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관료체제


주요 관료직

 

집정관 (Consul)

 

고대 로마의 관직을 일컬으며, 공화시대에는 로마의 시민, 즉 관리가 차지할 수 있는 실제상 가장 높은 자리였으며, 제국시대에는 명목상 황제 다음 가는 자리였다.

집정관이 임기를 마치면 전직 집정관(Proconsul)이 된다. 전직 집정관들만이 속주 총독이 될 수 있었다.


선출방법과 임기


집정관은 매년 국민선거를 거쳐 2명이 선출된다.

첫번째 집정관은 정집정관 (Consules ordinarii) 이라고 불리어지며, 로마의 햇 수는 이 첫번째 콘술의 이름을 붙여서 세어진다. → 로마 집정관 연대표
두번째의 집정관은 보좌집정관 (Consules suffecti) 이라고 불리어지며, 이 말대로 제 1 집정관을 도와주는 구실을 한다.

권한


선출된 집정관은 로마법, lex Licinia Sextia에 따라 로마의 통치권을 대표단 (comitia centeriata)으로부터 부여받게 되므로서 로마의 최고통치자로서 법적으로 인정될 뿐만 아니라, 군사, 행정, 법, 원로원 임원 임명 및 추천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원로원과 국민회의를 필요에 따라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법무관의 역사적 배경


원래 로마 공화국 시대인 기원전 450년까지 프라이토르(법무관)이라는 직책은 로마의 최고위 관리로 쓰여졌으나 콘술(집정관)제도가 도입된 이후에 콘술 다음가는 직책으로 평가되었다

quod iis temporibus(:호라티우스법 제정 당시) nondum consulem iudicem sed praetorem appellari mos fuerit. (호라티우스법, 리비우스, Ab urbe condita 3, 55, 11-12)
이를 뒷받침 하는 간접적 증거로는 이미 그 이름 Praetor("앞장 선 사람"이라는 고대 그리스어 πραίτωρ의 라틴어 번역)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인원과 임기


인원: 6명
술라의 개혁 이후 8명
아우구스투스 이후 8명
임기: 1년으로서 공화국시대에는 40세 이상의 남자만이 선출될 자격이 있었으나 제국시대에는 30세로 연령제한이 완화되었다.

권한과 직속관리


기원전 367년 이후로 시법무관(Praetor urbanus)이라는 직책은 무엇보다도 법적 판결권을 갖고 있으므로서 형사 및 민사관계의 재판을 관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맞고 있다. 이에 따라 물론 치안권이 프레토르의 권한에 속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재무관 (Quaestor)

 

종류와 성격;
아이딜레스 플레비 (Aediles plebi): 인원 2명으로서 오직 서민층 (플레비)를 대표한다. 서민 신분을 가진 출마자는 언제나 서민층에 의해 선출된다
아이딜레스 쿠룰루스 (Aediles curulus): 인원 2명으로서 귀족까지도 초함한 국민전체를 대표한다. 귀족 (Noblies)도 출마가 가능하며, 출마자는 구역 총회 (comitia tributa)에서 선출된다.

임기와 권한;
키케로의 저서에 따르면: De legibus 3.3.7 suntoque aediles curatores urbis, amronae, ludorumque sollemnium, ollisque ad honoris amplioris gradum is primus ascensus esto.

모든 아이딜레스는 선출 된 후 1년 동안 다음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활동한다.
시의 일반 행정: 도로, 공중 목욕탕, 음료수 관리
식량 공급: 로마 시민이 필요로 하는 식량을 지방에서 수입하고 곡식의 가격을 경매을 통해 정한다. 제국 시대에 접어들어 이 중요한 일은 제황 직속 관리가 맡아서 하게된다.
축제와 각종 경기 행사의 조직과 운영.
아이딜레스 쿠룰루스는 경우에 따라서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다.


→ 집정관 → 재무관 → 법무관

 

 

감찰관 (Censor)


정치체제


원로원 (Senatus)
호민원 (Tribunatus)

 

사회구조

 


고대 로마의 사회구조는 고대문명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우선 시민의 신분구조를 살펴봄으로서 많은 구체적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옛 한국사회의 신분이 양반 - 서민으로 구분되어 있듯이, 고대 로마인의 신분 역시 귀족 (Nobiles) 과 서민 (Plebes)으로 엄격히 분리된다.

귀족 Nobiles
서민 Plebes

 

 

로마 제황 연대표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인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부터 암살당한 기원전 44년까지 독재관으로 있었으나 로마 황제(Princeps)가 되지는 않았다.

 

목차


1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2 군인 황제

3 플라비우스 왕조

4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5 난립기

6 제 3세기의 위기중의 황제들

7 테트라키아

8 콘스탄티누스 왕조

9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10 테오도시우스 왕조

11 서로마 제국

12 동로마 제국

13 관련 페이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우구스투스 (Gaius Iulius Caesar Octavianus Augustus) (기원전 27년 - 기원후 14년)
티베리우스 (Tiberius Claudius Nero Caesar) (14년 - 37년) -아우구스투스의 사위
칼리굴라 (Gaius Caesar Germanicus, Caligula) (37년 - 41년) -티베리우스의 동생의 손자 폭군화
클라우디우스 (Tiberius Claudius Nero Caesar Drusus) (41년 - 54년) -카리굴라의 숙부 근위대에 의해 추대됨
네로 (Tiberius Claudius Nero Domitianus Caesar) (54년 - 68년) -칼리굴라이 여동생의 아들

군인 황제;


갈바 (Servius Sulpicius Galba) (68년 - 69년)
오토 (Marcus Salvius Otho) (69년)
비텔리우스 (Aulus Vitellius Germanicus) (69년)

플라비우스 왕조;


베스파시아누스 (Titus Flavius Vespasianus) (69년 - 79년)

-네로황제몰락이후 일오났던 황제난립의 내전에서 승리해 플라비우스 왕조의 창건자가 되었다.
티투스 (Titus Flavius Vespasianus) (79년 - 81년) -그의 장남
도미티아누스 (Titus Flavius Domitianus) (81년 - 96년) -티투스의 아우로서 폭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네르바 (Marcus Cocceius Nerva) (96년 - 98년)
트라이아누스 (Marcus Ulpius Nerva Traianus) (98년 - 117년)
하드리아누스 (Publius Aelius Traianus Hadrianus) (117년 - 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Titus Aurelius Fulvius Boionius Arrius Antoninus Pius) (138 - 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ntoninus) (161 - 180)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Lucius Verus) 161년 - 169년)
콤모두스 (Marcus Aurelius Commodus Antoninus) (180년 - 193년)

난립기;


페르티낙스 (Publicus Helvius Pertinax) (193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Didius Iulianus) (193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Lucius Septimius Severus) (193년 - 211년)
카라칼라 (Marcus Aurelius Antoninus, Caracalla) (211년 - 217년)
마크리누스 (Marcus Opellius Macrinus) (217년 - 218년)
엘라가발루스 (Marcus Aurelius Antoninus, Heliogabalus) (218년 - 222년)
세베루스 알렉산더 (Marcus Aurelius Severus Alexander) (222년 - 235년)

제 3세기의 위기중의 황제들;


막시미누스 트락스 (Gaius Iulius Verus Maximinus Thrax) (235년 - 238년)
고르디아누스 1세 (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 Africanus), 고르디아누스 2세 (Marcus Antonius Gordianus) (238년)
푸피에누스 (Marcus Clodius Pupienus Maximus), 발비누스 (Decius Caelius Calvinus Balbinus) (238년)
고르디아누스 3세 (Marcus Antonius Gordianus Pius) (238년-244년)
필리푸스 아라부스 (Marcus Iulius Philippus) (244년-249년)
데키우스 (Gaius Messius Quintus Traianus Decius) (249년-251년)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Quintus Herennius Etruscus Messius Decius) (251년)
호스틸리아누스 (Gaius Valens Hostilianus Messius Quintus) (251년)
트레보니우스 갈루스 (Gaius Vibius Trebonianus Gallus) (251년-253년)
아이밀리아누스 (Marcus Aemilius Aemilianus) (253년)
발레리아누스 (Publius Aurelius Licinius Valerianus) (253년-260년)
갈리에누스 (Publius Licinius Egnatius Gallienus) (260년-268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Marcus Aurelius Claudius Gothicus) (268년-270년)
퀸틸루스 (Marcus Aurelius Claudius Quintillus) (270년)
아우렐리아누스 (Lucius Domitius Aurelianus) (270년-275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Marcus Claudius Tacitus) (275년-276년)
플로리아누스 (Marcus Annius Florianus) (276년)
프로부스 (Marcus Aurelius Probus) (276년-282년)
카루스 (Marcus Aurelius Carus) (282년-283년)
카리누스 (Marcus Aurelius Carinus) (283년-284년) (공동황제 누메리아누스, 283년)

테트라키아
디오클레티아누스 (Valerius Diocletianus) (284년 - 305년) (공동황제 막시미아누스 (Marcus Aurelius Valerius Maximianus 286년 - 305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Flavius Valerius Constantius Chlorus) (305년-306년) (공동황제 갈레리우스 Galerius Maximianus 305년 - 311년)
콘스탄티누스 1세 (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306년 - 337년) (공동황제 갈레리우스 (Galerius Maximianus), 리키니우스 (Flavius Galerius Valerius Licinianus Licinius 308년 - 324년), 막시미누스 (Gaius Valerius Maximinus Daia 308년 - 313년)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Flavius Iulius Constantius) (337년 - 361년) (공동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 (Flavius Claudius Constantinus (337년 - 340년), 콘스탄스 (Flavius Iulius Constans) 337년 - 350년)
율리아누스 (Flavius Claudius Iulianus) (361년 - 363년)
요비아누스 (Flavius Claudius Iovianus) (363년 - 364년)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1세 (Flavius Valentinianus) (364년 - 375년) (공동황제 발렌스 (Flavius Valens, 364년 - 378년)
그라티아누스 (Flavius Gratianus) (375년 - 383년) (공동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 (Flavius Valentinianus), 375-392)

테오도시우스 왕조;


테오도시우스 1세 (Flavius Theodosius) (379년 - 395년)

서로마 제국;


플라비우스 아우구스투스 호노리우스 (Flavius Augustus Honorius) (395년 - 423년) (공동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 Flavius Constantius, 421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 (Placidus Valentinianus) (423년 - 455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Petronius Maximus) (455년)
아비투스 (Eparchius Avitus) (456년 - 457년)
마요리아누스 (Iulius Valerius Maiorianus) (457년 - 461년)
리비우스 세베루스 (Libius Severus) (461년) - 465년)
안테미우스 (Anthemius) (467년 - 472년)
올리브리우스 (Anicius Olybrius) (472년)
글리케리우스 (Glycerius) (473년 - 474년)
율리우스 네포스 (Iulius Nepos) - (474년 - 475년/480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Romulus Augustus) (혹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475년 - 476년)
오도아케르와 동고트 왕국으로 이어지다.


동로마 제국;


아르카디우스 (Flavius Arcadius) (395년 - 408년)
테오도시우스 2세 (Flavius Theodosius) (408년 - 450년)
마르키아누스 (Marcianus) (450년 - 457년)
레오 1세 (Leo I) (457년 - 474년)
레오 2세 (Leo II) (474년)
제노 (474년 - 491년)
바실리스쿠스 (Basiliscus) (475년 - 476년)
제노 (복귀) (476년 - 491년)
비잔틴 제국으로 이어지다.

출처:다니엘의 기도하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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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리모델링

 
인생(人生) 리모델링 


‘인생 리모델링’이란 책제목은 물론이고 
‘Breaking the Pattern.', 
'상상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는 
부제들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이것들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저자 플랫킨의 독특한 인생경험담입니다. 

그는 몇 명의 여자와 사랑에 
빠졌으나 언제나 나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보다 20kg이나 더 나가는 몸 때문에 
모든 다이어트를 해 보았으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몇 개의 사업을 벌였는데 한결같이 
좋지 않은 결과만 가져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연속적인 실패 속에서도 
그는 이 일의 책임은 파트너에게 있다고 여기고 
그들을 원만만 했을 뿐 자신은 실패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후에 가서야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 책을 쓴 것입니다. 

그가 깨달았다는 사실은 
모든 실패에는 무의식으로 일정한 패턴이 있는데 
그 패턴을 바꾸지 않고는 어떤 일에서든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하듯이 지친 인생들도 
책 제목처럼 리모델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에게 저자는 말한다. 
‘패턴을 바꾸라!’ 
이것이 인생 리모델링의 첫째 원칙입니다. 

자연이나 삶 속에도 일정한 패턴이 있기에 
질서를 유지할 수 있듯이, 
모든 일에는 반드시 패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실패 속에서도 좌절할 것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 패턴만 바꾸면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패턴의 소유자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분모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먼저 모든 책임 소재를 타인에게 돌리는 
습성 때문에 이웃과 파괴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수동적이고 의존성이 강하여 타인을 욕하면서도 
그들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격적이고 나르시즘에 자주 빠져 
피드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기에 
모든 일에서 실패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속담처럼 부정적인 패턴을 고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중독성 패턴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또한 스스로 삶을 조사하는 형사가 되어 
자신의 정확한 패턴을 확인하여 
계기가 되는 사건을 통해 바꾸어야 합니다. 
고통 없이 변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생각해 볼 일은 실패와 책임입니다. 

비록 자신의 나쁜 패턴 때문에 실패했다 해도 
한 사람에게 영원한 실패란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다시금 실패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그 요인들을 찾아보면서 깜짝 놀라는 것은 
모든 문제 속에는 자신이 원인제공자였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적인 사소한 행동 속에서도 
지나간 여러 인간관계에서 
삶의 계기가 될 만한 사건들이 있었기에 
그 반응에 따라 지금과 같은 패턴들이 생긴 것입니다. 

일이 안 될 때마다 비난의 대상을 찾고 
부정을 거듭하다 결국 좋지 않은 선택을 한 것입니다. 
또한 항상 지름길을 찾느라 가장 저항이 적은 길을 택하여 
스스로를 방치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제라도 정확한 부정적인 패턴들을 분석했다면 
더 이상 두려움이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도전하는 길만이 그 패턴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실패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진정한 배움과 성장의 학교이기 때문입니다. 



 


실패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최선의 비결은 책임을 지는 일입니다. 
책임이란 어떤 사건에 대한 반응과 함께 
그 반응에 대한 능력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나쁜 결과가 있을 때에 
비난과 변명을 통하여 회피하는 스타일이 있고,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 작은 차이가 실패자와 성공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과거에 얽매이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지만 
후자의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져야할 사람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실패도 성공의 필수 요소임을 아는 사람이므로 
자유롭게 미래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목표와 성취의 문제입니다. 

책 부제에도 써있듯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일어나게됩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목표로 삼는 것만을 성공합니다. 
그러므로 상상은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성공 그 자체가 아닙니다. 
존경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이 
보편적인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목표한 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목표가 있는 사람을 위해 
일평생 일해야 하는 종신형에 처해져 
있다는 말했던 어떤 사람의 말은 
파레토 법칙80:20에서 사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목표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80과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20의 
인생은 성공과 실패의 차이가 아니라 
성취과 허무(虛無)의 차이입니다. 



 


성공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추구하고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면류관일 뿐입니다. 

반면에 실패는 목표와 책임은 없지만 
핑계와 불에 탈 공력만 있을 뿐입니다. 

‘나는 다만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다른 것은 모르나 때를 기다리는 인내는 
발휘할 필요가 없는 것은 
완벽한 때는 영원히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표는 결코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취에 꼭 필요한 이유는 
목적지까지 인도하는 지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리모델링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우리의 패턴들을 알게 하시고 
어떤 결과든지 책임질 줄 알며 

그리고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성공이 아닌 
성취하는 삶이 되게 하는것입니다... 


<옮긴글입니다> 
倚  峰 
출처:고, 미, 사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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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5-01-16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 2005-01-16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 인생을 리모델링하려고 합니다.
순우리말로 거듭나기 어때요? 스텔라님

stella.K 2005-01-16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멋져요. 거듭나기!^^
 

 

 

  자메이카 출신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국가안보보좌관을 거쳐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합참의장에 올랐으며 레이건, 아버지 부시, 클린턴 등 3명의 대통령을 보좌한데 이어 2001년부터 부시 1기정부의 국무장관을 역임한 콜린파월.

그는 미국인들 사이에 가장 능력 있는 리더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소수 민족이자 흑인 출신인 그가 성공뿐만 아니라 존경 받는 미국인이 되는데는 이런 법칙을 충실히 지켰음이 아닐까

 

- 콜린 파월의 법칙 - 

 

1.사정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지는 않다. 다음날 아침이 되면 더 나아질 것이다.
2.(화나는 일이 있으면) 우선 화를 내라. 그런 다음 극복하라.
3.자신의 입장(직위)에 자아를 너무 밀착시켜 그 입장이 무너질 때 자아도 함
께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4.하면 된다.
5.선택은 신중히 하라. 당신은 그것을 얻을 수도 있다.
6.좋은 결정을 내리는데 불리한 사실들이 방해를 하지 않도록 하라. 7.다른 사람의 선택을 대신해줄 수 없듯이 다른 사람이 당신을 대신해 선택
하도록 해선 안된다.
8.작은 일들을 점검하라.
9.공적은 나누어라.
10.침착하라. 친절하라.
11.비전을 가져라. 까다로운 태도를 가져라.
12.두려움이나 반대자들의 의견을 고려하지 말아라.
13.지속적인 낙천주의는 힘을 증가시킨다.

출처:류지의 세상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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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05-01-15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린 파월, 부시정권에 드물게 균형감각을 가지고 일하시던 분이었는데 차기에는 물러나신다고 하지요. 귀 얇은 부시 주위에 온통 매파밖에 없으니 걱정입니다.
미사일과 폭탄 퍼붓는 일을 그리 쉽게 여기는 판에 그가 물러난다니 너무 아쉽습니다.
No more war!

stella.K 2005-01-15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린 파월은 참 멋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출처 : 예닮동산

    비판하지 말아야할 7가지 이유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외식하는 자여 먼저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1-5)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5절까지는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여기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단순히 평가를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말의 뉘앙스로는 ‘심판 혹은 정죄’를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는 그의 산상수훈 설교집인 ‘은혜의 각성 (Awakening Grace;조이선교회역간)’에서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일곱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습니다. 1. 우리는 모든 사실을 다 알지는 못한다 정당한 비판을 위해서는 모든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제한된 사실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제한된 사실만 알고 있다면, 우리는 비판은 늘 불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판은 사실에 기초해야 하는데, 제한된 사실로 어떻게 올바른 비판을 할 수 있겠습니까? 2. 우리는 그 동기를 다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동기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나 말, 표정을 통해서 그 동기를 100%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동기란 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비판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동기를 다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우리는 비판을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완전히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인간의 판단은 항상 객관성과 주관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판단이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각자의 판단은 늘 어느정도 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판단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판단을 할 때에만 그것은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비판하고자 할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주관성이 개입된 것이라는 점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4. 상황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어떤 사실이나 사건은 모두 상황맥락적입니다. 동일한 사실도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의 예를 봅시다. 미장이가 벽돌을 쌓다가 조수에게 “벽돌!” 하고 외치면 그것은 “벽돌을 가져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만약 공사장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벽돌!”하고 외치면 그것은 “떨어지는 벽돌을 피하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쉽게 누군가를 비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5.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우리의 인식은 늘 제한적입니다. 제한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할 때 우리는 늘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어떤 부분들이 있고 그것이 칭찬받아야 할 부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불쌍히 여겨야 할 부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이 정말 드러내기 힘든 장애를 가졌거나 남모르는 고통을 가졌다면, 우리의 비판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6. 우리는 편견이 있으며 시야가 흐려질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편견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관성보다 훨씬 더 우리자신을 슬프게 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판하려고 하는 상대방에 대한 첫인상이 편견으로 작용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비판하려는 상대방에 대해서 주위 사람들이 평가를 내린 것이 편견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편견이 있는 한 우리의 평가는 사실에 근거한 평가가 될 수 없습니다. 이미 평가를 내려놓고 거기에 필요한 사실들만을 열거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7. 우리 자신은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늘 불완전합니다. 특별히 일관성이 없습니다. C S 루이스는 자신이 가르치던 옥스퍼드 대학원 학생이 일관성없는 태도를 가졌던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저명정치인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파티에서 그 정치인이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자, 그 다음부터는 그 정치인에 대해서 우호적인 시각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는 것이 그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중에 아무도 비판하고자 하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유혹 속에서 쉽게 험담과 비판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을 간단히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다면, 위에서 언급한 일곱가지 근거를 늘 생각하십시오.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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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삽화 첫 공개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입력 : 2005.01.13 17:51 22' / 수정 : 2005.01.14 05:18 48'

명성황후(明成皇后·1851~95)를 직접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인 화가의 삽화가 발견됐다.

지금까지 명성황후 본인 여부가 불투명한 인물 사진과 초상화 말고는 직접 명성황후를 보고 묘사한 그림이나 사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13일 최근 일본 도쿄의 고서점에서 입수한 일본 잡지 ‘풍속화보(風俗畵報)’ 제84호에 실린 삽화를 공개했다. 1895년 1월 25일 동양당(東陽堂)이 발행한 이 잡지에 실린 삽화는 고종(高宗)과 명성황후가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접견하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 1894년 12월 고종과 함께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접견하는 명성황후의 모습이 담긴 일본화가의 삽화. 1895년 1월 발행된 일본 잡지‘풍속화보’에 수록된 것으로, 명성황후를 현장에서 직접 본 뒤 모습을 그린 스케치는 이번이 처음이다.
삽화 속 장면은 황후가 시해되기 1년 전인 1894년 12월 8일의 일로, 삽화 위에는 ‘왕과 왕비가 우리 공사의 충언(忠言)에 감동해 비로소 개혁 단행의 실마리를 깨치는 그림’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며, 일본인 화가 이시즈카(石塚空翠)의 서명이 있다. 삽화 속 고종은 황후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고 이노우에의 시선도 황후를 향하고 있어, 당시 명성황후와 이노우에 두 사람이 주로 대화를 했고 고종은 경청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 같은 장면은 명성황후의 당시 정치적 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삽화의 현장성을 높이고 있다.이 교수는 이와 관련, “명성황후는 좀처럼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날 접견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며 “복식과 배경 묘사가 매우 세밀해 이노우에를 따라간 화가가 현장을 직접 그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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