉하며 앞다투어 돈을 던졌다.

이처럼 소리 내어 읽고 듣는 책의 전통은 오늘날 카세트 테이프나 CD 형태의 ‘오디오 북’으로 되살아났다.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오디오 북이 활성화되어 에드거 앨런 포우나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은 고전적인 작가들은 물론, 토머스 프리드만의 ‘세계는 평평하다’ 같은 최근 나온 책도 대부분 CD로 나와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등 MP3 파일 형태의 오디오 북이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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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8-2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려주는 방식이 원래 읽기방식일거란 말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시간을 생각해보면 명확한 말이에요^^ 찰스 디킨스의 낭독순회여행은 유명하죠. 소설장르는 대사를 실감나게 해야하는데 이게 전 어렵더군요.. 아무튼 오디오북, 저도 들어보고 싶어집니다.

가을산 2006-08-21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세계 회장 이명희 씨는 책을 읽어주는 비서를 두었다고 하더라구요.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2006-08-21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6-08-21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찰스 디킨스는 저는 첨 알았어요. 작가 김영하가 최근 낭독회를 열었다는데 앞으로 이런 게 작가마다 흔해질 것 같아요. 그죠?^^

가을산님/오, 그랬군요. 저 같은 사람 비서로 써주면 안될까용.^^

***님/신청해 드렸사와요.^^
 

 

책이 책을 읽어드립니다

샘터사, 시각장애인 위한 음성 바코드 책 최근 발간
오른쪽 장마다 1㎝ 바코드 인식기 대면 낭랑하게 낭독

시각 장애인을 위해 ‘소리로 읽어주는 책’이 출간됐다. 샘터사에서 최근 발간한 ‘그 다음은, 네 멋대로 살아가라’는 오른쪽 페이지마다 윗부분에 가로·세로 1㎝의 음성변환 바코드를 부착했다. 이 바코드에 ‘보이스 아이’라는 인식기를 대면 책의 내용을 들려준다. 이 작은 네모 하나에 책 두 쪽 분량의 정보가 저장돼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은, 네 멋대로 살아가라’는 1970년 월간 ‘샘터’를 창간한 김재순 현 샘터사 고문이 1990년부터 최근호까지 매월 잡지 뒷표지에 써온 글 가운데 100여 편을 골라 희망(봄), 용기(여름), 사랑과 예술(가을), 성찰(겨울) 등 계절별 주제에 따라 엮은 책이다.

▲ 책의 오른쪽 페이지 위에 있는 음성변환 바코드에 인식기를 대면 텍스트가 소리로 변환된다. /샘터사 제공
책을 읽어주는 음성은 컴퓨터로 합성한 기계음으로서 마치 TV 뉴스 아나운서처럼 뚜렷한 발음을 들려준다. 한글은 물론 영어·일본어·중국어 변환이 가능하며, 현재는 모노톤의 여성 목소리로만 들려주고 있지만 조만간 구연동화 수준의 음성변환도 가능할 전망이다. 샘터사는 이번 단행본 출간에 앞서 지난 5월부터 월간 ‘샘터’에 음성변환 바코드를 싣고 있으며, 앞으로 나올 단행본에도 음성변환 바코드를 넣을 예정이다. 한편, 장애인 전문 격주간 신문인 ‘에이블 뉴스’는 올 3월부터 시각장애인과 한글을 익히지 못한 문맹인을 위해 같은 방식에 입각한 ‘소리로 읽는 기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지난달에는 동화책 ‘작은 세상’을 출간했다.

이들 출판물이 사용하는 ‘보이스 아이’는 한 업체가 올 1월 개발한 소프트웨어로, PC에 연결해서 사용할 수 있는 기종과, 스캐너·USB케이블을 이용해 휴대가능한 기종의 두 종류가 있다. 1990년대에 일본 업체가 PC에 연결해 사용하는 탁상용을 개발한 적은 있으나 휴대용은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상용화됐다. 한번 바코드로 텍스트를 인식해 두면 마치 MP3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듯이 들고 다니며 반복 재생이 가능하다.

김성구 샘터사 대표는 “선천적 시각장애인들은 점자가 더 편하지만 당뇨병이나 노화 등에 따른 후천적 시각장애인들은 점자 독해 능력개발이 쉽지 않아 이렇게 소리로 들려주는 책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용관기자 qq@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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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8-21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소식이네요. 소설을 비롯한 전 영역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stella.K 2006-08-2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저 같은 목소리 괜찮은데 이런 쪽에서 돈 버는 방법 없을까 싶기도 해요. 아참~! 물만두님이 제 목소리 모르시죠? 저 목소리 꽤 괜찮단 말 많이 듣고 산다우. 아직도...ㅋㅋ

프레이야 2006-08-21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런 희소식이... 후천적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괜찮을 듯하네요. 책을 듣고 싶을 때.. 다양한 음성지원이 되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전 녹음봉사하고 있지만 사실 제 단조로운 목소리에 지겨워하지 않을까.. 때론 까칠하게 들리진 않을까.. 걱정되더군요.. 스텔라님 목소리 좋으시다니,, 부러워요^^

가넷 2006-08-21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께요.^^

stella.K 2006-08-21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어머낫! 그런 봉사를 하고 계셨군요. 참 부지런 하시와요. 저도 지금부터라도 목소리를 잘 다듬어 놓으면 나중에 쓸모가 있지 않을까요?^^

야로님/물론요.^^

비로그인 2006-08-21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불시에 전화걸어서 목소리 확인들어갑니다.
 

 

역사학자·물리학자가 소설을 논하다

정옥자 교수 “선조를 울보로?… 소설이라도 심하다”
김상락 교수 “복잡계 연결망, 소설 구성에 도움될 것”

▲ 소설‘칼의 노래’가 원작인 드라마‘불멸의 이순신’. 원작 소설이 식민사관의 악영향을 받아 선조를 폄하했다는 비판이 역사학계에서 제기됐다.
국사학자·물리학자 같은 문학 밖의 학자들이 문학에 메스를 들이댔다. 문학의 다면적(多面的)인 모습을 독자와 같이 음미하기 위해서다. 계간 ‘문학동네’ 가을호 특집 ‘밖에서 본 한국 문학’은 이 같은 내용을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는 이순신의 병사들이 허겁지겁 감자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한 학자가 “감자는 임진왜란 이후 한반도에 들어 왔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작가는 “감자가 아닌 어떤 작물도 (문학적으로는) 당시 병사들의 상황을 더 절실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며 재판을 찍을 때도 감자를 그대로 놔두었다.

실물 차원의 역사적 고증에 대해 저자의 태도가 이렇다면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작가의 해석은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와 관련, “소설에서 선조는 울보이자 못난이로 그려져 있다”며 문제를 제기한 정옥자 교수(서울대 국사학과)가 ‘칼의 노래’를 역사학적으로 분석했다.

이번 특집에 ‘칼의 노래의 역사적 상상력’을 발표한 정 교수는 김훈의 소설에 대해 “식민사관에서 우리를 집중 세뇌시킨 당쟁론이 여과 없이, 아니 더욱 심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국체의 상징으로서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 국왕 선조의 개인적 고민도 함께 그렸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물은 정 교수는 ‘선조 제대로 알기’를 강조했다. “무수한 인재들이 배출되어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불리는 선조대는 임진왜란이라는 (동북아)세계대전으로 얼룩졌지만, 정부와 국민 모두가 단결하여 왜적을 물리쳐 국가적 위기를 타개했다”는 것.

‘밖에서 본 한국문학’ 특집에는 요즘 수학 물리학 사회학 등에서 성행하는 복잡계 연결망(compolex network) 이론도 참여했다.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여섯 다리만 건너면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복잡계 연결망은 설명한다. 예를 들어 박경리의 대하 소설 ‘토지’에는 총 543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김상락(경기대 물리학과) 교수가 복잡계 연결망을 ‘토지’에 적응해봤는데, “평균적으로 네 단계 정도를 거치게 되면 소설 ‘토지’에 나오는 어떤 인물이 다른 등장인물과 서로 연결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수많은 인물이 나오지만 결국 “일곱 개 이상의 연결선을 가진 주요 인물은 모두 58명”으로 집약됐고, ‘멋대로’ 등장하는 인물이 없으며, 작가의 치밀한 구성 의도에 따라 인물들이 촘촘히 연결된다는 것도 재확인됐다.

김 교수는 복잡계 연결망 이론이 앞으로 소설 구상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명작’과 ‘졸작’을 이 같은 연결망 분석으로 비교하면서 그 차이를 보다 정밀하게 살펴보면 좋은 소설의 지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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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스타 작가들'의 한국현대사

퇴근길에 사든 문화일보에서 이번주에 나온 김영하의 신작소설과 지난주에 나온 김인숙의 신작소설 리뷰를 읽었다. '위기의 한국소설'을 구원해줄 '스타작가들'? 내막을 조금 따라가본다. 개별 소설에 대한 리뷰 기사 두 편도 같이 옮겨다 놓는다.  

문화일보(06. 08. 10) ‘위기의 한국소설’ 구원투수?

-김영하(38·), 김인숙(43)씨.각종 문학상을 받으며 문학계 내부에서 인정을 받고, 또 대중에 게도 널리 알려진 이른바 스타작가들이다(*다섯 살의 나이 차이를 갖고 있지만 63년생 작가군의 한 명으로 '80년대 작가'인 김인숙과 '90년대 대표작가' 김영하는 문학적으로 한 세대의 격차를 갖는다. 그 차이가 두 작품에도 각인돼 있지 않을까 싶다). 386세대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이 한국 현대사의 풍경 속 에 개인의 쓸쓸하고 아픈 상처를 어루만진 장편 소설을 잇달아 펴내 눈길을 끌고 있다.

 

 

 



-9일 출간된 김영하씨의 <빛의 제국>(문학동네 발행)은 남파간 첩을 주인공으로 분단상황에 쫓기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과 그에 대한 연민을 담고 있다. 앞서 나온 김인숙씨의 <봉지>(문학사 상사)는 한 시골소녀가 민주화과정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성장하 는 이야기다. 당대의 시대상을 담고 있으나 사회, 역사의식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개인의 실존적 흔들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 두 작품의 공통점이다. 탄탄한 서사구조와 더불어 힘있는 문체로 독자를 흡인한다는 점에서도 같다. 문학계는 각기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는 두 작가의 신작 장편이 장기 침체를 겪고 있는 국내소설판에 독자를 끌어오는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빛의 제국’의 풍경 = 제목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따 왔다. 하늘은 청명한데 땅은 어두운 그림의 풍경이 소설 전체에 배경으로 깔린다. 20여년간이나 남쪽에 적응해 살고 있던 김기영은 어느날 24시간 후 귀환하라는 평양의 명령을 받고 고민에 휩싸인다. 1963년 평양 태생인 그는 67년생으로 둔갑, 연세대에 입학해 학생운동권에서 활동하다가 졸업 후 영화수입업자로 일해왔다. 운동권 후배와 결혼해 딸을 둔 기영은 95년에 그를 남파한 북쪽 담당자가 실각함으로써 ‘잊어진 스파이’가 됐다.

-“처음엔 주인공 기영의 시점으로만 글을 썼다가 없애버리고, 주요 인물마다의 시점으로 다시 썼어요. 8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를 입체적으로 그려가는 데 필요해서였지요.” 작가의 의도대로 등장 인물 하나하나의 가족사가 현대사의 골짜 기를 이룬다. 이 골짜기에서 어떻게든 살아 온 인물들의 모습은 비극적이면서 희극적이다.

-대학시절엔 임수경을 질투하며 평양에 가고 싶어 안달했던 기영의 아내 장마리는 스무 살이나 어린 대학생들과 섹스놀이를 즐기고(*얼마만큼 리얼리티가 있는 설정일까?), 기영의 뒤를 주도면밀하게 뒤쫓아온 남쪽 정보기관원 박철수는 실향민인 할아버지와 코미디언인 아버지의 삶을 애틋하게 반추한다. 이들의 모순된 모습에 당혹해하면서도 끝내 애정의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은 작가의 밀도 있는 묘사력 때문이다.

◆‘봉지’의 과거와 미래 = 1970, 80년대를 건넌 청춘들에 대한 회상록이다(*김인숙의 데뷔작이 <79-80 겨울에서 봄 사이>였던가?). 제목은 주인공 봉희가 어린 시절에 패싸움을 하는 오빠를 부르러 싸움판에 들어갔다가 자전거 체인에 맞아 이마가 비닐봉지처럼 찢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을 옮긴 것. 봉지는 예쁘지도 않고 공부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매사에 당당해서 친구인 순미, 영주, 가현의 부러움을 산다.

-봉지는 어느날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 진영을 보고 사랑을 품게 되지만, 독재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을 하고 있던 진영에게 시골 소녀의 풋사랑은 대수롭지 않은 일. 봉지는 서울의 한 간호전문 대에 입학, 진영의 학교로 그를 찾아가지만 여전히 두 사람 사이는 거리가 있다. 봉지는 어느날 당국의 수배에 쫓기는 진영을 숨겨줬다가 어딘가로 연행돼 고문을 받는다. 이런 일들이 벌어졌던 과거로 여행하는 일은 봉지에게 추억을 되찾는 일이라기보다는 지우기에 가깝다. ‘찢어진 봉지’와 같은 삶을 어느 누군들 껴안고 미래로 가고 싶을까.

-이 작품은 작가 김씨가 1983년 등단 이후 줄기차게 성찰해 온 시대적 고민을 좀 더 개인사 쪽으로 내면화한 느낌을 준다. 중년에 이른 봉지의 독백은 참혹한 세월에 무릎 꿇지 않고 살아온 자신의 과거에 담담하게 악수를 건넨다. ‘지나온 생을 견딘 힘만으 로도 남은 생은 괜찮은 법이다.’(장재선 기자)

서울신문(06. 08. 11) 남북 분단 그린 장편 ‘빛의 제국’ 펴낸 김영하

-소설가 김영하(38)가 장편 <빛의 제국>(문학동네)을 냈다.2004년 한해에 이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인문학상을 독식하며 문단의 스타로 떠올랐던 그가 <검은 꽃> 이후 3년 만에 발표하는 장편소설이다. 흡혈귀, 자살안내인 같은 비일상적인 설정에서 멕시코 이민사의 거대 서사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전복적인 글쓰기로 자신만의 문학적 입지를 탄탄히 구축해온 작가는 이번에도 내용과 형식 모두 기존 소설과 차별되는 실험적 작품을 내놓았다.


 

 

 

-<빛의 제국>은 남파 간첩으로 20년을 살아오다 갑작스럽게 북으로의 귀환 명령을 받은 40대 남자의 이야기다. 주인공 김기영은 엘리트 출신 공작원을 남한 대학의 신입생으로 입학시켜 학생운동을 주도하려는 당의 계획에 따라 스물두살이던 1984년 서울로 남파된다. 대학 졸업 후 영화수입업을 하며 임무를 수행하던 김기영은 1995년 북측의 책임자가 실각하면서 잊혀진 스파이가 되어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소설은 김기영이 귀환 명령을 받은 그날 오전 7시부터 다음날 같은 시간까지 단 하루 동안 김기영과 그의 아내 마리, 딸 현미에게 일어난 일상을 긴박하게 엮어나간다.

-생의 절반은 북한에서, 나머지 절반은 남한에서 지낸 한 남자의 삶에서 남북 분단의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조명하는 소설의 구조는 최인훈의 <광장>과 닮아 있다.“처음부터 <광장>을 염두에 뒀다.”는 작가는 “1980년대 이후 달라진 남북의 변화상을 통해 ‘광장’이 지닌 시대적 한계들을 돌파하고 싶었다.”고 말했다(*말하자면 김영하 버전의 <광장>, 소위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광장>쯤 되겠다). 노동당원인 김기영이 대학 운동권서클에서 주체사상을 학습하는 비극적 아이러니는 <빛의 제국>이 <광장>과 결별하는 지점이다.

-스파이가 주인공이지만 30·40대 남성들의 갈등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보편적인 이야기로도 읽힌다(*나도 때론 내가 고정간첩이 아닐까란 생각을 한다). 작가는 “과거를 잊고 평범한 일상을 지내다 하루아침에 소환명령을 받는 주인공은 언제든 세상으로부터 해고를 당할 수 있는 이 시대 남자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어느 한순간 중심을 잃어버린 채 한치 앞도 예측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로 추락하는 것이다.

-<빛의 제국>은 계간 ‘문학동네’에 지난해 가을호까지 4차례 연재하다 중단했던 소설이다. 하지만 등장인물만 제외하고 시점이나 구성을 완전히 바꿔 새로 썼다. 지난 겨울부터 칩거하면서 몸무게가 10㎏이나 빠질 정도로 작품에 열중했다.“착상이나 진행방향 등에 자신이 있었고, 쓰여져야 할 책이라는 확신도 컸다.”는 그는 “지금까지 작가로서 쌓아온 모든 역량을 총체적으로 쏟아부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작가 김영하의 모든 것이 담긴 야심작이라는 얘기다.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소설은 속도감 있고, 재밌게 잘 읽힌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희미해진다. 작가는 “다시 쓰여진 <광장>처럼 보이나 뒤로 갈수록 그 의미가 사라지도록 했다. 독자가 책을 읽은 뒤 안개 숲속을 즐겁게 헤맸다는 느낌을 갖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가장 잘 팔리는 한국 작가인 그의 신작은 벌써 해외 에이전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영문 시놉시스만 보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먼저 출간 제의를 해올 정도. 작가는 10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빛의 제국> 해외 출간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이순녀 기자)

국민일보(06. 08. 07) “찢어진 비닐봉지 같은 성장기”

-소설가 김인숙(43)은 요즘 중국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다. 유학간 딸을 돌보기 위해서지만, 밥짓는 냄새나 오폐수 냄새가 진동하는 베이징의 뒷골목을 걷다보면 흘러간 시간들이 발에 툭툭 채인다. “어쩌다보니 중국에 살게 되었지만 무엇을 하기 위해서라는 반짝이는 목적 의식 같은 거는 없어요. 다만 글 쓰는 사람으로 무대를 옮겨서 살아보는 것이 나쁜 경험은 아닌 거 같아요. 자극도 되고요.”

-그의 새 장편소설 <봉지>(문학사상사)는 베이징의 뒷골목을 걸으면서 써내려간 소설이다.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처럼 찢어지거나 채워지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한 여자의 성장 과정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의 본명은 김봉희로 별명은 봉지. 17세 여학생때 봉희가 오빠의 싸움을 말리려다 자전거 체인에 이마를 맞아 열두 바늘이나 꿰매야 했던 일을 겪고나서 친구가 붙여준 별명이다.

-“봉지의 머리에는 구멍이 뚫여버렸다. 그녀의 생각,자신이 젖은 창호지에 뚫린 구멍 같다고 여겼던 상상은 그녀의 이마를 향해 날아오던 자전거 체인을 비키지 못한 순간에 현실이 되어 버렸다. 미세한 바늘이 촘촘히 기울 수 있었던 것은 찢어진 살뿐이었다. 구멍은 그대로 남았다.”(33쪽)

-봉희의 이마에 난 구멍은 일종의 성장통을 뜻하는데 소설은 봉희가 14년 전에 쓴 ‘김봉지의 자전소설’을 풀어놓는 형식으로 전개되면서 제재소집 날나리 친구 순미,읍내에서 제일가던 여자 깡패 가현,봉희가 좋아하는 운동권 대학생 진영,봉희를 좋아하는 초등학교 동창 수호 등이 등장한다. 왜 이 소설을 썼는지, 로밍 서비스로 중계되는 국제전화를 통해 물었다. “바로 내 세대의 이야기지요. 참 오래전에 지나버린 시대같은데 내 안에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들이 있지요. 무엇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오늘의 나를 이루었을까. 내 안의 그 시대, 내 안의 그들에 대해 쓰고 싶었어요.”



 

 

 

-등장인물들은 1970년대말부터 1980년대까지의 사회 혼란과 혼돈을 통과한다. YH사건, 부마항쟁, 12·12쿠데타, 광주사태, 학내 프락치 사건, 통금해제,프로야구 출범…. 봉지의 머리에 구멍이 뚫렸을 때 바깥 세계 역시 거대한 구멍과 균열의 가운데에 있었다. 혼돈의 시대를 통과한 그들의 모습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순미는 화려한 삶을 꿈꾸며 술집에 나가는 여대생이 됐고, 23세에 미혼모가 된 가현은 미용사로 성공했으며 간호사로 일하던 봉희는 병원에서 만난 약사와 결혼한다. 진영은 감옥에서 나온 후 유학을 갔다가 소설가가 되었고 수호는 작은 출판사에 취직한다.

-꿈은 작아지고 스러지지만 작가는 “작아지고 스러져가고 어긋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얘기한다. “몸속에 든 것이라고는 텅 빈 바람밖에 없던 비닐 봉지. 그 찢긴 봉지에 무엇이 담길 수 있었을까. 유년의 순진했던 기억들이 찢어진 자리로 흘러나간 후,봉지는 그 찢긴 자리 때문에 다시는 완전히 부풀어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존재는 그것의 비어있는 자리로부터 살아 있는 소리를 낸다.”(149쪽)

 

 

 



-소설은 쓸쓸한 삶의 풍경, 여전히 텅빈 봉지일 수밖에 없는 인생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숱한 상처를 지나왔지만 그 상처가 지나간 자리에 영광이 스며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지만 그 안에는 존재에 뚫린 구멍을 메우기 위해 나름대로 절절했던 ‘완전한 순간’이 들어 있다. 작가는 그 순간들이 삶을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들어놓는 삶의 불가해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녀는 다시는 그러한 순간을 갖지 못하리라는 것, 어떤 남자를 만나 어떤 사랑을 하더라도, 그런 순간의 느낌을 다시는 갖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과는 다른 것, 말하자면 완전한 순간인 것이다.”(314쪽)(정철훈 전문기자)

06. 0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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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네 이웃을 경계하라!

'이웃'이란 주제에 대해서 생각할 일이 있었는데(짬이 나면 관련 페이퍼를 쓰게 될 것이다) 마침 도움이 될 만한, 더불어 요 며칠 무더위를 잠시 식혀주는 책이 출간됐다. 이름도 스릴(?) 만점인 <이웃집 살인마>(사이언스북스, 2006)가 그것이고, 저자는 요즘 부쩍 자주 등장하고 있는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 원래 진화심리학에서는 초창기에 '배우자 살해'가 중요한 연구테마였는데 그게 '이웃집 살해'로 좀 확장된/진전된 모양이다. 여하튼 "네 이웃을 사랑하라!"란 계명과 함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네 이웃을 경계하라!"는 경고인 듯싶다. 세상은 나이브하지 않다!..

문화일보(06. 08. 04) 살인은 본능… 네 이웃을 경계하라

-살인! 보통 사람들에게는 딴 세상의 이야기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미국 텍사스대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는 7년간 5000여건의 살인 케이스, 375건의 살인자 심층 인터뷰, 그리고 다양한 역사, 인류학, 생물학 자료를 인용해 분석한 결과, 모든 사람들 심지어 우리가 사랑하고 또 우리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조차 살인을 저지를 잠재력이 뿌리 깊게 내재돼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살인자는 우리 바로 옆에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2001년 1만6037명, 2002년 1만6229명, 2003년 1만6503명이 살해당했다. 여기서 전쟁과 9·11테러 희생자는 제외됐다. 이 통계로 추산하면 20세기에 미국에서만 대략 100만명 이상, 전 세계적으로는 최소 1억명 이상이 살해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전쟁같이 공인된 대량학살은 제외한 추론이다. 그러나 실종자, 의학발달 등에 따른 살인미수 등을 감안하면 실제 살해 수치는 두세 배에 이를 것이다.



-통계를 분석해 보면 살인은 특별한 사람에 의해 저질러지지 않는다. 연쇄살인, 갱단에 의한 살인, 폭도들의 충돌에 의한 살인, 유명인에 의한 살인, 야만스럽고 잔혹한 살인은 전체 살인의 5%도 안 된다. 살인의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살인을 하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살인은 보통 사람들이 처음 저지른 것이다.

-흔히 살인은 살인자의 감정이 이성을 넘어서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충동과 열정의 폭발로 인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격렬한 분노가 이성을 앞지를 때, 판단을 잘못 내렸을 때, 깊게 뿌리박힌 원시적인 감정이 표출될 때, 논리가 열정에 압도당할 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살인은 이성적 상태에서 벌어진다.



-물론 살인이 분노, 질투, 시기와 같은 강렬한 감정들에 의해 유발되기는 하나 감정이 분별력을 흐려 놓는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격정은 다분히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격정은 인간 심리를 이루는 잘 설계된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인간이 특정한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도록 도와준다. 살인은 복잡하고 조심스러운 계산을 통해 도달한 하나의 해결책이다. 결코 우발적이지 않다.

-액션 영화 등 폭력적인 대중문화가 살인을 부추긴다는 설명은 매체의 영향을 받지 않는 문화권에서도 여전히 살인이 발생하는 상황을 설명하지 못한다. 아동학대, 과도한 알코올, 유전자이상에 의한 뇌손상 등 병리학적 이론도 이들 가운데 극소수만 폭력적이 된다는 점에서 일반성을 띠지 못한다.



-또 가난, 경제적 불평등 등 자본주의의 모순이 사람을 범죄로 몰아넣는다는 사회학이론도,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에서 범죄가 더 많이 발생한다는 절대적 증거가 없다는 데서 막히고 만다. 살인이 발생하는 환경과 동기는 외관상 매우 다양해 보임에도 불구, 그 이면에는 이를 포괄하는 숨겨진 연결고리가 있다. 이 연결고리를 잇고 있는 실들을 추적해보면 인간 진화의 역사와 맞닥뜨리게 된다.

-살인은 인간의 생존과 번식 경쟁에서 많은 이점을 제공했다. 살인은 자기 자신과 배우자 또는 친척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강간당하는 것을 막는다. 주요한 적대자들을 제거한다. 경쟁자의 자원이나 영토를 취득한다. 경쟁자의 배우자에게 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다른 이성이 자신의 배우자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 흉포하다는 평판을 퍼뜨려 적의 침략을 단념시킨다. 유전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는 아이들에게 투자하지 않을 수 있다. 번식에 필요한 자원을 보호한다. 번식 경쟁자들의 핏줄을 완전히 끊어 놓는 등 냉혹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수많은 이점이 있다. 이익이 너무 실질적이어서 오히려 살인이 더 만연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군비확장경쟁처럼 진화한 살인심리가 살인의 만연을 막았다. 살인 위협이 증가하면 그 방어기제도 함께 발달한다. 살인은 위험한 전략이며 희생자들은 끔찍한 손해를 입히기 때문에 살인자를 살해하는 무자비한 방어책들이 함께 진화했다. 살인에 위험과 방해물들이 수반되기 때문에 경쟁자와 다툴 때 사람들은 살인 이외의 다른 대안들을 택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과 동맹해 경쟁자를 몰아내기도 하고 아예 경쟁자와 친해지기도 한다.



-저자는 “살인문제에 대해 만병통치약은 없다”며 다음과 같이 책을 끝맺고 있다. “반갑지 않은 성적인 눈길을 1초 이상으로 오래 보내는 남자를 경계하라.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걸 더 좋아할지도 모르는 계부모에게 주의하라. 당신의 성공을 배아파하며 조용히 앉아 있는 경쟁자를 조심하라. 동료들 앞에서 당신이 준 모욕을 참을성 있게 받아넘긴 사람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하라. 방금 유혹한 이성의 전 배우자를 주의하라. 거절하기 전에 당신을 ‘유일한 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낭만주의자를 경계하라. 떠나지 않으려는, 스토커로 변해버린 전 애인을 경계하라. 살인자들은 우리를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우리 주변에 있다.” 살인은 아니더라도 살인과 같은 치명적인 상황에 놓이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맺음이다.(김승현기자)

중앙일보(06. 08. 05) 살인, 번식을 위한 또다른 본능

-미국의 인기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에서 등장인물들은 이웃을 살해한 의혹을 받고 있는 남자와 어색하게 공존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베일을 벗지 않는 미치광이 연쇄 살인마가 환상 속의 살인자였다면, '위기의 주부들'에 나오는 그것은 현실적이다. 낯선 사람보다 가까운 이에게 목숨을 잃는 일이 현실에서 훨씬 빈번히 일어난다는 점에서는 말이다. 연쇄살인범이 살인 사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 미만에 불과하다. 살인 사건 피해 여성의 과반수는 남편.애인 등에게 살해됐다. 저자가 전세계 5000여 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남성의 91%, 여성의 84%가 적어도 한 번은 누군가를 살해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최근 서울에 사는 한 프랑스인의 집 냉동고에서 영아 시체 두 구가 발견된 사건은 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그러나 옛날엔 영아 살해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모든 문화권에서 영아 살해의 흔적은 남아 있다. 결함을 타고나거나 자식이 많아 더 낳기 부담스러울 때 영아 살해는 종종 일어났다. 인간은 자식을 키우는 데 어떤 짐승보다 오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하기에 진화 가능성이 없는 자손은 제거했던 것이다(*장애아의 낙태 같은 것도 같은 논리에 의한 것이다. 의학의 발달로 우리는 좀더 빨리 죽일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텍사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렇게 살인 심리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우선 가해자의 75%가 남성이다. '번식 경쟁'이 가장 큰 이유다. 남성들은 경쟁자를 제거해 자신과 배우자를 보호하고 경쟁자가 아내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직접 아이를 낳지 않으므로 친자를 확인할 길이 없었던 남성에게 살인은 남의 씨앗에 자원과 노력을 쏟아붓는 일을 방지하는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따라서 살인자 비율은 남성의 번식력이 왕성한 15세 무렵에 상승해 20대에 최고점을 기록하며 40대에 접어들면 크게 떨어진다.



-어떤 남성들은 배우자를 붙들어두기 위해 아내를 학대하거나 옴짝달싹 못하게 통제한다. 이별 후 비슷한 수준의 여자를 만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무직자 남성의 경우 증상이 더 심하다. 폭력 남편과 간신히 헤어진 뒤라도 안심하기 이르다. 배우자 살해는 대부분 결별 1년 이내에 일어나니까. 지옥 같은 결혼 생활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어떤 여자들은 살인을 택한다.

-살인 사건의 검거율은 69%. 강도 사건의 검거율(14%) 등에 비하면 월등히 높다. 결국은 감옥행이다. 이렇게 옛날 사회와 달리 살인으로 득 볼 일 없는 현대의 인간이 여전히 살인 본성을 품고 있는 이유는 뭘까. 저자는 인류가 아직 현대의 환경에 맞게 진화하지 못한 탓이라고 분석한다. 그렇다고 살인이 피할 수 없는 본능은 아니란다. 인류는 협동.이타주의.화해.우정.동맹.희생 등의 본성도 지녔기 때문이다. 책은 이렇게 폭력의 극단적 형태인 살인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갈등의 심리는 섬뜩하면서도 유용하다.(이경희 기자)

 

 

 

 

06.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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