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 했던 2015년이 지나고 2016년 새해가 밝았다.

어제 떳던 해가 오늘도 변함없이 떠올랐을 뿐인데 오늘 뜬 해는 어제 뜬 해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무래도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 새롭게 시작해 보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반영한 것일까?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있는 걸까? 우린 좋든 싫든 새해를 맞이해야 하고, 나이 한 살 먹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 들여야 할 뿐이다. 마치 쓰레기 봉투값이나 버스 요금 오른다고 호들갑 떨다가도 결국 얼마 안 있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담담하다는 건 담담하지 않기 때문에 애써 담담한 척 하다 이내 담담해져 버리는 그런 역설적 원리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작년엔 정말 힘든 한 해였다. 하는 것마다 안 됐고, 별 성과없이 주져 앉았다. 더구나 검기 몸살 외엔 건강하나 만큼은 자신했던 엄마가 생각지도 않은 암선고를 받고 어떻게 해야좋을지 우왕좌왕 했던 한 해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비교적 순조롭게 회복 중에 계시긴 하지만 그토록이나 아파했던 엄마를 지켜 본다는 건 이 엄마가 내 엄마 맞나 싶게 낮설게도 느껴졌던 한 해이기도 하다.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렇게 아픈 엄마를 두고 암판정을 받기 전까지 아무 것도 아닐 거야. 괜찮겠지를 되내이며 난 공연도 보러 다니고, 사람도 만나 히히덕거리기도 했으며, 변함없이 책을 읽고 살았다는 게. 무엇보다 당신이 괜찮다고만 하시고, 병원에 안 가시려고 이리 빼고, 저리 빼시니 그 고집을 누가 꺾을 수 있을까? 원래부터 병원과 친하지 않은 사람은 결국 스스로가 가겠다고 하기 전엔 선뜻 나서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아픈 엄마를 방치한  잘못도 크다. 

 

서론이 길었다. 그렇게 멋모르고 살았기에 (비록 하루가 갔지만)올해도 '내 맘대로 좋은 올해의 책'을 뽑을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무작위로 올려 본다.

 

사실 난 듣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라디오를 듣는다면 <세상의 모든 음악>이 유일하다. 물론 다른 프로도 드물게는 듣긴 하지만 결국 끝까지 듣게 되는 건 이 음악 프로다. 그나마 더러는 안 들을 때도 있고. 그러니 팻캐스트를 들을 리 만무하다.

 

그래도 이동진의 <빨간 책방>은 워낙에 유명해서 이렇게 듣기를 싫어하는 나도 간혹 한 두 번은 호기심에 듣기는 했다. 음악 프로는 음악을 들으면서 무엇을 괴외로 할 수도 있지만(난 보통 그 시간에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이 팟캐스트는 온전히 이것에만 집중해야 하는 것이라 듣고 있으면 재밌긴 한데 잘 안 듣게 된다. 

 

그러던 중 이 책이 나왔다고 해서 반가웠다. 이동진도 이동진이지만 김중혁을 좀 좋아하는 편이라 이 둘의 결코 밀리지 않는 말빨과 그 조화로움은 거의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싶다. 이동진은 이동진대로, 김중혁은 김중혁대로 자기 맡은 전문 분야(영화와 문학)에서 어쩌면 그리도 지식이 풍부한지. 

 

하지만 팟캐스트에서 다룬 책들의 편수에 비하면 책은 몇편 되지 않아 아무래도 2, 3권 계속 나와줘야 할 것 같은데 아직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

 

저자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읽을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이 책으로 재대로 저격당했다고나 할까?

 

글쓰기에 관한 책은 많다. 하지만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무슨 글쓰기 강사가 매뉴얼처럼 써낸 책도 많은데 나는 그런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굉장한 깊이를 가지고 있고, 글쓰기 책도 이토록 철학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책이라고나 할까? 깊이가 있으면서도 문체는 대체로 평이해 이렇게 쓰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존경스러운 마음마져 들기도 한다. 또한 글을 잘 쓰기를 원하는데 그럴 수 없을 것만 같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격려와 위로를 받는 것 같을 것이다.

         

나는 인터뷰집을 좋아하지만 특히 그 대상이 작가면 내 취향에 딱이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읽은다는 건 행운이었다. 오래 전부터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고, 특별히 소설을 쓰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 정작 소설을 못 쓰고 소설가들에 대해서 써 놓은 책을 좋아하니, 난 아무래도 소설은 못 쓰지 싶다.

 

특히 난 그들이 어떻게 글을 쓰고 문학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가 궁금한데, 고백컨대 내가 이러는 건 그들에 대한 순수한 관심 보단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대리만족 같은 건 아닌가 싶다.  

 

혹시라도 이쪽 방면에 관심 있는 사람이 있다면 몇년 전에 읽은 원재훈의 <나는 오직 글쓰고 책 읽는 동안 행복했다>를 함께 추천한다. 이 책 정말 재밌게 읽었다. 어떤 작가는 서로 겹치기도 하는데 시차가 있으니 생각이 어떻게 변했을지 또는 변함이 없다면 어느 부분에서 변함없는 생각을 가졌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이 책은 내용이 의미하는 바는 나에게 그다지 크게 다가 온 것은 아니다. 그냥 한편의 시 같은 희곡을 읽는 기분이었달까? 작가 김경주가 추구하는 것도 시극이었던 만큼 그냥 작가가 이제까지 써 온 작품 중 하나를 접해 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시면 시고, 희곡이면 희곡이지 시극은 또 뭐란 말인가? 말에 의하면 T.S 엘리엇으로부터 이 운동은 펼쳐나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성인들 지성을 깨우치는 건 좋은데 그렇게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일반인들 우왕좌왕 헷갈리게 만드는 게 그리 좋은지 묻고도 싶어졌다.

 

이렇게 이 책을 읽으며 투덜거리고 있을 무렵 한 가지 사실이 나의 뇌리를 꽝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그것은 다름아닌 작가의 활동이었다. 그는 연극 연출가이기도 하는가 본데 무대를 극장에만 한정 짓지 않고 카페든, 클럽이든 하다못해 창고에서도 공연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사실 나는 3년 전인 2013년에 내가 쓴 뮤지컬 작품을 처음으로 대학로에 올리고 같은 해 말 재공연 말이 나왔다 제작자와 대판 싸우고 결별했다. 솔직히 초연도 겉으로만 성공적이었지 그속을 들여다보면 원칙은 없고 무질서 그 자체였다. 그래도 가까스로 참고 재공연이 성사가 되길 바랐는데 제작자의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빡이 돌았던 것이다. 결과야 뻔한 거고. 역시 돈줄을 쥔쪽이 무섭긴 무섭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정말 이대로 무너져야 하는 건가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다가 이 방법도 있었구나 했던 것. 그래서 대본을 다시 고쳐 쓰고 무조건 돈키호테처럼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앞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작년은 하는 것마다 안 됐고, 그후로 엄마의 병이 점점 더 심해져 급기야 수술까지 받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돌이켜 보면 어차피 안 되는 거였구나 싶다.

 

그러니까 내 말은 책을 읽다보면 어떤 책은 어떤 의미로든 행동하도록 만드는 책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어떤 목표에 도달하지는 못했고 잠시긴 했지만 나를 이토록 돈키호테가 되도록 만드는 책이 있다는 것에서 이 책은 나름 나에겐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고 저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난 이석원의 <언제들어도 좋은 말>이 더 실제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은 글을(특별히 에세이를) 이렇게도 쓸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준 책이었고, 나도 왠지 이런 식으로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뭐 누구는 사소설이 아니냐고도 하고, 누구는 불륜에 관한 이야기를 쓴 거 아니냐고 하는데, 나는 그런 형식에 관한 평가는 차치하고 무엇보다 작가의 솔직함에 방점을 두고 싶다. 작가됨의 덕목 중 하나가 솔직함 또는 정직하게 쓸 것이기도 한데 그런 점에서 작가 이석원은 충분한 자질이 있다고 본다. 

 

나는 또 이 책을 읽고 얼마 있지 않아 <보통의 존재>를 샀고 바로 어제 완독을 했다.  글쎄.. 아무리 좋아하게 된 작가일지라도 이렇게 짧은 기간내에 또 다른 책을 사서 읽기란 나에겐 좀체로 없는 일인데 그냥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받고 보니 노란색 양장이 꼭 무슨 일기장 같기도 하고 예뻤다. 나 개인적으론 형식적인 면에선 앞의 책이 더 매력적이긴 하지만,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 이 책을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혼 경력, 정신병 이력, 가족과의 관계 등을 적나라다 싶을 정도로 솔직히 쓰고 있는데, 읽고 있으면 자신을 떠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왜 그 사람 앞에서는 용기가 없고 해명할 자신이 없어 뒤돌아서서 혼자 자조하며 중얼대는 그런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의 말이 일견 일리가 있고, 수긍이 가는 그 생각의 독특함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읽기에 따라선 다소 지루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앞의 책을 먼저 읽었다면 말이다.

 

특별히 그는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독서는 거의 하지 않다고 밝히고 있는데 책 읽기의 괴로움을 아는 사람은 담박에 질시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그러고도 인기 작가가 될 수 있는지 하면서 말이다. 

 

책을 많이 읽을 수 없다면, 생각을 많이하고 자기 글을 성실하게 고쳐나가는 것도 작가가 되는 한 방법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언젠가 블로그에 올라 온 그의 글을 읽으니 그는 <보통의 존재>가 나오고도 책을 끊임없이 고쳐 쇄를 거듭할 때마다 글이 조금씩 다르다고 하다. 지금까지 42쇄가 나왔으니까 42번을 고쳐 썼을지도 모른다. 굉장한 인내고 성실함 아닌가? 그렇더라도 새롭게 사지는 말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어딘가 숨어서 <언제 들어도...>를 고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석원의 발견을 감히 '발견 이 작가!' 라고 하리만큼 작품 보다 오히려 작가의 발견이놀랍고 반갑다.

 

그렇게 말하자면 '발견 이 작가!'에 또 하나의 이름을 올리자면 김경욱이다. 

 

솔직히 이 책은 몇년 전 이곳 아는 알라디너로부터 생일을 빙자하여 받은 책이다. 그런 것을 황송하게도 받은 즉시 읽지 못하고 거의 방치하다시피 하다 최근에 읽게 되었는데, 정말 언제까지 읽기를 미루었다면 작가에게나 이 책을 선물한 그 알라디너에게나 실수할 뻔했다. 물론 이미 했지만...ㅠ 

 

이 책을 읽었을 때 내가 정말 요즘 작가들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걸 새삼 알았고, 김경욱이란 작가가 있다는 게 우리나라 문학계가 아주 어둡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 저자가 위트있게 쓴 것도 한몫하지만 읽다보면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과가사를 알 수도 있어 유익하다.

 

특히 작가가 오타쿠적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작가와 내가 같은 세대를 살고 있어 어느 부분 그때는 정말 그랬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도 만들지만, 확실히 작가는 나 보다 두 세 걸음은 더 앞서 대중문화를 향유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오래도록 문화계에 종사한 사람의 자서전으로도 읽히는데, 마침 내가 이곳 알라딘에 내가 읽어 온 책들을 정리하는 글을 올리곤 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거의 손을 놓고 있긴 하지만. 글을 쓴다는 건 성실함이 8할 같다.

 

인생을 100으로 보고 반환점을 돌 때쯤 사람은 자서전을 쓰고 싶어지는가 보다. 뭔가의 정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모르긴 해도 저자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번엔 문학 잡지도 끼워 본다.

일단 환상적이리만치 착한 가격에 놀랐고 또 놀라우리만치 내용이 좋아서 이래도 되는 건가 의아할 정도였다. 천명관의 인터뷰도 좋았고. 

 

그렇다고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창간호라는 점에서도 이 책을 뽑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아, 근데 세번째 호는 사 놓고 여태 읽지 못했다. 난 왠지 공지영이 그다지 끌리지 않는데 아무래도 그래선지 아직도 읽지 못했다. 

정기구독을 할까 하다가 그만둔다. 이제부턴 읽고 싶을 때만 사서 읽어 볼 참이다. 

 

대충 이렇게 정리해 본다. 그런데 재작년에 이런 글을 쓰면서 나는 슬쩍 베스트와 함께 워스트를 한 권 올린 적이 있다. 이번에도 좀 짖궃게 한 권 정도 올려보고 싶은데 그건 바로,

이 책이다. 정말 위험하고, 거지 같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옹호하고 점잖게 말해 범신론적인 시각이 다분해 보이는데 읽다가 거의 내팽개쳐 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내 말을 확인해 보기 위해 이 책을 일부러 사서 읽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뭐 나름 이 책에서 은혜 받은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건 내가 보지 못한 뭔가를 봤나 보다. 하지만 이 책은 나로선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올핸 또 어떤 책을 읽게 될까? 

언제나 그랬지만 조금씩 건드려놓기만 하고 아직 완독을 하지 못한 책, 읽으려고 고히 모셔둔 책들을 좀 더 많이 읽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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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1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2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야클 2016-01-02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도 즐거운 책읽기와 함께 행복하시길 ^^

stella.K 2016-01-02 11:24   좋아요 0 | URL
어머나! 정초에 야클님께서 제 서재를 친히 방문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새해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은데요?ㅋ
야클님도 올해 좋은 일 많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책읽는나무 2016-01-02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6년은 분명 작년보다 더 나은 해가 될 것입니다^^

stella.K 2016-01-02 11:33   좋아요 0 | URL
아, 책나무님 고맙습니다.
그래야지요. 책나무님도 올해 좋은 일 많이 있으시길
저도 기원드립니다.^^

페크pek0501 2016-01-02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행복한 새해가 되시길...

stella.K 2016-01-03 14:10   좋아요 0 | URL
네. 언니도 좋은 책들과 함께 복된 한 해 되시길
저도 기도들여요. 고맙습니다.^^
 

이왕 80년대를 조금 더 얘기한다면 1984년을 말하고 싶다.

그때는 80년대 초반을 지나 중반으로 넘어가는 시기로 국가적으로 봤을 때 LA올림픽이 있었던 해였고, 4년 뒤 88 서울 올림픽이 있을 거란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그 대회에서 처음으로 세계 10위 안에 드는 쾌거를 이루고 올림픽기를 넘겨받기도 했으니 뜻 깊은 한 해이긴 하였을 것이다.

출판계에선 때에 맞춰 조지 오웰의 <1984>란 책을 내고 그를 띄우는 작업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1984년에 TV를 통해 방영된 두 드라마를 얘기하고 싶다. 하나는 <야망의 계절>이란 미국 드라마고, 하나는 <보통 사람들>이란 한국 드라마다. 

                       

 

그렇다고 이 두 드라마의 시작 년도가 1984년란 말은 아니다. <야망의 계절> 같은 경우 1976년 처음 우리나라에 방영됐다고 한다(예전에 TBC란 방송이 있었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방영됐고, 이후 TBC80년에 KBS와 통합되었다).

그런데 나는 그때는 방영된 줄도 몰랐고 알았어도 그땐 너무 어려 볼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또한 우리 드라마 <보통 사람들> 같은 경우는 1982년에 시작해서 종영했던 해가 1984년이다. 일일 드라마 치고 200회를 훨씬 넘기고 종영했으니 장수 드라마고 그래서 기네스에 올랐다는 말도 얼핏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야망의 계절> 같은 경우 이 작품은 어윈 쇼라는 작가가 쓴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 한 것으로, 원제는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라고 한다. 나는 영화가 너무 재미있어 나중에 책으로 사서 읽기도 했는데 막상 책은 영화만큼 재미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전화번호부만한 두께의 책을 거의 한 달쯤 걸려 완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처음에 나왔을 때는 단행본으로 나왔는데 세월을 거치는 동안 세 권으로 나왔고 그나마 지금은 절판된 상태다). 재미없으면 읽다가 포기했을 텐데 그래도 완독을 했던 것을 보면 포기할 만큼 재미없었던 건 또 아니었다.

이 작품은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조르다슈 가문의 이야기로 이민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 큰 호응을 얻었다.

무엇보다 나는 보는 내내 이 훌륭한 드라마를 있게 해 준 어윈 쇼란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재미있게 이야기를 엮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 아는가? 이 드라마가 우리나라 당대 작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는 것을. 특히 드라마 좀 본다는 사람들이라면 그 이름 석자를 모를 리 없는 김수현 작가가 그 영화를 모티프로 <사랑과 야망>이나 <사랑과 진실> 같은 연속 히트작을 내놨다.

이 두 드라마가 얼마나 유명했는지 이것이 방송되는 시간엔 수돗물의 사용이 급격히 줄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사실 <야망의 계절>을 모티프로 한 이야기는 김수현뿐만 아니라 나라도 능력만 있다면 이렇게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을 정도다.

특히 이 작품은 조르다쉬 가문의 두 형제가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는데 그것은 카인과 아벨의 신화의 변형으로도 보여 진다. 특히 난 형 루디로 나온 피터 스트라우스를 이 영화를 통해 처음 보았는데 누구라도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가 성공한 후 수트를 입고 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얼마나 멋있던지 남자는 역시 수트빨이란 말은 이때 이 배우한테서부터 나온 말은 아닐까?

<보통 사람들>은 말했다시피 나연숙이란 작가가 쓴 일일 연속극인데, 사실 이 드라마의 제목은 로버트 레드포드가 감독한 동명의 영화를 제목만 그대로 사용했다. 이처럼 나연숙 작가는 가끔 본인이 직접 지은 제목이 아닌 기존에 있는 제목을 그대로 차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그게 약간은 특이하다고 생각했다(물론 기억하기엔 좋긴 하지만 자신의 작품을 기억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도 보여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특히 제목을 <보통 사람들>이라고 해서 정말 보통 사람들이 나오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하지만 또 새삼 보통 사람의 기준은 뭘까를 생각해 본다. 보통은 중산층을 그렇게 부르지 않을까? 아니면 적어도 3대가 오순도순 살아가는 걸 보통 사람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어쨌거나 이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리 보통스럽지는 않다. 가장 역을 맡았던 배우 이순재는 당시 언론 쪽에 종사 했던가 그랬던 것 같고, 그의 동생은 송재호가 맡았는데 나름 성공한 소설가이고, 그의 아내는 연극배우며, 이순재의 아들은 고시 준비생 등 아무튼 그의 몇 대손 할아버지는 벼슬을 크게 했을 것만 같은 뼈대 있는 가문처럼 보인다. 그러니 뭘 보고 보통 사람들이라는 건지 제목이 오히려 생소할 정도였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이 드라마는 지극히 보통스럽기도 하다. 그렇게 사회적 지위가 보통스럽지 않을 뿐이지 사는 모양새는 보통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는 요즘 말하는 막장 드라마는 아니었다. 오히려 바른 생활 드라마라 하리만큼 등장인물이 극단적인 성격인 사람이 없다. 그러고도 시청률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일일극으로 2년을 하고 막을 내렸다면 가히 대단하다는 말밖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순재 씨의 부인으로 나온 김민자 씨다.

김민자 씨는 정말 누가 봐도 현모양처의 이미지다. 그런 그녀가 드라마에서 늦깎이 작가지망생으로 나온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런 그녀를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현모양처는 뭐 작가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는가? 그리고 어찌 보면 현모양처가 직업을 갖는다면 작가만큼 어울리는 직업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의 시동생이 작가가 아니던가? 평소 좋은 형수와 시동생 사이였으니 시너지 효과는 백 배였을 것이다.

기억이 나는 건, 그녀가 등단을 목표로 시장을 봐 오는 길에 헌책방에서 책 몇 권을 싸게 샀다고 자랑하는 장면이었다. 그게 또 어쩌면 그리도 알뜰해 보이던지.

그런데 이 장면의 잔상이 세월이 가면 갈수록 오래도록 남는 건 왜일까? 비록 드라마라고 하지만 왠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지금은 헌책도 어떤 책은 새 책 못지않게 깨끗하다. 그래서 누구는 헌책이라 부르지 말고 중고 책이라 부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시대의 헌책은 말 그대로 헌책이다. 물론 우리에게 헌책은 그 나름의 향수를 선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모양처에 살림만 했을 그녀 자신에게 책은 자신만을 위한 호사였을 것이다. 장을 봐 가지고 온 장바구니에 어디 자신만을 위한 물건이 하나라도 있었을까? 온통 가족을 위한 식재료들이 한 바구니었을 것이다. 때로는 자신이 자신에게 상을 줄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책이 유일하게 그녀 자신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상이요 호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헌책이었다니. 새 책이어도 좋지 않았을까? 그 헌책을 사 가지고 돌아 온 이 현모양처를 우리는 그저 좋아만 해도 될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게다가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녀는 원천적으로 작가가 될 수 없는 환경에 처해있다.

물론 그녀가 글을 쓰기 위해서 가족들에게 이해와 협조를 구하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왕 가족이 그녀의 꿈을 지지했다면 오히려 그녀를 몇 달 시골이나 사찰 같은 곳으로 보내 글만 쓰라고 했어야 했던 건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적어도 가사도우미 정도는 쓸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냉철하게 말해 작가란 그렇게 할 일 다하고 남는 시간에 글을 쓸 수 있는 꿈의 직업이 아니다.

또한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의 구조를 보면 대가족에 맏며느리로 본채도 부족해 별채까지 두고 있다(그런 것으로 봐서 그 집은 누가 봐도 꼭 옛날 아흔 아홉 칸 양반 집을 연상케 한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선 꽤 낭만 있어 보이긴 한다. 하지만 평생 넓은 집에서 다리를 종종거리며 살아왔던 엄마를 보고 자라서 그럴까 난 그 집의 구조가 김민자 씨에 연민을 갖도록 만들었다. 얼마나 힘들까? 자기 방은 각자가 알아서 청소한다고 해도 그 나머지 공간은 그녀의 차지였을 것이다. 더구나 가족이 매일 먹는 음식과 특히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만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시동생은 뭐 때문인지 자기 집 놔두고 별채의 서재를 점령하고 나오지 않는다. 시동생이 사람 좋은 사람으로 나와서 그렇지 형수의 입장에서 보통 신경 쓰이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시동생은 말로만 형수를 위하는 척하지 얹혀사는 주제에 서재는 독차지 하고 여간 해서 서재를 형수에게 양보하는 법이 없다.

아직 등단하지 않은 작가지망생이라면 선배 작가고 같은 아군으로 도움을 주는 입장이지 그녀가 정식 작가가 되면 언제 라이벌이 될지 모른다.

이렇게 김민자 씨는 극중에서 낮에는 집안 주변을 돌보고 짬짬이 책을 읽으며 밤에는 글을 쓰는 그야말로 주경야독의 삶을 사는데 잠자는 것도 아까워 시동생이 없는 밤 시간에 서재에서 쪽잠을 자며 글을 써 신춘문예에 등단에 성공한다는 스토리는 재투성이 아가씨의 또 다른 버전을 보는 것도 같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제대로 사는 인간의 정의를 정말 중요한 것에 힘을 몰아주고 나머지는 대충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난 그 말에 동의한다.

그에 비해 그녀의 손아랫동서는 연극배우고 살림은 못하지만 당차고 소위 말하는 현대 여성을 대표한다. 물론 드라마는 당연 이를 통해 김민자를 더 조명한다. 왜 그랬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의 덕목 특별히 맏며느리에 대한 덕목이 가족 화목을 위해 더 많이 노력하고 거기에 작가의 꿈을 이루는 슈퍼우먼이어야 하는 환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땐 그 드라마가 그렇게 했어도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요즘의 잣대로 보면 드라마에서의 김민자는 자신의 일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포기하고 투쟁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그 때 그 드라마에서 맡은 김민자 씨의 캐릭터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여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래 놓고 보통 사람들이라니! 그저 뭔가 모를 연민이 느껴질 뿐이다.

유명한 페미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란 책에서 여자가 작가로 성공하기 위해선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작가에 대한 환상이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동화의 끝이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것으로 끝나듯 한 번 작가는 영원한 작가인 양 하는데 물론 작가의 명예를 생각하면 그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작가하면 일부 성공한 전업 작가를 생각하는데 첫 작품을 내고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작품을 못 내고 잊혀지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듯 드라마는 김민자 씨가 신춘문예에 당선 됐다는 기쁨에 겨워하는 장면만을 담았을 뿐 그 이후에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다루지 않고 있다. 모르긴 해도 둘 중 하나지 않았을까? 두 번째 작품을 써 내기 위해 그야말로 고군분투 했거나 가정의 화목을 위해 다시 예전의 현모양처로 돌아갔거나.

어떤 경우든 전적으로 그녀의 선택이고 두 번째의 경우는 잘 모르겠는데 그녀가 만일 첫 번째의 선택을 했다면 이번엔 가족이 전적으로 그녀를 이해하고, 양보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무렵 나도 신춘문예 응모하겠다고 뭔가를 끄적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것이 <야망의 계절><보통 사람들>의 영향 때문임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물론 쉽지 않아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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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12-11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반가워 죽을 뻔했어요. 저 남자, 루디로 나온 피터 스트라우스가 그 시대에 저의
남자 이상형이었어요. 긴 팔의 흰 와이셔츠를 걷어 입길 좋아했는데 멋졌죠. 잊지 않고 봤던
드라마였죠.
<보통 사람들>도 생각나요. 말이 안 된다고 봤죠. 맏며느리가 그저 한 번에 소설을 썼더니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것. 천재인 모양이에요. 게다가 식모로 나오는 금보라는 대학에 붙더니 대학생이 되고 그 집 손자와 결혼해 살고... 한마디로 <특이한 사람들>이었죠. 작가가 꿈꾼 이상적인 가정을 보여 주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아, 이런 걸 기억해 내고 쓰시다니... 덕분에 추억의 드라마, 잘 감상했어요.

stella.K 2015-12-11 15:24   좋아요 0 | URL
ㅎㅎ 언니 와락~!
이 글 올려놓고 무플이어서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나 보다고
손들고 있으려고 했는데 이런 댓글을 써 주시니니...! ㅠㅠㅠ

언니도 기억하시는군요. 정말 지금 생각하면 보통 사람들 말도 안 되는데
그땐 왜 그렇게 꼬박꼬박 봤는지 모르겠어요.

피터 스트라우스는 그 영화에 나오고 어디 안 나왔나 봐요.
정말 좋아 했는데... 지금 보면 많이 늙어 있겠죠?ㅠ

2015-12-11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1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세미콜론이 주관하는 <배트맨 데이 2015 기념 특별 연속 강연> 2강에 다녀왔다.

솔직히 배트맨은 어리고 젊었을 때나 좋아하는 거지 이 나이 먹고도 좋아하기는 좀 어려운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더구나 허리우드 영화가 시큰둥한 나로선 이것은 더더욱 새삼스럽다. 제사 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다고 어제 그곳에 간 이유는 배트맨 보다 강연자로 나선 김봉석 작가가 궁금해서다. 

지난 여름 그의 책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를 인상 깊게 본지라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마음만 먹으면 좀 더 일찍 그를 보러 어디든 쫓아 다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그는 나의 사정거리에서 너무 먼곳에 있었고,  어제는 적재적소의 날이라고 생각했다. 모처럼 한때 배트맨을 좋아했던 추억도 떠올릴만 했고.

그런데 확실히 김봉석 작가는 이 분야에선 타의추종을 불허할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배트맨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허리우드 영웅 신화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되고 하드보일드 문학도 알아야 한다. 그것에 거침이 없다. 

그는 딱 보기엔 다소 뭔가 어눌하고 허술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과연 전문가 다웠다. 특히 그의 나이가 내 또래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씨네 21 기자였던 경력에 지금도 같은 동종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줄 알고 있다. 그래서 문화 전반에 관한 지식이 해박하다. 그가 그렇게 해박한 지식을 갖게된 것은 지식을 쌓아서 무슨 입신양명을 꽤하기 위함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책을 보면 사춘기 무렵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여러 가지 부조리와 불온한(?) 생각들 때문에 과도하리만큼 책과 영화에 탐닉하면서 그것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그는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런 그와 나를 비교해선 안 되겠지만 반성은 된다. 그 사람은 여전히 문화라 일컫는 모든 분야에 관심이 많은데 나는 가면 갈수록 시야가 좁아지고 있다.

배트맨과 수퍼맨은 알겠는데 코믹 마블이니 어벤져스는 도무지 알지도 못하며 관심이 없다. 

배트맨도 나는 어떻게 알고 있던가? 그냥 멋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는 팀 버튼이 만들고 마이클 키튼과 미셀 파이퍼가 나왔던 <배트맨 2>를 가장 좋아하는데, 나는 그저 영화 전반의 음울한 분위기와 마이클 키튼의 남성미, 반미치광이처럼 뇌까리는 듯한 악령든 미셀 파이퍼의 연기가 좋았다.

하지만 어제 그의 강연을 들으면서 역시 <배트맨>에 대해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제 김봉석은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슈퍼맨은 좋은 일을 하는, 즉 보이스카웃과 동의어지만, 배트맨은 훨씬 더 복잡하다고 했다. 그는 사적인 복수를 하지 않는다. 즉 살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슈퍼파워면서 탐정이고, 의심이 많다는 것. 나는 배트맨이 영웅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그것이 단순히 악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즉 남을 헤코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영웅이 되겠는가? 그가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 즉 어렸을 때 부모가 악당인지 불의의 사고로 죽지 않는가? 난 그게 나름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 하다고 생각했다. 고독한 영웅이 될만한 것이다.

또한 배트맨의 출연 배경은 50년대와 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시대가 미국이 겉으로는 태평성대를 이루지만 안으로는 모든 모순이 시작되면서 60년 대 터진 싯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시대에 배트맨이 나왔다. 확실히 배트맨을 다시 볼 필요가 있어 보이는 대목이다.

슈퍼히어로는 가면을 쓴다. 그것은 20세기 현대인들이 원하는 것. 그 시대 사육제 문화가 있었던 것도 가면을 통해 일탈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라는 것. 바로 그 점을 놓치지 않고 배트맨 시리즈는 그토록이나 맨 얼굴을 드러내놓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나 보다. 하지만 어느 영화에선 정말 사육제 장면이 나오면서 모든 사람은 가면을 쓰는데 배트맨과 상대 배역은 유일하게 그곳에선 가면을 쓰지 않고 나오고 있다. 그게 배트맨 2였을까? 기억이 없다. 어제 김봉석씨가 뭐라고 얘기했는데 워낙에 조두라 기억할 리 없고.

 그는 배트맨 이후 우리의 수퍼히어로는 그 모습을 여러 모양으로 달리하다가 비로소 <와치맨>에서 달라졌다고 한다. 그것은 동시에 만화가 달라졌고, <마우스>에서 만화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한다. 또한 미국 같은 나라는 만화뿐 아니라 5, 6년 전부터 게임도 예술로 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오락으로 보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또한 아이언맨이 없으면 마블도 없다고 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대략적으로 집어주니 내가 영화를 얼마나 띄엄띄엄 보고 있었는지 알 것도 같다.

어느새 우리의 배트맨이 그 탄생 역사가 75년이 넘었다고 한다. 기히 엄청나다란 생각이 든다. 지금도 배트맨 영화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허리우드를 욕하고 냉담하다가도 찍소리할 수 없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계속 만들어지고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 우리나라에 이만한 캐릭터가 과연 있을까? 어린이들의 대통령이라는 뽀로로가 과연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워낙 귀치니스트라 한동안 밤외출을 삼가했던 내가 신사역을 너무 우습게 봤는가 보다 빤히 알만한 길도 어둠이 내리고 나니 어디가 어딘지 몰라 헤멨다. 낮선 곳을 헤메는 거야 의당 있을 수 있다고 해도 거기서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을 잡는데 헤멜 건 또 뭐란 말인가? 두더지처럼 신사역 안을 헤멨고 결국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다리는 나무토막이 되어 있었다. 

오는 길에 배트맨을 알려면 그의 상대역인 조커를 알아야하지 않을까? 배트면 2에서 나왔던 대니드 비토도 좋긴 하지만 히스레저도 강렬하긴 하다. 배트맨이야 워낙 영웅이어야 하니까 멋있는 거야 당연한 거고 배트맨에 나왔던 조커들은 나름 인상적이면서도 철학적이기도 했다고 본다. 언제고 날잡아 배트맨을 다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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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0-31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 슈퍼히어로가 나오는 만화를 좋아했는데 유독 <배트맨>은 잘 보지 않았어요. TV에서 몇 차례 방영한 걸 본 적은 있는데 재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stella.K 2015-11-01 13:20   좋아요 0 | URL
그런가? 난 배트맨은 좋아했던 것 같아.
어쨌든 악당을 물리치고 힘센 영웅이잖아.
아, 그러기로는 슈퍼맨이 한 수 위던가...?
암튼 그 음울한 분위기가 매력적이지.^^

yamoo 2015-11-08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봉석 작가를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 대 초반에 알았습니다. 그가 공저로 낸 애니메이션 관련 저작을 통해서였지요. 근데, 그가 씨네21 기자를 했었군요!

배트맨...만화 원작인데, 영화는 꽤 심도 있습니다. 배트맨을 소재로한 영화 분석서도 많이 있습니다.매트릭스만큼 우려먹는 영화에요..ㅋㅋ

뭐, 영화는 취향따라 가는 거라...내갠 별루 일 수 있지요. 전 배트맨 보다는 스타워즈 쪽 입니다..ㅎㅎ 스타워즈와 터미네이터~ㅎ

stella.K 2015-11-01 13:27   좋아요 0 | URL
아, 꽤 오래 전에 알려진 사람이로군요.
근데 왜 저는 이제사 알았을까요? 글을 보면 좀 오타구 같다는
느낌이 있고, 얼굴 이미지는 어찌보면 마태우스님을 연상도
하더군요. 꼭 같다는 건 아니고 그냥 꽈가...ㅋㅋ

스타워즈도 좋죠. 근데 전 스타트랙도 좋았던 것 같아요.
특히 예전에 tv 시리즈 방영하고, AFKN에서도 하고 그럴 때...ㅋㅋ
 

 

 악스트, 이번호는...  

 

악스트의 장점이라면 가격이 파격적으로 싸다는 것과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이나 질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밥 한끼 먹으려면 보통 7,8천원 줘야하는데 그런 와중에도 천원, 이천원하는 밥집이 있다고 한다. 그럼 눈물나게 고맙고 정감이 가는데 이를테면 악스트도 그런 것 같다.

 

보통 문학잡지가 권당 만원이 넘는데 이렇게 정이 가는 가격의 잡지가 있다니. 내가 만일 훗날 작가로 등단한다면 작가가 되는데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받은 책 목록을 묻는다면 거기에 악스트를 포함시키겠다.ㅋ 

 

물론 두께에선 다소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잡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사람 별로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면 슬림하다고 할 수 있다(하긴 난 이 슬림한 잡지도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 않지만). 

 

그런데 여전히 단점은 글씨가 너무 작다는 것. 그나마 창간호는 전체적으로 깨알 같은 것에 비해 이번호는 어떤 지면은 크기가 컸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냥 큰게 아니라 어떤 지면에 상대적으로 크다는 것뿐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작다는 느낌이다.  눈 나쁜 사람도 악스트를 읽을 권리가 있는데 그 점은 악스트가 시급히 해결해야할 점이 아닌가 한다.

 

아직 읽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요즘 핫한 작가 중 한 사람인 장강명의 기사였다. 그도 전업작간데 전업작가가 그렇듯 그 역시 시간을 허투로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꼭 만날 사람이 아니면 한가하게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물론 전업으로 글을 쓰느니만큼 그가 선택한 삶이니 각오한 일이겠지만 새삼 대한민국에서 작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또 한 번 스산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요즘엔 부지런히 쓴 덕에 예전만큼 각종 문학상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도 하는데 그 말에서 괜히 착한 흥부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건 배수아가 번역을 맡은 한 장 짜리 소설 두 편이다. 난 한 장짜리 소설은 쓸 엄두도 안 날 것 같은데 상당히 인상적으로 잘 썼다. 앞으로 계속 실릴 모양인가 본데 기대가 된다. 

 

그런데 역시 악스트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는 작가와 나눈 인터뷰가 아닐까 한다. 창간호에선 천명관이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는데 이번에는 박민규다.  독자인 나로선 나름 적절한 대상이란 생각이 들고, 벌써부터 다음 호 인터뷰 대상자는 누가될지 궁금하다(개인적으로 김경욱이 됐으면 좋겠다. 요즘 내가 이 작가에 꽂혀 있는 관계로 ).  

 

 

역시 민규 형님은...

 

천명관 때도 그렇게 느꼈지만 박민규 역시 후배 작가들은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과부가 과부의 심정을 안다고, 작가의 길이 그리 쉽지 않으니 선배로서 후배를 챙기는 마음이야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박민규의 별스러움이야 그의 작품 보다 더 잘 알려진 사실이고(어느 핸가 동인문학상 수상식 때 타이거 마스크 쓰고 찍은 사진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인터뷰 기사를 보니 나름 포복절도할 내용도 나온다. 그것은 언젠가 이곳 알라딘이 내 인생의 책을 선정해 달라고 했단다(이런 건 또 언제했나?). 그런데 그의 답이 걸작이다. 자신의 인생의 책이 <허슬러>란다. 허슬러가 무엇인가? 도색잡지 아니던가? 처음엔 웃었지만 역시 박민규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때 부연 설명에서, 어렸을 때 자신은 책만 펴면 잠부터 밀려오곤 했단다. 그런데 처음으로 허슬러를 통해 책을 골똘히, 끝까지 보는 습관을 기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책 덕분에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또 뭐,, 지금도 비스마르크를 읽고, 노자, 장자를 읽고... 그러고 나서도 갑자기 <허슬러>를 보면 우와, 엉덩이다! 하는...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나라는 인간의 모순을 늘 깨우쳐주기 때문에 내 인생의 책이라고 생각한다... (134p) 고. 뭐 끝까지 본거야 이해할 수는 있다고 쳐도 그게 뭐라고 골똘히 보기까지 했을까?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뭐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이상적인 조화를 추구했을까?

 

그런데 이런 별스러움은 박민규 한 사람으로 족했으면 한다. 혹시라도 작가 꿈나무 중 박민규 코스프레 하겠다고 할까 봐.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문학 대들보가 나온다면야 말릴 건 아니겠지만 그러다 삼천포로 빠진다면 그 안타까운 인생을 어찌할 것인가.

 

참고로 난 초등학교 5학년 여름 처음으로 말로만 듣던 도색잡지를 보았다.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갔던 오빠가 가방에 넣고 다니던 걸 엄마의 눈에 띄어 보게 되었는데, 놀랍고 야릇하기도 했지만 나 보다 2살 많았던 오빠가 갑자기 훌쩍 커 보인 느낌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노는 차원이 달라졌구나 싶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제 겨우 1학년이다. 1학년 짜리가 벌써 그런 거나 밝히고. 엄마로선 이놈의 자식이 이담에 커서 뭐가 되려고 할까 한심했을 것이다. 지금은 도색잡지가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보고 느낀 건 왜 도색잡자는 여인만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남자도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박민규, 그가 말하는 한국문학

 

올해 한국문학계를 뜨겁게 달군건 역시 표절이다. 그도 얼마 전 표절의 도마위에 올랐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터뷰 기회가 왔으니 한마디 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표절에 대체로 온건한 입장이란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의 양상을 보면 표절에 대해서는 작가들 보단 독자들이 더 공분했고 강경한 인상이다. 마치 뭐에 사기 당한 양. 하지만 독자도 표절에 대한 다양한 입장과 반응을 들어봐야 할 것 같다. 그것에 대해 박민규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문학에 대해서 '순수'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표절에 대한 규정 내지는 가이드라인조차 마련되 있지 않다고 한다. 도작, 위작, 모방, 인용, 차용, 도용...어느 하나도 세부 협의된 기준이나 범위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막연한 '표절'한 단어에 의지한 채 지금까지 왔다는 얘기지. 이는 곧 교육을 할 수 없었다는 얘기기도 하다. 나도 문창과를 다녔지만 그런 교육을 받아 본적이 없다. 더 놀라운 것은 지금도 여전히 이에 대한 교뉵이 없다는 사실이다. 글을 잘 쓰고, 등단을 하고 작가가 될 훈련만 받을 뿐 이에 따르는 위험 내지는 안전수칙에 대해서 어떤 준비도 대책도 없다. ...... 표절이란 명사엔 '남의 문장을 훔쳐 쓴 것' 외에는 다른 뜻이 없다. 예컨대 천 매가 넘는 소설에서 한 문장만 같아도 표절은 표절인 것이다. 나는 이것이 18세기에나 적용될 판단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저작물의 수가 현저하게 적고 '3434/3444/3543 詩歌가 문학의 기준일 때를 말하는 것이다. 한 문장이 전체 작품의 3분의 1을 차지하던 시대니까.(141~142p)

 

정말 어느 것을 가지고 표절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저작물이 워낙에 많은 세대에 살고 있으니 내가 누구의 것을 나도 모르게 표절했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 반대로 표절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고, 적용의 문제에 감정의 문제가 끼어들 수도 있고, 이젠 여기저기서 하도 표절, 표절하니 또 그런가 보다고 무뎌질 것도 같다. 하지만 의도성이 있느냐 없느냐 또는 표절을 그렇게 한 단어로만 하지 않고 여러 동의어로 적용할 수 있다면 표절은 그것을 한 사람의 양심의 문제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표절을 했느냐 안 했느냐를 가려내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이 표절 작가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바라 볼 것이냐도 중요하지 않을까? 얼마 전 작가 신경숙 씨가 미국에서 작가 활동을 재개하겠다고 했다. 우린 신경숙 씨가 표절의 도마위에 올랐을 때 이 사람 작가 인생 끝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문제가 수그러들자 그녀의 그런 보도를 접하게 됐다. 하긴, 그녀가 도덕적으로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작가 인생을 정리할만큼인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평생 그것으로 밥 먹고 살았을 텐데 그 일을 접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그렇다고 또 한쪽으로 생각하면 자성을 촉구하는 정도로는 부족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녀를 옹호하는 사람이야 그녀의 작가활동 재개를 환영하겠지만 너무 성급한 결정은 아닌가 하는 우려의 시각도 없지 않을 것이다. 작가도 어차피 매문가다. 글을 써서 팔아야 먹고 사는 존재. 상인에게 상도가 있듯 매문가에게도 매문의 도가 있지는 않을까? 만일 그게 있다면 표절에 대한 교육과 함께 이것도 교육을 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저작이 많은 세상에 살면 살수록. 

 

 

문학은 섹스 같은 것이라구?

 

앞서 박민규는 문학에 대해 순수의 감옥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했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표절의 문제와 문학계의 카르텔을 지켜보면서 대중은 문학 너 마저 ...?하며 통탄했다는 말을 들었다. 문학 청정의 이미지가 손싱된 것마는 틀림없다.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무 보다 문을 숭상해왔던 민족성과 관련이 없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엄밀히 생각해 보면 문학은 그렇게 성스럽지마는 않을 것이다. 문학이 뭐라고 그렇게 성스러워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이런 이미지를 강요해 왔던 건 작가들 자신이 이니었을까? 문은 천한 것일 수가 없으니까. 자기가 자기 발등을 찍은 꼴은 아닌지. 각종 문학상이 그 권위를 얼마나 뽐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가? 그래서 문학상을 못 받은 작가는 작가라고 명함도 못 내민다. 이에 대해 박민규는, 이제라도 '순수'의 감옥을 벗어나야 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자칫 순수라는 창살에 '순결'이라는 창살마저 덧씌워질까 우려가 들어서다. 작가에게 문학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섹스의 대상이어야 한다(144p)고 말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크긴 하다. 문학 스스로가 지고 있는 권위의 갑옷을 벗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속되고 B 급 언어로 가득 채워진 문학은 문학이 아닌 양 바라보는 시각도 좀 덜어낼 필요도 있어 보인다. 그런데 우리의 민규 형님 뭔가 좀 어버하는 느낌도 든다. 문학이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섹스의 대상이라니. 뭐 그 나름대로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왜 하필 비유를 그렇게 했을까?

 

그가 섹스라고 말할 때 섹스는 오늘 날 배설, 쾌락, 카타르시스의 의미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문학이 관연 그런 건가? 하지만 섹스도 알고 보면 상당히 복잡한 철학과 윤리학, 생리학을 왔다갔다 하는 문제다. 고전적 기독교 진영에서는 섹스는 오늘 날 그렇게 타락했지만 알고 보면 섹스는 원래 거룩한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렇게까지도 말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차원은 아니지 않을까? 아무래도 허슬러의 영향이었을까?

 

이밖에도 우리의 민규 형님은 여러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여기서 줄인다. 창간호 천명관 때도 그랬지만 읽으면서 우리 문학과 그 나갈 바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의 민규 형님은 사진에서도 결코 기죽지 않는 카리스마를 작렬하고 있다. 꼭 홍콩 배우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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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10-08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폰트 작으면 일단 눈이 아파서 못봅니다.(블로그 폰트조차 키웠거든요..)

stella.K 2015-10-08 17:50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이야 좋아서 무릅쓰고 보겠지만
독자의 마음도 갈대 같은지라 언제 안 보게될지 모라요.ㅠㅋ

아이리시스 2015-10-0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저도 이거 살래요. 두권. 이건 기간 지나도 품절같은건 안될까요? 덜팔려서 여전히 지난호도 있는거겠죠?

stella.K 2015-10-08 17:54   좋아요 1 | URL
아이리스님, 오랜만이여요. 잘 지내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벌써 중고샵에도 있던 걸요?
전 이 책으로 우리나라 문학의 현주로를 알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는 우리 문학에 대해 그다지 아는 바가 없었거든요.ㅋ

스윗듀 2015-10-08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K님과 마찬가지로 악스트를 통해 한국문학에 대해 많이 알게 됐어요. 재밌다는 사실도요. 잘 읽고 갑니다😊

stella.K 2015-10-09 10:45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이 잡지는 기대가 많이 되요.
우리 열심히 읽어 보아요.^^

cyrus 2015-10-08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싼 가격으로 매겨진 책의 운명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글자 크기가 너무 작아요.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도 그래요.

stella.K 2015-10-10 20:16   좋아요 0 | URL
그래? 글씨만 빼면 솔직히 나름 고급진데.
종이 질도 싸구려가 아냐. 하지만 솔직히 난 종이가 반사가 되서 그것도
조금 부담스럽더라구. 그냥 일반 종이를 써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럼 단가가 좀 싸지 않나?
올재 클래식도 그러는구나. 그렇다면 그 시리즈는 나와는
인연없다고 봐야겠네. 난 이제 글씨 작으면 못 읽어주겠더라.ㅠ

페크pek0501 2015-10-10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씨는 크고 볼 일입니다. 이젠 눈 피로해서 작은 글씨가 싫더라고요.
가격에 비해 내용이 좋은데 글씨가... 참 아쉬운 일입니다.

stella.K 2015-10-10 18:34   좋아요 0 | URL
저도 조만간 안경을 하나 맞춰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전에 루테인이란 눈 영영제가 있다는데 먹어 본 사람은 효과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걸 먹어 볼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평생 써 온 눈인데 제가 제 눈을 위해 해 준게 아무 것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제 눈을 좀 위로해줬야겠다 싶어서요.ㅠㅋ
 

  한동안 문학에 그렇게도 구애를 퍼부었던 나도 어느 순간 시들해짐을 넘어 아예 냉담해지기까지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된 원인엔 적어도 나에게 3 가지 악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건 그토록 좋아했던 국어 선생님의 결혼과 교지에 내 글이 실리지 않은 것,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을 겨냥한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시작된 민주화 항쟁이 그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 이유 같지 않은 이유다. 국어 선생님 같은 경우 그 분의 결혼에 미련 같은 게 남아 있을 리 없다. 물론 잠시 아쉽긴 했지만 곧 선생님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렸고 오히려 이런 내가 대견하기까지 했다. 솔직히 실연 당한 사람들 마음 아프다고 질질거리고 추태 부리고 하던데 솔직히 나도 그렇게 되면 어쩌나 했는데 의외로 덤덤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1]

또한 내 글이 교지에 실리지 않은 건 좀 아쉽고, 충격적이긴 했지만 어차피 작가가 되는 건 장기전이고 결국 나이 먹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리부터 낙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2] 하지만 그 시대가 나의 작가의 꿈을 앗아갔다는 건 부인할 수 업을 것 같았다 

TV나 신문은 연일 시위와 군부독재를 타도하는 소식으로 들끓었고 나는 그게 남의 일인 양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 시절 나의 아버지 같은 기성 세대는 요즘 젊은이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시위한다고 못 마땅해 했다. 정치는 정치인이 하고, 군인은 나라 잘 지키면 되는 것이고, 장사꾼은 장사나 잘하면 되는 것처럼 학생은 그저 공부나 잘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대의 기성세대들은 결코 범상치 않은 시대를 거치며 살아왔다. 나라가 하나되지 못하고 갈라진 것은 유감이긴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좀 전쟁의 불안에서 벗어나 안정되게 살 수만 있다면 그도 다행이겠다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 같은 힘 있는 사람이 이 불안한 휴전의 시대를 버텨줄 수만 있다면 그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이루어 놓은 게 좀 많은가? 무엇보다도 잿더미 같았던 남한의 땅을 이만큼 발전시켜 놓은 건 그의 힘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기성 세대들은 잘 몰랐을 것이다. 진정한 자유가 무엇이고 다양성이 공존한다는 것이 뭔지를. 워낙 수직적이고 전통적 가치관에 길들여져 왔을 뿐만 아니라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이었으니 따숩게 밥 먹고 잠자는 것 외에 그것 너머의 자유가 허락될 거라고 누가 감히 상상하겠는가? 때문에 그 시절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하는 건 기성 세대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의 옷과 먹을 것 등록금이 어디서 나온 건데, 다 땅 팔고, 소 팔고, 기계 기름칠해 돌려 가며 번 돈 아니겠는가? 그런 피 같은 돈과 정력을 학교에 바치지 못하고 시위현장에 바치고 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건 집 앞에서 교회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하필 시위가 일어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 대학생 시위는 대학가 같은 번화한 곳에서 할 텐데 그런 곳과 한참 떨어진 시장 앞 도로변에서 시위를 하다니.

그 때문일까? 나는 한참 만에 목적지까지 가는 버스를 탔지만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마침 버스 안에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어떤 아저씨 둘이 서로 초면에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버스 안에서 창문을 통해 바깥의 상황을 보고 같은 마음이 되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시사 논평에 밝은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그 광경이 나에게 너무나 극명해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누가 더 자유로운 사람이었을까? 버스라는 우리 안에 갇혀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며 한담을 나눴던 그들이었을까? 아니면 대학이란 상아탑 안에 갇혀 있는다는 것이 위선이라고 생각해 저렇게 거리에 쏟아져 나와 행진을 했던 것이 자유였을까?    

어쨌든 그들은 어쩌면 그리도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는지 나도 보면서 신기할 정도였다. 저 나이쯤 되면 저렇게 이물 없이 낯선 사람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의 호방함에 나의 소심한 성격이 유난히 쪼그라드는 느낌도 들었다.

다행히도 길은 얼마 만에 뚫렸고,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한쪽이 먼저 목적지에 이르자 그 동안 말 벗이 되어준 것이 고마웠던지 상대 남자에게 어디까지 가시는지 모르겠지만 안녕히 가시라고 먼저 인사를 했고, 상대 역시 답례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80년 대는 서로 모르는 사이도 금방 공감대를 형성하고 친해질 수 있는 사이로 만드는 처절한 세대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문학은 어디로 갔던 것일까? 그렇게 민주화로 인해 촉발된 문학은 온통 참여문학 일색아니었던가? 그래서 문학이 그런 것이어야 한다면 나는 문학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 문학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것이고, 천일야화 같은 상상력의 본체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옛날 선생님으로부터 요셉 이야기를 듣고 이 세상 어디엔가 요셉은 존재하지 않을까란 희망을 가지고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문학은 그렇게 상상력과 별을 쫓는 모험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별이 손에 닿지 않는다고 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 처럼 문학을 하는 작가는 그렇게 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인 양 독자에게 끊임없이 상상력을 불어 넣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척박한 세상이 되어버린 현실에 기름이라도 붓겠다는 것인가?

그렇게 끊임없이 상상력을 퍼 올려야 하는 문학이 고작 현실과 야합(?)해서 참여문학이란 그때까지 듣도 보도 못한 이름으로 나온 것에 나는 적잖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자고 그 시대의 작가들은 하나 같이 현실을 비판하는 글만 써 댔던 것일까? 이렇게 척박한 세상일수록 누군가는 계속 상상력 가득한 글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이대로 한 세대만 지나면 문학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문학을 멀리했던 이유가 정말 이런 이유에서일까에 확신이 없었다. 문학에 대한 내 관심 자체가 시들했던 건 아닐까? 그것을 그렇게 참여문학에 덮어 씌웠던 것은 아닌지. 무엇보다 우리가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사춘기 시절, 인간은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나의 염세주의적 사고방식과 맥락을 같이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소설의 일회성이 나의 이런 생각을 더 부추겼다. 한 번 읽고 마는 소설에 기꺼이 돈을 지불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더구나 그 시대의 문학은 돈 내고 사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 역시 이 돈 안 되는 일에 나 자신을 투신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혼자 문학을 떠났던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세월이 한참 흐른 요즘에 와 드는 생각은 그 시절이 척박했다고 과연 문학이 문학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것을 어디서 알 수 있느냐면, 나는 1982년부터 내가 완독한 책을 기록하는 손바닥만한 노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지금도 아주 가끔 들여다 보는 때가 있다(사실 내가 이 노트를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을 거라곤 나 자신도 몰랐다. 잃어버리려면 충분히 잃어버릴 수도 있었던 건데 말이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이런 책을 읽었던가?’ 조금 놀라기도 하고, 그 책을 읽은 건 확실히 기억이 나는데 내용이 뭔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 책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책들은 언제고 날 잡아서 다시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또한 문학은 항상 보면 그 시대를 풍미하거나 대표하는 작가와 작품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참여문학이던 아니든 간에 말이다. 나는 또 문학에 애도를 표한다고 해 놓고 그 작가들의 작품을 야금야금 읽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시 문학계는 수필이 강세를 보였는데, 여류 수필가로 신달자와 유안진이, 남자로는 철학자 김형석과 안병욱이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들의 작품 한 두 권쯤은 다 읽었다독보적 지성으로는 이어령 교수가 있었고, 소설로는 박경리 선생과 박완서 선생이 있었다. 이들의 책 역시 난 몇 년간에 걸쳐 서너 권 이상은 읽었다.  

또한 외국 작가로는 <빙점>으로 유명한 미우라 아야꼬 씨의 책들을 좋아했는데, 그녀가 구사하는 작품의 정서가 우리나라의 그것과 흡사해 좋아했다. 무엇보다 나는 그녀가 쓰는 작품마다 기독교 작가로서 그 특유의 영성이 돋보여 좋아했다.

서양 작가로는 가톨릭 작가로 유명한 A. J 크로닌의 작품을 좋아했다.

의 작품을 알게 된 계기는 사실 난 교회를 다니기 전 성당엘 잠시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영세(세례)를 받을 때 나의 대모[3]에게 그의 책 <인생의 도상에서>란 책을 다른 책과 함께 축하 선물로 받았었다. 그런데 아무리 뚝배기 보다 장맛이라고 하지만 판형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활자가 작은 편이어서 당장 읽을 맛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몇 년간 내 방 책장에 꽂혀 있었는데 우연히 어떤가 싶어 뽑아서 한 두 장 읽기 시작했는데 그게 또 의외로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후 그의 책을 생각 외로 많이 읽었다.

그때 이미 나의 신앙은 가톨릭에서 기독교로 옮긴 상태였는데, 좀 웃긴 것은 그렇게 미우라 아야꼬와 크로닌의 작품들을 읽어서일까? 내친김에 아예 종교 문학에 발을 디뎌 볼 생각으로 집에서 한 정거장 정도 떨어진 곳 신사역 가는 길에 기독교 서점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 가면 기독교 문학에 관한 책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날 마음 먹고  갔다.

처음으로 가 본 그곳은 내가 찾던 기독교 문학 책은 그다지 있어 보이진 않았고, 주로 신학이나 신앙 서적을 팔고 있었다. 조금 실망은 했지만 이대로 나오기가 뭐해 용기를 내 그곳 주인에게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 있냐고 물어 보았다.

그 무렵 이문열의 책들이 문학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내가 알기론 그가 이전에도 책을 내긴 했지만 이 책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내가 그 책을 찾았을 싯점은 그나마 그 인기가 한풀 꺾인 때였다. 그렇게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 서점에 들어 온 이상 그 책이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말하는 순간 내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그 책을 이런 기독교 서점에서 찾고 있는 건지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그 책이 기독교 문학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던 것이다. 그동안 그렇게 서점을 기웃거리고 다녔으면서 하필 여기 와 그런 실수를 하다니? 그래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나 주워 담을 수도 없고 그냥 모른 척 주인이 어떻게 나오나 지켜 보는 수 밖에.

그런데 의외로 나를 대하는 주인과 그 친구의 태도가 참 마음에 들었다. 보통은 왜 그런 책을 여기서 찾나 의아해 할 수도 었을 텐데 다소 얼떨떨한 표정 지으며 그들은 내가 찾는 책에 대해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는 것이었다. 이마에 내천 자까지 그리면서. 그리고는 그거 소설책 아니냐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었다. 그제야 그들은 어떠한 결론에 도달한 듯 주인이 그건 여기엔 없으며 일반 서점에 가보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도 그 유명한 책을 읽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베스트셀러여도 그렇게 안 읽은 사람도 못지 않게 많다는 얘기다. 

나는 그런 그들의 진지함이 왠지 착해 보여 좋았다. 자칫 무안해질 수도 있는 상황을 그들은 직감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런 손님을 진지하게 대해주니 오히려 고마울 정도였다.[4]

그리고 나는 그 후 그들의 말대로 그 책을 단골 서점에서 사 읽었고, 그 책이 문학으로는 잘 쓴 작품이긴 하지만 기독교 문학과는 전혀 상관 없는 책이라는 걸 확실히 알았다.

그 밖에도 80년대엔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이나 황인경의 <소설 목민심서> 같은 역사 소설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면서 나 역시 역사소설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바로 이런 책들이 시대의 질곡과 상관없이 80년 대를 대표하는 책들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무슨 근거로 80년 대는 문학적 상상력이 부재한 시대라고 단언하고 조용히 안녕을 고하려고 했던 걸까?

그런데도 80년 대를 생각하면 그 시절 내가 읽어 온 책들 보다는<해방 전후사의 인식>의 인식이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등과 함께 이념 서적들을 떠올리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누구는 문학을 함에 있어서 그 시대의 사회성과 참여정신을 닮지 못해 괴로워했는지 모르겠다. 문학의 길은 의외로 넓고 깊다. 

시대에 저항하는 문학을 하는 것이 문학하는 자의 자세인지 아니면 그것과 상관없이 문학 그 자체의 길을 도도하게 가는 것이 옳은 건지 잘 모르겠다. 물론 그건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나 개인적인 생각은 시대를 초월해서 좀 더 예언자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문학하는 자세에 좀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언젠가 조선일보의 북세션을 담당했던(지금도 담당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김광일 기자가 이런 말을 했단다.

“(뜨거운 시대를 살아야 했던 작가들은 너무 뜨겁다고 전제하고)독자들은 이미 다 잊어버리고 가볍게 걸어가고 있는데 작가들은 아직 그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헐떡이고 있습니다. 짐을 올려놓기도 어렵지만 내려놓기는 더 어려운 법이지요. 그 역사의 짐을 내려놔야 새 시대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라고.

나는 기자의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시대를 정확하게 읽는 것도 작가의 몫이긴 하겠지만 시대를 관통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게 우리나라 작가는 조금 늦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위에 열거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을 수 있어서 그 시절 나름 나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1]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실연 당해보지 않은 인생을 인생이라 논할 수 있을까?

[2] 하지만 이런 생각은 살면서 생각해 보니 그다지 옳은 생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때 쓸 수 없는 글은 나이 먹었다고 써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글이란 축적의 산물이기 때문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날에 할 수만 있으면 조금씩이라도 쓰고 쌓아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3] 가톨릭엔 대모, 대부 제도가 있다. 말하자면 영적인 어머니, 아버지를 일컫는 말로 내가 신앙인임을 보증해 주고, 영적으로 이끌어 주는 사람을 뜻한다. 이들이 있어야 영세를 받을 수가 있고, 여자나 남자나 같은 성으로만 이루어진다.

당시 나의 대모는 나 보다는 대여섯 살 위로 보이는 어느 여대생 언니였는데, 참해 보이긴 했지만 의외로 내가 그녀의 대녀인데도 잘 챙겨주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것이 형식적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나 몰라라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나는 그녀를 성당을 다니는 동안 두 번인가 세 번 밖에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제도는 정말 좋은 제도 같긴 하다고 생각했다.       

[4] 요즘은 책을 거의 인터넷에서 사는 형편이고 보면 이렇게 서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관해 할 말이 없는 것 같다.설혹 오프라인에서 책을 산다고 해도 직원들이 사무적인 친절로만 대할 뿐이니 그런 광경을 묘사할 일이 없어졌다.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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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15-08-13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참 잘 쓰셨어요.
이달의 마이페이퍼에 강력추천합니다.^^

stella.K 2015-08-13 16:27   좋아요 0 | URL
ㅎㅎ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이전에 썼던 페이퍼가 거시기 해서 가림막용으로 올린 건데
뜻밖에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15-08-13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위의 댓글 보니 웃음이 나와요. 가림막용이라니요...
그런데 저도 사실은 그럴 때가 많아요. 마지막 글 때문에 민망해라, 빨리 다른 걸 올려야겠다...
지금도 그러고 있어요. 꼭 나의 발가벗은 몸을 높은 곳에 꽂아 둔 기분이거든요. ㅋ
하지만 우리 극복해야 해요. 뻔뻔해져야 한다니까요.

참여 문학, 생각납니다. 그때 소설들은 한결같이 데모하는 장면 같은 거나 나라에 대해 고뇌하는 장면이 들어가지 않는 소설이 없었어요. 꼭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던 시대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시대를 초월한 소설이 명작인 경우도 있는 건데...

미우라 아야꼬와 크로닌의 소설, 저도 읽었어요.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비밀 댓글 : 이런 말씀 드리기 실례가 안 된다면... 님이 최근에 쓰신 글 중에서 저는 이 글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괄호 안의 글은 비밀 댓글임. ㅋㅋ

[그장소] 2015-08-13 19:21   좋아요 0 | URL
(저도 이거 비밀인데요,와...Stella.k 님 80년대를 현역으로 보내셨단 글인것..이죠? pek0501 님?? ㅋㅎ ~안뵈실까나.... )

아,그럼 세례명...스텔라...?
저도 대모님이 계셔요. 카타리나죠..제 세례명..

stella.K 2015-08-13 18:06   좋아요 0 | URL
ㅎㅎ 니르바나님 댓글에 쓴 저의 답글이 너무 노골적인 것 같아
냉큼 들어 와 비밀글로 돌려 놓으려고 했는데 결국 언니한테도
들키고 말았네요. 왜 이렇게 가면 갈수록 소극적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언니 칭찬 들으니 기분은 좋네요. 고맙습니다.^^

[그장소]님,
그러니까요. 이러면 제가 엄청 나이가 많은 것 같아 안 쓰려고 했는데
결국 누구나 나이는 드는 거잖아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꼭 한번쯤
갈음하고 싶어하잖아요. 이글도 작년부터 써 온 글의 연장인데
그동안 게을러서 이제야 또 한편 올리네요.
또 언제 올리게 될지 모르겠어요.
제가 이 비슷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김봉석의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
한번 읽어 보세요. 저와 같은 세대구요 저 보다 훨씬 글을 잘 썼어요.^^

페크pek0501 2015-08-13 18:09   좋아요 0 | URL
저, 다 봤어요, 그장소 님. 하하~~

저도 동의보감 상중하를 읽었고 사람의 아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시대에 궁금한 마음에 읽었던 1인이에요. 이렇게 옛날 사람이랍니다. 스텔라 님보다 제가 더 옛날이어요.

제 입장에서 보면 sns의 좋은 점은 젊은이들과 친구처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죠.
늙어서 안 끼어 줘, 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점이에요. 오프라인이라면 분명 안 끼어 줬을 텐데, 하는 생각이...

나이가 많아도 글이 젊으면 오케이, 라는 거죠. 글이 늙었다면 늙은 대로 괜찮아 하는 공간이라는 거죠.

그장소 님, 반가웠습니다. ^^

[그장소] 2015-08-13 19:15   좋아요 0 | URL
Stella.k 님..엄청은 무슨요.제가 놀란건요..너무 동기간 같다고 하나, 격차를 못느끼니, 신기해 그랬어요.저 윗 글 처럼 작정하고 밝힌 글이 아니면 전혀 못느끼겠단..거죠..저와 같은 세댄줄 알고..그랬어요..(그치만, 전 윗 분들이 솔직히 더 편하고 좋습니다. 같은세대나 아래에는 제가 더 잘해야한단 노력이 따르잖아요..) 무리하기 싫고 ,,그저 흐르듯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면 싶거든요.따라가듯이..흘러가듯이..(저,,여우같은 거죠?! 재수없게!^^)ㅋㅋ
아..소개해 주신 책은 메모하고 꼭 읽어볼게요..고맙습니다..!!

[그장소] 2015-08-13 19:14   좋아요 0 | URL
알아서 기겠습니다 .언니님들, 그리고 pek0501 님 ,Stella.K님 왕 재수 하고 욕한번 하셔도 저, 진짜 할말 없네요..^^ 어쩔까요? 이 글들을 비밀글로 전환해요? 지우긴 우리들 흔적이 아깝고..(단 제 글방의 글은 꼭 처리하겠습니다) 원하는 분부를 내려주셔요. 대놓고 메너가없는 경우였네요. (본의아니게) 그치만..그게 뭐? 합니다..저는 ..부럽거든요..사실..그 모든, 나이도..세월도 ,지금의 위치도..

stella.K 2015-08-13 19:21   좋아요 0 | URL
아유, 왜 그러십니까?
전혀 그런 생각하실 필요 없으세요.
이리 어려워 하시면 제가 님을 어찌 대하겠습니까?
그냥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 주세요.
그래야 저도 편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8-13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심스럽게 이달의페이퍼 당선 예측해 봅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저와는 상극이지만 ㅋㅋㅋㅋ 그래도 어떤 진실성이 엿보여서 좋습니다. 허세 가득한, 이해도 못하면서 철학자나 나열하는 것보다는 이런 글이 백 번 낫죠...

stella.K 2015-08-13 18:07   좋아요 0 | URL
곰발님이 당선이라면 당선입니다. 고맙습니다.ㅋㅋㅋㅋㅋ

페크pek0501 2015-08-13 18:21   좋아요 0 | URL
그런데 곰곰 님은 왜 새 글을 안 올리시는 건가요?
기다리고 있사와요... ^^

[그장소] 2015-08-13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튼, 그러거나 말거나, 빙점이나..사람의 아들이나,소설 동의보감,목민심서,등 저는 90년대초중반에 걸쳐 읽었거든요..(그리 따지면 별 차이가 없는겐가..?) 아니지.. 82년부터 완독한 독서노트라 하셨으니, 88 올림픽 때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었다는...흠,
아,, 어쨌든 sns는 좋은 것이 세대를 막론하고 (버릇없이) 친구를 (감히...끄응..)만들어도 준다는
겁니다... 고마운 노릇입니다.. 그런의미로 꼭 이달의 페이퍼에 올라가셔야 겠어요! ^^

stella.K 2015-08-14 14:35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럼요. 그장소님과 저는 친구입니다.
오앤만에 기대해 보죠. 이달의 페이퍼.ㅋㅋ


[그장소] 2015-08-13 19:14   좋아요 0 | URL
아, 너그럽게 양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조심할게요.
(이..괄호 비밀 글이 귀염 터져서 너무 막 나갔어요)..지키는 선은 지키겠습니다.
꼭.페이퍼 이~~얍..에너지 관리공단 째...힘 퐉~~드리고 갑니다..(제 방 글 수습하러..)에고 괜찮으신지..몰겠어서..확인하고 풀어야겠어서요.. 저는 상관없지만.. 두분이 걸린 문제잖아요..ㅎㅎㅎ 괜찮으신건가요?
그냥 두어도? 그럼..오픈?

stella.K 2015-08-13 19:00   좋아요 0 | URL
네. 상관 없습니다.^^

[그장소] 2015-08-13 19:19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젤루 많이 떠든 아이 였군요! 칠판에 이름쓰고 당번 시켜야 할 !!
아,하핫..저 개인적으로 비밀글을 좋아라하지 않아서 가급적 여럿의 글에선
걍 다 놓고 쓰는 주의 라..저도 이게 좋긴합니다..덕분에 저는 속 씨원하였습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대인배셔요!

cyrus 2015-08-13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의 부제를 ‘응답하라, 80년대 문학’이라고 붙여도 좋겠어요. 제가 헌책방에 책 구경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지 과거에 독자들의 독서 취향이 궁금할 때가 있어요.

stella.K 2015-08-14 14:40   좋아요 0 | URL
그렇게 해도 좋긴하지.
그런데 나는 그 시대가 나같은 소시민에게도 미친 영향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
그 시대는 왜 꼭 정치인들과 몇몇 지성인들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젊은이들의 것인 것처럼 보여지잖아.
그 시대야 말로 문학이 죽어 있는 세대라고 생각해서
한쪽으론 마음이 쓰리기도 했다.ㅋ

yamoo 2015-08-13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미리 축하드려야 겠습니다. 8월의 이달의 당선작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ㅎ

2015-08-15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0 0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0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0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붉은돼지 2015-08-21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언급하신 목록을 쭉 보니 제가 80년대 읽었던 도서목록과
거의 88%정도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요 ^^
종교적인 문제에도 나름 관심이 많아서 사람의 아들외에도
라하트 하헤렙(맞나??)같은 조성기의 소설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잠시 추억에 잠겼습니다....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stella.K 2015-08-22 11:14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조성기 작가의 책 저도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나요.
오늘 우연히 TV에서 DJ 김기덕 게스트로 나와 토크쇼하는
프로를 봤는데 그것도 참 새롭더군요.
이종환, 김광한과 함께 트로이카였는데 지금은 다 가고 혼자
저렇게 남았으니 그도 참...
옛날이 새삼 그리워지더군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