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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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씨는 그 명성에 비해 나에겐 오히려 생소한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난 지금껏 그의 작품을 거의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의 읽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아주 오래 전 그의 작품을 읽은 것도 같고, 안 읽은 것 같기 때문이다. 그만큼 작가는 나의 관심 밖이였던 것이다.

내가 그를 관심 밖에 뒀던 건, 그가 한창 필봉을 휘둘렀을 때 나는 한국문학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그의 문학적 위치가 참여문학의 최선봉에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그 시절 작가들이 참여문학을 하지 않으면 달리 무슨 글을 쓸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난 문학하면 참여문학 밖엔 할게 없었던 이 나라의 문학풍토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정말 문학을 몰랐고, 배부른 생각을 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금은 문학이 너무 개인주의화 됐고, 너무 말랑말랑해졌다. 그래서 솔직히 재미가 없어졌다. 요즘에 주목받는 작가들은, 아예 문학이 엄숙해질 필요가 있냐고 하며 스스로 탈엄숙주의를 선언하고 나오고 있으니,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 그런 문학을 읽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지금이라도 참여문학을 독파해 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솔직히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아니 읽고난 후 무슨 말을 써야할지 리뷰 쓰기가 좀 막막해졌다. 읽을 땐 너무 재밌게 읽었다. 그런데 작가는 한가지 방법으로만 이야기를 풀어 나가지 않고 여러가지의 것을 혼합해서 풀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우선 주인공 바리는 작가가 창조해낸 인물이 아닌, 실제로 알고 있는 탈북의 어떤 사람을 그린 것 같이 생생하다. 게다가 바리공주의 구전설화를 완벽히 재탄생시켜 놓았다. 그리고 환상적인 요소까지 리얼하게 살리고 있어, 아, 이런 작가도 있었구나! 읽는내내 탄성을 지르게 만들었다. 게다가 작가는 참여문학의 대부(代父)답게 여전히 북한 문제와 미국의 9.11 사건, 아프가니스탄 사태 등을 바리라는 주인공을 통해 노련하게 병치시켜 놓았다. 게다가 이슬람의 내세관까지 녹여놓았으니 과연 대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과연 문학은 어때야 하는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는 개기가 되었다. 나는 아무래도 탈이데올로기화 되고, 개인주의화된 그리고 가벼움과 재미만을 추구하는 오늘 날의 문학에 찬성할 수가 없다. 그것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역시 문학은 인생을 얘기해야 하고, 공동체적 삶을 얘기해야 하며, 그것이 옳든 그르든 작가의 인생관이 녹아져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읽는다는 건 나에게 크나큰 기쁨이었다. 이 작품을 읽고나니 작가의 이전 작품을 읽고 싶어졌다.

물론 나 개인적으론 작가의 다소 샤먼적인 색채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그것을 통해 우리나라의 의식의 뿌리를 파헤칠려고 했다는 문학적 성과는 높이 사고 싶다. 또한 작가가 이전에 연극작업에 참여한 이력이 있어서일까? 작품에서 다분히 연극적 이미지가 베어있어 조만간 누군가에 의해 이 작품은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공연물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보게 만들었다. 그것은 운이 좋아서일까? 가제본으로 읽으면서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연극대본을 넘기는 것 같은 기분도 한몫 더 했으리라. 지금은 읽은지 조금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잔상이 쉬 지워지지 않는다. 바리데기. 과연 추천할만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작가의 건필을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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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07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연극적 요소를 찾아내셨나 보군요. 황석영은 이야기꾼이지요. 이 책은 아직 안
읽어봤지만 다음에 읽을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stella.K 2007-07-08 18:39   좋아요 0 | URL
그럴리야 없겠지만, 아무도 작업을 안 하면 나라도 하고 싶어요. 물론 머리 빠지는 일이지만...ㅎㅎ

mira95 2007-07-07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도 기대중인데..빨리 읽고 싶어요. 황석영은 언제나 생각할 거리를 주는 작가지요..

stella.K 2007-07-08 18:4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전 기회있는데로 <심청>이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황석영의 <심청>은 어떨까 궁금해지더라구요.^^

쿠자누스 2007-08-27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와 우연케 어느 식당에서 마주쳤을 때, 9/11을 소설로 만들어보라는 제안을 하려다가 공연히 실망만 하게 될 것 같아서 그만 둔 적이 있었는데요, 이 책에 무얼 썼을까 궁금하네요.
 
카페 여주인 프랑스 현대문학선 24
레몽 장 지음, 이재룡 옮김 / 세계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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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책 읽어주는 여자>로 유명한 작가다. 하지만 나는 애석하게도 아직 그 작품은 읽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저자의 또 다른 책, 이<카페 여주인>이란 작품을 읽게 되어 나름 행운이란 생각이 든다.

내용은 간단하다. 어떤 작은 마을에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여자에게 편지 한장이 날아든다. 그것은 어느 작가로부터, 하룻밤을 같이 지내주면 10만 프랑을 주겠다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소설은 시작하고 있다.

생각해 보라. 정말 누군가가 하룻밤을 지내주는 댓가로 적지 않은 돈이 생긴다면 제의를 받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으며, 주위의 반응은 또 어떻겠는가? 이것을 작가는 아주 그럴듯한 설득력을 가지고,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아주 섬세하고도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여기에 작가의 능력이 빛을 발한다.

솔직히 나는 작가의 내공에 좀 놀랐었다. 대작을 쓸만한 작가에겐 그다지 놀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만한 역량이 되서 그렇게 쓰는 것인데 새삼 놀라고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저 작가가 펼쳐 준 잔칫상에 독자는 편안히 앉아서 즐겨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품. 즉 작은 이야기를 이만큼 능청스럽게 펼쳐 나가는 작가들 보면 솔직히 질투가 날 정도다.

그런데 문득 읽다가, 만약 이와 똑같은 이야기를 우리나라의 어느 작가가 그려낸다면 어떻게 그려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를 비하 할 마음은 없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정서엔 돈과 섹스를 동의어로 보는 경향이 있어, 한푼어치의 에누리도 없이 과감하게 까발리려고만 했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갖는 신비감이 반감이 되면서 또 똑같은 얘기하고 앉았구나, 하지 않을까? 이것을 클리셰라고 한다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는 결국 작가의 몫이다. 레몽 장은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위해, 주인공인 카페 여주인과 10만 프랑을 제의한 작가를 파리의 어느 박물관으로 대려다 놓는다. 그리고 사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만드는가 하면, 역사의 한 단면을 얘기하게도 만든다. 그리고 프랑스 유명작가의 말도 인용하게 만든다. 과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작가의 역량이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책이 상당히 육감적이며 흥미롭고, 지적이기까지 하다. 게다가 책을 읽는 내내 마치 프랑스 영화 한편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아주 괜찮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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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6-30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 끌리네요. 님이 매혹된 소설 읽어보고 싶어 담아갑니다.

stella.K 2007-06-30 10:40   좋아요 0 | URL
네. 한번 읽어보세요. 저는 몇년 전에 사놓고 벼르고 벼르다 이제야 읽었네요. 이런 여름 날, 특히 조용한 밤에 읽으면 좋지 않을까 싶네요.^^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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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훈의 문학을 일컬어 “마초”적이라고 말한다. 나는 아직 그가 낸 책들을 다 읽어내진 못했지만, 그의 글들은 거의 대부분 남성을 대상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긴 하다. 그의 단편 “언니의 폐경”같은 경우는 이례적으로 남성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소설은 순전히 두 자매가 이야기를 주도하고 이끌어 간다. 그래서일까? “언니의 폐경”을 읽었을 때 나의 느낌은 마치 차가운 쇳조각에 살을 덴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김훈이 마초들의 이야기를 썼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겠는가? 어차피 이 세상의 이야기 중 거의 대부분이 남자가 나오고, 남자에 의해서 씌여지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러다가 그의 문학을 일컫어 마초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는 내는 책마다 화제가 아닌 적이 없었고, 특히 이 책 <남한산성>은 상종가를 치며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왜 그럴까? 요즘 인기 있다는 펙션 또는 역사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몰랐던 병자호란이나 인조에 관한 얘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는 이 소설을 시작할 때,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작가 김훈이 이 소설에서 얘기하려 했던 건 무엇일까?

알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듯, 김훈도 그런 것 같다. 그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호불호가 확실해 보인다. 그를 좋아한다면 왜 좋아하는 것일까? 나는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문체’를 좋아하는 것일 게다. 나는 그의 소설 <칼의 노래>로부터 그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의 문체는 한마디로 저기압 문체다. 읽고나면 가위에라도 눌린 듯 무겁지만, 뭔가의 깊은 울림이 있다. 이 작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마치 그때 당시를 여행하듯 명징하고, 인물이나 배경묘사가 적확하다. 모름지기 작가라면 이런 각을 세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이 그를 좋아한다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런데 싫어하는 이유는 뭘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의 작품엔 여성을 비하시키는 내지는 반페미니즘이라고 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작품이 여성이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꼭 그렇게 말해도 좋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 보단 그를 변호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지금까지 그의 작품을 읽은 바로는)그는 여성을 다룰 마음이 아예 없어 보이는 듯 하다. 그에겐 오로지 마초 다시 말해 남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의 문학을 마초적이라고 했을 때, 작가는 과연 그 말에 동의할까? 아마도 그 말은 평론가들이 자기내들끼리 뭉뚱그려 말했던 것이 세상에 전파된 것은 아닐까, 싶다. 여성의 비하 역시 그가 의도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초적이라는 것도 그렇다. 그가 주로 남성을 그리긴 했지만 전형적인 마초를 표현하지는 않아 보인다. 우리나라 국민이 그리도 흠모해 마지않는 이순신 장군을 형상화 한 작품 <칼의 노래>에서 보면, 그는 이순신을 영웅호걸로 그리지 않았으며, 고뇌하는 남자로 그렸다. <남한산성> 역시도 우리가 익숙히 보아 온, 파벌이나 당쟁을 그리지 않고 고뇌하는 남자들을 그렸다. 인조도, 김상헌도, 최명길 역시도...

 

 

그렇다면 그의 작품에서 그리는 남성들은 왜 그리도 하나 같이 고뇌하고 있는 것일까? 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남성은 그다지 전형적인 마초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의 상상이며,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남성들은 늘 선택을 강요받으며,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그것이 가정이든 나라든) 끊임없이 고군분투하고, 밥벌이의 지겨움에 몸서리치는 건 아닐까? 작가 김훈은 이것을 가감 없이 보여주게 되길 바랬을지도 모른다. 치욕을 기억하라고 하면서까지 하면서 말이다.

제법 비장해 보이긴 하지만, 역시 그것은 우리가 원하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마초는, 우리에겐 정복당해 온 역사만 있지, 어느 때고 정복한 역사는 없거나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반작용은 아닐까? 그래서 더더욱 마초적이 되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늘 이것을 의도적으로 반(反)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냐? 이 책 어디에선가 작가가 그렇게 표현한 것처럼, 그는 어느 쪽도 아니며 그저 글을 쓸 뿐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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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훈이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05 02:26 
    남한산성 - 김훈 지음/학고재 2007년 10월 31일 읽은 책이다. 올해 내가 읽을 책목록으로 11월에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빨리 읽게 되어 11월이 아닌 10월에 다 보게 되었다. 총평 김훈이라는 작가의 기존 저서에서 흐르는 공통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우 냉정한 어조로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다. 소설이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읽었음에도 주전파..
 
 
mira95 2007-06-24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오랜만이죠? 리뷰 좋네요. 저도 김훈 좋아하는데..<칼의 노래>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남한산성>도 봐야죠.. 추천 누르고 갈게요^^

stella.K 2007-06-24 20:49   좋아요 0 | URL
아, 미라님! 반가워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이렇게 반가울 수가...!^^

마노아 2007-06-24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한산성보다 김훈의 문학을 논하셨군요. 마지막의 마초에 관한 이야기는 신선합니다. 그런 속내가 있을 수 있단 생각이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stella.K 2007-06-24 20:50   좋아요 0 | URL
김훈에 중독됐다고나 할까?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다락방 2007-06-24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굉장한 글이예요. 추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글입니다. 위에서 언급하셨던 [언니의 폐경]은 『강산무진』에서 제가 가장 좋아했던 단편입니다.

stella.K 2007-06-25 09:3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고맙습니다. <언니의 폐경>은 확실히 작가의 작품중 단연 독보적인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07-06-24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칸이 오줌을 휘갈기는 장면이요! 마초적이랄까.

stella.K 2007-06-25 09:32   좋아요 0 | URL
그렇긴 하죠. 하지만 칸의 비중은 그다지 커 보이지는 않았죠.^^

드팀전 2007-06-25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초 이야기는 일단 김훈의 소설도 소설이지만 그보다 그가 가끔씩 하는 인터뷰나 기타 잡글들에서 보인 가부장적인 자신감과 반여성적인 멘트들에서 파장된게 아닐까요?

stella.K 2007-06-25 09:33   좋아요 0 | URL
아, 그런 게 있었군요. 왜 나는 잘 몰랐을까요...
 
요셉과 그 형제들 4 - 이집트에서의 요셉 (하)
토마스 만 지음, 장지연 옮김 / 살림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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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언제 나왔는가를 돌아보니 2001년 11월에 나온 걸로 되있다. 그 무렵 신문의 북섹션에 어느 기자의 리뷰를 굳이 읽지 않더라도 나는 이 책을 꼭 완독하리라 다짐 했었다. 

이 책은 알겠지만, 창세기 40장부터 나오는 야곱의 아들 요셉에 관한 이야기다. 내용은 간단하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그로인한 이복형들의 시셈으로 인해 함정에 빠지고, 그후 이집트의 노예상인에게 팔려가 갖은 고생 끝에 이집트 총리대신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하지만 실상 성경 본문은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9장 정도로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고, 그나마 어린아이에게 구연동화를 읽어주듯 너무나 교훈적이고 정형화 된 듯하여 어른들에겐 그닥 와닿지 않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운이 좋았을까? 이것을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로부터 들었다. 그때 그 선생님이 얼마나 재밌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던지 말 그대로 빨려들어가듯 했고, 침을 흘려도 침이 흐르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한마디로 감전 됐다고나 할까? 나는 그만 이 이야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내가 사춘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고, 성경을 펼쳤을 때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마주하고 얼마나 그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던지, 지금은 그 나이의 몇 곱절을 살지만 나는 여전히 그 이야기에서 조금도 자유하지 못한 채 세월을 살면 살수록 이 이야기에 빚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가 성인이 되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생각해 보라. 자신을 사로잡는 이야기가 있는지? 나이가 들어서도 잊지 않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 있는지. 그러기에 나는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을 꼭 완독하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 이야기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나의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생각만큼 그렇게 쉽게 읽혀지는 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원래 귀한 것, 신비스러운 것은 쉽게 문을 여는 법이 없으니까. 그러니 토마스 만도 이 이야기에 20년을 바친 것이 아니겠는가? 그만큼 이야기의 구조는 간단한 것 같아도 그 신비로움은 가히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솔직히 난 1권부터 3권까지 어떻게 읽었는지  기억에 없다. 앞서 밝혔지만, 너무 지루해 이 책을 발견했던 처음의 다짐과는 달리 그 다음 권은 언제 읽을지 기약에도 없었다. 독후감도 써놓지 못했다. 그리고 최근 드디어 4권을 읽었을 때 내가 비로소 깨달은 건, 3권까지는 4권과 그 이후의 것(6권까지)을 말하기 위한 전초전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성경대로라면 3권까지는 야곱이 요셉을 어떻게 생각했고, 요셉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으며, 이복형들은 요셉을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끊이지 않고 펼쳐진다. 그리고 4권의 내용은 이렇다. 이집트 노예상인에 의해 팔려간 요셉이 포티파르(성경은 보디발이라고 했다)라고 하는 이집트의 최고 권력가의 시종이 된다. 그러나 요셉은 포티파르의 아내의 끊임없는 유혹을 받고 있었다. 결국 포티파르의 아내는 그를 유혹하는데 실패하자 오히려 요셉이 자신을 덮칠려고 했다고 누명을 씌워 주인으로 하여금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것 또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 만은 이 이야기를 상당히 매혹적인 이야기로 풀어간다. 이후에도 요셉의 이야기는 더 전개가 되겠지만 아마도 요셉과 무트의 이야기는 전체를 통털어 가장 매혹적이고 백미라고 꼽을만 하지 않을까? 그것은 확실히 토마스 만의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물론 4권에서도 예의 그 끊임없이 펼쳐지는 만연체의 문장은 여전하여 읽는이로 하여금 지루함을 금치 못하게 만들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만연체의 문장속에서 발견하는 보석 같은 문장 또한 매우 훌륭할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하나 하나가 무척 매력적이다. 특히 가슴에 사무치도록 요셉을 향한 그리움과 정욕에 사로잡힌 여인의 마음은 절절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성경에 잠시 언급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같이 잠자기를 종용했다는 이 짧은 문장이 그녀를 대변해 주기엔 한참 역부족이다. 또한 그 뜻을 결국 이루지 못하자 증오의 마음으로 변해 요셉을 스스로 배신하는 여인의 마음이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조금도 비껴가지 않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4권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요셉이 여인의 유혹에 조금도 동요함이 없었다는 것에서 단순히 교훈만을 찾으려 하면 안될 것이다. 요즘 같이 성적으로 자유로운 시대에 어쩌면 요셉은 비웃음을 살 인물일지도 모른다. 요셉이 살았던 그 시대에도 성은 언제나 자유로왔다. 성을 숭배하는 신이 있었고, 그 시대의 창녀는 신을 받드는 신녀로서 추앙을 받았까. 그러니 고자가 아닌 다음에야 이 유혹을 피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왜 그런 속에서 요셉이 그토록 육체적 순결을 지키고자 했는지 토마스 만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요셉을 대변해 준다. 또한 토마스 만은 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을 때마다 그의 육체와 정신이 어떠했을런지 그 파장과 떨림을 놓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요셉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 무트가 요셉을 어느 정도나 생각했는지 생생하게 가늠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는내내 서사시가 뭔지를 새삼 깨달았으며, 마치 대작 오페라를 보는 듯한 상상에 사로잡혔ㅅ다. 더불어 왜 이런 훌륭한 이야기가 오페라나 뮤지컬 또는 연극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토마스 만이 기독교인이었는지 아닌지는 나로선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위해 읽기도 하겠지만,  그 이야기 자체는 신화로서 읽기에도 손색이 없다. 작가라면 이야기의 전범이 될만한 신화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보고 싶어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토마스 만은 작가로서 충분히 충실했다고 본다.  내가 이 이야기에 두근거리는 떨림이 있고, 빚을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를 다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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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4-09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즈가 기네요. 표지가 인상적이에요. 그치만 너무 길어서 읽을 엄두가..;;;

stella.K 2007-04-09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어제 리뷰 고치고 있는데 알라딘 에러가 나서 고치지도 못하고 왕짜증이었슴다. 그세 와서 보셨군요.
이 책 좀 길긴하죠. 저도 왠만해선 긴 책 안 보는데 꼭 완독해야 할 이유가 생겼답니다.^^
 
초콜릿
조안 해리스 지음, 김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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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초콜릿'이란 단어를 입력하고 클릭을 해 봤더니 이 이름을 달고 있는 책이 수십 권이 뜬다. 좀 놀랐다. 원래 초콜릿이 사람의 입맛을 달콤 쌉싸름하게 유혹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로라는 작가들이 이것을 소재로 그렇게도 많이 책을 내놓은 줄은 미처 몰랐다. 책도 유행을 타긴 하는 것 같다. 이렇게 '초콜릿'이 한때의 트렌드였다면, 얼마 전엔 '개'를 소재로한 이야기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올해는 '고양이'가 트렌드다.

 

이 책은 저자의 음식 3부작 중 하나라고 한다. 블루베리, 오렌지, 초콜릿을 소재로 했다. 몇년 전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동명 영화를 인상 깊게 본적이 있어, 한번쯤 소설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봤을 때나 책으로 읽었을 때나 내가 갖는 의문은 정말 '초콜릿'이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는가이다. 초콜릿을 싫어하진 않지만 일부러 즐겨하진 않는다.  요즘엔 초콜릿의 고급화와 대중화를 선언했는지 젊은 두 남녀의 욕망의 줄다리기를 컨셉으로한 한 CF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저 초콜릿이 사람을 강하게 끌 수 있는지 의문이 간다. 하지만 막상 편의점엘 가서 이 초콜릿의 가격을 보고 있노라면 그때까지의 먹고자 하는 욕망은 사라지고 과연 이 가격에 이 초콜릿을 사? 말아? 갈등하고 있는 나를 보면 나는 '상대적인 금욕주의자'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찌보면 먹는 것에 대한 유혹이 성에 대한 유혹을 앞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담과 이브의 최초의 유혹을 보라. 그깟 사과 알만한 선악과를 따 먹겠는가? 말겠는가를 고민하다 어처구니 없이 한입 베어 먹은 걸 가지고 벌거벗은 수치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어야 하지 않는가? 그 역사 이후 우리 인간을 얼마나 많이 먹는 것을 가지고 아귀다툼을 하며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는 것을 가지고 고민을 해야 했더란 말인가? 게다가 정력에 좋다면 뭐든지 먹고 보자는 우리나라 사람들 보면 기가 차고, 걸상만 빼고 뭐든지 다 만들어 먹는다는 중국 사람들 보면 신기해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그런데 그깟 '초콜릿'이 뭐 그리 대수라고 이처럼 은밀하고도 서정적이게 이야기를 써 놨더란 말인가?  

 

영화에서는 비주얼이 상당히 좋다. 정말 줄리엣 비노쉬가 만드는 초콜릿을 보면 침이 꼴깍 넘어간다. 그것도 그거지만 찬 바람을 뚫고 두 모녀가 어딘가를 가고 있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다. 그때 둘이 입었던 빨간색 망또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초콜릿은 잃어버렸던 부부의 사랑을 이어주고, 인간관계의 화해를 가져오며,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남편으로부터 자기 선언을 하게 만드는데 묘한 마력(?)을 뿜어낸다. 특히 종교적인 위선과 권위에 도전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나는 저자가 종교를 초콜릿이란 도구를 통해 허위와 권위를 수면위로 끌어올리려 했다는 것이 일견 아쉽게도 느껴졌다. 물론 종교에 그런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난 왠지 작가가 의도적으로 까발리려고 했던 것 같다 나름 그것을 변호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해 못할 것도 아닌지라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게다가 어찌보면 작가는 신앙을 흠잡으려 했다기 보다 인간의 자유가 종교적인 위선과 권위에 짓밟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아마도 그것을 말하려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저자의 문체가 서정적여서 좋다. 하지만 흠이 있다면 요즘같이 흡인력있고 재밌게 읽혀지게 되기를 기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한권의 책을 읽는데 며칠이 걸렸던가? 감히 입에 떠올리지도 못하겠다. 초콜릿 본연의 유혹보다 이 책을 이쯤해서 덮을까 하는 유혹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래도 무사히 완독했다. 다행히다. 읽는 내내 진한 코코아의 유혹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다 읽고 나서는 그런 유혹은 다시 없어지긴 했지만. 그 보단 매일 인스탄트 커피 두 스푼에 설탕 한 스푼, 우유 섞은  커피 한잔의 유혹이 더 크니까 그것으로 코코아의 유혹을 대신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열린 책에서 찍어내는 이 페이퍼백 소설에 적지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고래적부터 책의 모양새가 그래왔겠지만, 개개인의 인체공학에 맞춘 책이 앞으로 등장 하겠는가? 기대도 안한다. 하지만 너무 가볍게 만든 탓에 편하게 책상에 놓고 가볍게 한장씩 넘길 수  없었고, 꼭 손으로 들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불편함을 감내해야 했다. 만일 어떤 사정이 있어 한 손으로만 생활해야 하는(그것이 한시적이든, 영구적이든 간에) 사람에겐 엄청 불편한 것이다. 어쩌다 책을 읽다 머리나 콧등이라도 긁을라치면 읽은 페이지를 잃어버리지 않게 책을 엎어 놓고 긁어야 한다. 그 불편함을 아는가? 게다가 글씨와 행간은 왜 이리도 작고 촘촘한 것인지? 이것을 문학은 좋아하나 눈 나쁜 선배나 어르신한테는 결코 선물해서는 안될 책 1순위가 되어 버렸다. 나 역시도 시력이 예전만 같지 않이 이렇게 만들어진 책은 기차게 좋은 내용이 아니면 손도 대지 않을 확률이 아주 높다. 아무리 뚝배기 보다 장맛이라고는 하지만, 기왕이면 책 내용도 좋고, 튼실하게도 만들면 좋지 않은가? 싸게도 팔면 금상첨화겠지만 싸게 파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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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3-19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만 봤었는데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하네요. 책으로 다시보면 기억이 나려나요? 님의 리뷰를 보니까 그래도 책이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ㅎㅎ

stella.K 2007-03-20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느낌이 다르더구요. 좀 더 섬세하다고할까? 책으로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겁니다.^^

rancet 2007-06-09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책의 '페이퍼백' 시리즈에 대해서 저는 찬성입니다. 어서 다른 출판사에서도 좀 따라해줬음할 정도이니까요. 어제께 교보문고에 가서 문학 섹션에 갔었는데, 이제는 책의 표지가 만화책의 표지와 같아 졌더라구요.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책은 사용성을 파는게 아니라 영혼을 파는 상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담는 그릇이 넘치는 것이 좀 마뜩지않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 말이에요. '초콜릿'은 그래도 아주 두꺼운 편은 아니지만, 같은 시리즈의 '새의 노래'는 600쪽이나 됩니다. 만약 이 페이퍼백 시리즈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드커버나 정본을 사시면 되겠지요. 출판사는 오히려 독자에게 선택의 기회를 넓혀주고 이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의 거의 모든 책들은 하드커버와 페이퍼백이 같이 나옵니다. 물론 시간상의 선후는 있지만, 책의 내용을 보는 입장에서라면, 또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도, 열린책들 출판사의 '페이퍼백'은 좋은 기회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꾸벅~


stella.K 2007-06-10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ancet님,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페이퍼백과 하드카바, 같이 나와야 하는 것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 몰라서일까요? 열린책들의 어떤 책들은 하드카바가 안 나오는 것 같던데...그래서 불만인 거죠. 맞아요. 책은 영혼을 파는 거에 동감합니다. 하지만 그런 책들이 갈수록 찾아 보기가 어려운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은 것 같아요. 흐흑~