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아!  아버지

한가위라 대보름, 달 휘영청 밝습니다.
아들 딸 손목 잡고 고향 집에 갑니다.
어릴 적 내 작은 손, 아버지는 어떠셨던가요.
늘 앞서 걷던 어른 무섭기도 했는데.

몸 크고 머리 컸다, 집 떠난 지 벌써 몇 년.    
아버지 두텁던 손 물기 없이 바싹 말라,
고함에도 힘이 없고 가끔은 잔눈물 바람.    

아버지, 어머니 없는 고향은
고향이라도 고향이 아니라던데….
역전에 자전거 받쳐놓고
온종일 기다리셨으련만
“왔냐” 한마디 던지시곤
애꿎은 손자 머리통만 쓰윽.

아버지, 달이 밝습니다.
손잡고 싶습니다.


추석이면 한복을 입지요. 그런데 남자 한복 대님 매는 일이 쉽지가 않아요. 이걸 요리 돌리나 조리 돌리나 한참을 갸웃대다 보면 절로 아버님 생각이 나지요.

살아생전 아버님은 추석 때만 되면 제게 대님 매는 법을 가르쳐주셨어요. 한 번 배워도 두 번째는 또 잘 모르겠는 거라. 해마다 그렇게 잊어버려도 아버지는 귀찮다, 한심하다 안 하시고 늘 차근차근 가르쳐주셨어요.

아버지는 천생 선비 같은 분이었어요. 피부가 곱고 몸이 가볍고 책 읽기를 즐기셨지요. 흰 두루마기를 입으면 선이 착착 살고, 같은 상복을 입어도 태가 났어요. 울산 모랫골에선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나름껏 내세울 만한 지식인이었는데, 그만 20대 후반에 폐결핵과 간 질환을 앓으시면서 삶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어요. 이후 1991년 돌아가실 때까지 고생을 참 많이 하셨지요.

열 살 때 아버지 병을 고쳐보겠다고 큰 병원 많은 부산으로 이사했어요.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단칸방에 모셔두고 어머니는 집 앞에서 오뎅, 풀빵, 떡볶이 장사를 했어요. 그만으로는 호구가 안 돼 사글셋집 1층을 빌려 하꼬방만한 만홧가게도 열었지요. 아버지가 주로 자리를 지키셨어요.

존경받던 선생님이 아이들도 내놓고 무시하는 만홧가게 아재가 되다니. 어머니는 하루 서너 시간밖에 못 자는 고생을 하시면서도 그런 아버님으로 인해 늘 노심초사하셨어요. 후에 “장사를 하면서도 혹 그이가 약이라도 털어넣지 않을까 염려돼 방문을 확 열어젖히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으니까요.  

△ 1984년, 울산에서 분식집을
하시던 시절의 부모님.
고향 마을에서야 추석 하면 축제요 행복이었지만, 부산에서는 그렇게 한가할 틈이 없었어요. 그날이 대목이거든요. 오랜만에 잔돈푼이나 생긴 아이들이 만화 보고 군것질하러 몰려들잖아요. 어찌나 복작대고 소란스러운지, 어머니는 지금도 “명절이라고 찾아온 손님에게 자장면 시켜드렸던 송구스러움”을 잊지 못하고 계시니까요. 새 옷 입고 친척집 인사 다니고, 제겐 그런 모습들이 딴세상 일로만 여겨졌어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저는 그림 그린답시고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만 했어요. 그런 아들이 밉기도 하시련만 부모님은 좀체 싫은 소리를 안 하셨어요. 우리 아버지 참 대단하신 게, 제가 부산고 1학년 때 전교 꼴찌를 한 적이 있거든요. 어려서는 전교 1등도 하던 녀석이…. 그런데도 성적표를 보신 아버님은 딱 한 말씀만 하셨어요. “1등이 있으면 꽁지도 있는 법이지.”

캔버스 산다고 남의 집 바둑판을 훔쳐 팔아 난리가 났을 때도 아버지는 한 말씀 안 하셨어요. 좋은 학교 가라, 그림을 그려라 마라 잔소리도 없으셨고, 없는 살림에 그저 묵묵히 뒷바라지해주실 뿐이었지요. 그런 아버지가 딱 한 번 화를 내셨는데, 제가 하도 그림 그린다고 늦게 다니니까 한번은 방에 걸어둔 제 그림을 집어던지신 거예요. 저도 눈이 뒤집혔지요. 감히 내 그림을…. 그림을 발로 팍 밟아 뽀개놓고 밤 돼 들어와 보니 어느새 아버지가 얌전히 고쳐서는 벽에 다시 걸어두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그런 분이었어요.

저는 아버지 임종을 못했어요. 그때 한창 한겨레신문에 시사만평을 연재하던 때라 상복을 입고도 만화를 그렸지요. 지금도 속이 아픈 것이 그때 아버지 곁을 일주일이라도 지켰으면, 아니 단 하루만이라도 곁에 있었더라면. 사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글 그림 = 박재동 (만화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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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10-05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아버지, 달이 밝습니다.
손잡고 싶습니다. ]
저도 내년 추석에는 슬며시 아버지 손을 잡고 싶습니다.

stella.K 2004-10-05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추석 때 안 잡아 드리셨군요. 내년에는 꼭...^^
 
 전출처 : 바람구두 > 자유주의자라고??? 흐흐

좌익 속담집 LEFT WING PROVERBS

바람이 불어도 항상 左風이 분다
ANYWAY THE LEFT WIND BLOWS.

아나키스트들은 (사유) 재산이 절도라고 확신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것이 (사유) 재산이라고 믿는다.
Anarchists believe property is theft. Libertarians believe everything is property.

자유주의자들은 보스 역할을 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경우 그들 밑에서 일을 한다.
Libertarians are bosses; anarchists work for them when they run out of other options.

자유주의자들은 더 많은 총을 구입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더 많은 탄약을 사용한다.
Libertarians buy more guns, but anarchists use more ammo.

자유주의자들은 길쭉한 리무진을 탄다; 아나키스트들은 바람막이 창을 통해 벽돌을 던진다.
Libertarians ride in stretch limos; anarchists throw bricks through their windshields.

자유주의자들은 쇼핑을 하러 가게에 간다; 아나키스트들은 슬쩍 훔치러 가게에 간다.
Libertarians go shopping; anarchists go shoplifting.

자유주의자들은 습격을 당하고 나서 경찰을 찾는다; 아나키스트들은 경찰에 의해 습격을 받는다.
Libertarians go to the police after they've been mugged; anarchists get mugged by the police.

자유주의자는 다른 자유주의자와 결혼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먼저 수많은 아나키스트들과 같이 자고난 후에야 비로소 그렇게 하고 싶어한다.
A libertarian wants to marry another libertarian, but only after sleeping with enough anarchists.

아나키스트들은 세무서를 무시한다; 자유주의자들은 회계사와 변호사를 고용하여 세금문제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한다.
Anarchists ignore the IRS; Libertarians hire accountants and attorneys to fight them.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이 적법하게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정부가 탈취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아무도 사적으로 소유해서는 안되는 재산을 정부가 나서서 (사유제를 통해) 보호한다고 생각한다.
Libertarians think the government is trying steal the property they rightfully own; anarchists think the government is trying to defend property that nobody rightfully owns.

자유주의자들은 정당으로 조직되어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어떤 것에도 조직되어 있지 않다.
Libertarians are organized in a political party; anarchists aren't organized in anything.

아나키스트들은 선거를 무시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당선을 위해 선거운동을 하고, 투표를 하고, 낙선한다.
Anarchists ignore elections; Libertarians run for office, vote and lose.

자유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들이 철이 덜 들고,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주의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쓰지 않는다.
Libertarians think anarchists are naive and unrealistic; anarchists don't care what libertarians th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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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가슴속에서

별들이 사알짝 떠는 것을 알아챘다네.

하지만 안개로 빚은 영혼 속에

오솔길을 잃어버렸다네.

이상의 샘 속에

햇살은 내 날개를 부러뜨리고

고뇌에 찬 슬픔은

추억으로 몸을 적시네.

 

장미란 장미는 모두 하얗다네.

마치 내 고통의 빛깔처럼 하얗다네.

그렇지만 원래가 흰 빛깔은 아니라네.

장미 위로 내리는 눈을 맞았다네.

예전에는 무지개를 갖고 있었다네.

내 영혼 위로도 눈이 내리네.

영혼의 흰 눈은

빛 혹은 그림자 속에 감추어진

입맞춤과 정다운 모습의

눈송이를 지니고 있다네.

 

장미는 눈을 떨쳐버릴 수 있지만

영혼에 눈이 한번 쌓이면 떨굴 수 없고

시간의 발톱은

눈과 함께 수의를 짠다네.

 

죽음이 우리를 데려갈 때면

눈이 녹을까?

후일 더욱 완벽한 장미와

눈이 존재할까?

그리스도가 가르쳐준 대로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할까?

어쩌면 문제 해결은

결코 불가능한 걸까?

 

만약 사랑마저 우리를 배신한다면?

만약 황혼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선과

가까이에서 고동치는 악의

평범한 진리 속에 우리를 결박한다면

누가 우리에게 생명의 자양을 줄 것인가?

 

만약 희망의 불이 꺼져버리고

아수라장이 되면

어떤 횃불이 지상 위의

길들을 밝혀줄 것인가?

 

푸르름이 단순히 몽상이라면

순수를 어리하리야.

사랑의 화살이 없다면

우리네 사랑은 어이하리야.

 

죽음이 그저 죽음에 불과하다면

시인은 어떻게 될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잠든 사물은 어떻게 될까?

오 희망의 태양이여!

맑은 물! 초생달!

아이들의 가슴!

돌로 만들어진 투박한 영혼!

오늘 나는 가슴속에서

별들이 사알짝 떠는 것을 느꼈다네.

장미란 장미는

내 고통마냥 하얗다네.

                                                 1918년 11월 그라나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사랑의 시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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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9-30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에 가슴을 저미게 하시는군요...

stella.K 2004-09-30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특한 강렬함이 느껴지는 시 같아서...^^
 
 전출처 : 밥헬퍼 > 김수영의 '풀'과 이어령의 '풀들의 혁명'

 시 자체와 함께 시를 해석하는 방식이 저에게는 많은 도움을 주었던 글입니다. 시간과 공간, 관계된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시뿐만이 아니라 삶을 해석하는데 도구가 되었습니다.  *본문의 그림은 당시의 그림을 찾기 어려워 동일한 화가의 그림을 다시 옮깁니다. 창현 박종회 화백   

.................................................................

다시 읽는 한국시 -이어령-



 

 

 

 

 

 

 


                           김 수 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현대문학 1968년 8월호>


왜 당구대는 초록색인가. 이상스럽게도 카드놀이나 룰렛판이나 서양의 놀이판은 모두가 초록빛으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유럽의 색채>를 쓴 미셀 파스투로는 그것이 16세기때부터 내려오는 풍습이라고 말한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푸른 잔디밭에서 축구를 하고 골프를 하는 스포츠를 보면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유럽의 지중해성 기후는 농작물을 기르는데는 적합지 않지만 양떼나 젖소가 뜯는 목초를 기르는데는 이상적이다. 그래서 유럽사람들의 생활은 목장의 풀밭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서구문학에서는 풀이 생명과 활력의 상징물이 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월트 휘트먼의 <풀잎>이다. 서구 사람들이 이상으로 삼아온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당구대에 깔린 초록색 나사는 지금도 집집마다 잔디를 심는 서양사람들의 풍속처럼 초지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는 목장 문화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김수영 시인의 <풀>읽기는 당구대의 놀이판과 대단히 흡사한 데가 있다. 풀에 대한 그리움과 찬양만이 아니라 당구대 위에 흩어진 당구공처럼 그 시인의 언어 역시 희고 붉은 양색깔로 선명하게 나뉘어 있다.

  ‘날이 흐리다’,‘바람이 불다’와 같이 기상조건을 나타내는 말들이 ‘흰 공’이라면 풀에 관한 말들은 그와 대비를 이루는 ‘붉은 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는 ‘바람’과 ‘풀’의 두 언어가 서로 부딪칠 때 생겨나는 ‘눕다’와 ‘일어나다’의 서술어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간다. 이 시에는 거의 명사를 수식하는 형용사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행위(동사)에 관련된 부사들은 도처에, 그리고 시적 메시지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로 등장한다.


솔, 창현 박종회, 문인화, 70*40

 

  風靡(풍미)한다는 한자말이 암시하고 있듯이 바람이 불면 모든 풀잎은 일제히 한쪽 방향으로 나부끼며 쓰러진다. 풀이 눕는다는 것은 곧 바람에 굴복하고 순응하는 풀의 패배이며, 일종의 작은 죽음인 것이다. 그러나 풀의 일어난다는 것은 그와는 정반대로 생명과 자유를 되찾는 것이며, 독립적인 의지를 나타내는 승리인 것이다. 이렇게 눕다/일어서다의 대립항을 어떻게 선택해 가고 또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서 그 언어의 공이 굴러가는 성질과 속도, 그리고 그 방향과 미묘한 부딪힘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는 그 움직임을 제어하는 부사가 당구대의 쿠션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눕다에 중점을 둔 1연의 풀들을 보면 안다. 그 풀들은 바람 부는대로 움직인다. 바람의 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억눌리고 쓰러지는 순응의 풀이며 수동적인 풀이다. ‘풀이 눕는다’로 시작하는 그 시행은 계속 그 뒤에도 ‘나부끼다’와 ‘울다’로 이어져 갈 뿐이다.

  그러나 주어와 술어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지만, ‘드디어 울었다’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에서 ‘드디어’ ‘더’ ‘다시’와 같은 부사가 누워있는 풀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미묘한 움직임의 변화를 나타낸다. 드디어 울었다는 것은 참고 있었던 풀의 의지를, 그리고 ‘더 울었다’는 증대되어가는 좌절의 의미를, 그리고 ‘다시 누웠다’의 그 ‘다시’는 계속 일어나려고 노력하던 풀의 잠재된 행위와 그 지속성을 묻어둔다.

  그래서 풀의 의지를 숨겨두었던 그 부사들이 2연째에 오면 ‘빨리’와 ‘먼저’로 발전해서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와 ‘바람보다 더 빨리 운다’의 능동적인 풀을 만들어 낸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는 것은 수동적이었던 풀ㄹ이 이제는 자기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능동적 풀로 변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람과 풀의 행위는 이미 같지 않은 것이다. 이 같지 않은 속도의 그 작은 틈새 속에서 ‘풀’의 자유와 의지가 번뜩이기 시작한다. 그것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람보다 빨리 일어난다’이다. 일어난다는 것은 저항이며 생명이며 희망이자 승리이다. 그것은 풀들의 작은 혁명이다.

  눕다/일어나다의 대비를 극대화한 것이 3연의 풀이다. 1연의 바람에 눕는 풀이 2연에 오면 바람보다 빨리 눕는 풀로, 그리고 그것이 3연에 오면 바람보다 늦게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서는 풀이 된다. 그래서 이 전체의 시적 구조는 음악용어로 말하자면 크레센도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연의 나부끼는 풀이 3연에서는 뿌리째 눕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바람의 강도와 흐린 날씨의 정황은 ‘발목까지’, ‘발밑까지’ 내려와 결국엔 ‘풀뿌리가 눕는다’로 증대된다.

  풀뿌리가 눕는다는 말은 이미 그 풀이 단순한 식물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적인 풀의 경우는 뿌리가 뽑히는 경우는 있어도 바람에 눕는 일은 없다. 그래서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할 때의 바로 그 풀뿌리처럼 이 풀들은 식물 언어에서 정치적 이념어로 전환된다. 그러므로 바람에 눕는 1연의 사실적인 풀이 바람보다 빨리 눕는 2연의 비사실적인 풀로 옮겨가고, 그것이 다시 3연째의 바람보다 늦게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서는 반사실적인 풀로 바뀌어가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눕다/일어서다의 대립적 행위를 수식하는 언어들 역시 ‘다시’에서 ‘빨리’로, 그 ‘빨리’에서 ‘늦게’로 바뀌어지면서 시 전체의 긴장과 풀의 의미변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눕다와 동격인 ‘운다’란 말이 3연에 오면 ‘웃는다’로 바뀌고 바람과 풀의 대응관계를 나타내는 비교어 역시 빨리/늦게, 먼저/늦게의 대비로 무력한 풀의 의미를 반전시켜 ‘거대한 풀뿌리’를 만들어 낸다.

 

 

낙엽은 가시덤불에서, 창현 박종회, 문인화

 

 ‘풀이 눕는다’로 시작한 이 시가 마지막에 오면 ‘풀뿌리가 눕는다’로 그 상황이 한층 더 가열한 것으로 변해 있는데도 ‘우는 풀’은 ‘웃는 풀’로 변신되어 있다. 김수영의 식물원에서 자라는 풀들은 이파리를 나부끼게 하는 바람보다도 뿌리를 흔들어 놓은 바람 속에서 더욱 자유롭고 강한 풀이 되는 까닭이다.

  풀을 압도하고 압도하는 바람, 이파리와 줄기와 그 뿌리까지 누이는 거대한 바람의 힘, 그리고 비를 몰고 오는 흐린 날의 기상은 대체 무엇인가. 그 풀이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할 때의 바로 그 풀뿌리라고 한다면 그 바람과 흐린 날은 民草(민초), 그 당시 유행하던 말로 하자면 민중의 자유를 억압하고 그 생존을 위협하는 정치세력들이라는 것은 너무나 뻔하다. 그런데도 김수영 시인의 언어들이 다른 정치이념을 구호화한 시와 비교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뻔한 알레고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예츠의 말이었던가. 시를 쓰는데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알레고리에 빠지지 않게 하는 일이다.

  당구는 직선운동이면서 그것을 치는 큐의 변화에 의해서 그리고 쿠션을 이용한 간접적인 작용에 의해서 표적구를 때린다. 김수영 시인은 시를 총으로 생각하지 않고 당구대의 큐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흰공, 붉은공의 그 단순한 도식을 언어들을 갖고서도 무한한 변화와 유연성, 그리고 최대의 유희성을 획득한 초원의 시학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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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프레이야 > 이쁜 순수우리말 시어

* 까치노을 - 풍랑이 일 때 솟아오르는 하얀 물거품

* 구슬눈물 - 구슬처럼 둥글게 맺힌 눈물

* 다소니 - 사랑하는 사람

* 다손말 - 사랑하여 하는 말

* 명주바람 - 부드럽고 화창한 바람

* 미리내 - 은하수

* 발편잠 - 마음 놓고 편안히 자는 잠

* 보득솔 - 작달막하고 가지 많은 어린 나무

* 살싸하다 - 맵고 아리다

* 싸울아비 - 무사

* 작달비 - 굵고 거세게 내리는 비

* 장어구름 - 모양이 길고 빛깔이 몹시 검은 구름

* 할림비치 - 눈흘기기를 잘 하는 사람

* 희나리 - 채 마르지 아니한 생나무 장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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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9-16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 발견했습니다. 보득속이 아니라 보득솔입니다^^

stella.K 2004-09-16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쳤습니다. 이 페이퍼 가져가신 분 많던데 일일이 찾아 다니시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