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오늘 이 책을 받았다. 예정대로라면 조금 더 일찍 받을 수도 있었는데 보내는 측에서 우리 집 주소를 불명확하게 기입하는 바람에 배달 사고가 났고 오늘에야 받은 것이다. 아마도 신주소와 구주소가 섞여서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올해부터 신주소를 써야 한다고 하기에 쓰고 있는데 아직도 택배 아저씨들이 구주소가 익숙한지 겉봉에 구주소가 자꾸 따로 기입되어 오고 있어 아무래도 그럴바엔 아예 구주소로 다시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이 책을 내가 돈 주고 살리는 없고(책 값이 비싸기도 하거니와 이명박 대통령을 싫어하지도 않지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 운 좋게도 모처에서 하는 이벤트에 당첨이 되어 받아보게 됐다. 받고 보니 정말 묵직하다. 그도그럴 것이 800쪽이다. 두껍고 괜찮은 소설 두 권짜리도 읽는데 그 셈치고 읽으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빌 클린턴의 자서전 보다는 조금 얇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막상 완독을 할 수 있을까? 조금은 의문스럽다. 한 나라의 대통령의 이야기고 대통령의 주된 업무가 정치, 경제, 외교 기타 등등이고 그 이야기가 전면에 깔릴텐데 내가 뭐 그 방면을 잘 아는 것도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완독은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이 책이 처음 나올 때부터 관심은 갔다. 워낙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통령이라 이 분이 말이 많다면 왜 많은지, 탈이 많다면 왜 많은지 알고 싶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전혀 딴나라에서 역이민왔나 싶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임무가 현역으로 있을 때와  퇴임 이후가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알고 싶다고나 할까? 

 

그건 그냥 하기 좋은 말이고, 난 솔직히 정치엔 그다지 관심도 아는 바도 없는지라 역대로 대통령이 누가 되도 관심이 없다는 쪽이다. 그런데 대통령을 지지하는 쪽이야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같고, 욕하는 쪽에 관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저들은 왜 대통령을 욕하는가? 정말 대통령이 비난 받을만 한 것인가? 어떤 논리와 타당성이 있는가? 아니면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인가? 혹시 그들은 대통령이 이명박이기 때문에 욕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통령이 누가 되도 욕을 할 사람인 것인지 뭘 좀 알고 싶었다. 어차피 대통령을 포함 모든 리더의 자리는 욕 먹는 자리가 아니던가.

 

그런 것처럼 이 책이 출판되자 역시 반응이 뜨겁다. 인터넷 서점의 간단 리뷰를 포함 모든 리뷰를 봤을 때 호불호가 거의 명확하게 갈리고 있었다. 중간은 별로 없어 보인다. 나는 또 이 책을 읽고 어떤 평을 내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야 자서전에 잘 감동하는 편이니 이 책 역시 그렇게 되지 않을까? 전에 돌아간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책을 읽고 울었으니 말이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노 대통령에게 흘린 눈물은 가산점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어쨌든 불운하게 생을 마감한 분이 아닌가. 하지만 비교적 행복한 퇴임을 맞은 이 대통령에게 흘릴 눈물은 없으니 조금은 냉정할 것도 같다.

 

어치피 누구의 자서전이건 자신의 관점에서 쓰는 것이니 공정성을 논한다는 건 한계는 있어 보인다. 그래서 누구는 이 책과 대척점에 있는 <MB의 비용>을 함께 읽겠다고 한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할 것이다.       

 

마침 이 책에 이벤트가 붙었는데 그 시상 내용이 좀 거창하다. 결코 적지 않은 상금이 있고 이명박 대통령과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는 영광도 준단다. 이 대통령과 식사 한번 같이하기 위해 리뷰 쓸 때 온갖 미사여구를 총동원하여 쓰게 될지도 모르고, 주최측 역시 이 대통령을 지지하는 리뷰를 쓴 사람에게 영예를 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부터도 읽기도 전에 냉정하게 리뷰를 써야지 하다가도 밥 한 번 같이 먹게될지도 모르는 일에 마음이 흔들리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역대 대통령 중 이렇게 자서전을 내는 대통령은 이 대통령이 처음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뭐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자서전을 내고 안 내고야 순전히 자기소관이지만 그 사람이 좋고 싫고를 떠나 그냥 자신의 글을 썼다는 것에 방점을 뒀으면 한다. 아니할 말로 누구든 공과는 다 있게 마련이고 한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인데 나라 팔아먹을 짓을 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물론 나라에 먹칠을 했을지언정... 

아무튼 난 이런 다소 낙천적이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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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03-21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닥치고 정치>를 읽었는데
그 책과 상반되는 내용의 책일 듯싶네요.
두 권을 함께 읽으면 균형적인 시각이 잡혀지려나요...

요즘 글도 많이 쓰시고... 당첨도 되시다니 공짜로 얻는 기분이 좋았겠군요.^^

미세먼지만 없다면 좋은 봄날입니다.

stella.K 2015-03-21 17:13   좋아요 0 | URL
책 이벤트는 요즘 많이 자제하고 있어요.
좋은 책도 많은데...
그런데 이 책이 그냥 안 넘겨지더군요.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5-03-21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돈 주고 사서 읽은 사람이 저는 궁금합니다.
근데... 재미는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은 사실 뻥`이잖아요.
사람들은 뻥에 재미를 느끼니 이 책도 꽤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stella.K 2015-03-21 17:15   좋아요 0 | URL
ㅎㅎ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은 꽤 좋아하던데요?
제가 귀가 얇아서 이책 읽고 좋게 쓸 지도 몰라요.
그렇더라도 저 미워하시면 안 됩니다.ㅎㅎ

cyrus 2015-03-21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페이스북에 출판사 서평 이벤트 공지를 확인하면 상금에 눈이 멀어서 정말 열심히 쓰는 편인데 이 책만큼은 잘 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아부성 짙은 글을 쓰기도 싫고, 대통령 각하와 식사하는 기회가 있어도 딱히 하고 싶은 말도 없고요. 그런데 이 책이 노이즈 마케팅 덕분에 잘 팔린 상황에서 서평 이벤트까지 진행하면 판매부수도 더 올라갈 것 같아요. 서평 이벤트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stella.K 2015-03-22 19:42   좋아요 0 | URL
난 필력이 모자라 잘 쓴다해도 뽑아주지도 않겠지만
만약 순위안에 든다면 식사는 하고 싶어.
식사로 뭐가 나오는지. 어떤 집에서 사는지 궁금해.
아무튼 먹는 거라면 안 빠지는 편이라서 말이지.ㅋㅋ
 

얼마 전 <명작의 탄생>을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소설가들 19인을 인터뷰한 책인데 그중 소설가 박상우 편이 눈에 띄어 여기 옮겨 본다.

 

박상우는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1999년 이상문학상 수상하게 된다. 그런데 아는가? 이 옥탑방이 그가 처음 그 소설에서 사용했다는 것을. 나도 몰랐던 건데 이 책 <명작의 탄생>에서 처음 밝혀진 사실이다. 그것에 대한 인터뷰 부분을 보자.

이(이 책의 저자): 옥탑방이라는 단어가 사회문화로 익숙해진 것도 그 무렵부터가 아니었나요? 

 

박상우: 그때 당시는 옥탑방이 국어사전에 공식적으로 올라 있지 않았어요. 일상적으로 사용한 것은 제 소설이 처음입니다. 그 뒤 옥탑방 고양이가 나오고 '옥탑방, 옥탑방' 하더라구요. 어디 가서 옥탑방 쓴 작가라고 하면 드라마인 줄 알고 "<옥탑방 고양이> 잘 봤습니다." 그러더군요.(72쪽)     

여기서 그 무렵이란 박상우가 그 작품으로 이상문학상을 받고 알려지기 시작한 때일 것이다. 그런데 하필 '옥탑방 고양이'가 나오고 그것과 맞물려 알려지다니. 하지만 그것에 대해 억울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소설이란 게 드라마 보다 파급력이 그리 세질 못하니 일반 대중이 그렇게 인식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단지 '옥탑방'이란 단어가 그때까지 사전에도 없다가 박상우의 작품에서 처음 썼다는 나는 더 놀랍다. 그는 어떻게 하다가 이 '옥탑방'이란 단어를 발견했거나 만들어 냈던 것일까? 난 그런 사람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이야 일상어라 새롭지도 않겠지만 그때까지 누구도 쓰지 않은 단어를 썼다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옥탑방'은 드라마에 의해 부풀려진 것도 사실이다. '옥탑방'은 그동안 드라마에서 진화의 진화를 거듭해서 어느 호텔의 펜트하우스와 동급으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그게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이었나? 거기서 주인공 공유의 주거공간이 옥탑방으로 기억하는데,  겉으로 볼 땐 그냥 보통집 옥상 같은데 옥탑방 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의 아방궁처럼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때 이후 드라마에서의 옥탑방은 딱 우리네 서민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을 한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네 인식 속에서도 옥탑방은 서민이 살기에 딱 좋은 상징적 공간이 된 것 같다.  그렇게 된 것엔 무엇보다 옥상에서는 하늘과 세상을 다 품을 수 있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실제로 옥탑방은 여느 집 반지하나 그 보다 못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박상우의 인터뷰에서 재밌는 일화가 나온다. <명작의 탄생> 박상우편을 더 읽어보자.

이: 옥탑방이란 단어를 소설에 처음 쓴 작가인 만큼 옥탑방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았겠네요?

 

박상우: 대통령 선거가 있던 무렵인데, 당시 출마했던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가 각축을 벌이고 있을 때였어요. 기자들이 두 대통령 후보에게 옥탑방에 가 본적이 있는가? 옥탑을 아는가? 이런 질문을 했는데 노무현 후보도 이회창 후보도 둘 다 옥탑방을 모른다고 하는데 작가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거예요. 저는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어 코멘트를 하지 않겠다고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72~73쪽)

나는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옥탑방을 모른다는 두 대통령 후보 때문이 아니다. 그때 막 회자가 되기 시작했는데 모르는 것도 당연한지도 모른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지 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히려 웃기는 건 기자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기자들은 떼거리로 그에게 몰려가 두 분의 대통령 후보가 모른다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당연히 당황해 하는 수밖에.

 

순간 나는 어렸을 때 보았던 한컷 만화가 생각이 났다. 어느 기자가 나가라는 취재는 안 나가고 어느 여자와 여관 방(그때는 모텔이 생기기 전이었을 것이다)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딱 한 마디 써 있다. '기자도 정신...!' 모르긴 해도 당시 기자가 취재는 안하고 딴짓거리하다 잡힌 게 회자가 됐었나 보다.  그러니 누군지 모르지만 기자가 정신이 나갔다는 걸 말하기 위함이었겠지. 그처럼 그 기자들도 웃긴다. 작가에게 그런 질문을 할 생각을 하다니?  아무리 옥탑방을 처음 썼기로서니 말이다.

 

모르긴 해도 기자들은 우리나라 서민정책에 대해 두 후보는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알고 싶어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박상우 작가가 그 소설을 썼을 때 과연 서민의 고뇌와 상실을 고발하기 위해 썼을까? 그건 또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랬다면 논픽션이나 르포문학을 썼겠지. 문학 작품은 문학 작품으로 봐야할 텐데 우리나라 기자들  진짜 대책이 없다.

 

사실 '옥탑방'이란 단어를 박상우 작가가 처음 썼다는 것 뿐 그것은 70년대에 이미 있어왔던 주거 형태다. 당장 나는 유년시절 나의 첫 피아노 선생님 댁이 그런 옥탑방이었다. 지금은 '양옥'이란 단어가 사어가 됐을 법한데 당시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막 이층 양옥을 한 두채 짓기 시작했을 때이기도 했다.

 

그 피아노 선생님 댁도 이층이긴 하지만 양옥은 또 아니었다. 다락방 울라가듯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가면 나무 판자를 덧댄듯한 복도를 지나면 방 하나가 나오는데 그 방에 피아노가 있었다. 그 피아노 앞에 앉으면 왼쪽은 창문이었고, 오른쪽은 이층 베란다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그 시절 집이 거의 다 그렇듯 세를 둘 수 있겠끔 지어졌다. 그러므로 그 베란다에 수도가 있었고 그 방과 비스듬히 마주 보이는 곳이 부엌으로 쓸 수 있게 지어졌나 그랬던 것 같다. 물론 선생님 댁은 세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은 창고처럼 쓰였던 것 같다. 그러니 그 방은 햇볕과 통풍이 기가막히게 좋은 곳이었다. 대신 겨울은 견디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선생님은 내가 입고 왔던 오버코트를 벗지 못하게 했고, 피아노 한 곡을 다 치고나면 손이 시렵다고 켜 놓은 조그만 미니 전기곤로에 손을 녹일 수 있도록 해 주셨다. 나중엔 너무 추워 피아노를 옆방으로 옮기기도 했다.

 

그후 내가 옥탑방을 가 본 건 대학을 졸업하고 한 친구의 집에 갔을 때다. 그 친구가 그곳에서 동생과 자취를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를 포함한 다른 친구들은 이런 집이어서 좋겠다고 감상을 얘기하곤 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보기만 좋을 뿐 불편하다고 했다. 하긴 부엌이 같이 붙었다면 주방이 되었을 텐데 신발을 신고도 맞은 편에 있었으니 불편했을 것이다. 게다가 화장실도 공동으로 써야했기 때문에 급하거나 귀찮으면 부엌 바로 옆의 수채 구멍에 해결을 하기도 한단다.  훗날 그 친구는 친구들 중 가장 먼저 결혼을 했고, 결혼한지 1년인가 2년만에 안타깝게도 암에 걸려 주거지를 지상에서 천국으로 옮겨야 했다. 아무튼 이렇게 가진 게 별로 없던 시절 옥탑방에 대한 감상은 반지하 보다 몇 배 크다.

 

그런데 그게 박상우가 <내 마음의 옥탑방>이 나오기 이전 얘긴데 옥탑방을 박 작가가 처음 썼다니 좀 의아스럽긴 하다. 하긴  누가 어떤 단어를 처음 썼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아직도 이 세상엔 인간이 지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일 게다. 아직도 집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 나라의 조건에서는 더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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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1-31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정말. 옥탑방` 육이오 때부터 있던 말인 줄 알았습니다.

stella.K 2015-01-31 16:45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곰발님이 굉장히 나이들어 보입니다.
그때는 하꼬방이었죠.ㅋㅋㅋ
그런데 기자들이 더 웃기지 않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1-31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외국인은 반지하방`이거나 지하방`이란 한국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지하방`이 없다고 하더군요. 지하실은 있어도 말이죠.
생각해 보면 땅 넓은 나라`에서는 굳이 지하를 방으로 만들 필요가 없잖습니까.
생각해 보면 6.25 이전에는 지하방이란 단어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stella.K 2015-01-31 17:46   좋아요 1 | URL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적어도 미국 같은 나라가 그런 방이 있을리가
없죠.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오드리 헵번이 나왔던 <어둠속에 벨이 울리 때>의
공간이 반지하 실내라는 거?
그 영화 제가 중학교 땐가 아무튼 꽤 오래 전에 봤는데 반지하도 저런 구조라면
평생 살겠다 싶었죠. 그런데 아마도 영화를 위해 따로 제작한 공간이었을 겁니다.
왜 그런 실내를 했는지도 짐작이 가구요.
아마도 서양 사람들에겐 옥탑방도 쉽게 이해되기 어려울 것 같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1-31 18:34   좋아요 0 | URL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 는 이스트우드 옹 영화이고,아마 < 어두워질 때까지 > 일 겁니다. 거기에 햅번 여왕이 나오니 말이죠. 저도 지하에서 살아본 적 있는데 정말 최악입니다. 기관지 계통 질병을 달고 살아야 해요. 최악, 최악.. ㅎㅎㅎ

지하는 주로 사진 작가들이 사진 현상할 목적으로 꾸미는 경우가 많죠. 아마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사진 현상하고 그러지 않았나요. 아니다. 장님이었는데... 가물가물하네요.. 꽤 훌륭한 스릴러 영화였져. 스토리도 좋아고 말입니다.

stella.K 2015-01-31 19:15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어두워 질 때까지!
어쩌면 그렇게 완벽하게 헷갈릴 수가 있을까요?ㅎㅎ
곰발님도 그 영화 좋아하시는군요.
아마 그 영화엔 사진 현상실은 없었던 것 같아요.
오드리 헵번이 시각장애자로 나오죠.
악당 퇴치를 위해 어두운 밤을 기다리잖아요.
밤은 시각장애자인 그녀에게 유리한 때니까.
전기를 다 끊어놓고.
어둠속에서 벌이는 악당 퇴치극 뭐 그런 거 아닌가요?ㅋ

곰곰생각하는발 2015-02-01 03:33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저도 가물가물한데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왜 악당에 다 불 꺼졌을 때 냉장고 열어서 불빛으로 활용하잖아요.
그 영화의 백미였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시각장애인이 멀쩡한 악당들 물리치는 게
꽤 흥미로웠어요..

stella.K 2015-02-01 16:45   좋아요 0 | URL
헉, 악당이 냉장고 불빛 가지고 뭘 한다구요?
정전이어서 냉장고 불빛도 안 나올텐데...
그 영화 다시 봐야겠는데요?ㅋ

곰곰생각하는발 2015-02-02 17:52   좋아요 0 | URL
아니 그 유명한 장면을... ㅎㅎㅎㅎ
불이 다 꺼져서 악당이 햅번이 숨은 곳을 못 찾는데,
그때 악당이 냉장고 문을 열어서 그 불빛으로 햅번을 찾습니다. ㅋㅋㅋㅋㅋ

cyrus 2015-01-31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옥탑방 고양이> 인기 때문에 옥탑방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어요. 요즘 옥탑방 시세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네요.

stella.K 2015-02-01 16:28   좋아요 0 | URL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난 앞으로도 천재지변이 생기지 않는 이상 옥탑방 시세 알아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 알자나. 내가 다리가 약한 거...ㅎㅎ
혹시 알게되면 알려줘.^^

[그장소] 2015-02-01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옥탑방의 일례로 외국 친구에게 편지던가 우편으로 받을 것이 있어 국제우편을 받았다던가..
암튼..문제는 그게 옥탑이 주소인데..외국쪽에서 쓰기를 펜트하우스 라고..썼답니다.
맨 꼭대기층이라는 의미라고..틀린 말이 아니라나..?
그런데..택배기사는 건물을 보고 계속 되돌아 가더라는 겁니다.
이 건물엔 펜트하우스가 있을 그런 건물이 아니야..하면서..
우리 인식이..펜트하우스는 엄청 으리으리..한으리..해야 하는 그런 인식이 생긴..오해가 만든 해프닝..이었다고..

stella.K 2015-02-01 16:29   좋아요 1 | URL
ㅎㅎ 재밌네요. 그런 일 충분히 있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 문화와 미국 문화가 다르니...^^

[그장소] 2015-02-01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동산 붐이 일면서 반지하도 옥탑이란 것도..
생긴것이 아닌가..이문열의 변경..에보면..
딱지촌이라고..여기..제가 사는 성남 일대를 예전에 개발되기전..그리 불렀던가 봅니다.
판자촌이나..딱지촌이나..의미는 다르지만 공간적 구성엔 크게 다를것이 없을것 같다고..농사가 생업이 아니게되고..땅이 건물이 돈이 되는 시대가되면서 생긴 풍습이죠.일반 주택을 지어놓고 더 세를 받고자 불법증축을 하다보니..반지하도..옥탑도 생기는 거라고
외국은 보통 저장소로 대피소로 만들고 쓰지..우리처럼 주거용도로 쓰지않는다고 들었어요.뭐 그들도 형태변경을 가한것이라면 뭐든 가능하겠지요.

stella.K 2015-02-02 13:01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에 딱지촌이란 게 있었군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집에 대한 집착이 크죠.
손바닥만한 땅만 있어도 어떻게 하면 건물 지어서 세를 받아 먹을까
그런 생각하잖아요.
그리나라 부동산은 문젯점이 많은 것 같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2-02 17:50   좋아요 0 | URL
오, 그장소 님이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셨네요. 옥탑방`은 사실 불법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지금도 불법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왜 옥탑방은 도시 가스`를 설치할 수 없습니다. 주거 용도로 설치된 게 아니라 집주인이 세 욕심을 내서 불법 개축한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stella.K 2015-02-02 18:42   좋아요 0 | URL
헉, 지금도요...? 지금은 건축 규제가 완화되면서
합법인 줄 알았더니 아직도 불법이었군요.

[그장소] 2015-02-02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일명..떳다방..이라고 하나요?ㅎㅎ
그 것의 시초라..하는..걸로..봤어요.
변경을 읽다보면..졸부..라던지..특히 이쪽
분당..성남 강남 일대..변화가 아주 생생해서..제가 그 속에 있는것 같은 느낌..들어요.

stella.K 2015-02-02 16:23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떳다방!
예전에 그 일대가 그랬지요.

페크pek0501 2015-02-02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어보는 제목입니다. <내 마음의 옥탑방>을 읽은 것 같아요.
그때쯤이면 이상문학상집은 다 사 보던 시절인지라...

아예 전문 용어를 지어내기도 하잖아요.
융이 최초로 사용한 `페르소나`처럼요.

요즘 글을 많이 쓰셨군요. ^^


stella.K 2015-02-02 14:42   좋아요 0 | URL
오우, 오랫만이십니다. 이미지도 바꾸셨어요.
저도 좀 바꿀 필요가 있는 것 같긴한데 이러고 있습니다.ㅠ

많이 쓰긴요? 전혀 아닌데...^^
 

생각해 보니 올 한 해는 지난 해 보다는 지내기가 낫긴 했지만 특별히 한 일이 없는 별 볼 일 없는 한 해였던 것 같다.

 

특히 작년에 미처 해결하지 못한 두 가지 일을 올해도 붙들고 씨름했었구나 싶다. 인간의 걱정 중 90% 이상이 쓸 때 없는 거라던데, 쓸 때 있고 없고를 떠나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끙끙대며 보냈다는 게 좀 억울하다 싶다. 그냥 단순해질 수는 없는 건지...

 

이 책은 작년 말부터 읽기 시작한 책이었는데 총 5권 중 2권까지 독서를 마친 상태다.

이 책은 지금도 품절으로 나오는데 이 책이야 말로  나에겐 '발견, 이 책!'쯤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이렇게 좋은 책이 아직도 품절로 나온다는 건 독서계의 불행 같다. 하지만 난 운 좋게도 5권을 다 구입했다. 

이 책이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강원용 목사의 자서전이기도 하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 우리나라 현대사를 아우른다는 것에 있다. 그것을 편견이라고 볼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스펙트럼의 문제고, 사고관의 문젠데 저자의 역사를 통찰한 면이 탁월하다 싶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어서일까? 아니면 나이가 나이라서 그럴까 나 역시 자서전이라는 걸 쓰고 싶어졌다. 개인사로서의 자서전인 동시에 나의 살아 온 삶을 갈무리 한다는 점에서 이 작업은 필요한 것 같아 용기를 내서 조금씩 썼는데 아무래도 올해 안에 끝내진 못할 것 같다. 마음 같아선 올해 안에 끝내고 새해 새로운 자서전을 쓰기 위한 원년으로 만들어었야 하는 건데.

 

물론 나의 이야기는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다 아우르는 건 아니다. 올해가 내가 연극 대본을 쓴지가 딱 20년이 된 해였는데 그것을 뒤돌아 보고 싶었다. 잘 써서가 아니다.

얼떨결에 그 일을 붙들고 나름 세상을 주유했다.

 

내 이야기 내가 쓰지 않으면 누가 쓰겠는가? 기억이 더 흐릿해지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쓰자는 건데 진척이 없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글이란 안 쓰고 있을 땐 굉장히 위대해 보인다. 그러나 막상 쓰기 시작하면 지루하고 후회로 점철될 때가 많다. 이 한심하고 별 볼 일 없는 일을 왜 붙들고 있는 건지. 그걸 전체 이야기 중 4분의 1 정도를 남겨둔 상황이다.

 

그 다음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이 책이다.

일본 여성이 쓴 아시아 여성들이 지난 세기 동안 전쟁을 겪으면서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를 고발한 책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런데 거기엔 일본 여성도 포함을 시켰다는 것이 나로선 좀 놀라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난 지난 세기는 일본의 패권주의가 극에 달한 때로서 일본 여성들이 전쟁의 고통을 겪었을 거라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다. 누구는 저자더러 당신도 일본 사람이면서 그렇게 쓴 것이 엄살을 부린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순수하게 여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본 여성도 전쟁에서 예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은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다. 아직도 위안부 문제만 끄집어내면 발끈부터 하는 일본의 극우 수컷들과 자신의 자리를 지키겠다고 이 문제를 외면하고 거짓말을 해야하는 극우 암컷들은 확실히 반성할 필요가 있다.      

 

 

 올해는 갑질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해로 기록될 것 같은데 나는 올해 교회에서조차 갑질을 해 대는 어떤 인간 때문에 내내 가슴 한켠에 뭔가가 얹혀진 느낌으로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팀의 리더고 재정의 거의 대부분을 담당한다는 이유만으로 팀을 자기 휘하에 두려고 하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즉 자신은 하나님의 대리인이고 그 권위를 위임 받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신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망상적인 생각들도 가득하다. 

 

어떻게 그런 생각들이 가능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녀의 입장에선 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돈을 가지고 그 누구의 일도 아닌 하나님 일을 하겠다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순종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 배면에 깔려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생각을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교회에 가지고 들어와 갑질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가진 자의 세상이니까. 하지만 교회에서 돈을 가졌다는 건 그저 신자들이 가진 여러 많은 탈란트 중 하나를 가진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있는 사람이 더 많은 희생해야 하는 것이 교회다. 그리고 그것엔 강요는 없다. 이렇게 겸손한 생각을 가져줘야 하는데 마치 돈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일도 가장 크게 할 수 있다는 착각을 가지고 그것을 권력삼아 군림하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적어도 가진 자로서 절대로 손해 보지 않겠다는 자세다. 그런 사람한테 희생을 설명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일이고. 

 

그런데 더 화가나는 건 그녀가 조금이라도 불리한 입장에 처하면 고난 당하는 척, 약한 척혼자 다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한마디로 말하면 소시오패스다. 그녀 때문에 상처 받고 모임에 탈퇴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은 생각도 않고 자신만이 고난 당하는 것처럼 가증을 떨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교회에 종속된 팀을 사유화하면서 말이다. 그건 정말 겉으로 보기에만 복음 전파를 위한 선교팀이지 알고 보면 그녀의 사조직이다. 교회는 언제까지 이를 방치하고 묵인할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 그나마 위안 내지는 나를 추스르기 위해 읽었던 책이 이재철 목사의 책들이었다. 정작 욕하면서 닮는다고 그런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이 책들을 읽었다.  

 

무엇보다 내가 읽는 이 책은 설교집이라고는 하지만 인문학적 향취가 물씬해 읽으면서도 굉장히 만족감하며 읽었다. 앞으로 이재철 목사의 다른 책도 꾸준히 읽어 볼 참이다.

 

앞에서 강원용 목사의 <역사의 언덕에서>가 발견 이 책이었다면, 이 책은 '발견 이 작가!'쯤 되려나? 그렇게 말하기엔 김연수 작가는 이미 중견 작가다. 단지 나에게 있어 김연수 작가의 발견이 너무 늦은 거다(하긴 아직도 내가 모르는 작가가 좀 많은가?).  그러리만치 이 책은 좋았고 이 책을 통해 김연수 작가가 좋아졌다. 

그의 다른 책도 틈나는대로 읽어 봐야겠다.

 

 

 

 

 

 

 

 김연수의 책과 더불어 <거장처럼 써라>나 <작가란 무엇인가>는 모두 글쓰기란 한 범주 안에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거장처럼 써라>는 저자가 당대 유명한 작가들이 글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를 일일이 분석했다는 것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감탄을 하다 못해 존경을 표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일반인들은 넘 볼 수 없는 놀라운 경지를 펼쳐 보이는 것도 아니다. 작가들의 글 쓰기의 특징을 나열하면서 우리도 글을 쓸 수 있다고 다독이기도 한다. 오늘 날의 글쓰기가 선호하는 방식은 셀린저의 방식은 아닌가 한다. 내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는 직접 사서 읽어보기 바란다.

 

 

또한 <작가란 무엇인가>를 읽는다는 건 하나의 축복 같다. 세상에 그토록이나 많은 작가를 인터뷰한 책이 있을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파리 리뷰 인터뷰는 모르긴 해도 상당히 오래된 것 같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작가를 인터뷰 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헤밍웨이나 윌리엄 포크너, EM포스터 같은 작가. 특히 자살로 생을 마감한 헤밍웨이를 읽는다는 건 좀 아련한 느낌이 있었다. 

이 책의 2권과 3권이 동시에 출간되어 나왔는데 곧 읽어 봐야할 것 같다.    

 

지금까지 난 서재활동 이후 거의 해마다 나의 베스트를 뽑아 왔던 것 같는데 올해는 나 나름의 워스트나 문제작을 생각해 봤다.

이 책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는 작품성이 뛰어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책은 확실히 문제작이다 싶다. 등장인물의 실명을 그대로 쓴 것도 독특하고 일종의 잘 편집된 다큐멘터리 극을 보는 것도 같다. 

우리는 나름 인정 받고 있는 사람의 모든 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정말로 믿을만 한 것인가에 우리는 왜 의심하지 않는 것일까? 글쎄 이 책은 학문은 신성하지 않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솔직히 난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땐 그다지 유쾌하게 읽지 못했다. 하지만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남다르게 기억에 남는다.  

 

이 책이야 말로 내가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쓰레기는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 책은 돌아가신 원로 목사님의 아들이 썼다고 해서 유명세를 탄 책인데, 저자가 지금까지 나름 기독교에선 알아주는 유명한 책을 여러 권 쓴 것에 비하면 이 책은 지금까지의 명성을 그 스스로가 깍아 먹지 않았나 싶다.

 

물론 풍자 소설은 있을 수 있지만 나 개인적인 입장에선 오늘 날의 교회 문제를 소설의 형식으로 빌려 써야 했나 나름 소설을 애호하는 나로선 좀 불쾌했다. 무엇보다 작가가 이 소설을 썼을 땐 그다지 교회의 갱신을 호소하기 위한 대의는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그냥 타깃이 된 목사를 웃음 거리로 만들기 위해 쓴 것 같은데 그런 의도라면 좀 더 거룩한 목적을 가질 수는 없었을까? 안타까웠다. 서초교회가 잔혹했던 거룩하건 어쨌든 자신의 아버님이 세운 교회 아닌가?  

이제 본인도 알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다시 소설 쓴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밖에 좋은 책이 몇권 더 있긴 하지만 생략한다.

 

올해 우리나라 독서계의 키워드는 도서정가제가 아니었나 한다. 좋은 책을 만드는 입장에선 좋은 가격 받고, 독자는 할 수만 있으면 적당한 가격에 사 보는 게 꿈인데 그럭저럭 안착이 되는 걸까?  

 

내년엔 또 어떤 책이 나의 관심을 끌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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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12-31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해를 잘 정리하셨네요.

올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 멋진 글 읽었습니다. ^^
내년에도 올해처럼 변함 없기를...

stella.K 2014-12-31 22:58   좋아요 0 | URL
캄샤합니다.^^

yamoo 2015-01-04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정말 한 해 정리를 잘 하셨네요..ㅎ 새해에도 좋은 책 많이 읽으시길! 그리고 건강하시길 빌겠습니다~

stella.K 2015-01-05 13:27   좋아요 0 | URL
아이고, 야무님 고맙습니다.
님께서도 건강하시고 올 한 해 행운이 함께하시길 빌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가 초등학교 때 <들장미 소녀 캔디>란 순정 만화를 TV에서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만화가 한창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을 때 나는 안타깝게도 그걸 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동시간 대에 타 방송에서 모험 가득한 만화를 하고 있었고, 오빠와 동생은 늘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그 시절만해도 TV가 한 대뿐인 우리집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결국 내가 그 만화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동생만 보는 것 같으면 싸우던지 구워 삶던지 어떻게든 해 보겠는데 오빠까지 보고 있으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오빠는 중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보통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만화영화는 어린이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서 잘 안 보는 것 같던데, 남자들이 좀 늦되는 줄은 알았지만 오빠는 늦돼도 한참 늦돼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차마 뭐라고 할 수는 없었고, 난 그저 속으로 오빠가 얼른 커서 만화를 졸업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나의 정서적 성장이 오빠의 그것을 앞질렀던 걸까? 정말 중학교에 올라가니 만화가 시큰둥해졌고, 오빠는 여전히 만화를 떠날 줄 몰랐다.[1] 그래도 캔디에 대한 미련은 남아서 어느 날 <들장미 소녀 캔디>가 만화책으로 나온다고 했을 때 솔직히 마음이 설레었다. 캔디가 책으로 나오다니, 유후~!

 

그런데 솔직히 말해 캔디가 좋아서겠는가? 캔디에 나오는 테리우스와 안소니가 좋아서는 아니겠는가? 거기에 이웃집 키다리 아저씨 같은 길버트도 빠지면 섭섭할 테니 덤으로 좋아해 주고.

 

이렇게 거기에 나오는 남자들은 누구 하나 버릴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소니와 테리우스의 성격은 극명하게 갈려서, 안소니는 자상하고 조용한 것이 여성취향적인 반면, 테리우스는 반항적이면서도 야성적이었다. 그래서 누구를 더 좋아하느냐 의견이 분분했고, 그에 따라 물론 단편적이긴 했지만 그 시절 여학생들의 이성에 대한 취향을 알아보기도 했던 것이다[2]. 그리고 내가 알기론 테리우스가 안소니 보다 인기가 더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이 작품의 인기 요인이 한 가지가 더 있는 것 같은데, 당시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이야기의 배경과 작풍이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때까지의 만화가 익살스럽거나 다소 튀는 느낌이었다면 이 작품은 다분히 부드러운 여성의 곡선을 살리고, 풍부한 감성적 요소를 최대한 살려 누구라도 보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매력이 있었다. 특히 꽃미남의 역사는 이때부터는 아니었을까 한다.[3] 물론 지금은 세련된 작품이 워낙 많이 나와 이것을 새삼 논한다는 게 의미가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때 난 그토록 보길 원했던 만화를 또 뭐 때문인지 사서 보지 않고 빌려 볼까도 생각했었다. 여간 해서 책을 빌려 볼 줄 몰랐던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앞서 말했지만 난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난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들장미 소녀 캔디라구.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그게 만화책으로 나왔다는데 지금 돈 생각하며 튕기겠다는 거야? 그건 캔디에 대한 배신이야, 배신.

그랬다. 만화책은 책이 아닌가? 그런 차별을 두다니. 이건 내가 아니었다.   

 

게다가 나의 이런 생각은, 만화가 인기가 있긴 있었는지 빌려달라는 사람마다 돌아오는 답변은 지금은 빌려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구차하게 물어보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내가 언제부터 책을 빌려봤단 말인가 하는 자각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책은 사놓고 혼자 몰래 봐야 한다. 그런데 그때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 책을 학교까지 들고 다니면서 누가 보거나 말거나 버젓이 꺼내놓고 봤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 옛날처럼 유혹하고 싶었던 아이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빌려달라고 할 땐 빌려 줄 사람이 그렇게 없더니 어느 날, 평소 친하지도 않던 옆 반의 아이가 눈꼬리를 살살 치며 빌려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성격상 어떤 책이든 친한 사이가 아니면 별로 빌려주고 싶지 않은데, 그 아이는 그 만화를 보고 싶어하는 페로몬을 나에게 너무 많이 분사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또 나는 나도 그 책을 그 아이에게 빌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순순히 빌려 줄 나도 아니었다. 거기엔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그것은 수업 시간에 절대로 읽지 말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업시간에 몰래 보다 선생님께 압수당해 그 자리에서 찢겼다는 소문을 들어 온 터라 혹시 나도 혹시 그렇게 될까 봐 그 아이에게 다짐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그 아이도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왠걸, 그렇게도 당부를 했건만 그 아이는 내 말을 어기고 수업시간에 그 만화책을 보다 선생님께 걸려 똑 같은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깐깐하기로 유명한 지리 선생님한테.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참 순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아인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스스로 조건을 걸면서까지 그 아이를 믿고 싶었던 걸까? 빌려 주고 싶어하지 않았던 아이에게 만화책을 빌려줘야 했던 나로선 그것이 최선이었을까? 그 아이도 그렇다. 남의 책을 빌려 보는 것에 대해 최소한의 약속도 지켜줄 수 없는 그 아이는 책을 빌려 볼 자격이 있는 걸까?

 

그 소식을 들으니 기분은 안 좋았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어쨌거나 그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을 하고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이 참 묘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아이에 대해 그다지 끌리는 바는 없었는데 그 생각에 방점이라도 찍듯 같은 반의 다른 아이가 내게 와, 그 아이에게서 책을 돌려 받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돌려 받으려면 독한 마음 먹고 끝까지 받아내던가, 그럴 마음이 아니라면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낫다. 내가 무엇이 아쉬워 그 아이에게 그 만화책을 돌려받지 못한단 말인가? 빌려줄 땐 못 이기는 척 하고 빌려줬지만 나도 못지 않게 강하다는 걸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역시 말대로라고 생각했다. 역시 예의 그 눈꼬리를 살살 치며 어물쩍 넘어가려는 태도가 역력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마음을 강하게 먹고 낮고도 강한 어조로 책을 변상해 내라고 종용했다.

 

그러자 그 아인 이런 나의 태도에 압도 당했던 걸까? 의외로 순순히 내 책을 변상해 주는 것이었다. 난 순간 좀 당황했다. 성난 복어처럼 잔뜩 무게를 잡았건만 이러면 김 빠지는 건 아닌가? 하지만 뭐 별로 힘들이지 않고 책을 변상 받았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좀 우스웠다. 그 아이가 나를 유령대하듯 하는 것이었다. 어쩌다 우리 반에 오거나 복도에서 마주쳐도 도무지 알은 체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좀 어이가 없었다. 물론 그런 일련의 일들이 있었다고 해서 그 아이와 내가 이후로도 역일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를 모른 척 한다는 건 나로서도 좀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빌려 달래서 빌려줬고, 응당 변상을 요구해 그것을 돌려 받았으니 나도 더 이상 이 아이에 대해 감정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누구를 유령취급 한단 말인가? 정말 이것 밖에 안 되는 아이였나 싶은 게 입맛이 썼다.

 

솔직히 변상 문제는 내가 요구하기 전에 먼저하고 사과를 해야 원칙이다. 그렇다고 책을 변상 받을 때 재대로 된 사과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마치 안 해 줘도 되는 일을 해준다는 태도로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모른 척 하고 손을 털려고 했다. 과연 사람은 겪어보니 알겠다 싶었다. 

 

요즘 같이 책이 흔한 시대에 뭐 그런 일이 있나 싶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책이란(그것이 아무리 만화책이라도) 함께 나누고 공감하자고 빌려주고 빌려보는 건데 그 시절 그 아이나 나나 좀 미숙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도 책을 빌려주는 사람이 있을까? 돌려 받을 목적으로 말이다. 돌려 받겠다고 빌려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에 대해 빌려주는 사람이나 빌려가는 사람이나 서로를 얼마나 신뢰하고 그렇게 하는 것일까? 책이 흔해진 세상에서 없으면 또 사지 하거나, 알아서 돌려주면 모를까 어떻게 야박하게 돌려달라고 그러냐고 해서 돌려 받지 못하는 책이 있지는 않은가?

 

옛날부터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라고 해서 서로 채무의식이 없는 것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는 걸까?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란 말을 합리화 해서 공공도서관 같은 곳에서 반납 받지 못하거나 훼손 당한 책만 해도 엄청나다고 한다. 한때 좋은 마음으로 지하철에 무인도서관을 운영했지만 회수율이 저조해 아예 문을 닫기도 했다는 말을 듣는다. 조용히 도로 갖다 놓으면 더 많은 사람이 그 책을 읽을 수가 있는데 말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라는 생각에 책임의식이 희박해서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내 책 귀하면 남의 책도 귀한 법이다.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란 말은 언제 왜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만화책은 책이 아니란 말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만화 좋아하는 사람이 알면 섭섭해 할 일이다. 

 

요즘 같이 책이 흔해진 세상에 누구는 책 보다 사람이 더 중요한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오히려 거기서 그 사람의 인격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만화책이라도 말이다.

 

어느 때, 누구에게든 지키고 싶은 책이 있다. 그게 남 보기엔 아무리 하찮은 책일지라도 말이다. 그것을 서로 존중해 줬더라면 적어도 그 친구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란 말은 그것으로 인해 한번쯤 상처 받아본 사람에겐 확실히 염장 지르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나저나 그때 지리 선생님은 어쩌자고 그 귀하디 귀한 만화책을 그렇게 가차없이 찢어버리셨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 시절 만화가 대접 받지 못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 후 내가 대학 들어갈 즈음엔 만화는 제 8의 예술이라고 해서 그 위상이 몰라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럴 줄 알았다면 선생님은 그냥 가지고 계셨다가 주위를 주는 선에서 마무리했어도 그 아이는 알아 듣지 않았을까? 어쩌자고 선생님은 그런 엄청난 일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는지 모르겠다.


 

[1] 오빠는 고등학교를 들어가서야 비로소 만화를 안 보기 시작했다.

[2]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은 남학교와 여학교가 엄격히 구분되었던 때라 그런 것으로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그런 식으로 투사하고 풀었던 것. 그래서 캔디가 더 인기였고. 

[3] 아마도 그러한 작풍은 이후 나왔던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루이 14세와 마리 앙트와네트를 그렸던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완성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재미있었던 건, 거기에 보면 오스칼이란 인물이 나오는데 작품에선 그다지 많이 다룬 것 같지않지만 사실 이 인물이 여잔데 마리 앙트와네트와는 내연의 관계라고 해 동성애를 조장했다 아니다로 의견이 분분했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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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7-07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만화책을 '쓰레기'에다 '나쁜 것'으로만 여겼고
아직도 이 흐름은 다 가시지 않았어요.

잘 살펴보면, '만화비평'이란 아예 없다시피 합니다.
신문이고 잡지이고
만화 신간 소개를 하는 기자는 찾아볼 수도 없으니까요 ^^

이제 와 돌이켜보면
이렇게 '오늘 새롭게 이야기를 쓰도'록
그때 그러한 일이 우리한테 찾아왔을는지 몰라요.

교사들도 그만 한 만화책은 스스로 읽어 보면
푹 빠져들었을 텐데... 아무튼......

stella.K 2014-07-07 18:04   좋아요 0 | URL
아, 정말 그렇네요.
만화비평이 없어요. 가장 대중적인 매체 중 하난데 말입니다.
만화에 대한 위상이 예전보다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이 미흡하죠?
잘 지적하셨네요.

솔직히 지금도 그런 선생님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아이들 보는 앞에서 책 찢고 그런 몰상식한 일은 좀 삼가했으면
좋겠습니다.
압수했다 돌려주면 되는 것을.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만이 중요한 건 아니잖습니까?
물론 1차적 책임은 수업시간에 딴짓하는 학생이 잘못이긴 하지만요.;;

2014-07-07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08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춘기 시절 나는 꼭 한 번 선생님을 사랑한 적이 있다. 그것은 중학교 1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었다.

 

아마 중학교도 초등학교처럼 남녀공학이었다면 내가 국어 선생님을 좋아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도 모를 일이다. 그때 나의 몸은 14살이었어도 생각은 그 보다 훨씬 앞섰으니 남녀공학을 다녔어도 또래 남자 아이들이 너무 어리다고 쳐다보지도 않았을지도.

 

어쨌거나 여학교였으니 이성의 선생님을 좋아했던 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간 해서 첫 눈에 반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국어 선생님은 거의 첫눈에 반하다시피 했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아주 멋지고 잘 생겼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저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가 완성했다던 다비드 상을 닮았다고나 할까? 그러면 잘 생긴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글쎄 내가 동양 사람이어서 그런지 서양인의 기준에선 다비드 상이 아름답다고 할지 모르지만 난 한 번도 그게 감동하리만치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냥 아름답다고 얘기하니까 그런가 보다 할 뿐.

 

특히 파마를 했다고 보기엔 너무 천연덕스러운 고수머리가 다비드의 머리를 연상케 했고, 갸름한 턱 선도 어딘가 모르게 닮아 보였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검은 뿔 테 안경을 쓴 것이 지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다소 엉성해 보이기도 했는데 나는 그게 상당히 매력적이면서도 순수해 보였던 것이다[1]  

 

국어 선생님을 좋아했으니 국어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건 당연했다. 하긴 뭐, 초등학교 1학년 때 를 맞은 것만 제외하면 나는 어느 때고 국어 성적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국어 선생님이 좋았던 건,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내가 눈에 띄면 달려와 물어보라고 했다. 그 말이 어찌 그리도 내 마음에 들어와 박혔는지 나는 선생님의 그런 순수한 면이 좋았고 마치 성당의 신부님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난 선생님 눈에 띄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지금 생각하면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을 수업 중에는 불쑥불쑥하곤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건 점심시간을 공약했던 게 기억이 난다.

 

선생님께 무엇을 질문할 것인지는 며칠 아니 몇 주전부터 준비를 했고, 선생님을 어떻게 만나 질문을 할 건지 머리 속으로 시뮬이레션을 그려보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점심을 빨리 먹고 국어 선생님이 어디 계신지 찾았다. 마침 이층 복도 창문에서 아래를 살피고 있으려니 선생님은 학교 건물 현관에 계신 것이 발견이 됐다.

 

나는 혹시 입에서 반찬 냄새가 날까 봐 동그란 빨아 먹는 비타민 씨를 우물우물 급히 삼키고(그래도 입에서 반찬 냄새는 낫을 것이다. 그럴 땐 양치를 했던가 적어도 박하사탕 정도는 물어 줘야하는 건데), 선생님께 다가가 준비한 질문들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그것도 의자가 없어 계단 난간에 걸터앉아.

 

나는 무엇보다 질문을 핑계 삼아 선생님을 가까이서 느껴보고 싶었다. 국어 시간 먼 발치서 선생님을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솔직히 그때 난 질문이 마치고 교실로 돌아가는데 약간 휘청거릴 뻔했다. 내가 지금 뭘 한 건가? 정말 국어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러는 건가? 내가 아무리 국어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러기까지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내가 좀 놀라긴 했지만 그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난 얼마 안 있어서 국어 시험에서 내 생애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 그것도 선생님이 고읜지 아니면 하다 보니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시험 중 가장 까다롭고 난해해서 한 반에 90점 넘는 아이가 한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내가 바로 그 손에 꼽을 아이들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그것도 문제 하나를 고치지만 않았어도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무슨 부화뇌동이었는지 마지막에 답을 고쳐 쓰는 바람에 아쉽게도 하나를 더 틀리긴 했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그러자 선생님은 자랑스러운 얼굴들을 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난 정작 부끄러워 얼굴도 들지 못했다.

 

 

그 무렵 나는 우연히 서점에 갔다 세계의 여러 유명 시인들의 시를 모아 놓은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 중 영국의 시인 예이츠[2]를 좋아했는데 그의 시 하늘의 융단이란 시를 읽고 있노라면 어쩌면 시어가 그처럼 영롱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외워버릴 정도였다.

                    

                                          하늘의 융단

                                     

                                             금빛 은빛

                                    하늘을 수 놓은 융단이

                               밤과 낮 어스름의 검푸른 융단이     

                                            내게 있다면     

                                   그대 발 밑에 갈아 드리련만

                                   나 가난하여 꿈만 가졌기에

                                    그대 발 밑에 깔았으니

                                    사뿐히 밟으소서

                                    내꿈 밟고 가시는 이여

 

하늘

그대그렇게 읽기 시작한 시집이 몇 권 된다. 그리고 나도 이런 시를 써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습작 삼아 몇 편 써 보기도 했다그런데 2학기에 접어드니 국어 선생님은 교지(校紙)에 실을 글을 모집한다는 광고하고 다니셨다. 그러면서 원고를 반장에게 내든가 나에게 직접 내도 된 다고.

 

마침 써놓은 시도 있겠다 난 나의 시들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그 원고를 반장에게 낼 수도 있었지만 교무실로 들어가는 국어 선생님 뒤를 밟아 직접 드렸다. 원고는 가을 어느 날 냈던 것 같은데 교지는 2월 종업식에 맞춰 나눠준다고 하니 그 안에 내가 원고를 냈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거의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후에 일어났던 일들이 그것을 생각 못할 만큼 급박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불패의 화신 같았던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믿을만한 최 측근에게 권총을 맞았단다. 그건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 전날만해도 그런 징후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정말 울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저 멍한 느낌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니 분위기가 먹구름이 낀 듯 침통했다. 몇몇 아이는 훌쩍훌쩍 울기도 했다. 이런 아이들 틈으로 꼭 그런 아이가 있다. 슬픔은 둘째치고 누가 울고 누가 울지 않는가 세고 있는 아이 말이다.

 

나는 침통은 한데 아직 눈물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도무지 뭐가 뭔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날씨는 왜 또 그리 우중충한 건지. 반에 들어서자마자 그 아이는 너도 안 우는구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말고도 울지 않는 아이가 있다는 말인데 난 그것을 헤아려 볼 사이도 없이 신경질적으로 안 울긴 누가 안 울어!”했다.

 

그렇게 말하고나니 약간 미안한 생각이 들긴 했다. 그렇게 화 낼 생각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주워 남을 수도 없고, 일부러 심각한 척 고개를 푹 숙이고 내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이후에 우리나라에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는 지면상 말하지 않겠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국어 선생님의 결혼 소식이 나에겐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 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그토록 사모했던 선생님인데 대통령이야 또 뽑으면 되는 것이지만, 국어 선생님은 누구와 바꿀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선생님은 내가 당신을 좋아한 것을 알았을까?

 

갑자기 선생님을 가까이서 느껴보겠다고 했던 나의 지난 날의 노력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창피하게 느껴졌고, 꽤 오랫동안 내가 그 선생님을 좋아했다는 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또 의외로 충격에 강한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다. 순간 침착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분명 선생님의 결혼 소식은 슬프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선생님을 좋아해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고백을 해 보겠는가? 설혹 그런다고 해서 선생님과 데이트를 해 보겠는가? 나이가 어려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좋아하면 뭘 꼭 바래야 하는 것인가? 내 마음 아주 잠깐이지만 선생님을 좋아했던 그것 자체만으로도 좋은 것 아니겠는가? 그거면 됐다고 나는 어느새 나 자신을 다독이고 있었다.      

 

선생님은 자상하고 좋은 분이셨다. 어느 비 오는 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우산도 쓰지 못하고 가는 나를 불러 버스 정류장까지만이라도 같이 쓰고 가자고 나를 부르셨었다. 하지만 나는 한사코 괜찮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결국 선생님도 나를 포기하고 다른 아이와 함께 우산을 쓰고 빗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때 마음 한 켠에 후회가 이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못 이기는 척 하고 선생님 우산 안으로 들어설 걸 그랬나? 하지만 그때 그러지 않기를 역시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날 선생님은 퇴근 시간도 아니었는데 비교적 일찍 교문을 나섰었다. 그런 걸 보면 결혼할 여자와 함께 살 집을 보러 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남의 남자가 될 걸 욕심 내 뭐 하겠는가?

난 그때 이후로 다시는 그 어떠한 선생님도 좋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어느덧 긴 겨울 방학도 끝나고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1학년의 마지막 날이 왔다. 그 동안 거의 잊고 지내다시피 한 교지가 드디어 나왔다. 상급 학교엘 진학하니 이런 것도 받아보고 어지간히 감격스럽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 글이 실렸을까? 기대 반, 설렘 반으로 교지를 펼쳐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내 글은 단 한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난 그제서야 그 가을 날 교지에 대한 국어 선생님의 세부 공지사항이 생각났다. 즉 선생님은 원고를 낸다고 해서 다 실리는 것이 아니라고 했었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께 원고를 드리는 순간 그 말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설마 아버지도 감동해 눈물을 흘리셨다는 필력의 소유자의 글이 교지에 실리지 않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좀 씁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않았다. 나는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몰라도 포기가 빠르고 금방 잘 잊어버린다. 단 학교 교지의 수준이 생각 보다 높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때 교무실로 들어가시던 국어 선생님의 뒤를 밟아 일부러 직접 전달한 나의 모습이 새삼 창피해 죽을 건만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반장한테 낼 걸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국어 선생님 손에 직접 쥐어드릴 생각을 했던 걸까?

 

그나마 다행인 건 선생님은 이제 결혼을 했고, 2학년 땐 다른 선생님이 국어를 가르칠 것이니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교지 역시 다시는 건 응모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1] 나는 그 무렵 안경에 관심이 많았는데 지적이면서도 선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난 아직도 안경을 쓰지 못하고 있고, 그런 생각도 크면서 점차 바뀌었다.  

[2] 윌리엄 예이츠 [William Butler Yeats] 아일랜드 시인 겸 극작가. 환상적이며 시적인《캐서린 백작부인》을 비롯하여 몇 편의 뛰어난 극작품을 발표했으며 1923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독자적 신화로써 자연(자아)의 세계와 자연 부정(예술)의 세계의 상극을 극복하려 노력했다.(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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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기침 2014-06-26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예이츠의 시를 보게 되네요. 좋은 밤요. 꾸벅^^

stella.K 2014-06-26 11:56   좋아요 0 | URL
푸른기침님, 반갑습니다.
예이츠를 아시는군요. 그러니까 더 반갑네요.
우리나라에선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아 모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저 시를 중학교 때 외우고 잊고 있었는데
최근 이 글을 쓰려고 하다보니 얼추 생각이 나더라구요.
신기했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