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 조지 오웰을 읽는다는 것은 

<동물농장>이나 <1984>이 이미 명작의 반열에 오른지도 한 세대도 더 전의 일이건만, 나에게 있어 조지 오웰은 오래도록 다가가지 못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올해 이런저런 이유로 작가에 대한 나의 주저함을 깨는 개기를 맞이 하였다. 그것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위건 부두로 가는 길>과 <숨쉬러 나가다>를 읽게 된 것. 어느 책이든, 읽기 위하여 첫 장을 펼쳐 볼 때까지, 아니 첫 부분에 해당하는 10 페이지내지 20 페이지를 읽기까지, 과연 이책이 나에게 맞는 책인지 아닌지, 독서가 주는 특유의 긴장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일단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에게 있어, 조지 오웰을 읽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만만치는 않다는 느낌이다.  

 솔직히, <위건 부두로 가는 길> 같은 경우는 그 유명세도 유명세지만, 무엇보다 르포 문학이 주는  진실함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읽으려 했던 이유가 더 강하다. 그런데 이 또한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읽기가 쉽지 않았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거북했다. 차라리 문체가 어려운 것이라면 나았을런지도 모르겠다. 문체는 감정을 거의 배제한 채 건조했다. 물론,  읽는 중간 중간 조지 오웰 특유의 유머를 접할 수는 있지만 르포 문학의 특성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읽는 내내 거북하다. 그리고 내안을 맴돌며 물었던 것은, '내가 왜 이책을 읽고 있어야 하는 거지?', '도대체 조지 오웰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책을 썼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책을 읽고 있노라면, 언젠가 보았던 에밀 졸라의 원작 영화 <제르미날>이 생각이 난다. 그것 역시 탄광을 배경으로 했고, 탄광촌의 메마르고 퍽퍽한 삶과 갱도 안의 풍경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이 영화는 탄광촌의 억압된 분노가 결국 민중봉기로 이어졌던데 반해, <위건부두로 가는 길>은 탄광촌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 것에서 끝나고 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영화의 한 장면은, 큰 물통에 물을 받아놓고 주인공의 일가족이 차례로 그 물에서 목욕을 하는 장면이다. 물을 한번도 갈지도 않고,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목욕을 하는 것이다. 물론 1800년대를 배경으로 했으니 그 시절에 수도시설이 뭐 그리 있었겠는가만, 그것도 하루종일 막장안에서 탄을 캐느라 새까매진 몸을 씼고 있으니, 한 사람도 다 못 씼을 물을 가족 전체가 돌아가며 썼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조지오웰도 탄광촌 사람들의 삶을 묘사함에 있어서 한 수 위면 위였지, 결코 빠지지 않는다. 그나마 영화는 웅장한 스케일의 보는 맛이라도 있지, 책은 작가가 그야말로 한 자, 한 자 종이 위에 뿌려놓은 활자를 쫓아 가다보면 그 세밀함이 마치 일부러 끌어다 보는 것 같아 굉장히 부담스럽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느끼는 것 이상이나 또는 이하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 같다. 자기 이상의 것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져, 정말 그럴까? 놀라고, 자기 이하의 것을 보면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된다. 그다마 이상의 것은 판타지를 만족시키는 게 있어 다소의 평안함을 느끼지만, 이하의 것을 보는 건 괴롭고, 그나마 나는 저 정도는 아니지 하는 위안 정도 삼는다고나 할까?  

나는 애초부터 부잣집에서 태어나보지 못한 관계로 있는 것을 자랑하며 살아보지 못했다. 대신 가난하지도 않아, 남의 도움을 받고 살거나 도적질은 더더욱 하며 살아보질 못했다. 그래서 극빈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이책은 내가 읽기에 적지않은 부담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읽기가 편했던 것은 이책이 아니었나 싶다. 그도 읽다보면 줄거리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있어, 몇번을 다시 돌아가 읽기를 반복하며 읽었던 책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안정적이면서도, 오웰 특유의 유머가 있고, 또 어찌보면 몇 가지 사실을 제외하고 오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묘사가 섬세하고 인상적이다.  특히, 주인공이 지극히 소시민적이어서 나로선 감정이입이 훨씬 수월했다. 솔직히 주인공 조지 볼링의 삶이 우리 서민의 삶을 대변해 준다고 느끼지 않는가? 살이 쪄 놀림을 받긴 해도, 누구를 누르고 좀 더 나은 삶과 대접을 받으려고 하고, 무엇엔가에 대해선 쭈볏거리며, 결혼하기 전 약간 샛길를 가긴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마땅한 처자와 결혼해, 애 낳고  밋밋한 삶을 살기는 영낙없는 우리네의 삶과 똑같은 판박이다.  

특히, 주인공은 중산층이다.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알고 사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 적당히 성공하고 싶고, 적당히 안주하고 싶어한다. 성공하려면 내가 부셔져야 하고, 안주하면 나른하고, 지루하다.  

이책에서 내가 끊임없이 목도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인공의 뚱뚱한 몸과 전후의 사람들의 삶과 인식에 관한 문제였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만족스러울 줄 알았다. 그러나 결혼하기 전 아내는 아름다웠지만, 결혼하고나서는 180도 달라져, 늘 가스비와 교육비 등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전전긍긍하는 여느 여염집 아낙으로 변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주는 지루함에서 벗어나고자 주인공 조지 볼링은 고향에로의 여행을 감행한다. 그것의 명목은, 잠시 숨쉬러 가는 거였지만, 그것도 엄밀한 의미에선 일탈의 또 다른 방편이다.                         

나는 결코 그곳에 다시 가지 못하리... 

주인공에 감정이입도 이입이지만, 그의 일탈이 주는 행위도 적잖이 나의 관심을 글었던 것도 사실이다. 고작 주인공의 일탈이란 게 고향을 여행하는 거라니? 너무 건전해 귀엽기까지 하다. 적어도 그렇게 갑갑한 일상을 벗어난다면 근사한 곳으로의 여행이나, 모르는 사람과의 하룻밤 정사. 뭐 그런 것을 상상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주인공은 기껏 기대감에 부풀어 고향을 갔지만, 그곳은 어렸을 적  자신이 뛰어놀던 곳과는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름 좋아했던 곳에 정신병원이 들어서지 않나? 옛 애인을 보는 것도 괴롭다.   

그것은, 이책의 말미, 즉 4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 부분을 읽고 있자니 나도 나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 생각이 났다. 특히 나의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던 그곳이. 집 앞에서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길 안 막히면 3,4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그것을, 나는 한번도 작정하고 나서보지 못햇다. 물론, 그동안은 어딘가를 경유해서 가느라 그 언저리를 거쳐간 적은 있다. 하지만 내가 살았던 그동네 골목 골목을 누벼볼 생각을 못하는 것은, 게을러서만도 아니고, 그것은 왠지 다시 돌아보지 못할 나의 용기의 부족같다. 그곳에 가면 왠지 어린 시절이 생각날 것 같아 눈물을 왈칵 쏟을 것만 같고, 너무 많이 변해버린 것에 가슴이 콱 막힐 것도 같아 갈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반은 이 소설의 주인공을 닮아있고, 반은 주인공을 전혀 닮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어느 땐가는 나의 기억이 다 지워져버리기 전에, 내가 살아 온 곳에 대한 기억을 낫낫이 살려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인데, 그것은  자본주의의 변화속에 세상이 너무나 많이 변하고 있어, 나의 옛 기억조차 빼앗어 가버릴까 봐서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가 태어나고, 살던 곳의 풍경을 잊을까? 자서전을 쓸 마음이 있다면, 자기가 살던 곳에 대한 생생한 기억의 묘사도 빠트리지 말 것이다. 그것은 한 인간이 살던 곳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이 전부가 아닌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내가 강남에서 산다고 하면 무조건 굉장히 잘 사는 줄 안다. 하지만 공히 말하건데, 이 세상 어디든, 가난한 동네에 부자가 살 수 있듯이, 부자 동네에 부자만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해두고 싶다.  

또한, 내가 살았던 **동에서 무엇을 보든지 간에 처음부터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 동네는 70년대 중반만 하더라고 아스팔트도 깔려있지 않아, 비가 오거나, 눈이 녹는 봄이면 땅이 질척거려 도무지 한발을 내딛기가 힘들었고, 바람이 불면 황토 먼지가 말도 못했다. 실개천이 있어, 학교를 가려면 크게 깡총 걸음을 내딛어야 했고, 달구지를 맨 소가 똥을 싸며 지나갔던 곳이며, 가을이면 코스모스와 갈대가 흔들거리는 곳이었다. 또 집 뒤쪽엔 조그만 야산이 있었다는 것과, 밤이면 한번도 보지는 못했지만 부엉이 같은 새가 울었다는 것도 말해두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당이 있고, 1 가구 1 주택이 기본이었다는 것도 말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위로, 더 위로 

그런것이, 회색빛 아스팔트가 길을 메우고, 산도 깎였으며, 더 이상 소나 부엉이는 울어대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엔 할 수만 있으면 집들은 위로 또 위로 올라가기만 했고, 마당은 아예 없거나, 있어도 그야말로 왜 있어야 하는지 그 존재 가치가 무색하게 조그맣게 있을 뿐이었다. 새로 지은 집에 그 많은 방들은 뜨내기들이나, 소위 '나가요' 언니, 오빠들의 차지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동네는 술집과 그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장사치들의 소굴이 되어버렸고. 물론 한 동네가 꼭 그것만을 위해 존재했던 건 아니겠지만,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강남 불패'란 말은. 자본주의가 위로, 더 위로 욕망을 키워나갈 때, 자본주의의 찌꺼기들도 더불어 그 욕망에 편입하지 못해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옛날을 그리워 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70년 대, 새마을 운동으로 시작해서 80년 대 경제 중흥기를 맞이했지만, 그게 과연 좋은 것이기만 했을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때 우리는 확실히 잘 살게 된 것을 실감할 수는 있었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의 삶의 질도 좋아졌는가엔 아무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본주의 그 중심해 서지 못해 안달하는 것인가? 

조지 오웰은 평생을 파시즘과 싸워 온 작가다. 만일 그가 21세기를 다시 산다면, 그의 적은 자본주의와 인권이 되야하지 않을까? 나는 처음에 그가 왜 평생토록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고, 그들에 대한 글을 끊임없이 쓰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유가 있었다. 비교적 부유한 환경속에서 자랐던 그는 어느 날 외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동경하던 버마에 가게됐다. 거기서 그는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을 봤다. 그것은 그에게 평생 잊지 못할 일로 각이 되었고, 가난한 자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그들을 대변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자괴감을 느낄만 하다. 그럴 때 우리는 잠시나마 '지식인'으로서의, 전반적으로 우월한 존재로서의 자기 지위를 의심하게 된다. 적어도 지켜보는 동안에는, 우월한 인간들이 계속 우월하기 위해서는 광부들이 피땀을 흘려야만 한다는 자각을 똑똑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위건부두로 가는 길' 49P)  인간이 욕망을 갖고 있는 한 아래로 향해있는 쉽지 않다. 과부가 과부의 사정을 알듯,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만이 잘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지 오웰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 그들은 누구일까? 어떤 의미일까?  난 저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래로, 더 아래로 

일본이 얼마 전 그렇게 천재지변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얼핏, 일본의 부자들에 대해 기사를 본적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유목민적 기질을 발휘해, 해외 어딘가에 집을 사 놓고 그런 천재지변이 나면 그곳으로 피난을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년의 반은 해외에 거주하고, 나머지는 국내에 거주하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라에 큰 일이 나면 피해를 보는 쪽은 역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나 피해를 보는 것이지 그들은 안전하다.  더불어, 전쟁이 나도 총칼을 들고 전장에 나가는 건 그들이지,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과연 남의 나라 일만하겠는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는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일본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나라는 워낙에 전체주의적 사고가 지배하는 나라기 때문에, 나 보다는 우리를 생각하는 게, 우리나라 보단 훨씬 앞선다. 우리도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그 난리통에도 질서 의식이 상당한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런 나라에서 이런 말은 솔직히 일본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 같다. 우리나라나 어울리지.  

그렇게 나라의 궂은 일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이, 나라의 영광스러운 일엔 있는 집 자식들이 빛을 보거나, 덕을 본다면 억울해서 살맛이 나겠는가?  지금 이명박 정부가 비난을 받는 것은, 그의 정책이 없는 사람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새삼 자본주의만이 살 길인가에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솔직히 자본주의란 말 자체도 있는 사람의 사전에나 있는 말이다.  또한, 현빈이 모 드라마에서 뇌까려서 유명한 대사가 되어버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이라는 말도 알고보면 자본주의에서 나온 말이고. 자본주의가 아닌 나라에선(그것이 비록 오지더라도) 이 말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따라 올 수 밖에 없었던 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제는 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왜 자본가들은 없는 사람까지 같은 대열에 따라오게 만들고, 그들은 돌보지 않는가? 자본가와 없는 사람이 나눠져서 나라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에게 힘을 키우는 방법을 가르쳐서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자본가들은 역시 이익집단들이다.  그들이 이익만을 앞세우지 않도록 견제해야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일 것임에도 오히려 뒷배를 봐주는 일을 자처하고 있으니 비난을 받는 수 밖에.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뛰는 기름값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물가를 생각하면 우리가 이런 세상을 얼마나 더 오래 버틸 수 있을까?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쯤되면, 뭔가 다른 길을 모색해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정말 지금의 자본주의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을까? 늘 생각하고, 늘 의심해 본다.  

그래도 조지 오웰은, 결코 21세기를 다시 살지 않을 것이다

조지 오웰의 책을 읽었을 때나, 안 읽었을 때나, 그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디스토피아. 암울한 세상에 대한 반추를 많이했던 작가여서일까? 그의 인생은 별로 행복하지 못했고, 일찍 단명했다. 그가 오래 살았더라도, 그는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이 있는 한 행복하게 살지는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21세기를 다시 살지 않을 것이란 것이다. 물론 다시 살 수도 없지만, 다시 살 수 있게 해 준다고 해도 살지 않을 것이다. 그건 20세기에 파시즘이란 괴물과 평생을 씨름했는데, 자본주의와 또 싸우라고?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설 <1984>의 빅 브라더만큼이나 유명한 전설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영웅이라고까지 부를 것는 없다고 생각한다. 영웅은 혁명가의 것이지 작가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혁명가이면서 작가일 수 없듯이, 작가이면서 혁명가일 수는 없다. 작가는 그저 작가일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전설로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지상에 조지 오웰이란 사람이 살다가 갔다. 비록 다른 시대에 살았더라도 이것만으로도 그를 충분히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고, 그를 기억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읽기 전엔 그토록이나 쉽지 않은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읽고나니 그에 대한 존경과 함께 묘한 연민이 느껴진다.  내친김에 그의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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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5-14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작년에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랑 <1984> 그리고 에세이집을 읽어봤는데
그 이후로 완전히 조지 오웰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그의 소설과 에세이들이 주로
사회비판적 성향이 많은데도 저 같은 경우에는 쉬우면서도 동시에 인상 깊게 읽었거든요.
조지 오웰을 좋아한다면 <위건 부두>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인생> 같은 르포도
읽어줘야하는데 저도 간만에 오웰의 글을 읽어봐야겠습니다.

stella.K 2011-05-15 15:29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만일 조지 오웰이 21세기를 산다면
이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았겠느냐구요.
하지만, 그는 파시즘과 평생을 싸웠다잖아요.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시대는 2차 세계대전의 시대
였고, 파시즘의 시대였지요.
그의 책이 근래 많이 나오는 건 뭐 때문일까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본격적으로 그를 주제로한 에세이를 재대로 써야할 것
같아요. 이글은 어설픈 게 많죠?
그래도 예쁘게 봐줘서 고마워요. 시루스님.ㅋㅋ

은비뫼 2011-05-15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이던가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읽었었어요. 별재미는 없지만 조지 오웰의 힘이 있어서인지 자꾸 읽게 됩니다. 셰익스피어 인 컴퍼니에서 하고 많은 책 중 파리와 런던의~ 이 책을 잡은 적이 있어요. 참 아이러니합니다. ^^

stella.K 2011-05-15 15:2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은비뫼님. 조지 오웰의 책을 읽는다는 건
어렵지는 않는데 다소 지루하고, 그런데 덥고나면 자꾸 생각이나요.
중독성이라고나 할까? 암튼 매력있어요.
<나는 왜 쓰는가>를 사 놓고 아직 안 읽었는데
읽어봐야할 것 같아요.^^

cyrus 2011-05-20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만 그런게 아니었군요, 저는 <동물농장>은 재미있게 읽었는데
<1984년>과 <버마 시절>은 약간 지루한게 있더라구요,
이제 <숨 쉬러 나가다>를 읽어보려고 하는데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네요 ^^

stella.K 2011-05-20 22:56   좋아요 0 | URL
에이, 댓글을 또 달고 있어요.ㅎㅎ
일단 작가 자체가 그리 유쾌한 작가는 못되죠.
저는 <위건부두로 가는 길>이 처음 읽은 건데 지루한 것도 지루한 거지만,
너무 처참한 지경이어서 읽기가 괴롭더라구요.
그래도 <숨쉬러 가다>는 위건 보다는 편하게 읽혀요.
이런 작가를 쉽게 좋아할 수는 없겠지만,
작품의 재미의 유무를 떠나 조지 오웰이 위대한 건 그의 작가정신인 것 같아요.
많은 글을 썼지만, 주제 의식이 분명하잖아요. 한 목소리를 내고 있고.
무엇보다 치열하게 썼고.
행복한 작가는 못 됐지만, 자기사명은 충분히 완수한 훌륭한 작가란 생각이
이제야 들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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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책의 내용에 평하기 보단 책 자체를 평가하고 싶은 책들이 있다.  

솔직히, 우리가 뭐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봉은 더 더욱 아닐진데, 왜 만날 책을 읽었단 이유만으로 서평만 해야한다고 생각하는건데? 책이 좋다는 건 인정하지만, 다 좋은 건 아니지 않는가? 읽는 독자도 책에 대해 할 말은 많다. 책을 안 읽는 사람 보다 읽는 사람이 몇배 더 멋있지만, 그 고상함을 유지하기 위해 좋은 말만 해대는 사람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에, 시나리오를 공부했을 때, 수강생들의 워크샵 작품을 읽고 평가를 해야하는 숙제가 사명처럼 주어졌던 때가 있었다. 그때 유독히 좋은 말만 하는 수강생이 있었다. 내가 볼 땐 그게 그 사람의 성향이고, 성격이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좋은 가정 분위기에서 반듯하게 자라, 천성적으로 싫은 말 못하는 사람이다. 뭐 나름 젠틀해서 난 그런 사람 좋은데, 공부할 때 그런 사람은 공공의 적이 된다.  어떻게 이 덜 떨어진 작품에 좋은 말만 해 댈 수 있느냐? 비록, 들을 땐 아파도 좋은 말 보다, 필요한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영화판에서 진정한 전우다. 이것은, 그 시절 나의 사부님이 누누히 강조했던 말이다.  

내가 어쩌다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그 시절 수강생들의 한참 덜 떨어진 작품에 비견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확실히 아쉽고, 안타깝고, 쫌만 더 잘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말을 속시원히 까발리고 싶어서다. 그리고 이책은 그 이름도 자랑스런, '알라딘 평가단'에서 받은 책이 아니던가? 서평은 서평이고, 평가는 평가다. 폐일언하고, 나는 이 책에 대해 평가만 하련다.   

사람들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있을 때, 어떤 말을 먼저 듣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까? 나쁜 말 먼저 듣고, 좋은 말 듣는 게 그래도 좀 낫지 않나?   

그래서 말인데, 솔직히 난, 이 책 받아 들었을 때 짜증부터 확 밀려왔다. 만화면 다 용서된다는 건가? 나도 지금 보다 10년, 아니 5년만 더 젊었어도 찌증 같은 건 내색도 않고 열심히 읽고,  어떻게든 느낀점을 말해야지(이게 우리식의 서평 아닌가?), 했을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예전 같으면 만화가 하급 문화 행위쯤으로 비하됐지만, 지금은 제9의 예술이라 하여, 누가 만화 본다고 해서 결코 비난하면 안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볼 때 솔직히 자위하는 소리 같다. 만화의 길은 아직도 멀고도 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짜증이 밀려왔다는 건 공교롭게도, 글씨가 너무 작고, 촘촘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내가 초두에 말하지 않았던가? 난 용가리 통뼈가 아니라고.  아직 안경은 안 썼다지만, 나도 적지 않은 나이이고 보면, 이런 책은 읽기가 참 난감하다. 만화면 다 용서되냐고 좀 전에 물었는데, 사실 용서될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 만화는 아이들이나, 청소년, 젊은이들만 읽어야 하는데? 그 보다 더 나이든 세대. 할머니, 할아버지도 읽으면 안 되는 건가? 가끔, 만화 생산자들, 만화는 매니아들을 위한 것이라는 구태 의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만화가의 길은 외롭고, 고독하다고 온갖 똥폼은 다 잡는다. 자기네들 바운더리를 스스로 정해놓고, 누구한테 덤태기를 씌우려 하는 건가?  

이현세 만화를 보고 자랐던 세대가 이제 50을 바라보고, 60이 머지 않았다. 그들 중엔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하여 이미 오래 전에 만화 졸업한 사람이 부지기수겠지만, 왜 만화가 젊을 때 한때의 향수로 취급 받아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책은 누가 봐도 판형의 면에서, 나이많은 사람에겐 그다지 어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소개된 화가의 그림을 실사로 집어넣는데, 그게 정말 거짓말 안 보태고 엄지 손톱만 하거나, 그 보다 좀 크거나 했다. 뭐 안 보는 것 보다야 낫긴 하겠지만,  그  보단 그렇게 작은 사이즈 인쇄가 가능하다는 게 새삼 놀라울 뿐이었다.

그림은 모름지기 문화재급으로 보는 것이 제일 좋다.  예를들어, 루브루 박물관전을 우리나라에서 했다 하면, 미술에 대해 문외한이어도 솔깃하다. 왜 그런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그게 아니더라도 될 수 있으면 큰 화면에서 또렷히 보는 것이 좋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 보는 건,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을 모독하는 것인줄도 모른다. 다행히 책에 실렸던 화가들이 이미 이 세상에 없으니 망정이지, 알았더라면, "당신 내 그림 가지고 뭐하는 거야?"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2page를 더 추가해 그 화가의 주요작품을 좀 크게 볼 수만 있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부제가, '2page로 보는 화가 이야기'라고 해서 하는 말이다.    

또한, 화가에 관한 책은 이 책 말고도 많이 나온 줄 알고 있다. 과연 이 책이 경쟁력 있게 만들었다고 자부하는지 묻고 싶다.  

그래도 이 책, 나름 특이할만한 것은 있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화가가 101명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모르는 화가가 이렇게 많았나? 우리가 아는 화가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닫게 만든다. 마치 이 책을 보고나면, 미술계도 메이저와 마이너가 있는 건가?(없으라는 법 없겠지만) 몇 명 밖에 알지 못했다는 것에서 괜히 억울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이렇게 많은 화가를 알필요가 있을까? 양극단을 오가게 만든다. 또한 이책의 장점이라면, 한 화가에 대해서 그 인생의 시작과 함께 20대, 30대, 4,50대 뭘 했는지를 만화적 상상력과 함께 간략하게 알아 볼 수 있게 해놨다는 점, 그리고 화가 연표와, 그 화가가 지향했던 작품 경향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아 볼 수 있게 했다 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어떤 설명이나, 해석 같은 것은 기대하면 안 된다.  그냥 백과사전 식이다. 일부러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 같이 미술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사람이 편하게 볼 수 있는 책 같다(물론 내용면이 그렇다는 것. 도판이나 판형을 생각하면 영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순전히 서양화가를 중심으로 다뤘다는 것이다.   

책의 도판이나 판형을 생각하면 나로선 그리 높은 평점은 줄 수가 없지만, 왠지 저자의 공력은 좀 높이 사 주고 싶긴 하다. 별점을 준다면, 3개는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도 꿀꿀한데 미술관이나 나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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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11-05-12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랑 ,가요.
 
 그림이라는 거, 볼 줄도 모르고 아는 것도 없지만
 손 잡고 옆에 함께 서 있어 줄 수는 있어요.
 가방도 들어 줄 수 있구요. 나 힘 쎄요.
 

stella.K 2011-05-12 18:27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래요. 나중에 가게되면
연락 드릴게요.
저 가방 들어주는 사람 무지 좋아해요.ㅋㅋ

은비뫼 2011-05-12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자도 그림도 정말 이렇게 작은 책 보기 힘들듯.. 그렇죠? ^^
책 읽으며 미술관가서 정말 큰크기로 그림을 시원하게 보고 싶어지더랬습니다.
눈 좀 쉬게요. 하핫.

무스탕 2011-05-13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보다 스텔라님 평가가 더 빛나는 책이네요. ㅋㅋㅋ

stella.K 2011-05-13 10:58   좋아요 0 | URL
ㅎㅎ 이게 웬 일이랍니까? 어쨌든 고맙습니다.^^
 
예술/대중문화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오랜 기다림 끝에 얼마 전 알라딘 평가단 책을 받았다. 솔직히 기대에는 못 미친 선정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선정도서가 100% 나의 기대를 만족시킬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래도 만화책만 두권이라니... 이런 선정만큼은 좀 피해야하는 거 아닌가란 생각이 못내 들었다. 내가 만화책을 평소에 잘 보는 타입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런 선정 방식은 별로 평가단을 배려한 건 아니란 생각이 든다(아, 물론 그렇다고 내가 만화를 평소 평소평가 하고 있다고 오해하진 마시길. 지금 읽고 있는 책은 감탄하면서 읽고 있는 중이니까).  

아무튼 그렇다 보니 이 달에는 어떤 책이 선정될지 벌써부터 기대반, 걱정반이다. 부디 이번 달에는 좀 더 좋은 책이 선정되길 간절히 바라며, 나의 눈길 머문 책들을 둘러본다.  

한옥이여, 영원하라!- 김도경의 <지혜로 지은 집>

지난 달에도 서평단 적지 않은 분들이 집이나 건축관련된 책들을 많이 올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선정되지 못했다. 이번엔 한권 정도 되면 좋겠는데... 

나이 들어 갈수록 한옥이 좋아진다. 한옥이 과학적이란 건 이미 오래 전부터 입증됐다. 얼마 전에 읽은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란 책을 보면, 그책 집의 구조를 큰 카테고리로 여러 가지 말을 주절거리고 있는데, 읽다보면 역사적으로 볼 때 새삼 우리 한옥이 얼마나 좋은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린 한때 한옥을 불편하다는 이유로 많이 없애버렸다. 그건 아마도 문지방과 부뚜막 때문은 아닐까란 생각을 해 보게 되기도 한다. 

이건 여담인데, 어제 아는 사람과 얘기를 하면서, 엣날 반상이 유별하던 시절, 왜 상놈이 양반 보다 애를 더 잘 낳는가 하는 얘기를 했었다. 그것은, 여성의 아랫배에 해당되는 문젠데, 자고로 아랫배는 자궁이 있는 자리로서 그곳이 따뜻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옛날 종들은 늘 방에 불을 꺼뜨리면 안 되었기 때문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짚혔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 아랫배도 따뜻해지고 그래서 아기를 잘 났는 거라고 한다.  그런데 비해, 양반은 별로 따뜻하지 못한 환경에서 살았었다는 것이다. 방이라봤자, 아랫목만 겨우 따뜻했으니 그럴만도 하겠다.  아무튼 그렇게 듣고 있노라면 우리나라 한옥이 또 한번 여기서도 입증된다고나 할까? 정말 지혜로 만들고, 지은 것들은 시대를 초월해 오래도록 살아남는 것 같다.  한옥이여, 영원하라!  

책이 꽤 튼실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현암사에서 나왔다. 그 이름만으로도 알아줄만 하지 않은가? 이 달의 평가단 책으로 선정되서 받아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눈으로 읽는 음악- 나도원의 <결국, 음악>    

보는 순간 확 끌렸다. 책 표지가 옛날 트랜지스터 라디오 같은데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저 책에서 라디오 소리가 날 것만 같다.  

요즘, 세시봉이 전국 투어에 나서면서 다시 인기몰이 중에 있다. 왜 그토록 인기일까를 생각해 보면, 역시 음악은 추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주일 날, 아침일찍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내가 항상 타는 버스에서 어느 방송인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즐겨듣던 팝송이 나온다. 그곡들이 한창 인기를 끌었을 그 시절에, 난 그곡들에 맞춰 립싱크하면서 신나게 몸을 흔들어었다. 물론 살을 뺄 목적으로.  그 생각이 난다. 그때 난 혼자 방에서 했는데, 지금도 혼자 하려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지 못한다. 혼자도 쑥스럽고, 어색한 것이다. 그리고 어렸을 때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했을까? 신기할 정도다.  그리고 생각하는 건, 저 노래들을 한창 듣고 있었을 그 시절에도 분명 옛날 노래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덧 세월이 흘러 이 노래들도 옛 노래가 되어버렸으니 세월이 참 무삼하다.  

물론 저자의 책엔 내가 언급한 사항들은 없다. 그래도 몇년 뒤, 저자가 또  이와 같은 성격의 책을 내준다면, 거기에 작년부터 주목을 받았던 세시봉의 이야기도 한자락 넣어주지 않을까? 그리고 애증의 '위탄(위대한 탄생)'도 언급하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해 본다.  

인문학으로서의 음악-김종철의 <음악, 삶의 소리를 듣다>

 

얼핏 느끼기엔, 위의 <결국, 음악>보다는 한 수위의 책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책소개의 말마따나 한때 우린 클래식이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생각했던 때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음악을 ‘통섭의 눈과 귀’로 들어보라고 충고한다.  

이책은 클래식뿐만 아니라 음악이라고 하는 저변의 모두를 다루고 있다.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으면서 음악을 통한 삶의 통찰의 경지까지 보여줄 것 같아 기대가 크다.    

 

우리나라 영화를 집대성했다-이세기의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한때는 매니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꽤 부지런히 영화를 본적이 있다. 최고로 많이 본 때가 120이었나, 140편 정도 봤던 것 같다.  

지금은 그렇게까지는 보지 못하고 있다. 이책 전에 그냥 영화로 1001편을 다룬 책이 있는 걸로 아는데, 이책은 우리영화만 뽑아 1001편이다.  전에 이렇게 저렇게 본 겹치는 한국 영화를 빼더라도, 1년에 약90편씩만 보아도 10년이 걸리는 대장정이긴 할 것이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책 한권쯤 가지고 있으면 우리나라 영화의 흐름을 알 수도 있고. 꽤 가치있는 자료로 남을 수 있을 것 같다. 쪽수가 천 페이지를 넘어가긴 하지만 도판이 많아서일 듯 하고, 그래도 맘만 먹으면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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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is film 2011-05-04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죽기 전에 봐야할 한 영화 1001> 이 책 좀 밀어주고 싶은데.. 아무도 없으시네요 ㅠㅠ

stella.K 2011-05-04 10:59   좋아요 0 | URL
ㅎㅎ 이 페이퍼 올리고 그런 책이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요.
좋을 것 같긴한데, 청소년 책으로 분류가 되있더군요.
우리가 청소년 책 보기엔 또 좀 그렇지 않나요?ㅋㅋ

In this film 2011-05-04 11:05   좋아요 0 | URL
노노~ 절대 청소년책 아닙니다. 청소년도 볼 수 있다는 의미이지 이렇게 한국영화만 정리한 책을 접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지금이라도 페이퍼에 추가해 주세요 ㅜㅠ

stella.K 2011-05-04 11:11   좋아요 0 | URL
ㅎㅎ 그세 나타나셔서는...
알겠습니다.^^

2011-05-04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4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4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4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4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4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6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6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추리비평` 창시자 피에르 바야르 방한

 쿨하게 사과하라 

어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탓는데, 갑자기 택시 한대가 끼어 들었다. 순간 운전기사 아저씨 꼭지가 돌아 차문을 열고 고함을 치신다. "여기서 끼어들면 어쩌자는 거야! 저게 실성을했나?" 그러자 그 택시 운전기사도 절대 지지 않고 뭐라고 큰소리를 친다. 

물론 거친 말을 쓴 거야 이쪽 아저씨가 좀 심하긴 하지만, 저쪽 아저씨 미안하다고 사과는 않고 되려 큰소리치는 게 좀 그렇다. 그런 상황에서도 목소리 큰사람이 이긴다고 생각하는 걸까?  

얼마 전, 이책의 저자가 나와서 강연하는 걸 잠깐 본적이 있다. 그는 한국 사람은 참 사과하는 게 인색하단다. 왜 그런가를 생각하면, 사과하면 자신이 더 손해를 본다는 무의식적 강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설마 나도 그런가? 잠시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같다. 이를어째... 혹시라도 내가 실수하고 사과해야 하는데 안한 적이 있다면 비밀 댓글로라도 말씀해 주시라. 그럼 사과드리리다. 

암튼 그 저자는, 사과해야 할 때 사과했더니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조목조목 설명하는데 과연 그렇겠다 싶다. 특히 모 병원에서 의료사고가 일어났을 때 점잖은 의사체면에 책임지기 싫어 이리 빼고 저리 빼다가 오히려 법정까지 끌려가서 손해 보기 보다, 사과할 때 사과했더니 손실이 훨씬 적었다는 연구보고를 한다. 결국 사람의 목숨 보다 또는 돈 보다 중요한 건 쿨하게 사과하는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저 책이 읽고 싶어졌고, 동시에 어째서 저런 책까지 나와야 할까? 마음이 좀 복잡해졌다. 

귀머거리새들의 대화 

어제, 피에르 바야르 좌담회에 다녀왔다.  

그런데 프랑스 남자들 은근 잘 생겼다. 오래 전, 르 클레지오를 봤을 때도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피에르 바야르도 못지않게 지성미가 느껴진다(난 그전까지 프랑스 사람은 알랑 들롱만 잘 생긴 줄 알았다)  . 이 좌담회엔 피에르 바야르 말고도 방민호 교수 등 몇 사람이 참여했는데, 김연수 작가도 나왔다. 사실 난 피에르 바야르 보다 김연수 작가가 좀 더 궁금했다. 실제 어떤 인상일지, 무슨 말을 할지. 그런데 무엇보다도 김연수 작가 목소리가 참 보기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굵직한 목소리다.  

좌담회 역시 생각보다 훨씬 지적이고 생동감 있는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특이한 건, 방청객들에게 성냥곽보다 조금 큰 통역기(?)를 나눠줬는데, 그걸 오른쪽 귀에 끼고 들으면, 바야르 교수의 불어를 동시 통역으로 들을 수가 있다. 그건 좀 새로운 경험이다. 그러니까 방청객도 뭐라도 된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는데, 문제는 잡음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 옆의 여자는 그런 게 필요없는지 나눠주는 통역기를 그냥 들고만 있던데, 약간 부러웠다. 

별로 기억나는 건 없는데, 이를테면 바야르 교수는 그런 말을 했다. 우리가 책에 대해서 말할 때 꼭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고 말을 해야하는 것이냐는 것이다. 책 프롤로그에도 그런 말이 나오지만, 실제로 다 읽을 수도 없고, 설혹 다 읽는다 읽고 얘기한다고 해도 대화하는데 더 꼬이기만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슬쩍 아는 척만해도 대화는 훨씬 편하고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김연수 작가도, 작가생활 초기 때 애써 열심히 글을 썼더니 오히려 그 작품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에따 모르겠다, 그냥 내 식대로 쓰자 했더니 오히려 알아 봐주는 사람이 많더라고 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책에 대해서 채무의식 내지는 어떤 묘한 강박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긴하다. 나만 보더라도,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만 할 것 같고, 그만큼 어쩌다 취향도 안 맞고 못 읽어 줄 책을 만나면 자괴감도 같고, 언젠간 읽겠지 하고 못 읽어 준 책에 대해서 죄의식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또 안 읽기로 한 책에 대해서 묘한 해방감 같은 것도 가지고 있다. 최근에 나는 그 유명하다던 미미 여사의 <모방범> 마지막 3권을 읽으려다 결국 포기했다. 이책 가지고 재미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도 누군가 이책 가지고 대화에 낄려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필히 읽고 대화를 해야할 것 같다. 예전 같으면  "뭐, 추리소설은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하고 슬쩍 넘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요즘엔 워낙 매니아층이 넓고, 이책 정도는 읽어줘야 하지 않을까?하는 책도 많아져 그렇게 흘려버리고 말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우리의 바야르 교수는 어제 이런 말을 했다. 아무리 그책이 좋아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말하는 것 같아도 서로 말하는 바가 다르고, 생각하는 바가 달라서 꼭 귀머거리새들이 말하는 것 같다고. 우리식으로 말하면, 동상이몽쯤 되려나? 아무튼 그 표현이 재밌었다. 귀머거리새들의 대화라! 

아무튼 이책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책을 좋아하면서도 책에 매이는 이 묘한 채무의식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나도 조만간 이책을 읽어 볼까 한다. 마침 어제 바야르의 번역본을 두권에 만원이란 파격적인 가격으로 판매한다고 해서 사고, 또 한번 채무의식을 치렀는데, 참 어쩌자고 이러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읽어야 할 책은 이미 내 방에 가득히 넘쳐나고 있는데 말이다. 이책 읽으면 진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지만 이책 절대로 다 믿을 건 못되는 것도 같다. 바야르 교수는 이책을 쓰기위해 얼마나 많은 텍스트를 섭렵했겠는가? 물론 그냥 설렁설렁 보고 자유롭게 썼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분의 설렁설렁과 나 같은 사람의 설렁설렁은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래도 좋은 건, 이런 책은 일종의 에세이류로 분류가 될 것 같은데, 이런 지적이고 위트가 넘치는 에세이는 대환영이고, 이제 좀 이런 류의 에세이가 나와줘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우린 너무 에세이를 감성쪽에만 촛점을 맞추는 것 같아 하는 말이다. 또 모르지. 그런 에세이가 알고 보면 꽤 있을런지. 이것도 알고보면, 알아보지도 않고, 읽어보지 않고 아는 척하며 하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그럴 땐 그냥 나도 귀머거리새려니 생각해 주면 고맙겠다.  

피에르 바야르 교수에 대해선 어설픈 나의 말 보단 차라리 기사가 날 것 같아, 먼대글 형식으로 여기에 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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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4-28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연회를 많이 다니시네요.^^ 후기 잘 읽었습니다. (혹시 책을...알라딘에서 구입하셨나요? 쿨럭^^;)

stella.K 2011-04-29 11:16   좋아요 0 | URL
아니, 빵가게님이 저의 서재에 들러주시고!
황감합니다.ㅋ
사실 좀 더 꼼꼼하게 잘 써야했던 건데 그냥 저의 주관적인
느낌만 주절거렸네요.
지금 다시 들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뭐랄까, 상당히 흥미진진한 시간이었거든요.
아마도 지적인 빵가게님이 들으셨어도 좋아할만한 시간이었을 텐데...ㅋ
책은 현장에서 샀습니다.
알라딘에서도 싸게 팔지만 이렇게까지 싸지는 않을 거예요.
만원에 두권이었으니, 땡 잡은 거죠. 언제 읽을지는 모르겠지만...휴~
 

얼마 전에 읽은, 정수복 교수의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에 소개된 크리스티앙 가이라는 작가가 소개되어 있어 여기 발췌 정리해 본다. 

그는 1948년 생이라고 한다.  

청년기에 들어서 그는 고독을 이기기 위해 색소폰을 불기 시작했다. 이내 재즈 음악의 세계에 매료되어 한때 재즈 연주가의 길을 걸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 이곳저곳 전전하며 손님들의 구미에 맞추어 하기 싫은 연주라도 억지로 해야하는 생활에 회의를 느껴 재주 연주가로서의 삶을 접었다고 한다. 그러고 난 다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은 돈이 되지 않았다. 먹고 살기위해 궃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글을 쓰고부터는 모든 것을 감수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재주 연주가의 길을 떠났지만 재즈는 그가 글을 쓸 때 그가 글을 쓸 때마다 종이 위에 얼굴을 내밀었다. 재즈는 그에게 모국어와 같은 것이었다. 어쩌다 모국을 떠나 외국에 살게 되어서 모국어를 거의 쓰지 않아도 모국어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듯이 재즈는 그의 몸속에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책이 없는 집에서 자랐고,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소년 시절에 무슨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고 한다. 그는 요즘에도 다른 작가들의 책을 읽으면서 문체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글의 분위기 속에 빠지면서 '문장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즐기기'가 아니며 '일'의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 책을 읽다보면 문장의 구성방식이나 어휘 선택을 살피고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추측해보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자기를 문득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는힘들여 쓴 첫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는데, 얼마 후 편집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한다. 그 편집 담당자는, '당신의 작업은 재미있는데 한번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나서는 그에게, '당신이 쓴 원고의 현재 상태는 지나치게 시뮈엘 베케트의 영향 아래 있다. 베케트를 벗어나 당신 스스로의 이야기를 당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써보라'고 주문을 하더란다. 그래서 그는 몇 달 동안 아파트에 쳐박혀 자기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긴 독백 형식으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계속 적어 내려갔다. 그렇게 해서 1987년 그의 첫 작품  <그는 말한다>가 출판되었고, 그후 지금까지 12권의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 책들은 각각 개별적인 작품들이지만 모두 자전적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반 고흐가 파리 시절에서 시작하여 아를과 생-레미 그리고 오베르-쉬르-우아즈 시절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여러편의 자화상을 그렸다면, 크리스티앙 가이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줄곧 자화상을 그린 셈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참모습을 찾기 위해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글을 썼다. 그러다보면 자기가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 때가 오리라고 생각하며 글을 썼다. 그렇게 해서 나온 열두 편의 소설은 모두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하기 위한 자기 모색과 자기 탐구의 작업이었다. 그는 지금 글을 쓰지 않고 있다. 그는 지금 여백 속에 있으며, 그 여백 속에서 새로운 글이 떠오르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모습을 더 분명히 그리기 위해서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 글을 읽으니,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현실은 단 한 줄도 쓰지 않겠다했던 아니 에르노가 생각이 났다.  그 역시도 자전적 소설을 쓰는 작가로 유명한데, 크리스티앙 가이도 그렇고, 그런 작가군이 있는가 보다.  글을 쓰다보면 정말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반 고흐가 한번도 아닌 몇 번에 걸쳐 자회상을 그렸다니 새삼 놀랍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모습을 그릴 때마다 낮설게 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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